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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몰도바 공화국 (Republic of Moldova)
인구: 280만 명, 몰도바(78%), 우크라이나(8%), 러시아 면적: 3만 4천㎢(충북1/2), 종교: 동방정교회(98%)
언어: 루마니아 화폐 환률: 1레우→ 60원
역사: 소련공화국 중 가장 작은 공화국으로 루마니아의 몰다비아 공국의 일부였고, 세력이 가장 강했을 때는
슈테판 공 4세(재위 1457~1504) 때 이며, 스테판 셀 말레(Stefan cel Mare)라고도 한다.
아들 보그단 3세(재위 1504~17)는 투르크 황제에게 공물을 바쳤고, 1812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러시아제국에
할양되어 한 지방이었으며, 1853년 나폴레옹 3세가 예루살렘을 돌볼 수 있는 권리를 오스만 술탄에서 받아낸
것을 러시아정교회의 모욕으로 보고 같은 권리를 술탄에게 주장했다.
술탄이 거절하자 종속국인 몰도비아 왈라키아를 공격하여 크림전쟁이 시작되었으며, 1854년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몰도비아 왈라키아에서 군대를 철수 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후 다시 루마니아로 포함되었고, 1940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가
1941∼44년 루마니아가 다시 점령했으나 1944년 소련군이 탈환했으며, 1990년 6월 23일 주권을 선언했다.
1991년 8월 27일 몰도바 국회가 소련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한 후 같은 해 12월 독립국가연합(CIS)에
참여 했는데 몰도바는 '와인의 여왕'으로 유명하며, 유럽 최빈국이어서 물가가 가장 싼 나라에 속한다.
한국과는 1992년 1월 31일 공식적인 수교가 이루어졌다.
몰도바를 유럽에서는 베싸라비아(Bessarabia)라고 불렀고, 90%가 루마니아 혈통이며, 문화도 같은 계열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 지도에도 없는 이 나라는 ‘드네스트르 강 저편’ 뜻이며, 1990년 티라스폴을
수도하고 몰도바로부터 독립을 선언을 하였고, 짧은 내전을 치렀으며, 1992년 휴전을 선언했다.
지금까지도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이 나라는 몰도바에서 사용되는 전기를 많이 공급하기에 여러
차례 정전사태가 발생했고, 현재도 긴장 관계가 남아 안전보장지대에 여전히 러시아 군대가 주둔한다.
이런 이유들로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국가모습을 갖추기까지 몰도바의 길은 험난하며, 몰도바 남자들은
언어가 통하는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러시아 등지에서 일해서 번 돈을 고국에 송금한다.
※드네스트르 강(Dnestr River) 루마니아어로는 니스트랄(Nistral) 이며, 우크라이나 리비우 서남쪽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발원하여 몰도바 동쪽 경계를 이루다가 다시 우크라이나로 흘러 오데사 근처에서 흑해로 흐른다.
강 길이는 1,352km로 우크라이나에서 2번째로 긴 강이며 몰도바는 이 강물로 수력발전을 하여 공급 된다.
[9일] 18년 10월 25일 목요일
●일정: 오데사(180km)→ (6) 몰도바 키시네프 관광[1 법원 2 정교회 2 국회 3 스테판 공원(푸시킨, 스테판 동상)
4 오르간 홀과 시청 5 성당 공원(개선문 아취, 대성당) → City Park Hotel
[몰도바로 가는 길]
오데사를 출발하여 드네스트르 강을 건너 1.5시간 달리면 몰도바 남서쪽 끝 팔랑카(Palanca) 검문소에 도착해
우리는 차 안에 있었고, 운전기사와 TC만 내려 통관 수속을 밟았는데 한나라 입국장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황량한 들판에 다른 건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검문초소 같은 작은 건물 하나만 보였는데 아마도 몰도바보다
더 작고 아직도 국가로 공인 받지 못한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으나 아니었다.
이번 여행 처음으로 내 음악을 같이 들으며, 좀 가난하다는 생각이 드는 촌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가면 작은
도시를 지났는데 사진 속에 도시 이름이 있어 커우세니(Causeni)라는 것을 알았고, 인구는 2만 여명이다.
키시나우에서 처음 만난 화려한 황금 지붕과 작은 건물들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는 시우플라 수도원(Ciuflea
Monastery)이고, 수도원을 돌면 키시나우(Chisinau) 호텔을 지나 우리가 묵을 시티 파크 호텔에 도착했다.
[키시나우(치시나우, Kishinyov) 역사] 인구 70만 몰도바,
비크 강 유역에 있는 몰도바는 문헌상 스테판 첼 마레(Stephen 재위 1457~1504년) 4세가 다스리던 1466년
최초로 언급되었으며, 스테판이 죽은 뒤 이 도시는 투르크 지배하에 들어갔다.
