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수정 21권, 20년(1587 정해 / 명 만력(萬曆) 15년) 3월 1일(경인) 1번째기사
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
성균 진사 조광현(趙光玹)·이귀(李貴) 등이 상소하여, 스승 이이(李珥)가 시배(時輩)들에게 무함(誣陷)당한 정상을 극력 논하였는데, 모두 수만언(數萬言)이었다.【이때 조정 논의가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당에 대한 공격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선비로서 성혼·이이의 문정(門庭)에 조금이라도 가까이한 자는 차례로 배척당하였다. 그래서 성혼·이이를 위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관학 유생(官學儒生)이 오현(五賢)의 종사(從祀)1)를 청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유생들을 불러 모으고는 상소 끝머리에 ‘정도(正道)를 그르치고 진리를 어지럽히며 이름을 낚고 성예(聲譽)를 구하였다.’는 등의 말을 몰래 첨가하여 성혼·이이를 공격하였는데, 전일 성혼·이이를 존숭하던 무리들도 모두 알지 못하고서 거기에 서명하였다. 이귀의 이름도 거기에 들어 있었으므로 이귀가 성내어 동료를 거느리고 소장을 갖추어 이를 변명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유독 조광현과 소장을 지어 동서(東西) 논의의 수말(首末)을 두루 진달하는 한편 조헌(趙憲)의 논의가 치우쳤음을 말하고 힘써 손순(遜順)하여 중도에 맞게 하려 하였는데 조광현은 그것은 감히 하지 못하였다. 이귀가 이에 이경진(李景震)을 시켜 별도로 상소하게 하고 그가 지은 소장도 올렸다.】 그 소장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지난번에 어리석고 미천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문득 봉장(封章)을 올려 죽은 스승을 위하여 원통함을 송변(訟辯)하였으니, 스스로 천위(天威)를 범하여 죄가 용서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일이 국론(國論)에 관계되고 비방이 사문(師門)에 미친 것을 보게 되어서는 감히 끝내 입을 다물라는 경계를 지켜 한 마디 말을 하여 죽은 스승의 마음을 밝히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요즘 공주 제독(公州提督) 조헌(趙憲)이 소장을 올려 일을 말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소장을 얻어 읽어보고는 위연(喟然)히 탄식하여 ‘조헌은 우리 당(黨)의 선비인데 그 말이 중도에 맞지 않고 사실에 어긋남이 이러함에 이르렀으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죽은 스승이신 이이의 평생은 붕당(朋黨)을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힘을 다해 사류(士類)를 보합하여 시세의 어려움을 구제하려고 도모하였는데 뜻을 품고서 성취하지 못하고 불행히 마음과 힘을 다해 애쓰다가 죽자 국사가 한 번 패하게 되었으므로 신들은 매우 가슴 아프게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이이가 죽은 뒤부터 그의 언론과 풍지(風旨)가 전혀 전해짐이 없고 곧 중도에 맞지 아니한 말이 배류(輩流)들 사이에서 나올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들은 생각건대, 죽은 스승은 평일 학자들과 말을 할 적에는 의리의 문자에 관한 것이 많았고 조정의 시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후생들 사이에는 혹 죽은 스승의 의논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헌의 말에 이르러서는 사문(師門)의 종지와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론(士論)의 거조에도 해로움이 있었으니, 문생이 된 자로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죽은 스승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지·후생들 몇 명과 각기 듣고 본 바를 참고하여 죽은 스승이 평생 조정에 벼슬하면서 했던 언론과 심적(心跡) 가운데 현저하여 알 수 있는 것을 대강 기술하였습니다. 먼저 죽은 스승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진달하고, 다음에 조헌의 일방적인 말을 설파하여 기어코 세상에 드러내어 밝히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반드시 듣고 싶지 아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소장이 이미 작성되자 다시 수정자(守靜者)의 말에 동요되어 의논이 귀일되지 않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사람은 군사부(君師父) 세 가지에서 생성되었으므로 하나같이 섬겨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금 부모에게 원통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화복과 이해를 헤아리지 않고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수정(守靜)하자는 말에 동요되어 그만둔다면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신들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죽은 스승의 심사(心事)를 기어이 드러내어 밝히고야 말겠다. 그렇게 해야 죽은 스승의 평일의 논의를 신명시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불쌍히 여겨 재결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옛날 동서로 당파가 나뉘어질 적에 조짐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에게서 일어났으나 실지는 전후배(前後輩)의 사이가 서로 좋지 못한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사류(士類)이면서도 의심과 간격이 일어나 참소와 이간이 행해져서 결국 배척이 유발되었으니, 이것이 동서의 당이 처음으로 나뉘어지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당초에는 모두 사류였지만, 심의겸과 김효원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않게 됨에 따라 전후배의 사이가 서로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조정에는 성대한 화기가 있었는데, 두 사람의 친구로서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가 각각 시비를 다투어 서로 합일되지 못하게 된 뒤에야 같은 동아리끼리 상종하면서 서로 번갈아가며 결점을 헐뜯고 사람마다 편견을 고집하여 서로 승부를 다투었습니다. 을해(1575 선조 8년)에는 서인이 요로를 담당하고 을해년 이후에는 동인이 용사(用事)하여 서로 공격하였는데, 계미년에 이르러 괴란(壞亂)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2)
아, 사람이 한 세상을 삶에 있어 사해 안이 모두 형제인데 하물며 같은 나라에 태어나서 같은 조정에서 죽는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 동인이니 서인이니 주창하여 한 나라가 둘로 나누어지고 같은 배에 탄 사람이 적국이 되고 한 집안이 호인(胡人)이나 월인(越人)처럼 남남이 되어, 아래로는 사대부의 뜻을 어지럽게 하고 위로는 명주(明主)에게 근심을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분분하게 전도되어 달이 가고 해도 다하도록 끌고 가서 국가의 일을 일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밀어 넣었으니, 이것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통곡하고 눈물 흘리고 길이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이이는 국외(局外)의 사람으로 국사를 담당한 자의 혼미함을 환하게 보고는 ‘양쪽이 모두 전후배인데 그들의 심사를 다 알 사람은 나만한 사람이 없으니, 내가 화해시키지 아니하면 누가 따르겠는가.’ 하고, 곧 조정에 드러내 놓고 말하기를 ‘서인도 사류이고 동인도 사류이다. 사류가 서로 공격하는데 어느 한쪽을 도와주거나 어느 한쪽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양쪽을 다 옳게 여겨 함께 존립시키고 잘 개유(開諭)하여 화해시켜야 조정이 편안해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하였는데, 전후배가 그 말을 듣고 감히 그르다고 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그 말대로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이가 일찍이 근심하게 된 까닭입니다.
당초 심의겸이 김효원을 윤원형(尹元衡)의 문객(門客)이라 하여 전랑(銓郞)의 천거를 막았는데, 김효원은 또 심의겸을 어리석고 거친 외척이라 하면서 요직에 앉힐 사람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소견에 의거한 것으로 애당초 사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심의겸의 무리들은 김효원이 원한을 갚는 소인이라 하였고, 김효원의 무리는 심의겸을 멋대로 하려는 조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전배인 사류는 후배가 김효원에게 편당을 든다고 의심하고, 후배인 사류는 전배가 심의겸을 두둔한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아, 심의겸·김효원 스스로가 전배와 후배의 사류에게 부종(附從)한 것이지 사류가 심의겸·김효원에게 부종한 것은 아닌데, 이제 이에 편당이 되어 두둔한다는 것으로 서로 의심하니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부터 붕당이 나뉘어 각각 대립하여 언론이 분분해짐에 따라 그 형세가 서로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충성을 다해 나라를 근심하고 공도(公道)를 행하고 사정(私情)을 잊어버리며, 초연하게 우뚝이 서서 동서 붕당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오직 이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온 조정의 백관이 팔짱만 끼고 감히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는데도 이이만은 홀로 그것을 근심하였습니다. 이에 양쪽을 억제할 계책을 내어 ‘난의 조짐은 오직 심의겸·김효원 두 사람이 시비를 다투는 데에서 나올 뿐인데, 이는 국가의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을 외방으로 내어 보내면 쟁투의 단서가 절로 종식되고 국사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의견으로 그때의 우상 노수신(盧守愼)에게 말하였더니, 노수신 또한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에 주상께 계품하여 심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김효원은 부령 부사(富寧府使)에 제수하였습니다.
또 ‘이 두 사람이 대단한 죄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다만 당론을 없애려 한 것일 뿐이다. 지금 심의겸은 좋은 지방을 제수받고 김효원은 나쁜 지방을 제수받았으니, 벌이 고르지 아니하여 불가하다. 뿐만 아니라 김효원은 병이 중한 사람이니, 만일 변방에 갔다가 쓰러져 죽게 되면 성조(聖朝)에서 신하를 몸처럼 아낀다는 뜻에도 어긋난다.’ 하고는, 곧 이 의견으로 독계(獨啓)하여 그를 구제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서인만이 이이가 김효원에게 사정을 둔다고 의심할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또한 김효원에게 편당든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서인의 친구들도 그 사이에 의심을 두지 않는 이가 없어, 뜬 의논이 왁자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 이이가 어찌 김효원에게 사정을 둘 사람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쫓겨난 뒤에 동인의 형세는 조금 꺾였고 서인의 지론(持論)은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윤현(尹晛)은 들뜨고 경박하여 김효원의 무리를 배척하는데 편중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이때 정철(鄭澈)이 호남에 있으면서 뜬 소문에 자못 의혹되어, 이이가 김효원을 사적으로 두둔한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이이가 파주에 있으면서 정철에게 글을 보내어 깨우쳐 주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부터 나의 소견이 형의 뜻에 맞지 않았으니 진실로 구차히 같이하기는 어렵다. 다만 형과 나 사이에는 마땅히 말을 다하여 서로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데, 조금도 가르쳐주는 말이 없으니 유감이 없지 않다. 형이 다른 벗에게 보낸 서찰을 보게 되어서는, 거기에 곡절을 갖추어 다 써서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였으니, 이는 불설지교(不屑之敎 : 상대에게 무자극의 자극을 줌으로써 스스로 깨닫게 하는 가르침)로서 후의를 받음이 깊다. 시비를 변명하고 싶지는 않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있기가 어려우므로, 일의 수말(首末)을 진술하겠다.
김효원은 인물이 본디 행동이 가볍고 심지가 얕은 사람이다. 그러나 논의가 강개(慷慨)하고 일을 당하면 강직하고 과감하였으니 당초 어찌 나만이 취할 만한 사람으로 여겼겠는가. 형도 버리지 않았다. 지난 여름·가을 이래로 형의 소견이 전과 아주 달라져서 걱정스러운 사람으로 여긴다 하기에 내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형의 말이 확고해졌다는 말을 듣고는 점차 의심을 두게 되었는데, 좌상(左相)을 추고(推考)하고 중회(重晦)를 내치기를 청한 뒤에야 나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살펴보니 그들 동배(同輩)는 성대하게 서로 부추기고 추천하여 권세의 기염이 있기에 이르렀다. 내 생각으로는, 만일 그 예봉을 조금이나마 꺾지 않으면 반드시 뒤 폐단이 있을 것이고 장차 붕당의 근심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보낼 계책을 하고서 우상(右相)에게 통지하였다. 그 뒤에 또 경연 석상에서 드러내놓고 아뢰면 도리어 분란이 일게 될까 염려하여 두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려 하였으니, 그 계책은 그들의 예봉을 꺾어 누그러뜨리고 진정시키려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의사를 미처 다시 우상에게 통지하기 전에 마침 간원이 계사를 올려 이조의 직에서 갈렸는데, 좌상이 도리어 심의겸의 세력이 편중된 것을 의심하여 경석에서 갑자기 아뢰었다. 김효원이 부령 부사에 임명된 뒤로 저 연소한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고, 공심(公心)으로 중립하던 사람도 또한 그 과중함을 근심하였다. 그러나 평일 김효원과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은 떼지어 일어나 통쾌하다고 하였으므로 논의가 왁자하게 시끄러워져서 그치지 않았다. 내 의견으로는, 김효원은 병이 중하니 만일 변경에서 쓰러져 죽게 된다면 도리어 사류(士類)가 불안하게 여길 것으로 생각되었으므로 내지(內地)로 옮기자고 계달하였다. 일의 시종은 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흔들리어 안정하지 못하여 잠시 버렸다가 잠시 취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이 사람에 대해 형은 형편없는 소인으로 반드시 국가를 혼란케 하고 사류를 도륙하는데 이를 것이라 하지만 나는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만일 공론이 동조하면 기세를 얻어 능히 그 뜻을 행할 것이지만 만일 공론이 허여하지 않으면 반드시 옆길이나 지름길로 무리하게 들어가기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요직에 앉으면 일을 그르칠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부림을 받으면 그 재능이 또한 취할 만한 것이 있다. 따라서 지금은 그 기세를 줄이는 것은 가하지만, 너무 심하게 미워하여 심각하게 다그치다 보면 반드시 사류의 불안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내 의견이 이러하였으므로 마침내 형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형으로 하여금 나를 위하지 못하게 한 것이 또한 형이 나로 하여금 형을 위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다.
바야흐로 오늘날 김효원이 세력을 잃고 있어서 깊이 근심할 것이 없는데 형은 매양 후일의 재앙을 염려하니, 이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의 인품이 일체 형의 말처럼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아서 후일 다시 요로에 올라 눈 한번 흘긴 작은 원한도 반드시 갚아 사림을 참벌(斬伐)한다면 형은 선견지명이 있는 것으로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들어가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니 그 죽음이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간신을 두둔한 악명을 백세도록 씻지 못할 것이니 구차히 사는 것이 욕스러우리라. 후일의 근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요 형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형이 근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저들이 전성할 때에는 제배(儕輩)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한 마디 말이라도 새어 나가면 곧 큰 재앙을 당할까 두려워하더니, 외방으로 나간 뒤에는 또 범을 동여매듯이 하고자 하여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심각하게 공격하려고만 하는가 하면 또 장차 가까운 자리에까지 파급시켜 인심이 흉흉해지게 하고 있는데, 모두 형의 힘을 빌어 중함으로 삼고 있다. 나는 아마도 계속 이렇게 할 경우 일을 그르치는 책임이 형에게 있게 되고 나에게 있게 되지는 않을 듯하다. 형이 만일 이 세상을 잊지 않는다면 마땅히 병을 참고 올라와서 시세를 살피고 적의함을 헤아려서 사림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한데, 어찌하여 날마다 분노하면서 불평스런 기운을 쌓고 떠도는 말을 가벼이 믿고서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을 의심한단 말인가!’
여기서 말한 좌상은 박순(朴淳)이고 우상은 노수신(盧守愼)을 가리키며 중회(重晦)는 김계휘(金繼輝)의 자(字)입니다.
또 글을 보내어 논쟁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이미 세상을 담당할 희망이 없고 형도 조정에 돌아올 의향이 없으니, 동이(同異)의 소견은 버려두고 논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형과 나의 사이에 서로 다 이해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옛 사람이 서로 친애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다시 한 마디 말을 한다.
형이 나를 의심하는 것은 진실로 옳다. 다만 나는 애초에 김모(金某 : 김효원을 지칭함)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랐다가 형의 말을 인하여 살펴본 것에 불과하다. 형은 그를 가리켜 대간(大奸)이라 하나 나는 그를 의심할 뿐이다. 형의 말을 미루어서 살펴보건대 형적에 의심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나 실로 적확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기염이 성대할 때에 내가 과연 예봉을 꺾을 계획을 시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한 번 꺾이게 된 뒤에는 평일 불쾌하게 여기던 사람이 떼지어 일어나서 심각하게 공격함에 따라 김효원과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고 기가 죽어서 모두 움츠리고 물러갈 마음을 품었다. 일개 김효원이야 애석해 할 것이 못되지만 사림은 위로하지 아니할 수 없다. 때문에 내가 조제(調劑)하여 중도에 입각하여 사류를 안정시키려 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전후 다름이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가령 김효원의 권세가 성대하여 장차 폐단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렀다면 내가 마땅히 독계(獨啓)하여 배척해야 할 것이고, 김효원이 죄를 진 것이 과중하여 사림이 평안하지 못하다면 내가 마땅히 독계하여 구원해야 할 것이니, 권세를 누르고 위태로움을 구원하는 것은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사론(士論)이 한 곳에서 나와 거의 무사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자중지란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김효원의 허물이다. 김효원이 이미 외직으로 나갔으니 고요히 안정되어 무사할 수 있는데 또다시 어지럽게 말을 만들어내어 하는 일마다 서로 의심하여 마침내 조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김효원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사람들의 소견이란 지나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기가 일쑤이니 어찌하겠는가. 만일 주동(主東)이니 주서(主西)니 하는 설이 없으면 사론이 정해질 것이다. 나는 동서를 깨뜨려서 하나로 만들려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한다. 가령 내가 동을 주장하기도 하고 서를 주장하기도 한다면 어찌 양쪽이 모두 불쾌하게 여기기에 이르겠는가.’
이때에 정철이 자못 떠도는 말에 의혹되어 처음에는 이이가 동인을 사적으로 두둔한다고 의심하였는데, 이이의 서찰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의심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심의겸의 제배들은 이이를 의심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만일 그 뒤에 다시 이이의 심사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서인이 이이를 치는 것이 반드시 오늘날 동인의 소위에 못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축(1577 선조 10)년 무렵에 이르러 서인의 세력이 조금 꺾였는데, 이발(李潑)·김성일(金誠一)이 경석의 계사를 인하여 이수(李銖) 등이 뇌물을 주고받은 데 대한 옥사를 일으켜 철저히 추문(推問)하였으나 끝내 지적할 만한 실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발 등은 오히려 옥사가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유생 정여충(鄭汝忠)을 형신(刑訊)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발 등의 소위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심을 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발 등의 생각도, 삼윤(三尹)이 일을 그르친 죄3)를 곧바로 탄핵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하면 선배 사류 중에 반드시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위에서도 모함하는 것인가 의심할까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옥사를 인하어 삼윤을 쳐서 제거하려 한 것입니다. 그 거조가 실로 사군자(士君子)의 광명정대한 처사가 아니었으니 인심이 열복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이만 그르게 여겼을 뿐 아니라 김우옹(金宇顒)도 그르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서인이 여지없이 패하고 동인이 바야흐로 승리하여, 동인이 옳고 서인은 그르다[東是西非]는 것으로 국시(國是)를 정하자, 들떠 조급하고 진출하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앞다투어 부회하였습니다. 그때 심의겸의 집에 출입하며 아침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면서 종처럼 알랑거리던 무리들이 그들에게 항복하여 몰래 들어간 자가 상당히 많았으나 동인의 주론자(主論者)는 오직 자기에게 붙는 것만 기뻐할 줄 알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미워할 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현우(賢愚)와 재능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아니하고 일체 청관(淸官)과 미직(美職)으로 처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예로부터 조정 사대부로서 명사(名士)가 된 이는 덕행(德行)이나 재화(才華)로 명사가 되었지 실지가 없으면서도 그 이름을 얻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인물이 어떠한가는 따지지 아니하고 백이(伯夷)든 도척(盜蹠)이든 입으로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東是西非]’는 네 글자만 말하는 자면 명사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시세를 타고 이익을 노리는 시정인(市井人)들의 행위를 하게 되었으므로 기고만장하게 날뛰어 다시 예의염치라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의논에 조금만 뇌동하지 않는 자에 이르러서는 숙덕(宿德)과 신신(藎臣)4)이나 염공(廉公)하고 청근(淸謹)한 인사가 있더라도 모두 배척하여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게 합니다. 시론의 괴란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벼슬길이 어찌 혼탁하지 않겠으며 국가가 어찌 무너지지 않겠습니다. 이러니 이이가 시론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어찌 잘못이겠습니까.
기묘(1579 선조 12)년 무렵에 이르러 시론이 날로 심각 준엄해져서 시비(是非)의 설이 또 변하여 사정(邪正)으로 되기에 이르러서는 인심이 놀라 분란되고 사론이 크게 무너져 그 형세가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에 이이가 해주에 있으면서 크게 근심스러운 일로 여겨 소장을 올려 논척(論斥)하고 나서 또 이발에게 글을 보내어 책망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시론이 날로 준엄해져서 다시 화평할 희망이 없다. 생각건대 이 논의는 반드시 그대의 의사가 아닐 것이라 여겼으므로 내 상소문에 이른바 깊은 생각, 원대한 식견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대들 2∼3인을 가리킨 것이다. 지금 그대의 의견도 과격한 논의와 서로 격하게 어울리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여긴 것이다.’ 하였고, 또 ‘의루(倚樓)가 논핵을 받은 것은 참으로 공론에 의한 것이었으나 방관하는 자는 오히려 조제(調劑)에 해로움이 있다고 의심하였다. 삼윤(三尹)의 탄핵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어서는 인심이 비로소 열복하지 아니하여 현저히 모함하는 것으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다만 연소한 사류가 서로 추종하면서 스스로 하나의 논의를 이루긴 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고 움츠러들어 감히 지척하여 말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류가 인심이 열복하지 않는 것을 모르고 스르로 공론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내 생각은 이에 그칠 뿐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또 까닭없이 심의겸은 소인이고 서인은 사당(邪黨)이라고 현저히 지척하게 되어서는, 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해졌으니 참으로 사람을 잡는 수단이다.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심의겸은 애석히 여길 것이 없더라도 서인이 모두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겠는가. 이것이 과연 그대들의 본의인가. 만일 본의였다면 나의 강론한 것은 모두 면종(面從)한 것이니, 미안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이른바 의루(倚樓)란 조원(趙瑗)입니다.
또 ‘후손에게 넉넉함을 전해준다[裕後]고 운운한 말은 다만 심의겸이 권세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지, 그를 금고(禁錮)하여 서용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니, 상소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내 상소는 사류를 보전하고 조정을 편안히 하려 하였을 뿐이고 본래 소요스럽게 하려는 계책이 아니었는데, 일방적인 의견을 가진 자들이 자기를 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스스로 소요스러운 일을 만들어냈으니 나 또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꾸짖는 데에는 밝고 비록 총명이 있으나 자기를 헤아림에는 어두운 것이다. 연전에 계함(季涵 : 정철의 字)이 서인을 주장하는 의견을 편벽되이 고집하여 도리어 나를 의심하였는데, 나와 그대가 좋은 말로 입이 닳도록 타일러 힘껏 만회하였다. 이때 그대가 계함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여겼는가. 오늘날 그대가 동인을 주장하는 것도 또한 계함이 서인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찌하여 계함을 꾸짖던 것으로써 스스로를 꾸짖지 아니하는가. 을해(1575 선조 8)년 서인의 과실은 거조가 온당함을 잃은 데에 있었는데, 오늘날 시배(時輩)의 거조가 과연 을해년보다 나은 것인가. 서인을 사당(邪黨)이라고 다 지척하는 것이 을해년에 공저(公著 : 李誠中의 자) 하나만을 논핵한 것과 견주어 어떠한가. 서인의 현자(賢者)는 모두 청관(淸官)에 의망(擬望)하지 않는 것이 을해년에 중숙(重淑 : 金應南의 자)만을 전랑(銓郞)에 승천(陞薦)시키지 않은 것과 견주어 어떠한가. 을해년에 의루(倚樓)가 상을 받은 것은 참으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시세에 빌붙어서 팔을 내두르고 큰소리치며 스스로 득지(得志)함을 밝히는 자가 또 몇 사람의 의루인지 모르지 않는가. 인심이 의구하고 유식한 자가 우탄(憂歎)하는 것이 을해년보다 심한데 바야흐로 시끄럽게 사람을 향해 쟁변하기를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 하니, 이 말은 다만 동류들 가운데 진취(進取)를 추구하는 자들만 믿을 뿐 다른 사람이야 누가 믿겠는가.
만일 오늘날의 처사가 중도에 맞는다면 누가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고 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미 그 잘못을 본받고서 또 스스로 옳다 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무턱대고 행동하고 시행이 전도되어도 군자가 되는 데에 상관이 없단 말인가. 오늘날 선비를 뽑음에 있어 인물의 본품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 다만 논의의 이동(異同)으로 취사(取捨)를 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논의가 백출하여 괴귀(恠鬼)가 난무하고 있다. 저들이 어찌 의루가 상을 받는 것을 보고 이것이 좋은 벼슬을 취득하려는 것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경함(景涵 : 이발의 자)은 고금의 사적을 두루 보았으니, 어찌 군자가 뜻을 얻고 청론이 바야흐로 행해지는데도 국사를 무너뜨리고 농락함이 오늘날과 같은 경우가 있었는가. 조정의 사대부가 식견이 분명하지 못하여 어진 사람이 있어도 일을 완성시킬 수가 없다. 허노재(許魯齋)가 「인자예양(仁慈禮讓)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하고서도 나라를 망치고 집을 무너뜨린다는 경우가 이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지나친 말이라고 여겼더니 지금 비로소 징험이 된다. 옛 사람의 말은 가벼이 여길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계함은 정철의 자입니다.
또 ‘화평과 배척을 아울러 행할 수 없는 것은 웃음과 울음을 아울러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내 논의는 화평을 주로 삼았고 헌부의 상소는 배척을 주로 삼았으니, 이것이 옳으면 저것이 그르다. 지금 그대들의 소견은 이미 배척을 공론으로 삼으면서 또 화평하고자 하니, 진퇴에 근거할 바가 없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만일 흉중이 명백하고 맑다면 이런 분명치 못한 식견과 의논이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만일 화평하게 한다면 심의겸과 김효원의 구구한 논변이 어떻게 하면 크게 상관될 것이 있겠는가. 내버려두고 묻지 말고서 다만 그 우열에 따라 취사하면 된다. 배척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 죄를 분명하게 바루어야 할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입으로는 화평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배척을 주장한단 말인가. 이는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면서 그와 서로 좋게 지내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어찌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아서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끝내 선후책(善後策)이 없다. 이는 실로 하늘이 하는 일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함(景涵)은 평일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어떠한 사업을 하려 하였는가. 그런데 오늘날 조정에 벼슬하면서 기관(機關)을 다 동원하여 동인을 부호하고 서인을 억제하는 일만을 성취할 뿐이란 말인가. 유자(儒者)가 도를 행함이 과연 이것뿐이란 말인가. 오늘날 만일 죽음 속에서 삶을 구하려 한다면 마땅히 논의를 정립하기를 「심의겸에게 드러난 허물은 없으나 이미 외척이고 또 사류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이는 마땅히 작록만 보존시킬 뿐 다시 요지에 두어서는 안 된다. 삼윤(三尹)은 스스로 부정(不靖)한 일을 일으켜 사류에게 크게 거스름을 받았으니 이들 또한 다시 청선(淸選)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 서인들은 재능에 따라 벼슬을 주고 조금도 시기하거나 저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동인으로서 의논이 과격한 사람은 제재하여 억누르고 때를 타고 부회하는 자는 물리쳐서 소외시켜야 한다. 이처럼 마음가짐이 공명(公明)하여 세월이 오래되면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일을 해나갈 사람이 없을까 염려될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그대와 이현(而見 : 유성룡의 자)으로 말하면 처사가 중도를 잃어 이미 범과 무소가 우리를 뛰어나가게 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모쪼록 이현을 힘써 만류하여 시사(時事)를 수습하는 한편 우리들로 하여금 재[嶺]를 넘어 귀양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도 또한 한 방도이다. 다만 시론(時論)이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대들도 장차 제사지낸 뒤의 추구(芻狗)5)가 되어 스스로 입각(立脚)할 수 없게 될까 염려된다. 아, 괴롭기 그지없다. 우리가 다투는 것은 의리일 뿐이다. 나는 실로 일호도 사정에 치우치고 화를 낼 마음이 없다. 다만 내 천성이 이완(弛緩)된 것은 무심(無心)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나 사리가 바르면 가령 철륜(鐵輪)이 머리 위에 구르더라도 조금도 꺾이지 않는데, 하물며 온 세상이 더럽게 헐뜯는 것이 어찌 나를 일호인들 동요시킬 수 있겠는가. 사리가 바르지 못하면 삼척동자가 머리에 진흙칠을 하고 가시를 지게 하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겨 사양하지 않겠다. 그대는 모쪼록 숙부(肅夫)와 더불어 사리에 의거 상량하여 잘못된 것을 지시해 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환하게 스스로 깨닫게 해주기 바란다. 사리가 바르지 못하면 내가 소견을 곧 고치겠거니와, 만일 내 소견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면 또한 돌이켜 생각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발·유성룡·김우옹의 무리들이 모두 죽음 속에서 살기를 구하라[死中求生]는 말을 불변의 정론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김우옹이 이이에게 답한 서찰에서 또한 ‘이 논의가 매우 좋다. 내 의견도 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여긴다. 내 의견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경함(景涵)과 이현(而見)의 의견도 그러하니, 어찌 큰소리로 배척하는 자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다만 중론에 격렬한 것이 많고 벗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러할 뿐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서로 잇따라 상량하여 선후책을 도모하는 것이 매우 다행한 일이겠다.’ 하였습니다.
또 ‘당초 심의겸과 김효원이 흔단을 맺은 데 대한 시비는 본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 사이에 어찌 진짜 시비가 없겠는가. 을해년 서인이 괴패(壞敗)된 짓을 한 것에 이르러서는 시비가 어찌 분명하지 않은가. 다만 지금 동인이 격분으로 인하여 노기가 가중되어 지적하여 비의(比擬)함이 과당하였던 탓으로 사류가 분열하여 수습할 수 없게 된 데 이르러서는 또 스스로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시비가 있기는 하였으나 사정(邪正)과 흑백의 다름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고 다만 화평해야 할 뿐이다. 지금은 단지 삼윤(三尹)을 그르다고 해야 할 것이고 그 나머지 서인을 아울러 연루시켜 그르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계함(季涵)·중회(重晦 : 金繼輝의 자) 같은 사람을 청반(淸班)에 의망(擬望)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온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스스로 과실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동인의 과실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 끝내 배척하고 쓰지 않으려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심의겸을 지척하여 소인이라 하고 서인을 지척하여 사당(邪黨)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과연 잘못되었다. 또 보내온 사연에 「오늘날 선비를 취함에 있어 인물의 본품은 묻지 않고 다만 의논의 동이(同異)로써 취사(取捨)하므로 괴귀(怪鬼)가 난무한다…….」 하였는데, 이야말로 그와 같다. 나도 금일의 사세를 보건대, 장차 인심이 불평하게 되어 패증(敗證)이 백출하고 있으므로 매양 동배(同輩)를 위해 힘써 말하였으나 다만 붕우 사이에 또한 역량과 규모가 세도(世道)의 책임을 담당할 수 있는 자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자 견해를 달리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니 마침내는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또 ‘귀하의 상소에 「외척은 반드시 재앙의 실마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니 중용(重用)해서는 안 된다.」 한 것은 또한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전일 상소의 뜻을 자세히 보지 못하여 심의겸을 위해 변명하는 병통이 있지 않은가 여겼었는데 지금 보여 준 뜻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전일의 망령된 논의가 매우 부끄럽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계함(季涵)은 정철의 자(字)이고 중회(重晦)는 김계휘(金繼輝)의 자입니다. 김우옹의 견해가 이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발이 이이에게 답한 서찰에도 ‘이 논의가 매우 좋다. 이야말로 오늘날의 사세에 매우 마땅하게 맞는 말이다. 내 의견은 본래 이와 같았다. 내 의견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숙부(肅夫)의 의견도 이와 같았다. 고명(高明)은 평일 제배(儕輩)들의 소견이 이와 같다고 여기지 않았는가. 제배들이 당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았다. 다만 그 상소의 중간에 「피차(彼此)의 사류(士類)가 심히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뜻밖의 근심거리를 야기시키므로 바야흐로 힘을 다해 조호(調護)하고 있지만 힘이 부족할 뿐이다.」 하였다. 존좌(尊座)는 먼 지방에 있으면서 오직 의심할 만한 형적에만 의거하고 오직 놀랄 만한 말만을 듣고 오직 물이 배어 들어가듯 헐뜯는 참소만 받았을 뿐이었으니 어떻게 제배들의 심사를 다 알 수 있겠는가. 고명의 덕의(德義)는 곧 내가 평생에 경신(敬信)하는 바로 믿고 의지하려 하였는데, 지금 서로 알아줌을 받지 못하고 이처럼 사이가 소원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대개 서인의 인품을 논하자면 취사(取捨)할 바가 없지는 않으나, 지금 현우(賢愚)를 묻지 않고 일체로 그르게 여긴다면 진실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물의가 있는 자는 우선 공론의 허락을 기다리고 그 나머지 제공(諸公)들은 실로 의심할 것이 없다.’ 하고, 또 ‘서인 쪽 사류를 혹 삼사(三司)에 의망(擬望)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던 것은 그에게 실로 잘못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막고 틔어주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고 진실로 장차 주선하여 수습하려 했던 것인데 영원히 버리고 쓰지 않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습니다. 또 ‘심의겸을 지목하여 소인이라 하고 서인을 지목하여 사당(邪黨)이라 한 이것이 과연 내 소견이겠는가. 내 의견으로는 심의겸·김효원은 시비(是非)가 없지는 않으나 심의겸 또한 대단한 죄를 얻은 일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다만 시비를 가지고 말하였을 뿐이고 갑자기 현저한 배척을 가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의겸을 대우함이 이러하다면 그밖의 사류를 수습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또 ‘시비를 가지고 말하였으나 그밖의 사류는 절로 관여된 바가 없다. 또 그르게 여기는 자도 일개 심의겸일 뿐이고 또한 너무 심하게 공격하는 논의도 없었다.’ 하였습니다.
또 ‘정희적(鄭熙績)이 흐리멍덩하고 무식하여 소요를 일으켜 심의겸을 소인이라 하기에 이르렀고, 또 재앙을 꾸민다느니 사설(邪說)이라느니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제배들은 참여해 안 자가 없었다.’ 하고, 또 ‘의루(倚樓 : 趙瑗의 호)가 상을 받은 것은 진실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였지만 지금 시세에 따라 부화하는 자도 많이 있었으니 이 또한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배의 죄이겠는가.’ 하고, 또 ‘천하의 일이 여의치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만일 제군(諸君)이 우리 제배 몇 사람의 소견에 의해 일을 하였다면, 거의 중도에 맞게 처리하여 다시 오늘날 존공(尊公)의 의심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을해년 무렵에 존공이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감을 직접 보고서도 한 번 손을 들어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몸을 거두어 떠나갔을 뿐이니, 존공의 덕망과 역량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내가 한 세상 사람을 거느리고서 모두 내 의사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심의겸을 중용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를 금고(禁錮)시켜 서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고 운운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혼망하여 잘못 상소의 뜻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이다. 어구(語句)를 만듦에 있어 어긋남이 이와 같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공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또한 쇠세(衰世)의 염려이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이현(而見)이란 유성룡의 자이고 숙부(肅夫)란 김우옹(金宇顒)의 자이고 경함(景涵)이란 이발(李潑)의 자입니다. 이 무리들이 논한 바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희적이 사헌부의 상소를 지으면서 심의겸을 지목하여 처음으로 소인이라고 하고 서인을 지목하여 처음으로 사당(邪黨)이라 하였을 때, 이발·김우옹 등이 옥당에 있으면서 사헌부의 상소가 과당하다 하여 차자로 논박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들뜨고 조급한 자를 억제하고 사류를 보합하여 함께 국사를 하고자 한 것은 실로 사류 공공(公共)의 논의요 실로 한 사람의 사견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발 등이 이이의 말이 옳은 줄을 알았으나 본래 편파적인 소견으로 뭇사람이 지껄이는 가운데 시달림을 받아서 머리를 내밀었다 감추었다 하면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이의 말을 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이가 서인을 사적으로 두호하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이이가 또 이발에게 서한을 보내어 깨우쳐 주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의 의논은 그 마음을 의논하는 것이고 나의 논의는 그 형적(形迹)을 논하는 것이다. 사람을 관찰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마음으로 해야 하고 상벌은 마땅히 형적으로 해야 한다. 만일 그 형적을 논하지 않고 마음으로 상벌을 내리면 인심을 열복시킬 수 없다. 이것이 요(堯) 임금이 사흉(四兇)을 죽이지 아니한 이유6)이다.
지금 심의겸의 마음을 형이 깊이 간파하였으며 나도 감히 그 근심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 버린들 뭐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다만 형적에 현저한 죄과가 없는데도 갑자기 공격을 가하고 서인 쪽의 선사(善士)를 연루시켜 아낌없이 버린다면 추존하여 권력을 잡은 사람이 모두 유속(流俗)의 비루한 사람들로 대다수가 심의겸 쪽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거조가 이와 같을 경우 인심이 어찌 열복하겠으며 나라의 언론이 어찌 정해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는 이유이다. 심의겸·김효원 두 사람의 시비에 대한 논변은 치란(治亂)에 관계가 없는데 도리어 시비에 대한 논변 때문에 인재를 파괴하고 국맥(國脈)을 손상하되 온 세상이 도도하여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아이들의 소견이다.
을해년 사이에 서인이 팔을 내두르면서 「시비는 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내가 매우 가소롭게 여기기만 하고 놀라며 탄식하기에 이르지 아니한 것은, 서인에 착한 선비가 있기는 하나 학문하는 선비가 아니니 깊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되었던 것이며, 또 사암(思庵)·중회(重晦) 같은 무리도 모두 나와 같이 넌지시 비웃었으므로 놀라고 탄식하기에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해 시비의 논변에 대해서는 학식이 현형(賢兄)과 같은 자도 눈을 부릅뜨고 기염을 토하면서 기필코 논변하고자 하였으니 내가 실망하였다. 어찌 깊이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의견으로는 심·김 두 사람에게 시비가 있기는 하나 그 논변은 국가에 관계되지 않는 것인데도 논변하여 도리어 소요스럽게 하였으니, 논변하지 말고 사류를 조제(調劑)하여 악을 물리치고 선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되느니만 못하였다고 여긴다. 그런데 지금은 묽게 검은 것은 논변하여 제거하고 몹시 검은 것은 취하여 쓰니 이는 어떠한 의리이며 식견인가.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공자(孔子)를 쓰고자 할 적에 안평중(晏平仲)이 이를 말렸지만7) 이는 안평중이 성인을 미워한 것이 아니다. 그저 소견이 밝지 못하였던 것이다. 평중은 성인을 몰라보았는데도 오히려 현대부(賢大夫)의 이름을 잃지 않았으니, 오늘날 인백(仁伯 : 김효온의 자)을 모르는 자를 어찌 반드시 모두 버려야 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유속(流俗)의 연로한 재상이 전일에는 서인에게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오늘날 뜻을 얻고나서는 바야흐로 동인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하니, 조제를 그르게 여기는 것이 이치나 형세로 보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변하기 쉬운 자들이니, 때가 바뀌고 세력이 떠나가면 또 동인을 배척하게 될 텐데 믿을 만한 것이 뭐가 있는가. 또 각립(角立)에 관한 말은, 형은 내가 심의겸·삼윤(三尹)과 함께 사림을 해치는 것으로 의심하니 형이 나를 보는 것이 너무 박한 것이나 아닌가. 내가 전부터 고립하여 서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또 동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은 진실로 양쪽을 조화하여 조정을 편안하게 하려 한 때문인 것이다. 만일 서인에게 붙어서 동인을 공격하게 한다면 차라리 동인에게 붙어서 서인을 공격할 것이다. 후일 심의겸·삼윤에게 편당하여 맑은 명성을 잃고 좋은 벼슬을 얻기보다는 오늘날 현형(賢兄)에게 붙어서 맑은 명성과 좋은 벼슬 두 가지를 함께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른바 사암(思庵)은 박순(朴淳)의 별호이고 인백(仁伯)은 김효원(金孝元)의 자(字)입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형은 내가 형에게만 권면하고 서인은 경계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지만 내가 형에게 고한 말을 서인이 듣지 못하였으니, 서인을 경계한 말을 형이 어찌 들을 수 있는가.
대체로 남의 싸움을 말리는 데에는 이길 자를 말려야 한다. 이기지 못할 자는 바야흐로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하는 법이니 어찌 듣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을해년에 서인이 조금 이겼고 동인이 조금 패하였으므로 그때에 나는 그저 서인을 향해 쟁변하였으니 어찌 동인을 권면하는 말이 있었겠는가. 지금은 서인이 여지없이 패하고 동인이 바야흐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어찌 동인을 향해 쟁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인도 잘못 헤아린 것이 많으므로 수시로 경계하여 일러주었더니, 믿고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모(沈某 : 심의겸) 까지도 「사류가 만일 나와 삼윤(三尹)을 배척하고 그 나머지 서인 쪽 선류(善類)를 모두 구애없이 통용(通用)하면 인심이 반드시 열복할 것이다.」 하였다. 심의겸의 말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의 말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오늘날 조제의 책임은 동인에게 있다. 후일에 번복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또한 어찌 미리 헤아릴 수 있겠는가. 대저 군자의 도리는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번복할 것을 미리 헤아려서 먼저 거조를 잘못하는 것은 이미 옳지 않다. 사변은 무궁한 것이니 계손(季孫)의 근심이 전유(顓臾)에 있지 않고 담 안에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8).’
이이의 이 서간의 말은 분명하고도 통쾌하여, 어리석은 남녀들이라도 공을 위하고 사를 잊은 채 일심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칠 충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발 등이 기뻐하면서도 계속 잘하려고 하지 않고 허물 고치기를 꺼렸으니, 어찌 사의(私意)에 굳게 가려진 것이 극심한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이가 동·서를 타파하자는 논의를 주창한 뒤로부터 신진으로서 부회하는 무리들은 기탄함이 더욱 심하였으나 틈을 타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계미(1583 선조 16)년 사이에 이이가 시배의 과격한 잘못을 극력 진달하여 ‘바라건대, 전하는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널리 불러 탑전에서 면대하여 성상의 뜻을 밝게 효유함으로써 동·서를 분변하는 버릇을 고치고, 선한 사람은 등용하고 나쁜 사람은 벌주는 것을 일체 공도(公道)를 따르고, 융화시켜 탕평책을 써서 진정하고 조화하게 하소서. 만일 미혹됨을 고집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억제하고 사정을 품고 억지로 논변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배척하여, 반드시 모두가 같이 인정하는 대로 공적으로 옳은 것과 공적으로 그른 것을 한때의 공론이 되게 하면 사림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시배가 이이를 축출하려고 모의한 것이 이 소장에서 처음 싹텄습니다. 그러나 이 소장의 말은 곧 전일 동인을 깨우쳐 주던 말로서, 이발의 무리가 지당한 논의라고 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발의 무리들이 전일에는 노하지 않다가 오늘날에 와서 노하는 것은 주상께서 바야흐로 이이를 의지하고 있으므로 그 말이 드디어 행해져서 자기들이 그의 억제를 받을까 심히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전일에 이른바 지당하다고 한 것도 또한 겉으로 복종한 체한 말이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것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붕우간에 성실히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아, 가령 서인이 주장하는 논의가 또 편중되어 모든 동인을 사당(邪黨)으로 배척한다면, 이이가 부지시키는 것이 서인에게 있지 아니하고 반드시 동인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이의 본심입니다. 을해년에 김효원의 제배를 구원한 한 가지 일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전후의 형적은 같지 않지만 피차가 없이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해명한 것입니다.
아, 처음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보낼 계책을 세워 당론을 없애려 한 사람도 이이이고 을해년에 서인에게 거스름을 당한 사람도 이이이고 을해년 이후 동인에게 배척을 당한 사람도 이이입니다. 이 어찌 온 조정에 한 사람도 공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사류가 산산이 무너지고 나라 일이 날로 글러지기 때문에, 자신이 그 책임을 담당하고 나서서 힘껏 쟁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자신을 위해 계교한 것이겠습니까. 곧 사류를 위한 계책이요 국가를 위한 계책입니다.
가령 이이가 때로는 동인을 주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인을 주장하기도 하여 시론(時論)에 거스름이 없었다면, 이이는 한쪽 사람이 되는 데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국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쪽 사람이 되는 것이 어찌 이이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이이가 전부터 고립하여 서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동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한 까닭이니, 어찌 시론에 이견을 세우기를 좋아한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조그마한 한 나라에 인재가 적은데, 다시 피차를 구분하여 한쪽을 버리고 한쪽만을 취한다면 현인을 막고 인재를 버리게 되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 동서의 당파가 나뉜 뒤로부터 사람마다 각기 사심을 품어 자기편 사람은 편들고 반대편 사람은 공격하여, 조정에 공론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 추천하여 끌어들이는 것은 서인 가운데 재행(才行)이 있는 사람이고 동인은 엄폐시켜 버리며, 헐뜯고 비방하는 것은 동인의 허물과 악행이고 서인에 대해서는 숨겨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동인이 뜻을 얻게 되어서는 역시 서인을 본받았는데 그보다 또 더 심했습니다. 이러므로 공론이 항상 아래에서 답답하여도 위에 진달할 길이 없고, 조정의 진퇴용사(進退用捨)와 상벌출척(賞罰黜陟)을 일체 동·서인이 하는 대로 맡긴 채 위에서는 그 사이에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10여 년 이래로 동서의 당이 이미 이루어져서 배반하고 나가는 자는 종 취급하고 들어오는 자는 주인 대접을 하였으므로 구신(具臣 : 수효만 채운 쓸모없는 신하)이 자리만 채우고 앉아서 서로 도와 잘못을 숨겨주었습니다. 따라서 간혹 근후하고 선량한 사람이 있어도 나라를 집처럼 걱정하고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면서 입장(立仗) 아래에서 한 번 우는 자9)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고 그저 묵묵히 시속에 따라 부침(浮沈)하면서 녹이나 탐하고 몸을 보전하여 해마다 승진 제수되어 경상(卿相)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었습니다. 아, 이이 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군신의 의리가 거의 폐기될 뻔하였으며, 일국의 공론을 위에서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이이가 죽은 뒤에도 감히 이런 말로써 전하의 옆에서 아뢰는 자가 없게 된 까닭입니다.
아, 기묘(1579 선조12)년 소장을 올린 뒤로 동인이라 이름하는 사람들은 이이가 자기들을 모함하는 것이라 하여 더욱 힘껏 공격하였고, 서인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또한 이이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라 하여 더욱 깊이 추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모두 이이의 본심을 모른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만일 동인이 이이의 본심을 깊이 알아 이이의 이 소장을 인하여 처사가 중도를 얻어 공론에 부응되었다면 명절(名節)이 보전될 수 있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사의 궤열(潰裂)도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겠습니까. 그 중에는 사군자(士君子)의 의사를 지닌 자가 한두 명쯤 없지 않았으나 멀리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없어 편견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과격함을 억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숭상 조장하여 계미년의 분쟁을 일으켰으니, 이에 이르러 동인이 국사를 허물어뜨리고 농락한 것이 도리어 을해년 서인의 소행보다 심함이 있었습니다. 그때 삼사의 사람 가운데 권덕여(權德輿)와 같이 나약하여 위협에 따른 사람이 한둘쯤 없지는 않았으나, 그 나머지는 대다수가 때를 타고 시기하는 무리들로 본래 이른바 사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우옹의 소장에 ‘들뜨고 조급한 자들을 억제하여 사류를 보전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였고, 이발이 피혐하는 계사에서도 이 무리들을 사류라 하지 않았으니, 공론은 엄폐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이 당초에 어찌 갑자기 이러한 거조를 하려 하였겠습니까. 다만 대각(臺閣)에 중망을 지고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인물이 없음으로 인하여 마음대로 농간질을 하였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른 것입니다. 계락과 술책이 다하고 손발이 다 드러나서 수습할 수 없게 되어서는 전적으로 이해(利害)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명의(名義)는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필승할 것만을 계획하여 근거없는 사실을 날조함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이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왕안석(王安石)에 견주었고 왕안석에 견주어도 인심을 열복시키기에 부족하게 되어서 또 ‘오만하게 천단하였다.’는 것으로 지목하였고, ‘오만하게 천단하였다.’는 것으로 더욱 성청(聖聽)을 현혹시킬 수 없게 되어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로 논하였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명에 또한 근거할 데가 없게 된 뒤에는 아무리 이이의 말 속에서 꼬투리를 찾으려 해도 되지 않자 ‘성상께서 몹시 미워하는 사람은 심의겸이고 사론이 함께 싫어하는 것은 외척이니 만일 심의겸을 함정에 빠뜨리면 위로는 성청을 현란시킬 수 있고 아래로 사람들의 입을 겸제(箝制)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 먹은 마음이 아, 너무도 참혹합니다.
