|
12
"목사님, 이것 좀 보세요. 얘가 이런 짓을 하고 다니네요, 쯧쯧···"
교감이 한우리신문을 펼쳐들고 상우를 불렀다.
"예? 누구요? 누가 무슨 짓을···?"
상우는 복희가 무언가 심상찮은 일을 저질렀다는 걸 직감했다. 헌데,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신문에까지 나왔단 말인가? 신문에는 깡마른 작은 소녀가 피켓을 들고 서있는 사진이 실려있었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학교는 예외다???'
어디서 알아냈는지 복희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헌법 제20조 1항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현장으로 달려간 상우가 겨우 달래고 달래 식당으로 데려갔지만 복희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단식 중이라고 했다.
"용건만 간단히 얘기하세요. 약속을 지킬 건가요?"
"너 정말 이럴래? 니 주장 이해한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그런데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자, 어서 먹어!"
상우가 숟갈을 집어 복희 손에 쥐어주었다.
"그 더러운 손 치워!"
복희가 사정없이 숟갈을 내동이치며 한 말이었다.
"너, 위선 떨지 말어!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아니? 겉으론 날 위하는 척 하면서 속으론 제 살 궁리나 하는 주제에 성자인 척 하지 말란 말이야, 구역질나니까!"
복희가 벌떡 일어서며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허리에 왼손을 얹은 채 오른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상우에게 하대를 하는 복희는 더 이상 학교 안의 제자 아이가 아니었다.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얼굴로 상우를 쏘아보던 복희가 홱 돌아 식당을 나갔다.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단식시위 중이던 복희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상우가 접한 건 단식 7일째로 접어든 날 저녁뉴스시간이었다. 어디서 캐냈는지 언론은 학교에서 일어난 예배거부 사건 뿐 아니라 복희의 복잡한 집안문제까지 낱낱이 들추어내고 있었다.
학교장은 복희가 늘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아이이며, 학교가 50년 동안 지켜온 커리큘럼을 이유로 소란을 피운 건 퇴학에 해당하지만 학생 선도 차원에서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복희의 시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청소년 인권을 거론하던 언론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가 종교문제를 핑계로 소란을 피우는 것이라는 쪽으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우리신문 기자가 상우를 찾은 건 복희가 쓰러진 다음 날이었다. 사건의 진실을 말해줄 사람으로 복희가 자신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상우는 망설였다. 사실을 모두 말할 경우 복희의 시위와 호소는 탄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자신은 파멸을 각오해야 했다.
"목사님, 부탁입니다.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청소년 인권문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사에 이정표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기자가 간곡한 어조로 부탁을 해왔다. 상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자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잠시 후 상우는 그 동안 복희와 자신이 학교에서 겪었던 일과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담담히 모두 털어놓았다.
진상우의 인터뷰 내용은 다음날 아침 한우리신문에 고스란히 실렸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외롭지만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되는 일 없단다. 돌아온단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퇴계로 2가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2층에 자리잡은 낡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였다. 대화가 불편할 정도로 볼륨을 높인 음악소리에 진상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출세했더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드디어 진상우 인생에 쨍 하고 해가 뜨는 건가? 크큭···!"
웃음을 참지 못한 하림은 마시던 커피가 입가로 흘러내리자 급히 닦아냈다.
"짜식··· 참 주책이네! 난 쫓겨나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와, 임마?"
상우가 눈을 위아래로 훑으며 빈주먹을 허공에 날렸다. 둘의 대화는 고등학교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표정도 말투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상우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니 속에 묻어두었던 걸 다 토해 내니 속이 후련하냐? 그래, 잘 했다. 묻어두면 병이 되지.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냐?"
하림은 상우의 대답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얼굴을 상우 앞으로 바짝 들이대며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끝까지 갈까봐 겁난다. 상우야, 싸우지 마라.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하림아, 돌아가기엔 내가 너무 멀리 왔어. 피해갈 길도 없어보인다. 그냥 갈 수밖에 없어. 내 마음이 이끄는 데까지 가 볼 생각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려던 상우가 하림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작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림아, 나, 내려놓을란다. 목사라는 짐, 이젠 정말 내려놓을 거야!"
"너,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거야? 목사라는 걸 그렇게 쉽게 버렸다 챙겼다 해도 되는 거냐고?"