178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1812년 베사라비아의 나머지 지역과 함께 러시아에
할양되었고, 푸슈킨의 유배는 키시네프(1820.9월~23.5월)를 거쳐 오데사(1823~24)로 이송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 루마니아에 속했다가 1940년 다시 소련이 지배했으며, 이때부터 몰도바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키시네프(키시뇨프)라는 지명에서 치시나우(키시나우)로 개명했다.
2차 세계대전과 지진으로 폐허가 된 것을 소비에트 유니온(구소련)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했는데 가이드는
겨울에는 추위가 혹독하여 밤 온도가 -35℃까지 내려가고 낮엔 -20℃라고 했다.
[키시나우(키시너우, Kishinyov)]
시티 파크 호텔(City Park Hotel, 시 공원)에서 가이드를 만나 방 배정을 받고 짐을 놔 놓고 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이드를 따라 시내 관광을 나섰고, 큰 도로(스테판 셀 말레)를 따라 북서쪽으로 향했다.
키시나우는 1940년 강도 7이 넘는 지진의 폐허로 고풍스러운 건물은 찾을 수가 없고, 2차 대전 동안 도시는
60%가 파괴되었으며, 12만 명의 인구가 사망했고, 지금의 건물은 그 후에 건설했다고 한다.
2015년 국민은 400만 명이었으나 지금은 280만으로 줄었는데도 지금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하루 100명 정도가 유럽 쪽으로 빠지며, 대부분 언어 소통이 가능한 루마니아로 간다고 한다.
키시나우는 나무도 많고 공기도 좋아 유럽에서도 이름난 그린 시티(green city)이며, 몰도바는 물도 깨끗하여
그냥 마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페라 극장 앞에 도착했다.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몰도바 국립 오페라 발레단(Moldova National Opera Ballet)으로 1981년 건축했고,
지붕 아래 쓰여 있는 글자 중 우측 끝부분에 마리아 비에슈(MARIA BIESO)라고 적혀있다.
이 사람은 1960년대 가장 유명했던 오페라 가수라고 하였으며, 다음은 몰도바에 많이 생산되는 석회석으로
만든 조각들이 있었는데 중앙 위에 둥근 모양은 태양을 상징하고, 우측 것은 새를 상징한다고 했다.
좌측 뒤는 황소, 앞의 작은 것은 꽃을 상징한다고 했으며, 이곳에서 많이 보이고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하면
멋지겠다는 나무 이름을 물었더니 세계100여 종의 소나무를 총칭하는 ‘블루 파인(Blue pine)’이라고 했다.
블루 파인(푸른 소나무) 보다는 더 정밀한 이름을 알고 싶었으며, 다음으로 보이는 건물은 가이드는 1984년
지어진 몰도바 공화국의 대통령(Presidency of the Republic of Moldova)의 집무실이라고 했다.
1984~87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국가에 비해 대통령 혼자 쓰기에는 너무 커고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통령 임기는 4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며, 건물 내부는 아직도 리모델링(구조변경) 중이라고 했다.
다음은 농식품부(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od Industry) 건물로 이 나라는 농부가 60%인 농업국으로
과일 중에 제일 많이 생산되는 것은 포도이고, 사과, 호두, 복숭아, 살구 등이 생산된다고 한다.
곡식은 밀이 가장 많이 생산된다고 했고, 또 이 건물에는 법원도 같이 있다고 하는데 농식품부에 법원이
속했을까? 아니면 반대일까? 아니면 서로 독립되어 있을까? 아시는 분?
[변모 교회(Transfiguration Church)]
SIS Archive(SIS 보관소) 건물 모퉁이 사이에 있는 변모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로 1905년 지어졌는데 이 도시
사람들 중 93%가 러시아 정교회를 믿으며, 소비에트 유니언(소련공산당) 시절에는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림 중에 맨 상층은 신의 세계, 중간층의 부활한 성도의 세계까지는 천국을 의미하고 그 아래 지상의 세계는
지옥을 의미하며, 의자는 노약자만 앉고, 나머지는 서서 2시간 동안 예배는 드린다고 한다.
진열장에는 소비에트 유니언에 많이 분실되었으나 그나마 남아 있는 소중한 유물을 전시해 놓았는데 변모
교회라고 해서 성경의 변화 산 이야기인가 했는데 예수 재림 때 변화된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큰 도로를 건너 다시 돌아오는 길에 처음 만나 건물은 1906년에 지어진 국립 미술관(National Arts
Museum)이고, 건축은 19세기 말에서 1910년 사이에 유행한 아르누보 양식이라고 한다.