그러나 시배(時輩)가 미워하는 것이 어찌 반드시 심의겸 한 사람에게 있었겠습니까. 이이의 경학(經學)과 덕망이 한 시대 사림의 영수가 되었고 또 화평의 논의를 주장하였으므로 시세에 빌붙은 무리가 하루아침에 화평의 논의가 행해져 자기의 이익을 잃어버리게 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불평스러운 마음을 품고 그를 미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년에 이이가 성상의 은총을 크게 입어 날로 의지가 깊어지게 되어서는 시세에 빌붙은 무리들이 머리를 모으고 크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행의(行義)가 본디 고상하여 또 다른 일로 오욕을 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심의겸과 약간 족분(族分)이 있는 것을 인연하여 이를 끌어대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이른바 명사(名士)란 자로 실제 심의겸에게 빌붙었던 사람 가운데 모두가 함께 아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도, 시배가 일찍이 그들을 비난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이 도리어 그들을 대각(臺閣)에 앉혀놓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입을 싹 닦고, 심의겸을 탐탁치않게 보는 이이를 공격하게 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아둔하여 참으로 그것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시배가 참으로 심의겸을 미워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서 공격한다면 어찌 심의겸에게 빌붙은 사람은 공격하지 아니하고 곧 심의겸을 탐탁치 않게 보는 이이를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시배가 미워한 것은 실로 심의겸에게 있지 않고 이이에게 있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아, 이 마음은 환하여 길 가는 사람도 아는 것인데 어떻게 구구하게 한 손으로 천하의 눈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성혼을 논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산야(山野)에 몸을 의탁하여 조정의 정령(政令)과 인물의 진퇴(進退)를 참여해 알지 않은 것이 없고, 들뜨고 경박한 무리를 모아 시사를 평론하고 경상(卿相)을 두루 헐뜯으며 한 세상의 사람을 하찮게 보아 유속(流俗)으로 지목한다.’ 하였는데, 이는 실로 기묘년에 남곤(南袞)의 무리가 사림을 일망타진하던 때10) 쓰던 말입니다. 아, 이 말이 어찌 사군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현인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죄와 사특하고 편벽된 말이란 것이 이에 이르러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전일 동인으로 이름한 자라 할지라도 진실로 그때 삼사의 자제나 당여(黨與)가 아니면 팔을 걷어붙이고 격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조야(朝野)의 공론이 일시에 사방에서 폭발하여 곧은 말이 조정에 가득하게 되어 위세로 협박할 수 없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삼사는 공론에 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명께도 배척을 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이가 다시 들어온 뒤로는 형적이 일변되어 모든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는 상황인데도 동인은 도리어 모두 그런 식으로만 사의(私意)로 사람을 헤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거조가 있게 되면 곧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이이는 혐의를 피하지 아니하고 공론을 크게 펼쳤습니다. 공론이 쓸 만한 현재(賢才)라 하면 동서를 따지지 않고 천거하여 기용하였고 공론에 빌붙는 경망한 자라 하면 동서를 따지지 않고 제재하여 억눌렀으며, 조금이라도 명의(名義)를 알아서 전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태도를 지닌 사람만 아니면 이론(異論)이라 하여 배척하지 아니하고 모두 수습하여 기용했는데, 하물며 이른바 사류에 대해서이겠습니까. 지론(持論)의 지공무사함이 이와 같은데 저들이 먼저 스스로 의혹하는 마음을 품고 잠깐 나왔다가는 곧 숨어버리는가 하면 물러나서 사태의 변천을 관망하면서 유감과 원한을 풀고서 함께 국사를 할 계책을 하려 하지 않았으니, 아, 또한 잘못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이와 같아서 그때 성명께 죄를 얻어 배척당하기도 하고 외방으로 좌천되어 나가기도 한 수효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인재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보면 당시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된 자로서 한두 명은 명망이 드러나지 않은 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시배가 국사를 무너뜨려 농락한 것에 비하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정철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이이가 그 단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인물로 말하면 전일 재능도 없고 덕행도 없으면서 시론에 빌붙은 자에게 비하면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매양 시배가 실정에 지나치게 정철을 공격하여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하는 것을 보고는, 홀로 그렇지 아니함을 밝히기를 ‘정철은 충청강개(忠淸剛介)하여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다. 편협한 결점이 있기는 하나 단점이 그의 장점을 엄폐할 수는 없다. 심의겸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는 하더라도 의겸이 뜻을 얻었던 때에는 조금도 아첨하여 가까이한 형적이 없었으니 기질과 심사가 그와는 아주 달랐던 것이다. 다만 악을 미워함이 너무 심하여 남을 용납하지 못하였고 남과 합치되는 의견이 적고 중의(衆議)를 구차히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인 쪽 사류가 정철의 심사를 모르고서 형적만을 가지고 의심한 것이다. 인재가 아까우니 쓰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시배에게 극력 말하였습니다. 이 또한 국가를 위한 계책인 것입니다. 이이가 어찌 하나의 정철에게 사정을 두고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이이가 신사(1581 선조14)년의 계사에서 ‘정철이 중도에 맞는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사류의 과격함을 의심해서 마음을 비워 돌이켜 반성하여 원망하는 것이 없지는 못했다.’ 하였으니, 이이가 정철에게도 좋아하는 바에 편중하여 전연 그의 병통을 모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발이 이이에게 답한 서한에 또한 ‘김계휘(金繼輝)·정철 같은 사람은 격론을 일으킨 과실이 없지는 않으나 오늘날 등용한 무리에 비하면 훨씬 차이가 있다…….’ 하였고, 김우옹도 ‘정철은 끝내 버릴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들의 의논도 오히려 이러하였다면, 이이가 정철을 기용하려 한 것은 모두 공론에 의거한 것이니 또한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삼윤(三尹)에 이르러서는 이이가 ‘이들이 일찍이 을해년에 일을 그르쳤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이가 전형(銓衡)의 권한을 잡고 있을 때에는 청요직(淸要職)에 한 번도 주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어떤 문생이 이이를 찾아가니, 이이가 묻기를 ‘지난번 내가 윤두수(尹斗壽)를 형조 참판에 주의한 것에 대해 외부의 의논이 어떻다고 하던가.’ 하자, 대답하기를 ‘외부의 의논을 잘 알지 못하겠으나 이들이 일찍이 을해년에 일을 그르쳤던 탓으로 오랫동안 배척당하여 폐기되어 있었으니, 지금 이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물정이 반드시 온당하지 못하게 여길 것이다.’ 하므로, 이이가 ‘이것은 시배의 논리이다. 일을 그르친 죄에도 경중이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일을 그르쳤다고는 하더라도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계미(1583 선조 16)년 동인의 소위에 비하면 삼윤의 과실은 가벼운 것이다. 그런데 전일 동인이 일체 폐기하여 동지(同知) 벼슬도 제수하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시배의 조처가 너무 심했다. 지금 이 사람은 범한 것이 중하지 않고 또 이재(吏才)가 있으니, 형조의 벼슬에 제수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근수(尹根壽)에 이르러서는 그 과실이 또 더 가볍다. 그의 인품이 소탈하고 단아하여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또 선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내가 조정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 사람이 이미 대사성으로 있었는데, 이 관직은 또한 시종(侍從)이나 청요(淸要)의 관직이 아니므로 버려두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지론이 동쪽 편도 들지 않고 서쪽 편도 들지 아니하여 편중과 편당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이가 처음 조정으로 돌아올 적에 사대부들 사이에 세 가지 말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동인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기망(欺罔)하여 충신과 현인을 배척하고 모함하여 국가를 농락하고 무너뜨림이 이에 이르렀으니 청요직을 가벼이 제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니, 이는 서인을 주도하는 자의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삼사의 사람이 조급하고 망령된 과실은 있으나 또한 사류의 동아리이니, 절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전대로 쓰고 의심하여 틈이 없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으니, 이는 동인을 주도하는 사람의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삼사의 사람이 분명히 일을 그르친 것이 도리어 을해년 삼윤의 무리보다 더한 점이 있었으니, 이는 삼윤의 전례에 의하여 청요직에 서용하지 않음으로써, 동서 양쪽에서 일을 만들어 낸 과실을 징계하고, 그 나머지 이른바 동서의 사류는 모두 수용할 것이요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전일 사류를 보합(保合)하여 함께 국사를 다스렸던 계책대로 행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사림으로서 공심(公心)을 가진 자의 말입니다. 이이가 이 세 가지 말을 취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쓰되 세 번째의 말을 옳게 여겨, 제재하고 억눌러 보합시키는 권형(權衡)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이이가 예전부터 지녔던 소견으로 일호도 그 사이에 편당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어떤 문생이 이이에게 묻기를 ‘선생이 평소의 마음가짐이 지극히 공정하였고 나라를 근심하고 집을 잊으면서 초연히 동서의 밖에서 홀로 우뚝 서서 동인 쪽의 사류와 서인 쪽의 사류를 수습하여 기용하여 함께 국사를 다스리려 하였는데, 이것이 곧 처음 뜻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도리어 이른바 서인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일을 하면서 동인에 대해서는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의 야윈 것을 보듯이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서 보기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들 서인의 세력이 조금 성해지고 동인의 세력이 조금 꺾였다고 여긴다. 선생이 조정에 있으면서 어떻게 오히려 편중하는 근심이 있음을 면하지 못함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른바 조제(調劑)하고 보합하는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하자, 이이가 ‘아, 그대의 의심이 옳다. 그러나 이는 나의 죄가 아니다. 대개 동서가 분당한 이래로 서인이 논의를 주장하면 동인을 배척하고 동인이 논의를 주장하면 서인을 배척하여, 각각 사견을 가지고 공론을 막아왔다. 그런데 내가 홀로 그 사이에서 쟁변하여 기필코 동서를 타파하고 사림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사류가 화합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나라가 나라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인이 내 말을 쓰지 않다가 전일에 패하였으니 동인도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인데, 동인이 또 패망한 전철을 답습하여 오늘날의 실패가 있게 되었으니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러나 전일 동서가 논의를 주장할 때에는 삼윤(三尹)과 이발(李潑)의 무리가 주인이고 나는 객이었으므로 외로운 자취가 쓸쓸하여 말이 쓰여지지 못하고 실패가 서로 뒤따르게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내가 바야흐로 주인이고 동·서인이 객이니 이야말로 조제를 이룰 수 있는 때이다. 다시 무슨 편중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형세는 서인은 내가 일찍이 동서를 타파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하여 차츰차츰 친근하게 나아오고, 동인은 내가 일찍이 들뜨고 조급한 자를 억제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하여 차츰차츰 멀어지고 있다. 삼사의 제배에 이르러서는, 다 물러가 움츠리고 서로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관망하면서 찾아오지도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사하여 직무를 보지 않는 자도 있었다. 국가의 허다한 직무를 이들을 위하여 오래도록 폐기할 수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이른바 서인의 경우에도 한둘 재능이 모자란 사람이 없지 않았다. 이것이 전후 형적이 다른 것으로 외부 사람의 의심을 일으키게 된 까닭이다. 아, 내가 오늘 동인을 수습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전일 서쪽 사류를 수습하고자 한 것과 다르겠는가. 그런데 시배가 나의 본심을 모르고서 의심을 품고 이리저리 관망하는 것이 이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나만의 허물이겠는가. 그러나 시배로 마음이 공정한 자는 오래도록 내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반드시 나의 충심을 환히 알아서 함께 일을 할 것이고, 오늘날처럼 물러나 서서 엿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의 본심이 어찌 이와 같은 데에 그치고 말려는 것이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조정에 돌아와서 그 자리가 미처 따스해지기도 전에 갑자기 뜻을 품은 채 죽었으니, 이것이 이이가 구천(九泉)에서도 한을 두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정철의 위인은 효성스럽고 우애하고 청렴하고 개결하며 직무를 담당하는 재능에 여유가 있으나 논의를 주장하는 지혜는 부족합니다. 이때를 당하여 이이가 죽고 성혼이 떠나가자 국론이 정해지지 못하여 횡의(橫議)가 바야흐로 난무하니 인심이 의심을 품은 것이 이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제갈양(諸葛亮)과 관중(管仲) 같은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담당하게 하더라도 진복(鎭服)시키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하물며 정철과 같은 자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정철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스스로 역량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서 몸을 이끌고 물러가는 것이 옳은데 국사를 홀로 담당하다가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였으니 이는 실로 정철이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정철의 위인은 역량이 부족하기는 하였지만 논의와 거조에 있어 조화하여 진정시키는 것을 힘써 주장하였기 때문에 세 사람을 유배보낸 것에 대해서도 방환(放還)시키기를 청하였으니, 그가 재앙을 즐겨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시배가 마침 한 사람도 정철과 서로 친숙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용모와 사기(辭氣)가 날카롭고 사나움을 보고 잘못 심각한 사람으로 여겼으니 이는 전연 정철의 위인을 모르는 자입니다.
정철이 조정에 벼슬한 지 20여 년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거친 초야로 유락(流落)하여 그 가난함이 숯으로 쌀을 바꾸고 밥상에 장이 없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청고(淸苦)한 절조는 세상에 모범이 되고 세속을 격려하기에 족합니다. 이것이 이이가 종신토록 애중히 여기던 것으로 참으로 오늘날의 유속으로선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철이 패한 뒤로 이발이 들어왔습니다. 이발을 위한 계책으로는, 이미 이이·성혼과 친구의 교분이 있으니, 마땅히 이이·성혼의 본심을 발명하여 당적(黨籍)의 거짓됨을 공파하여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이발은 양사의 논의를 미흡하게 여겨, 구봉령(具鳳齡)·홍성민(洪聖民)을 추론(推論)하여 심의겸의 당여(黨與)로 삼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혹은 경학(經學)에 능하고 혹은 재국(才局)이 있어 모두 세리(勢利)에는 담박하였고 심의겸과는 평소 교분이 두터운 자취가 없음은 국인이 아는 바입니다. 다만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는 까닭으로 아울러 몰아서 함정으로 밀어 넣었으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피혐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내용이 더욱 엄하여 병패(病敗)가 백출하였으므로 공격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깨져버렸습니다. 다만 당초 삼사의 논의는 모두 사리에 가깝지 않은 말로 날조하여 무망한 것이 환하게 드러났으니 진실로 상세히 변명할 것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발은 이이·성혼이 교유하였던 사람을 끄집어내어 말하여 짐작으로 논을 만들어 장황하게 현란시키는 말을 만들었으니 세상을 속이고 대중을 의혹시킬 수도 있기에 신들이 하나하나 밝게 변론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이이와 서인은 실로 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정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을해년에 이이가 정철에게 보낸 서간에서 시론의 편중됨을 극력 논쟁하여 적극 만회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른바 ‘한몸이 되었다.’는 것이겠습니까. 그가 ‘이이의 소견이 서인과 하나가 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삼윤(三尹)의 무리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말을 더 한층 심각하게 한 것입니다. 아, 어찌 그것이 사실이겠습니까. 이이가 심의겸과 삼윤을 청요직에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서인의 소견이겠습니까. 정철도 오히려 함께 한몸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심의겸과 삼윤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처럼 사리에 가깝지 아니한 말로 감히 군부의 앞에서 기망하였으니 어쩌면 마음이 혼란하여 전일 왕복한 논의를 다시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가 ‘사류들이 매양 이이가 서인을 구원하여 간사한 사람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의심한다.’ 하였는데, 이른바 간사한 사람은 심의겸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심의겸은 외척일 뿐만 아니라 권리를 탐하고 세도를 즐겨하여 사류의 마음을 잃은 지 오래이므로 기묘(1579 선조 12)년의 소장에서 또 ‘외척에게 영원히 권병(權柄)을 주지 마시어 심의겸의 평생을 막으시라.’고 청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그가 다시 들어오는 길을 열어 준 것이겠습니까.
그가 ‘이이가 서인들에 대해 실로 항상 잊지 않고 수용하려는 의논이 있었다.’ 하였는데, 이발의 전의 서간에서 이른바 ‘이 논의가 매우 좋으니 이야말로 오늘날의 사세에 아주 걸맞는 말이다. 시비(是非)로 말하더라도 기타의 사류는 원래 간여한 바가 없는 것은 물론 그른 사람은 오직 심의겸 한 사람뿐이다.’ 하였고 김우옹의 서간에 이른바 ‘이 논의가 매우 좋다. 내 생각도 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여긴다. 지금은 삼윤을 그른 것으로 여기고 그 나머지 서인까지 아울러 연루하여 그르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은, 서인 쪽 사류를 수용하자는 논의로서 바로 이이의 논의와 차이가 없이 꼭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죄로 삼으니, 어찌 전후의 의논이 그렇게 반복이 심합니까. 이이가 기묘년 해주(海州)에 있을 적에 올린 소장에 ‘심의겸은 선을 지향하는 근후(謹厚)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이이의 말이 아닙니다. 소장에 ‘심의겸이 조금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다.’ 한 것은 그의 형적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심의겸이 조정에 벼슬하던 때를 당하여 한 시대의 명덕(名德)으로 이황(李滉) 같은 제현(諸賢)들을 존모하여 모두 왕래하였고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유인(遺人)들도 힘껏 추천하여 끌어 들였으니, 이것이 ‘조금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다.’고 지목한 이유인 것입니다. 근후(謹厚)라는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소장에 실지로 이런 말이 없었습니다. 이이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도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사(1581 선조14)년 심의겸을 논박하는 말에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즐겨한다.’는 것을 죄로 삼았고, 그때 대사간을 사직하는 소장에도 ‘심의겸은 기세가 장황한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아,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즐겨하며 기세가 장황한 사람이 어찌 근후한 자의 근처에 갈 수 있겠습니까. 글에 쓴 것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증험할 수 없는 평일의 언론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가 ‘계미년의 한 장의 소장에는 말이 더욱 준맹(峻猛)하였는데, 심지어 자기를 따르지 아니한 자를 배척하려 하기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이의 이 소장은 실로 전일 이발의 무리들에게 보낸 서간과 그 뜻이 터럭끝만큼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가 ‘미욱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는 재억(裁抑)한다.’ 한 것은 바로 앞서의 서간에서 이른바 ‘의논이 중도에 지나친 자는 재억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사심을 품고 어거지로 변명하는 자는 배척하여 멀리한다.’ 한 것은, 바로 앞서의 서간에서 이른바 ‘때를 타고 부회하는 자는 배척하여 멀리한다.’는 말입니다. 이이의 논의는 한결같았는데, 이발은 앞서는 지당하다고 하고 뒤에 와서는 준맹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류를 배척하고자 한다.’ 한 말에 이르러서는, 소장에 본래 이런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발이 마음에 분노가 있어 자신의 소장의 괴란(乖亂)이 이처럼 극도에 이름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혼이 이이를 구원한 말을 가지고 ‘조정 사대부를 들어 붕당을 지어 참소하여 교묘하게 중상한다고 지목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또 성혼의 소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입니다. 그때 성혼이 바로 주상이 삼사의 무망(誣罔)만 보고 동인 쪽 사류를 아울러 의심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장에 ‘그러나 오늘날 조정의 논의가 어찌 모두 의도적으로 이이를 죄주기 위해 이에 이르렀겠는가. 부회하는 자가 때를 타고 미워하여 공격하였을 뿐이다…….’ 하였으니, 사류를 아끼는 마음이 매우 환히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과연 혼동하여 분별이 없는 말입니까. 성혼의 의사는 삼사의 부회하는 사람을 두고 ‘붕당을 지어 참소하여 교묘하게 중상한다.’ 하였을 뿐입니다. 부회하는 사람이 사류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발의 무리가 곧 이렇게 운운한다는 말입니까.
또 ‘이이가 공론을 돌보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사정(私情)만을 따라 그때 자기를 공격한 사람을 다 배척하고 전일 뜻을 잃었던 무리를 다 기용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더욱 무망(誣罔)한 것입니다. 이이가 전형(銓衡)을 주관하던 때에, 김우옹(金宇顒)·김홍민(金弘敏)·한효순(韓孝純)·성영(成泳)의 무리로 말하면 이들은 이른바 그때 자기를 공격한 자들었으나 모두 기용했으며, 삼사의 직에 있던 사람에 이르러서는 일을 그르친 과실이 도리어 삼윤(三尹)보다 더 심하였으므로 한효순·성영(成泳) 이외에는 삼윤의 전례에 의하여 아울러 청요직에 제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과연 자기를 공격한 자를 다 배척한 것입니까.
정철·신응시(辛應時)·이해수(李海壽)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전일 뜻을 잃었던 자들이지만 그들의 재능과 행실이 동인 쪽 사류에 못하지 않았으므로 이이가 아울러 청요직에 주의(注擬)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한때 사류로서 덕망이 있는 자는 동·서를 논하지 않고 재능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고 조금도 시기하거나 방해함이 없이 구애하지 않고 통용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전일 뜻을 잃은 자들을 다 기용한 것입니까. 이야말로 이이가 평일 동·서를 타파하고 사류를 보합하려는 마음이 자기가 논의를 주장하던 때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둘 기용할 만한데도 미처 기용하지 못하고 기용해서는 안 되는데도 잘못 기용한 자가 없지는 않으나 또한 환조(還朝)한 초두에 채방(採訪)이 미진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이이가 죽은 뒤에는 시세에 빌붙어서 도리어 이이·성혼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려 한 자가 간혹 있었습니다. 만일 이것을 가지고 이이의 지감(知鑑)이 미진하다고 한다면 그럴 수는 있겠으나 이것이 과연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이 사정(私情)을 따른 것이겠습니까.
또 ‘동료가 이이·성혼의 일을 지적해 논한 것이 바로 그 결점에 적중되었으므로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발이 과연 이이가 종시 심의겸과 체결하여 함께 모의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며, 과연 성혼이 심의겸의 농락을 받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이발이 과연 그렇게 여겼다면 이는 종전에 이이·성혼의 의논을 추존한 것이 모두 자기를 속이는 것임과 동시에 남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면 또 어찌 그 결점을 바로 적중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퇴(進退)에 근거한 바가 없어 논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사람의 열복을 바라고자 하니 어렵습니다.
또 ‘이이와 성혼이 유배된 세 사람이 돌아오도록 청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이발이 틀림없이 이이와 성혼이 환조(還朝)하여 계달한 말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이·성혼은 인견(引見)하던 날 너그러이 용서하도록 힘껏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게 되자, 물러나와 서로 ‘이 세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간언(諫言)하다 죄를 얻어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니 후사(後嗣)에게 보일 것이 못된다. 반드시 말감(末減)을 굳이 청한 뒤에야 일이 바야흐로 중도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힘껏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이이가 죽고 성혼이 떠나가서 드디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이이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전일 한 말을 다시 아뢰어서 허락 얻기를 목표하였을 것입니다.
‘경중을 헤아리게 하라.’는 말을 잘못 본 것에 이르러서는 ‘이이가 대간과 곡직(曲直)을 송변(訟辨)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이의 의견으로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국사를 천단하는 것은 곧 인신으로서 첫째가는 죄이니 이 죄명을 지고서 염치없이 출사(出仕)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변경의 일이 바야흐로 급박하여 일이 적체된 것이 많았으므로 삼공(三公)이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였고 위에서도 도타이 유시하여 나오게 하였으므로 부득이 계사에서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죄를 들어 좌우 신하들에게 의논하고 여러 대부에게 물어 경중을 헤아리게 하소서. 만일 용서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이 미안하긴 하지만 감히 힘써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던 것입니다. 이이의 의견은, 조정에서 자기 죄의 경중을 헤아리게 하여 다행히 큰 죄에 이르지 않았다고 한 뒤에야 감히 나아가서 직무를 봄으로써 주상의 하교를 받들겠다고 여긴 것뿐이지, 어찌 감히 대간과 경중을 따져 헤아리려 한 것이겠습니까. 이이가 말한 것은 진실로 문리가 통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이처럼 잘못 보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삼사 및 이발과 김홍민(金弘敏)의 무리만이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마음이 먼저 어지러워 상도(常度)를 잃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글에 써서 이처럼 분명한 일도 오히려 전도되고 착오됨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천하의 시비를 분변하고 천하의 큰 일을 논하는 데 있어 어긋남이 없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계사의 끝에 ‘원하건대 시종의 곡절을 통찰하시어 보합하고 진정시켜 화평한 복을 도모하소서.’ 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 말이 더욱 전도 착오되었습니다. 이이·성혼은 지극히 공정한 사람인데, 이발이 조금도 용서없이 배척하고 헐뜯은 것이 이러하였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발이 이이·성혼을 배척하고 또 장차 누구와 더불어 보합하며 누구와 더불어 진정하며 누구와 더불어 화평을 도모하려는 것입니까. 이것이 논의를 정립함에 있어 사리에 어긋나 문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인 것입니다. 만일 가슴이 흐리멍덩하고 혼란한 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전도 착오된 의논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아, 이발이 스스로 평일에 경제(經濟)로는 이이를 허여하였고 도학(道學)으로는 성혼을 허여하였습니다. 또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넓으며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하고 임하(林下)에서 지조를 지키고 몸을 닦아 값을 기다리며 나아가고 물러남과 벼슬하고 벼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일마다 예전 현인을 인용해가면서 두 사람을 허여하였으니 이발이 이이와 성혼에 대해서 그 심사를 전연 모른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곧 논의가 날카로운 신진의 무리와 합하여 하나가 되어서는 그들의 심사를 한 마디 말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 없고 일호도 애석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충후한 군자의 기상이겠습니까. 이것이 이발이 너무도 각박하게 처신한 것으로서 조야의 공론이 그에 대해 분히 여기는 것은 물론 동인으로 이름하는 자도 이것으로 의심하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발이 이에 이르게 된 것은 또한 어찌 이발의 마음뿐이기만 하겠습니까. 대개 동·서가 분당한 뒤로부터 서로 모함하여 이익을 추구하고 양쪽 사이에 일을 만들어낸 탓이었으니, 예컨대 윤기신(尹起莘)·이순인(李純仁)·정여립(鄭汝立)의 무리가 얼굴을 돌리고 말을 만들어내어 이발의 무리의 마음을 점차 고혹시켰으므로 평일의 의논이 대체로 면종(面從)하는 작태가 많았던 것입니다. 계미년 이후부터는 이발이 호남에서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머물고 있었는데, 전일 빌붙은 무리들이 길에서 들은 말을 주워모아 부연하여 더 보태었고 심한 경우에는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서 일일이 이발에게 급히 기별하였습니다. 물이 배어들어가듯이 차츰차츰 헐뜯는 참소와 살을 에는 듯한 통절한 호소에는 비록 마음가짐과 공평한 사람이라도 조금쯤 흔들려 미혹됨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이발과 같은 위인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시험삼아 논하겠습니다. 옛날 이른바 동인이란 사람은 심의겸을 배척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사람이 동인이 되었고, 옛날 이른바 서인이란 사람은 심의겸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사람이 서인이 되었습니다. 외척을 배척하는 사람은 진실로 청의(淸議)라고 할 만하나 충현(忠賢)한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은 사류라고 할 수 없으며, 사사로이 사귀는 친구를 구호하는 사람은 진실로 편당한다고 할 만하나 유종(儒宗)을 존모(尊慕)하는 사람은 공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시인(時人)이 발신(發身)하는 자본이 되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며 외척을 배척하는 것이 실로 사림 청류(淸流)의 논의이므로 선비로서 심의겸을 배척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동서의 이름이 전일과 달라서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동서의 말이 있은 이래로 서인의 명목은 그 말이 네 번 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심의겸의 친구와 제배(儕輩)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삼윤(三尹)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에는 서인을 구원하는 자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정철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니며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으니 이이와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림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조야(朝野)의 공론을 지닌 사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사실에 의거한 말이겠습니까. 이러므로 공론이 열복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른바 서인이란 자가 오늘날에 와서 더욱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는 공론을 하다가 간사한 사람에게 펀당한다는 이름을 얻었고 성혼은 이이를 구원하다가 사적으로 구호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중외(中外)의 수많은 선비들은 이이와 성혼을 구원하다가 서인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백대의 공론은 속일 수 없지만 일시의 억울함을 당한 것은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 이이를 공격하는 까닭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개 심의겸을 말거리로 삼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신들이 무망(誣罔)한 정상을 일일이 조목조목 진달하여 공파(攻破)하겠습니다.
대개 이이는 심의겸과 족분(族分) 관계로 서로 알기는 하였으나 그와 친밀히 지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전랑에 천거되었을 적에 심의겸이 저지하였는데 김계휘(金繼輝) 등이 힘껏 구원한 데 힘입어 해결되었으니, 다른 것은 논할 것 없이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이이가 본디 심의겸과 서로 좋게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심의겸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이이가 이때에 매양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요구하였고 한 달도 조정에 편안히 있은 적이 없었으니, 빌붙어 체결한 자가 과연 이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이의 명성이 날로 성대해지자 한때의 사대부가 그와 얼굴을 알기를 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때로 서울에 이르면 심의겸이 대중을 따라 와서 만나보았을 뿐입니다. 심의겸이 패망한 뒤에 전일 심의겸을 붙좇던 무리가 일시에 동인에게 복종하여 창을 거꾸로 들고 심의겸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사대부로서 심의겸과 아는 자는 모두 심의겸을 병을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심의겸이 때로 혹 가서 보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빛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이이는 예전처럼 대우하여 가까이하지도 않고 멀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상 인정이 가소로운 점인 동시에 이이가 말을 듣게 된 까닭입니다.
이발의 무리는 이이가 신사년에 심의겸을 끊지 아니한 것을 그르게 여겼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도리 또한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닙니다. 범연히 서로 아는 자가 있고 정면(情面)으로 서로 아는 자가 있고 심사(心事)가 서로 통하는 교분으로 사귄 자도 있고 선(善)으로 책면하고 인(仁)으로 돕는 도의(道義)의 교분으로 사귀는 자도 있습니다. 이이가 심의겸에게는 족분 관계로 잘 대우하였을 뿐이고 당초 교분의 도리로서는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심의겸의 대단한 죄악이 있음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한갓 시인(時人)에게 배척받는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전염될까 염려하여 하루아침에 버리고 끊어 버리면 이것은 천장부나 하는 짓이요 또한 정인 군자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만일 이이가 참으로 심의겸이 대고(大故)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죄를 짓던 날에 끊어야 할 것이고 신사년에 끊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조헌(趙憲)이 이른바 ‘뜬말이 있은 뒤에 이이가 자취를 끊고 서로 찾아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어찌 심히 가소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뜬말로 인하여 곧 사람을 끊었다면 이것이 어찌 사군자가 사람을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이이가 심의겸에게 대단한 죄악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몰랐으나 또한 권세를 탐하고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김효원은 쓸 만하고 심의겸은 쓸 만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기묘년의 소장에 또 ‘동서를 탕척시키고 모두 재능대로 임용하더라도 심의겸은 다시 요직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고, 심지어 ‘영원히 외척에게 권세를 주지 말라.’고 청하여 심의겸이 다시 들어오는 길을 막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올린 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깊이 주의시켰으니, 이것이 과연 일호라도 심의겸의 처지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사람을 논함에 있어 마땅히 마음으로 해야 하고 상벌을 시행함에 있어 마땅히 형적으로 해야 하므로 심의겸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일시의 서인 쪽 사류를 아울러 연루시켜 다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이이의 소견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성룡·이발·김우옹의 무리도 전일 논한 바입니다. 계미년 성비(聖批)에 ‘심의겸은 간인이다.’라는 분부가 계신 것을 본 뒤에 이이 또한 비로소 의심하여 ‘이 사람이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즐겨서 본디 수백(粹白)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가 척리(戚里)임을 빙자하여 임금께 죄를 얻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궁금(宮禁)의 일은 비밀스러워서 외신(外臣)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또한 의심할 따름이고 억측할 따름이었습니다. 만일 이이가 심의겸을 알지 못한 것을 죄로 삼는다면 유성룡·이발·김우옹의 무리와 그 책망을 같이 받아야 합니다. 어찌 이이만 탓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로써 살펴보면 그의 마음과 형적이 해와 별처럼 환하게 밝으니, 어찌 한 점인들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아, 이이가 심의겸과 안 것을 시배가 애당초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심의겸이 배척당하던 초기에 그의 제배들은 당여(黨與)로 지목받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이이만은 감히 지목하는 가운데 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 조정이 서로 번갈아가며 천거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한 것은 애당초 친밀한 형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동인의 지론이 편중된 데 이르러 이이가 홀로 동서를 타파하자는 논의를 주장하면서 들뜨고 조급한 무리를 통렬히 억제한 뒤에야 좋아하지 않는 자가 비로소 많아졌고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이이가 심의겸과 사적으로 지낸다.’ 하더니, 계미년 이후 비로소 함정으로 몰아넣고서 당여로 지목하였습니다.
아, 이이는 한 사람입니다. 이이의 덕업(德業)과 경술(經術)을 위에 천거한 것도 시배이고 징소(徵召)하기를 계청한 것도 시배이고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하도록 청한 것도 시배이고 오늘날 배척하여 얽어 모함하는 것도 시배입니다. 아, 시배에게 거스르기 전에는 이이가 도학과 경륜이 있는 대현(大賢)이 되었다가 시배에게 거스르게 된 뒤에는 이이가 사악한 붕당을 만든 소인이 되었으니 어찌 앞뒤로 헐뜯고 칭찬함이 이처럼 서로 반대된단 말입니까.
이이가 참으로 심의겸과 체결하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심의겸이 뜻을 얻고 있던 때 체결했어야 하는 것이지, 의겸이 실세한 뒤에 체결한다는 것은 부당한 말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심의겸이 패하기 전에는 이이가 전원에 물러나 살면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겼습니까. 경진(1580 선조 13)년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들어오던 때에는 심의겸이 실세한 지 이미 오래되어 먼 외방으로 쫓겨났고 동인이 바야흐로 시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이이가 체결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논의를 주장하고 있는 시배에게 이견을 세우고 실세한 심의겸에게 체결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체결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사리 사욕을 이루려는 것이니, 자기의 사리 사욕을 이루지 못한다면 또한 무엇 때문에 체결하겠습니까.
아, 시배의 기세가 치성할 때에도 오히려 끌어들여서 당여로 삼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세상이 천하게 여겨 버려버린 심의겸이 끌어들여 당여로 삼을 수 있었겠습니까. 일신의 영욕과 화복도 오히려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절조를 변개하게 할 수 없는데, 스스로를 도모하지도 않는 사람이 더구나 심의겸을 위해 도모하겠습니까. 이이의 삼사는 오직 이와 같았으므로 선세(先世)의 대부(大夫) 백인걸(白仁傑) 같은 이도 특별히 이이와 성혼을 천거하여 특립독행(特立獨行)하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백인걸은 사조(四朝)의 숙덕(宿德 : 덕행이 있는 노숙한 사람) 이며 을사(乙巳)의 유직(遺直 : 直臣을 가리킴)으로 일찍이 심의겸을 배척한 것은 국인이 아는 바입니다. 만일 이이와 성혼이 조금이라도 심의겸에게 오염된 형적이 있었다면 어찌 외척에게 편당하는 사람을 국가를 위해 현인으로 천거함으로써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이와 심의겸이 본래 친밀한 형적이 없었음을 여기에서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아, 시배로서 이이를 공격하는 자가 어찌 모두 시세에 빌붙어서 충현(忠賢)을 시기하는 자들이겠습니까. 그 가운데에도 마음가짐이 조금 공정하나 정의(情意)가 막혀서 이이의 심사를 모르는 자도 있겠고 식견이 밝지 못하여 시배의 논의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는 자도 있겠고 또한 신진 후생으로 붕당의 논의에 오염되어 그른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 자도 있겠고 또한 마음으로는 시론(時論)을 그르게 여기면서도 역량이 부족하여 남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도 있겠고 또한 시종 곡절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대중을 따라 뇌동한 자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하루아침에 깨달으면 또한 반드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뉘우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오늘날의 사대부는 모두 임금 섬기는 의리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대개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속이지 않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배 중에 시론이 무망(誣罔)된 것임을 아는 자가 한두 사람 없지는 않으나 곧 그들과 함께 어울려서 하나가 되었으며, 혹은 실지로 이 사이의 시비를 모르고 억지로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자도 있습니다. 만 사람이 부화(附和)하여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함께 같은 말을 하여 마침내 한 사람도 실지로 임금에게 고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과연 이른바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배는 모두 임금 섬기는 의리를 모르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편당하여 임금을 속이는 것은 그 죄를 바로잡을 수 있으나 시론에 한 번 거스르면 종신토록 폐기됩니다. 오늘날의 시배는 부귀에 뜻을 두지 않은 자가 적으니, 당초 옛 사람이 임금을 섬기던 의리로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아, 일세(一世)의 인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능히 우뚝이 스스로를 지켜 만 마리 말이 함께 달리는 속에서도 의연히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 사이에서 스스로 벗어난 사람이 없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아, 이이는 죽었습니다. 오늘날 한 세상 사람을 다 몰아다가 모두 이이가 소인이라고 하게 한들 또한 국사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대저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오직 의(義)와 이(利) 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특립독행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며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사람은 군자로서 의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시세에 빌붙어서 자신을 보존하고 지위를 튼튼히 하며 작록을 탐하면서 나아가기는 쉽게 하고 물러나기는 어렵게 여기는 사람은 소인으로서 이익을 좋아하는 자입니다. 오직 이익만을 좋아할 뿐이므로 이익이 외척에게 있으면 외척에게 빌붙고 이익이 권간(權奸)에게 있으면 권간에게 빌붙고 이익이 시론(時論)에 있으면 시론에게 빌붙어서 오직 이익이 있는 것만 보고서 향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기미를 쫓아가고 향기를 따라서 가지 않는 곳이 없고, 파리처럼 이익을 찾아다니고 개처럼 분주히 쏘다니어 몰아 내버려도 다시 돌아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이익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데에 있으면 아내와 자식을 죽여가며 추구하고, 이익이 임금과 아비를 시해하는 데에 있으면 임금과 아비를 시해하면서 빼앗으니, 이것은 이익을 좋아하는 자들의 일입니다.
오직 의리만을 좋아할 뿐이므로 이익이 외척에 있어도 빌붙지 않고 이익이 권간에게 있어도 빌붙지 않고 이익이 시론에게 있어도 빌붙지 않고 오직 의리의 있는 것을 보아 그를 따를 뿐입니다. 그리하여 영화로와도 즐거워하지 않고 곤욕을 당하여도 놀라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고 내몰아도 가지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의리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데에 있으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의리가 일족이 멸하는 데에 있으면 일족이 멸하여도 사양하지 않으니 이것은 의리를 좋아하는 자들의 일입니다.
아, 의리를 좋아하는 자는 나라를 위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자신을 위합니다. 이익을 좋아하면서 임금을 사랑하는 자는 있지 않고 의리를 좋아하면서 임금을 버리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오늘날의 사대부 가운데 누가 군자로서 의리를 좋아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소인으로서 이익을 좋아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작록을 탐하고 나아가기는 쉽게 하고 물러나기는 어렵게 여기는 자이겠으며 누가 시세에 빌붙어서 자신을 보존하고 지위를 튼튼히 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특립독행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는 자이겠습니까.
혹시 하루아침에 외척과 권간이 국권을 도둑질하여 생살(生殺)과 위복(威福)이 그의 손에서 나오게 된다면,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으려 근심하고 벼슬을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잃을까 근심하여 바람부는 대로 휩쓸리는 자들이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의리를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강경하고 정직하여 흔들리지 않고 횡류(橫流)의 지주(砥柱)처럼 우뚝이 서는 자들이 의리를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이른바 사대부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가 만일 명예와 절조를 아껴서 조금이라도 화평론을 주장하여 형적을 깨뜨려버리고 일시의 인재를 수합하여 그들과 더불어 천직(天職)을 함께 다스려 직무에 협력함으로써 위로는 성상께서 밤낮 정무에 애쓰시는 근심을 풀어드리고 아래로는 사림의 공론이 답답해 함을 위로해 주는 것으로 스스로 만년을 보전할 계획으로 삼는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부회하는 무리가 시론을 주장함에 따라 괴란(乖亂)이 날로 더욱 심해집니다. 조정에서는 오직 당색의 이동(異同)을 가지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는 것을 일삼을 뿐이고 국가의 치란(治亂)과 생민의 휴척(休戚)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지경에 버려두니, 인심이 열복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공의가 함께 분히 여기고 지사가 팔을 내두르며 조헌(趙憲)이 과격한 논의를 제기하게 된 까닭입니다.
대개 조헌이 한 말은 이이와 성혼을 신구(伸救)하는 것을 주로 하였으나 그 소견이 일방적이어서 스승의 뜻에 어긋났습니다. 사람을 논할 적에는 좋아만 하여 악을 알지 못하고 미워만하여 선을 알지 못하면 또한 일시의 공론을 열복시킬 수 없으니 또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조헌의 뜻은 이미 이이와 성혼을 유림의 영수로 삼고 있으므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를 보면 곧 가리켜 시기하는 사람으로 삼고 이이와 성혼을 추존하는 자를 보면 곧 가리켜 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삼으며 인물의 본품(本品)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서 일체 사정(邪正)으로 단정하였으니 이것이 논의가 분격하여 중도에 맞지 않고 스승의 뜻을 크게 어기게 된 까닭입니다.
대저 사람을 논함에 있어 형적만을 보고 본심을 규명하지 않으면 번번이 사람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는 기묘년에 뭇 소인들이 사림을 일망타진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기묘년에는 사림이 합하여 하나가 되고 오직 소인만이 사림을 모함하였으므로 형색이 분변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므로 사림을 공격하는 자를 모두 소인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였거니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당초 사림이 나뉘어 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가 시세에 빌붙어 시기 모해하는 무리가 많이 있기는 하나 또한 잘못 속아서 저지당하여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니, 어찌 본심을 규명하지 않고 일체 소인으로 규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헌의 소장에서 공격한 김우옹·유성룡·김홍민(金弘敏) 같은 몇몇 신하에 이르러서는 장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인물을 논하자면 이 또한 일시의 청류(淸流)로서 이이가 일찍이 칭허(稱許)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뜬 말에 잘못되고 한쪽에 치우치게 집착하여 점차 침고(沈痼)되어 이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또 이 몇몇 신하는 소견이 편벽되어 이이의 심사를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 또한 장점을 취함에 있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몇몇 신하가 일시의 청류라고는 하나 그 가문에 출입하는 자는 대다수가 부회하고 아첨하는 무리였는데, 이를 재억(裁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그 사이에 동이(同異)의 의견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서로 어울려서 하나가 되었으면 사론의 의심을 초래하는 것은 또한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 말만 듣고 간사한 마음이 생겨 이러한 사리에 어긋나는 비난이 있게 된 것이지, 애초에 어찌 그 사이에 사심(邪心)을 가지기야 했겠습니까.
대개 이 몇몇 신하는 역량과 소견이 세도(世道)를 담당하여 들뜨고 조급한 자를 진정시키고 처지를 화평하게 하여 서로 화합해서 직무에 힘쓰는 복을 누리게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위를 잃을까 근심하는 유속(流俗)의 무리가 전연 이해에 마음을 두고 명의(名義)를 돌아보지 않은 채 시세에 빌붙어서 날마다 공격만을 일삼고 탐욕을 부리고 혼탁시키고 시기 모함하는 경우에 비하면 또한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지금 조헌이 비유를 든 것이 도리에 맞지 않아서 이 몇몇 신하를 비인(匪人 : 무뢰배)으로 삼고 기대항(奇大恒)은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으로 허여하고 심의겸은 의리의 명성을 드날린 것으로 지목하였습니다. 서인인 경우에는 한 사람도 단점을 말한 것이 없고 동인인 경우에는 한 사람도 장점을 말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과연 이이의 평일 소견이었겠습니까. 거리에 떠도는 말을 주워모아 성상께 아뢴 데 이르러서는,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뜻은 간절하나 광망(狂妄)하고 미련한 과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어쩌면 조헌이 근년 이래로 남쪽 고장에 유락(流落)하여 있으면서 오랫동안 사우(士友)의 논의를 접하지 못하였으므로 떠나 있던 나머지 고루하여 이러한 어긋남이 있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이의 평소의 논의와 서로 틀린 것이 이처럼 심하단 말입니까.
아, 이이가 스스로 수립한 것은 광명정대하고 천지처럼 우뚝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고 옛 사람에 부끄럽지 않은데, 살아서는 그 포부를 당세에 조금도 시행해 보지 못하고 죽어서는 그 심사(心事)를 드러내 밝힐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조헌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그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 존모(尊慕)하는 성의는 있으나 사우(師友)의 뜻을 환히 알지 못하였고, 논설하는 바도 또 스승의 도를 발명하지 못하였으니 구원(九原)에 있는 죽은 스승의 영령이 어찌 여기에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조헌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또한 시대를 한탄하고 세속을 슬퍼하는 뜻과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실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설(辭說) 가운데 어찌 참으로 채택할 만한 것이 없기에 삼사가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힘껏 공격하고 심지어 조헌을 흉험(凶險)하고 교사(巧詐)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아, 어찌 그것이 사실이겠습니까.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부회하는 무리가 바야흐로 시론(時論)을 주장하여 그들의 손 안에서 진퇴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이 무리에게 빌붙지 않고 생로사병(生老死病)의 지경에 이른 사람을 구제하려 하는 것은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미치고 어리석다고 한다면 가하거니와 흉험 교사라는 네 글자가 어찌 조헌의 마음을 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조헌이, 이이가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잊지 못하여 이 소장을 올렸다.’ 하니, 이것은 더욱 무망(誣罔)하는 말입니다. 조헌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이가 옛 사람을 사모하고 선을 좋아함을 취하였으나 벼슬길에 천거하여 발탁한 것은 실로 이발·김우옹이 한 것이니 이것은 나라 사람이 함께 아는 일입니다. 만일 조헌이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이발의 무리에게 갚아야 할 것이요 이이에게 갚는 것은 부당합니다. 설사 이이가 조헌에 대해 천거 발탁해 준 은혜가 있어 조헌이 잊지 못하여 그렇게 하였다 하더라도 대중의 성쇠에 따라 향배를 결정하는 자에 비하면 또한 거리가 멀지 않겠습니까. 작위(作爲)가 없이 하는 것은 옛 사람도 허여한 것인데, 지금 이것을 죄로 삼고 저것을 옳게 여기니 그 또한 잘못입니다. 신들이 일개 조헌을 위해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시배(時輩)가 사람을 공격함에 있어 없는 것을 얽어내어 있다고 하면서 장황하게 현란시키는 정상과 전후의 방법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과 같으니, 이를 살펴 그것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면 곧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이것을 통하여 저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이와 성혼을 논한 말에 이르러서는 이발(李潑)의 여론(餘論)을 조술(祖述)한 것인데 옥당의 차자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스스로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마치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이이를 이미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군자라고 허여하고 또 성혼에게 임하(林下)에서 학문하는 선비라고 허여하였으니, 두 사람은 당세에 구하여도 비할 만한 사람을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또 외척에게 빌붙었다 하면서 실신(失身)으로 지목하였으니 이 두 사람은 백이(伯夷)의 마음에 도척(盜蹠)의 행실을 지닌 것이니 어찌 이치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이는 때를 타고 부회하는 무리가 이 논의를 주창하자, 신진의 사류가 이 사이의 곡절을 알지 못하고 대중을 따라 뇌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들은 또 생각건대, 돌아간 스승이 전후 올린 소장이 무려 누만 언인데 건백한 내용은 모두가 국가의 대계였습니다. 만년에 풍운(風雲)의 시기를 만났으나 곧바로 하늘이 그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평생의 포부를 하나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사림이 함께 팔을 내두르면서 한탄하는 까닭입니다.
