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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은 1917년 丁巳生이시며 생일은 음력 3월 초이튿날로
경북 군위군 의흥면 파전동 밀양 손씨 가문의 2남 3녀중 셋째딸로 나시었으며
아래로 막내 남동생이 계신다.
1997년 3월 30일(음력 2월 20일)에 경북 군위군 우보면 나호 1동 자택에서 졸하시니
그때가 향년 81세이셨다.
열일곱에 아버님께 시집오시어
나보나 10년 연상이신 누님과 나 두 자식을 키우셨고
둘째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백수하신 할머니를 50년 넘게 모시었으며
할머니께서 돌아가실때까지 지성으로 섬기셨으며
한번도 할머니를 모시는 것을 불평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나로 인하여 무던히도 많은 가슴앓이를 하셨다.
어머니는 나와 나의 누님 사이에 두 딸을 더 낳으셨으나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한다.
천하에 몹쓸일이 자식을 앞세우는 일이라 하지 않던가.
이미 두 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어머니의 가슴에는
토해내지 못하는 피멍이 가득 차 있으셨으리라.
그러던 차에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다.
이제 이 아들마저 죽게 된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죽으리라는 마음이
아무리 올곧은 마음을 가진 여인네라지만 어찌 아니 들었겠는가?
그러나 나 역시 어릴 때 너무도 병약하여
하루에도 몇번씩 경기를하여 숨이 넘어가고는 했다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안고 십리길을 단숨에 달려 의원을 찾으셨다 한다.
내가 얼마나 병약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갓난 아기였을 때 경기를하여
어머니께서 나를 들쳐 업으시고 십리길을 달려가서 침을놓아 살린후에
안고 오시다가 지나가는 버스소리에 다시 까무라쳐서
오시던 길을 되돌아서 달려 가셨다고 한다.
나는 여섯 살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먹었다.
세 살이면 모두가 떼는 젖을 어머니는 병약한 아들이 애처로와
차마 젖을 떼지 못하신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 기를적에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섬 너말의 인피젖을 먹여 키운다 하였으나
나는 그 곱절의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랐다.
그럼에도 그분의 아들인 나는
그분이 소망하시는 만큼 강건하지 못하여 항상 그분의 애를 태웠다.
나의 희미한 기억만으로도
어머니는 나의 건강을 위하여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셨다.
내가 학교를 다니기 전부터 우리집에는 인삼을 곱게 썰어 넣은 꿀단지와
그 당시에 유명했던 영양제 에비오제가 끊이지 않았다.
설사 어머니와 누님이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 두 가지만은 끊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나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먹다가 질려 동네 또래의 친구들에게 나누어준 그 많은 에비오제를
누님은 단 한알도 먹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나는 끊임없이 병치레를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홍역을 치르었는데
어찌나 심했던지 자그마치 한달이나 학교를 가지 못하였다.
다행히 나의 잔병치레는 그것으로 끝났지만
그 후로도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야위고 약한 체격으로 어머님의 속을 태웠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시집오시기 전만해도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세끼 끼니걱정은 없는 집안에서 자라셨다.
그분의 시집살이는 그분 인생에 있어서는 크나큰 고행이며 중형이었다.
시댁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시집오신 어머니는 처음으로 피죽을 잡수어 보셨다고 하셨다.
거기다가 남편은
일년이면 한달을 얼굴보기 어려울 정도로 집을 나가
노름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는 탕아였으니
양반집 규수로 곱게 자란 여인네로서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인고의 세월이셨다.
나는 어렸을 때의 아득한 기억으로
어머니가 동구밖에서 해가 질 때까지
무언가 깊이 생각하시면서 우시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우시는 것을 본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아버지가 첩을 얻어 동구 밖에 살림을 차렸을 때에도
어머니는 내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미 그때 당신의 삶을 포기하셨는지 모른다.
그분은 늦게 얻은 외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으셨다.
삶에 대한 절망과 비애와 회의와 배신...
그 모든 것을 오직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즐거움으로 지우고 잊으며 이겨 내셨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국민학교 5학년 되던 해에
시골학교에서 대구로 전학 시키시고
아버지 몰래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논 한마지기를 처분하시어
대구에 집 한채를 마련 하셨다.