눈을 잔뜩 흘기며 하림이 상우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잘 알잖아, 난 처음부터 아니었어. 지금까지 억지로 버텨왔지. 이젠 정말 자유로워지고 싶어!"
"그럼, 학교를 떠날 생각이냐?"
"그래야 되지 않겠니? 학교까지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교목으로 왔는데 목사 그만두고 교사로만 남겠다고 하면 학교에서 이해해주겠어?"
"그럼 제수씨는? 정순씬 어떻게 할 거냐고? 그리고 애들은 뭘로 먹여 살릴 건데?"
하림의 말에 따라 상우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내와 자식 얘기만 나오면 앞이 캄캄해지는 상우였다.
"뭐든 열심히 하면 먹고사는 거야 어떻게 안되겠냐? 흐흐흐···"
"막연한 소리 하지 마, 임마!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는 놈이 똥고집만 있어가지고!"
"정 안되면 니네 집으로 들어갈 테니까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게 해 주라 하림아, 흐흐흐!"
"짜아식, 참 못말리는 놈이네!"
'띠리리리 링링링···'
익숙한 수신음에 상우는 반사적으로 휴대전화 폴더를 열었다. 학교 행정실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네, 진상우입니다."
"목사님, 지금 교장실로 좀 오시랍니다."
행정실장의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네, 알았어요. 잠깐 나와있는데, 10분 내로 갈 께요."
"어서 가봐라, 상우야! 제발, 제발 좀 차분하게 생각하고!"
하림이 상우보다 먼저 일어서며 한 말이었다.
"그래, 알았어! 너무 걱정하지 마!"
상우가 빙그레 웃으며 하림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하림의 손이 상우의 어깨 위로 두텁게 덮여왔다.
교장실로 들어서던 상우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교장과 환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진목사님. 이리 앉으시지요."
교장은 웃으며 말했지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진목사님이십니까?"
상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비대한 몸집의 사내가 물었다. 기름기가 잔뜩 낀 넙적한 얼굴이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인사하시지요. 교단에서 나오신 목사님들이십니다."
"네? 교단에서요?"
상우는 이들이 찾아온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부닥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빨리 다가왔기에 당황스러웠다.
"네, 우리 학교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님들이십니다."
교장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내들이 급히 말을 이었다.
"노회장입니다."
"총회 교육부 총무올시다."
"노회 서기입니다."
"총회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네, 진상우입니다."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이라···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상우는 목사들을 무시하고 교장에게 물었다.
"교장선생님, 절 부르신 이유가···"
"목사님, 이분들은 교단 어른들이십니다. 예의를 갖추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교단 어른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교단의 막중한 일을 맡으신 어른들께서 저같이 하찮은 일개 교목을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요?"
상우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한 말이었다.
"목사님이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시니 보기 좋습니다. 얘기를 나누기가 수월할 것 같네요."
총회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목사가 함박웃음을 얼굴 가득 문 채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녹음기였다. SONY라는 상표명이 하얗게 찍힌 소형녹음기의 붉은 버튼에 불이 들어오고 테이프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위원장이 녹음기를 책상 한가운데 조심스럽게 놓았다.
"바로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목사님의 이단성 여부를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저희가 묻는 말에 예와 아니오로 간단히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우리신문에 난 목사님의 인터뷰기사를 봤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목사님이 종교다원주의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목사님, 종교다원주의자이십니까?"
종교재판이 따로 없군! 상우는 속말을 삼키며 피식 웃었다.
"예와 아니오로 간단히요?"
"네, 그렇습니다. 진지하게 둘 중 하나로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둘 다··· 해당이 안되면 어떻게 하나요? 둘 다 해당되든가···"
"그런 말이 어딨어요?"
노회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진지하게 답하라면서요? 그러면서도 예와 아니오, 둘 중 하나로만 답을 하라니까 하는 말입니다! 예와 아니오 둘 중 하나에 진지함이 담길 수 있나요? 이 세상에는 검은색과 흰색만 있는 게 아닙니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두 있구요. 주황색, 연노란색, 푸르스름한 색, 아 참, 회색도 있지. 검은 색이 흰색인 척 하다가 들키면 나타나는 회색 말구 원래의 순수한 회색말입니다. 또 무슨 색이 있더라! 맞아, 갑자기 깡패한테 얻어터지면 나타나는 푸르덩덩 멍든 색도 있구요!"
"이보세요, 진목사님!"
위원장 목사가 소리를 질렀다.