대저 우리 국가는 성왕(聖王)과 신군(神君)이 계승하여 정치 도구가 다 완비되어 앞서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제작이 있었고 뒤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저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연산(燕山)이 선왕의 전형(典刑)을 전복시켜 음학(淫虐)한 폐정(弊政)을 창시하자,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여 모든 정치가 옛날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의 여법(餘法)이 아직도 다 개혁되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국가 생민에 해가 되고 있으니, 이는 선왕의 옛 법전이 아닙니다. 이러한데도 고치지 않으면 장차 백성을 보호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이가 경장(更張)하려고 한 것은 또한 장차 국가를 위하여 천명(天命)을 맞아 중흥의 업적을 세우려 한 것이니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과연 분경(紛更)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진신들 사이에 다시 이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가려움과 아픔이 자기 몸에 절실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이는 비난할 수 있어도 그 말은 옳은데, 어찌 사람 때문에 말조차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아, 이이의 건백이 행해지지 못한 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거니와, 조처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저해하여 무너뜨린 뒤에야 마음에 시원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곡식을 바치는 자에게는 허통(許通)시키자는 일에 이르러서는 당초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조처입니다. 계미년 변경의 흔단이 있었던 초기에 중국의 장사(將士)가 북방에 구름처럼 모였으나 군량이 다 떨어져서 운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종의 2백 년 왕업을 일으킨 지역이 장차 오랑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감히 손을 소매 속에 넣고 편안히 앉아 있으면서 한 가지 계책도 조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나라 신하 주희(朱熹)는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를 제수받았을 적에 부민(富民)에게 미곡을 빌어쓰고 영직(影職 : 실제로 그 직무에 근무하지 않고 이름만 있는 벼슬)으로 보답하기로 언약함으로써 한 지방의 기근을 구제하였으며, 아조(我朝)에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리에 광묘(光廟 : 세조)가 일찍이 북도에 화살을 바치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면천(免賤)시켜 양인(良人)이 되게 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평일 경상(經常)의 법이 아니지만 또한 실로 권변(權變)을 행하는 방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유가 이미 행하였고 조종조에서도 이미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당시에 격문이 서로 잇따르고 봉화가 쉬지 않아서 한 지방의 안위가 호흡 사이에 결판날 상황인데 어찌 장구(章句)를 따지는 썩은 선비가 큰 소리만 칠 뿐 완급(緩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런 소위를 본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이가 이렇게 한 것은 다만 일시의 위급을 구제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는데, 그 사이에 인재를 아끼는 뜻이 스며 있었음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헌이 ‘이이가 이렇게 한 것은 인재를 아끼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이의 본심을 아는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이가 시의(時議)와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행하기를 힘껏 청한 이유인 것입니다.
언자(言者)가 과연 구차하다는 것으로 논쟁하자 위에서 결의(決意)하여 행하였고, 이이가 죽은 뒤에 와서 언자가 또 전후 소생(所生)을 분간하여 허통(許通)시키자고 한 논의를 주장하여 논집해 마지않자 위에서 또한 깊이 살피지 아니하고 갑자기 따르셨습니다. 이 일이 미세하기는 하나 나라의 신망이 걸린 것이어서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이이도 전후의 소생을 분간해야 함을 모른 것이 아니었으나 뒤의 소생을 허통하고 전의 소생을 허통하지 아니하면 응모자가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장자는 천인이 되고 차자는 양인(良人)이 되어 한 집안 안에서 명분이 문란해져 또한 크게 사리에 어긋나게 생겼으므로 전후의 소생을 아울러 허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이가 이것을 함에 있어 어찌 의도한 바가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대개 당초 사목(事目)에 전후의 소생을 분간한다는 말이 있지 않았으므로 곡식을 바치는 사람의 대다수가 연로하여 출산이 중단된 사람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나라를 위해 변경을 돕기를 복식(卜式)11)처럼 하는 자들이었겠습니까. 그저 자손이 벼슬길에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공사(公事)를 처음 준허(准許)받았을 적에는 서얼의 무리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고려의 공사는 사흘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옛 속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가산을 다 기울여 후일의 계책을 도모하다가 만일 국가가 신의를 지키지 않고 곧바로 파하고서 그 댓가만 돌려주면 우리들의 일이 낭패이다.’ 하므로 권하는 자가 모두들 ‘그렇다 않다. 현재 이야(李爺 : 이이)가 조정에 있으니 어찌 이처럼 실신(失信)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서로 돌려가며 말을 전하였으므로 응모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곡식을 바치는 짐바리가 잇따랐고 군사(軍事)가 힘입어 구제되었습니다. 지금 그 일을 파하지도 않고 댓가도 돌려주지 않으면서 다만 전의 소생은 부거(赴擧)를 허락하지 못하게 하고 또 천첩 자식의 부거를 멋대로 정지시킨 경우가 많아 국가의 실신이 또 이 무리들의 처음 염려하던 이외에서 나오고 있으니, 백성을 속이는 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때 관금(關禁)이 엄하지 아니하여 곡식을 바치는 무리가 운송의 편리함을 이롭게 여겨 혹 포목(布木)을 가지고 가서 본도(本道)에서 곡식을 무역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유사(有司)가 규검하지 못한 과실이요 서얼이 외람된 짓을 한 죄이므로 참으로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징치하고 신의는 잃지 않는 것이 옳은데, 위에서 일이 나인(內人) 족속에 관계된다 하여 특명으로 그 사람에게 댓가를 돌려주고 부거(赴擧)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성상의 지공무사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자못 실신(失信)에는 대소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모르신 것입니다.
아, 신의란 나라의 큰 보배입니다. 필부도 신의가 없으면 오히려 향당(鄕黨)에서 행동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주로서 신의가 없으면 뒷날 급한 때에 어떻게 사방을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평일 무사할 때에는 큰 근심이 없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일이 다급해지면 반드시 때늦은 후회가 있게 될 터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인이 ‘먹을 것을 버리고 군사를 버리되 신의는 버릴 수 없다12).’ 하였는데, 지금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세 가지를 잃었으니 불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곡식을 바친 무리가 이러한 억울함을 받았으니 어찌 상서(上書)하여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려 하지 않겠습니까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즉위하신 이래로 너그러이 용납하여 간언을 받아들여서 언로(言路)가 크게 열렸으니 어찌 한 사람의 말도 채택할 만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위에서 그 말을 선하게 여겨 유사에게 내리시지만 유사의 대다수가 관직을 태만히 하고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일찍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의 시비와 이해를 따져보지도 않고 일체 방계(防啓)하니, 아름다운 꾀와 특이한 계책이 시무(時務)에 절중(切中)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폐지되고 시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하들이 임금의 미덕을 받들어 순종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간언을 받아들이는 성상의 성대한 덕으로 하여금 간언을 쓰는 실효를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는 언로를 열어놓았으나 신하들이 그 문을 닫아버린 것이니, 지치(至治)가 흥기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얼들이 도움이 없음을 알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이이가 죽은 뒤부터 사기가 저상되어 사람마다 자신을 보전할 계획을 품고 있으니 인심과 세도가 날로 달라지고 때로 같지 아니하여 덕을 숭상하는 기풍이 점차 없어지고 이익을 취하는 습성이 날로 자랍니다. 따라서 아비가 자식을 경계하고 형이 아우를 권면하는 것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녹봉을 구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고 있으므로 스승을 높이고 벗을 가까이하여 충성과 효도를 강마(講磨)하는 자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신은 이와 같이 하여 마지않으면 그 유폐(流弊)가 장차 사유(四維)가 모두 없어지고 인욕이 마구 범람하여 동경(東京)의 당고(黨錮)13) 와 남송(南宋)의 위학(僞學)14)의 화를 날을 정해 놓고 기다릴 수 있음은 물론이고 나라도 따라서 위태롭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 한 가지 일은 신의 사사로운 근심이며 지나친 염려이나 또한 조헌과 같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언자로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 시배에 무식하고 부회하는 무리가 있기는 하나 또한 사림에 화를 일으키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 하였으니, 조짐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에서는 화복(禍福)으로 사부(士夫)를 꾀고 주현(州縣)에서는 위형(威刑)으로 유사(儒士)를 으르니, 풍색(風色)의 불길함이 서리를 밟는 것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회하는 무리가 점차 화의 빌미를 만들어내어 강한 자는 공격하여 공을 자랑하고 약한 자는 영합하여 이익을 구하게 될 것이니, 뒷날 사림의 화가 이 무리들의 손에서 생기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 또한 형상이 이미 드러난 것으로 어리석은 신이 억측으로 한 논의가 아닙니다.
아,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인(庶人)이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 공론이 없은 뒤에야 초야에서 사론(士論)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론이 아래에서 격렬한 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만일 시세에 빌붙어서 조론(朝論)에 화응(和應)하고 공정을 칭탁하면서 사정(私情)을 부려 당대의 현인을 몰래 모함하는 자가 스스로 포의(布衣)의 공론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여철(余喆)·황이옥(黃李沃)15)의 소위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아, 수년 이래 조야의 사이에 인심이 날로 격렬해졌습니다. 계미년에 관학(館學)의 유생이 소장을 올린 뒤로부터 사론이 발론되었다가 중지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을유년484) 가을에 삼사가 비로소 이이와 성혼을 논하여 이름을 당적(黨籍)에 편입시켰습니다. 이에 태학의 선비들이 소장을 올려 논변하려 하였는데, 그때 재임(齋任)으로 있던 자가 뒤에 소장을 올린 무리들에게 저지당한 바가 많아서 그 논의가 마침내 결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정(兪大楨)과 유영겸(柳永謙) 등 7∼8인이 시론(時論)에 빌붙어서 진취(進取)의 매개로 삼고자 하기에 이르러서는, 종사(從祀)하자는 공론을 가탁하여 은밀히 정인을 욕하는 간계를 부려 성리학(性理學)을 강명(講明)한 이이를 가리켜 도를 그르치고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 하고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는 성혼을 가리켜 이름을 팔고 성예를 구하는 선비라 하였으니, 이는 실로 기묘년의 간흉(奸兇)이 사림을 해치던 여론(餘論)16)으로서 유대정 등의 말이 그와 은연 중 합치됩니다. 그리하여 머리를 감추고 논의를 정립하여 많은 선비를 농락하였는데 소장을 쓰던 날에 이르러서는 기미를 알고 가지 아니한 자가 태반인가 하면 어떤 이는 무심코 가서 참여하면서 소장의 사연을 보지 않은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정 등이 그들을 다 열서(列書)하여 명수(名數)를 허세로 열기(列記)하여 인주로 하여금 그를 보고 많은 선비들 사이의 공공의 논의로 여기게 한 것입니다. 그때 속은 자가 한두 사람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계미년 황해도의 소두(疏頭)인 생원 유대춘(柳帶春) 등과 서울의 선비 약간인들이 모두 속은 속에 들어 있었으므로 또한 소장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기 위하여 소장을 갖추어 올리려 할 즈음에 시론이 크게 험악하여지자 부형들이 통렬히 금하였으므로 또 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도성의 선비로서 간사한 모의를 미리 알고 당초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자 70∼80인이 서로 모여 모의하기를 ‘삼사의 무망(誣罔)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가하거니와 모범 지역인 태학(太學)에서 이처럼 도를 어지럽히는 논의가 있으니, 변덕스럽고 간휼(奸譎)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다. 그런데 정원에서는 이 무리들의 소위를 태학의 공공의 논의라 하기에 이르렀으니, 인신이 군부를 속임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이르렀고 사문(斯文)이 장차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이 나아가서 물리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수천인의 소장을 갖추어 궐문에 크게 모여 장차 합문(閤門)을 두드려 호소하려 하였으나 해가 저물어서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 또 모였더니, 어떤 사람은 부형의 위협으로 어떤 사람은 화복(禍福)으로 으르고 겁주는 바람에 위축되어 논의가 일치되지 못한 탓으로 파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많은 선비들이 서로들 ‘시배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하루하루 더 심해지니 말로 다투기가 어렵다. 또 시비는 한때에 혼란한 경우가 있지만 공론은 백대에 정해지는 것이니, 문을 닫고 강학하며 행동을 바르게 하고 말은 겸손히 하여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바를 행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지난날 조헌의 상소가 나오게 되어서는, 조헌 또한 오당(吾黨)의 선비이기는 하나 논의를 세움이 일방적이어서 스승의 뜻에 크게 어긋나 장차 고인이 된 스승의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하여금 또한 후세에 민멸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70제자의 상(喪)이 있기도 전에 대의(大義)가 이미 어긋났다17).’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문(同門)의 선비가 서로 모여 ‘종전에 우리들이 소장을 올릴 적에 일찍이 근원까지 궁구하는 논의를 한 적이 없었으므로 고인이 된 스승을 존모(尊慕)할 줄 아는 자라도 고인이 된 스승의 풍지(風旨)를 알지 못하여 과격한 논의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한번 변론하여 위로는 우리 임금께 진달하고 아래로 동지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지난 겨울부터 서로 강론하고 서로 의견을 모아 스승이 조정에 벼슬할 적의 시말에 대한 실적을 대강 기술하였는데, 무릇 수개월 만에 소장이 비로소 탈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식자는 ‘분분하게 소장을 올리는 것은 평이하게 살면서 천명을 기다리는 도리18)가 아니다. 더구나 시배는 시비(是非)와 명의(名義)를 돌보지 않고 오직 공의(公議)와 힘껏 다툴 마음을 먹고 있을 뿐이니, 이 논의가 나가더라도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소요의 자료만 될 뿐이다. 저 조헌의 말이 스승의 뜻을 잃었지만 또한 우리들의 소견이 아니고 보면 스승에게 또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전일의 경계를 어기지 말고 물러가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하였는데, 동문 선비들 대다수가 이 말을 그럴싸하게 여기고 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장차 홀로 진달하려 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입이 닳도록 신을 극력 말리면서 ‘그대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스승의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한 사람이 소장을 연달아 올리는 것은 번독스러울까 두렵다. 그리고 남의 사적인 서찰을 들추어내는 것도 크게 사리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또 성대한 세상에서 할 일이 아니다. 스승의 뜻을 발명한다 하더라도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 것[柱尺直尋]19)은 옛 사람도 부끄럽게 여긴 바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 또한 이 말을 옳게 여겨 소장을 반도 쓰지 못한 채 중지하였습니다.
지금은 뜬 의논이 시끄럽게 들끓고 괴이한 논의가 난무하여 소장을 올리지 않아도 소요는 매한가지이니, 이 소장이 한 번 나가서 스승의 뜻이 만분의 일이라도 발명되는 바가 있으면 번독스럽게한 데 대한 주벌(誅罰)과 남의 서찰을 들추어 낸 죄책을 신들이 당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차마 스승이 성세(聖世)에 무고당한 것을 범연히 보고만 있으면서 끝내 드러내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탈고한 소장에 스승이 이발·정철·김우옹의 무리와 왕복한 서찰을 첨입(添入)하여 삼가 목욕하고 백번 절하며 면류(冕旒) 아래에 진달합니다. 논술한 것은 실로 제배(儕輩) 사이의 공공(公共)의 논의요 진실로 신들 한두 사람의 소견은 아닙니다. 인용한 스승의 왕복 문자는 모두 이이의 본가에 있으니 어찌 감히 일호라도 장황히 떠벌여서 옛 사람이 ‘임금을 섬김에는 속이지 말라.’는 경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이가 조정에 벼슬하면서 지녔던 시종의 공심(公心)을 헤아리고 조헌의 본말이 어긋난 잘못된 소견을 아시어, 조정을 위로하고 사림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소장이 올라간 지 26일 만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의 소장에 ‘들뜨고 조급하며 진출하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앞을 다투어 일어나 부회하였다. 그때 심의겸의 문에 출입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종유하며 종처럼 알랑거리던 무리가 영합하여 불의로 들어간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였고, 또 ‘전일 심의겸에 빌붙던 무리가 일시에 동인에게 납관(納款)하여 창을 거꾸로 돌려 심의겸을 공격한다…….’ 하였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임금을 섬김에는 숨김이 없는 것이 옛날의 도리이니 그대는 하나하나 죄다 들어서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고, 조광현(趙光炫)·이귀(李貴)를 명초(命招)하여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조광현은 이미 시골로 내려갔으므로 이귀를 불러 물어 보았더니 ‘문자로는 자세히 다 말씀드릴 수 없으니 면대하기를 청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가 창졸간에 서계(書啓)할 수 없다면 우선 물러가서 서계하라.”
하였다. 이귀가 회계(回啓)하기를,
“고인이 된 스승이신 이이(李珥)는 충심으로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한 번 시론(時論)을 거스르자 터무니없는 비방이 백방으로 나와 날로 새로와지고 달로 성해졌는데, 이것이 인심이 날로 격렬해지고 공론이 옆길로 터져나간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해를 따지지 아니하고 이이의 본심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에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이의 심사가 조금이나마 성명의 세상에 발명되는 바가 있다면 신은 만번 주륙을 당하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 성비(聖批)로 하문하시는 분부를 받드니 이야말로 신자가 숨기지 않고 다 말씀드릴 때입니다.
신이 이른바 ‘들뜨고 조급하며 진출하기를 좋아하는 자’란 백유양(白惟讓)·노직(盧稙)·송언신(宋言愼)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일일이 진달하려 한다면 어찌 이 수삼 인의 무리에 그치겠습니까. 그 가운데 두드러진 자가 이들입니다. 전일 심의겸과 체결하였다가 심의겸이 실세(失勢)한 뒤에 도로 심의겸을 공격한 자는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윤의중(尹毅中)입니다. 이들은 말할 거리조차 못됩니다.
또 심의겸과 서로 알고 지내는 정분이 이이에 비할 바가 아닌 자로는 이산해(李山海) 같은 자가 있습니다. 시배가 심의겸을 아는 것을 이이의 죄로 삼는다면 먼저 이 사람을 공격해야 옳습니다. 시론에 거스르지 않은 까닭으로 이 사람은 공격하지 않고 이이만 죄를 주려 하다니 이것이 과연 임금을 섬김에 속이지 않는다는 도리입니까. 신이 이산해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이가 심의겸과 체결하여 일을 같이하지 아니한 것을 다른 사람은 혹 모를지라도 이산해는 반드시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산해는 이이의 평생 고구(故舊)의 정분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이가 무고당한 것을 멀거니 보고만 있으면서 주상의 앞에서 그의 본심을 한마디도 발명한 적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구원(九原)에 있는 이이도 유감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이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바라건대 이산해를 불러서 심의겸과 서로 알고 지낸 정분이 이이와 누가 더 깊었는가를 물어 보소서. 그러면 천일(天日)이 위에 계신데 산해가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습니까. 산해가 심의겸에게 준 시에,
서울에 봄이 오니 서찰을 다시 보겠고 산길 깜깜한 밤에 친숙히 서로 맞네 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심의겸을 모르는 자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아침저녁으로 서로 종유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른바 ‘종처럼 알랑거렸다.’는 자란 정희적(鄭熙績)입니다. 신이 자신의 화를 두려워하여 정직하게 진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시배의 무망(誣罔)함을 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재주는 엉성하고 글은 졸렬하여 우선 물러가서 자세히 아뢰려 하였으나 임금께 아뢰는 말을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임금의 말을 집에 묵히는 것은 더더욱 미안한 일이 되겠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는데, 회보가 없었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이귀가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변명하여 아뢰기를, “공론은 백대에 정해지는 것인데, 이귀가 매양 말로 쟁변합니다.”하니, 대답하기를,
“바른 말이 사면에서 이르는데 그대들이 한 자의 종이로 막아 가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뒤에 경연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자, 상이 이르기를,
“이귀의 말은 곧 만세의 공론이다.”하니, 논하는 자가 조금 저상되었다.
당시 승지는 모두 한쪽의 준론(峻論)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이귀를 두렵게 하여 대답을 잘못하도록 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몽당붓을 주고 재촉해 문자를 지어 올리게 하였으므로 자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침 알지 못하는 어떤 이졸(吏卒)이 등 뒤에서 뾰족한 붓 한 자루를 몰래 던져 주었으므로 드디어 계사(啓辭)를 초하여 즉시 올렸다.
선조 22권, 21년(1588 무자 / 명 만력(萬曆) 16년) 1월 3일(정해) 3번째기사
《통감강목》을 강하고 나라의 사기, 재해 상황, 왜적의 동향 등에 대해 의논하다
초경(初更)에 상이 편전에 나왔다. 참찬관(參贊官) 황섬(黃暹), 시독관(侍讀官) 홍인상(洪麟祥), 검토관(檢討官) 조인득(趙仁得), 기사관(記事官) 정기원(鄭期遠)이 입사하여 《통감강목(通監綱目)》의 동한 헌제기(東漢獻帝紀)를 진강하였다. 인상이 아뢰기를,
“이때 유비(劉備)가 한 세대의 영웅이며 제실(帝室)의 후예로서, 손권(孫權)과 더불어 힘을 합쳐 조조(曹操)를 도모하였으니, 그 계책이 매우 잘된 것입니다. 만약 유비가 없고 손권만 있었다면 조조를 절대 홀로 당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고, 조인득이 아뢰기를,
“만약 유비만 있었어도 능히 조조를 대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조를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유(周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비가 오(吳)와 위(魏)를 평정한 뒤에도 헌제(獻帝)가 그대로 있었다면 끝내 헌제를 보필하였겠는가?”
하니, 조인득이 아뢰기를,
“소열(昭烈)이 헌제의 흉문(凶聞)을 전해 들은 뒤에야 즉위하였으니, 만약 헌제가 그대로 있었다면 소열이 제위(帝位)에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유비는 반드시 신하로서 헌제를 섬기겠지만, 항우(項羽)가 만약 의제(義帝)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한 고조(漢高祖)가 끝내 신하의 절의를 지켰겠는가?”
하니, 홍인상이 아뢰기를,
“동공(董公)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의제(義帝)의 상(喪)을 발표하였는데,20) 군신(君臣)의 의(義)를 어찌 남의 말을 빌어서 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논한다면 한 고조의 마음은 진실로 천리(天理)에 순수(純粹)하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때 호소(縞素 : 백성의 喪服)를 입은 늠름한 대의(大義)는 한 고조만이 단행할 수 있을 뿐, 딴 사람은 절대 그러하지 못할 것입니다. 소열의 신하 중에 제갈양(諸葛亮)을 제외하고는, 대의를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갈양이 아무리 광복(匡復)시키려 하였으나 한말(漢末)의 사기(士氣)가 여지없이 떨어져 있었으니, 어떻게 국사를 경영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라란 사기로써 부지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홍인상이 아뢰기를,
“신하의 도리는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합니다. 저번 대간(臺諫)의 의논은 별로 큰 잘못이 없는데, 하교가 너무 준엄하시니 극히 미안합니다. 당 태종(唐太宗)은 별로 양주(良主)가 아닌데도 능히 위징(魏徵)의 말을 용납하였으니, 역시 기이한 일입니다.”
하고, 조인득은 아뢰기를,
“권협(權悏)은 털끝만큼도 말썽을 일으킬 사람이 아닙니다. 이후로는 사람들이 상(上)의 마음이 어떠하실까 염려하여 지레 겁을 먹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황섬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미나리를 드린다, 또는 햇빛을 드린다21) 하였는데, 이 어찌 미나리나 햇빛을 귀하게 여겨서였겠습니까. 다만 윗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근래에 사습(士習)이 극히 퇴패되었는데, 경외(京外)가 다 그러하여, 덕을 높이고 행(行)을 닦는 자가 드물며 글을 읽고 문(文)에 능한 자가 전혀 없으니, 진실로 한심스런 일입니다. 신이 칠실(漆室)22)에서 한 가지 어리석은 계책을 생각해 보았는데, 각도(各道)의 감사가 관하를 순찰할 때 학문을 강(講)하고 재주를 시험한 뒤 조정에 이를 계문(啓聞)하고 상(賞)을 논하게 한다면 혹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하고, 홍인상은 아뢰기를,
“사기의 성쇠(盛衰)에 나라의 흥망이 매어 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년인 무진·기사 연간에는 이황(李滉)과 같은 숙유(宿儒)가 있었으므로 선비된 자가 다 높일 줄 알아 그 이름을 듣고 그 사람을 상상하며, 저마다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에 뜻을 두어, 당시의 사기가 울연(蔚然)히 볼 만하였으나 지금에는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이 없고 나라에서 배양하는 방법이 없어 퇴패된 사습이 점차 오하(汙下)한 데로 나아가고 있으니, 위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약 이를 안다면 예우(睿憂 : 임금의 걱정) 또한 많으실 것입니다.”
하고, 조인득은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지난 병술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조하(朝賀)할 때, 천관(千官)이 조복(朝服)을 입고 동반(東班)에 서고 신 등이 흑의(黑衣)를 입고 그 아래에 섰는데, 중서사인(中書舍人)과 서길사(庶吉士) 등이 앞을 다투어 와서 묻기를 ‘어찌 흑의를 입고 있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전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하였더니 ‘동반에 서는 이는 의당 조복을 입어야 한다.’ 하기에 서반(西班)의 뒷줄을 살펴보니 섬라국(暹羅國)·회회국(回回國) 등의 사신은 과연 조복을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올려서 조복 차림으로 입반(入班)하는 것이 의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오래도록 경연(經筵)에 나오지 못하였는데, 민간의 기근(飢饉)과 질고(疾苦)에 대하여 그대들은 혹 달리 들은 바가 있는가? 그리고 서로(西路)의 사정은 어떠한가?”
하자, 조인득이 아뢰기를,
“지금 곽산(郭山)·용천(龍川)·숙천(肅川)·박천(博川)·안주(安州)·의주(義州) 등의 고을에 기근이 매우 심하여 백성이 다 유리(流離)하고 기읍(畿邑) 또한 그러합니다. 소신이 보건대, 금호문(金虎門) 밖과 양쪽 행랑(行廊) 아래에 누더기 옷에 거적자리를 맨 자들이 매우 많기에 그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모두 빌어 먹는 유민(流民)들로 그 목소리가 너무 애절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에게 비축된 곡식이 없으므로 겨우 한 해의 흉년만 만나도 그처럼 구제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황섬이 아뢰기를,
“무릇 재화(財貨)나 백물(百物)은 그 한계가 있는데 지금 사치가 풍조를 이루어 의복·음식의 폐단이 성하여 이루 막을 수 없으니, 위에서부터 검덕(儉德)을 숭상하여 풍속을 교화하시면 백성이나 임금의 용도가 족하여질 것입니다.”
하고, 홍인상은 아뢰기를,
“그러한 폐단이 하늘의 재변(災變)보다도 더 심하다는 고인(古人)의 말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오늘 이명생(李命生)의 상소를 보았던가?”
하자, 황섬이 아뢰기를,
“소신이 정원에서 보았는데 그 처리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어찌하여 어렵다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황섬이 아뢰기를,
“시행할 만한 계책도 아니고 소문만 번거롭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문이 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왜로(倭虜)로 하여금 우리나라에서 그런 말이 있었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 좋다. 또한 그들의 사신이 온 뜻을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였다. 황섬이 아뢰기를,
“이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차중(借中)23) 하려는 데 불과한 듯합니다. 당초의 전교는 만고(萬古)를 통틀어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으로 지극히 지당합니다. 그러나 왜로는 추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신도 그 실정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홍인상이 아뢰기를,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보이는 대로 베어야 합니다. 어찌 용납하여 들일 수 있겠습니까. 대개 해외(海外)의 표한(慓悍)한 위인들을 어찌 중국의 예의로써 책(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들이 와서 우리의 사신(使臣)을 청하는 데는 반드시 그 속셈이 있는 것이니, 그 실정을 파악해서 잘 처리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황섬이 아뢰기를,
“지금 온 사신은 하나의 용렬한 무부(武夫)이니 곧 전날 도선주(都船主)로서 자주 우리 나라에 왔던 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 나라에 문자를 해득한 중(僧)이 없지 않으니 중을 보내 수호(修好)를 청하는 것이 좋을 터인데 꼭 무부를 보낸 데는 혹 우리 나라의 사신을 청하다가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이를 핑계로 작적(作賊)하려는 계획을 세우자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황섬이 아뢰기를,
“우리에게 실수가 없으면 그만입니다. 어찌 저 왜로의 사정까지 알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온 사신을 관찰하건대 원대한 계략은 없는 듯하니, 그저 찾아온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의리로써 대우할 뿐입니다.”
하고, 홍인상이 아뢰기를,
“국가의 민력(民力)이 튼튼하고 변비(邊備)가 허술하지 않다면 저들에게 아무리 모종의 모사가 있다 하더라도 염려할 나위가 없지만, 지금 국운이 불행하고 병력과 민력이 함께 병들어 그 뿌리가 뽑혔으므로 일찍이 조그마한 도적을 만났어도 그 수모(受侮)가 적지 않았는데, 만약 큰 도적을 만나면 어려움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이는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밤낮으로 강구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선조 22권, 21년(1588 무자 / 명 만력(萬曆) 16년) 1월 5일(기축) 1번째기사
조헌의 상소를 소각하고 내리지 않았는데 거기에 실린 동·서 각인들의 관계와 행실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지금 조헌의 소(疏)를 보니, 이는 인요(人妖 : 정상에서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 라 하늘의 견책이 지극히 깊으니, 두렵고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어찌 과인(寡人)이 현상명경(賢相名卿)을 지성으로 대우하지 않고 직무를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았던 소치가 아니겠는가. 더욱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소(疏)를 불가불 내려야 하겠지만, 또 차마 내릴 수도 없다. 이 소가 한번 내려가면 그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므로 아예 내가 그 허물을 지고 이미 소각시켜 버렸으니, 사관(史官)은 나의 허물을 대서(大書)하여 후세를 경계하였으면 한다.”
하였다. 처음에 조헌이 옥천군(沃川郡)에서 감사 권징(權徵)에게 투소(投疏)하자, 권징이 조헌으로 하여금 직접 정원(政院)에 올리게 하였으므로, 이번에 정원에 올리며 말하기를,
“지난 해 정원에 소를 올릴 때, 정원이 먼저 유전(柳㙉)·노식(盧植)에게 간통(簡通 : 대각(臺閣)의 벼슬아치가 서면으로 의견을 통합하는 일) 한 뒤에야 입계(入啓)하였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게 하였다. 이번의 소에 대해서는 간통하지 말고 바로 속히 입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그 소중(疏中)에 잘못 쓰인 곳과 격식에 위배되는 곳이 많은 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말을 노여워하여 한 차례 훑어보고 바로 입계시킨 뒤에 한마디 회계(回啓 : 임금의 물음에 대해 심의하여 上奏함) 하려고 기초(起草)를 하다가 소각시켰다는 명이 갑자기 내려오자 그만 두었다. 그 소의(疏意)의 대개는, 도술(道術)·국운(國運)·군식(軍食)·비변책(備邊策)을 논하고, 끝에는 일본(日本) 정벌(征伐)을 논하였는데, 일본과 단절하는 계책과 우리를 강하게 하는 계책이 들어있었다. 또 소 중에 별폭(別幅) 2도(度)가 있는데, 매조(每條) 아래 대주(大註)를 붙이고 대주 안에 또 소주(小註)를 붙여, 번번이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이(李珥)의 학문을 증명하였다. 또 이이가 이황(李滉)과는 뜻도 같고 도(道)도 같은데, 이황의 문도(門徒) 중에 하나도 그 스승의 뜻을 아는 이가 없어 서로 헐뜯어 이이와의 사이를 둘로 갈라놓으려 하고 있다고 하고, 노수신(盧守愼)은 겨우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이황과는 서로 반대되니 이는 위학(僞學)이라고 하면서, 그의 ‘욕심은 사람의 성이다. [欲者人之性]’는 시(詩)와 ‘사람의 욕심은 천성이 아니다. [人欲非天性]’는 두 시를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또 노수신이 신(臣)의 충고를 듣지 않고 완동(頑童)들과 친하며, 을해년에 출생한 자는 장차 재상(宰相)이 될 것이다 하여 아무리 서리(胥吏)의 무리라도 반드시 더불어 계(契)를 맺었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 옥천군(沃川郡)에서 호상(護喪)을 맡았던 아전을 시켜 해마다 목화(木花)를 반복 무역하여 권귀(權貴)를 부르고 재물을 주어서 그 자제와 친척 중에 벼슬을 제수받은 자가 11명이나 되며, 주사(籌司)는 군국(軍國)의 대사를 대처하는 곳인데 봄에는 객(客)들과 대좌하여 술을 마실 뿐 비변(備邊)에 대한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가을에는 신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정유길(鄭惟吉)은 이민각(李民覺)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의녀(醫女)에 고혹(蠱惑)되어 그 조부(祖父 : 鄭光弼)의 풍도를 크게 무너뜨렸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 정유길은 기대항(奇大恒)의 벗으로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첩을 차지하였고, 김귀영(金貴榮)·유전(柳㙉)은 붕사(朋邪)의 괴수로 나라를 저버리고 외구(外寇)를 불러들였으며, 김응남(金應南)·백유양(白惟讓)·허봉(許篈)·이발(李潑)의 모사만을 듣고 조권(朝權)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그 모주(謀主)는 이산해(李山海)라고 하였고, 그 주(註)에 ‘유전(柳㙉)은 본디 원대한 계책도 없고 다만 이산해와 결탁하여 높은 반열(班列)에 올랐으므로 정철(鄭澈)이 심지어 유전의 백마(白麻)를 찢어 버리려 하였으니, 정철은 오늘의 양성(陽城)24) 이다. 이산해가 정철을 미워하여 이이를 정철의 구교(舊交)라 해서 아울러 절교하는 등 미천할 때의 벗을 영귀할 때 잊어 버렸으니, 이는 비부(鄙夫)의 태도이다.’고 하였다.
또 서인원(徐仁元)과 심대(沈岱)는 지금 동인(東人) 중의 거벽(巨擘)이다. 심암(沈巖)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심대가 그 아우인 때문이오, 서예원(徐禮元)이 형(刑)을 바로 받지 않은 것은 서인원이 그 형인 때문이며, 심암을 추천한 자는 유전이오, 서예원을 기용(起用)한 자는 이산해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심암의 패군(敗軍)은 곧 유전의 패군이오, 서예원의 패사(敗事)는 곧 이산해의 패사이다. 심암이 비록 죽었으나 두 사람이 오히려 살아 있으니, 남북(南北)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명령을 달게 받으려 하겠는가. 우선 이 두 사람부터 파출(罷黜)시키고 급히 중사(中使)를 보내 박순(朴淳)과 정철을 소환하여 조권(朝權)을 위임하고 세자 책봉을 의논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정언신(鄭彦信)은 나라를 저버리는 악인이오, 권극례(權克禮)는 벼슬을 판 간인(奸人)이라 하였고, 그 주(注)에, 국가에 식량이 한창 부족한데, 호령(湖嶺 : 충청도와 경상도의 별칭)에서 쌀 1백 석을 수송하여 허봉과 송응개(宋應槪)에게 뇌물로 주므로, 임윤신(任允臣)과 한백후(韓伯厚)가 회계(會計)에 대해 입계(入啓)하려 하다가 노식(盧植)의 위협으로 한백후가 끝내 그만두고 말았으니, 노식이 비록 죽었으나 관작을 삭탈하고 정언신도 의당 강등시켜야 하며, 권극례는 탐음남종(貪淫濫從)하다고 하였다. 또 자신에게 굶어 죽은 한 아우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삼공(三公)이 나의 아우를 죽인 것이다. 삼공이 음양을 잘 섭리하여 시화연풍(時和年豊)하였다면 내 아우가 반드시 죽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심공에게 그 책임을 지운다면, 나의 아우를 직접 죽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윤경(尹暻)은 허봉을 깍듯이 섬긴 자이다. 허봉의 일당 김응남(金應南)·백유양(白惟讓)·홍가신(洪可臣)·이발(李潑)·이길(李洁)이 서로 조정과 결탁하여 구호했기 때문에 그 아들 홍렬(弘烈)의 체포가 늦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또 허봉과 이양중(李養中)은 어려서부터 절친한 벗으로 함께 한 기생을 간음했다고 하였다. 또 양사기(楊士奇)를 이어 서익(徐益)마저 죽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서기(徐起)·송익필(宋翼弼)을 군중(軍中)에 두어 군기(軍機)를 참찬(參贊)하게 하고, 또 박인적(朴麟迹)으로 둔전관(屯田官)을 삼아 성적을 책임지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일본의 사신을 구류시키고 이를 천자(天子)에게 고하여 문죄(問罪)를 단행한다면 종계(宗系)를 개정(改正)하는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선왕조(先王朝)에서는 복상(卜相 : 정승을 새로 가려 뽑음)에 적격자를 얻어 풍속이 순미(淳美)하므로 강상(綱常)의 변(變)이 없고 다만 홍길동(洪吉同)·이연수(李連壽)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항간에서 욕을 할 때는 으레 이 두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는데, 지금에는 복상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여 풍속이 괴패(乖敗)하고 강상의 변이 곳곳마다 일어나므로 홍길동·이연수의 이름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일을 의논하려면 황임(黃琳)·이증(李增)·안자유(安自裕)·이준민(李俊民)·김명원(金命元)·홍성민(洪聖民)·황정욱(黃廷彧)·이산보(李山甫) 등을 불러들여야 한다. 이들은 다 질실(質實)하고 유아(儒雅)하여 함께 일을 의논할 만하다고 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소인(小人)은 모모(某某)이다. 반드시 양연(粱淵)이 있어야 김안로를 제거할 수 있고, 이탁(李鐸)이 있어야 이양(李樑)을 제거할 수 있고, 박순(朴淳)이 있어야 윤원형을 제거할 수 있고, 정철이 있어야 김개(金鎧)를 제거할 수 있으니 정인군자가 조정에 있어야 간사한 자가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이가 ‘네가 미천한 사람으로 조정(朝廷)을 그처럼 지척(指斥)하고 있으니, 혹 상으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일이 없겠는가. 화(禍)가 반드시 자신에게 미칠 것이다.’ 하기에, 신은 ‘그렇지 않다. 박순(朴淳)은 충렬(忠烈)한 선비로 선왕조(先王朝)로부터 알려진 사람이오, 정철은 충신(忠藎)의 선비로 상으로부터 의중(倚重)을 받는 사람이오, 성혼(成渾)은 학문의 선비로 상으로부터 초빙을 받은 사람이며, 민순(閔純)이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춘금(春金)의 옥사(獄事)와 백모(白帽)의 상소25)에 대해서는 상으로부터 채용된 바가 있다. 신의 소(疏)를 보면 반드시 가납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선조수정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萬曆) 17년) 7월 1일(병오) 3번째기사
전 의정부 영의정 박순의 졸기
전 의정부 영의정 박순(朴淳)이 졸(卒)하였다.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이다. 박순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하여 마음이 평탄하고 화평하여 남과 대립이 없었다. 일찍부터 서경덕(徐敬德)에게 수학(受學)하고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면 마치 한 덩이 맑은 얼음과도 같아 신혼(神魂)이 아주 상쾌하다.”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검으로 소문이 났다. 명종이 친시(親試)하여 급제시키고 기대함이 매우 중하였다. 그래서 관각(館閣)에 있을 적에 권신(權臣)의 뜻을 거슬러 중한 형률(刑律)로 논죄하였으나 파면하는 데에 그쳤다. 명종 말년에 다시 발탁 기용되어 두 권신(權臣)을 탄핵하여 내치니, 사론(士論)이 비로소 신장되고 조정이 엄숙하여져 선류(善類)의 종주가 되었다. 노수신과 함께 정승이 되어 정승의 자리에 있은 것이 14년이나 되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명망이 중하였으나 사람들이 건명(建明)한 바가 없는 것을 결점으로 여겼다, 그러나 박순은 스스로 경국 제세(經國濟世)에 부족하다 하여 오로지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양보하였으므로 이이와 성혼을 힘껏 천거하였고 시종 협력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당론(黨論)이 나뉘어지게 되어서는 박순은 이이와 성혼을 편든다 하여 탄핵을 많이 받았는가 하면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하면서 ‘세 사람은 모양은 다르나 마음은 하나다.’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상이 이르기를,
“선류(善類)끼리 상종하는 것이 도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물러나서도 오히려 상의 권념(眷念)이 쇠하지 않았다.
이때에 졸하니 나이 67세였는데, 조야(朝野)가 애석히 여겼다. 박순은 문장에 있어 한당(漢唐)의 격법(格法)을 추복(追復)하였고 시에 특히 능하여 또한 한 시대의 종주였는데,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 등이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이로부터 문체가 크게 변하였다. 《사암짐(思庵集)》이 세상에 유행한다.
선조수정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萬曆) 17년) 12월 1일(갑술) 19번째기사
전 부윤 남언경을 하옥하였다가 석방시키다
전 부윤(府尹) 남언경(南彦經)을 하옥하였다가 얼마 뒤에 석방하였다. 언경이 전주에 있을 적에 정여립을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이때에 여립에게 분군(分軍)하기를 청한 일이 발각되어 나국(拿鞫)하였으나 곧 석방되었다. 또 여립의 서사(書舍)에 시를 쓰면서 주자(朱子)에다 비한 일로 인하여 대간이 재차 하옥시키기를 논계하였는데 체직시켜 방출(放出)하였다. 언경은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이황(李滉)과 학문을 강론하여 벗이 되었다. 명성이 일찍 드러나고 여러 차례 천거되어 조정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그의 학문은 양생(養生)을 주로 하여 조행이 독실하지 못하였고 부(府)를 다스리는 데에도 훌륭한 치적이 없었다. 이때에 다시 옥에 수감되자 정철이 동료에게 익살로 말하기를,
“내 벗 시보(時甫 : 남언경의 字)가 과거에 한 번도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옥에서는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하였다. 마침내 그의 신구(伸救)를 힘입어 석방되었으나 드디어 폐기한 사람이 되었다.
선조수정 24권, 23년(1590 경인 / 명 만력(萬曆) 18년) 4월 1일(임신) 9번째기사
전 영중추부사 노수신의 졸기
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노수신(盧守愼)이 졸(卒)하였다. 수신의 자(字)는 과회(寡悔), 호(號)는 소재(蘇齋)이다. 그는 기묘 명신(己卯名臣) 이연경(李延慶)의 여서(女婿)로서 그의 학문을 배워 스스로 장보(章甫)가 되었고 독서하며 예절을 지켰으므로 훌륭한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었다. 그가 반학(泮學)에 출입하게 되자 동렬의 유생들이 숙연한 자세를 취하여 조행(操行)이 달라졌으며, 과거에 급제하여서는 즉시 시종(侍從)으로 들어가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강관(講官)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도(海島)에 가 귀양살이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곤액스런 상황 속에서도 독서를 하고 문장을 저술하며 스스로 즐겼다. 조정에 돌아온 지 7년 만에 특별한 은총을 받아 발탁되어 재상의 지위에 있었는데 전후 16년 동안 대체적인 것만을 힘썼고 함부로 변경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간혹 건명(建明)한 것이 없다고 비난하였으나 따지려 하지 않았다. 이때에 사람을 잘못 추천한 죄로 파직되어 산직(散職)에 있다가 근교의 사가(私家)에서 졸하였는데 나이는 76세였다. 그는 일찍이 자기의 묘명(墓銘)을 지었는데 그 글에 ‘하찮은 일에는 흐릿하여 끝내 누된 적이 있지만 큰 뜻에는 분명하여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하였다. 그가 지은 문집(文集)이 세상에 전해졌다. 그의 문장은 시(詩)에 가장 뛰어나 기발하고 정묘하여 일가견을 이루었으므로 한 편의 문장을 지어낼 적마다 사방의 학자들이 전송(傳誦)하였다. 그의 학문이 애초에는 매우 정밀하고 해박하여 유림의 촉망이 이황(李滉)보다 앞섰었는데 해도(海島)에 가 있으면서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추존하였고, 인심(人心)·도심(道心)·집중(執中) 등의 설(說)을 자기 나름대로 지어 주자(朱子)의 견해에 이론을 제기하자 이황이 그르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도학(道學)은 이황이 나옴으로부터 크게 밝혀졌다. 그런데 수신은 유독 육학(陸學 : 陸象山의 학문)의 종지(宗旨)를 참작하여 사용하였는데 후인들이 더러는 추모하며 칭술하기도 하였다.
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27일(계축) 3번째기사
김응남·성혼·김성일·정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응남(金應南)을 부제학(副提學)에, 성혼(成渾)을 우참찬(右參贊)에 제수하였다. 경상 감사 김성일(金誠一)을 가선 대부에 가자하고, 대호군(大護軍) 정운(鄭運)을 북병사(北兵使)로 추증하였다.
【성일은 젊어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황이 죽을 무렵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조정에 벼슬함에 미쳐서는 준엄 강직하다는 말이 있었다. 일찍이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는 접대가 조금만 예절에 어긋나면 번번이 지적하였으므로 왜인들이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회답하는 서장의 내용이 공손하지 않자 성일이 받지 않으면서 ‘고치지 않으면 죽어도 가지고 돌아갈 수 없다.’ 하자, 왜인들이 그의 의기에 감복하여 끝내는 내용을 고쳤다. 돌아와서는 옥당(玉堂)의 장관에 보임되었다. 차자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면서 궁위(宮闈)와 왕자들의 일에 저촉되는 말이 있었는데, 내용이 매우 긴절하고 곧았다. 상이 겉으로는 너그러이 용납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좋지 않게 여겨 승지로 좌천시켰다. 그때 마침 전옥서(典獄署)의 옥수(獄囚)가 도망친 일이 생기자 상은 성일이 전옥서의 제조(提調)를 겸하고 있으면서 검칙을 잘못하였다는 것으로 파직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성일을 과감한 공격에 합당하다 하여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제수했다.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경상도를 침범하였다. 상은 ‘성일은 타고난 성품이 편벽되고 강퍅하며 용심이 거칠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왜노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극력 주장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소홀케 하여 결국 이 난리가 터지게 하였다.’ 하고서 금오랑(金吾郞)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사면하여 그 도의 초유사(招諭使)로 삼았으며 다시 감사에 제수하였다. 성일은 강개한 마음으로 임지에 나아갔고 험난한 일과 사생을 회피하지 않았다. 한번은 갑자기 적군을 만났는데 장수와 사졸들이 중과부적임을 들어 피하자고 청하였으나 성일은 말에서 내려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서 기다렸다. 적군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가버렸다. 남쪽 지방의 사민(士民)들이 성일이 불러 위무하고 효유한 데 힘입어 안집(安集), 무너져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영남의 인심을 수습한 데에는 성일의 공로가 대부분이었다. 이때 절도사와 순찰사 등의 제관(諸官)이 모두 의관을 차려 입지 않고 군사들과 섞여 지냈었다. 성일이 ‘어찌 우리나라 원문(轅門)의 의용(儀容)을 변형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니, 군관들이 모두 붉은 옷을 입고 관(冠)에는 깃털을 꽂았다. 그가 위험한 때나 평상한 때나 한결같이 한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성일의 공로가 많았음을 들어 자급을 올려주게 하였다. 다만 그의 인품이 고집이 세고 편협하여 수용하는 도량이 없었기 때문에 동서의 분당이 일어날 때에 한사코 공격하기를 힘썼고 잘 조화하여 조정을 안정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부족하게 여겼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 권율의 장계에 ‘정운(鄭運)은 이미 포증(褒贈)하였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은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에 따라 추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수정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일(을유) 10번째기사
경상좌도 순찰사 김성일의 졸기
경상좌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다.
당시 혹심한 병란에 백성은 굶주리고 여역(癘疫)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성일이 직접 나아가 진구(賑救)하면서 밤낮으로 수고하다가 여역에 전염되어 죽었다. 일로의 군사와 백성들이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성일은 성품이 강직 방정하고 재질이 매우 뛰어났는데, 이황(李滉)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젊어서부터 격앙하고 강개하여 기절(氣節)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조정에 있을 때에는 기탄없이 탄핵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일본에 봉명 사신으로 가서는 예절을 철저하게 지켰으므로 왜인들이 경복(敬服)하였다. 그런데 동행과 서로 불화한 나머지 적정(敵情)을 잘못 주달하였으므로 거의 죄벽(罪辟)에 빠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용서하는 왕명을 받고서는 더욱 감격하여 사력을 다해 적을 칠 것을 맹세하였다. 평소 군려(軍旅)에 대한 일은 알지 못했으나 지성으로 군중을 효유하고 관군과 의병 등 모든 군사를 잘 조화시켰는데, 한 지역을 1년 넘게 보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훌륭하게 통솔한 덕분이었다. 그는 임종시에도 개인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 아들 김혁(金㴒)이 옆 방에 있으면서 함께 걸린 염병으로 위독하였으나 한 번도 그에 대해 묻지 않고 오직 국사를 가지고 종사자들에게 권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의열(義烈)에 감동하였다.