이젠 몰도바공화국 국회(Parliament of the Republic of Moldova)에 도착했는데 정원에는 살아 있는 작은
나무로 구성된 ‘Moldova’라는 글자가 있고, 이곳도 에스토니아처럼 101명의 의원이 있다고 했다.
에스토니아 국민은 134만 명이고, 이 나라는 280만 명인데 국회의원 수는 같았다.
[마리아 체보타리 공원(Cebotari Maria Park)]
지도에는 스테판 대 중앙 공원(Stephen the Great Central Park)으로 되었으나 가이드는 1957년 모든 것을
갖춘 마리아 체보타리 공원이라고 해서 검색했더니 그녀는 서 유럽에서 아주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다.
1910년 키시나우 가난한 노동자의 12명 자녀 중에 5번째로 태어나 4살부터 재능을 발휘했고, 1929년 러시아
유랑극단 단장 비루도프 백작은 미인이자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나이가 많은 백작과 결혼하고 몰도바를 떠나 전 유럽을 순회공연 했으며, 그녀는 재능을 인정받아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승승장구했고, 그녀의 성공 그늘 속에 소외감과 열등감에 남편은 술과 도박에 빠졌다.
‘가혹한 마음’이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한 디슬과 사랑에 빠졌고, 남편과 이혼하고 다슬과 재혼하여 아들 둘을
얻었으며, 2차 대전 때 베를린 폭격으로 집과 전 재산을 다 잃고 가난에 허덕였다.
2차 대전 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오스트리아로 이주하여 열심히 살았으나 남편도 죽고 그녀도 간과 췌장에
퍼진 암세포로 1949년 6월 9일 죽었으며, 19세에 고향을 떠 난 후 한 번도 가지 못할 만큼 불행했다.
전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있었으나 철거를 하고 지금은 국기게양대가 있었는데 맨 좌측은 키시나우 기이고
중앙은 몰도바 국기, 맨 우측은 유럽연합기인데 2014년 유럽연합의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비자기구만 있으면 된다고 하며, 유럽의 지원을 받고, 유로를 사용한다고 하며, 공원 안으로 들어가
처음 만난 것은 1885년 만들어진 알렉산더 푸슈킨 흉상(Alexander Pushkin Statue)이다.
그는 여기서 1820.9월~23.5월까지 유배 생활을 했는데 그 자리에 현재 푸슈킨 박물관이 있으며, 그는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로 사실주의(리얼리즘) 작품인 ‘예프게니 오네긴’을 썼다.
이것을 차이코브스키가 오페라로 만든 것이 ‘유진 오네긴’이며, 푸슈킨은 키시나우를 ‘음란의 도시’라고 했다.
공원의 분수대는 물은 나오지 안했고, 이제는 공원 끝 모서리에 있는 스테판 대 기념비(Stephen the Great
Monument)에 도착했는데 그는 이 나라를 가장 강대하게 만든 스테판 셀 말레(Stefan cel Mare)라고 한다.
그는 헝가리, 폴란드, 터키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42번의 전쟁 중에 42번 다 승리한 왕이라고 했는데 전쟁의
신이라는 오스트리아 외젠 장군은 24번 전쟁에서 다 승리했고,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서 23전 23승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엄밀하게 따지면 45전 40승 5무승부이라고 하며, 외젠은 나폴레옹이 7대 전략가 가운데
유일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한 사람인데 이번에 최다승 왕을 만났다.
스테판 왕은 1988년에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며, 1972년까지 소비에트 유니온(소련
공산당) 시절 길 건너에 있는 레닌 동상과 마주보고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독립 후 레닌 동상을 치우고 스테판 동상을 가장 좋은 이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갑자기 가이드가 트란스니스트리아 화폐를 나우어 주면서 지도를 펴고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는
티라스폴 거쳐서 온 줄 알았으나 돌아와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 나라는 위 몰도바 역사에 있다.
60년대 전형적인 소비에트 건축물인 주정부 관공서 정부 청사(Government House)는 그냥 통과했고, 귀금속
상점이 있는 살롱 드 비주테리 파라디스(Salon de bijuterii Paradis) 건물 끝에 관공서가 있다.
이 관공서는 키시나우 시청(Primaria Chisinau)이며, 다음 블록에 있는 작은 궁전 같은 백색의 아름다운 건물은
1901년 건설했고, 1970년 지휘자 티모페이 구르토보이(Timofei Gurtovoi)가 오르간이 설치된 콘서트홀을
구성하여 건물 이름이 오르간 홀(Organ Hall)이 되었으며, 1974년까지 주립은행이었다.