"아, 이거, 참! 목사님들, 잠깐만! 저에게 말씀을 드릴 기회를 좀 주십시오!"
얼굴이 벌겋게 단 교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홰홰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진목사님, 목사님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평소에는 이러지 않는 분이···"
"죄송합니다, 교장선생님! 이 자리, 참 황망한 자리군요. 녹음기를 틀어놓고는 흑백 둘 중 하나로만 답을 하라니 이게 무슨 O X 문제입니까? 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분들보다 훨씬 더 복음적이고 성서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원주의자인 건 맞지만 다원주의자는 곧 이단이라는 저분들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분들이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반한 이단자들이거든요!"
상우가 속사포처럼 쏟아놓은 말이었다.
"목사님은 피해망상증이 있는 것 같군요. 마음 속에 분노도 품고 있구요."
총회 교육부 총무라는 목사가 한 말이었다.
"잘 보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현실기독교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놈입니다! 이 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배반한 괴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교단에서 나온 목사들도 따라 일어섰다. 교장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상우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슨 병인가? 도대체 왜 이 문제만 나오면 내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는 것인가? 정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사회의 결의사항을 상우가 통고받은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교목 직위는 해제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설교를 하실 수 없습니다. 부장 대우도 받지 않게 됩니다. 원하시면 학교에 남아 평교사로서 종교과목 수업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하시더라도 학교의 이념에 맞는 방향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은 학교에 오실 때 학교의 이념을 존중하겠다고 서약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다원주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목사님과 오래 같이 일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교장이 말끝을 흐렸다. 연민의 정을 내보이는 교장의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지만 다원주의적인 가르침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의미는 정확히 전달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입을 다물 수는 없습니다. 월급만 받아먹고 사는 허수아비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교목 직위는 학교에서 거두어갔지만 교사직은 제가 사직하겠습니다."
상우는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썼다. 오히려 잘되었다는 홀가분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순을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에 가서 뭐라고 설명을 하지?
13
"퇴직금엔 한 푼도 손대지 마! 얼마 안되는 퇴직금 날리면 알거지 되기 십상이니까. 목사 일 다시 하기 싫으면 노가다를 하든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든 밑바닥에서 돈 버는 방법부터 배워!"
정순은 이미 각오했다는 듯 사직서를 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고마워, 여보! 내 뭘 해서든 당신하고 애들 안 굶겨. 나 열심히 살 거야!"
상우는 오만 생각에 휩싸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순이 내쉬는 한숨 소리가 간간히 이어지고 있었다. 창문을 비집고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이 새벽 2시를 넘어가는 벽시계 바늘을 겨우 비쳐주고 있었다.
'이제 뭘 하지? 택시 운전을 해봐? 노점은 어떨까? 잘만 하면 월급쟁이보다 낫다던데···'
'그래, 교회도 학교도 모두 떠나기로 했다고?'
'네, 주님! 학교까지 떠나는 건 좀 아쉽지만 교회와는 벌써 결별하고 싶었는데··· 좀 늦었네요, 헤헤헤···'
'벌써 결별하고 싶었다? 그래, 교회를 아주 떠나려는 이유가 뭐냐?'
'교회가 주님을 배반했으니까요. 주님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는커녕 주님을 팔아 교회 조직을 위한 장사에 매진한다는 것을···!'
'그러면 왜 진작 떠나지 못했느냐? 이제야 그걸 깨달은 것이냐?'
'아니요, 주님! 벌써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는데 왜 떠나지 못한 거냐?'
'그건··· 주님, 그건···'
'가족들을 위해 참아왔겠지. 너 때문에 가족들 고생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
'그러면 너와 그들이 다른 것이 무엇이냐?'
'네?'
'너는 네 가족의 안녕을 위해 참아왔던 것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다른 사람은 교회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냐?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다오!'
'······'
'내가 설명을 해 주랴? 교회에 나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적어도 진정성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목사질을 계속해 왔다. 물론 정직하게 말하지도 못했지,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 이유는 무엇이냐? 내가 보기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한 가지 사실 외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너와 그들 사이에 누가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주님···'
'그래,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게 아니겠느냐? 허허허··· 그래, 아무래도 넌 목사 자격이 없는 것 같구나, 그만 두거라!'