김면(金沔)과 김성일이 잇따라 죽으니 집합된 군병들이 많이 흩어져 수습할 수 없었다. 한효순(韓孝純)이 그를 대신하였으나 군정(軍政)이 김성일에 미치지 못했다. 최경회(崔慶會)가 거느린 군사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도 굶주리고 병에 걸려 죽는 자가 서로 잇따랐다.
선조 53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7월 20일(병신) 2번째기사
병판의 교체 문제, 변란에 대응하는 일을 논하다
상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영중추 부사 심수경, 영의정 유성룡, 판중추부사 최흥원, 호조 판서 김명원, 지중추부사 김수, 우승지 구성(具宬)이 입시하였다. 】 이르기를,
“병판(兵判) 심충겸(沈忠謙)이 논박을 당하여 형세가 출사하기 어려우니 누가 대신할 만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병판은 오로지 병사를 조련하는 일을 맡고 있으니 반드시 교사(敎師) 당관(唐官)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자를 얻어야 합니다. 이덕형이 합당한데 아직 어미를 장사지내지 않았고, 이 밖에는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이 군대를 보내 구원할 일은 기약할 수가 없는데 소서비(小西飛)의 종왜(從倭)는 오래지 않아 적의 진영으로 돌아갈 것이다. 적이 만약 그 소식을 들으면 곧 독기를 부릴 것이니 이곳에서 변란에 대응할 일을 반드시 미리 고려하여 잘 조처해야 한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저들 적이 반드시 금년에 돌격해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세월을 오래 끌면 이는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이번 중국의 일은 우리나라에 재앙을 전가시킨 것으로 호랑이를 놀리고서 옷 벗은 아이를 던져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전일에도 송 시랑(宋侍郞)이 화친을 의논한 일을 조정에 진달하지 않아 우리나라에 화를 끼쳤습니다. 신이 이 뜻으로 팽사준(彭士俊)에게 말하니 사준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성룡은 나라의 큰 원수를 잊고 적과 강화를 하고자 하였으나 상이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결국 회유책을 써서 재난을 늦춰야 한다고 말하였다. 고양겸(顧養謙)이 강화의 일로 호택(胡澤)을 보내 주본을 올리라고 재촉할 때 성룡이 그 주문(奏文)을 제술하였다. 비록 ‘화의(和議)’ 두 글자는 없었지만 전편이 다 머리를 감춘 내용으로서, 먼저 우리 나라가 군사는 고단하고 힘은 약하여 결코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 중국이 그 봉관(封款)을 허락하여 적으로 하여금 철수해 돌아가게 해달라는 뜻으로 끝을 맺어 그 글을 호택에게 보였다. 성룡은 처음에 자기가 이 글을 지으면 반드시 그 사실을 알고 죄줄 사람이 있을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병이 들었다고 칭탁한 뒤에 기초(起草)하였는데, 문장을 매우 거칠고 서투르게 지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쳐 짓도록 만들어 놓고 마침내 그 초고를 가지고 가서는 끝내 내보이지 않고 윤근수에게 짓도록 하였다. 근수도 붓을 대기가 어려워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낭료(郞僚) 중에 한번 글을 보면 능히 다 기억하는 자가 있어 성룡이 지은 것을 외워주니 근수가 그것을 모방하여 글을 만들었다. 성룡은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유학하여 유자(儒者)의 이름이 있었으나 조정에 선 지 수십여 년 동안 재상으로서의 업적이 특별히 볼 만한 것이 없고 처리하는 일이 항상 이와 같았다. 왜변(倭變)을 만난 이후에는 생취(生聚 :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음) 하고 교육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삼지 않고 오직 중국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만 일삼았으며, 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의리로써 상에게 경계를 아뢰지 않고 오직 회유책으로 적을 물리칠 계책을 삼았다. 옛날의 이른바 회유책은 적이 와서 요구할 경우 그 납관(納款 : 화친을 받아줌)을 허락하였는데, 오늘의 기미는 반대로 사직을 무너뜨리고 능침(陵寢)을 파헤쳐 의리로 보아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살 수 없는 적과 강화를 하려고 하니 어찌 성하(城下)의 맹서26)에 가깝지 않은가. 탑전(榻前)에서 아뢸 때에는 화의를 그르다고 하여 거짓으로 화의를 주장하지 않는 자처럼 하여 그 마음을 숨겼고 나아가서는 군부(君父)를 속이고 한 세상을 속이고 후세를 속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혹 속이더라도 한 세상은 속일 수 없는 것이며 한 세상은 혹 속이더라도 어찌 후세까지 과연 속일 수 있겠는가.
김수가 아뢰기를,
“적이 만약 호남 지역을 침범하였을 때 학가(鶴駕 : 세자의 행차)가 떠나서 나오면 민정은 더욱 동요될 것입니다.”
하고, 심수경은 아뢰기를,
“동궁은 중국 사신을 접대할 일로 그 쪽에 머물러 있는데 이제는 중국 사신이 나온다는 기별이 없으니 올라오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시점에서는 유언비어가 매우 많으니 올라오면 안 된다. 중원(中原)이 이미 봉공을 거절하였으니 적이 만약 중원을 곧장 침범하려 한다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거칠 것이고 중원이 이 적을 정벌하려고 할 때에도 반드시 우리나라를 거칠 것이므로 우리나라는 적의 싸움터가 되어 자연 멸망되고 말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만약 과도관(科道官)의 논의로써 봉공을 파하였다면 조정이 의당 조치한 일이 있을 듯한데도 별달리 조치한 계책이 없고, 손 시랑의 세 가지 계책 또한 우리나라에 유리한 점을 볼 수 없는데 형세가 만약 궁지에 몰리게 되면 다만 압록강을 수비하려고 한다 합니다. 저들 적이 절강(浙江)을 놓아두고 우리나라를 경유하려는 것은 좋은 계책이라 할 만합니다. 절강은 중국에 있어서 꼬리와 같고 우리나라는 머리와 같으므로 중원이 만약 우리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요동이 반드시 먼저 흔들려 천하의 형세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병의 철수하는 계책은 옳은 것이다. 그의 뜻은, 적이 만약 경상도를 거쳐 곧장 용인(龍仁) 등지에 이르면 반드시 좌우에서 적의 침공을 받게 될 것이므로 경성에 와서 머무르는 것만 오히려 못하므로 지금 철수하려는 것이니, 사실 장수의 책략이다. 그러나 우선 그대로 머물기를 청하는 것이 좋겠으니 머물기를 청하는 자문을 빨리 만들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해주(海州)에 있는 실록(實錄)은 깊은 산의 큰 사찰에 두어야 하니 아마도 영변(寧邊) 지역이 적당할 것이다. 혹시 변고가 있으면 반드시 잃어버릴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니다. 향산(香山 : 사찰)에 보관해 두고 믿을 만한 승인(僧人)에게 승직(僧職)을 주어 그로 하여금 단단히 지키게 하라.” 하였다.
선조 53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7월 22일(무술) 1번째기사
유공신과 정엽이 이요가 왕수인의 학을 칭찬한 것을 비판하다
홍문관 응교 유공신(柳拱辰)과 부수찬 정엽(鄭曄)이 상차하기를,
“성상의 도량이 크고 넓어 궂은 것도 포용하고 모든 말을 수용하여 비록 이요(李瑤)와 같은 괴망(怪妄)한 사람이라도 일을 봉진(封進)하고 대궐에 호소하면, 그 죄는 제쳐두고 그 마음을 허용하여 즉시 소대(召對)하고 친절하게 말씀을 나누셨으니 아름다운 말이 숨어있지 않고 수많은 계책이 다 쓰여질 일이 장차 이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다만 듣건대, 이요는 왕수인(王守仁)의 학(學)을 크게 칭찬하여 성청(聖聽)을 어지럽혔다 하니 신들은 너무나 놀랍고 괴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왕수인의 학은 선(仙)·불(佛)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우리 유학(儒學)의 이름을 빌린 것인데 그 마음이 간특하여 스스로 그 설을 지어내서 크게 떠벌렸습니다. 심지어 ‘선(善)을 생각하지 않고 악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 본래의 면목(面目)을 안다.’ 하고, 또 ‘신(神)이 머물고 기(氣)가 머물고 정(情)이 머무르는 것이며 선가(仙家)의 이른바 장생구시(長生久視)의 도술27)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 하고, 또 ‘오유(吾儒)도 신선의 도가 있다. 안자(顔子)는 32세에 죽었으나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하는 등 그 괴이하고 허탄하여 이치에 어긋난 설은 끝이 없으며, 그 법은 글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는 것을 큰 금기로 삼고 마음을 알 수 없는 경지에 주입시켜 요행히 하루아침에 크게 깨닫는 것을 주장하면서 정(程) 주(朱)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 : 먼저 알고 나중에 행함)을 배척하여 경훈(經訓)을 고쳐 사견(邪見)으로 꾸미기까지 하였으니, 인민(人民)을 혼란시키고 도(道)를 해친 죄가 심합니다. 그러므로 무종(武宗)이 그의 관직을 추삭(追削)하고 방(榜)을 내걸어 그 허위를 천하에 보였으니 그 염려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저 요는 미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일개 사람일 뿐이므로 사실 그와 따질 것은 없습니다. 신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는 점은 전하의 해박한 학문과 고명한 식견으로 엄중히 가려내고 단호히 끊어 허위가 참을 어지럽히고 사(邪)가 정(正)을 해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인데도 도리어 상대하여 그의 견해를 묻고 그의 말에 수답하셔서 요의 말을 허여하신 것처럼 하신 일입니다. 이는 비록 겸허하여 남의 말을 듣는 훌륭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신들은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선비의 추향이 정해지지 않아 그로 인한 화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송(宋)나라의 육구연(陸九淵)은 우리 유가의 학문에다 의탁하였으나 실은 석가(釋迦)의 유파일 뿐이고, 왕수인은 사실 상산(象山)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그 허망하고 방자하여 경훈(經訓)을 배반하며 성인을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더 심했습니다. 선신(先臣) 이황(李滉)이 한 말에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그의 뜻을 행하였다면 그 화가 진 시황(秦始皇) 때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심했을지 모를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무종이 앞에서 그를 죄주고 현유(賢儒)가 뒤에서 공격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요의 사견(邪見)을 배척하여 호오(好惡)를 밝히지 못하셨으니 신들은 전하께서 이치를 강론하는 공부에 또한 완전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도를 엄격히 지키고 성학(聖學)을 더욱 힘써 허탄한 설과 괴이한 술법으로 생각을 어지럽히지 말고 지극히 올바른 도를 구하신다면 성학이 크게 밝아져 사설(邪說)은 자연 사라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건대, 학술의 고명함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나 같은 자는 쉽게 엿보지 못하겠다. 남이 논하는 것을 들으면 월(越)나라 사람이 제(齊)나라 말을 듣는 것 같으니 어찌 감히 알겠는가. 그러나 유의하겠다.”
하였다.
선조 56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0월 17일(신유) 4번째기사
군자감 주부 조목의 항왜 문제에 대한 상소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조목(趙穆)이【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경술(經術)이 있어 유일(儒逸)로 등용되어 일찍이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었다. 】상소하기를,
“신은 이제 나이가 일흔 하나로 이미 관직에 나갈 때는 아닙니다. 다만 국가가 우리 나라 역사 이래 천고(千古)에 없던 참혹한 왜적의 변란을 당하여, 지난 해에도 도성(都城)을 지키지 못하고 서쪽으로 몽진을 하였습니다. 신은 그때에 영외(嶺外)에 있었는데 망망한 천지에 사방은 죄어들어 바라고 의지할 데 없어,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기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잃고 들판 가운데서 울부짖듯이 할 뿐만이 아니었으며, 환도(還都)하시는 날에도 달려가서 천일(天日)이 다시 빛남을 보지 못하여 마음에 항상 통한(痛恨)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9월 28일에 3일자의 정목(政目)을 보니, 신이 흡곡 현령(歙谷懸鈴)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국가의 존망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미약한 힘이나 재주를 하나도 바친 적이 없는데도 은명(恩命)이 멀리 폐기되어 떠도는 이 몸에까지 미쳤으니 감격이 깊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군문(軍門)에 숙배하여 천은(天恩)에 사례하게 된다면 물러나 구학(丘壑)에 엎드려 죽더라도 만족할 것입니다. 신은 출사(出仕)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길을 나선 지 10일 만에 도성에 도착하니 모두 폐허가 되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본 직(本職)이 이미 체직되었는데 또 신에게 본 직을 제수하시니, 신은 실로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국가가 철류(綴旒 : 면류관의 주옥을 꿰어 늘어뜨린 끈)처럼 위태로운데 그 중에서도 가장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항복한 왜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의 부득이 한 입장에서 나온 계책이라는 것을 신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투항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즉시 우리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인데, 지나오는 일로(一路)에 겁략(劫略)을 자행하여 인심이 놀라 구적(寇賊)을 만난 것처럼 가족을 이끌고 피하는 자가 많으며, 또 그들의 오는 것이 그침이 없이 도로에 줄을 이었습니다. 들으니, 그 우두머리 중에도 투항하려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이 적이 안녹산(安祿山)이 말을 바치던 수법28) 을 쓰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강화(講和)한다는 설을 들으니, 더욱 통분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생령(生靈)을 살육하고, 우리의 종사(宗社)를 탕복(蕩覆)하고, 우리의 능침(陵寢)을 훼손하였는데 돌아가지 않은 채 우리의 영토에 가득 있으면서 어떻게 강화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 금(金)나라가 이러한 방법으로 송나라를 속였고 송나라는 스스로 속았습니다. 당시의 재상이던 진회(秦檜)는 이로써 나라를 그르쳐 만세가 지난 지금도 오히려 이를 갈게 하였습니다. 이 점을 전하께서도 깊이 아시는 바이므로 신이 상서(上書)하여 말할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 자연 처치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신은 감히 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천도(天道)는 선한 자에게 복 주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강(强)함을 믿고 잔학함을 부리는 자치고 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흠 잡힐 일도 없는데 저들은 스스로 명분없는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에 재앙을 만듦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결국 복망(覆亡)하는 재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옛 사람 중에 1여(旅 : 단위명 1여는 군사 5백명)와 1성(成 : 단위명 1성은 땅 10리)의 힘으로 중흥(中興)을 이룩한 자가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아무리 잔패(殘敗)되었다 하나 1여와 1성으로 중흥을 이룩한 것에 비하면 백배는 더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덕을 닦아 하늘의 뜻에 부응하고, 인정을 베풀어 백성을 어루만져 종사(宗社)로 하여금 다시 편안하게 하시고, 국운을 거듭 새롭게 하는 것으로써 오랑캐를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으실 것이며, 신의 말을 늙은 선비가 항상 하는 말이라 여겨서 버리지 마소서. 신은 이제 영원히 사직하는 때를 당하여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다만 ‘영원히 사직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기에 있으면서 종사(從仕)하도록 하라.”하였다.
선조수정 29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2월 1일(갑진) 2번째기사
정탁을 우의정으로 삼다
정탁(鄭琢)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정탁은 본래 영남의 한족(寒族)으로서 젊어서부터 명성이 없었는데,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수학하여 동배들의 끌어줌을 입었기 때문에 드디어 현달한 관직에 올랐다. 문학과 재국이 모두 일시의 명류(名流)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오직 비순(卑順)하고 겸공(謙恭)하여 남들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정승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몸가짐을 산승(山僧)처럼 하고 모습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승상(僧相)이라 칭하였다.
선조 60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2월 6일(기유) 1번째기사
《주역》을 강하고, 관찰사의 임명·군공의 허위 문제 등을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 행 대사헌(行大司憲) 홍진(洪進), 동지사(同知事) 이항복(李恒福), 특진관(特進官) 이제민(李齊閔), 참찬관(參贊官) 김우옹(金宇顒), 특진관 윤선각(尹先覺), 참찬관 정숙하(鄭淑夏), 정언(正言) 정형욱(鄭馨郁), 검토관 정경세(鄭經世), 기사관(記事官) 신성기(辛成己)·민유경(閔有慶)·윤의립(尹義立)이 입시하였다. 】 강이 끝나자 정숙하가 아뢰기를,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윤선각에게 이르기를, “경이 유사 당상으로 있으니, 속히 의논해서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덕령(金德齡)은 내가 잘 모른다. 당초에 사람들이 사실과 너무 지나치게 말하더니, 지금은 도리어 무능하다고 여긴다. 위명이 꺾이자 군졸들이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나의 생각에는 비록 필부의 용맹이라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그는 한쪽 지역을 방어하게 할 만하니, 지금 전라 감사에게 하서하여 군병을 뽑아 보내 주기도 하고 또는 군량을 계속 공급해 주기도 해서 군세를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처럼 해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하니,
이항복은 아뢰기를,
“신이 동궁을 배종하고 남하했을 때 호남 사람이 김덕령의 기이한 일을 극도로 말하니, 듣는 자는 살피지 않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 진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상소를 올려서 유 총병(劉總兵)으로 하여금 철수해 돌아가게 하고 영남의 일을 오로지 김덕령에게 맡기려고까지 하였으나, 신은 그 위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옛 역사책속에 실린 관우(關羽)·장비(張飛)의 지혜와 용맹에 대한 일을 보아도 김덕령이 하는 바와 같은 것은 있지 않습니다. 신이 김덕령을 전주(全州)에서 보고 말하기를 ‘옛날에는 군졸 중에서 뽑혀 상장(上將)이 된 사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반드시 먼저 전공을 세운 후에야 명장이 될 수 있으니, 모름지기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뛰어난 공을 세우도록 힘쓰라.’ 하니, 그는 신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그 진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더러 오활한 말을 한다 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군사를 모집할 때에는 풍문을 들은 자들이 단지 기이한 말만을 믿고 적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전공을 세운다 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는데, 지금은 군량이 이미 고갈되고 기이한 일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진에 속한 군사들이 거의 다 흩어져 갔습니다. 또 말[馬]을 색출한 일 때문에 호남의 인심을 크게 잃어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조정에서 비록 군량을 조달해 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따를 군사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여러 장수 중에 오직 이시언(李時言)만이 김덕령과 서로 좋아하여 쓸 만한 사람이라고 하고 김덕령도 이시언과 더불어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니, 김덕령으로 하여금 이시언의 진중에 합치게 하면 온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조정이 사호(賜號)까지 하였는데 지금 이시언의 관하를 삼는다는 것은 사체에 부당하다. 나는 처음에도 믿지 않았지만, 이귀(李貴)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양쪽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는 말을 감히 하였는가. 어찌 그럴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용력은 쓸 만하니, 어찌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인물이겠는가. 모름지기 영남·호남으로 하여금 군량을 계속 조달하여 군세를 도와서 장려해 쓰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영남의 식량 조달은 당초부터 질서가 없이 산란하여 두서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각진의 장수들이 스스로 가져다 먹었었는데, 홍이상(洪履祥)이 내려간 뒤로는 비로소 조정하기는 하였으나 지급하는 수량이 많지 않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불편하게 여겨, 이 때문에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매우 염려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원수의 장계를 보니, 홍이상이 비록 힘써서 하기는 하나 규모가 워낙 협소해서 살릴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아래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미 도원수로 하여금 영남에 가서 감사와 상의해서 경장(更張)하도록 하였습니다. 근래에 듣건대 도원수는 아직까지 우도에 있고 감사와 더불어 상의해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극히 우려됩니다. 영남을 좌·우도로 나누어서 서성을 감사로 삼으려 한 것은, 대개 서성이 재기(才氣)가 있고 남쪽 지방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김응남에게 이르기를,
“진 유격(陳遊擊)이 적을 선유(宣諭)해도 적이 듣지 않는다는데 그래도 중국 사신은 나오겠는가? 적은 중국 사신이 오면 꼭 물러가겠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진 유격은 모욕을 이미 많이 받았습니다. 석 상서(石尙書)는 아마 이 적이 반드시 물러갈 것이라 생각하고 이와 같이 했을 것입니다. 단지 이해룡(李海龍)의 말만 들으면 중국 사신이 나올 경우 적이 물러갈 것 같다고 하지만, 중국 사신이 나올지의 여부는 역시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반드시 중국 사신이 나와서 그들을 물러가게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 유격의 품첩(稟帖)을 얻어본 뒤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영남에 주둔한 군사가 모두 수천 명도 못 되는데 군량마저 떨어졌으니, 적이 만일 물러간다면 그래도 지탱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상교에 의하여 진 유격의 품첩을 본 뒤에 조처하는 것이 매우 온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각기 적의 정황에 대해 말하라. 저 적은 중국 사신이 나온 연후에 물러가려 하고, 중국 조정에서는 적이 물러간 연후에 내보내려고 하니,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윤선각은 아뢰기를,
“소신은 혼미한 사람이니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적이 물러가면 주문(奏聞)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적이 다 물러가지 않았으니 무슨 말로 주문하겠습니까? 진 유격과 누국안(婁國安)의 품첩이 들어가면 중국 조정에서 반드시 조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우리 나라는 주문하지 말고 짐짓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진 유격의 품첩을 보아서, 거기에 만일 절반이 건너갔다고 하였으면 사실대로 주문하기를 ‘중국 사신이 나온다면 적이 물러갈 생각을 가질 것이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왜적이 거짓으로 절반이 건너가는 것처럼 하고 혹시 가지 않았거나 혹은 대마도(對馬島)까지만 갔다가 도로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36척의 배에 1만 5천여 명의 군사를 실었다는 것은 절대 무리이니,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반드시 우리 나라의 주문을 기다려서 사신을 내보내지, 진 유격의 말만 듣고 내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이 물러가지 않았는데 사신이 나온다면 사체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낭패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을 나오게 하려면 마땅히 들은 바에 따라서 주문해야 하고, 만일 사신이 나와도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주문할 것이 없다. 오직 두 가지일 뿐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설사 주문을 한다 하더라도 다만 진 유격이 한 말로 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 유격이 한 말이 있으면 마땅히 그 말대로 처리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저번에 석 상서의 자문을 보니, 적이 물러가지 않더라도 중국 사신은 반드시 나올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우리 나라가 비록 주문을 하지 않더라도 사신은 응당 나올 것 같습니다. 진 유격이 말하기를 ‘내가 경사에 가서 서둘러 사신을 내려보내면 적은 반드시 물러갈 것이다.’ 하였으니, 그가 나올 때 필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적이 물러가는 것은 마치 동쪽 문으로 나가고 서쪽 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책봉을 구하는 것이 만일 실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황제라 자칭하고 있으면서 봉후(封侯)를 구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필시 가탁하는 일일 것이다. 전일에 통신(通信)을 요구한 것도 역시 선화 후전(先和後戰)의 뜻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큰 뜻을 가지고 왔다가 지금은 형세에 곤란한 바가 있기 때문에 봉후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중원을 왕래하며 그 허실을 엿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왜적은 본시 금수인데, 중국 조정에 봉후를 구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왜적이 중국 조정에 통서하기를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부친다.’ 하여, 스스로 한 지역의 천자로 자처하였으니, 이는 바로 침범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의후(許儀后)가 올린 글을 가지고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요즘 사사로 기복(起復)하여 사적(仕籍)에 함부로 오른 자는 깎아버리라는 공사(公事)가 있기 때문에 무사(武士) 중에 기복된 자들은 모두 불안해 하여 연달아 소장을 올리고 있으니, 지금 항식(恒式)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무사를 조정에서 기복함은 전장에 쓰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니, 빠짐없이 다 방소(防所)에 내보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전진(戰陣)에 다 내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스스로 기복한 자도 있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의 자식이 어찌 감히 스스로 기복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매우 해괴한 일이다. 전일 경연에서 아뢴 것도 역시 이를 말한 것이다.”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본사의 회계는 다만 사사로 기복한 자를 지적했을 뿐이지, 무사를 모두 기복하지 말라고 이른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이 병조에 있을 때 보니, 금군 차첩(禁軍差帖)과 군사의 면역(免役)·노제(老除) 등의 첩(帖)이 하루에 거의 50여 장이나 나갔습니다. 만일 국가에 도움이 있다면 상규(常規)에 구애받아서는 아니되나 그 이해를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군(正軍)이 거의 역을 면하고 관속(官屬)도 모두 역을 면하게 되면 장차 형태를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니, 이 폐단을 미리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군수(軍需)에 도움이 된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한갓 폐단만 있다면 장차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익이 많고 손해가 적으면 오히려 할 수 있지만 손해가 많고 이익이 적으면 결코 개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의 말이 옳다. 또 군공(軍功)도 허위가 많다. 군공 성책(軍功成冊)에 기록된 것으로 보면, 평행장(平行長)의 군사가 거의 없어졌을 것인데 오히려 감축된 바가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미안한 줄은 아나 사실이 이와 같다. 비록 꼭 다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그 폐단은 그렇다. 전일 계본(啓本) 중에서 보고한 왜적의 수는 3백 명 미만이었는데 목을 벤 숫자가 3백 명이 넘으니, 극히 무도하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근일에 군공청(軍功廳)의 문서를 보았더니, 그 중에 신의 서압(署押)을 위조한 것이 두 장 있었고 함부로 기록된 자는 30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함부로 기록된 부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폐단도 막지 않아서는 아니됩니다. 지금부터는 군공 성책을 도목정(都目政)29)에 일체 사용치 않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책을 도목에서 쓰고 안 쓰는 것은 비변사와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한명윤(韓明胤)이 영동(永同)을 사수한 공은 신이 일찍이 장계하였습니다. 한명윤은 일개 서생(書生)이면서 종시 역전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그의 아내도 절부(節婦)로서 적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신이 한명윤을 보고 위로하였더니, 한명윤은 ‘이때에 감히 처자의 죽음을 말하겠는가.’ 하여, 신이 도리어 부끄러워하였습니다. 한명윤이 소매 속에서 자그마한 책을 꺼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군부(軍簿)인데, 군량을 얻어가지고 이 고을 경계에 있는 산 속에 숨어서 적을 무찌를 계획을 하기 원한다.’ 하기에, 신이 군량을 넉넉히 주고 또 용장(勇將) 권희인(權希仁)으로 하여금 협력하게 하였더니, 그 뒤에 누차 밤을 이용해 공격하여 적이 물러갔습니다. 권희인은 웅천(熊川)의 싸움에서 죽고, 한명윤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다가 중국군에게 구타당해 죽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들으니 투항한 왜인이 한명윤을 왜인을 포박한 사람이라고 여겨 차 죽였다 한다.”
하자,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도 처음에 듣기는 윤선각과 같았는데, 그 후에 들으니 투항한 왜인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한명윤은 일개 서생으로서 몸을 일으켜 적을 쳤다. 담략(膽略)이 남보다 뛰어났고 성의를 다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활약하다가 끝내는 죽기에 이르렀으니, 옛날의 열사(烈士)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권희인은 자원하고 나서서 적을 치되 종시 혈전하였다. 적의 성에 먼저 오르는 등 용맹을 날려 여러번 전공을 세우고 싸움에서 죽었으니, 역시 장부라 할 만하다. 】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같이 뛰어난 사람은 별도로 포증(褒贈)을 해야 합니다. 김성일(金誠一)은 당초에 의분하여 적을 막았는데, 그 공이 매우 큽니다. 유극량(劉克良)은 파주(坡州)의 접전에서 처음에는 불가한 일로 생각하고 모두 믿고 따르지 않았는데 마침내는 힘껏 싸우다 죽었으니, 또한 가상합니다.”
하고, 홍진은 아뢰기를,
“김성일은 당초에 웅천(熊川)을 지켰는데, 적의 예봉이 몰려와 그 위세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무장과 군졸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발사하지 못하였는데,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꼼짝 않고 앉아서 군관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한 왜졸을 죽이니, 적이 조금 물러나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성일이 있었더라면 진주(晉州)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김성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진주가 보전될 수 있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창의독전(倡義督戰)하기로는 김성일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의 초모격서(招募檄書)를 보면, 충의가 분발하여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성일이 수길(秀吉)에게 속임을 받은 것은 많다. 수길이 전립(氈笠)을 쓴 데다 애를 안고 맨발까지 한 자세로 접견하자, 김성일은 장담하기를 ‘수길은 대수롭지 않으니 일본은 염려할 것이 못 된다.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에 대해서도 사안(謝安)은 듣고 움직이지 않았는데30) , 어찌 이 적을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이것이 수길에게 속임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자, 좌우에서 모두 아뢰기를,
“김성일은 적정(賊情)을 분명히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윤길(黃允吉)은 매우 걱정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간웅(奸雄)이고 평행장(平行長)은 박실(朴實)한데 싸울 때마다 꼭 이기니, 가장 염려된다…….’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이다. 성일은 속임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은 성일과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처지인데 그때 함께 정원에 있으면서 물어보았더니, 성일도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다만 ‘남쪽 지방 인심이 먼저 요동하니, 내가 비록 장담해서 진정시켜도 오히려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이를 염려한 것이니, 어전(御前)에서 아뢴 것은 반드시 잘못 계달(啓達)한 것일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김성일은 자가 사순(士純)이고 안동(安東) 사람인데, 위인이 강직하고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과감한 말로 직간을 하였고, 기축(1589 선조 22)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을 때에는 정직하게 자신을 가져 조금도 의구함이 없었다. 왜인의 서계(書契)에 패만(悖慢)한 말이 많이 있자 엄격한 말로 꾸짖어 물리치고 받지 않으니, 왜적의 괴수도 모두 두려워했고 따라서 서계의 내용을 고쳤다. 그가 귀국해서 홍문관 부교리가 되어 자주 소차(疏箚)를 올려서 당시의 병폐를 절실하게 지적하였다. 간신 정철이 기축역옥(己丑逆獄)31)으로 인하여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을 터무니없는 죄로 얽어 죽이니, 사람들은 모두 최영경의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김성일이 어전에서 항언으로 변명하여 설원과 복관이 되게 하였으니, 청론(淸論)의 한 맥이 이를 힘입어 이어졌다. 임진년 봄에 그는 영남의 병마절도사로 임명을 받아 남쪽 변방으로 달려갔다. 왜적이 이미 이르니 열군(列郡)은 와해되어 풍문을 듣고 온통 분산하였으나 김성일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보수(保守)할 계획을 하였다. 적이 웅천에 들어왔을 때 그는 말에 내려 호상에 버티고 앉아 비장을 독촉해서 싸우게 하여 왜적의 선봉장을 베니, 흉적이 이 때문에 조금 물러서게 되었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김성일이 ‘왜구는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과감하게 말하여 방비를 해이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이 내려져 있었는데, 특별히 이를 용서하고 이내 초유사(招諭使)로 임명하자, 그는 도로 영남 지방으로 들어가서 동지를 불러모으고 의병을 규합하니, 원근에서 모두 향응하였으므로 함락되었다가 도로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이 16∼17읍이나 되었다. 그의 초유 격문은 충의가 분발하고 사의가 격렬하였으므로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로 하여금 듣게 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가 마음이 동해서 눈물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우도 순찰사로 올려 제수되었다. 계사(1593 선조 26)년 여름에 병으로 군막(軍幕)에서 죽으니, 이 소식을 들은 자 중에는 애통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아, 김성일은 옛날의 유직(遺直)이라 할 만한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조목(趙穆)이 전에 소명을 받고 올라오지 않았는데 필시 가난하여 탈 말을 갖추어 길을 떠날 수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다시 소명을 내리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에 그를 경연에 입참시키라는 전교가 계시자, 아랫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부르라. 경연관이 많이 결원되고 두 사람만이 있으니 매우 미안하다. 왜 차출하지 않는가?”
하였다. 【조목은 퇴계 선생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머리가 희도록 경전을 연구하고 행의(行義)가 매우 높았다. 김응남이 그를 불러 경연에 두기를 청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일이다. 】 응남이 아뢰기를,
“근래에 탐풍(貪風)이 크게 일고 있는데 이런 때에는 청백한 사람을 높이 등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종조에서 조원기(趙元紀)라는 자를 통정대부(通政大夫)·가선대부(嘉善大夫)·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린 일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아름다운 규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때에도 청백한 사람이 있는가?” 하자,
응남은 아뢰기를, “이기(李墍)의 청소(淸素)한 절개는 남들이 따르기 어려운 바입니다. 이 밖에 어찌 한두 사람 정도뿐이겠습니까.” 하고,
정숙하는 아뢰기를, “국운의 불행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러 사무가 매우 번거로운데도 위에서 자주 경연에 납시니, 이는 신민의 복입니다.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건대 성종조에 전(前) 직장(直長) 이유의(李惟義)라는 자가 이천(利川) 사람으로서 역학(易學)에 정통하자 역마편으로 불러 올려 경연에 입참시킨 일이 있었으니, 지금도 성종조의 고사에 의하여 역학에 밝은 사람을 널리 구해다가 고문으로 대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조목처럼 어진 자도 경연관으로 삼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하겠다. 김홍미(金弘微)는 박학한 사람인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역변(逆變) 때 파직되어 귀향했다가 변란 후에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는데, 모친 상을 당하여 또 안동 지방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도 아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주역》을 아는지의 여부는 신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대개 박학하니 필시 잘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홍민(金弘敏)은 벌써 죽었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작년에 병사(病死)하였습니다.”
하였다. 【김홍민은 타고난 자질이 온아하고 또 학행이 있었는데, 상주(尙州) 사람으로 현사(賢士)였던 김범(金範)의 아들이다. 】 미시에 경연을 파하였다.
선조수정 29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7월 1일(임신) 3번째기사
문폐의 심화로 긴요하지 않은 서원을 혁파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문폐(文弊)가 너무 심하니, 긴요하지 않은 서원(書院)은 우선 혁파하라.”
하였다. 서원의 설립은 명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죽계(竹溪)에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창설하여 선현(先賢)인 안유(安裕)를 제사지냈고, 그 뒤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가 되어 조정에 사액(賜額)과 반서(頒書)를 청하였다. 당시에는 자못 사자(士子)의 강업(講業)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잇따라 설립된 것이 국내에 겨우 10여 군데에 불과했다. 당시 이황이 김종직(金宗直)을 제사지내려 하자 문인 중에 부당하다고 의혹을 가지는 자가 있을 정도로 그때는 존사(尊祀)된 자도 적었으며, 서원만 있고 제사지내지 않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국내에서 마구 본받아 ‘우리 고을에도 제사지낼 만한 현인이 있다.’고 굳이 청하면서 연달아 서원을 세우고 사우(祠宇)를 세웠다. 그러나 이때는 그래도 그다지 폐단이 심하지 않았는데도 상교(上敎)가 이미 이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은 서원이 없는 고을이 없고, 제사를 받는 자도 하찮은 사람이 많다. 유적(儒籍)이 역(役)을 도피하는 소굴이 되어 현송(絃誦)의 미풍이 땅을 쓴 듯이 없어졌으니, 문폐를 운위할 것도 못 된다 하겠다.
선조 65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7월 18일(기축) 1번째기사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론하였다. 상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어찌 각자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하지 않는가?”
하자, 대사헌 김늑(金玏)이 아뢰기를,
“집경전(集慶殿)의 어용(御容)이 지금 예안(禮安) 이황(李滉)의 서당에 있는데 방이 협착하고, 참봉(參奉)이 거처하는 곳이 봉안(奉安)한 곳과 너무 가까우며, 산승(山僧)을 시켜 밥을 지어 먹이므로 연기가 끼니 매우 미안합니다. 왜적이 만약 바다를 건너간 뒤 그대로 그곳에 봉안한다면 날씨가 춥기 전에 수리해야 할 텐데, 반드시 조정에서 결정을 한 다음에야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김늑이 아뢰기를,
“당초 참봉 홍여율(洪汝栗)이 제천(堤川)으로 어용을 모시고 오는데 왜적들이 가득하고 도로가 막혀서 도로 예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정사성(鄭士誠)은 사고가 생겨 오지 않았는데도 여율과 함께 상을 받았습니다. 인심이 매우 흉악하여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여율이 수복(守僕) 두사람, 산승(山僧) 두 사람과 함께 시종 보호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역에 왜적이 접근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 보니 여율이 수복 및 산승과 함께 어용을 짊어지고 왔으므로 도중에서 서로 만나 통곡하고 신이 여율에게 청량산(淸涼山)으로 가서 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간 여율이 성의를 다하였으니 그 공로가 큽니다. 그런데 정사성 또한 승진의 명을 받았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산승 및 수복의 이름을 신이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바쁘게 애쓴 공은 상을 주어 격려하는 일이 있어야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매우 옳으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살펴서 거행하도록 하라. 어수선한 전쟁 때를 당하여 여율이 성의를 다해 봉안한 일은 나도 알고 있다. 그 성의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영사(領事) 이원익에게 이르기를,
“평양의 살수(殺手)는 어느 곳에서 배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절강(浙江) 사람이 왕래할 때 사적으로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여 익힌 것이고, 창법(槍法)은 진정(眞定) 사람에게 배웠는데 서울의 창법과는 다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평양의 창법을 보니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지금은 전에 사용하던 법을 버리고 다시 절강의 창법을 배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법이 좋은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한 쪽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서울에서 훈련하는 법을 위조로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정(眞定)의 창법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전투에 임하여 치고 받는 사이의 임기 응변(臨機應變)이 무궁하니, 어느 한 쪽을 버릴 수는 없다. 평양에 그 사람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평양 사람들이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이 검법을 연습한 것은 모두 경이 성심을 다하여 가르친 덕이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였다. 상이 이원익에게 이르기를,
“평안도 수령 중에 포상할 만한 자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태천 현감(泰川縣監) 홍여율(洪汝栗)은 성심으로 직무에 임하여 업적이 가장 드러났고, 영유 현령(永柔縣令) 강인(姜絪)은 기국(器局)이 취할 만하고 또한 재간이 있습니다. 태천과 영유는 모두 판탕(板蕩)된 고을이었는데 이 두 사람이 마음을 다해 조처함을 힘입어 모양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상원 군수(祥原郡守) 김정목(金庭睦)은 군사 훈련을 부지런히 하고, 영변 판관(寧邊判官) 심언명(沈彦明)은 백성을 잘 다스립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승직(陞職)시키는 일로 승전(承傳)을 받들라.”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존호(尊號)를 없애라는 명령이 신민들 모두가 떠받들고 있는 이때에 갑자기 나오니, 신들은 놀라고 황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2백 년 동안 종계(宗系)가 무함을 받았어도 변론하지 못했던 것을 성상의 시대에 이르러 성효(誠孝)가 하늘에 닿아 깨끗이 씻었으니, 이러므로 존호를 올리자는 요청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백관들이 여러 날을 정청(庭請)하자 비로소 마지못해 허락하시어 사방에서 휘호(徽號)를 떠받든 지가 지금 몇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어 존호를 삭제하는 일을 거행하려고 하여 신령과 백성들을 실망시킬 수 있겠습니까. 속히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그대로 놓아둬도 이익이 없으니, 속히 존호를 없애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병란과 흉년과 전염병을 치른 나머지 거의 다 죽어 모든 관아의 군부(軍簿)에 남아 있는 자가 얼마 없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이 물러간다 하여도 만약 보통 때처럼 그 이웃과 일족(一族)까지 침범하면 군인의 숫자가 날마다 감축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다 없어질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떠돌아다니거나 절호(絶戶)가 된 것은 빨리 그 수를 빼고 현재 남아 있는 자들로 군적을 만든 다음에야 백성들이 혜택을 받을 것이며, 군액(軍額)을 채우는 것으로 말하면 후에 차츰 회복되기를 기다려서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가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환상법(還上法)은 공사(公私)가 모두 유익합니다. 수령의 공급(供給)과 공물(貢物)·세금·부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에 힘을 입고 있습니다. 임진(1592)년 에는 분탕을 당하지 않은 고을에도 모두 원곡(元穀)을 흩어 주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고, 계사년과 갑오년에는 분급(分給)해 줄 곡식이 없었으니,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다만 임진년에 분급한 것뿐입니다. 몇년 전신이 평안도에 있을 때 삭감해 준다는 명을 듣고는 후일 반드시 숫자를 나누어 봉납(捧納)케 할 것이라 생각했었고 평안도 백성들도 또한 그렇게 여겼는데, 지금 처음으로 영구히 면제해 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곡식 나올 길이 없어 소량의 곡식으로는 탕패(蕩敗)한 숫자를 충당할 수 없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우상의 뜻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하자, 답하기를,
“신의 뜻으로는 떠돌아다니거나 죽었거나 절호(絶戶)된 자를 제외하고는 분급해 준 양에 따라 적절히 헤아려 봉납케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리(情理)와 사세(事勢)로 말하면, 임진년에는 백성들이 허둥지둥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으니 어찌 농사를 지은 자가 있겠는가. 지금 결코 추징(追徵)할 수 없다. 이 밖에 다른 계책이 없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일단 환상을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수족(手足)을 움직일 곳이 없을 뿐만이 아닙니다. 명나라 장수들이 끊이지 않고 와서 군량을 수송하여 쓸 곳이 매우 광범위한데 관청에 저축
한 것이 없으면 백성에게서 마련해내야 할 터이니 이는 더욱 백성을 침탈하는 것이 됩니다.”
하고, 김늑이 아뢰기를,
“만약 임진년의 환상곡을 추징한다면 이는 백성들에게 신용을 잃는 것이니 시행할 수 없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민간에 하유(下諭)하여 현재 기경지(起耕地 :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있는 논밭)의 다소(多少)를 헤아려 봉납할 곡식을 정하고 명년에 그 곡식을 본주인에게 분급하며 수령은 모곡(耗穀)을 쓰지 말고 아울러 분급하여 해마다 저축하면, 이로 인하여 환상할 곡식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신용을 잃는 것은 논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임금과 백성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환란을 만나 각자 분산(分散)했다고 할 때 돌아와 안정되고 나서 그 아들에 이미 써버린 물건을 추징한다면 어찌 안심케 하는 도리가 되겠는가. 만약 어버이는 손에 아무 것도 없고 아들이 다소라도 저축한 것이 있다면 자식된 도리로서 그 부모의 곤궁함을 보고 어찌 구제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부득이하다면 현재의 기경지로써 숫자를 나누어 봉납케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평시의 방백(方伯)은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하의 수령을 독자적으로 벌을 주는 규칙이 있습니다만, 지금 신의 걸음에는 특별한 사목(事目)이 없는데, 감사나 병사·수사가 혹 군무(軍務)에 관련된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군문에 잡아다가 벌을 줄 수 있습니까? 또 그 중에 만약 편의에 따라 계획·시행할 일이 있으면, 비록 계청(啓請)하지 않더라도 혹 임시 편의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원수(都元帥) 이하는 스스로 처단할 수 있는데, 감사·병사·수사를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일은 모두 경의 편의대로 시행하라. 도성 밖의 일은 경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으니 내가 다시 중앙에서 통제하지 않으련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세자를 보양하는 것은 종사(宗社)를 위하는 큰 계책이니, 동궁의 관료들을 잘 선발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입니다. 그런데도 주의(注擬)할 때에 출신(出身) 여부에 구애되어 적임자를 얻지 못하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마땅히 재신(宰臣)과 시종(侍從)에게 각자 잘 아는 사람을 추천케 하고, 시골에서 공부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경학에 밝은 선비들을 더욱 널리 소집하여 세자를 모시게 하면, 기질을 훈도하고 덕성을 함양하는 도에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하였다. 아룀이 끝나자, 파하고 나왔다.
선조 67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9월 24일(계사) 3번째기사
김찬·유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찬(金瓚)을 사헌부 대사헌에, 유근(柳根)을【사람됨이 밝고 지혜로우며 약간 사화(詞華)의 재능이 있으나 체면을 돌보지 않고 세리(勢利)만 추구하였으므로 청론(淸論)에 버림을 받았다. 】 한성부 판윤에, 조경(趙儆)을 함경북도 병사에, 조목(趙穆)을【사람됨이 학문에 힘쓰고 행실이 독실하여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곤궁함을 잘 견디었다. 이황(李滉)에게 배워 강명(講明)하여 발휘한 공이 많았는데, 문인들이 미칠 수 없없다. 】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하였다.
선조 73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3월 26일(계사) 2번째기사
《주역》을 강한 뒤 평안 방백 윤승길과 각사 낭청의 일처리에 관하여 논의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김홍미(金弘微)가 ‘육오효(六五爻)의 신의로 사귄다. [六五厥孚交如]’에서부터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다. [自天祐也]’까지 진강하고, 아뢰기를,
“이는 1위(位)가 3양(陽)을 통솔하는 것으로서 위(位)는 시군(時君)의 지위이며 시(時) 역시 크게 화평한 때[大有]이므로 신의[孚信]의 뜻이 됩니다. 임금이 화유(和柔)를 지니고 중도를 지켜서 신의로 아랫사람을 접대하면 아랫사람 또한 성심으로 호응하여 상하가 함께 믿게 됩니다. 그리고 부(孚)자의 형체가 위는 조[瓜]자이고 밑에는 자[子]자로서 곧 새가 알을 품은 형상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의[信]가 속[中]에 있는 것을 부(孚)라 하는가?”
하자, 홍미가 아뢰기를,
“속이 비고 흘러나오기 때문에 부(孚)라고 합니다. 크게 화평한 때[大有]에는 인심이 안일하기 때문에 만약 유순(柔順)만을 숭상하게 되면 능만(陵慢)의 조짐이 생깁니다. ‘위엄스럽다. [威如]’는 위엄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효(爻)는 건(乾)이 밑에 있고 이(離)가 위에 있어 대유(大有)의 상이 되는데 태괘(泰卦)에 비하여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니, 홍미가 아뢰기를,
“64괘 중에 이 괘가 가장 으뜸이 됩니다. 이미 신의[孚信]로 접대하고 또 위엄으로 시행하니 길(吉)하여 이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건괘(乾卦)가 비록 좋기는 하나 절정까지 오른 용이 후회가 있는데, 이 괘는 상구효(上九爻)가 너무 높이 올라 지위가 없는 곳에 있으니 이는 대유(大有)의 극진함이며, 또 이(離)의 위에 처하였으니 밝음이 극진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천우(自天祐)의 우(祐)자가 우(佑)자와 뜻이 같은가?”
하니, 홍미가 아뢰기를,
“사람이 도우면 우(佑)라 이르고, 하늘이 도우면 우(祐)라 이릅니다. 상구효가 문명(文明)의 상(象)으로 어진이를 높이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 복록과 경사를 누리고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 글의 진의는 지나침을 경계함에 있다. 만족하면 꺼리고 겸허하면 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요순(堯舜)의 성인으로서도 오히려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자만하지 않았으니, 《서경(書經)》에 ‘자만하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유익함을 받는다.’ 하였다. 해가 정오가 되면 기울어지고 달이 차면 이지러지며, 춘하 추동(春夏秋冬)에 있어서도 또한 모두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헌국(李憲國)은 아뢰기를,
“겸손[謙]은 일신의 소관이니, 사람으로서 겸손이 없으면 능히 그 몸을 보존하지 못합니다. 퇴계 이황(李滉)은【동방의 대유(大儒)이다. 】 남에게 겸공(謙恭)을 보였으나 끝내 그 인격이 숨겨지지 않아 세상에 이름을 남겼는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하고, 홍미는 아뢰기를,
“진박(陳搏)의 말에 ‘뜻을 이룬 일은 오래 생각하지 말고 쾌락을 누린 곳엔 다시 가지 말라.’고 하였으니, 역시 겸허의 뜻입니다.”
하고, 헌국(憲國)은 아뢰기를,
“성인은 겸공함을 잘하였기 때문에 역문(易文)에 겸(謙)자의 뜻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인은 일을 참작하여 겸(謙)을 밝힌 것이다. 어찌 망령되어 스스로 박덕하다 하겠는가. 공자(孔子)는 ‘문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文不在玆]’ 하고, 맹자(孟子)는 ‘나를 버리고 그 누구로 하겠는가. [捨我其誰]’ 하였으니, 그렇다면 성인도 때로 겸사[謙]하지 않은 말이 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열 사람이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한 사람이 몸소 보는 것만 못하다. 내지(內地)의 형세를 내가 일찍이 보았기 때문에 환하여 눈 앞에 있는 것 같다. 【서행(西幸)할 때 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이른 것이다. 】 평안 방백(平安方伯)의【윤승길(尹承吉). 】 일 처리가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신잡(申磼)이 아뢰기를,
“승길이 이원익(李元翼)의 뒤를 이었으니, 아마도 원익에게 미치지 못할 것 같으나 주야로 노심하고 있습니다. 비록 원익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심력을 다해 공무를 받드니 몹시 가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심력을 다하여 하면 비록 적중하지 못하더라도 멀리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각사 낭청(各司郞廳)이 친히 문서(文書)를 잡지 않고 서리(胥吏)를 유모(乳母)처럼 여기니 몹시 괴이한 일이다.”