10분간의 자유 시간에 오르간 홀 주위 길가에 전시된 상품을 구경한 후 도로를 건너 호텔 쪽으로 향했다.
[대성당 공원(Cathedral Park)]
대성당 공원에는 서남쪽 중앙에서 서북쪽 중앙에 일렬로 늘어선 3개의 건물이 있는데 그 중 서남쪽 스테판
셀 말레 대로 옆에는 개선문 아취가 있고, 정 중앙에는 벨 타워가 있으며, 서북쪽에는 대성당이 있다.
개선문 아치[The Triumphal(삼중) Arch(아취)]는 파리 개선문 같다고 했으나 사실은 모방하여 만든 것이며,
1841년 터키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고, 상단에는 시계가 있다.
대성당의 벨 타워(Bell tower)는 소련 시절에 파괴한 것을 1998년 새로 복구한 것이라고 하며, 종은 아침
8시와 오후 4시 30분에 2번 친다고 하고, 이제는 대성당(The Metropolitan Cathedral)로 향했다.
[대성당(The Metropolitan Cathedral)]
이 성당은 1836년 세웠고,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성당이라서 내일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가 온다고 했으며,
또 아기들의 세례나 결혼식 때 찾아오며, 예배는 악기 없는 합창곡(아카펠라)으로 찬양한다고 한다.
아 카펠라(a cappella)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방식의 하나이며, 성인으로 추대되었다는 스테판 셀 말레 왕도
있었고, 이제는 관광을 마치고 바로 뒤에 있는 호텔로 향하다가 호텔 앞 길 거리에 서 있는 조각을 봤다.
이 조각은 안드레이 무드레아 갤러리(Andrei Mudrea Galler)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만든 조각으로 이름은
‘연인의 조각(Sculpture of Lovers)’이라고 하는데 여인이 힐 구두를 벗어 들고 걷는다.
여인만 보면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돌을 박아 놓아 걷기도 힘든 힐 구두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
같으나 남자가 시간을 보고 있는 것을 보면 약속시간을 넘긴 여인이 빨리 걷기 위해 벗은 것 같다.
[10일] 18년 10월 26일 금요일
●일정: 아프가니스탄 추모비→ 크리코바[포도주 농장 방문]→ 오레이 수도원→ 키시나우 리플 기념물→
공항 이동→ 모스코바 향발
[유대인 게토의 비문에 대한 참고서(Monument to the victims of Jewish ghetto)]
차를 타자마자 설명할 시간도 없이 내린 곳은 작고 좀 의시시한 공원이었는데 사람이라곤 개와 산책하는
여자 한 분만 있었으며, 무엇하러 이곳에 온 줄도 모르고 사진만 찍고 차에 올랐다.
여행기를 쓸 때 이곳의 이름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지도엔 유대인 게토의 비문에 대한 참고서라고
되어 있으며, 기념비는 1992년 빈민가의 문이 있는 위치에서 발견되었다고 되어 있다.
비문에는 희생자와 순교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비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랍비(유대인교 선생)라고 한다.
※게토(ghetto): ‘유대인 강제 격리구역’은 유럽 도처에서 있는데 시작은 1280년 이슬람왕국 모로코 밀라였다.
이슬람 국가는 유대인의 집과 문 크기까지 제한했고, 14, 15세기에는 유럽에서 강제격리가 이루어졌으며,
게토라는 이름은 1516년 베네치아에서 최초로 쓰기 시작했다.
게토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밤이나 성주간 때에는 문을 잠갔으며, 그 안에서 유대인은 종교, 사법, 자선
기관들을 조직하는 등 자치를 했고, 유대인은 게토 밖에서는 유대인을 나타내는 표지를 달아야 했다.
19세기 서유럽에서는 게토가 사라졌고,. 이슬람 국가는 1948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때까지 계속
존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는 유대인 전멸을 위한 집단수용소 형태의 게토를 만들었다.
현재는 소수민족들이 따로 모여 사는 도시의 특정지역을 게토라 부른다.
[파르크 기념비(Parc Memorial)]
파쿨 아프간(Parcul Afgan) 공원에 있는 기념비는 벨로루시 민스크에 있는 ‘눈물의 섬’처럼 1979~88년 9년
4개원 동안 몰도바 사람들은 소비에트 유니온(소련 공산당) 함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군대가 가장 많을 파견했을 때에는 135,000 명이었으며, 이중에 몰도바 군인이 희생된
것은 300여명이라고 하고,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된 기념비이라고 한다.
눈물의 섬처럼 이곳도 어머니 동상이 있는데 머리에는 비들기가 앉아 있어 머리장식처럼 보였으며, 최근
이 지역 아파트에서 가스 폭발로 7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포도주 농장으로 향했다.