아들이 대구에서 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는
시골 살림을 포기하시고 아들을 위하여 대구로 나와서 온갖 고초를 격으셨다.
처음 그분이 취직한곳은 야쿠르트 공장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면서도 그곳을 택하신 것은
아들에게 야쿠르트를 먹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야쿠르트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고
어머니는 그 원액을 가끔 한도시락씩이나 가지고 오시고는 하셨다.
그것을 물에 타서 먹으면 지금의 야쿠르트와 같은 맛이 나는데
나의 기억으로 어머니는 단 한모금도 드시지 않으시고 아들을 먹이셨다.
그러다가 아버님이 갑자기 편찮으셔서
어머니는 야쿠르트 공장에 나가시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시골로 돌아가시고 나는 잠시 친척 형과 함께 자취를 한 기억이 난다.
자취를 하면서 어린 나이에 힘이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혼자 방안에 앉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져
중학교에 바로 입학하지 못하고 국민학교를 재수하며 어머니의 속을 썩혔다.
나의 재수는 어머니에게 큰 부담이었다.
어머니는 시장 귀퉁이에서 야채 장사를 하시면서
근근이 방세와 생활비를 마련하셨는데
철없는 나는 늘 어머니에게 용돈을 달라고 보체었고
어머니는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내어 주셨다.
한번은 시장에서 야채를 팔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졸라
서커스 구경을 갔는데 저녁 늦게야 서커스가 끝나 곡마단 문을 나서니
어머니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그날 대구에 유학을 온 이래 처음으로 어머니의 꾸중을 들었다.
밥먹을 시간에 집에 들어오지 않고 서커스 구경만하고 있다고...
그러나 정작 내 기억에 오래도록 이 사실이 남아있는 것은
하루 종일 시장에서 일하시고 피곤 할대로 피곤하신 노인네가
자식이 저녁을 먹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배가 고파도 자식을 기다리는 그분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서커스 구경을 해보지 못했다.
나는 나름대로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서커스를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잊으셨을지도 모르는 그 이야기를 해 드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그럴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그분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시고 말았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다.
앞에서 잠시 말했지만 어머니는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아버님 몰래 우리집의 유일한 재산인 큰골의 옥답 한 마지기를 팔아서
대구에 집 한채를 마련 하셨다.
그곳은 지금 대구의 신암 아파트가 있는 위치로
당시에는 동대구 역도 없었고 주변은 온통 밭이었으며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서도 한참동안 걸어 나와야 했던 곳이다.
방 두칸에 부엌이 하나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블록 집이었는데
어머니는 그 집을 사셔서 다른 사람에게 세를 놓고
우리는 바로 옆집의 단칸방에 월세로 살았었다.
그때 어머니는 시루떡 장사를 하셨는데
시내의 떡방앗간에 가셔서 시루떡 한 시루를 사서 머리에 이고
시내 이골목 저골목을 다니시며 떡 사소 떡 사소를 쉬지 않고 외쳐야
하루에 겨우 시루떡 한 시루를 팔 수 있었다.
해가 빠지면 어머니는 파김치가 된 몸을 억지로 가누시면서도
나에게 줄 떡 한 조각만은 꼭 챙겨 오셨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떡시루도,
늘 가져오시던 시루떡도 없이 캄캄한 밤중에 들어오셨다.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되어 무슨 일이냐고 여쭈었더니
어머니께서는 그냥 떡이 오늘따라 잘 팔리지 않아서
좀 늦으셨다고 하시며 저녁을 지으러 나가셨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다리를 절뚝거리시는 것을 보고
재차 물으니 사연은 이러 하였다.
어머니께서 골목을 다니시며 떡 사소를 외치시다가
어느 한옥집 앞을 지나시다가 대문이 열려 있기에
목도 마르고 하여 물이나 한 그릇 얻어 마시려고 대문에 들어서며
떡 좀 사이소 하는 순간에 대문간에 있던
송아지 만한 개가 어머니의 발목을 물어 버린 것이다.
놀라신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 지셨고
떡시루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주인이 달려 나와 대강 붕대를 감아 치료를 해 주었는데
어머니는 그 길로 땅바닥에 흩어진 떡을 주워 담아
다시 시장의 길가에서 해가 질 때까지 떡을 파시고 오신 것이다.