하자, 설서(說書) 김광엽(金光燁)이 아뢰기를,
“수령이 결혼한 자녀를 솔거(率去)할 수 없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데, 난리 이후 이 법이 무너져 소원한 친족도 모두 솔거하여 관가에 폐단을 끼치므로 그 놀라움이 이를 데 없으며, 혹은 토민(土民)과 더불어 자녀를 혼취시키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날로 탐오(貪汚)를 자행하므로 백성들이 그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어사와 감사에게 신칙하여 더욱 수소문하고 살펴서 적발되는 대로 엄히 다스려서 훗날의 폐단을 막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또한 헌부(憲府)에 말하라.” 하였다.
선조수정 32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6월 1일(갑인) 1번째기사
전 의정부 우참찬 성혼의 졸기
전 의정부 우참찬 성혼(成渾)이 졸하였다. 성혼의 자(字)는 호원(浩原)이니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수침은 세상에 높이 뛰어난 지조가 있어 은거하면서 도(道)를 강론하여 세상에서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일컬었다. 혼은 천성이 매우 고매하여 일찍 덕기(德器)를 이루어 어린 아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익혔고, 또 일찍이 이황(李滉)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사숙(私淑)하였었다.
그의 학문은 고정(考亭 : 朱子)을 기준으로 하여, 강론하여 밝히고 실천하는 공을 아울러 힘써 본원(本源)의 바탕에 더욱 독실하였다. 이이(李珥)와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에 대한 설을 수천 마디 주고 받았는데, 선유(先儒)들이 밝히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 이이가 일찍이 ‘만약 견해(見解)의 우월을 논하자면 내가 약간 나을 것이나 행실이 돈독하고 확고한 것은 내가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처음에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직(職)을 내려 불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으니, 상의 후대함이 더욱 중하여 부르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혼은 힘써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 간혹 서울에 왔으나 항상 오래 머물 뜻이 없어 조정에 있는 날짜를 통산하면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임진년 난리 때 이홍로(李弘老)의 모함32)을 받아 상의 우대가 쇠미해지자 드디어 다시는 부름에 응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파산(坡山)의 옛집에서 졸하였다. 학자들이 우계선생(牛溪先生)이라 부른다.
선조수정 33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2월 1일(신해) 1번째기사
윤근수가 경성 및 대동강·압록강 등처에서 역관을 차정할 것을 청하다
사역원 제조 윤근수(尹根壽)가 아뢰기를,
“유 제독(劉提督)의 군사들이 태반은 우리 말을 잘 아는데,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물으니, 영남(嶺南)에 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경성(京城) 및 대동강·압록강 등처에서 역관을 차정(差定)하여 군문(軍門)·경리(經理)의 차관(差官)과 함께 조사하여 쇄괄(刷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실록》을 상고하면 ‘윤근수(尹根壽)는 경망하고 탐욕스러운 나라의 도신(盜臣)이고 사림(士林)의 해충이다.’라고 하였는데, 근수는 명종(明宗) 때 수찬(修撰)이 되어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기를 청하였고, 그 후 전랑(銓郞)이 되어서는 권신(權臣) 이양(李樑)의 모함을 받았으며 이황(李滉)·조식(曺植)을 따라 주자(朱子)와 육구연(陸九淵)의 동이(同異)를 논했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과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이로써 보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가 있는데, 붓을 잡은 자가 마음대로 헐뜯고 욕하는 것이 이러하였단 말인가
선조 135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3월 17일(을묘) 1번째기사
경연을 하고 진헌 물품·국방·곽재우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
조강이 있었다. 상이 별전(別殿)에 임어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신흠(申欽)이 《주역(周易)》을 강하였는데, ‘비서괘(賁序卦)’에서부터 ‘비도지대야(賁道之大也)’까지 두 번 읽기를 마치자 상이 한 번 읽었다. 신흠이 아뢰기를,
“비괘는 바로 文明의 상(象)인데 반드시 바탕[質]이 있은 뒤에야 문(文)을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리유유왕(小利有攸往)’이라고 한 것이니 바탕을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하고, 검토관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왕(往)’ 자는 여기서 저기로 가는 것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작위(作爲)는 모두가 ‘왕’ 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주역》은 반드시 괘상(卦象)을 먼저 알아야 한다. 고인이 한 말에 ‘주역이라는 글은 경계만을 한 것이 아니다. 먼저 괘의 형상을 안 다음에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옥당에 상(象)에 대하여 논한 책이 있는가?”
하자, 신흠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대체로 《주역》의 괘에 대한 것은 모두 《계몽(啓蒙)》에 있으니 반드시 《계몽》을 보신 뒤에 괘가 이루어지는 차서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괘(賁卦)를 가지고 말하자면, 《정전(程傳)》에는 건곤(乾坤)을 비로 삼았고, 《본의(本義)》에는 손(損)과 기제(旣濟)를 비로 삼았으며, 고주(古註)에는 태(泰)에서 온 것으로 비라 하였는데, 《정전》과 고주는 모두 견강부회한 것이고 기제와 손에서 온 것이 옳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연에 여럿이 참여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각자의 소견을 말하라. 대체로 독서는 행사(行事)와는 다른 것이지만 행사에 관계된 것이라도 말하라. 독서하는 때 잘못 묻거나 잘못 대답하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였으나 좌우에서 묵묵히 대답이 없었다. 상이 다시 이르기를,
“영상이 먼저 말하라.”
하니,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소신은 전혀 《주역》을 모릅니다. 글 뜻도 잘 모르기 때문에 감히 한마디도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특진관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신은 경서 중에 《춘추》와 《주역》은 전연 모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복희(伏羲) 때에 이미 괘의 이름이 있었다면, 상고(上古)에 정령(政令)과 문물(文物)이 없었는데 어떻게 송(訟)이나 정(鼎)으로 이름을 붙였겠는가. 그 당시에 어찌 쟁송(爭訟)이 있었으며 또 어찌 정기(鼎器)가 있었겠는가. 영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지사(知事) 윤근수(尹根壽)가 아뢰기를,
“괘의 이름은 문왕(文王) 때에 비롯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항복이 아뢰기를,
“송(訟)이라 말한 것은 쟁송을 말한 것이 아닌데 후인이 가져다 그런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에는 송사뿐만이 아니라 어찌 다투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미 강유(剛柔)와 장단(長短)과 흑백(黑白)이 있다면 송사의 이치도 있는 것입니다. 앞에 보이는 유신(儒臣)이 교정한 64괘는 꼭 복희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은 본디 《주역》을 모르니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음양(陰陽) 두 자는, 천만 가지 변화와 길흉 소장(吉凶消長)이 모두 이 두 자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주역》에서 음양을 말하였다. 음양은 사시(四時)의 운행뿐만 아니니, 이 책으로 말하자면 덮는 것은 음이요 펴는 것은 양이며, 사람으로 말하자면 가만히 있는 것은 음이고 말을 하는 것은 양이다. 음양의 이치는 없는 곳이 없어 천지간에 이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영상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말하는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말을 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이 음양이 될 뿐이 아니라 말을 하는 가운데 길(吉)한 것은 양이고, 흉한 것은 음이 됩니다.”
하고, 이희득(李希得)이 아뢰기를,
“신은 《주역》을 모르지마는 스승에게 듣기를, 양수(陽數)는 1이고 음수(陰數)는 2이기 때문에 소인은 항상 이기고 군자는 항상 지며 다스려진 때는 적고 어지러운 때는 항상 많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음은 2이고 양은 1이라고 한 것은 음은 많고 양이 적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모난 것은 2이고 둥그런 것은 홀수이므로 이치가 그런 것이다. 영상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은 잘 모르지만 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김수에게 이르기를,
“호판(戶判)은 《춘추》를 공부하였다고 하니 《춘추》에 조예가 깊을 것이다.”
하니, 김수가 모른다고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굳이 사양하지 말라. 들으니 임요수(林堯叟)의 주는 중국 사람들이 지리하다고 하고, 왕수인(王守仁)의 새로운 주가 있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영상이 자세히 알 것이니 임씨의 주석과 비교하여 어떻던가? 《호전(胡傳)》을 발명(發明)으로 삼는 것이 좋은데, 또 《정전(程傳)》이 있으니 버릴 수가 없다. 《통감(通鑑)》을 보더라도 호씨(胡氏)가 이미 논(論)해 놓았는데 또 여러 사람의 논이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호전》 아래에다 《정전》을 써넣는 것이 무방하다고 여긴다.”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정전》을 《호전》 뒤에다 두는 것은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당연히 《호전》을 위주로 해야 한다. 사람을 가지고 선후를 정해서는 안 된다. 《논어》의 주도 주자로 위주하고 그 나머지 제가(諸家)는 부주(附註)하였다. 반드시 사람의 선후를 가지고 편차를 정할 것이 없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 일은 쉬이 성취하기가 어려우니 불가불 옥당에다 오래도록 맡겨야 합니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경연에 참석하였는데, 매양 《춘추》로 강(綱)을 삼고, 《좌전》으로 목(目)을 삼으며, 《호전》으로 발명을 삼는다 하시어 매우 미안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인이 이르기를 ‘반드시 《좌전》을 본 다음에야 경(經)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좌전이 혹 경과 다른 곳이 있다 할지라도 좌전을 버리고서는 경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왕세정(王世貞)은 근래의 명나라 사람인데 그의 문장과 논의가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이 천하에서 제일 가는 문장으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인물에 대하여는 전혀 칭찬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사람됨이 논의가 괴벽하여 남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호(韓濩)의 글씨를 왕세정이 보았는가? 그의 평가가 어떻던가?”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목마른 기마(驥馬)가 내[川]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치는 형세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개 사람의 마음이 단정하지 못하면 말할 가치가 없다. 모든 일은 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의 병통은 진실하지 못한 데에 있다. 한호는 액자(額字)는 잘 쓰지만 초서와 예서는 그의 소장(所長)이 아닌데, 아마 반드시 왕세정이 말한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왕세정이 천하의 일을 논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나라 조종조(祖宗朝)의 사적도 그가 논하였는데, 그 간에 미안한 말도 있다. 필시 그는 어리석고 거친 사람일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윤승길(尹承吉)이 아뢰기를,
“어제 왕자를 파직하도록 청한 일에 대하여 쉬이 따를 일이 아니라는 전교를 내리셨는데, 신들도 어찌 모르겠습니다까. 그러나 근래 불순한 자들이 투입(投入)하는 폐단이 점점 심해져서 주인을 배반한 종과 신역을 도피한 자가 모두 투탁하고, 간세한 무리는 그를 기화로 폐단을 일으켜 못하는 짓이 없으니, 원근간의 인심이 소요하여 살고 싶은 의욕을 잃고 있습니다. 신들이 백 번 생각한 나머지 그러한 계사를 올렸습니다. 머뭇거리지 마시고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을 어찌 가벼이 할 것인가. 간혹 범람한 사람이 있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니 헌부에서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근래에 공안(貢案)을 수정하는 일에 대하여 외방의 백성들은 그 간의 곡절을 모르고서 백성을 위해 그런 것으로 여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공안을 만들어내더라도 무슨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가겠습니까. 유무(有無)를 무역하고 대소(大小)를 균일하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더구나 그 공안을 상정(詳定)한 것은 갑오년4673) 이전으로서 그후에 국가의 용도가 늘어나고 줄어들지 않아 이제 다시 헤아려 보아도 필시 줄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호조 판서가 여기 있지만 색목(色目)은 외인(外人)이 알 수 없습니다. 지난날 진헌(進獻)을 평시와 같이 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아래에 있는 자는 의당 따라야 하겠으나 근래에 별사(別使)가 잦아 진헌하는 수효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나라의 탕패된 실상은 황상(皇上)께서 아는 바이니 우선 전일 줄여서 정한 수효대로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땅이 수천 리나 되는 번방(藩邦)으로서 진헌하는 것까지도 능히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성절(聖節)과 동지(冬至)는 이번 달에 처음 알고 다음 달에 행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有司)는 기일 안에 극력 조치해야 한다. 방물(方物)은 결코 줄일 수 없다. 어느 물건이 가장 어려운가?”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가장 어려운 것은 인삼과 표피(豹皮)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의 말은 틀렸다. 시정(市井)의 무지한 무리가 중국의 시장에서 무역하는 인삼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지경인데, 진헌을 하지 아니하여 중국 사람이 만일 ‘당신 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인삼을 어찌 유독 진헌만은 못한다고 하는가?’ 한다면, 이 어찌 너무나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표피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어찌 구비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평소에는 1년에 진헌하는 인삼이 1천 9백여 근인데, 갑오년에 반으로 줄인 이후로 겨우 5백 근에 이르며, 그 중에 또한 진헌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바치는 것은 2백 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품질이 좋은 것이라도 오래되면 부서져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또 외방에서 듣자니 인삼 1근에 목(木)이 16필이라고 합니다. 표피는 창이나 칼에 찔린 상처가 있거나 발톱이 조금이라도 상했으면 봉진(封進)하지 못하는데, 호표(虎豹)는 손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양도(兩道)의 감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러한 폐단을 익히 압니다. 표피의 가격이 작은 것도 70필이 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포(價布)를 내어 사들이는 표피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이 모두 성의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대체로 말하자면 감사나 수령이 한 지역 사람을 다 동원하여 호표를 잡는 대로 모두 관용(官用)으로 쓰고 있는데, 어찌 지금 갑자기 호령을 내려 잡을 수 있겠습니까. 민간에서 잡은 것은 다 쓸 수 있고 관가에서 잡은 것은 다 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10에 2∼3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다 민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헌하는 흑마포(黑麻布)는 어떤 물건으로 대체해야 하는가? 그것이야말로 과연 구하기 어렵다. 인삼 등의 물건은 힘을 다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황제(高皇帝)가 고려(高麗)의 습성은 교사(狡詐)하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생각할 때마다 미안하다. 대개 우리나라 사람은 이 이름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모든 일에 더욱 정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상은 나의 말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이번의 별사(別使)는 인삼 50근을 진헌해야 합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사가 헤아려서 처리하라.”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전제(田制)에 관해서 우리 나라는 미루고 고식적으로 처리하다가 이제는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전제는 예나 지금이나 그 땅의 생산에 대해서는 반드시 세금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정돈하지 않으면 수습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각 고을로 하여금 힘써 수습하되 서둘러 하도록 한다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지(城池)와 갑병(甲兵)도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급무로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꼭 그 뒤에는 폐단이 따르는데 그것은 왜 그러한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기강이 서지 않아 사사로운 뜻을 마구 자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답(田畓)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해마다 새로 경작을 시작한 것을 기록한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그럴듯하나 틀렸다. 전답이 비록 옮겨다니는 물건은 아니지만 반드시 소요스러운 일이 많을 것이다. 지금은 백성들이 지쳐 머리를 들지 못하는데 경솔히 해서는 안된다. 《주역》의 이치를 가지고 보더라도 역시 시기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부득이한 일이라 하더라도 시기를 잃으면 길(吉)함이 도리어 흉(凶)이 되는 것이니, 시기를 헤아려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의 본래 뜻은 다만 재앙을 당한 곳만을 살피게 하려는 것일 뿐인데 지금은 예와 다릅니다. 가령 어떤 백성이, 우리 전답이 어느 정도로 재해를 당했다고 할 때 수령이 친히 가 살펴서 만일 사실이 아닌 경우에는 중한 형벌을 가한다면 대체로 허위로 보고하는 자가 없어질 것인데, 수령이나 감사가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리고 거주민이 옮겨다니는 폐단을 막지 않으면 이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전일 본조(本曹)에서 아뢴 것은, 비록 새로 살림을 난 사람이라도 오가통(五家筒)에다 소속시켜 이리 저리 옮겨다니는 폐단을 막아보려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무적(魚無迹)의 시에 ‘궁궐에선 매양 백성을 걱정하는 조서 내리는데, 주현(州縣)에서 한낱 부질없는 종이로 보네[北闕每下憂民詔 州縣傳看一虛紙]’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폐습이 그러하다. 드러나는 대로 죄를 주어 사정(私情)으로 요행히 면제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육조(六曹)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말하면, 판서(判書)가 이 일은 해야 한다고 해도 낭청(郞廳)은 받들어 행하지 않고, 이 일은 제거해야 한다고 해도 낭청은 또한 받들어 행하지 않으니, 이는 당상이 낭청을 잘 부리지 못해서입니다. 경외(京外)가 다 그러한 형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습속은 언제나 일을 직접 처리하지 않고 오로지 하리에게만 맡겨 두고서 높은 자리에서 팔짱끼고 바라보기만 한다. 내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 낙 상지(駱尙志)가 직접 전구(戰具)를 만들고, 유 총병(劉摠兵)은 천하의 대장인데도 손수 말발굽쇠를 박는 것을 보았다. 만일 우리나라 사람이 그렇게 하면 필시 중한 논박을 당하거나 어쩌면 영불서용(永不敍用)되기까지 할 것이다. 정원의 일로 말하자면 비밀에 관계된 변보(邊報)가 오면 입계하기도 전에 아랫사람이 먼저 안다. 비변사도 그렇다.”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중국이나 일본 사람은 일을 의논하면 그 의논을 아무리 부형(父兄)이라도 전하지 않는데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합니다. 승지나 비변사에서 퇴청한 뒤 친구가 찾아와 물을 때 비밀에 관계된다고 하여 말해주지 않으면 반드시 오활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인은 처자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좌전(左傳)》에 ‘모사를 부인이 알게 하였으니 살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일본인들이 동편관(東平館)에 왕래한 지가 2백여 년이지만 한 사람도 그들 나라의 사정을 들은 적이 없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왜인의 진실성은 천성적으로 특별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 이르기를,
“대체로 오늘날의 일로는 방어하는 것이 가장 으뜸이고 다른 일은 그 다음이다. 어느 날 갑자기 불행한 일이 닥치면 막아낼 수 있겠는가. 어찌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망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남방의 방어는 2월부터 4월까지가 가장 어렵습니다. 5월과 6월은 바다 안개로 낮에도 어두워서 필시 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병력으로 지탱해 낼 수 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적병이 수백이나 수천 정도면 반드시 방어할 수 있겠지만, 만일 대군이 오면 한쪽 지역의 병력을 통틀어도 방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의 성품이 왜인의 강한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강이 서지 않았지만, 저들 왜적은 호령이 엄명(嚴明)합니다. 평수길(平秀吉)이 임진년 이후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이나 소서행장(小西行長) 같은 사람에게 오로지 책임을 맡겼기 때문에 모든 일이 반드시 성공되었던 것입니다. 근래에 헛소문이 비등하여 충청도로부터 평안도까지 인심이 이미 동요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어사를 미리 차출한 뜻은 유비 무환이라 여긴 때문이다. 이미 차출하였으면 의당 군관(軍官)을 스스로 천망(薦望)하여 짐을 꾸려놓고 대령해야 하는데, 계하(啓下)한 지가 이미 오래된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은 무술년에 중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에게 본관(本官)의 수령을 겸임시킨 것을 보고 합당한 일이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내려가므로 판탕(板蕩)된 지역에서 손을 쓸수가 없어 한갓 헛된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이 없습니다.”
하고, 윤근수는 아뢰기를,
“방어하는 일은 장수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곽재우(郭再祐)는 당초에 비록 잘못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성을 지켜 왜적과 전투하는 때에 군중들이 그를 믿어 두려워함이 없었으며,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떠받들었습니다. 병사(兵使)가 되어서는 몸가짐을 청검(淸儉)히 하고 자신 돌봄을 간소하게 하여 병사들이 모두 기꺼이 그의 명을 따르고 집을 떠나 방수(防戍)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였다 합니다. 소신은 아직 곽재우를 본 적이 없지마는 경상도 사람은 모두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고 그도 장수의 지략이 있으니 불가불 제때에 방면하여 난에 임하여 힘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곽재우가 당초 의병을 일으킬 때에는 자못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었지만 그 뒤에 스스로 뉘우쳐 군정(軍情)이 모두 애석해 하였습니다. 이번에 진(鎭)을 버린 곡절에 대해서는 비록 알 수 없지마는 만일 방면하여 일을 맡기면 그는 필시 힘을 다할 것입니다. 권응수(權應銖)는 비록 포악하고 패려하다고 하지마는 역시 버려서는 안 됩니다. 소신이 당초의 일을 보건대 권응수가 아니었다면 영남 좌도는 보존할 수가 없었으며, 영천(永川)을 수복한 공로는 참급(斬級)이 5백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필시 조정의 사체는 모르고 새를 다 잡으면 활을 천시한다는 탄식을 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비록 중국 군대의 힘에 의지하여 오늘날이 있지마는 여러 장수들의 노고도 적지 않습니다. 만일 호종 공신의 말석에다 부친다면 여러 장수들이 필시 불만스러워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군대의 힘이 아니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 강토를 회복한 것은 모두 중국 군대의 공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 이는 내가 사실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 여러 해 동안 방수한 공이야 어찌 감히 전혀 없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항복과 김수가 아뢰기를,
“사람들 모두가 부록(附錄)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함께 기록한다 해도 차등이 있기 마련이니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자, 윤근수가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합당하십니다.”
하고, 이어 아뢰기를,
“근래에 《장자(莊子)》의 말로 인하여 죄를 받은 자가 있는데, 그 당시의 고관(考官)이 ‘노망(魯莽)’을 《장자》의 말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장자를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장자》의 말을 썼다고 하는 것은 《장자》의 의논을 그대로 답습한 것을 지적한 것이지 문자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글에 섞여 나오는 것을 혹 《장자》의 말인지도 모르고 사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는 필시 이함(李涵)을【경자년 별시에 합격하였으나 《장자》의 말을 사용하였다 하여 삭방(削榜)되고 정거(停擧)당하였다. 】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사변 전에 그러한 전교가 있었는데 신은 그 당시 옥당에 있으면서 ‘전편의 지론(指論)이 오로지 장주(莊周)의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였다면 죄를 주어야 하지만 문자간에 사용한 것이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으며, 위에서도 ‘내가 문자간에 사용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 정시(庭試)의 논을 보니 《장자》의 의논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전교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이산해(李山海)도 그 말을 찬성하였는데, 그 말이 중외(中外)에 전파되어 선비들이 모두 다시 사용해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자고로 문인들이 쓰는 ‘눈 아래 완전한 소가 없다[眼底無全牛]’는 등의 말은 다 《장자》의 말이다. 과장(科場)에서 처음 군부(君父)를 대면하는 때는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글은 능히 사람의 심술(心術)을 붕괴시킨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정엽(鄭曄)이 아뢰기를,
“옛날 주자는 과장의 고관(考官)에게 편지를 보내어 소식(蘇軾)의 글을 인용한 자는 일체 물리치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이 엄정(嚴整)하시니 문체(文體)가 이로 인하여 분명하여질 것입니다. 근래에는 잡술(雜術)이나 정도(正道) 간에 전연 다 폐지하고, 과거 보려는 무리는 요점이나 모아서 익히고, 조정에 벼슬을 한 자는 시비를 논하기 좋아하여 힘써 배우고 독서하는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가정에 들어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의(義)를 몰라 풍습이 날로 무너져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조목(趙穆)과 김장생(金長生) 등 한 평생을 경서만 궁리한 사람을 상께서 대신에게 하문하시어 거두어 등용해서 나라의 원기를 배양하도록 하소서. 근세의 이황(李滉)은 사문(斯文)에 공이 있어 송(宋)의 주자와 같았고, 그 뒤의 이이(李珥)는 학문에 힘써 조행이 있었으며, 지금은 조목이 그에 가깝습니다.”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정엽(鄭曄)의 아뢴 바가 옳습니다.”
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고 이어 섭정국(葉靖國)의 일을 논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대체로 사람은 심술이 평정(平正)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氣)가 지나쳐 시기하고 음험한 사람은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등용해서는 안 된다. 이는 대신이 사람을 쓰는 방도이니, 영상은 꼭 나의 말을 기억하라.”
하고,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오늘 논한 일들은 모두 이차적인 문제들이다. 지금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영상은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병력만이 탕패된 것이 아니라 인심도 흩어져 임진년보다도 더합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백성으로 하여금 국가에서 조금의 혜택이라도 베푸는 것을 알도록 한 뒤에야 일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오활한 듯하지만 일을 겪고 나서 보면 그것이 현실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왕세자 책봉에 관한 일도 전에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그 당시 외간에서는 왜적의 형세가 한창 치성하니 의논을 뒤로 미루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왜적이 국경에서 떠나가고 중국 군대도 철군했으니 다시 주청사를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조정의 사세를 알 수 없으니, 나의 생각으로는 천천히 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그리고 세자가 현재 상중(喪中)에 있으니 책봉을 받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지난 번 위에서 하교하시기를 ‘청백리(淸白吏)에 해당된 사람은 역시 수용(收用)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훌륭한 처사입니다. 이는 상에 해당되는데 벌만을 폐지할 수는 없으니 탐오한 자도 적발하여 중한 벌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탐오한 자는 안으로 조정에서부터 밖으로 주군(州郡)에까지 모두 탄핵하여 논하되, 역시 사실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헌부는 법을 집행하는 관(官)이다. 우리 나라는 가난하고 쇠잔한데도 의복을 사치스럽게 입는다. 제도는 비록 단정히 해야 하지만 자연 입어야 할 복식의 법도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상인(常人)은 사족(士族)의 복장을 못하며 당하관은 당상의 복장을 못하는 것이다. 세속에서 이른바 금란(禁亂)이라는 것을 헌부에서는 유념해서 하고 있는가?”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초피(貂皮)는 우리 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인데, 여염의 천민까지도 모두 초피를 쓰고 다니기 때문에 초피의 값이 평소보다 4∼5배나 비쌉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습속이 사치스러워 서로 다투어 멋을 부리니 모두 비단옷을 입고 나서야 말 것이다.”
하였다.
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18일(계미) 1번째기사
상이 별전에 나가 《주역》 복괘를 강하고, 성진선·성영 등과 시국을 논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 복괘(復卦)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정전(程傳)의 글은 다른 글과 달리 중첩되는 듯하다.”
하니, 시독관 성진선(成晉善)이 아뢰기를,
“선유(先儒)의 설(說)을 후세 사람이 감히 다시 의논할 수는 없으나 옛사람들도 역시 지나치게 자세하지 않은가 의심하였습니다.”
하고, 동지사 성영(成泳)은 아뢰기를,
“《주역》은 성인께서 인사(人事)로써 천리(天理)를 징험한 책이어서 참으로 용이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먼저 충신(忠信)하고 독경(篤敬)한 말을 마음속에 새겨 사욕(私欲)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에야 천리가 밝아져 역리(易理)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성진선이 아뢰기를,
“복괘는 용공(用功)에 가장 긴절하니 바로 선(善)으로 돌아가는 기틀입니다.”
하고, 영사 김명원(金命元)은 아뢰기를,
“이 괘는 옛날 사람이 유암(幽暗)한 가운데 한 점의 백(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은 일찍이 이황(李滉)에게 《주역》을 배웠으니, 필시 독특한 묘리를 얻었을 것이다.”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소시적에 배웠으나 과거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폐기하여 지금은 잊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황은 수학(數學)에도 역시 능했는가?”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대개는 알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경덕(徐敬德)이 수학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성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서경덕이 알았다고 합니다. 지난 번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왔을 때 ’그대 나라에 학자가 있는가?’라고 묻자, 그때 서경덕이 있다고 대답했는데, 성리학(性理學)에도 정통하지만 수학에 더욱 정통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지만 이제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성진선은 아뢰기를,
“서얼(庶孽)인 윤광일(尹光溢)이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수학에 극히 정통하여 선유(先儒)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기묘년(己卯年)에 화를 당한 사람들이 불차탁용(不次擢用)하려고 하였으나 그가 미천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화담(花潭 : 서경덕의 호) 이후에 정염(鄭)이란 자가 수학이 서경덕에게 뒤지지 않아 미래의 일을 알았다고 합니다.”
하고, 성영은 아뢰기를,
“그 사람 역시 유자(儒者) 가운데 귀한 자이니, 그 후손을 녹용하여 특별히 포상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성진선이 아뢰기를,
“이 대목을 선유들은 ‘고요한 곳에서 천지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괘는 5음(陰)에 1양(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천지로 말하면 양도(陽道)는 음이 다하면 즉시 생기는 것으로, 비록 음이 다해 가는 속에서 양이 싹트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 생길 때는 미약하기 때문에 동지(冬至)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미약하기는 하지만 군음(群陰)에 의해 소멸당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천지가 조물(造物)하는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염계(周濂溪)와 소강절(邵康節)이 모두 이런 모양으로 보았고, 정자(程子)는 ‘1양이 싹터 움직이는 곳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이 설이 더욱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장령 강첨(姜籤)이 나와 아뢰기를,
“추국청 관원의 가자를 개정하는 일은 언관이 범연히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리 후에 작상이 지나치게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 폐단을 구하고자 해서입니다.”
하고, 정언 윤황(尹煌)은 아뢰기를,
“작상을 지나치게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난리 후에는 조금만 작은 수고가 있어도 문득 중하게 가자하였으니, 부득이 개정한 다음에야 명기(名器)가 뒤섞이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개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강첨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원익을 따라 영남에 갔을 때 항왜 60여 명이 밀양(密陽)땅에 모여 한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양민을 침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속히 처리해야 하니, 만약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어 다시 일본에 투항하면 어찌 걱정거리가 안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북쪽 열읍에 나누어 두면 일본과 서로 떨어지게 되고 오랑캐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단히 옮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자 김명원이 아뢰기를,
“혹 개유(開諭)하여 점차 옮기면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강첨이 아뢰기를,
“도망한 중국 군사가 영남에 많이 있는데, 만약 미리 처리하지 않으면 중국의 문책(問責)이 있을 것이니, 이 일 역시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 번 체찰사의 장계를 보건대, 입송(人送)하지 않으려는 뜻이 있었다. 애당초 중국 군사들이 이처럼 우리 나라에 많이 머물게 된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
하자, 김명원이 아뢰기를,
“응모(應募)하여 온 자들로서 우리 나라에 처자가 있어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이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성영은 아뢰기를,
“체찰사가 머물려 두고자 하는 뜻은 언 발에 오줌누는 것과 같습니다. 사체로 말하면 중국에서 구해준 은혜가 망극하고, 또 대소 장관들이 모두 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머물려 둔다면 대의에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뒷걱정도 없지 않습니다. 소신이 본부에 있는데, 사대부들이 모두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지금은 이미 그들의 힘을 이용하고 있으니, 붙잡아 보내기는 매우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부터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 남은 것이다. 지금 만약 붙잡아 보냈다가 의외의 불측한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성영이 아뢰기를,
“쇄환(刷還)하려고 하던 때에 마침 왜적의 사신이 도착했기 때문에 변방 신하가 우선 머물려 두고 그들의 힘을 빌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모조리 쇄송(刷送)한다고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윤황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거산 찰방(居山察訪)이 되어 북쪽에 3년 동안 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폐단을 다 진달하기는 어렵지만 그 가운데서도 본도의 출신(出身)들이 매우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은 봉족(奉足)이 있고 또 번(番)을 나누지만 출신으로 강변(江邊)에 부방(赴防)하는 자는 1년 중에 반년이 넘도록 자신이 장구(裝具)를 갖추어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 때문에 가산이 파탄되어 유리하는 자가 많으니, 반드시 각별히 그 노고에 상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 또 북방에는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으므로 자식을 낳으면 묻어버립니다. 이는 비록 고달픔을 견디지 못해 그러는 것이지만 강상과 관계되는 것인데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니, 보기에 매우 참혹하고 불쌍합니다. 각별히 감사에게 하유하여 금단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자, 성영이 아뢰기를,
“북쪽 변방은 오랑캐와 가까와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습속에 물들어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예전부터 있어 왔지만 지금은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라 하더라도 어찌 자식을 묻을 리가 있겠는가.”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겠습니까. 생각건대 궁박(窮迫)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특진관 신식(申湜)이 아뢰기를,
“국가가 전에 없던 변란을 만나 백성들이 겨우 적의 칼날을 면하여 살아남은 자가 얼마되지 않습니다. 중국 군사들이 철수한 후에는 보존(保存)할 가망이 있기를 바랐는데, 신이 수령이 되었을 때 보니 백성들의 부역이 조금도 견감되지 않고, 전날의 공부(貢賦)가 모두 회복되어 민생이 소복할 가망은 다시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정사를 특별히 베푼 다음에야 살아날 것입니다. 금년 농사가 흉년인 듯하여 민생이 더욱 의지할 바가 없으니, 휴양(休養)하는 정사를 급급히 강구하여 민심을 위무해야 합니다. 중국 군사들이 머물러 있을 때에는 징발하는 일이 없을 수 없었으나 지금은 군사를 뽑고 군량을 모으는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이 없으니, 밤낮으로 여기에 힘써 오로지 토적(討賊)하여 복수하는 데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또 근래에 학교의 정사에 있어서 몽학(蒙學)을 전폐하여 어린 사람들이 성취하지 못하니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서울에는 대사성이 주관할 수 있지만 외방에는 반드시 감사가 순행하며 권과(勸課)하여 상벌을 보여야 하니, 이런 뜻을 감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성영은 아뢰기를,
“오늘 복괘(復卦)를 진강하였는데, 복의 뜻은 음욕(陰欲)을 제거하여 선한 마음이 싹터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신데 신의 어두운 학술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가난한 집 자식이 금(金)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성상께서는 그 뜻을 확충하여 천리를 보존하기를 힘써 인욕에 빠져드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이것이 더욱 성스럽게 되는 길입니다.
또 어느 국가든 어찌 난리가 없었던 때가 있었겠습니까. 난이 극도에 달하면 다스리기를 생각하는 것이 복(復)의 뜻입니다. 지금 당장의 급무는 적을 토멸하여 복수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상하가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모쪼록 양병(養兵)을 힘쓰면 적이 와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나랏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고 해서 모두 치지도외함으로써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다하여 참으로 조처하기가 어렵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집안 일처럼 걱정한다면 어찌 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국용(國用)은 전결(田結)에 달려 있는데, 국가에서 얻는 바는 겨우 10분의 1∼2이고 인구(人口)는 모두 누락되어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남정(男丁)은 양반·상인을 막론하고 모두 적출(籍出)해서 군사가 될 자는 군사가 되게 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쌀로 내게 하여 군량에 보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뜻을 간절하게 팔도에 하유하여 나랏일이 이 지경이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군사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재물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버려두고 이렇게 하지 하지 않으면 적을 토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이 다시 올 경우 위망의 화가 반드시 전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하고, 특진관 권희(權憘)는 아뢰기를,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등의 일을 탕패되었다고만 하면서 어떻게 조처해 보려는 뜻은 없으니, 조정에서 만약 용동(聳動)하는 일을 보이지 않으면 누가 기꺼이 봉행하겠습니까. 상께서 독실히 뜻을 두시어 아랫사람들을 거느리시고, 장수와 수령 가운데 국사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자를 각별히 포장해 인심을 권장하시면 기강이 저절로 설 것입니다.”
하였다. 진시 말에 파하고 나왔다.
선조 142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10월 25일(기축) 1번째기사
상이 《주역》을 강하고, 윤승훈·조익·김지남·이충원 등과 시국을 논하다
묘시 정각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시독관 조수익이 이괘(頤卦)를 진강하였는데 서괘(序卦)에서 양덕(養德)·양신(養身)·절무(切務)까지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윤승훈(尹承勳)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은가(恩暇)를 받아 양주에 가서 소분(掃墳)할 때 경차관 이경운(李卿雲)이 양전(量田)하는 일 때문에 그곳에 있으면서 타량(打量)하려 하는데 위관(委官)·서리(胥吏)와 결복(結卜)을 속인 백성이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경운이 17일이나 머물러 있으면서도 타량하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사 송응순(宋應洵)이 매우 민망하게 여겨 매면(每面)마다 설득하는 품관(品官)을 정하여 알렸으나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령 잘못된 곳은 죄로 다스린다 하더라도 국가에 기강이 있다면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명령(命令)과 정교(政敎)는 기강에서 나오는 것인데 기강이 이와 같고야 무슨 일인들 할 수 있습니까. 외방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중(京中)도 그러합니다. 지난 번 염근한 사람을 선발하고 대제학을 권점할 때 대신은 이른 아침부터 와서 모였는데 재신(宰臣)은 오후에야 왔습니다. 여러 번 재촉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조정이 이러하니 외방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전에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보니 매양 좌기(坐起)할 때 낭청이 일제히 오지 않았는데 오늘 갑이 칭병(稱病)하면 내일은 을이 칭병하면서 돌려가며 나오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관부(官府)의 당상(堂上)이 출입할 경우에는 낭청이 지영(祗迎)하고 지송(祗送)하는 규칙이 있는데도 난후에는 소홀히 하여 폐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육조(六曹)가 이러하니 다른 관청은 알 만합니다. 세도(世道)의 능이(陵夷)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다시 회복할 수 없고 인심도 잘못되었습니다.
경상도 같은 곳은 본디 유자(儒者)가 많기로 이름나서 지난 날 상도(上道)에는 이황(李滉)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였고, 하도에는 조식(曺植)이 있어 절의를 높였기 때문에 풍속이 볼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곳 또한 잘못되어 간다고 합니다. 지금은 향중(鄕中)에서 풍헌(風憲)을 내는데 유사(有司)에게 조금만 혐의가 있으면 모함하는 것을 일삼는가 하면 정거(停擧)시키는 일도 임의로 하고 있다 합니다. 심지어 매우 미워하는 자에게는 살자(殺字)·유자(流字)·장자(杖字)를 써놓고 사람들이 모여 권점(圈點)을 치는데 살자의 점수가 많으면 사죄(死罪)로 얽어넣는다고 합니다. 유자와 장자도 이런 규정에 의거한다고 하니, 이는 모두 국가에 기강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토주(土主)는 말할 것도 없고 관찰사나 체찰사 등의 영문(營門)까지도 모두 기찰한다고 하니, 이런 조짐을 길러서는 안 됩니다. 영남은 인심이 순후하기로 이름이 났는데도 잘못되어 가는 것이 이러합니다. 관찰사와 체찰사가 모두 멸시당하고 있으니 조정도 따라서 멸시당하게 될 것입니다. 뒷날의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장령 조익(趙翊)이 아뢰기를,
“고(故)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은 재행(才行)으로 관에 제수되었는데 정유년에 황석 산성(黃石山城)에 들어가 수성장(守城將)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林)과 함께 지키기로 약속하였었습니다. 그러다가 적이 들어오자 사림은 정병을 거느리고 성을 버린 채 먼저 달아났으나 곽준은 두 아들 한 딸과 그곳에서 함께 죽었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지금까지 탄복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정표(旌表)하여 충렬을 포장하게 하는 것이 국가가 충절을 권장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문중(門中)에는 다만 사촌의 손자만 있다고 하니 특별히 파격(破格)하여 후사(後嗣)로 세워서 충혼(忠魂)을 제사지내게 해야 합니다.”
하고, 정언 김지남(金止男)은 아뢰기를,
“근일 상께서 자주 경연에 나아가 신료(臣僚)들과 말씀하실 적에 문의(文義)에 대해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신료들이 보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문의 이외에 다시 온화한 빛으로 받아들인다면 신료들의 책려(策勵)가 모두 진달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위의(威儀)를 배양하시는 것은 부족하지 않지만 개도(開導)하는 뜻이 적기 때문에 진계(陳啓)할 일이 있어도 소회를 다 진달하지 못하는 일이 많으니, 종용히 논하여 가부(可否)를 보인다면 성덕(聖德)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상께서는 침묵이 너무 지나치시어 신하들에게 하문하는 뜻이 부족한 듯합니다.”
하고, 특진관 이충원(李忠元)은 아뢰기를,
“오늘 이괘(頣卦)를 강론하셨습니다. 상께서는 덕을 배양하는 것을 제일의 공부로 삼으시어 덕을 배양하여 훌륭한 자를 배양하는 데까지 미쳐야 하고, 훌륭한 자를 배양하는 이외에 군대를 양성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10년 동안 병패(兵敗)한 나머지에 처해 있지만 어찌 인력이야 모자라겠습니까. 다만 군병의 설시(設施)를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군병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한가히 노는 자가 많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의당 먼저 팔도에 이문(移文)하여 호패법(戶牌法)을 만들어 누락된 인정(人丁)을 모두 파악, 사천(私賤)이라도 군병이 될 만한 자는 군병에 예속시키고 그 나머지에게는 모두 세포(稅布)를 거둔다면 징수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군병을 돕는 데에 쓴다면 군대가 모양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大典)》에 각도의 염분(鹽盆)과 어전(漁箭)에서 곡식을 무역하여 군자(軍資)에 보충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팔도 연해에는 모두 어염(魚鹽)이 나니 이것으로 대략 군량을 수습한다면 어찌 부족하기야 하겠습니까. 옛날에도 군흥(軍興)에 대한 일이 있으면 주세(酒稅)를 독점하여 받을 때도 있었는데 더구나 응당 행해야 할 일인 데이겠습니까. 둔전(屯田)에 있어서도 시행한다고는 하나 일을 맡은 자가 힘을 다하지 않고 폐단만 끼쳐 실효가 없으니, 군대를 양성하는 일은 경장(更張)을 한 뒤에야 할 수 있습니다.
신이 근래 조보(朝報)를 보건대 노추(老酋)가 나아와서 직첩(職帖)을 받고자 한다고 하니 분명히 우리를 엿보려는 계획입니다. 2∼3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우리 나라 서변을 침범하더라도 전혀 대항할 형세가 없으니, 특별히 대신을 시켜 각별히 군대의 양성에 대한 일을 의논하여 착실히 시행하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조수익은 아뢰기를,
“윤승훈이 아뢴 내용이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옳지만 말은 그릅니다. 이른바 기강이란 모두 군상(君相)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승훈은 자신이 정승 지위에 있으니 의당 기강을 확립시켜야 할 것인데, 성상 앞에서 폐단만을 진달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직위도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속담에 전하기를 ‘황희(黃喜)가 정승이 되고 김종서(金宗瑞)가 판서가 되어 있을 적에 일 때문에 종서에게 뜰에 내려가 조목(朝目)을 받게 하였다.’고 하니, 정승이 된 자가 아랫 재상으로 하여금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함은 모두 삼공(三公)이 검칙하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조정에 기강이 있은 뒤에 외방에도 있게 되는 것인데 지금 하관(下官)은 상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인은 관원을 두려워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염피(厭避)하는 마음이 있으면 즉시 정고(呈告)하여 이것이 조보(朝報)에 기록되어 나오는데 없는 날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가 기강이 없어 그런 것입니다. 이충원이 근래 양성하는 일을 아뢰었는데 신도 소회가 있는 바 성공되기 어려운 줄을 알지만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 훈련도감이 보인(保人)을 주는 한 가지 일을 해가 지나도록 조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감의 군사 숫자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많아도 3천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한 장관(將官)이 거느리는 군사도 이같이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인을 주지 못하니 외방 군사야 어떻게 모두 줄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에 10여 만의 군사가 없고서야 어떻게 모양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군사가 많으면 보인으로 주는 정부(丁夫)도 따라서 많아지게 되는데 지금 있는 한정(閑丁)들을 모두 쇄출해 낸다고 하더라도 충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신의 우견(愚見)에는 사천법(私賤法)이 우리 나라에만 있습니다. 하늘이 많은 백성들을 낼 적에 부여(賦與)한 것은 균일한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귀천이 나뉘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법은 아무리 용렬한 자라도 선조(先祖)가 물려준 노비가 있기만 하면 편히 앉아 공후(公侯)의 즐거움을 누리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선유(先儒)들이 ‘정전법(井田法)은 천하가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라야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국세가 위기일발의 처지여서 노비가 있는 자라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으니 중국의 법에 의거 재상 이상까지만 거느리는 가정(家丁)을 헤아려 지급하고 사천은 영원히 혁파하여 군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 고려 때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둘 적에 중국 관원이 사천법을 묻고 혁파하려 하였는데 그때의 군상(君相)들이 못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용렬한 임금에 용렬한 재상의 소견이어서 의논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운이 되돌아와 온갖 정사가 새로와지는 시기이니 전일의 잘못된 법규를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회복시키는 일을 어떻게 담소(談笑)하고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대대적인 거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변란이 발생한 지가 10년인데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외환(外患)은 없다 하더라도 내란(內亂)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더구나 노추(老酋)가 우리를 엿볼 계책을 세우고 있고 남쪽의 왜적도 다시 일어날 흔단이 있어 걱정이 많은데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파하였다.
선조 146권,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2월 28일(신묘) 2번째기사
박이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이장(朴而章)을 홍문관 직제학 겸 시강원 보덕으로, 조목(趙穆)을【영남 사람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학문을 독실히 하고 조행을 힘써 닦으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일찍이 시사를 간여한 적이 없으므로 학자들이 그를 존중하였다. 】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이수록(李綏祿)을 홍문관 응교로, 조정견(趙庭堅)을【사람됨이 거칠고 용렬하며 학식이 없었다. 】 사헌부 지평으로, 구의강(具義剛)을【사람됨이 들뜨고 어리석으며 음흉하였다. 】 시강원 문학으로, 유희분을 이조 좌랑 겸 시강원 사서로, 목장흠(睦長欽)을 시강원 사서로 삼았다.
선조 148권,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3월 1일(계해) 5번째기사
정광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광적(鄭光績)을 대사성으로, 조목(趙穆)을 공조 참의로,【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에게 수업(受業)하였는데 당시에 학력(學力)으로 이름이 있다. 】 박성(朴惺)을 공조 정랑으로,【남중(南中)사람으로 성혼(成渾)의 죄명이 성립되기 전에 상소하여 그를 배척하였다. 】 김유(金瑬)를 대교(待敎)로 삼았다.
선조 148권,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3월 9일(신미) 6번째기사
예조가 태자 책봉 시에 진하하는 예에 대해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태자의 책봉은 천하의 큰 경사이니 이미 조칙을 받았으면 군하(群下)의 입장에서도 본조(本朝)에 진하(陳賀)하는 예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전에도 이 예를 행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내일 예를 거행해야 마땅한데 본조(本曹)에는 상고할 만한 등록(謄錄)이 없습니다. 행해야 될 일을 거행하지 않는다면 크게 궐전(闕典)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이는 천사 화찰(華察)이 태자를 책봉하러 나왔을 때에 진하했던 예가 《황화집(皇華集)》에 실려 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무진(1568 선조1)년에 태자를 책봉하면서 진하했던 일이 이황(李滉)의 문집 연보(年譜)에 보인다고도 하니, 홍문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상고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선조 153권,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8월 2일(신묘) 2번째기사
성균 진사 최극겸이 오현을 종사할 것을 주청하다
성균관 진사 최극겸(崔克謙) 등이 오현(五賢)33)을 종사(從祀)할 일로 상소하니, 답하였다.
“그대들의 뜻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이 일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가벼이 거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전부터 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즉시 거행하지 못한 것이다. 이점을 알라.”