[크리코바(Cricova) 포도주 농장]
본래 일정은 밀레쉬투(밀레슈티 미치, Milestii Mici) 포도주 농장으로 이 농장은 길이만 200km이나 현재는
55km만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와인저장고가 있고, 150만 병이 저장되어 있다.
몰도바는 와인투어를 할 만한 2곳 중에 첫째가 이곳으로 지하 포도주 도시(Underground Wine City)라는
별명이 있으며, 기네스북에 오르면서 유명해졌고, 키시나우에서 18km 정도 떨어져 있다.
시음 주는 무한정 무료이며, 정원 장식으로 오크통과 포도주잔의 분수가 있다.
두 번째가 우리가 견학한 크리코바로 키시나우에서 13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가이드는 15세기 석회석을
채굴하던 광산 동굴을 1947년에 와인저장고로 개조하여 1952년 문을 열게 됐다고 한다.
동굴길이는 120Km로 세계 2번째로 길고 지하창고는 연중 12~14℃ 온도를 유지하여 추우니 패딩이 좋다고
하며, 사람 건강에 가장 좋은 습도를 가지고 있고, 아직도 석회석이 많이 저장되었다고 한다.
동굴 안을 농장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들어가 구경을 했으며, 짧은 영상도 보았는데 크리코바의 포도주는
BC 3세기 때부터인데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종교행사로 사용했다고 한다.
몰도바 스파클 와인(샴페인, Sparkling Wine)은 소련시절에 본격적으로 육성하여 소련에 공급되었고, 일부는
서유럽에 판매되었다는 내용이라고 TC가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스파클을 번역하면 발포성이다.
이젠 지하 100m에 위치하고 있다는 스파클 와인공장에 도착하여 과정을 구경했는데 기억에 남은 것은 병에
빛을 통과시켜 불순물을 찾아내는 방식인데 어느 시대인데 이런 방법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45도 거꾸로 있는 병들은 시간이 되면 마크를 기준 삼아 돌려주며, 2달은 거꾸로 세워 침전물을 보고 저장
시간을 정한다고 했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은 6명의 여성이라고 한다.
샴페인은 프랑스 것을 말하고, 그 외에는 스파클 와인이라고 하며, 뚜껑을 열고, 당도가 다르게 설탕을
주입하면서 병에 표시를 하고, 체크를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원인을 분석한다고 했다.
원시적으로 와인을 만드는 도구와 와인을 담았던 항아리들을 보았고, 크리코바 스파클 와인은 스파클
와인 대회에서 은메달을 받았다는 것도 벽에 전시 되어 있으며, 소련시절에 받았던 메달도 있다.
숙성년도는 병에 기록되어 있는데 백포도주는 대략 25년 되었고, 적포도주는 40년 정도 되었으며, 40년
넘으면 부패한다고 하고, 와인은 절대로 산소가 들어가면 안 되어서 코르크 마개가 젖도록 눕혀둔다.
코리코바 토슨트를 따라가다가 각국에서 방문한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 러시아 국기 옆에선 푸틴, 사마란치 올림픽 회장 등이 있다.
이 중 메르겔 총리와 푸틴은 이곳에 개인 와인 셀러(Wine Seller)를 가지고 있고, 푸틴은 50번째 생일파티를
이곳에서 가질 정도로 유명한 곳으로 러시아 국기가 있는 곳이 푸틴의 개인 소유의 와인이다.
중요한 와인을 보관하는 곳에는 러시아 국기가 있었는데 아마도 러시아 소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으며,
이 자리에서 푸틴이 사진을 찍은 곳이고, 이곳을 지나면 화려하게 꾸며진 복도와 방들이 나온다.
한 벽면에 세계최초 러시아우주인 유리 가가린 사진이 있고, 아래 액자에 ‘지구를 떠나는 것보다 크리코바
와이너리를 떠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친필이 있으며, 그는 하루 종일 와인만 마셨다고 한다.
더디어 시음 방(테스팅 룸, Tasting Room)과 연회장이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애주가들은 가장 좋겠지만
가장 싫어하는 곳으로 이런 시음은 전에도 2번 있었다.
하나는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네틀링스의 소유지(Neethlingsof Estate) 농장인데 이 농장은 275㏊(80만평)에
일 년 약 100만 병을 만들고 2500개의 참나무통이 있는 와인 리 이다.
나머지는 지하 17km나 되는 아르메니아 예레반에 있는 노아(Noy) 코냑 와인너리(Winery) 이며, 억지로 하나
더 추가하면 멕시코에서 시음했던 데킬라 이다.