'네? 주님, 정말이십니까? 이얏호··· 신난다! 이제야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두 팔을 벌리고 교회를 뛰쳐나간 상우는 수영선수가 풀로 뛰어들듯 몸을 내던졌다. 푸른 잔디밭이 상우를 안아주었다.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으며 큰 대자로 누운 상우를 향해 하늘 저편에서 양떼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상우는 행복감에 젖어 기지개를 펴며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
'진상우 목사···!'
'누구?'
'나다. 네 친구!'
'네? 예수님? 아니, 예수님이 왜 또··· 에이, 또 잔소리하려고 오셨구나. 이젠 절 놓아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전 이제 목사가 아닙니다! 설마 딴 소리 하시려고 또 오신 건 아니겠지요? 헤헤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얘기로구나. 그래 좋다, 터놓고 얘기해 보자! 넌 아주 이기적이야. 네 가족까지 버릴 정도로···!'
'네? 아니, 그렇게 심한 말씀을··· 전 가족까지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제 그릇의 분량이··· 저 자신과 가족만 챙기면서 살기에도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고, 그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하기에···'
'아니, 그렇지 않다. 넌 자신을 위해 가족까지 버리려 하고 있다. 네 행복과 소망을 찾겠다고 가족의 행복과 소망을 내팽개치고 있어! 너 때문에 지금 네 아내와 아이들이 울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가족을 위해 지금껏 참아왔다고 한 말도 다 거짓인 게야!'
'······'
'왜 말이 없느냐? 인정하는 것이냐?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주님, 잠깐만요!'
진땀을 흘리며 허공을 저어대던 상우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희미한 달빛이 여전히 좁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돌아누워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정순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미안해, 정순아···'
상우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터져 올라오고 있었다. 고개를 꺾고 속울음을 토해냈다. 정순이 깰까 봐 상우는 가슴을 누르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14
꽃을 밟지 않고는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남산은 떨어진 벚꽃 잎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희고 화려한 꽃잎으로 남산을 휘감았던 벚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부끄러운 알몸을 그대로 드러냈다. 복희는 남산분수대 앞으로 옮겨 시위를 하고 있었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학교는 예외다???'
여전히 헌법 제20조 1항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복희를 위해 상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밥이나 먹고 하라는 상우의 끈질긴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잘렸다고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내가 선생님에게 고마워할 것 같애요? 선생님은 좀 다르다고 생각할 줄 알았나요? 웃기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난 어른을 믿지 않아요, 게다가 남자들은요! 그러니 제발 귀찮게 좀 하지 말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토 나오려고 하니까···"
남산으로 옮겨와 시위를 벌인 지 나흘째 되던 날, 점심때마다 찾아온 상우에게 복희가 거침없이 쏘아댄 말이었다.
'저 녀석, 저러다 쓰러지고 말텐데···'
그 날 이후로 상우는 복희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당차게 외면하지도 못한 채 멀리 숨어 지켜보기만 했다.
"얘가 걘가 본데, 히히히···"
"그래두 쌍판은 괜찮은데, 헤헤헤···"
"그러네! 인상이 고약해서 그렇지 잘 꾸며놓으면 괜찮겠어. 후헤헤···"
담배를 물고 있는 사내아이들이 복희를 둘러싸며 한 말이었다. 복희의 비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복희가 들고 있던 피켓을 옆에 있는 나무에 사정없이 휘둘렀다. 게시판이 떨어져나가자 나무봉을 꼬나쥔 복희가 사내아이 하나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아악···"
사내아이가 머리를 감싸며 옆으로 쓰러졌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또 한 사내아이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는 복희의 모습이 보였다. 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이 있는 쪽을 향해 뛰쳐나갔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세 아이들이 복희를 사정없이 짓밟고 있었다.
"그래, 죽여라, 죽여, 이 개새끼들아! 살고 싶지 않은데 잘 됐다···"
쓰러진 복희가 온 몸을 활개치며 발악을 했다.
"무슨 짓들이야? 그만 두지 못해!"
상우가 다가서자 한 아이가 홱 돌아서며 눈을 부라렸다.
"넌 뭐야, 이 새꺄!"
갑자기 날아온 주먹에 상우가 벌러덩 나뒹굴었다. 연이어 발길질이 날아들고 얼굴을 짓밟힌 상우의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복희야··· 상우는 복희의 목소리에 울음이 담겨있다고 느꼈다. 저 아이도 울 수 있구나···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상우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끄응 신음을 흘렸다.