사신은 논한다. 오현이 도학(道學)을 천명(闡明)하여 중화(中華)의 문명으로 만이(蠻夷)의 풍속을 변화시켰으니, 사문(斯文)에 끼친 공이 크다. 따라서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참람한 것이 아니다. 최치원(崔致遠)이나 설총(薛聰) 같은 무리들까지도 향사(享祀)의 보답을 받는데, 성대한 오현의 공로로도 종사(從祀)하는 은전(恩典)에서 오래도록 빠져 있으니, 사림이 함께 탄식하는 바이다. 더구나 성묘(聖廟)를 새롭게 중수하여 여러 가지 일을 새로 시작하는 때이겠는가. 이러한 때에 더욱 거행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상의 전교는 가벼이 거행하기 어렵다고 하고, 성균관의 상소도 두 번째에 이르러 갑자기 중지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선조 166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9월 9일(임술) 1번째기사
전대 임금의 능묘의 일을 의논하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전대(前代) 임금들의 능묘(陵墓)는 변란을 겪은 뒤이므로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훼손된 곳을 수리하고 초목(樵牧)을 금해야 할 듯하다. 전대의 충신으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김양(金陽)과 백제의 성충(成忠)·계백(階伯) 및 고려의 강감찬(姜邯贊)·정몽주(鄭夢周)같은 이의 묘소도 봉식(封植)하고 초목을 금해야 할 듯하다. 한둘만 들어서 말하고, 나머지는 다 말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성교(聖敎)를 보건대 이대(異代)를 차별없이 추숭(追崇)하여 봉식하라는 뜻이 지극하십니다. 예조를 시켜 널리 더 듣고 보아 전대 임금들의 능묘와 충현(忠賢)으로서 뛰어나게 일컬어지는 자는 상교(上敎)에 따라 편의한 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일이 예조에 계하(啓下)되자, 예조가 아뢰기를,
“듣고 본 것이 넓지 못하고 전적(典籍)에는 의거할 곳이 없으므로 쉽사리 거행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각 고을을 시켜 전에 봉식하고 수리한 전대 임금들과 충현으로서 뛰어나게 일컬어져 사람들의 이목(耳目)에서 잊혀지지 않은 자를 낱낱이 탐문하여 아뢴 뒤에 처리할 일로 팔도의 감사(監司)와 개성부 유수에게 아울러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이제 각 고을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뛰어난 자인지를 가리지 않고 다만 지경 안의 유명한 분묘를 범연히 써 보낸 곳도 있습니다. 국가가 봉식하는 성전(盛典)을 혼잡하게 시행할 수 없으므로 계하(啓下)에 따라 뛰어나게 일컬어지는 사람과 전대의 임금들의 능묘를 각각 계본(啓本)에 실린 것에 따라 뒤에 나열하여 적었으니, 각도를 시켜 먼저 봉식하고 나무하거나 방목하는 것을 금하게 하소서. 전대의 임금들과 충현이 이뿐만 아닐 것인데 비망기에 언급된 성충·계백·강감찬같은 이를 각도에서 적어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연대가 오래 되어 알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각도의 감사에게 다시 이문(移文)하여 상세히 탐문하여 치계(馳啓)하라고 행이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능묘는 다음과 같다.
강원도 영월(寧越)에 있는 노산군(魯山君)의 묘,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고려 시조 현릉(顯陵)의 경내에 있는 소목릉(昭穆陵) 열 곳, 경상도 김해(金海)에 있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능, 경주(慶州)에 있는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능, 김춘추(金春秋)의 능, 김양(金陽)의 묘, 미추왕(味鄒王)의 능, 효소왕(孝昭王)의 능, 선덕왕(善德王)의 능,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묘, 진주(晉州)에 있는 증 대사간(贈大司諫) 조식(曹植)의 묘, 예안(禮安)에 있는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황(李滉)의 묘, 인동(仁同)에 있는 고려의 충신 주서(注書) 길재(吉再)의 묘, 청도(淸道)에 있는 김일손(金馹孫)의 묘, 밀양(密陽)에 있는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의 묘, 흥해(興海)에 있는 증 영의정 이언적(李彦迪)의 묘, 함양(咸陽)에 있는 증 우의정(贈右議政)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묘, 현풍(玄風)에 있는 증 영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묘, 경기 장단(長湍)에 있는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묘,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의 묘, 증 우의정 서경덕(徐敬德)의 묘, 주계군(朱溪君)의 묘, 고양(高陽)에 있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양위(兩位)의 묘, 용인(龍仁)에 있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묘,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묘, 황해도 해주(海州)에 있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묘, 평안도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의 묘, 중화(中和)에 있는 동명왕(東明王)의 묘.
선수 38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3월 1일(신해) 3번째기사
관학 유생이 소장을 올려 오현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잇따라 소장을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감히 경솔하게 거행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더구나 이언적(李彦迪)도 그 사이에 끼어 있으니, 그대들이 청탁(淸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괴이하게 여긴다.”
하니,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상이 다시 이르기를,
“언적의 일은 내가 없는 것을 날조하여 구원(九原)에 간 사람을 크게 무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절로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본성이 있으니, 돌아가 마음속에서 찾아보면 자연 알 수 있을 것이다. 꼭 이황(李滉)이 언적을 지나치게 추존(推尊)한 말에 미혹될 것은 아니다.”
하였다. 상소를 네 번째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너무 고집스럽다. 온 나라에 아무도 언적에 대해 논할 사람이 없단 말인가. 내가 한번 글 몇 줄로 세인들의 견해를 깨우쳐 차마 자격이 없는 사람이 외람되이 공묘(孔廟)에 끼어 제사를 받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이 말을 하는 까닭은 바로 사도(斯道)를 부식(扶植)하기 위한 것이다.”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태학(太學)에서 올린 상소에 답하신 내용을 보건대, 전후 성지(聖旨)가 준엄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으므로 서로 바라보면서 놀라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조야(朝野)가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마침 유생들의 상소 때문에 내가 경솔히 망견(妄見)을 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마땅히 공성(孔聖)의 무언(無言)34)을 본받고자 하나 형세상 부득이하여 맹자(孟子)의 호변(好辯)35)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대저 학문이란 것은 사도(斯道)를 강명(講明)하는 것으로, 삼대(三代)의 학문이란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이다. 인륜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군신(君臣)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진실로 여기에 의거 처신한 것에 부족함이 있게 되면 군자들은 그를 의심하고 후인들도 비난하는 것이다.
언적이 이성(二聖 : 中宗 ·仁宗)의 두터운 은총을 입어 그 지위가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도학(道學)을 강명하여 세상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그런데 갑진(1544 중종 39)년과 을사(1545 인종 1)년에 이성(二聖)이 잇따라 돌아가시고 여러 간인(奸人)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사림(士林)들은 어육(魚肉)이 되고 종사(宗社)는 위기 일발인 때를 당해서 언적으로서 했어야 할 도리는, 힘써 횡류(橫流)의 지주(砥柱)36)로 하늘을 뒤덮는 역류를 막아 위로는 이성(二聖)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 화란을 피하지 않았어야 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몸을 지켜 물러나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운림(雲林)에다 잠홀(簪笏)을 감추고 초야에 거처하여 사도(斯道)로 하여금 조금도 굴하지 않게 하고 자신으로 하여금 욕되지 않게 했어야 한다. 그리하여 간흉(奸凶)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게 하고 사기(士氣)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까지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강명(講明)한 학문을 저버리지 않는 것임은 물론 또한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도리이다.
그런데 언적은 여러 간사한 자들 사이에 발을 들여놓고 풍파(風波) 사이에 부침(浮沈)하였지, 직언 극론(直言極論)으로 간흉들의 간담을 격파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하였다. 나아가서는 국가를 바로잡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몸을 깨끗이하여 멀리 벗어나지도 못하였다. 자신이 추관(推官)이 되어서는 남문(南門) 밖에서 여러 어진 사람들을 국문(鞫問)했으니, 모르겠거니와 그때 언적의 이마에 부끄러워하는 땀이 흐르지 않았겠는가. 도리어 신장(訊杖)의 크고 작은 것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이는 바로 ‘삼년상(三年喪)은 제대로 못하면서 시마(緦麻)·소공(小功)을 따지고 방반(放飯)·유철(流歠)하면서 치결(齒決)할까 걱정한다.’37)고 하는 격이다.
끝내 간흉들에게 억지로 끌려 종정(鍾鼎)에 공훈을 기록하고 기린각(麒麟閣)에 초상화를 그렸으며, 적신(賊臣)들과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하면서 강력히 사절하지 못하고 계속 구차하게 끌려다니며 대열을 따라 진퇴(進退)함으로써 끝내 적유령(狄踰嶺)에 귀양가서 서새(西塞 : 江界)의 혼(魂)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옛부터 지금까지 소인(小人)과 행동을 함께한 자로서 그 재앙을 받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여러 흉인들이 대궐에 나아가 봉성군(鳳城君)을 죽이라고 청할 때 언적이 그들을 따라갔으니, 언적의 천리(天理)는 여기에 이르러 거의 사라진 것이 아니겠는가. 언직이 중종의 알아줌을 받아 일찍이 진서산(眞西山 : 眞德秀)과 같다고 인정했는데, 진서산은 송 이종(宋理宗)에게 제왕 굉(濟王竑)의 원통함을 강력히 진술하면서 ‘윤기(倫紀)는 우주(宇宙)의 기둥이다.’고 했다. 서산은 이미 죽은 억울한 혼령의 원한도 씻어주려 했는데 언적은 죄없는 왕자를 죽이라고 청하였으니, 진유(眞儒)가 이런 행실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언적이 도학을 강명하고 수기(修己)에 힘쓴 것으로 보면 한 시대의 위인(偉人)이라 할 수 있다. 언적의 어짐으로도 오히려 나와 같은 용군 암주(庸君暗主)의 망령된 비난을 면하지 못하니, 신하된 자는 자신의 몸가짐과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수정 41권,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5월 1일(계해) 2번째기사
풍원 부원군 유성룡의 졸기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졸하였다.
성룡은 안동(安東) 출신으로 호는 서애(西厓)이며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었다. 병인년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경연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드디어 상신(相臣)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咨文)과 게첩(揭帖)이 주야로 폭주하고 제도(諸道)의 주독(奏牘)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들었는데도 성룡이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당시 신흠(申欽)이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문득 신흠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부르는 대로 쓰게 하였는데, 문장이 오래도록 다듬은 것과 같아 일찍이 점철(點綴)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흠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와 같은 재주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그 아들 이경전(李慶全)과 함께 오래도록 폐척(廢斥)되어 있으면서 성룡을 원망하여 제거하려고 꾀하였다. 그 결과 무술년에 주화(主和)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변무(辨誣)의 사행(使行)을 피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떠나게 되었는데, 향리에 있은 지 10년 만에 죽으니 나이가 66세였다.
성룡은 임진난이 일어난 뒤 건의하여 처음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하여 포(砲)·사(射)·살(殺)의 삼수(三手)를 뽑아 군용을 갖추었고 외방의 산성(山城)을 수선(修繕)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비어책(備禦策)으로 삼았다. 그러나 성룡이 자리에서 떠나자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유독 훈련도감만은 존속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선조 172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3월 19일(기사) 4번째기사
성균관 생원들의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의 문묘배향 상소문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 조명욱(曺明勖)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도를 밝혀 모범을 보이는 것은 진유(眞儒)의 사업이고, 덕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본받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사(盛事)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진유가 있었는데도 생전에 임용되지 못하고, 죽어서 후세에 추숭(追崇)을 받지 못하면, 사자(士子)의 추향(趨向)을 밝히고 국가의 원기(元氣)를 키울 길이 없게 되어 사도(斯道)가 쇠퇴하게 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현(前賢)을 높이 숭상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신들이 생각해 보건대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돌보아주시어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 받으심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돈독하게 배양하셨으므로 옛날보다 더 많은 인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당대의 인물을 보건대, 문경공(文敬公) 신(臣)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신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신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신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 등이 모두 출중한 자질을 지니고 울연(蔚然)히 서로 이어 태어났는데, 학문은 성인들의 정미(精微)한 경지까지 이르렀고 행실은 군자의 순수(純粹)함을 구비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진유(眞儒)요 백세(百世)의 종사(宗師)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존숭하는 전례(典禮)가 없어 필분(苾芬)의 제사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성명(聖明)한 조정의 일대 흠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오현(五賢)의 언행과 사적은 위로 나라의 사책(史冊)에 들어 있고 아래로 야사(野史)에 나와 있으니 성명께서 진실로 이미 통촉하시고 그 분들의 사람됨을 믿으시리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신들이 오늘날 갖추 논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우선 한두 가지만 거론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김굉필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성현의 학문에 진력했는데 《소학(小學)》으로 자신을 단속하면서 학문의 경지에 깊이 몰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언행이 충신(忠信)하고 독경(篤敬)하여 매사에 예의를 준행(遵行)하면서 끊어진 학문을 일으켜 세워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사문(斯文)에 공로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정여창은 일찍부터 분발하여 널리 경전(經傳)을 섭렵했는데 궁리(窮理)를 독서의 요체로 삼고 마음갖기를 속이지 않는 것으로 위주하였습니다. 체용(體用)의 학문을 통달(通達)하고 가정(家庭) 내의 행신을 도탑게 하였으며 김굉필과 학문의 벗이 되어 사도(斯道)를 강명(講明)했으니, 사문에 또한 공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조광조는 천품이 매우 특이하여 제배(儕輩)들보다 뛰어났었는데 험란한 시대에 유배 생활을 하던 김굉필을 좇아 군자의 위기(爲己)하는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 뒤 임금에게 신임을 받고 국정(國政)을 행하게 되어서는 평소에 쌓은 포부를 펼쳐 나갔는데,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일으키고 향약(鄕約)의 제도를 시행하는 등 선왕(先王)의 법도를 차례로 거행하여 요순(堯舜)의 치적을 기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도에 참소를 당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영영 떠나고 말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무의식 중에 길이 탄식을 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그가 끼친 유풍(遺風)과 혜택은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우리 국가의 정학(正學)의 일맥(一脈)이 그래도 실가닥처럼 이어져 끊어지지 않은 것은 조광조의 공이 아니고 누구의 공이겠습니까.
이언적은 도기(道器)의 천품을 타고 나 영오(潁悟)함이 누구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수수(授受)한 곳이 없는데도 사학(斯學)에 스스로 분발하여, 실행하는 공부에 마음을 두고 격치(格致)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오잠(五箴)과 삼성(三省)으로 자신을 더욱 엄하게 다스리고 팔규(八規)와 십목(十目)으로 임금의 잘못을 더욱 간절하게 바로잡았으며 모든 저술이 사도(斯道)를 우익(羽翼)한 것 아닌 것이 없었으니, 중종(中宗)께서 ‘옛적의 진덕수(眞德秀)5304) 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다.’고 칭찬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황의 경우는 더욱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자품이 고매(高邁)한 데다 수양이 넓고도 깊었는데, 강구(講究)하는 데 온 정력을 기울여 미묘한 이치를 환히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에 대해 모두 발명(發明)하고 회오(會悟)함이 있게 되었는데, 광명(光明)하고 위대한 그의 일생이야말로 순수한 정도(正道)의 경지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입조(立朝)해서는 염방(廉方)과 정직으로 마음을 삼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잘못을 바로잡아 도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습니다. 십도(十圖)의 글과 육조(六條)의 상소가 모두 제유(諸儒)의 잘잘못을 가리고 이단(異端)의 그릇된 점을 배척하지 않은 것이 없고 보면, 4현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우리 동방(東方)의 고정(考亭)5305) 이 된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다섯 유신(儒臣)들이 앞에서 창도하고 뒤에서 계승하여 중국 문헌의 진수를 터득하여 우리 동방 선비들의 올바른 학문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앞에서 사업을 빛내고 뒤에서 공덕(功德)을 계승함으로써 당세에 혜택이 있게 되고 후세에 공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항간(巷間)의 선비들이 그 풍모와 인품을 사모하여, 모두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아들은 효도하고 신하는 충성하며 오도(吾道)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예(文藝)는 숭상할 것이 못되고 반드시 성현의 학문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입니까. 아, 4유신의 일은 전하께서 친히 들으신 바이고, 한 현자의 덕은 전하께서 직접 보신 바입니다. 마땅히 숭상해야 할 덕과 당연히 보답해야 할 공이 해와 별처럼 분명하여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치고 있고 보면, 그 덕을 숭상하고 그 공을 보답하는 특전(特典)을 어찌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변혁의 시대를 맞아 비운(否運)을 회복하려고 노력을 경주하시니 도(道)를 중히 여기는 정성이 다사 다난한 시기에도 게을러지지 않고 문(文)을 숭상하는 생각이 전쟁을 치른 날에도 더욱 간절하십니다. 묘사(廟社)를 세우지 못하고 궁궐도 복구하지 못한 이때에 맨 먼저 문묘(文廟)를 재건하여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시고 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계속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세우게 하셨으니, 사도(斯道)를 부식함으로써 중흥(中興)의 기틀을 만드시려는 바가 지극하고 극진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오현(五賢)의 유신이 아직도 종사(從祀)하는 대열에 참여되지 못했고 보면 성조(聖朝)에 흠이 되는 일로서 그 무엇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아, 살았을 때 그들을 쓰면 훌륭한 치세(治世)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치기에 충분하고 죽어서 그들을 존숭하면 후세에 길이 사표(師表)가 될 분들인데, 존숭하고 현양(顯揚)하는 은전을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혹시 전하께서 다섯 유신의 공덕이 이런 예우를 받기에는 부당하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도를 주창하여 밝히고 사문을 진작시킴으로써 후학(後學)들로 하여금 의귀(依歸)할 바가 있게 한 그 분들의 공덕이 어찌 문장(文章)의 최치원(崔致遠)이나 방언(方言)의 설총(薛聰)이나 공로가 미미한 안유(安裕)만 못하다 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신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겨 마지않는 바입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다섯 유신의 공덕을 적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추가로 포장(褒奬)하여 증직(贈職)을 내리고 《유선록(儒先錄)》을 편찬하도록 하시는 한편 서원(書院)을 세우도록 허락하시며 편액(扁額)까지 내리셨고 보면, 전하께서 이미 다섯 유신에 대해 극진히 아셨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사(從祀)하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까지 중난하게 여기시니, 이 점이 바로 신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겨 마지않는 바입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만인의 공론이 아니라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무진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사이에 사자(士子)들이 봉장(封章)을 올려 전하에게 호소한 것이 어찌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짓을 하느라 그런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의덕(懿德)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동일한 마음으로서 격렬해지는 공론은 막을 수 없는 까닭에 그런 것이니, 어찌 신들의 편견일 뿐, 만인의 공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신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겨 마지않는 바입니다.
혹시 전하께서 선왕조(先王朝)에 있었던 일이라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송 이종(宋理宗)은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주희(朱熹) 등 다섯 유현(儒賢)을 추봉(追封)하여 선성(先聖)에 종사(從祀)토록 하였는데, 일이 또한 선왕조에 있었던 것인데도 이종이 거행하면서 혐의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병필(秉筆)했던 사람들도 ‘오도의 기세를 증대시켰다.’고까지 찬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 때문에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신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겨 마지않는 바입니다.
아, 다섯 유신의 공덕이 이처럼 훌륭하고 전하께서 환히 아시는 것이 이처럼 지극하고 공론이 격발된 것과 전대(前代) 역사의 본보기가 또한 이러한데도, 전하께서 오히려 고집하며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오래도록 유음(兪音)을 아끼고 계시니 신들은 참으로 성상의 의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금방 난리를 겪고 나서 문교(文敎)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으므로 인심은 혼매해지고 풍속은 야박해지기만 하며 사기(士氣)는 날로 위축(委縮)되고 국맥은 점점 소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를 위해 죽는 의리가 끊어져 임금을 버리는 자가 있게 되었는가 하면,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도리가 사라져 어버이를 유기(遺棄)하는 자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런 때에 진유(眞儒)를 숭장(崇奬)하여 다사(多士)의 사표가 될 여지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장차 선비들이 갈 길을 잃게 되고 풍화(風化)가 날로 무너져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소멸되며 예악(禮樂)이 붕괴되고 이적(夷狄)이 날뛰게 됨으로써 마침내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될까 두렵습니다.
아, 현재 걱정스러운 일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재변이 겹쳐 일어나는가 하면 남쪽과 북쪽에서는 적들이 틈을 노리고 있으니 위급한 상황이 조석 사이에 있습니다. 밤잠을 못 이루시며 걱정하시느라 경황이 없으실텐데 신들이 이 점을 급급하게 여기는 것은, 진정 도솔(導率)하는 방도가 없고 보면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올바르게 되지 못하고 추향이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의마음이 착하게 되지 못하며 사람들의 마음이 착하게 되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게 되어 장차 더 큰 근심거리가 닥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송나라가 나라를 세웠을 적에 강좌(江左)가 침체되어 부진하였지만, 유현(儒賢)을 존숭하는 한가지 일로 조금이나마 사람들의 뜻을 강하게 했기 때문에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금(金)나라로서도 끝내 장강(長江)을 건너 임안(臨安)에 들어가 문정(問鼎)하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대개 사문(斯文)의 명맥(命脈)이 부지되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진유를 존숭하고 제사하여 한 시대를 용동(聳動)시키는 일이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현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미루고 도를 중히 여기는 정성을 키우시어, 다섯 현신을 제향을 받는 70인의 반열에 추향(追享)하도록 특명을 내리소서.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선비들의 갈길을 밝히고 한편으로는 원기(元氣)를 배양함으로써 유림(儒林)의 표준이 되게 하고 국가 회복의 기초가 되도록 하소서. 더구나 지금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경영하여 공역(功役)이 거의 끝나가고 광전(曠典)을 증수하고 있는데 만약 이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면, 그대로 세월만 보내다가 마침내 거행할 때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여러번 더 생각하시어 속히 윤허하는 분부를 내리소서. 그렇게 되면 오도(吾道)가 이보다 다행함이 없고 국가도 이만한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신들은 격절(激切)하고 두려워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계문(啓聞)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우리 나라 유현(儒賢)들이 중국 유현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나 그대들의 정성스러운 뜻을 잘 알았다. 다만 이는 중대한 일이므로 경솔하게 거행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선조 172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3월 21일(신미) 1번째기사
성균관 생원 조명욱 등의 이언적의 하자 없음과 문묘배향 3차 상소문
성균관 생원 조명욱 등이 세 번째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하유(下諭)하신 것을 보건대 성상께서 비답한 말씀이 더욱 준엄하시어 ‘이언적(李彦迪)도 그 속에 끼어 있다.’는 분부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임금의 말씀이 한번 나오자 사기(士氣)가 꺾이고 말았는데, 덕을 존숭하고 도를 즐기는 전하의 정성으로도 도리어 이러한 말씀이 있었으니, 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 돌아만 볼 뿐, 지극히 실망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들이 생각해 보건대 문원공(文元公) 신(臣) 이언적은 도덕과 언행이 명백하고 순수하여 털끝만큼의 의심스러운 점이 없는데 전하께서 이토록 폄하(貶下)하시니, 신들은 성상의 의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이언적의 도덕과 언행이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학문의 공력이 극진하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학문을 강명(講明)하며 실천하고 조존(操存)하며 성찰(省察)하는 데 있어 정미(精微)로움과 상하의 이치를 관철함으로써 순일하게 올바름에서 나왔던 것을 보건대 학문의 공력이 극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출처(出處)의 도리가 극진하지 못했다고 여기신다면, 3대(代)의 조정에 출사(出仕)하는 동안 충성스럽고 간측(懇惻)스러운 마음으로 진퇴(進退)한 심적(心跡)이 해와 별처럼 밝으며, 제반 사업(事業)을 조치함에 있어 반드시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때처럼 만들 것을 자임(自任)했던 것을 보건대 출처의 도리가 극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학문이 진보됨에 따라 저저(著書)하는 일도 쉬지 않아 《구인록(求仁錄)》·《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 저서가 있었는데, 고정(考亭)에게서 터득한 것이 더욱 많았었고 보면, 도를 보위(保衛)한 공이 성대하다 하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도의로써 임금을 인도하여 시종 한결같이 하였고 간사함을 배척하고 위구(危懼)스러움을 진정(鎭定)시키면서 아무 두려움 없이 곧장 밀고 나가는 등 사생(死生)이나 궁달(窮達)로써 평소 지켜 온 바를 바꾸지 않았고 보면, 입조(立朝)한 절조가 대단했다 하겠습니다. 신들이 보고 기억하는 바로는 아무리 갖가지로 자세히 탐구해 보아도 미진했던 자취를 찾아내지 못하겠으니 신들은 전하의 분부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언적의 도덕과 언행이 과연 미진한 점이 있었다면, 명철하신 중종(中宗)과 성명하신 효릉(孝陵 : 인종)께서 진덕수(眞德秀)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필(御筆)로 포장(褒奬)하시기도 하고 그러셨겠습니까. 선왕(先王)의 예감(睿鑑)으로 어찌 소견이 없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선왕들만 그렇게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즉위(卽位) 초에 특별히 유신(儒臣) 유희춘(柳希春) 등에게 명하여 《유선록(儒先錄)》을 편찬케 하셨는데 이언적도 여기에 끼어 있었습니다. 이는 이언적이 현인이라는 것을 전하께서 또한 아시고 취하셨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지난날에 취택하셨던 것은 무엇 때문이고 오늘날에 폄하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십니까? 이 점을 신들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언적은 심학(心學)의 연원(淵源)을 탐구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스승으로서 모범될 만한 점이 그처럼 우뚝했었는데, 전하께서 이토록까지 분부하시니 신들의 의혹이 더욱 심해집니다.
신들은 비루하고 천박하여 말씀을 드려도 천청(天聽)을 감동시킬 수 없을 것이니, 선정(先正)이 칭찬한 말로 밝혀드릴까 합니다. 하나는 ‘심신(心神)과 성정(性情)에 근본을 두고 가향(家鄕)과 방국(邦國)에 적용하여 시행했으니, 이른바 체(體)가 있고 용(用)이 있는 학문이라 하겠다.’ 한 것이고, 하나는 ‘오도(吾道)의 본원(本源)을 천명(闡明)하고 이단(異端)의 사설(邪說)을 물리쳤다.’ 한 것이고, 하나는 ‘행실은 덕과 부합되고 말은 후세에 모범이 되었으니, 우리 동방에서 그 짝을 찾기가 힘들다.’ 한 것인데, 이는 곧 문순공(文純公) 신(臣) 이황(李滉)이 한말입니다. 이황이야말로 세상에 이름이 난 대유(大儒)인데, 그가 한 말은 모두가 오늘날에 보이고 후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느라 지나치게 칭찬하는 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 어찌 그 말이 믿기에 부족하겠습니까.
선왕(先王)께서 장려한 말을 고찰해 보고 선배(先輩)가 존숭한 말을 미루어 보건대, 이언적이 사도(斯道)를 저버린 일이 무엇이 있기에 전하께서 어제와 같은 분부를 내리셨단 말입니까. 신들은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어찌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토록까지 불행한 사태가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대개 전하께서 이언적을 그르다고 여기는 그 이유가 분명히 있는데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마음에만 두고 내놓지 않으시다가 이제야 비로소 들려주시게 되었고 보면, 아무리 신들이 미천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전하의 쌓인 의혹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신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체하시는 심려를 시원스럽게 풀어버리시고 통쾌하게 공론을 따르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윤허하시어 속히 존숭하고 보답하는 특전을 거행하게 함으로써 다섯 유신(儒臣)을 모두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배향(配享)토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사문(斯文)과 국가에 이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 번째 소장을 살펴보고 더욱 추향(趨向)을 알게 되었다. 다만 중대한 일이라서 경솔하게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다시 뒷날을 기다려 처리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언적에 대한 일은 내가 진실로 없는 일이 있다고 날조해서 구원(九原 : 황천)에 있는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말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지금 더불어 논변(論辨)하기는 어렵다. 대저 사람은 각자가 시비(是非)를 기릴 줄 아는 천성(天性)이 있기 마련이니, 우선 돌아가 탐구해 본다면 스스로 천성(天性)의 양지(良知)로 알게 될 것이다. 반드시 이황(李滉)이 스스로 지나치게 추앙하고 존숭해 놓은 말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점을 알라.” 하였다.
선조 172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3월 22일(임신) 5번째기사
성균관 유생 조명욱 등이 올린 이언적의 문묘 배향을 청한 4차 상소문
성균관 생원 조명욱(曺明勖) 등이 네 번째 상소하기를,
“신들이 다섯 유신(儒臣)을 종사(從祀)할 일로 계속해서 세 차례나 상소를 올렸지만 한번도 윤허하지 않으시고 여러 차례 미안스러운 분부만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다시 전하에게 아뢰는 것이 더없이 번독(煩瀆)스러운 행위인 줄은 압니다마는,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사문(斯文)이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과 사기(士氣)가 쇠퇴하고 왕성해지는 것이 대체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히 마침내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할 말을 다하려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어제 내리신 성상의 비답을 보고는 지극히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이언적의 학문이 오늘날 존숭하기에 부족하며, 이황(李滉)의 말이 전하께서 취신(取信)하기에 부족하단 말입니까. 전하의 말씀이 한번 나오자 다사(多士)들의 의혹이 더욱 심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들이 전하에게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아, 이언적의 도덕과 언행이 온 세상의 본보기가 되어 찬연하고도 뚜렷하게 고금(古今)에 게시(揭示)된 것은 앞서의 상소에서 다 말씀드렸으니 지금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이황의 말은 취신(取信)하기에 충분하다는 점만을 가지고 밝혀볼까 합니다. 이황은 천품이 고매하고 도학이 순수하여 그가 전수(傳授)하고 저술한 것 모두가 공자와 맹자의 유지(遺旨)를 체득(體得)한 것으로서, 실천이 독실하고 조예(造詣)가 고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모든 유현(儒賢) 중에 대성(大成)한 분이고 백대(百代)의 종사(宗師)라 할 수 있는 분으로, 언행 하나하나가 세상의 법도가 되고 있는데, 어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짓을 하느라 지나치게 추앙하고 허여하는 말을 하였겠습니까.
아, 이언적만한 공덕(功德)이 있은 다음에야 이언적의 공덕을 밝힐 수 있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이미 정해진 공론으로서 후세에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이 반복해서 고찰해 보아도 의심스러운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전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말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하신 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시고 유술(儒術)을 숭상하시어 《유선록(儒先錄)》을 만들게 하고 서원(書院)을 세우게 하는 등 덕을 존숭하고 도를 즐기시는 일 아닌 것이 없으심으로써 사문을 부식(扶植)하여 오늘날의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셨는데 이번에 이런 뜻밖의 분부가 계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자신은 선(善)을 좋아하는 덕을 행하시면서 다음 사람들의 선에 흥기하는 것은 저해하는 결과가 되겠기에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아, 시비(是非)를 가리는 성품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니, 신들처럼 어리석고 소견이 얕은 사람으로서도 선현(先賢)을 배우고 존숭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날 동안 계속 상소하여 존숭하고 보답하는 특전을 거행하게 하려고 하면서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아, 선현은 마땅히 존숭해야 하고 사기(士氣)는 마땅히 배양해야 하는 것이니, 대개 선현을 숭상하지 않으면 사기를 용동(聳動)시킬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준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공론을 굳게 거절하시면서 ‘이언적은 존숭할 수가 없다.’고 하시고 ‘이황의 말은 취신(取信)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들은 생각하건대 사기가 이로 말미암아 위축되고, 학문하는 사람들이 좇을 곳이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을 잃게 되고 추향(趨向)이 방향을 잃게 됨으로써 반복해서 고질화되고 회맹 비색(晦盲否塞)하게 되어 마침내는 국가가 멸망하게 되고야 말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열성(列聖)께서 수백년 동안 유현(儒賢)을 존숭하고 도를 중하게 여겨 온 교화(敎化)가 전하의 성명(聖明)하신 시대에 이르러서 이토록 깎여 없어지고 녹아 사라지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아, 이 다섯 유신들은 도덕과 언행이 전후의 시대는 다르지만 법도는 동일한 것으로서 모두 후학의 사범(師範)이 되고 성묘(聖廟)에 종향(從享)하기에 충분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체하시는 심려를 털어버리시고 통쾌하게 여망(輿望)을 따르소서. 그리하여 다섯 유신을 모두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배향(配享)하도록 하신다면, 사문(斯文)이 이보다 다행할 수 없고 국가도 이보다 다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격절(激切)하여 두려운 마음이 지극해짐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계문(啓聞)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 보았다. 경솔하게 거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이미 유시했거니와, 다시 뒷날을 기다렸다 처리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언적의 일에 관하여 그대들의 의견은 그럴 것이다. 어찌 그대들의 소견만 그렇겠는가. 온 나라에 있어서도 제대로 논의할 자가 없을 것이다. 종사(從祀)하기를 청함에 이르러서는 내가 한번 몇 줄의 글을 써서 세상 사람들의 소견을 풀어주고 싶었다. 차라리 이언적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공자의 사당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사도(斯道)를 부식하기 위해서이다. 그대들이 오늘날 하고 있는 말이 또한 괴이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단 돌아가서 탐구해 보지는 않고 한번 내가 한 말을 듣자 쓸데없이 분격하여 크게 놀라고만 있다. 아, 오래가고 보면 고치기 어려운 법이니 또한 어찌 그대들의 논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대들과 붓을 놀려 한바탕 쟁변하며 한담할 겨를이 없다. 우선 뒷날을 기다리라. 한번 나의 소견을 써 보여 주겠는데, 그때에는 반드시 시비를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선조 172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3월 23일(계유) 1번째기사
정원이 이언적의 일에 대한 비답을 우려하자 불가 이유를 말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살피건대 유신(儒臣) 이언적(李彦迪)은 실로 오도(吾道)의 선각(先覺)으로서 동방의 대현(大賢)입니다. 평생을 큰 학업에 잠심(潛心)하여 성학(聖學)을 강명(講明)하고 사도(斯道)의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그의 진실한 실천과 깊은 조예, 의연한 언행과 절도있는 진퇴(進退), 그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입언(立言)한 저술이 모두 문집 및 《유선록(儒先錄)》에 있는데, 광명정대하여 분명 의심스러운 점이 없습니다. 따라서 네 유신의 반열에 동참시켜 성묘(聖廟)에 배향(配享)함으로써 천년토록 혈식(血食)하게 해야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야(朝野)에 딴 말이 없고 예나 지금이나 딴 의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삼가 태학(太學) 유생들의 상소에 답하신 것과 전후로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성지(聖旨)가 준엄하여 조금도 가차(假借)가 없으셨습니다. 신들이 진실로 몽매하긴 하지만 그 내용을 다 읽기도 전에 서로 돌아보며 놀라와 눈이 휘둥그레졌을 뿐 뭐라 할 말을 잊었습니다.
종사(從祀)해야 한다는 논이 나온 지는 대개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유신을 존대하고 도를 중히 여기시어 하지 않는 일이 없으신 성명의 시대를 만나게 되었기에, 계청(啓請)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루지게 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까지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답답하게 여겨 온 것 역시 오래되었습니다. 이번에 답답함이 더욱 답답해지던 판에 놀라와 실망하게 되는 일이 잇달게 되었으니, 도리어 대성인(大聖人)께서 하시는 것에 의심이 없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오늘날의 풍습을 보건대 비록 성상께서 특별히 성심(誠心)을 천명하고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이름난 유현(儒賢)들을 표장(表章)하고 사문(斯文)을 부식(扶植)시키시더라도 오히려 변화시키기 어려울까 걱정되는데, 더구나 이처럼 꺾어버리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외람하게도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유림(儒林)의 빛이 사라지고 조야(朝野)가 실망하여 장차 사문이 어두워지게 될 것을 목도하고는 구구한 우려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침 유생들의 상소에 답하느라 경솔하게 망령된 소견을 말했다가 사람들의 의혹을 사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서는 공부자(孔夫子)의 무언(無言)을 본받고 싶어도 형편상 불가능하고 맹자에게 가해진 호변(好辯)이라는 비평을 면하기도 어렵게 되었으니, 스스로도 그만둘 수 없는 처지이다. 요즈음 몸이 편치 못한 관계로 심사(心思)가 망연(茫然)하다. 그러나 바르게 말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게 되겠기에 이에 감히 대략 큰 줄거리만 거론하여 한번 말해 보겠다.
대저 학문이란 사도(斯道)를 강명(講明)하는 것이다. 삼대(三代)의 학문은 그 목적이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는 데 있다. 인륜에는 다섯이 있는데 군신(君臣) 관계가 그 첫째를 차지하니, 진실로 이에 있어 처신하는 도리가 혹시라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군자가 회의하고 후세 사람들이 논란하게 되는 것이다.
살펴 보건대 이언적은 두 분 선왕(先王)의 권애(眷愛)를 두텁게 입어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학문을 강명하여 당대의 명유(名儒)가 되었으니, 한 시대의 중신(重臣)이라 할 수 있다. 갑진년과 을사년에 두 선왕께서 잇달아 승하(昇遐)하시자 뭇 간신들이 마구 일어나 화란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림(士林)은 어육(魚肉)이 되고 종사(宗社)는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이언적으로서는 어떻게 처신했어야 그 도리에 맞았겠는가? 횡류(橫流)에 지주(砥柱)가 될 수 있는 힘을 발휘해 하늘을 뒤덮는 기세를 막아냄으로써 위로 두 선왕의 큰 은혜를 보답하고 아래로 자신의 큰 책임을 다할 수 있었어야 했으니, 그럴진대 사생을 걸고서 화란이 닥쳐와도 피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스스로 은퇴하여 괘관(掛冠)하고 돌아가 잠홀(簪笏)을 버리고 산림에서 지내며 조야(朝野)에 고도(高蹈)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사도(斯道)를 조금도 굴하지 않게 하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므로써 간흉(奸兇)들이 두려워 꺼리는 바가 있게 하고 사기(士氣)가 아주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 기필코 평소에 강명(講明)한 학문을 저버리지 않았어야 하는데 이 또한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도리라 하겠다.
그런데 이언적은 뭇 간신들 속에 발을 딛고서 물결치는 대로 부침(浮沈)했을 뿐 직언(直言)으로 극론(極論)하여 간흉들의 간담(肝膽)을 깨뜨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나아가서 국가를 광구(匡救)하지도 못하였고 물러가 몸을 결백하게 하여 멀리 떠나지도 못한 채 자신이 추관(推官)이 되어 남문(南門) 밖에서 제현(諸賢)을 국문(鞫問)했으니, 이날 이언적의 이마에서 땀이 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도리어 형장(刑杖)이 크니 작으니 하는 소리만 했었으니 아, 이는 그가 형장이 작고 가벼웠다면, 그 사람을 국문하고 그 옥사(獄事)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던가. 이것이 이른바 삼년복(三年服)을 제대로 입지도 못하면서 시마(緦麻)나 소공복(小功服)을 따진다는 것이고, 자신은 밥과 국을 어지럽게 흘리고 먹으면서 남이 치결(齒決 : 이로 마른 고기를 끓어 먹는 것)하는 것을 책망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끝내는 간흉들에게 휩싸이게 되어 종정(鍾鼎)에 공로를 기록하고 인각(麟閣)에 높이 이름을 걸고서 적신(賊臣) 이기(李芑)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동맹하였으니,【그때 이미 동맹했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이는 내가 짐작으로 한 말이니, 만일 미처 동맹하지 않았다면 이 구절은 삭제하라. 】 그가 ‘나에게 과연 정난위사(定難衛社)의 공로가 있다.’고 여겼던 것인가. 어찌하여 힘을 다해 사양해서 기필코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구차하게 대열(隊列)을 따라 진퇴(進退)하다가 끝내 적유령(狄踰嶺)을 넘어 귀양가서 서쪽 변방 강계(江界)의 혼이 됨을 면하지 못하고 말았단 말인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소인과 함께 주선(周旋)하여 조호(調護)한 사람치고 화를 입지 않은 자가 없었다.
심지어는 여러 간흉들이 대궐에 나아가 봉성군(鳳城君 : 중종의 여섯 째 아들 李岏)을 죽이기를 청할 때에 이언적이 따라 갔었으니, 이언적의 천리(天理)가 이쯤되면 없어져 버린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중종(中宗)께서 이언적을 알아주시어 일찍이 진서산(眞西山)과 같다고 허여하셨으니 지극하였다. 성인(聖人)의 지취(旨趣)가 깊고도 원대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진서산이 제왕 횡(濟王竑 : 宋 寧宗의 황태자로 뒤에 폐해졌음)의 원통함을 송 이종(宋理宗)에게 극력 진달하며 ‘인륜이란 것은 우주(宇宙)의 동량(棟樑)이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본래 전문(全文)이 있는데 잊어버려 기억할 수 없다. 】 진서산은 이미 죽은 제왕 횡의 원통함을 씻어주려고 했었는데, 이언적은 죄도 없는 왕자(王子)를 죽이자고 청하였으니, 정말 진유(眞儒)로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언적이 어떻게 지하(地下)에 돌아가 옛 임금을 뵙겠는가.
그런데도 이황(李滉)이 지나치게 추존하자 세상이 온통 그에 휩쓸리어 시비를 제대로 말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대저 맹자·한유(韓愈)·정자(程子)·주자(朱子)가 한 말이라도 후세 사람들이 논할 수 있는 법인데, 어찌 이황이 한 말이라고 하여 자신이 부여받은 천성(天性)을 어둡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언적은 도학을 강명하여 몸을 닦는 데에 힘을 기울였으니, 한 시대의 위인(偉人)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범상하고 비루한 무식자들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언적의 현명함으로도 범상하고 어두운 임금인 내가 망령되이 논란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보면, 신하된 사람으로서 처신하며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어찌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기를,
“지금 이언적의 일로 소장(疏章)과 차자(箚子)가 분분한데 해도 저물었기에 곧장 소견대로 황급하게 써 내렸다. 그래서 이언적이 추관(推官)이었는지의 여부도 다시 따져보지 못했는데, 혹시 사실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대개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한 나라의 중신(重臣)인 신분으로서 옥사(獄事)의 시비를 말하여 바로 잡지는 못하고 그저 형장(刑杖)의 대소(大小)만 따졌던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추관이라고 한 것이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 아니면, 그 한 귀절은 삭제해야 마땅하다. 그리 알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언적은 일세(一世)의 명유(名儒)로서, 사자(士子)의 귀의처(歸依處)가 되었다.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는 데 있어서 전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한 지 어언 40년이 지났으니 온 나라의 공론이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에 앞서서는 한 번도 미안스러운 분부가 없었는데 지금 와서 남김없이 배척하고 있으니 상의 의도를 진실로 알기 어렵다. 이언적의 처사(處事)와 행실에 대해서는 옥당(玉堂)의 차자와 유생들의 상소에 이미 다 말했으니, 신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아, 한 나라에 군림(君臨)하여 온갖 기무(機務)를 총리(總理)하니 나라의 흥망성쇠가 모두 그 한마디 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심상한 정령(政令)을 낼 때에도 조심하고 삼가야 할 텐데, 더구나 풍화(風化)에 관계가 있는 말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분격(憤激)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런 분부가 한번 내리자 사기(士氣)가 위축되고 국가의 기맥(氣脈)이 따라서 깎이게 되며, 공론이 시행되지 않아 시비가 뒤섞이게 되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선조 172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3월 23일(계유) 6번째기사
홍문관의 신식·강첨·이덕형·이정험·강홍립·민경기 등의 상소문
행 홍문관 부제학 신식(申湜), 전한 강첨(姜籤), 부응교 이덕형(李德泂), 교리 이정험(李廷馦), 수찬 강홍립(姜弘立), 부수찬 민경기(閔慶基)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변고를 겪은 이래로 국가가 혼란스러워 학문과 예를 닦는 일을 대부분 못하게 되어 유현(儒賢)을 존숭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이 점이 진정 식견 있는 자가 한탄하고 다사(多士)들이 억울하게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관학 유생들이 국조(國朝)의 유종(儒宗)인 문경공(文敬公) 신(臣) 김굉필(金宏弼), 문헌공(禮獻公) 신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신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신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 등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을 가지고 대궐에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그들의 뜻은 대체로 오도(吾道)를 위해 긍식(矜式)하는 바가 있게 하여 흥기(興起)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온 나라 대소 신민들의 공통된 공론으로서 어떤 사람도 그 사이에서 조금도 이견(異見)을 내지 않고 똑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임금께서는 즉시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미안한 비답을 내리시면서 ‘이언적같은 사람도 그 속에 끼어 있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온 지 오래이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의혹만 가득할 뿐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옛적에 송(宋)나라 신하 정이(程頤)는 그의 형 명도(明道 : 정호의 호)의 묘(墓)에 표(表)하기를 ‘학문하는 사람들이 도에 있어 지향(指向)할 바를 안 다음에야 이 분이 공이 있음을 알 것이고, 도달(到達)할 바를 안 다음에야 이 명칭이 실정에 맞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신들처럼 학문에 어둡고 식견이 없는 사람이야 이언적이 학문을 한 공정(功程)과 조예(造詣)의 깊고 얕음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정(先正)의 정론(定論)으로서 들은 것에 의거하건대, 이언적은 도기(道器)의 천품(天稟)을 타고 나 어려서부터 이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속의 학문 이외에 이른바 위기(爲己)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강명(講明)하고 체득하여 실천했으며,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의 영역에 힘을 쏟고 조존(操存)과 성찰(省察)하는 데에 공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입언(立言)과 수훈(垂訓)은 모두 옛 성현들이 몸소 실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절요(切要)한 내용들로서 실제로 일삼아 해 나가야 할 것들이지 공언(空言)이 아니었습니다.
중종(中宗)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고서는 자신이 아는 한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없었고 계옥(啓沃)하는 계책에 있어서도 지극히 충성스럽고 곧게 했으므로, 중종께서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칭찬하시며 ‘옛적의 진덕수(眞德秀)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극히 알아 주고 칭찬했던 사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에 뚜렷이 드러나고 있으니 속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성조(聖朝)에 와서는 임금께서 즉위하시자 맨 먼저 그동안 못했던 특전(特典)을 거행하여 포장(褒奬)하고 증직(贈職)하는 일을 베푸셨으며, 또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언행(言行)을 수집하고 편찬 기록하게 함으로써 염락관민(濂洛關閩)의 글과 함께 후세에 전해지게 하셨으니, 선유(先儒)를 표장(表章)하고 도통(道統)의 맥을 부식(扶植)한 뜻이 참으로 지극했다 하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당상(黨庠)간에 선비들이 그의 풍채를 우러르고 그의 인품을 사모하며 취사(取捨)할 바를 알아 추향(趨向)이 분명해지게 되었고, 무지한 인심이 문란해지고 어지러워지지 않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우리 전하께서 표양(表揚)하고 도솔(導率)한 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일찍 승배(陞配)하지 않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면서 아무리 일이 많은 시기에도 그 일을 강구하여 진작시키는 기틀을 삼으려고 하였는데, 뜻밖에도 이번에 도리어 이처럼 미안스러운 분부가 있게 되었으므로 신들은 괴이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진실로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혹시 당치도 않게 모함하는 말이 전하의 일월(日月) 같은 총명을 가리어 자모(慈母)가 투저(投杼)하는 것과38) 같은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그 전에는 존숭하여 칭찬하시다가 이제 와서는 야박하게 깎아내리시는 등 이토록 동떨어진 분부를 내리신단 말입니까.