이번이 3번째 인데 시음 전 맹물로 입 안을 잘 헹구어 주며, 먼저 시음한 것은 흰색의 술인데 백포도주인지
아니면 블랑 드 블랑인지는 모르겠으나 난 관심도 없고, 어서 빨리 지나 가기를 바랐다.
본래 ‘아세틸 알데하이드’를 놔두고 태어나 평생 마신 술이 소주 3병도 안되니 술에는 무뢰한(無賴漢)이다.
백포도주는 증류해서 만든 술이고, 적포도주는 증류 전의 술인지 알고 있었으나 백포도주는 포도껍질을 빼고
알로만 만든 술이고, 적포도주는 껍질과 함께 만든 것이라고 옆에서 부언으로 설명을 했다.
※샴페인(champagne): 본래는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명으로 철자까지 똑같으며, 이 지방에서
나는 포도주에 붙여서 쓰던 것을 지금은 주로 백색의 발포성(거품성질) 포도주를 부르는 명사가 됐다.
샴페인은 17세기말 베네딕토 수도회 수도사 동 피에르 페리뇽이 발견했고,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로 나뉘고
거품이 생기는 발포성과 거품이 없는 비발포성이 있으며, 가스의 압력이 높을수록 고급이다.
반드시 어름 속에 넣어 차게 마시며,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주문할 때 주의할 점은 샴페인은 무척
고가이어서 좀 싼 것을 마시려면 가스 압력이 좀 낮은 ‘끄레망’을 주문한다.
더 싼 것은 기포의 뜻을 가진 ‘무쉐’를 주문하고, 가장 싼 것은 약 반포성의 ‘뻬띠앙’을 주문하되 한 가지
더 백포도주 만든 ‘블랑 드 블랑’과 적포도주로 ‘블랑 드 누아’를 구별해서 주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도를 구별해야 하는데 섹(조금 단 것), 드미섹(단 것), 두(매우 단 것)과 엑스트라 섹
(조금 드라이), 브뤗(드라이), 엑스트라 브뤗(매우 드라이)로 나누어 주문해야 한다.
위의 크리코바 와인너리 해설자가 당도를 달리해서 넣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병을 거꾸로 45도 세우고,
돌리는 이유는 아래 나폴레옹 코냑에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하세요.
※나폴레옹과 샴페인, 코냑: 샴페인이 축배용으로 많이 쓰이는 이유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승리의 순간
샴페인이 필요하다.’고 한 것으로 승리 후에는 샴페인을 마셨다고 한다.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를 전투 전날 샴페인을 미처 준비하지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모에 샹동 회사는 1804년 나폴레옹을 성대히 대접할 기회를 가졌고, 그는 호의에 프랑스에서 가장 명예로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으며, 이후 이 회사 샴페인은 전 유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모에 샹동 사는 이것을 기리기 위해 1860년대 황제라는 뜻인 ‘임페리얼(Impèrial)’을 출시하여 지금까지 가장
판매량이 높은 샴페인으로 ‘모에 샹동 브뤼 임페리얼’은 국내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코냑(코냐크, Cognac)도 프랑스 서쪽 해안에 있는 지방 이름으로 1811년 나폴레옹이 아들을 낳았고, 이해에
질 좋은 포도가 풍년이어서 브랜디 제조업자들이 이 둘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 ‘나폴레옹 코냑’이다.
이 코냑은 고급 브랜디에 사용하기에 싸구려 메이커도 그 중에 괜찮은 것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하니 조심해야 하며, 오크통에서 일차로 숙성된 포도를 병에 옮겨 담아 2차로 숙성시킨다고 한다.
이때는 병을 거꾸로 세워서 가끔 돌려주어 병 입구 쪽에 불순물이 모이도록 하며 숙성은 V.O(Very Old)는 2년
반 이상, V.S.O.P((Very Superior Old Pale)는 4년 반 이상, X.O(Extra Old)는 6년 반 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질 좋은 포도주을 결정하는 요소는 오래 발효된 포도주가 아니고 가장 당도가 높은 해에 만들어진
포도주이기에 애주가들은 질 좋은 포도가 생산된 해를 적어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구 오르헤이(Old Orhei)와 타타르 목욕탕(Tatar Bath)]
오르헤이는 오라이 또는 오레이라고도 하며, 구 오르헤이에서 직선으로 서북쪽 15km 지점에 오르헤이가
있는데 우리는 구 오르헤이에 초입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식당 이름은 아그로 펜시우네아 카사 베르데(Agro Pensiunea Casa Verde) 인데 이 식당에서 본 것 중에
우리나라에도 있는 옥잠화가 이 나라에도 있었고, 그 옆 죽은 나무에 토기 컵과 항아리을 걸어 놓았다.