나는 그때 속으로 많이 울었다.
철부지의 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밉고 부끄러웠다.
지금도 나는 시루떡만 보면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의 무딘 기억으로도
그때 어머님이 가져다 주신 시루떡 맛은 아무곳에서도 다시 맛볼 수 없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때부터 나는 결혼하신 누님댁에서
누님 내외분과 함께 살았다.
중 2때 결혼한 누님은 시골에서 대구로 나오셨는데
어머니는 시골의 할머니 때문에 나를 누님에게 맡기셨다.
그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누님과 자형 내외분의 덕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내가 누님 내외분께 폐를 끼치기 전까지
나는 여러 사람들의 신세를 진다.
우선 대구 오성 중학교 교감으로 계셨던 손 00 씨 댁에서
몇 달을 혼자 지냈고
사촌 누님댁에서도 몇 달을 지낸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구차한 부탁을 하셔야만 했지만
한번도 내게 어려움을 말씀하시거나 표 내신 적이 없으셨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겨울 방학이되어 대구에서 공부하던나는 양력설을 며칠 앞둔 어느날
기쁜 마음으로 시골집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어머니는 힘겹게 꽁꽁언 감자 구덩이를 파고 계셨다.
아버지는 물론 집에 계시지 않으셨으며
아무리 괭이로 내리 찍어도 1cm도 파이지 않는 감자 구덩이를
언손을 녹이시며 파고 계셨다.
어린 나의 눈에 그것은 너무도 애처럽고
내가 어머니를 너무 고생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지금 공부를 그만하여도
5급(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은 칠 수 있으니
공부를 그만하고 돈을 벌겠다고 하였다.
그 순간 어머니는 안색이 굳어지시더니
힘들어 공부 시켰더니 이제 겨우 하는 소리가
공부 때려치우겠다는 소리를 한다면서
마당에있는 싸리 빗자루에서 싸리 회초리 하나를 뽑아 드시고는
내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 치셨다.
그날 나는 많이 울었다.
어머니한테서 맞은 것이 아파서 운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생이 마음 아팠고
아버지가 미웠고 능력 없는 내 자신이 미워서 울었다.
그리고 그날이후 나도 약간은 철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한번도 공부 때문에 어머니 속을 썩혀 드린적은 없다.
비록 좋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그동안에 겪으셨던 모든 고초를 다 보상 받으신 것처럼 좋아 하셨다.
대학 3학년 때 어머니는 환갑을 맞으셨다.
그러나 불행한 이 여인은 환갑상을 받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지아비가 감옥에 있는데
어찌 환갑상을 받느냐시면서
나중에 득이 너가 돈벌어서 환갑잔치 해다오 하셨다.
그러나 끝내 불초한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한번도 생일잔치를 열어 드리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결혼한 뒤에도 어머니는
생일상을 받으시기 위해서 서울로 대전으로 오셔야만 했다.
나는 어머니의 80회 생신날 잔치를 할려고 했다.
어머니가 다시 가 보고 싶어하시던 오오사카에 모시고 갈려고 여행사에 비용을 물어보고 있었다.
불행한 노인은 그 며칠을 참지 못하시고
생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것은 내가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해드리지못한 불효중
평생 내 가슴의 응어리로 남는 것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나는
방위병으로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게 되어
고향의 예비군 사무실에서 6개월 동안 근무하였는데
내가 철이든 이후로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분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었다.
그분의 행복한 시간은 조금 더 연장이 된다.
내가 청송에 있는 현서중학교로 발령이 나서 자주 시골집에 올 수 있었고
이제 돈을 벌어서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3년이 지나서 아들은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서울로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떠나 버린다.
어머니는 아들이 또 다시 객지로 나가 고생하는 것이 마음 아프셔서 숟한 밤잠을 설치신다.
그보다는 이렇게 다시 집을 나간 아들은
끝내 평생을 객지 생활로 이어져
다시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여기에서 다 쓸 수는 없다.
다만 어렸을 때,
어린 철부지때 내가 어머님 속을 썩힌 이야기들만 몇가지 적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고
그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은 한이 없다고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위로 시어머니를 모시는데 있어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바치셨고
역마살이 낀 남편에게 단 한번도 음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순종적인 아내로 사셨으며
병약한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 온갖 굴욕과 어려움도 잊으시며 살다 가셨다.