아, 전하께서 덕을 존숭하고 도를 즐기시며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설시(設施)하는 모든 일이 사문(斯文)을 숭상하게 하는 교화(敎化) 아닌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종사(從祀)하는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처럼 지체하고 난중하게 여기시므로, 이것만도 이미 다사(多士)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하겠는데, 또 의심해서는 안 될 사람을 의심하시며 준엄한 분부를 여러 차례 내리셨습니다. 신들은 이로써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하고 사문이 땅에 떨어져 사람들이 가야 할 바를 모르고 선비들은 사기가 떨어진 채 길을 잃은 듯 의귀(依歸)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 까 두렵습니다.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몸으로 외람하게도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이 일이 잊혀지지 않기에 임금에게 논변(論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전의 견해를 씻어버리고 앞서의 의심을 완전히 풀어 버림으로써 다시 유현(儒賢)을 좋아하는 아량을 회복하시고 도를 중히 여기시는 정성을 더욱 돈독하게 하소서. 그렇게 되면 유림(儒林)에 이만한 다행이 없겠고 국가에 이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결재를 바랍니다.” 하니,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선조 175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6월 5일(갑신) 3번째기사
경상도 생원 김윤안 등의 5현의 문묘배향을 건의하는 상소문
경상도 생원(生員) 김윤안(金允安) 등이 또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영남(嶺南)의 바닷가 먼 곳에서 난리 중에 살아남은 몸으로 오래도록 도(道)를 들어보지 못하여 고루하기가 더욱 심합니다. 그러나 덕을 좋아하는 타고난 천성은 병화(兵火)속에서도 다 없어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유신(儒臣)의 행사를 변석(辨釋)하여 성상의 의심을 풀어드림에 있어 의의(意義)가 유창하지 못하고 사어(辭語)가 명확하지 못하여, 위에 글을 올리는 정성에 크게 어긋나게 되었기에 궐문을 우러러 부월(斧鉞)의 처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상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납하시어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 천장(天章)이 내리자 사람들의 의심이 확 풀렸고 현인(賢人)의 심사(心事)는 다시 잘못이 없는 데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성인(聖人)의 마음은 일월(日月)처럼 지극히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것이어서 만백성이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축하하기를 ‘산과 들을 헤매고 멀리 올라와 큰일을 이미 마쳤으니 돌아가 부로(父老)들을 뵙고도 또한 할 말이 있게 되었다.’고 하며 마음이 든든하여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바가 있기에 사흘 밤을 유숙하면서 지체하고 있었습니다만 번독스럽게 호소하는 것이 때로는 불가한 일인 듯싶고 이제 이대로 거두어 버리고 마음속에 간직하기에는 심사(心事)가 처연하였습니다. 종사(從祀)하는 한 가지 일은 곧 국가의 대제목(大題目)이자 유사(儒士)들의 제일의(第一義)인 것입니다. 종사 여부가 선현(先賢)에 있어서는 조금도 손익이 될 것이 없지만, 스승을 존숭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그대로 방과하여 만세의 공론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관(賢關 : 성균관)의 다사(多士)들의 혈성(血誠)을 다해 진소(陳疏)하는 것은 사세가 그만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들은 멀리 궁벽한 지방에 있으므로 소식이 서로 막혀 이미 반유(泮儒)들이 상소할 때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또 따로 향유(鄕儒)의 소장(疏章)도 갖추지 못했으니, 30년 이래 사문(斯文)에 많은 죄를 졌습니다. 무릇 온 나라 사람들이 친절(親切)하게 훈목(薰沐)받아 온 것은 아조(我朝)의 유선(儒先)들 만한 이가 없는데, 이른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 곧 그들입니다.
이 다섯 유신(儒臣)들의 깊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은 당시의 문적(文籍)에 드러나 있기도 하고 후세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또한 전후 유생(儒生)들의 상소에도 갖추어 있으므로 지금 기필코 그 나머지의 것을 빠짐없이 열거하려 한다면 이는 수다스런 말이 될 뿐더러 군더더기일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종사(從祀)하는 특전(特典)을 내리는 것은 곧 제왕이 공덕(功德)을 존숭하여 보답해 주고 다사(多士)들의 표준이 되게 함으로써 국가의 원기(元氣)를 삼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일에 부족한 점이 있게 된다면 사도(斯道)가 마침내 어디에 의탁할 것이며 또한 사라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란한 때에도 경적(經籍)에 유념하시고 강도(講道)에 마음을 기울였으므로 고명하신 식견이 이미 놀라운 경지에 도달하셨을 것이고 또한 위로는 선성(先聖)들의 도통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후대 임금들의 표적을 계시(啓示)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쾌하게 종사하는 특전을 거행하여 뚜렷이 인문(人文)를 게시하는 일은 진실로 전하의 책무(責務)입니다. 더구나 지금 묘우(廟宇)가 새로 낙성되어 향사(享祀)할 기일이 정해졌으니, 향기로운 제물로 제사하는 일은 지금이 바로 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데 매양 신중히 해야 한다고 핑계하시며 지나치게 겸손하시어 사문(斯文)의 더없이 중요한 일이 귀숙(歸宿)할 데가 없게 하시니, 신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시 후배(後輩)들의 한없는 애석한 일로 남게 될까 우려됩니다.
신들은 장차 신발을 고쳐 신고 멀리 군부(君父)를 하직하려 하는데 한번 도성문을 나서면 오색(五色) 구름이 피어오르는 천리 밖으로 떠나야 하므로 생각하는 바를 다 말씀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어리석은 이 충심(衷心)을 굽어 살펴 채택해 주심으로써 특별히 전에 없던 성대한 특전을 거행해주신다면 신들은 구학(丘壑)에 뒹굴다가 죽더라도 남은 영광이 있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니 유현(儒賢)을 존숭하는 뜻을 잘 알겠다. 다만 이 일은 뒷날 조정에서 조용히 의논해서 처결해야 할 것으로 경솔히 거행하기는 어렵다.”
하고, 이어 비망기로 이르기를,
“이 상소에 있는 유생들이 모두 지금 서울에 머물러 있는가? 영남 유생들이 험난한 길에 멀리 왔다가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궐정(闕庭)에서 정시(廷試)를 보여 위로하여 보내라.”
하였다.
선조 175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6월 10일(기축) 3번째기사
성균관 생원 이정 등의 5현의 문묘배향을 건의하는 상소문
성균관 생원 이정(李瀞)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지난번 다섯 유신(儒臣)을 종사(從祀)하는 일을 가지고 봉장(封章)을 올려 대궐에 호소하여 존숭(尊崇)하고 보답하는 특전(特典)을 거행하기를 바랐는데, 말한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정성이 천심(天心)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전하의 청감(聽鑑)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또한 이언적(李彦迪)의 일에 대해 도리어 뜻밖의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신들은 성비(聖批)를 받들어 읽다가 머리를 맞대고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대체적인 줄거리만이라도 진달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히 잇따라 소장을 올리어 전하께 강청(强請)하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한가한 즈음에 여러번 생각해 보시고 조용히 깨닫게 되기를 바라서였습니다.
옥당(玉堂)의 제신(諸臣)이 차자를 올려 갖추 진달함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진실로 이미 심금(心襟)을 열어놓고 다시 더 살펴 정령(丁寧)한 뜻을 보이셨고, 이번 영남 유생들이 간담(肝膽)을 피력하여 대궐문에 와서 호소하자 전하께서는 또 아름답게 받아들여 너그러이 용납하셨으니, 전하의 의심도 이로부터 풀릴 것이고 이언적의 광명정대한 심적(心跡)도 사방 사람들의 귀에 드러나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는 진실로 신들의 다행입니다. 생각하건대 군정(群情)이 전하께 크게 바라고 있는 것은 종사(從祀)하는 한 가지 일인데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망설이고 계시는가 하면 또한 뒷날 의논하여 처결하시겠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오늘날 경솔하게 거행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은 무슨 뜻에서이고 뒷날 의논해서 처결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에서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성상의 분부에 대해 의혹이 없을 수 없는 점인데 아마도 전하께서는 아직껏 마음속의 의심을 풀기에 석연치 못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아, 이언적은 학문이 순수 정대하고 도학(道學)이 굉박 광후한데, 한 몸으로 임금과 백성에 대한 책임을 안고 양조(兩朝)의 지우(知遇)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에 평생동안 쌓아온 경제(經濟)의 뜻을 이 세상에 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방(東方)이 복이 없어 이성(二聖)께서 잇따라 승하(昇遐)하시고 간흉(奸兇)들이 요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화기(禍機)가 이미 발생했는데도 사왕(嗣王)을 보익(輔翼)하고 사림(士林)을 부호(扶護)하기 위해 그 사이에 주선하면서 고상한 행동으로 멀리 떠나 자신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그의 임금을 친애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며 위태한 조정에서 정색(正色)하고 간흉들속에 우뚝이 서서 한 시대 사람들의 의지가 되었습니다. 이래서 이기(李芑) 등이 이를 갈며 독심을 품고 기필코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것인데, 서쪽 변방으로 귀양가게 된 것은 모후(母后)께서 특별히 관대한 은전(恩典)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화 내린 것을 뉘우치지 않아 대현(大賢)이 한 시대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펴보지 못하게 했지만, 그가 끊임없이 급급하게 여겼던 본심은 하늘의 해와 별처럼 환히 온 나라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습니다. 그가 화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천명(天命)인 것이고 자신이 마음속으로 자정(自靖)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것으로 군자는 선하게 하기를 힘쓸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저들에 대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리하여 귀양가 있으면서도 대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루도 마음속에서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하는 여가에 저서(著書)하여 입언(立言)해 놓은 것도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유서(遺書) 1편에서 더욱 그의 간절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국사를 충성으로 도모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고 한결같은 지조로 환란에 태연하여 모든 일이 자득(自得)한 것이 아님이 없었으니, 진실로 옛 군자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아, 심적(心跡)이 환하고 언행이 우뚝하여 이처럼 정대하고 광명했는데도, 살아서는 당시에 화란을 바로잡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오늘날에 신임을 받지 못하니, 이것이 이언적의 현명한 점에 대해 진실로 손익이 될 것은 없지만 사문(斯文)의 불행과 신들의 지극한 통탄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아, 우리 나라는 조종(祖宗) 이래로 유현(儒賢)을 존숭하고 사도(斯道)를 중히 여겨 인재를 교육하는 교화를 극진히 해왔습니다. 문종대왕(文宗大王) 때에 이르러서는 정몽주(鄭夢周)를 추장(追奬)하여 후학들에게 향방을 보여주자 호걸다운 선비들이 다분히 배출되었습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이 세 유신(儒臣)은 모두가 정미하고 순수한 학문을 가지고서 앞에서 주창하기도 하고 뒤에서 계승하기도 하여 중국에서 전해온 문헌(文獻)을 우리 동방에 크게 융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불행하여 기이한 화가 잇따라 기묘년5343) 이르러서는 사문(斯文)의 액운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사림(士林)이 좌절되고 유풍(儒風)이 사라져버려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화의 불씨로 여기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 추향(趨向)의 암담함이 날로 밤중과 같은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이언적이 나와 주창하여 조광조의 일을 이어가지 않았다면, 기묘년에 이미 좌절되었던 사기(士氣)가 어떻게 다시 을사년 이전에 떨칠 수 있었겠으며 후학이 누구에게 의귀(依歸)했겠으며 국맥(國脈)이 장차 누구를 의지했겠습니까. 아, 이언적은 이미 먼 지역에서 생애를 마쳤고 이황(李滉)은 또 그 시대에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므로 세상에 전해오던 학문이 성대해지지 못하고 점점 강쇠(降衰)되었으므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점차 민멸되어 도덕과 학문이 한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분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만일 다섯 유현(儒賢) 같은 분이 나와서 바로잡는다면 이들을 흥작(興作)시키는 책임은 오직 전하의 한몸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언적의 현명함을 포장(褒奬)하여 지난날의 의심을 통쾌하게 풀으시고 다섯 유현을 존숭하여 보답하는 빛나는 의식(儀式)을 시급히 거행함으로써 한 시대 사람들의 관첨(觀瞻)을 새롭게 하고 다사(多士)들의 추향(趨向)을 바로잡을 것은 물론 선왕(先王)들께서 배양해 오던 사기(士氣)를 오늘날 다시 진흥시켜야 할 것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이토록 의심하여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면서 ‘아직은 뒷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시니, 장차 어떻게 군정(群情)을 위로해 주고 후학(後學)들을 고무시켜 문교(文敎)가 흥기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옥후(玉候)가 미령하시어 바야흐로 조섭중(調攝中)에 계시므로 진실로 어지러이 번독스럽게 할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진실로 사기의 성쇠는 곧 국가의 안위와 치란의 큰 근본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어려운 때를 당하여 배양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않으신다면, 사문(斯文)이 날로 저상되고 사도(斯道)가 의탁할 데가 없게 되어 뒷날의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 무릅쓰고 아뢴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면서도 번독스러움을 꺼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군정(群情)을 환히 통촉하시고 공론을 널리 채택하시며 이언적의 현명함을 살피시어 의심을 풀고, 종사(從祀)하는 특전(特典)을 거행함으로써 존숭하여 보답하소서. 그리고 다섯 유신(儒臣)도 모두 향기로운 향사(享祀)를 받게 하신다면, 사문과 국가에 이보다 더한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누가 진달한 소장에서 성의가 간절함을 잘 알았다. 종사는 중한 일이어서 마땅히 조용하게 처결해야지 경솔히 거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선조 175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6월 16일(을미) 3번째기사
개성부 생원 김추 등의 5현의 문묘배향을 건의하는 상소문
개성부(開城府) 생원(生員) 김추(金秋)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 열성(列聖)들께서 화락하게 인재(人材)를 흥기시킨 아름다움은 삼대(三代)에 뒤질 것이 없었으므로 다섯 유신(儒臣)같은 분들이 서로 잇따라 나와 단절된 학문을 계승하고 미언(微言)을 부연하여 도학(道學)을 주창하여 밝혔으므로 울연(蔚然)히 한 시대의 종사(宗師)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학자들이 지금까지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우러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성균관의 여러 장보(章甫)들이 정성을 다해 대궐에 호소했을 때 성비(聖批)가 마치 이언적(李彦迪) 한사람은 부족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셨는데 유생들이 소장을 올리고 옥당이 차자를 올리자 정녕하게 온화한 분부를 내렸으니, 성상의 마음이 이미 석연해지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언적에게 잘못이 없는 것을 통촉하시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 등과 함께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올리도록 명하신다면, 사문(斯文)이 의귀할 데가 있게 되고 후학들이 긍식(矜式)할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중요한 예이니 마땅히 조정에서 조처해야 한다. 경솔히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선조 176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7월 11일(경신) 2번째기사
이비(吏批)가 아뢰기를,
“전일 ‘나이가 80이 된 사대부(士大夫)에게 노직(老職)을 주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듣고 보는 대로 거행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전 참의(參議) 조목(趙穆)은 학행(學行)이 뛰어나서 선비들의 긍식(矜式)이 되고 있는데, 이제 나이가 이미 81세입니다. 이 사람은 전에 전교하신 대로 노인을 우대하는 법을 거행해야 할 듯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조목은 이황(李滉)의 고제(高弟)인데, 올바름을 지키고 학문에 독실하며 언행이 뛰어나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숭되었다. 】
선조 178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9월 15일(임술) 4번째기사
예조에서 김굉필 등 5인의 문묘 배향을 건의하다
예조의 계목(啓目)에,
“지금 성균관(成均館)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그 내용 중에 ‘천조(天朝)가 이미 일정한 법제(法制)를 만들어 회전(會典)에 기록하고 번국(藩國)에 반포(頒布)하였으니, 그 뜻이 우연한 것만을 아닐 듯하다. 따라서 한결같이 천조의 성식(成式)대로 준행해야지 다시 다른 의논을 해서는 안 되니, 선사(先師)의 위호(位號)와 종사(從祀)할 분들의 승출(陞黜)을 모두 회전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계성묘(啓聖廟)의 경우도 천리(天理)나 인륜으로 볼 때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관한 제도와 의절(儀節)이 모두 회전에 실려 있으니 고찰해서 모방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따로 우견(愚見)이 있으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문헌(大獻)이 전해져 왔습니다마는, 의리(義理)에 관한 학문을 개시(開示)하여 사자(士子)들로 하여금 올바른 방향을 찾게 한 것은 진실로 성조(聖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바른 학행(學行)과 깊은 조예(造詣)는, 모두 《유선록(儒先錄)》 및 전후의 성균관·사학(四學) 유생(儒生)들의 상소에 언급되어 있으므로 지금 감히 췌언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사도(斯道)를 보위한 그들의 공은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은 사장(詞章)과 훈고(訓詁)의 학문을 가지고도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는데, 이 다섯 유신(儒臣)의 정대한 학문으로도 표장(表章)하는 특전(特典)이 없었으니, 사자들이 실망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문묘(文廟)를 중건하고 종사할 분들을 승출하는 시기를 당하였으니, 진유(眞儒)들을 존숭하고 사도(斯道)를 붙잡아 세울 기회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모두 국가의 큰 제도와 관련된 사항이니, 대신들과 의논해서 품재(稟裁)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선조 180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10월 17일(계해) 3번째기사
예조에서 계성묘를 세울 것과 김굉필 등 5인의 문묘 배향을 아뢴 계목
예조의【판서 허성(許筬), 참판 신식(申湜), 참의 송준(宋駿). 】 계목(啓目)에,
“성균관의 계사(啓辭)에 ‘지난해 양 경리(楊經理)가 우리 나라에 있을 적에 문묘(文廟)의 전식(典式)이 중국과 다른 것이 있음을 보고 중국의 예에 따라 바로잡을 것으로 이자(移咨)하여 왔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에 따라 시행하겠다는 내용으로 회자(回咨)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는 이미 정해진 예법이 있으니 번국(藩國)에서 달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이제 문묘를 중건함에 있어 양무(兩廡)에 봉안(奉安)할 적에 선사(先師)의 위호(位號)와 종사(從祀)의 승출(陞黜)에 관계되는 것과 계성묘(啓聖廟 :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사당)를 세우는 것과 기타 거행해야 할 절목(節目)을 이때에 결정하여 시행해야 되니, 해조(該曹)에 내려서 널리 중국의 예제(禮制)를 상고, 참작하여 조처하게 해야 한다.’고 한 데 대해 윤허한다고 전교하였습니다.
문묘의 전식(典式)은 위로는 선성(先聖)을 받들고 아래로는 선비들의 법식이 되는 것으로 이는 오도(吾道)의 뿌리요 사문(斯文)이 본받는 것이므로 진실로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문묘 제도는 전조(前朝 : 高麗)에서부터 전해온 것으로 당초에는 중국의 법을 취하였을 것인 바, 처음부터 우리나라가 스스로 만든 예법은 아닙니다. 이를 수정하는 일이 황명(皇明) 가정(嘉靖) 연간에 비로소 취정(就正)하게 되었는데 차이가 나게 된 것은 대개 여기에서 연유되었을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들은 ‘문묘의 승출은 권신(權臣) 장부경(張孚敬)의 무리에게서 나왔으니 존신(尊信)할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런 말이 있기는 하나 일이 사리에 맞는다면 성인은 사람 때문에 그 말까지 폐기하지는 않았으니, 단지 그 일이 예(禮)에 합당한지의 여부만을 살필 뿐이지 권신의 여부는 논할 것이 아닙니다. 중국 조정에서 이미 제도로 정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재하고 번국(藩國)에 반포하였으니 그 뜻이 범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 경리(萬經理)가【이름은 세덕(世德)인데 중국인으로서 우리나라를 경리(經理)하는 벼슬에 있던 자이다. 】 이미 조선(朝鮮)을 경리하라는 명을 받고서 군무(軍務)의 여가에 이자(移咨)까지 하였으니, 그가 우리나라를 중국과 같은 위치로 올려놓으려는 뜻이 매우 성대합니다. 당초 몰랐을 때에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이미 알고 난 뒤이니 한결같이 중국의 법식을 준행할 것이요, 다시 다른 의논이 있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선사(先師)의 위호(位號)와 종사(從祀)의 승출(陞黜)을 일체 《대명회전》에 기재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계성묘(啓聖廟)를 세우는 것은 천리(天理)와 인륜(人倫)으로 폐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예의(禮義)의 풍속에 대해 지금에야 의의(擬議)하는 것은 또한 이미 늦은 일입니다. 문묘의 서쪽에 따로 당초에 봉안했던 선성(先聖)의 옥우(屋宇)가 하나 있으니 별도로 사우(祠宇)를 건조하지 않더라도 그곳을 그대로 수리하면 하나의 묘우(廟宇)를 이룰 수 있으며, 따로 건조한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공역(功役)이 아니어서 성균관 서벽(西壁)의 재료(材料)만 가지고도 충분히 영조(營造)할 수 있으니 경비를 염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균관으로 하여금 동무(東廡)·서무(西廡)의 역사를 끝낸 다음 재력(材力)을 축적하여 건조하게 해도 마땅하겠습니다. 그 제도와 의절(儀節)은 모두 《회전》에 기재되어 있으니 상고하여 지을 수 있습니다.
신들에게 따로 우견(愚見)이 있는 바, 무릅쓰고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동방에 문헌(文獻)이 전래된 것은 절로 이루어진 것이 있습니다만, 의리의 학문을 열어주어 선비들로 하여금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게 한 것은 실로 성조(聖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융성하여졌습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같은 분들의 올바른 학행(學行)과 깊은 조예(造詣)는 모두 《유선록(儒先錄)》과 전후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의 상소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제 감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오도(吾道)를 호위한 공은 폐할 수가 없습니다.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은 사장(詞章)·훈고(訓詁)의 학문이었는데도 오히려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있는데, 이상 다섯 신하는 아직까지 표장(表章)하는 법전이 없으니, 선비들의 서운해 함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묘우를 중건하고 종사(從祀)를 승출(陞黜)시키는 때를 당하였으니, 이는 바로 진유(眞儒)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부식시킬 기회입니다. 이에 일단의 견해를 외람되게 진달하지 않을 수 없어 아뢰는 것인 바, 매우 황공합니다. 이는 모두 국가의 큰 제도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해조에서 감히 독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품재(稟裁)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완평 부원군 이원익은 의논드리기를,
“각건(各件)의 사연(辭綠)은 모두가 큰 거조(擧措)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신처럼 병들고 혼미한 사람은 진실로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해조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논열(論列)한 것이 매우 자세하니 여기에 근거하여 조처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겠습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은 의논드리기를,
“예관(禮官)이 논한 것이 대략 사의에 맞습니다. 신들의 천견(淺見)으로는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릴 수가 없습니다. 계성묘와 승출에 대한 두 조항은 반드시 멀리 전조(前朝)의 일을 상고하고 중국 제도를 본받아야 하니, 어찌 이를 강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다섯 분에 대해서는 그들의 학문이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와 공의 유무를 분명히 안 다음에야 감히 헌의(獻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번 일은 갑작스러워서 자세히 상고할 겨를이 없습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고,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유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의논드리기를,
“문묘의 전식(典式)은 사도(斯道)의 성쇠에 관계되는 것이니 신들이 어떻게 감히 경솔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대하다는 이유로 한 차례 가부를 귀결짓지 않는다면 끝내 귀정(歸正)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왕작(王爵)으로 높인 것은 당초 성인(聖人)을 높인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왕(王)’이라고 하는 것은 부자(夫子 : 孔子)때의 천자(天子)입니다. 춘추대의(春秋大義)에도 왕을 높이는 것을 제일로 삼았고 부자께서도 일찍이 ‘노(魯)나라의 교제(郊祭)와 체제(禘祭)는 비례(非禮)이니 주공(周公)의 도가 쇠해졌구나.’39)5424) 하였습니다. 예악(禮樂)도 참람됨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높이던 바 작명(爵名)이 자신에게 가해진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부자께서 편안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도(人道) 가운데 큰일로는 스승보다 더 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군(君)·사(師)·부(父)는 일체(一體)라 하여 한결같이 섬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디부터 있던 지위(地位)에 의거하여 단지 ‘지성 선사(至聖先師)’라고만 일컬어도 그 존숭이 이미 높은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왕(王)’자를 덧붙인 다음에라야 더 높이는 것이 되겠습니다. 중국에서 하루아침에 결단하여 개정하였으나 천하에서 이를 그르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전고의 누습(陋習)을 모두 씻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성묘(啓聖廟)는 사도를 중히 여기는 정성이 선성(先聖)의 유래에게까지 미쳐 가는 것으로 이는 사문의 성전(盛典)입니다. 그리고 안자(顔子)·증자(曾子) 등 제자(諸子)들이 아무리 성인이지만 아비보다 먼저 흠향받을 수 없다는 혐의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천리와 인정에 비추어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해조의 공사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공문 제자(孔門諸子) 이외에도 사도를 호위하는데 공이 있는 자는 모두 종사(從祀)하여 묘정에 배향되었는데 승출(陞黜)에 대한 의논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중국 조정에서 이미 수정을 가하였으니 또한 달리함이 있어서는 부당하겠습니다. 전부터 중국 사신이 왔을 적에 성묘를 배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성묘의 전식(典式)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어찌 못보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 의도를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면서 혈성(血誠)을 다하여 사대(事大)하였으므로 그 지성에 상하가 미덥게 되었습니다. 전고의 사례를 두루 살펴보건대, 치란(治亂)을 기록한 역사책도 외국으로 반출하는 것을 금해왔는데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을 기록한 《회전(會典)》까지 번국(藩國)인 우리에게 반포하였으니,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보는 것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경리(經理)가 이자(移咨)까지 하여 귀일시키려 한 것은 그 의도가 역시 중국과 같게 올려놓으려는 것입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스스로 힘써 도(道)에 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국에 이미 이루어진 법식이 있으니 우리 번국의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준행하는 것이 사체상 올바른 것이 됩니다. 그리고 뒷날 중국 사신이 보더라도 반드시 성조(聖朝)의 문교(文敎)가 동쪽으로 파급되어 온 성대함에 기뻐할 것이고, 또한 우리나라의 전제(典制)가 올바르게 된 것을 숭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사된 사람 가운데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 등은 모두 이학(異學)으로 성문(聖門)에 죄를 얻은 자들이어서 그 유해(流害)가 홍수나 맹수보다도 더합니다. 한때 한두 사람의 강력한 고집에 의해 사도를 호위한 공로의 대가로 종사의 대상에 들게 되었으나 이는 실로 천하 공공(公共)의 의논이 아닌 것입니다. 그 뒤에도 잘못임을 탄핵하고 거짓임을 변론하는 소장(疏章)이 왕왕 통보(通報)에 잇따른 것을 보면 중국 조정의 인심이 지금까지도 승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을 묘정에 종사하자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40년 이래 온 나라 대소 신민의 공통된 의논으로 오랠수록 더욱 격렬하여 모두 이견(異見)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명께서 중흥하시어 모든 것이 함께 일신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성대한 법전을 특별히 거행해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크게 보임으로써 일시(一時)의 선비들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을 데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도를 부식할 수 있는 한 번의 큰 기회로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큰 제도에 관계된 것이고 백세 뒤에도 우러러 볼 것으로, 한두 신하가 감히 독단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다시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아 품재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위에서 재결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의 의논이 이와 같았으므로 위에서 재결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니, 우선 뒷날을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기로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송(宋)나라의 신하인 정이(程頣)가 자기의 형인 명도(明道)의 비(碑)에 ‘학자(學者)가 도(道)에 대해 깊이 나아가 선생의 이르른 경지를 모른다면 누가 이 ‘명도’라는 이름이 실정과 맞는다는 것을 알겠는가.’ 하였는데, 생민(生民)이 있은 이래로 부자(夫子)처럼 덕이 성대한 분은 있지 않았다. 백왕(百王)의 심법(心法)을 전하고 만고의 강상(綱常)을 확립하였으니, 그 성대한 공과 지극한 덕은 비유하건대 천지처럼 크고 일월처럼 밝아서 무어라 명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진실로 성인(聖人)을 알기에 충분한 덕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에는 천재(千載) 뒤에 경솔히 위호(位號)를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중국의 법제가 비록 진선(盡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삼대(三代 : 夏·殷·周). 때와 견주어 본다면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는데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네 글자가 과연 부자의 성대한 덕을 형용하기에 충분하고 백세 뒤에 의혹이 없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은 우리 동방의 도학자(道學者)이다. 그분들의 올바른 입심(立心)과 깊이 도(道)에 나아간 것은 위로 선철(先哲)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 후학(後學)을 개발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부자(夫子)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삼가 본보기로 삼아 흥기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실로 일국 대소 신민의 공통된 의논인데도 제도를 다시 새롭게 하는 때를 당하여 시행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선조 181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11월 12일(무자) 6번째기사
김수·조목·이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수(金睟)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이시발(李時發)을 형조 참판으로, 조목(趙穆)을 공조 참판으로,【조목은 사람됨이 뜻을 도타이 하고 행실을 힘쓰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부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며 경의(經義)를 강론하여 듣고 본 것이 가장 많았다. 어버이를 위해 과거에 응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여러 번 주현(州縣)에 시용(試用)되었는데 자못 성적(聲績)을 나타냈다. 만년에 징소(徵召)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두문(杜門)하여 자수(自守)하며 좌우의 도서(圖書)를 공경히 읽고 곰곰이 생각하였으며 후학을 가르쳐서 성취한 자들이 많았다. 일찍이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과 동문으로 사귀어 친하였는데, 유성룡이 수상(首相)이 되어 국사(國事)를 담당할 때에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을 구제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노여운 빛을 나타냈다. 강화(講和)의 의논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조목이 글을 보내어 꾸짖으면서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다. [主和誤國]’는 넉 자로 지목하였는데, 유성룡이 크게 노해 드디어 서로 절교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나이 80이 넘었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므로 원근의 학자가 칭찬하며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바른 것을 지키고 배움을 도타이한 자는 오직 이 한 사람 뿐이다. 】 이거(李蘧)를 경기 감사로,【사람됨이 용렬하며 나이도 노쇠한데 1백 1세의 편모(偏母)가 있으므로 이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정사(政事)의 체모에는 어긋난다. 】 권진(權縉)을 사간으로,【전에는 이산해(李山海)에게 붙어서 현로(顯路)에 통하였는데 뒤에는 홍여순(洪汝諄)에게 붙어 이산해에게 창을 거꾸로 들이대며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사람됨을 알 만하다. 】 이정험(李廷馦)과【논의가 편벽하다. 】 박건(朴楗)을 예조 정랑으로, 윤광계(尹光啓)를 예조 좌랑으로, 유성(柳惺)을 전적으로, 백대형(白大珩)을 감찰로, 윤황(尹煌)을 전적으로, 권여경(權餘慶)을 제주 판관(濟州判官)으로 삼았다.
선조 183권,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1월 25일(경자) 8번째기사
성균관 진사 유학증 등이 계성전 건립, 동국 오현의 종사를 청하다
성균관 진사 유학증(兪學曾)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삼가 아룁니다. 학교는 윤리를 밝히는 곳이고 종향(從享)은 덕을 높이는 것인데, 윤리를 밝히는 도리는 반드시 선대(先代)를 추존(推尊)하는 것이며 덕을 높이는 예전(禮典)은 공론을 따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란 본디 기회가 있으니 새로운 제도를 창설함과 빠진 예전을 보충함이 어찌 중흥의 오늘날에 기대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송(宋)나라의 신하 홍매(洪邁)가 말하기를 ‘안자(顔子)와 증자(曾子) 두 분은 당상(堂上)에 배향되었는데 안노(顔路)와 증석(曾晢)은 무하(廡下)에 종사(從祀)하여 자식이 부친의 위에 처하여 있으니 신령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윤리 차서를 문란케 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요수(姚燧)는 말하기를 ‘안자·증자·자사(子思)는 당상에 좌정하고 안무유(顔無繇)·공이(孔鯉)·증점(曾點)은 묘정(廟庭)에 종사되니, 그 잘못은 자식을 높이고 부친을 격하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자식은 아비보다 먼저 음식을 먹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물헌(勿軒) 웅화(熊禾)는 두 학설을 절충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별도로 1실(室)을 설치하여 숙량홀(叔梁紇)을 중앙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안노·공이·증점을 서쪽으로 향하여 유식(侑食)하게 한다면 존경함이 표시되고 백성에게 효도를 가르침이 된다.’고 하였으며, 황조(皇朝)의 구준(丘濬)은 웅씨(熊氏)의 설을 옳다고 하면서 계성묘(啓聖廟)를 건립하자고 청하였는데, 그의 말은 ‘자식이 아비보다 먼저 음식을 먹는 것은 천륜에 관계되니 고쳐 만들기를 꺼려 그대로 따르면 안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정이나 예로 보아 당연한 일이며 천하 고금에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성군이 창설하고 계승하여 모든 시설을 일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는데 유독 윤리 기강을 좌우하는 태학(太學)에서 선현을 배향하고 종사하는 규정이 중국의 조정과 크게 다르니, 이것이 신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중국에서는 숙량홀·안노·증점·공이·맹손씨(孟孫氏)·정향(程向)·주송(朱松)·채원정(蔡元定)이 모두 계성묘에 들어갔는데 우리 나라는 안노·증점·공이 세 사람만이 아직도 무하(廡下)에 있고 맹손씨·정향·주송·채원정은 참여되지 않았습니다. 숙량홀 같은 이는 마땅히 존경하고 높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제향의 예전(禮典)에 빠져 대성인의 어버이를 존경하는 뜻을 저버렸으니, 윤리의 차서를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되는 것에 어긋나며, 어버이보다 음식을 먼저 먹지 아니한다는 대의에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삼한(三韓)이 재생하고 국운이 새로와져 높은 궁장(宮墻) 속에 향사하는 일이 잘 거행되니, 아마도 조종(祖宗) 2백 년의 미비한 예전이 필시 전하의 오늘을 기다려 완비되려나 봅니다. 더구나 지금 중국인의 왕래가 마치 한 집안과 같으며 우리의 예악 문물과 전장 법도에 대하여 감탄하며 존경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오직 이 일 하나만이 중국과 달라서 의아해 하고 있으니, 계성묘의 건립은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인데도 어찌 잘못된 것을 답습하여 고치기를 꺼린다는 비난을 자초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신들이 다섯 분을 종사하는 일을 가지고 혈성을 다하여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허락한다는 말씀이 오래도록 없으시니, 신들은 마음은 있으나 정성이 전하를 감동시키지 못하고 다시 진달하고 싶으나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여 머리를 모으고 서로 돌아보다 잠자코 물러났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성명께서 양육하신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사림에 응어리진 아픔을 끼친 지 오랩니다. 이에 외람되고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감히 전일의 요청을 거듭 진달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주소서.
신들이 삼가 살펴보니 문경공(文敬公) 신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신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신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신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은 모두 학문이 단절된 때에 분기하여 사도(斯道)를 강론하여 밝혔는데, 그 학문의 정심함과 실행의 독실함과 후세에 미친 공덕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며 성명께서 통촉하신 바이니, 감히 다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신들이 삼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의 현인을 좋아하시는 마음과 유교를 숭상하시는 정성은 참으로 한 가지 선행이라도 볼 만한 점이 있는 이라면 비록 천백 년 윗대에 있더라도 존경하고 드러내어 혹시라도 힘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실 정도인데, 하물며 이 다섯 분은 천재 일우의 성대에 태어나 우리 동방의 이학(理學)을 밝혀서 사문의 영수요 유림의 종장이 되었는데도 수십 년 이래 상소만 번거로왔고 전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아 명세(名世)의 진유(眞儒)로 하여금 제향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신들은 삼가 지난해 성상의 비답을 보니, 한 번은 ‘중대한 일을 어찌 가벼이 거론할 수 있으냐.’ 하셨고, 한 번은 ‘잠시 뒷날을 기다리자.’ 하셨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신들의 말을 결코 따를 수 없다고 하심이 아니라 곧 일을 가볍게 거론하기 어렵다는 것과 시기적으로도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성묘를 중건하고 동·서 양무(兩廡)도 수리하여 행단(杏壇)에 현가(絃歌)하는 장보(章甫)의 선비가 모두 모이고 근궁(芹宮)에 향기로운 석채(釋菜)의 예를 장차 거행하려고 하니, 사전(祀典)에 올려 배향하는 것은 참으로 오늘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욕의(縟儀)를 거행하여 성례를 천명하지 아니하여 덕을 높이고 현인을 존경하는 아름다운 뜻이 성세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어찌 오늘날 하나의 큰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아, 정학(正學)은 우주의 대들보이고 사림은 국가의 원기이므로 대들보가 한번 망가지면 인륜의 기강이 무너지고 원기가 한번 시들면 국가의 명맥이 위태로와지는 것이니, 이것은 필연적인 이치인 것입니다. 한 차례 난리를 겪은 뒤로부터 민이(民彝)가 없어지고 사습(士習)이 투박해져 온 세상이 몽매하여 학문을 알지 못하니, 국가의 맥락은 점차 쇠약하여져 마치 질병이 나날이 깊어가는 것과 같고 세상의 도리는 점차 하강되어 마치 흐르는 물이 더욱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정학이 밝지 않으면 인륜이 장차 무너지고 유풍(儒風)이 진작되지 않으면 국가의 형세가 나날이 위태로울 것이니,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성명이 위에 계시어 격려하고 부식할 생각을 갖고 일대의 유선(儒先)을 표창하고 군현(群賢)의 종사를 허락하여, 한편으로는 사문이 상실되어감을 진작시키고 한편으로는 선비들의 취향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못하고 의리와 이욕을 분변하지 못하여 삼강은 무너지고 사유(四維 : 인·의·예·지.)는 망가져서 세상의 도리와 국가의 명맥이 아마도 오늘날에 이르러 막이 내릴 것입니다. 그러니 신들이 구구한 혈성으로 항소(抗疏)하여 궐문에 호소하는 일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중히 여기시는 바는 대신·대간·논사(論思 : 홍문관) ·예관(禮官)인데 대신이 옳다고 하며 대간도 옳다고 하고 논사의 신하와 예를 관장하는 관원도 모두 옳다고 하며 전하까지도 또한 불가하다고 하지 않으셨으니, 사리로 헤아려 본다면 어찌 분명히 거행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어렵게 여기고 미루어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무슨 의도에서입니까? 아, 시기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우며 일이란 신속함이 귀하고 늦추어짐을 주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대로 이럭저럭 날짜만 보내다가 또 기회를 놓친다면 유림이 더욱 답답해 함과 많은 선비들의 실망은 그만두더라도, 한스러운 바는 우리 전하의 30년간 도를 높이는 정성과 현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선비의 정론(定論)을 생각하고 흠궐된 성전(盛典)을 닦아 계성전을 건립하시고 인심과 공론이 같다는 것을 생각하시어 다섯 분 종사의 욕의(縟儀)를 거행하신다면, 윤리를 밝히고 덕을 높이는 대의를 양면 모두 극진히 하여 여정(輿情)에 보답할 수 있고 사습을 바로잡을 수 있어 원기가 튼튼해지고 국맥이 공고해질 것이니, 중흥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니 예를 좋아하고 현인을 존경함이 지극하여 실로 가상하다. 다만 일의 체모가 막중하여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뒷날을 기다려 다시 거론함이 좋을 것 같다. 계성묘의 일은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선조 192권,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10월 24일(을축) 3번째기사
예조에서 의주·평양·경성의 비문 제진 문제를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건의하다
우승지 정혹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대제학 유근(柳根)의 계사(啓辭)에 ‘앞서 예조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의주(義州)·평양(平壤)·경성(京城) 세 곳에 비(碑)를 세우게 되면 비문(碑文)은 대제학으로 하여금 제진(製進)하게 할 것으로 이미 재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세 곳에 비를 세운다면 그 비문은 3건이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1건의 글을 세 곳에 같이 새깁니까. 이를 예조로 하여금 재결을 받아 시행하게 하소서. 또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선왕조 갑인년 사이에 경복궁 중수기(景福宮重修記)를 제학(提學) 홍섬(洪暹)으로 하여금 제진(製進)하게 하였는데, 홍섬이 사양하며 대제학 정사룡(鄭士龍)으로 하여금 제진하게 하였고, 정사룡이 또 계청하여 이황(李滉)·정유길(鄭惟吉)로 하여금 제진하게 하여 끝내는 홍섬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이 문집(文集)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국가의 큰 술작(述作)이 있을 경우 반드시 대제학에게만 전담시키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그 일을 중히 여겨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널리 문장에 능한 신하를 가려 찬진(撰進)하게 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간선하여 쓰게 하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돌을 다듬고 글을 새기는 공역이 몹시 거대하여 아마도 지금은 적기가 아닌 것 같으나 비문은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습니다. 지금 이 비를 세우는 일은 실로 덕행과 행적을 기재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기재하는 바가 모두 실사(實事)가 있어 이것을 가지고 갖추 기술한다면 1건의 글로 족할 것이요 2∼3건을 제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세 곳의 비에 모두 1건의 동일한 글을 쓰는 것 또한 너무 구차한 것 같으니, 1건의 글을 찬출(撰出)한 후 각 지방의 사적을 참작하여 약간의 증감을 가하여 3건을 제진하고 그것을 각각 그 비에 새기는 것이 사리에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덕행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가 중대하니 유사(有司)의 소견만으로 마음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결정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선조 192권,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10월 27일(무진) 2번째기사
예조에서 세 곳의 비문을 쓸 것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을 보고하다
우승지 정혹(鄭㷤)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대제학 유근(柳根)의 계사에 ‘세 곳에 쓸 비문(碑文)을 대제학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진(製進)하게 할 것으로 계하하였는데 세 곳에 세울 비문의 내용을 세 건으로 해야합니까. 아니면 한 건의 글을 세 곳에 새깁니까. 이 한 가지 일을 예관으로 하여금 위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게 하소서.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선왕조 갑인년 사이에 경복궁 중수기를 제학 홍섬(洪暹)으로 하여금 제진하게 하였는데 홍섬이 사양하므로 대제학 정사룡(鄭士龍)으로 하여금 제진하게 하였던 바 사룡은 또 계청하여 이황(李滉)·정유길(鄭惟吉)로 하여금 제진하게 하여 끝내는 홍섬이 제진한 기문(記文)을 썼다고 하는데 그 기문이 문집(文集)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국가의 큰 술작(述作)이 있을 경우 대제학 한 사람에게만 전담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널리 사신(詞臣)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찬진(撰進)하게 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 선별하여 쓰게 하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석재를 다듬고 글을 새기는 일이 몹시 거대하여 아마도 적기가 아닌듯하나 비문은 미리 준비하지 아니할 수 없을 듯하여 이에 감히 여쭙니다.’ 하자, 윤허한다는 것으로 전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본조에서 ‘지금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이 실로 덕행과 업적을 기재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데 거기에 기재하는 것은 절로 실사(實事)가 있는 것이니 이것으로 비술(備述)하면 1건의 기문으로 족하고 2∼3건의 제진이 필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세 곳의 비에 똑같은 기문을 쓰는 것이 구차하므로 1건의 기문을 찬출(撰出)한 후 각각 그 지방의 사적을 삽입시켜 약간의 증삭(增削)을 가하여 저술한 다음 각기 비에 새기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공적을 가려 후세에 전하는 일로 사체가 중대하므로 유사(有司)의 소견으로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이에 윤허한다는 것으로 전교하였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영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세 문신(文臣)에게 분명(分命)하여 각각 제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1건의 기문으로 가감하는 것은 너무 구차한 일이다.’ 하고,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은 ‘해조의 계사에 의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행 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은 병으로 인해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참작하여 결정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해조의 계사에 의하여 하라.”하였다.
선조 193권,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11월 3일(계유) 1번째기사
《주역》의 건괘를 읽다. 입시한 신료들과 근래의 문장·약방 의술·북로남왜의 방비·천재지변 등 국사를 의논하다
진시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니 영사 유영경(柳永慶), 지사 유근(柳根), 특진관 박홍로(朴弘老)·남근(南瑾), 대사간 성이문(成以文), 참찬관 유간(柳澗), 시강원 박진원(朴震元), 지평 민덕남(閔德男), 검토관 박안현(朴顔賢), 가주서 이홍망(李弘望), 기사관 임장(任章)·이현(李俔)이 입시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주역(周易)》의 건괘(蹇卦)를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건괘 초육(初六)의 뜻이 가령 임금이 건난(蹇難)한 때를 당하게 되면 과연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가?”
하니, 진원이 아뢰기를,
“건난한 때에는 또한 마땅히 자신에 반성하여 덕행을 닦으면서 반드시 시기를 살펴보고 행동한 연후에야 영예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이 괘는 신하의 의리로 말한 것으로, 마치 이윤(伊尹)이 신야(莘野)에서 밭을 갈고 태공(太公)이 위천(渭川)에서 낚시질하는 것 같은 일로 모두 덕행을 닦으면서 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건난한 때에 있을 지라도 심력을 다해 그 어려움을 극복해가면 어찌 할 수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성상께서 하교하신 초육(初六)의 뜻은 임금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곧 신하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고, 유근은 또 아뢰기를,
“한퇴지(韓退之)가 양성(陽城)에게 지어준 글에 ‘벼슬하지 않아서는 자기의 지조를 고상히 지니고 벼슬하여서는 왕의 신하로서 강직해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타당하다.”
하니, 남근이 아뢰기를,
“양성이 간의 대부(諫議大夫)가 되어서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퇴지는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학문을 버렸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후세에도 미진하다는 의논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사견(私見)으로는 그 위인을 고상히 여긴다. 이 사람은 또 사우(師友)가 없이 일어났고 학문이 고명하였으므로 명(明)나라 설 문정(薛文正) 같은 이도 퇴지(退之)를 찬미하는 논이 있었다. 심지어 악어(鰐魚)를 양(羊)처럼 구축하였으니, 이런 사람은 송(宋)나라에서도 많이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程) 주(朱) 이외에는 모두 미치지 못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퇴지가 나중에 무슨 벼슬을 하였는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벼슬이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堯)임금이 이를 순(舜)임금에게 전하고 순임금은 이를 우(禹)·탕(湯)·문(文)·무(武)에게 전하고 우·탕·문·무는 이를 주공(周公)·공자(孔子)에게 전했다고 하였으니, 퇴지의 이 말은 타인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근래에 우리 나라 선비가 소동파(蘇東坡)의 글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뜻에서인가?”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속인들이 소운(騷韻)이 없다 하여 읽지 않습니다.”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소신(小臣) 같은 사람이 주문관(主文官)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문폐(文弊)를 이룬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의 문장은 어떠한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근래 문체가 크게 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여 년 이래 한시(韓詩)와 동파(東坡)의 글을 모두 읽지 않기 때문에 문폐가 이러합니다. 이때에 권장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남근은 아뢰기를,
“요즈음 사람들은 전혀 고문(古文)을 사수(師受)하지 않고 다만 동시(東詩)로 전업을 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문체가 날로 저하되는 것입니다.”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한시(韓詩)는 곧 문장의 근본이며 원기인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한시를 많이 읽으면 시를 짓는 데에만 유효할 뿐 아니라 행문(行文)하는 데 있어서도 통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의 문폐는 선비들의 과실이 아니라 곧 고관(考官)의 소치이다. 옛날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脩)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서는 험괴(險怪)한 문체를 바꾸었고 명(明)나라의 구준(丘濬)이 고관이 되어서는 부잡(浮雜)한 시속의 문체를 제거하였다. 그러고 보면 시속 문체의 폐단을 바루는 방법이 과연 고관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지 않은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소신이 고관이 되어 살펴본 결과 문관(文官)이라는 자가 문리를 해독하지 못하여 응시자의 시권(試券)을 제대로 읽어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문장의 우열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관(試官)을 의망(擬望)할 때 고쳐 의망하고 싶었으나 사체에 미안함이 있어 과거를 설치할 때마다 과감히 단행하지 못하였다. 해사(該司)가 구양수·구준 같은 사람은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당시 문장에 능한 사람을 극선하여 고관으로 삼는다면 또한 좋겠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이번 월과(月課)를 ‘예조가 괴이한 문자를 취하지 말라고 청하였다.’는 것으로 제(題)하였는데, 이것으로 제한 것은 소신이 문폐를 바로잡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中原) 사람은 송(宋)·원(元) 때의 문장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근래 중원 사람들은 혹 동파(東坡)의 시를 읽는다고 합니다. 중묘조(中廟朝)에 임억령(林億齡)이 낮에는 이백(李白)의 시를 읽고 밤에는 동파의 시를 읽기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이백의 시만을 숭상하는 것은 불가하다. 반드시 동파의 시를 읽어야만 글을 지을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문(古文)이 좋기는 하다. 그러나 세대가 이미 달라진 입장에서 고문을 배우려 하다가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이는 한단(邯鄲)의 걸음을 배우는 격이 되고 만다. 또 궤변(詭辯)을 하는 자는 소견이 괴벽하여 반드시 성정(性情)을 해치므로 사용한 문자가 《좌전(左傳)》 같더라도 의당 물리쳐야 하는데, 고관(考官)의 소견이 이미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합격을 시키고 만다. 이 때문에 시속이 따라서 그것을 본받게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전에 향시(鄕試)로 취사(取士)할 때 ‘제갈양불구관우(諸葛亮不救關羽 : 제갈양이 관우를 구제하지 않음)로 논제(論題)를 냈는데, 그때 합격한 자는 ‘제갈양이 관우를 죽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구제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궤변이 이와 같았으므로 내가 예조로 하여금 삭제하게 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말하면 시문(時文)이 괴이함을 숭상하게 된 것은 곧 고관의 소치이다. 만약 올바른 고관을 얻어 문폐를 없앤다면 전과 같은 폐단은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요즈은 선비들이 방(榜)이 났다는 소리를 들으면 1등으로 입격한 자의 글을 전서(傳書)하여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읽듯 한다고 한다. 이것이 문체가 점점 저하되는 원인이다.”