"흥, 이제 정신이 드시는가 보군, 바보 선생님!"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복희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러게 나서긴 왜 나서요, 바보같이!"
눈을 흘기는 복희의 얼굴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여유와 호감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
"보면 몰라요? 병원 되시겠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가벼운 외상만 입었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 있으셨습니다."
복희는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 웃으며 농섞인 말을 쏟아냈다.
"넌? 넌 괜찮으냐?"
"전 이런 일에는 프로니까요. 히히히···"
복희가 해맑게 웃었다. 그래, 이런 모습 보기 좋구나, 또래들 모습이야! 상우는 마음이 환해지는 걸 느끼며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차암, 선생님두··· 그렇게 세상을 몰라요?"
"무슨 말이냐?"
"학교도 대책 없이 쫓겨나.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데 무작정 뛰어들어. 흠, 이제 선생님이 위선자는 아니란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이건 영락없이 바보잖아요. 세상 물정 모르는···"
"인생 다 산 놈 같구나."
상우는 기가 막혀 허허 웃었다.
"선생님, 그렇게 살지 말아요. 식구들이 있잖아요. 자기 똥고집만 세우면 마누라하고 자식들이 고생해요. 선생님은 배운 게 있으니까 어디 월급 많이 주는데 들어가서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일하고 사세요. 그게 선생님도 좋고 세상도 원하는 거예요."
인생 십여 년 산 녀석이 자신을 훈계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복희가 자신을 진정으로 걱정해주고 있다는 건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야 저 녀석이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놓은 것인가···
"넌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시위는 때려칠래요."
"왜, 학교가 네 요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절대 그만 두지 않겠다더니···"
"선생님 때문에 귀찮아서 안되겠어요."
"뭐, 뭐?"
"그렇잖아요? 어린애처럼 보채면서 따라다니다가 언제 누구한테 맞아죽을지 모르는데 불안해서 더 못하겠다구요."
"허, 참···"
할 말을 잃은 상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제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이래봬도 제가 선생님보단 세상을 좀 알아요. 제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이제 제 걱정은 마시고 선생님 앞가림이나 잘 챙기시라구요, 아셨어요, 바보 선생님?"
복희가 살며시 상우의 손을 잡았다. 상우는 그제야 자신의 손에 붕대가 감겨있다는 걸 알았다. 복희의 눈에 눈물이 살짝 비치고 있었다.
"야, 상우야!"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선 사람은 하림이었다.
"하림아!"
"전 갈께요!"
복희가 급히 일어서더니 하림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친군가보군요. 우리 철부지 선생님 좀 잘 부탁해요."
뒤돌아 손을 흔드는 복희가 눈을 찡긋하고는 사라졌다.
"저 아이냐? 정말 당돌한 아이네."
"그래,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지. 이 묘한 세상이 만든 묘한 아이···"
15
경동고등학교에서 한성대학으로 이어지는 길 왼편에 자리잡은 삼선동 산동네는 수십 년 동안 판자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고개 너머 창신동에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상우는 주소를 적은 쪽지를 들고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길을 연신 들락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상우가 퇴원하고 석 달 동안 친구와 선배를 찾아다니며 교회에 낸 이력서가 벌써 여덟 통이었다. 목회를 그만두겠다는 상우에게 정순은 이혼과 목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순의 기세에 두 손을 든 상우는 아홉 번째 이력서를 들고 삼선중앙교회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에서 의욕도 없었지만 상우를 받아주려는 교회 역시 하나도 없었다. 신학대학원 선배가 목회를 하고 있는 이곳에서도 딱지를 맞는다면 더 이상은 이력서를 내지 않아도 좋다는 정순의 허락을 받고서야 상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진목사, 목회를 계속 하고 싶으면 끝까지 감추었어야지! 그걸 다 까발려놓고 나보고 받아달라면 내가 어떻게 하나? 자네는 물론이고 나도 교단에서 퇴출될 게 뻔한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사람 난처하게 만드나···"
"선배님은 스스로 이 가난한 동네를 찾아오신 걸로 아는데요. 헐벗고 굶주린 이웃과 고통을 나누겠다던 선배님을 존경했고, 배우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저는 다시는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배님이라면 동역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는데··· 제가 실력이 부족하거나 성향이 맞지 않아서라면 이해하겠습니다만 교단 눈치로 이러신다면 정말 실망이네요."