그런 어머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나는
결국 나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자로
항상 어머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고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렇게도 바라시던
퉁퉁하게 살찌고 믿음직 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참으로 공교롭게도
2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던 나의 몸무게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저 세상에서조차도 마르고 약해 보이는 아들이 못내 안스러우셨던가보다.
이제 내가 추측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조금 기술하고 글을 마쳐야겠다.
나는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한 한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살아 갈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날의 나의 행동은
평생을 두고 뉘우쳐도 소용없는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있기에
이렇게 글로나마 나의 죄를 옮겨 놓을까 한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영천 보현산에서 대전으로 가는길에 나는 동료직원 한사람과 시골집에 들렀다.
서둘러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어머니는 서둘러 저녁상을 차려 주셨는데
거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무우 깍두기가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의 매운맛을 완화시키려고 깍두기를 담으시면서 설탕을 넣으셨던 모양이다.
마흔이 넘어도 철이 없는 아들은
깍두기가 달다고 전에 없이 심하게 어머니를 나무랐다.
그리고는 깍두기를 다시 담으라고 반 명령조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나는 밥을 먹고 물 한모금 마실 여유도 주지 않고
바쁘다면서 서둘러 대전으로 올라왔다.
그것이 살아 생전에 모자의 마지막 상면이었다.
1시간 만이라도,
1분
아니 1초라도 아들을 더 붙잡아놓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눈꼽 만큼도 헤아리지 못하고 아들인 나는 그렇게 매정하게 어머니를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은 다시 지나 갔다.
금요일 오후 어머니께서 보현산으로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내일 집에 오겠느냐고 물으셨다.
왜그러시느냐고 물으니
그냥 보고 싶어서 그러신다고 하셨다.
나는 짜증을 내며
피곤해서 갈 수 없다고 또 한번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것이 모자가 이 세상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토요일 오후 나는 시골을 들리지 않고 영천으로 해서 고속도로로 대전에 올라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심 나를 기다리셨다.
설탕을 넣지 않은 깍두기를 만들어 놓으시고.......
내내 아들을 기다리시던 어머니는 세시쯤 마을을 가셨다.
그리고 혹시 집을 비우는 동안 아들이 올까봐 마음데로 놀지도 못하시고
다섯시쯤 다시 집으로 오셔서
끝내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시며
아들이 가져갈 무를 씻고 계셨다.
그때 뒷집에서는 어머님 연배의 안 노인들이
저녁을 지으시며 노시다가 어머니에게 저녁을 드시러 오시라고 전화를 하셨다.
욕실에서 무를 씻으시던 어머니는
아들의 전화인줄 아시고 급히 전화를 받으려고
욕실에서 방으로 가시다가
물기가 많은 욕실 바닥에 미끄러지시면서
머리를 문지방에 부딪히시고 절명하셨다.
얼마동안의 희미한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얼굴이
그 희미한 의식 속에서 조차 보이셨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일어난 사고로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 가셨다.
항상 저녁에 자다가 죽어
아침에야 내 죽음이 알려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던 분의 죽음은
참으로 어이없게
한많은 세상으로부터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시지 않으신체
인연의 끊을 놓으셨다.
더욱 나를 슬프게 한 것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주검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루동안 방치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때까지 아들은 시골에 어머니에게
전화 한통화 하지 않았다.
그날따라 나는 항상 아침이나 저녁이면 하던 전화를 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글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달이 지난날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분이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다.
내가 이글을 쓰는 것을 이토록 미룬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과 어머니에 대한 나의 무관심과 효심이 없는 탓이다.
그동안 어머니가 보고 싶어 산소에 찾아가 큰소리로 운적이 많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거의 일년 동안은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울고 또 울었다.
세상의 정 중에서 죽음의 정이 가장 빨리 끊어진다고 하였다.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자식인 모양이다.
그리고 부모에 불효한 자식은
그 부모가 세상을 버려도 불효를 하나보다.
이젠 어머니 산소에 가도 눈물이 나질 않는다.
집안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어머니의 흔적을 보아도
아무런 그리움이 없다.
나는 본시 어머님을 괴롭히려고 세상에 태어난
천하의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나 싶다.