식당에서 가까이 있는 폐허된 타타르 목욕탕(Tatar Bath Ruins) 유적지로 향했다.
오레이는 1495년 ‘스테판 셀 말레’ 때 몰도바 영토가 되었고, 19세기 후반 오스만투르크 술탄이 지배하면서
이곳을 전부 불태웠다고 하며, 목욕탕은 몰도비아 왈라키아 시절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14세기 때 오레이는 낙타타고 지나가던 대상들을 상대로 살던 오륙백 명이 사는 작은 도시였으나 타타르가
점령하고 정착하면서 그들의 방식으로 만든 일종의 증기 목욕탕이라고 한다.
올 때도 차를 세워두고 호두를 주웠고, 이곳에도 많았으며, 수도원 마을에서도 많았고, 대충 개인당 1되
이상 주웠으며, 우리 고향 영동에도 호두나무가 많아 맛을 아는데 여기 호두는 정말 맛있다.
TC는 이 일을 고만두면 이 나라의 호두로 장사하고 싶다고 했으며, 호도(胡桃)는 오랑캐 호와 복숭아 도인데
나무에 달려있을 때 모양을 말하고, 호두(胡頭)의 두는 머리 두로 먹을 수 있도록 까진 것을 말한다.
카카오는 열매 때 이름이고, 가공을 하면 코코아가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며, 우리나라는 호두를 나무에
달렸을 때 털어버리는데 자연히 벌어져 떨어지는 것을 추자라고 했다.
늦은 가을에는 나무에 달린 호두를 본적이 없었지만 여기서는 벌어지지 않고,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며, 열매가 많은 나무의 이름을 물었더니 가이드는 스마트폰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신기하게도 한글로 산사나무속이라고 되어 있어 어떻게 검색했는지 궁금했으며, 이 나무의 다른 이름은 11개가
되는데 생략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열매의 맛은 시고 달며 성질은 따듯하다고 했다.
또 간장, 비장, 위장에 작용하고 진정, 강심, 강압작용을 하고, 소화불량, 산후복통, 고지혈증, 동맥경화, 이질,
심장기능장애, 심계항진, 심장쇠약 등에 쓰이는 좋은 약재이며, 천연 소화제라고 된다.
이곳에서는 구 오르헤이가 내려다보이는데 시내에 있는 아코퍼마운툴 마이키 도누이(Acoperamantul Maicii
Domnului) 교회(루마니아어 비세리카, Biserica)가 인상적이며, 이젠 동굴교회로 향했다.
[오르헤이 국립공원(Orhei National Park)]
구 오르헤이(Old Orhei) 서남쪽에 라우트(Raut)라는 작은 시내가 좌우로 흐르는 중앙에 있는 높은 언덕은
위로 갈수록 높아지며,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길 위에 펼쳐 놓은 수공목각기념품이다.
막 결혼한 부부를 만났는데 이들은 여기 교회에서 결혼한 사람들도 있고, 사진 찍으러 오는 부부도 있다고
하며, 신혼부부와 함께했던 아가씨 2명 중에 앞에 가는 아가씨는 자갈길을 걷기가 힘들었던지 호텔 앞의
조각처럼 이 추위에 힐 구두를 들고 맨발로 가고 있어 마음이 안쓰러웠다.
이 아가씨들 건너편에 있는 붉은 지붕의 집 뒤로 공동묘지(Cimitir Butuceni)가 있었다.
공동묘지 앞 지붕만 보이는 교회를 가이드는 15세기 만들어진 동굴 교회(Cave Church)라고 했으나 지도엔
루페스트라 오레히 베치(Rupestra Orheii Vechi) 교회(Biserica)라고 표기된 기독교회이다.
이 교회는 세르키예프 페스테레(Cerkiev Pestere)라는 예배당이 있으며, 이곳을 통과하면 절벽이 나온다.
그런데 계단을 잘 못 디디면 낭떠러지로 바로 떨어 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고, 본래 이 교회에는 12명의
수도사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1명만 거주하고 있으며, 17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입구는 1820년, 예배당은 1890년 다시 만들어졌고, 동굴로 들어가려면 남자는 모자를 벗고 여자는 머리를
가려야 하며, 사진은 찍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동굴 예배당에는 나이 많은 수도사가 마리아상 앞 의자에 앉아 있으며, 동굴 끝에는 낭떠러지이고, 그 아래는
라우트 시내가 흐르는데 이곳 바닥 바위에는 온통 조개껍질화석이었다.