"이보게, 진목사, 이건 좀 다른 문제야! 난 자네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네. 난 예수님을 혁명가 정도로 보는 자네와는 다르단 말일세.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 까지는 좋네. 나도 불교와 도교같은 고등종교는 존경하니까. 부처님도 공자님도 성현으로 존경하고 있지. 하지만 인류의 죄를 대속할 유일한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의 위상을 부정할 수는 없네. 예수님을 그저 다른 종교의 창시자처럼 인류의 성현정도로 보는 자네들의 시각이라면 기독교는 뿌리부터 무너질 수 있네. 난 그런 다원주의 신학에는 동의하지 않아!"
"의외네요, 선배님! 선배님은 학창 시절 누구보다도 다원주의 신학에 몰입하셨던 분이었는데··· 졸업논문이 '유일신종교와 동양종교의 궁극실재에 대한 비교연구' 아니었던가요? 그 때 다원주의 신학에 끌린다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졸업하기 위해서 잠시 보류하지만 다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독교의 미래는 없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선배님! 그 동안 신념이 바뀌어 정직하게 다원주의 신학을 부정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기독교의 위기를 받아들일 수 없어 다원주의를 배격하기로 하신 건가요?"
얼굴이 벌겋게 단 상우가 선배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미 부목사로 취업하는 문제는 물건너 간 셈이었다.
"이보게, 진목사, 너무 이러지 말아! 자넨 목회 현장을 너무 몰라. 아니 사람 사는 세상을 모른다고 해야 할까? 너무 강하기만 하면 부러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르나? 사람이 좀 유연해야 하네. 자네 뜻을 펼치려면 감출 줄도 알고 물러설 줄도 아는 게 좋은 거야, 이 사람아!"
"네, 어쩌면 이게 한국교회 진보들의 현주소인지도 모르지요. 사회를 향해서는 진보인데, 교리문제로 들어가면 여전히 골통보수지요. 정치적인 부패와 경제적인 착취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이기에 교회 이름을 들고 투쟁하지만, 교리문제를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네요. 그 절대 교리 때문에 기독교는 여전히 독선과 배타에 잠겨 있고, 그 독선적 교리에 세뇌당한 한국 교회 교인들의 충성으로 교회는 여전히 비대한 몸집을 유지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참 웃기는 일이지요. 너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내 죄는 묻지 마라, 이겁니까? 하하하···"
"이봐, 진목사, 이건 기독교 사상문제야! 자네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독선이고 배타야. 이천년 동안 내려온 기독교 교리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말게!"
"네, 알았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거라면 당연히 서로 존중해야겠지요. 그런데 제 생각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어쨌든 선배님 생각이 선배님의 솔직한 신념이라면 그것 역시 존중해야겠지요.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정말 선배님이 저와 생각이 다른 건지 보신을 위한 처세술인지 그게 궁금하다는 겁니다. 선배님 뿐 아니라 신학교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목회자들의 자세와 주장, 그게 그들의 진정성인지 살아가기 위한 처세인지 정말 그게 궁금해요."
상우가 선배목사와 합치될 수 없는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정순은 비릿한 생선내가 진동하는 시장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골목길 좌우로 생선가게가 길게 이어졌다. 통째로 잘라놓은 커다란 나무둥치를 앞에 두고 덩치 좋은 사내가 탕탕 칼을 내리치며 생선 대가리와 내장을 다듬었다.
'이 골목이 맞는 것 같은데···'
정순은 적어온 약도를 연신 들여다보며 음식점을 찾았다. 주인 할머니가 전화로 알려준 이름은 '순천할매곰탕집'이었다. 길게 늘어선 생선가게골목 중간쯤에 있다고 했으니 이 근처 어디일 것이었다.
"아저씨, 말씀 좀 물어볼께요. 순천할매곰···"
"쩌 위짝으로 오십미터만 올라가면 왼쪽에 붙어있구만요."
정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덩치 좋은 사내가 한 말이었다.
"몸이 부실해 보이는디··· 워째, 이런 일 할 수 있으시겄소?"
정순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은 말이었다.
"네, 할머니. 저 잘 할 수 있어요. 보기보단 강단이 있거든요."
정순은 일부러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상우의 이력서가 계속 반려되자 정순은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기로 했다. 더 이상 상우를 몰아치는 건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종일 서서 설거지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기쁘게 받아들이자고 정순은 마음을 다졌다.
"그려, 그럼 한 번 해보더라고···"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