그래도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우면
어머니가 보고 싶고
산소에 찾아가서 넉두리라도 풀어놓으면
그나마 막힌 가슴이 후련해진다.
어머니는 저 세상에서조차 아들을 보살피고 계심이 분명한데
아들은 편하게 살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만 어머니를 찾는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차이인가 보다.
2000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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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가신겁니까?
정말로 당신은 영원히 제게서 떠나신겁니까?
믿어지지않는 이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당신의 흔적은 집안 구석구석 남아있어 제 가슴을 찢어놓고 있는데
당신은 정녕 한마디 말씀도 없이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리시는 겁니까?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신이 심어놓으신 텃밭의 시금치랑 마늘은
아직도 당신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은 어찌 한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않으시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 가십니까?
집앞의 개울물은 오늘도 변합없이 흐르고
뒷산의 진달래 개나리는 이 봄에도 피고 있는데
어머님,
당신의 생신을 불과 며칠 눈앞에 두고
이렇게 당신은 홀연히 떠나시는 겁니까?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신의 따스한 손길이 아쉬울 때면
당신의 온화한 음성이 그리울 때면
저는 어디서 당신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까?
아직은 때가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당신을 필요로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이 세상에,
당신이 사랑으로 돌보아 주어야할 이들이 너무 많은 이 세상에
한 줌 미련도 없이 그렇게 훌훌 떠나가실 수 있습니까?
손주들의 올망졸망한 눈망울이 보고싶지도 않으십니까?
애원하듯 보고싶다던 아들을
한번쯤 더보시고 돌아 가셔도 그리 늦지는 않았을텐데
무엇이 그리도 급하고 바쁘셔서
제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한을 남기시고
당신만 훌훌 떠나셨습니까?
가끔 한번씩 와서는
반찬 투정이나하고 꿈같이 사라지는 아들을 위해서
설탕을 넣지않은 무우 깍두기를 담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손주를 위해서 땅콩도 심으셔야 하시고 옥수수 씨앗도 구해야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아껴 모아두신 그릇과,
당신께서 만들어 놓으신 수의와
텃밭에서 뽑아다 놓으신 무며 상치가
그리고 당신의 하염없던 그 사랑이
이젠 저에게 아픔으로만 다가옵니다.
당신을 등에 업고 수미산을 천만번 오르내려도 모자랄 내리 사랑이었건만
정성스러운 밥한끼 지어 드리지도 못했는데
평생을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가
자식효도 한번 받아 보지도 못하시고
당신은 그렇게 아무 말씀도 없이 떠나십니까?
어머니.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세상 어디에 내어놓아도 떳떳하고 당당하도록 키우신 자식이
이제 세상에 빛을 뿌리려 하는데
당신은 그 빛도 보시기 전에 눈을 감으시니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하기사
고통과 한으로 평생을 사신 당신께서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으시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당신의 기구한 운명이 억울하시지 않습니까?
울고 싶어도 우실 수 없었고
몸이 아파도 약한첩 마음놓고 지어 잡숫지 못하신
80년 고통의 세월에 미련없이 종지부를 찍으시고
그렇게 홀연히 떠나신 어머니 당신은 정녕 부처 이셨나 봅니다.
부디 극락왕생 하시어
죄짖고 미련맞게 사는 이 자식을
살피고 바로잡아 주시길
합장 기도 합니다.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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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성암님....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나서...한참을 기다렸다가 글 올립니다~
부모에게 받은거 어찌 다 갚을수 있겠습니까...
다들 예기 하지요...
그저 내가 잘 살고 있는게 효도라고~~그거면 되는게지요~~ 존경합니다~~
아이구 수련님. 죄송 합니다.
이 글은 저의 사연이 아니고, 고향 후배가 적은 글 입니다.
처음 글을 옮길때 내용을 밝혔다가 혹여 본인의 프라이버시 문제가 걱정되어 지워 버렸더니 이런 오해가...
애처러운 이 사모곡을 적은 후배는
천문학 박사로 영천 보현산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는 집안 동생임을 밝힙니다.
정성어린 사연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오래전에 작고하신 부모님이 무척이나 보고싶습니다 좋은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리며 건강하십시요
아침부터 눈물난다,,,울 엄마생각난다
아침 이른 시간에
일 하시기전 짬이 생겼는 모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