이것은 바다 밑이 융기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며, 루마니아 땅도 융기된 것이라고 하였고, 또 이 동굴엔
12칸으로 나누어진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12명의 수도사들이 기거했던 장소로 설수 없도록 낮았다.
짐이 놓여있는 곳은 지금의 수도사가 기거하는 곳이고, 밖으로 나오면 높은 곳에는 18세기에 만든 십자가가
있으며, 이 십자가를 잡거나 돌면서 기도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고, 이젠 수도원으로 향했다.
[오르헤이 베치 수도원(Orhei Vechi Monastery)]
이 수도원 대문을 통과하면 오른쪽 붉은 건물은 오르헤이 베치 수도원(Orhei Vechi Monastery)이고, 좌측에
황금 양파가 있는 흰 건물이 비세리카 스판타 마리아(Biserica Sfanta Maria) 동방 정교회이다.
수도원은 못 들어가고 교회 안에 들어 가 보았는데 이 교회는 1905년 건축되었다고 하며, 많은 설명했지만
TC는 설명이 없었고, 안을 둘러본 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저지대로 내려가 동네로 들어섰다.
[생태 리조트 부투세니(Eco Resort Butuceni)]
동네는 우리의 농촌 풍경이었는데 가이드가 전통적인 가옥이라 한 곳은 생태 리조트 부투세니는 리조트로
식당도 겸한다고 하나 아무도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갔으며, 지붕은 갈대라고 한다.
갈대지붕의 수명은 30년이나 된다고 하여 감탄했고, 벽의 파란색은 모기 같은 곤충을 막아주는데 나무 밑도
같은 색깔로 칠했는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곤충을 쫓으려고 눈 화장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이 리조트는 베틀 등이 전시되어 있어 작은 박물관 같았으며, 이 마을도 떨어진 호두는 많았으나 대부분
지붕 위나 주울 수 없는 곳에 있었고, 마을 끝이자 초입인 북쪽에는 텅 빈 공터는 6월에 오페라가 열리이며,
낮은 돌 무대와 의자대신 돌들이 길게 옆으로 놓여있었고, 남쪽에는 닭들이 놀고 있는 닭장이 보였다.
이번여행에 오리 키우는 것만 보았지 닭 기르는 것을 처음이고, 지금까지 단 한명의 사람도 보지 못해서 좀
이상했는데 가이드는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가 되면서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한 4만 유로(약 5천만)라고 했지만 면적을 말하지 않아 우리가 가늠할 수 없지만 주민들은 팔고 떠나 500여
명의 초등학생이 300여 명으로 줄었다고 하며, 가이드는 영어도 못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했다.
어디서 왔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대답하느라 쩔쩔맸으며, 이제는 키시나우로 향했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고, 시내 들어오다가 치니누 서커스(Chisinau Circus) 공연장을 보인다.
[리플(여울) 기념물(Riffle Monument)]
이젠 몰도바의 마지막 관광지인 리플 기념물이 있는 도착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현충탑과 비슷한 곳으로
매년 5월9일이면 승전기념 행사가 있다고 하며, 붉은 사각뿔 탑이 있다.
이 탑은 1975년에 만들어 졌고, 1946년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탑으로 기념탑 아래 중앙에는 꺼지지
않는 성화가 타고 있었고, 황금별 탑 주위에 반원형의 붉은 벽이 있다.
이 벽은 1941~45년 2차 대전에서 희생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군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며,
주위의 Blue pine trees(푸른 소나무)는 이들을 잊지 말자는 것을 상징으로 심은 나무라고 한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CIS 연합의 국가들은 2차 대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가족 중에 한명은 희생자가
있기에 그들을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결혼한 후에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이제는 몰도바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잠시 쇼핑센터에 들렸다가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대부분
가이드 같이 먹지 않고 혼자 먹었으나 오늘은 같이 먹으면서 대화를 했다.
오스트리아 애인이 중국음식을 좋아해 젓가락 사용해 봐 능숙하지는 않지만 제법 했고, 식사 후 모스코바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으며, 모스코바에서 다시 심페로폴로 와야 하는 고달픈 오늘 밤이다.
※독립국가연합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1991년 8월에 러시아에서 독립한 국가들이
12월에 결성했으며, 정회원 국과 준회원 국이 있고, 참관 국이 있다.
정회원 국은 러시아, 몰도바, 벨로루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며, 준회원 국은 투르크메니스탄 1나라이고, 참관 국은 몽골, 아프가니스탄 2나라이다.
2014년 12월 CIS 기능이 역할을 하지 못하자'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로루시,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5개
국이 EAEU(유라시아 경제연합)을 결성했고, 타지키스탄이 가입을 신청했으며, 몰도바는 참관 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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