하고, 상이 또 유근에게 이르기를,
“이는 모두 주문관(主文官)의 책임이니 경들이 마땅히 할 일이다. 인도하여 가르쳐야 되겠으나 사람마다 가르칠 수는 없다. 취사 선택에 있어 적의함을 얻으면 문체는 절로 바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의 문체가 조종조에 비하여 어떠한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신이 소시에 듣건대, 선왕조에는 문사 6∼7인을 선발하여 문장양망(文章養望)이라 불렀다 합니다. 지금의 문체가 어찌 조종조와 같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정광필(鄭光弼)은 《좌전(左傳)》을 3백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필은 문장으로 자처하지 않고 이처럼 독서하였으니, 옛사람들의 독서를 이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모두 독서를 하지 않는다. 혹 독서를 한다 하더라도 모두 허문(虛文)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염 사람들이 ‘이조(吏曹)의 문밖에 어찌 독서당을 만들지 않는가?’라고 하니, 이는 조소하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서당에 있는 자들이 서로 ‘아무는 《좌전》을 읽고 아무는 마사(馬史 : 司馬遷이 쓴 《史)》)를 읽었다.’고 하였으니, 누구나 책을 들면 읽을 줄 알았는데, 그 후에는 그렇지 못하여 독서하였다는 이름이 있어도 실효를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아예 서당도 없어져 버렸으니 그 제도를 아끼는 뜻조차도 없어져 버렸다.”
하고, 또 이르기를,
“문신(文臣)의 시사(試射)는 모두 허사인 것이다. 추고당하는 죄를 모면하기 위해 1분(分)만 얻어도 오히려 안심하고 있으니, 이런 시사를 해서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또 옛날에는 전경 문관(專經文官)을 선택하였었는데, 지금은 전경 문관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시사 문관(試射文官)을 병조가 감하(減下)하는가, 정원이 감하하는가?”
하니, 유간이 아뢰기를,
“병조가 감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알기에는 연소 문관들을 시사한 지 수개월도 되지 않아서 도로 감하하니, 어느 겨를에 재주를 성취하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근래 가주서(假注書)가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므로 내가 늘 웃는다. 또 주서의 책임이 몹시 고달파서 주서 두 사람으로는 부족하다. 승지 육방(六房)에도 각각 주서를 두는 것이 무방하다. 애당초 주서를 적게 설치한 의도를 알 수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조종 이래 삭서(朔書)를 권장하여 쓰게 한 것은 인재를 배양하는 방법에서였는데 내가 근래 삭서와 전문(篆文)을 보니 형체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성재(成才)될 리가 만무하다.”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유근이 문폐에 대해 한 말은 옳습니다. 유근이 문폐를 바루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근이 고관(考官)이 되면 응시자가 입장할 때 유근이 가는 곳을 피한다고 합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어떠합니까? 풍습(風濕) 치료하는 약을 일전에 들였는데 효과를 보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기(浮氣)가 간혹 있는데 왼손이 오른손보다 심하다. 겨울 동안에는 약간 복용하고 있다가 따스한 봄이 되기를 기다려 침구(鍼灸)를 가할 생각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의술(醫術)은 경연(經筵)에서 말할 것이 아니나 마침 이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내가 말한다. 근래 의술이 너무도 허술하다. 내가 의술은 알지 못하나 병의 증세와 이치로 궁구하면 또한 알 수 있다. 약을 쓰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인데, 의관(醫官)들은 쉽게 약을 써서 어느 병에 대해 물으면 무슨 약을 쓰라 이르고 가미(加味)하는 것 또한 많아서 본방(本方)의 약효를 잃게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필요없는 약을 복용한 것이 이제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 약을 복용하여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약을 복용하곤 할 따름이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옛사람들은 병의 증세를 알아서 다스렸는데 지금 사람들은 병의 증세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종조(中宗朝)에 안찬(安瓚)이란 의관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두통(頭痛) 앓는 것을 보고 바로 낙상(落傷)이라고 진단한 다음 약을 써서 즉시 그 효과를 보았다. 이는 참으로 귀신같다고 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3대를 계승한 의원이 아니면 그 약을 먹지 않는다 했고, 공자(孔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약은 감히 먹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약의 복용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약 쓰기를 매우 쉽사리 하니 지금의 의술을 알 만하다. 중원 사람은 이에 대해 많은 책자를 만들었는데, 《평림(評林)》·《의학입문(醫學入門)》 같은 책들은 모두 양생(養生)의 방법을 말하여 사람을 기만한 것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이를 믿고 배운다면 필시 생명을 잃는 일이 많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후인들은 모두 신농씨(神農氏)에 미치지 못하면서 많이들 사견으로 방서(方書)를 만들기 때문에 도리어 해를 보게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옛날에는 조사(朝士) 가운데도 의술에 능한 자가 있었으니, 정작(鄭碏)의 형 정염(鄭)은 의술에 정통하여 인묘(仁廟)를 진찰하였다. 그런데 지금 의술은 단지 찌꺼기만을 훔쳤을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하나의 심병(心病)을 앓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면서도 말의 시비를 알 수 없다. 또 내가 일전에는 입으로 토설하지 못하여 벙어리 같았는데 오늘날 이 자리에서 경들과 함께 말할 줄을 예측하였겠는가.”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안타까운 심정에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로는 천변이 있고 아래로는 민원(民怨)이 있으며 남북에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소신이 재상의 지위에 무릅쓰고 있으므로 주야로 민망합니다. 신을 체직시키고 다시 현재(賢才)를 얻어 보상(輔相)의 책임을 맡기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건괘(蹇卦)에 이견대인(利見大人 :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이라 하였다.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어찌 대인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나라와 함께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할 대신이니 퇴거할 수 없다. 옛사람은 임금을 보도함에 있어 모두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경은 나를 보도할 만한 사람이니 어찌 퇴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이윤(李尹)·여상(呂尙) 같은 사람을 얻어 그들로 하여금 보도하게 한다면 일을 극복해낼 수 있겠으나 소신 같은 자는 무능한 사람이니 어찌 일을 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된 자는 의당 현재(賢才)를 등용하여 내정을 닦고 외침을 막을 뿐인데, 내정을 닦고 외침을 막음에 있어 허다한 곡절이 있는 법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함경도에 필시 변고가 일어날 것인데 우리 나라의 민심은 한 번 궤산되면 쉽게 수습할 수 없다. 마땅히 변고가 생기기 전에 미리 방비해야 한다. 이른바 필시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병화(兵禍)가 만연하여 철령(鐵嶺)을 짓밟아 옴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랑캐의 욕심은 한량이 없으므로 훗날의 화가 실로 두렵다. 하지(夏至) 때는 일음(一陰)이 싹틀 뿐이지만 그것이 끝내는 굳은 얼음이 되는 것처럼, 아골타(阿骨打)와 홀필렬(忽必烈)이 처음에는 그 뜻이 천하를 얻으려는 데 이르지 않았으나 훗날의 화는 결국 저와 같은 데에 이르렀다. 모든 일이 이와 같지 않음이 없으니, 묘당(廟堂)은 이를 각별히 조처할 것은 물론 또한 민력(民力)을 해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방비에 전력하면 민력이 상하게 되고 민력의 피해를 염려하면 방비가 허술해집니다. 신이 양전책(兩全策)을 백방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하나의 묘안도 얻지를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진(六鎭)이 텅 비어서 영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이 함몰하면 민심이 흉흉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매양 이를 개탄하면서 스스로 ‘전일 북도의 감사와 병사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중국 장수가 머지 않아 곧 들어올 것이니, 그에게 말하여 그의 가정(家丁)으로 하여금 하질이(何叱耳)가 보내온 사람을 만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중국 장수가 머물러 있음을 알게 하면 아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변사가 먼저 의논하여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을 것 같으면 중국 장수의 가정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중국 장수의 허락여부를 알 수가 없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조 어사(趙御史)에게 다시 회자(回咨)하여 그로 하여금 노추(老酋)를 선유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북호(北胡)가 노략질하는 일을 중국에 주달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훗날 사단이 없을 것 같으면 주달할 필요가 없겠지만, 훗날 만약 변란이 있을 것 같으면 미리 주달함이 옳겠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소신이 거듭 생각해 보건대 이 적호의 환란이 필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적호의 기미를 중국에 주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오랑캐가 상경(上京)하고자 한다고 하니 이 무슨 뜻인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이는 호기를 부리는 말입니다. 또 이 호인은 왕태(王太)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하질이란 것은 호인의 본명(本名)이 아니라 곧 좌궁(左弓)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복장태(卜章台)인데 형인 복안태(卜安台)가 죽은 후 그 아들이 항상 장태가 부귀를 누리지 못할 것을 비웃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복안태의 딸이 노가적(老可赤)의 아내가 되어 일가(一家)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박홍로에게 이르기를,
“경이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되었는가? 영사(領事)가 중국에 주달하고자 하는 뜻과 내가 중국 장수의 가정을 보내 선유하고자 하는 뜻이 어떠한가? 각각 소견을 진술하라.”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지금 미리 주달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서서히 일의 기미를 보아가며 주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중국이 이미 남왜(南倭)를 평정하였는데 지금 또 북호(北胡)의 일로 주달한다는 것은 아마도 부당할 것 같습니다. 중국 장수가 근간에 곧 나올 것이니 그에게 간청하여 그의 가정을 보내어 선유하게 하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홀온(忽溫)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였습니다.”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박승종(朴承宗)이 실록청(實錄廳)에서 보았는데, 성묘조(成廟朝)에서는 안마를 주어 잘 대우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호인이 경들의 소견에는 어떠한가? 과연 끝내 무사하겠는가? 내지(內地)의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잘 방비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만전을 기할 수 있겠는가? 경들에게 필시 평소 소견이 있었을 것이니 진술해 보라.”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적의 정세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애초 군사를 일으킨 것은 무단히 한 일이 아닙니다. 중국의 장관(將官)이 호인을 살해한 것을 보복하려는 계책에서였습니다. 지난날 동관(潼關)의 함락도 처음에는 장구(長驅)할 계책이 아니었습니다. 또 듣건대 그 나라에는 성지(城池)의 형세가 없다고 하니 그 형세가 어찌 남쪽을 침구하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추호(酋胡)를 선유하여 납치된 번호(藩胡) 및 우리 나라 사람을 쇄환(刷還)시킨 후 직첩을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로의 말은 곧 처음 주려고 하던 1백 장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홍로가 아뢰기를,
“오랑캐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고신(告身)을 주어서 이익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섣불리 줄 수 없는 것이니 강정(講定)한 연후에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노략질할 걱정이 목전에 절박하다면 고신을 주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북도의 방수군(防戍軍)이 수천 명에 이르는데 명년에 군량을 댈 일이 극히 염려됩니다.”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1∼2년 동안의 기한을 두고 한편으로 군사를 보충하고 한편으로 고신을 주는 것이 방비책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해(東海)의 물이 붉어지는 변이 무슨 일에 대한 보응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극히 괴이하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영동(嶺東)과 영남(嶺南)에서 일어난 풍수(風水)의 변 또한 괴이합니다.”
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자강(自强)하지 못하는 터인데 북도 수령들의 가렴주구와 백성을 괴롭히는 행정이 근자에 더욱 극심합니다. 이러고서야 국본(國本)이 어떻게 견고해지겠습니까.”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전에는 순안 어사(巡按御史)를 보내어 북도를 살피게 하였는데, 일개 문관(文官)이 한 도(道)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하나 탐오한 수령들이 또한 이로 인해 욕심을 함부로 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금후부터 어사 한 사람을 보내어 수령들을 규찰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수역(戍役)에 보내는 군사들에게 위무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지금도 북도로 가는 장사(將士) 들의 처자에게 호역을 면제시켜서 국가에서 무휼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가하다고 하였다. 성이문이 아뢰기를,
“일당백(一當百)의 군대를 북도에 들여보냈으나 이른바 일당백이란 것은 팔도에서 잔약하고 용잡한 자들을 충당시킨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군졸로 어떻게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먼저 무사(武士)를 모집하여 북도로 들여보내고 방수(防戍)를 마치고 돌아온 후 6품직을 제수하기로 허락하면 저들 역시 감동하여 모집에 응할 것이며 따라서 정병(精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역로(驛路)가 피폐하고 역마가 부실하여 평일에 있어서도 오히려 전명(傳命)하기가 어려우니, 혹시라도 급보가 있게 되면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마관(馬官)을 선임하여 역로를 회복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민덕남은 아뢰기를,
“재변의 참혹함이 이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에 대한 보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두 생민의 질고와 원망이 부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조심하시어 묘당(廟堂)과 더불어 보존책을 강구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천심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문장(文章)의 폐단은 실로 좌우에서 아뢴 바와 같습니다. 경외의 사자(士子)들이 예문(禮文)과 유서(儒書)에 뜻을 두는 자가 전혀 없어 사습(士習)이 날로 투박해지고 예의와 염치가 따라서 소멸되니 매우 한심합니다. 대사성(大司成)은 특별히 선비들의 모범이 될 만한 자를 선택하여 구임(久任)시킴으로써 성과를 책임지우고 외방에는 각별히 각도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그들로 하여금 권장함과 동시에 학술과 행검이 있는 자를 널리 수소문하여 사실대로 계문하면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해 각별한 포상을 베풀어 선비들의 마음을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근래 무변(武弁) 가운데 장령(將領)이 될 만한 자가 전혀 없어 혹 병사·수사의 자리가 비게 될 때는 합당한 사람을 차송(差送)할 수가 없습니다. 장래의 병사·수사에 합당한 사람을 각별히 택차(擇差)하여 형조·호조의 낭관으로 삼아 명망을 배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유간은 아뢰기를,
“지난번 소신이 일 때문에 영남에 가서 들은 바에 의하면 중국 장수가 왕래하면서 마가(馬價)를 징수하므로 남방 백성들이 이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가를 징수한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유간이 아뢰기를,
“소요되는 수량을 헤아리지 않고 마필(馬匹)을 많이 징수하는 것인데, 만약 소요 수량이 10필이면 40∼50필을 독촉하여 소요 수량 이외에는 모두 목필(木匹)로 받아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값을 수령이 마련하는가, 아니면 찰방(察訪)이 마련하는가?”
하니, 유간이 아뢰기를,
“수령과 찰방이 다같이 마련하는데, 수령은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여 민간에서 징납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고, 박진원은 아뢰기를,
“《사서(四書)》와 《시전(詩傳)》의 언해(諺解)를 아직 완간하지 못한 권책과 《소학언해(小學諺解)》를 양남(兩南)의 종이가 생산되는 고을로 하여금 개간(開刊)하여 반포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 역시 그러하다.”
하였다. 진원이 아뢰기를,
“세자께서 《상서(尙書)》를 진강(進講)하는데 언해가 없습니다. 지금 《상서》와 《예기(禮記)》를 현토(懸吐)하고 해석하여 《시전언해》를 개간하듯이 하면 경연(經筵)에만 도움이 있을 뿐아니라 여염(閭閻)의 훈몽(訓蒙)에도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서》를 현토하고 해석하여 간행하는 것은 진실로 내 뜻과 같다. 그러나 《예기》에 있어서야 현토와 해석이 무엇이 필요한가. 이는 곧 고인들의 행문(行文)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가례(家禮)》는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글에 능한 자로 하여금 보게 하여도 오히려 쉽게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글을 알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지금 《가례》를 현토 해석하여 여염 사람과 규중의 부녀들도 모두 알게 하는 것이 좋겠다. 《시경언해》의 채 완간하지 못한 권책과 《서전》·《가례》는 마땅히 해야 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상서》·《가례》·《시전》을 간행하고자 하는 뜻이 어떠한가?”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마땅히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인출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문관은 일을 다잡아 하지 않으므로 이를 추진할 수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천자문(千字文)》 같은 것도 해석하면 좋겠다. 그러나 《예기》는 꼭 해석할 필요가 없겠다. 《가례》를 해석하고자 하는 뜻은 어떠한가?”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평시 이황(李滉)이 집석(輯釋)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 얻어 볼 수 없습니다. 《가례》에 대한 분부는 또한 지당합니다.”
하고, 박안현은 이르기를,
“사서의문(四書疑問 : 科文六體 중 한 가지)은 과거의 극심한 폐단입니다. 한 사람이 지어놓으면 열 사람이 그대로 옮겨 쓰므로 온 과장(科場)의 글이 똑같아 취사선택이 어려우니 이것을 폐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유근에게 이르기를,
“사실이 그러한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제의(製疑)할 줄 모르는 자는 다른 사람의 저술을 베껴 쓰곤 하기 때문에 내용이 똑같은 폐단이 있습니다. 신이 고관(考官)이 되어서는 서서 제술하지 못하게 하였더니 별로 똑같은 문장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각 자기의 의사로 짓는데도 절로 같아지는 것인가, 아니면 전서(傳書)를 하므로 같아지는 것인가?”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전서하기 때문에 똑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역서(易書)는 혁파할 수 없다. 역서를 한 후부터는 과지(科紙)의 품질을 숭상하는 풍습이 절로 없어졌다.”
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
“근래 종실(宗室)이 글을 알지 못하니, 평시의 예에 의해 다시 종학(宗學)을 세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뜻은 좋으나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인품이 같지 않아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가르쳐도 유익함이 없다.”
하고, 또 유영경에게 이르기를,
“종학을 설립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아뢰기를,
“급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유영경이 또 아뢰기를,
“종묘와 궁궐을 짓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이를 먼저 계획해야 합니다.”
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
“성상께서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와 망궐례(望闕禮) 때 대내(大內)가 극히 협소하여 백관의 반열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서장(西墻) 밖 공지에다 조그마한 집 하나를 지어 어전(御殿)을 만들어서 조회할 때 사용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할 수 있으면 하라.” 하였다. 오시(午時) 초에 파하였다.
선조 195권, 39년(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1월 18일(정해) 2번째기사
관학 유생 유희량 등이 오현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유희량(柳希亮)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하늘이 우리 조정을 돌보시어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받으며 교도해 주고 부추겨 주시어 인재가 배출되었는데, 그때는 문경공(文敬公) 신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신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신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신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은 모두 하늘이 낸 진유(眞儒)로서 앞에서 계도하고 뒤에서 계승하였습니다. 널리 배우고 힘써 실행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敬)을 주지함으로써 본원의 바탕을 함양하여 고명한 경지에 도달하였고, 후배들에게 요령을 제시하고 방향을 계도하여 세상의 종사(宗師)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륜(彝倫)이 이에 힘입어 무너지지 않고 오도(吾道)가 이를 말미암아 실추되지 않았으니, 유가(儒家)의 의범으로서 사문(斯文)을 부추긴 공은 당시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항간의 선비들이 사모하고 우러러 받듭니다. 길을 잃었던 자가 돌아설 줄 알고 이단을 말하던 자가 정도(正道)를 되찾을 수 있어 어둡기만 하던 천지가 다시 일월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이겠습니까.
신들은 듣건대 그 공이 드러났으므로 대례(大禮)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오신(五臣)은 정도를 계발한 공이 이와 같고 이륜을 밝힌 공이 이와 같고 또 후학을 계도하여 귀착지를 알려준 공이 이와 같으니, 그 훌륭한 공이 이 오신보다 더한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대례는 오히려 빠뜨렸으니, 이것이 어찌 많은 선비들의 실망이며 성세(聖世)의 결례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덕을 존중하여 훌륭한 예우를 하소서. 보공(報功)의 법전을 특별히 밝혀 종사의 대열에 들게 함으로써 위로 도학의 본원을 넓히고 아래로 많은 선비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한 시대의 사람들이 이(利)를 버리고 선(善)으로 달려가기를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하계하신다면, 어진이를 높이고 선을 권장하는 도리가 여기에 이르러 지극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겠다. 이 일은 전에도 이미 하유하였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뒷날을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오현(五賢)의 종사(從祀)는 실로 온 나라의 공동의 논의이다. 진유(眞儒)를 표창하여 사문(斯文)을 부지하는 일은 오늘날의 급선무인데도 지연시키고 시행하지 않으면서 우선 뒷날을 기다려 보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일대 흠이 아니겠는가.
선조 196권, 39년(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2월 12일(신해) 1번째기사
《주역》 건괘를 강론하다. 조사·일본에 사절파견·하늘의 이변·북방 방어·문묘 등 국사를 논의하다
진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론하였다. 영사 심희수(沈喜壽), 지사 황진(黃璡), 특진관 김신원(金信元)·권희(權憘), 대사헌 홍식(洪湜), 대사간 최천건(崔天健), 참찬관 김시헌(言時獻)·홍경신(洪慶臣), 검토관 민덕남(閔德男), 기사관 임장(任章)·이현(李俔)·유학증(兪學曾)이 입시하였다. 상이 앞서 배운 《주역》 건괘(乾卦)의 초 육효 ‘왕건내예(往蹇來譽)’에서 정전(程傳)의 ‘유춘추지언귀야(猶春秋之言歸也)’까지를 한 번 읽은 뒤에 홍경신이 육사(六四)의 ’왕건내연(往蹇來連)’에서 정전의 ‘지오야(指五也)’까지를 진강(進講)하였다. 상이 새로 배운 대목을 읽어 내려가다가 정전의 ‘시이석이길야(是以碩而吉也)’에 이르러 이르기를,
“석(碩)하기 때문에 길하다고 보아야 되겠는가, 이러므로 석하여 길하다고 보아야 되겠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석하기 때문에 길하다고 보아야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이 벌써 극에 달하였는데 보조(補助)가 있다. 그러므로 이는 석하여 길하다는 것이지 석하기 때문에 길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건의 극에 처해 있으면서 너그러움을 얻은 것으로 본다면 석하기 때문에 길하다는 것인 듯하나 이제 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그것이 윤당합니다.”
하고, 홍경신은 아뢰기를,
“신들도 처음에는 석하여 길한 것으로 보고 밖에서 강정(講定)할 적에 그렇게 고쳤었는데 이제 다시 보니 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하였다. 심희수가 아뢰기를,
“이는 건괘가 구오(九五)의 건난(蹇難)할 때를 당하였건만 양강(陽剛) 중정(中正)한 신하를 제대로 얻어서 서로 보필하고 있기 때문에 건난을 헤쳐나가는 공이 있으므로 석하여 길하다는 것입니다. 상께서 크게 건난한 때를 당하시어 화란(禍亂)은 거의 평정하였으나 아직도 완전히 회복시키지 못한 것은 찬조다운 찬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재 중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상께서 사람 쓰는 도리를 제대로 다하신다면 반드시 적격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홍경신은 아뢰기를,
“임금이 아무리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밑에 양강 중정한 신하가 없으면 건난을 제대로 헤쳐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묻기를 좋아하면 여유가 생기고 독단을 좋아하면 지혜가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당 덕종(唐德宗) 때 육지(陸贄)를 말하지 않은 것은 그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덕종이 시종 그를 썼다면 훌륭한 정치를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홍경신은 아뢰기를,
“성공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이성(李晟)만을 말한 것인데, 그는 장수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신(賢臣)이었습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덕종이 ‘하늘이 이성을 탄생시킨 것은 사직을 위해서다.’고 하였거니와, 예악이 바뀌지 않고 종묘가 그대로 보전된 것은 곧 당시 그가 회복한 공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장재(將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덕종의 성품은 소인(小人)과 잘 맞아서 노기(盧杞)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큰 변란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난을 다스리고 반정(反正)한 공은 크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덕종의 인품을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단수실(段秀實)의 비문을 덕종이 친히 지었는데, 반드시 글을 잘 한 뒤에야 그 글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덕종이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친히 비문을 지어 표창한 것입니다. 이번(李藩)의 인품은 덕종도 정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을 평하여 ‘이 사람이 어찌 나쁜 짓을 할 사람이겠는가.’ 하였던 것입니다. 덕종의 비문에 단수실의 사적이 실리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유종원(柳宗元)도 비문을 지어 추가하여 기입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한 사실이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상께서 건난을 구제하는 도리를 더욱 다하신다면 국가 만세의 복이겠습니다.”
하고, 홍경신은 아뢰기를,
“건괘의 대상(大象)이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닦는 데 주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은 반(反)자에서 온 것입니다.”
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영사 심희수가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천변(天變)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그중에서도 지난번 흰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지른 변고는 병상(兵象)을 주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뭇 재앙 가운데 가장 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해마다 발생하여 연초(年初)에 일어나기도 하고 혹 초봄에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무슨 일의 보응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이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너무도 흉참스럽습니다. 국사가 위급하고 인심이 원망하는 이런 때를 당하여 아랫사람으로서 그 누가 놀라와하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어제 신들이 사정(私情)을 상달한 뜻은 윤허를 받아 물러가게 될 것을 바란 것인데 상의 전교에 ‘이런 일은 한(漢)나라 조정의 잘못된 처사이다.’ 하셨습니다. 이고(李固)·두교(杜喬)라면 모르겠지만 용렬한 신이 어찌 정승 자리에 있을 수 있는 때이겠습니까. 재변의 발생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훌륭한 정승을 선임하여 쓰신다면 보필하는 공효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5∼6년 전에 습증(濕症)으로 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하여 늘 절어 왔으며 이제는 나이도 이미 많습니다. 매번 사퇴하려고 하는데도 되지 않는데, 중국 사신이 나오게 된 뒤에 실례라도 한다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때인만큼 더욱 이대로 중임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사람 중에는 집에 누워서 다스린 이도 있었으니, 집에 누워서 보필하여도 된다. 재변이 발생한 것은 실로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이것이 어찌 상공(相公)의 잘못이겠는가.”
하자, 심희수가 아뢰기를,
“의정부가 병이나 요양하는 곳은 아닙니다. 어찌 감히 누워서 보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북방의 일로 말한다면 그들의 병력이 많지는 않다 하더라도 용병술로 본다면 심상한 적이 아닌 듯하다. 혹시라도 한 번 발동한다면 우리 나라의 장수들은 본시 용병술을 잘 모르는데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특히 함경도는 병력이 취약하고 인심이 괴리되어 있으니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는가. 비변사도 이 점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임기 응변은 제대로 못하지만 어찌 우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직첩을 받고 나서도 반드시 침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 적들은 잔약한 보루를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40여 동(同)의 물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늘 병력으로 시위를 한다는 기별이 있으니 불원간에 반드시 도발할 것입니다. 관찰사는 양향(糧餉) 때문에 걱정하고 병사(兵使)는 군졸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군량이 고갈된다면 장차 어떻게 이어대겠습니까. 천리 밖에서 조병(調兵)하고 운량(運糧)하는 것은 번번이 그때그때 하여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참으로 본도의 토병(土兵)이 처자를 보양하면서 지성으로 적을 방어하도록 하게 할 수 있다면, 싸움도 하고 둔전도 경작하게 하는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군량을 싸 가지고 출정하게 되어 원근이 소란스럽기만 하고 끝내 이어대지 못하는 어려움이 오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詔使) 이외에 감생(監生)이 조서를 가지고 온다는 일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처음에는 감생이 혹시 철군(撤軍)하는 일로 조서를 가지고와서 우리 나라에 자력으로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습니다만 칙서라 하지 않고 조서라고 하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서를 가지고 오면서 조서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자, 심희수가 아뢰기를,
“관문을 통과한 뒤에는 반드시 확실한 기별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가 언제쯤 여기에 도착하겠는가? 모든 일은 다 준비되어 있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행차의 지속은 아직 알 수 없으나 2월에 길을 떠났다면 도착할 시기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 행차가 어찌 3월 초승을 벗어나겠습니까. 그리고 북방의 일이 저와 같은데 남방의 일이 또 이와 같아 왜인이 누차 강화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매번 중국의 명령을 따라야지 임의로 처리할 수 없다고만 핑계를 대므로 귤왜(橘倭 : 橘智正)가 비웃으며 ‘강화를 하고 싶지 않다면 바로 말할 것이지 어찌 꼭 천조를 구실로 삼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수사(水使)의 군관을 들여보낸다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전일에 들여보냈던 사람을 번번이 들여보낼 수 없어서 통사 이언세(李彦世)를 들여보낼 것을 지금 의논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대근(朴大根)은 어째서 들여보내지 않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어찌 박대근을 들여보내고 싶지 않겠습니까. 무인을 골라서 함께 들여보내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무인으로서 나이 젊고 영리한 자를 아직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희춘(蔣希春)을 남쪽에서 불러온 뒤에 떠나보내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평조신(平調信)의 조문(弔問)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그것은 사람을 보내기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구실임을 알았다. 평조신은 우리 나라의 흉적이므로 조문은 전례가 없으니 결코 할 수 없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전에 쇄환(刷還)된 뒤에 또 도주한 사람이 있으니, 이들을 찾겠다는 명분으로 말한다면 조금 나을 듯하기에 벌써 회계(回啓)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도 황당하여 어려울 것 같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조정도 모르게 외부에서 보냈다고 한다면 될 듯하나 교활하고 약은 그들이 조정에서 보낸 것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북방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한 사실을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방에 부방(赴防)하러 가는 사람이 부산에 가서 환도(環刀)를 구입하려는 것을 왜인이 금지시키자, 지정(智正)이 꾸짖기를 ‘오랑캐를 막기 위하여 칼을 사는데 왜 막는가.’ 하였다 합니다. 이러한 일은 아랫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다면 저들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은 아무리 엄금하더라도 모든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저들이 누차 쇄환하였는데도 우리는 회보를 하지 않았는데, 만약에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와서 위협한다면 우리나라 사람 중에 동요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평조신이 이미 죽었으므로 어떤 이는 이제부터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아들 경직(景直)의 말이 ‘아버지는 가강(家康)에게 잘 주선하였으나 나는 나이가 어려서 제대로 주선을 못하니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있게 될까 두렵다.’고 한다니, 이것 역시 위협하는 뜻입니다.
아무리 저들에게 강화를 허락한다 해도 주사(舟師)가 해이되어서는 안 되는데 주사가 점점 전일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그리고 가강의 말이 ‘나는 평수길(平秀吉)과는 다르다. 임진년에 나는 관동(關東)에 있었으므로 나의 군사는 한명도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고 한다니, 평수길은 우리나라에 있어 불공대천의 원수이지만 지금은 이 사람이 태도를 바꾸었으니 강화를 허락할 수도 있습니다. 북방의 일과 남방의 일을 갈라서 조처한다면 기회를 노려 협박해 올 우려가 있는데 만일 강화를 협박해 온다면 반드시 난처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개돼지와 강화하는 것이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모든 일이란 임기 응변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황진(黃璡)이 ‘귤지정(橘智正)이 돌아갈 적에 기색이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아마 강화의 일이 지연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적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임진년에 평수길이 우리나라에 사절(使節)을 청한 것에 대해 모두들 명분을 빌려는 저의라고 하였으나 평수길이 중국을 경멸하면서 어찌 우리나라에 명분을 빌려 하였겠는가. 평조신의 죽음에는 조문을 한 전례가 없으니 결코 보낼 수 없다. 이번에 사람을 보내더라도 대마도에만 간다면 저들의 정형(情形)을 제대로 알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옛사람도 ‘두 진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이에 연락자를 두는 것은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지난해 청정(淸正)이 유정(惟政)·김응서(金應瑞) 등과 서로 알아서 서신을 왕복한 일이 있으니, 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청정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인구 쇄환을 명분으로 오가게 한다면 저들의 정형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다 해도 대마도에서 정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외정(外廷)의 뜻은 대마도에만 보내려고 합니다. 깊이 들어갔다가는 잡혀갈 우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잡혀가는 일은, 왜인의 성품이 아무리 사독하다 해도 반드시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가강은 조선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면 잡혀갈 우려도 있으나 이제 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별도로 의논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사 잡혀간다 하더라도 손해될 일은 없을 것이다. 왜인이 도량은 자못 넓으나 다만 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금수와 같은 것이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장수가 평행장(平行長)이 평양에서 패전하였듯이 패전하였다면 어찌 살아날 길이 있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온 나라가 소란해져 대간(臺諫)이 계사(啓辭)를 올렸을 것이지만 저들은 태연히 꼼짝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성미가 급할 따름이다. 만약 글을 알았다면 더욱 형언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평소 동평관(東平館)에 사시로 머무르는 왜인이 2백 년 이래로 그 수가 적잖이 많았지만 자기 나라의 일은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아무 말 없이 매매만 하고 갔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동평관에 머물렀다면 하루가 못되어 우리나라 일을 모두 말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홍식이 아뢰기를,
“적정을 정탐하는 것이 의리에 나쁠 것이 없다 해도 상께서 지금 와신 상담 중에 있으므로 조문은 결코 보낼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문은 이미 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조문이 아무리 속임수에서 나왔다 해도 참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홍식이 아뢰기를,
“근래 놀랍고 해괴한 재변이 없는 해가 없는데 무슨 일에 대한 응험이라고 감히 지적할 수는 없으나 하늘의 사랑과 아낌이 이와 같다면 상께서는 더욱 생각을 가다듬어 성찰하셔야 됩니다. 예부터 상상(祥桑)이 저절로 시들었고40) 형혹(熒惑)이 저절로 물러났었으니41) 재변을 해소시키는 길은 덕을 닦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고, 최천건은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 때 평지에 10여 척(尺)의 물기둥이 솟아났고, 24개의 산이 같은 날에 무너졌으니, 이는 변고가 극에 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덕을 닦음으로 해서 끝내 화는 없었습니다. 상께서 이렇게 건난(蹇難)한 때를 당하였을수록 자신을 반성하고 덕을 닦아 진실되게 하늘에 응답하고 성심으로 공도(公道)를 펴고 모든 아랫사람을 신임하는 한편, 외모의 꾸밈을 제거하고 늘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시어 이것으로 재앙을 없애는 근본을 삼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어찌 재앙을 상서로 만들 길이 없겠습니까.”
하고, 홍식은 아뢰기를,
“재앙을 만나 수성하라는 것이 예사로 하는 말인 것 같으나 제왕이 마음을 기울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길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시정(時政)의 득실이나 변사(邊事)의 이해, 그리고 인재의 유체(幽滯)나 형옥의 억울함에까지도 이처럼 조정 신하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널리 자문하여 이것으로 여망(輿望)에 부응하고 천심(天心)에 응답하신다면 어찌 하늘이 감응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재앙을 바꾸어 상서를 만드는 것도 한 생각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을 오활하고 실상이 없다 하지 마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은 들으라. 함경도의 일에 대해 나의 생각에는 육진(六鎭)에만 군량을 운송하고 군병을 보탤 것이 아니라 중로(中路)의 중요한 곳에 결원이 생기는 대로 믿을 만한 사람으로 점차 전차(塡差)해 나간다면, 그들도 평소에 미리 조치할 것이라 갑작스런 사태에 반드시 힘입는 바가 있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함흥(咸興)은 내지(內地)여서 육진과는 거리가 멀지만 삼수(三水)·갑산(甲山)과는 아주 가까와서 5∼6일의 이정(里程)에 불과하다 한다. 저들이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아서 묻는다면 우리나라의 형세를 반드시 다 말할 것으로, 그들의 용병술이 왜인만은 못하다 해도 깊숙이 몰아쳐 올 우려도 있다. 병법에 정병은 맞서 싸우고 기병은 그 후미를 에워싸라고 하였다. 때문에 진(晉)나라의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와 맞서 버티되 등애(鄧艾)는 산을 뚫어 길을 텄으며, 수(隋)나라 노광달(魯廣達)은 하약필(賀若弼)과 맞서 버티되 한금호(韓擒虎)는 예상 밖의 출격을 하였던 것이다. 이 오랑캐가 기병으로 명천(明川)·길주(吉州)로 나오거나 또는 함흥으로 나오지 않을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난에 임하여 응변을 잘할 사람을 얻어 맡기고자 하는데 비변사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눈이 녹은 뒤에는 산너머의 적이 극히 두렵습니다. 관내(關內)의 형세가 과연 상의 하교와 같으니 적들이 풍악을 울리면서 온들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적임자를 얻어서 미리 대비시킨다면 급한 상황에서 쓸 수는 있겠습니다. 다만, 도내의 물력이 이미 고갈되어 명천·길주의 산성도 제대로 쌓지 못할 형편이니 반드시 강원도의 군병을 쓴 뒤에야 성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말은 이런 때에 성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라 적격자를 얻어서 미리 대비한다면 급박할 때 반드시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신도 하교하신 뜻을 알겠습니다. 적이 만약 쳐들어온다면 반드시 괴란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성과 온성이 극히 위험스럽다. 만일 작은 보루를 지키지 못한다면 큰 성도 위태롭다. 우리 나라의 무인은 말 달리고 활쏘는 것만 알고 용병술은 전연 알지 못하는데, 더구나 기병·정병의 술법을 잘 알겠는가. 저 김종득(金宗得)이 군사를 괘멸시키고 나라를 욕되게 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중국인을 보면 유격장(遊擊將) 정도도 모두 병서를 잘 알고 전진(戰陣)에 익숙하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중국인은 모두가 군대 출신이어서 그렇습니다. 남병사(南兵使)도 동쪽 사람을 뽑아다 서쪽에 전보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남도(南道)는 군병을 첨가하지 않은 데다 토병 역시 모두 북도에 들어가 수자리살고 있습니다. 눈이 쌓였을 때는 그래도 모르겠지만 눈이 녹은 뒤에 적병이 쳐들어온다면 남도가 극히 위태롭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취약한 곳을 먼저 침공해 온다면 인심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병기·화약·군량이 모두 저들의 소유가 될 것이고, 우리 나라 사람이 포로가 된다면 모든 진(鎭)의 허실과 도로의 원근도 반드시 다 말할 것이다. 적에게 조총을 가르쳐 준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일 한 진의 수비가 무너진다면 화기와 화약도 빼앗아 갈 것이다.”
하니, 김신원이 아뢰기를,
“신이 북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듣건대, 육진(六鎭)은 성지(城池)가 고르지 못하여 경성(鏡城)은 곧 병사(兵使)가 주재하고 있는 곳인데도 성이 극히 낮아서 넘어들어 올 수도 있다 합니다. 그리고 적들은 화약을 제대로 쓸 줄 알고 장군전(將軍箭)까지도 익숙한데 화약은 인삼과 초피(貂皮)를 가지고 중국에서 무역해 온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다.”
하니, 김신원이 아뢰기를,
“적이 깊숙이 쳐들어온다면 곧바로 서울에 이를 것입니다. 함흥 등지에 형세를 보아서 산성을 설치한다면 뒷날에 반드시 힘입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강원도는 회양(淮陽)·철원(鐵原) 등지에 산성을 설치하여 장구한 계획을 세운다면 함경도가 무너진다 해도 파수(把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은 반드시 깊은 생각이 있은 뒤에야 뜻밖의 걱정을 면할 수 있는 법이다.”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남방의 제일가는 건아(健兒)가 북방에 들어가면 모두 잔약한 병사가 된다 합니다.”
하고, 김신원은 아뢰기를,
“이종성(李宗誠)·이유직(李惟直)이 관동에 있다 해도 급박한 때에 어떻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제대로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영내(嶺內)에 차단할 곳을 둔다면 험조(險阻)한 데 웅거하여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누차 패한 뒤에는 회양에 이를 것입니다. 방어할 수 있으면 지켜내야 하나 다만 그곳은 물력이 전혀 없으므로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홍식은 아뢰기를,
“요해처에 성을 쌓아 방어하는 일은 상의 하교와 같이 하여야 됩니다만 반드시 적격자를 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개소문(蓋蘇文)은 안시성(安市城) 하나로 천하의 대병을 당해 내었으니 이는 사람을 제대로 얻은 효과입니다.”
하고, 홍경신은 아뢰기를,
“망하지 않을까 염려해야 굳건하게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강토가 수천 리이고 산천이 험조하니 우리 백성을 잘 보전만 한다면 어찌 스스로 굳건해질 수 있는 방책이 없겠습니까. 지난번에도 해의 변괴가 참혹하였으니, 지금은 바로 상께서 스스로 반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모든 일을 반드시 자신(自身)에서 집안으로, 집안에서 나라로 확충시켜 나가는 것을 참된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대신에게 책임지워 자주 접견하며 백성을 보호하고 나라를 굳건히 할 방도를 위임하신다면 반드시 천하의 강국이 될 것입니다. 조종(祖宗) 때의 훌륭한 법규가 《실록(實錄)》에 모두 실려 있으니, 참으로 이를 상고하여 선정하기를 《정관정요(貞觀政要)》처럼 한 다음 폐기되고 실추된 것들을 수거(修擧)한다면 어찌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남방 사람이 북도에 들어가면 장사일지라도그 고생을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토병을 길러서 쓸 수 있다면 한 명이 열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노(內奴)를 어려울 때에 쓰라는 것으로 이미 전교가 있었으니 미리 연습시켜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심희수가 아뢰기를,
“북도의 내노가 가장 완실(完實)합니다. 그중 장사를 뽑아 군병을 삼는다면 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가 위급할 때는 중국에도 군병을 청하였는데 더구나 이들은 우리 나라의 백성입니다. 남방의 병사는 의식이 매우 족하지만 북도에 한 번 들어가면 군량이 공급되지 않고 말이 굶어 죽는 경우가 많으니 인원이 아무리 많아도 실제로 쓸 수가 없습니다. 도내의 군병을 모두 동원하는 한편 방어하면서 처자들을 보호하도록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고, 홍경신은 아뢰기를,
“북도가 있고 나서야 내노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 공사천(公私賤) 내노를 막론하고 모두 방수의 군병에 첨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일없이 노는 인력이 매우 많고 곡식을 바치고 군공(軍功)을 받은 자도 많으니, 사대부의 자제로서 공부를 하는 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군적에 충정(充定)한다면 군액(軍額)이 점차 충실해져서 저절로 강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한다면 또한 어찌 재용(財用)의 부족함이 걱정되겠습니까.”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조종조 때는 조정 관원도 모두 싸움에 나갔으나 지금은 건장한 자가 모두 일없이 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는 오로지 사심을 너무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방수군을 첨가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자 상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김신원은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외방에 있어서 자세히 아는데, 병사는 부족하지 않으나 민원(民怨)이 극심합니다. 제향(祭享)에 진헌하는 물건 외에 감할 수 있는 것은 감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안(貢案)을 다시 상정(詳定)하였는데 평상시보다 거의 갑절이나 되니 복정(卜定)한 수를 4∼5년을 시한으로 하여 줄여 주었다가 그뒤에 가서 분정(分定)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권희는 아뢰기를,
“호조의 경비가 바닥나 조사(詔使)를 지대(支持)할 물건까지도 모두 각 고을에 분정하였고 또 시정(市井)에다 마련토록 독촉하기 때문에 민원이 끝이 없습니다. 재용을 마련할 방법을 묘당으로 하여금 강정(講定)케 하되 은광(銀鑛)을 열기도 하고 돈을 주조 하기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 돈을 주조한다는 것은 결코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권희가 아뢰기를,
“군병과 군량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군병이 족하고 군량이 족한 뒤에야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해사(該司)에 비축된 면포는 30동(同)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말만 잘할 뿐으로, 하는 말로 보면 요순(堯舜)의 훌륭한 정치도 이룰 수 있다. 임인년【1602 선조 35년. 】 중국 사신이 나왔을 적에 쓰던 장막과 상탁(床卓)을 각별히 승전을 받들어 해유(解由)케 하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다 잃어버렸다. 이는 해당 관원이 직무를 유기한 채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조사가 탐욕스럽기로서니 어찌 상탁을 가지고 갔을 리가 있겠는가. 장막은 상사(上司)의 하인이 위세로 빼앗아가니 전설사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쓰더라도 반납을 하면 되겠으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니, 관리로서의 봉직하는 태도가 이래서야 앞으로 어디에 쓰겠는가.
재상의 자제를 군보(軍保)에 충정하는 일은, 그 말은 좋다. 그러나 법이란 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유사(有司)가 받들어 시행한 뒤에야 행해지는 것이다. 이제 재상의 자제를 군보에 충정한다면 간찰(簡札)을 가지고와서 청탁할 것인데 어떻게 충정시킬 수 있겠는가. 전일 안자유(安自裕)가 ‘우리 나라는 법을 법으로 삼지 않고 간찰을 법으로 삼는다.’ 하였는데, 참으로 격언이다.”
하자, 홍식이 아뢰기를,
“장막은 평상시에는 사약(司鑰)이 담당하여 출납하므로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다고 합니다. 조사(詔使)가 돌아간 뒤 이번에도 평상시대로 사약이 감수(監守)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김신원은 아뢰기를,
“어막(御幕)은 홍식이 아뢴 대로 하겠으나 조사가 왔을 때 쓰는 잡물은 예빈시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 때는 종이 한 장 때문에도 장죄(贓罪)를 받았으니 그렇게 보면 오늘날은 모두가 장죄인이다. 도감과 공조에서 만든 물건이 매우 많은데, 유기·철물·상탁·지의 따위의 물건들이 모두 간 곳이 없으니, 너무도 심하다. 속담에 ‘관가 돼지 배앓는 격’이란 말이 있는데, 말은 천박하지만 비유는 아주 적절하다. 관가의 돼지가 배앓는 것을 남이 누가 잘 치료해 주겠는가. 우리 나라의 일이 바로 이런 꼴이다.”
하니, 권희가 아뢰기를,
“감생(監生)이 온다면 당연히 사은(謝恩)의 사절이 있어야 합니다. 진헌할 인삼은 반드시 양각삼(羊角參)으로 하여야 되지만 올해는 행차가 연이어지다 보니 민간의 생산이 이미 고갈되었습니다. 중삼(中參)으로 대용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헌할 물품을 미리 중삼으로 정할 수는 없다. 임시하여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파삼(把參)을 금단하여 일체 쓰지 못하게 하고 부경(赴京) 행차에도 파삼을 가지고 가다가 잡힐 경우에는 중률(重律)로 다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황진이 아뢰기를,
“전일 파삼을 엄금하였으나 고 태감(高太監)·장겸(張謙) 등 때문에 다시 썼습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갑오년과 을미년 사이에 신이 중국에 있으면서 듣건대, 명삼(明參)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그 값이 아주 높으나 약재로 쓰면 본 성분을 잃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체 금단하면 방해될 일이 있을까 염려되는가?”
하니, 김신원이 아뢰기를,
“남방 사람들이 명삼이 장기(瘴氣)를 이기고 충독(蟲毒)을 막아준다면서 구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강 개시(中江開市)는 이미 혁파하였는가?”
하니, 권희가 아뢰기를,
“채색(彩色)을 지난번에 사온 것으로 보아 아직 혁파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세(皇稅)도 이미 혁파되었는데 지방관이 어떻게 감히 하고 있는가?”
하니, 황진이 아뢰기를,
“이는 꼭 혁파해야 될 일입니다.”
하고, 권희는 아뢰기를,
“의주(義州) 사람들이 중국인과 서로 왕래하고 있으니 무슨 사단을 야기시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문묘(文廟)의 동서무(東西廡)는 이미 중수하였으나 명륜당(明倫堂)은 아직 조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사가 나오기 전에 조성하려고 합니다. 난후로 사습(士習)이 크게 퇴락되었는데, 이는 국가에서 교양하는 방도가 전폐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자질이 훌륭한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배운다는 것은 과거(科擧)로 발 신이나 하는 일일 뿐이니 학문으로 업을 삼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묘년과 을사년 사이에 큰 사화(士禍)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선비들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으나 다행히도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이황(李滉)이【이학(理學)이 고명하여 염락 관민(濂洛關閩)의 맥을 이어받았으므로 학자들이 주자에 비겼다. 】 소명을 받들고 오자 관학(館學)의 제생(諸生)이 강론을 같이 하지 못하였으나 송연(竦然)히 긍식(矜式)하는 데가 있어서 태산 북두처럼 우러르고 신명처럼 믿었기 때문에 사습이 크게 혁신되고 사람들이 다 격앙되었습니다. 거기다 허엽(許曄)·유희춘(柳希春)·기대승(奇大升) 등의 무리가 뒤를 이어 대사성이 되어 교도하였으므로 그뒤 얼마 안 되어 사습이 점점 혁신되었습니다.
명륜당이란 인륜을 밝히자는 곳인데 나이 순으로 앉는 법은 시행하지 않고 시부(詩賦)를 지어 사람을 뽑는 법이나 만들어 내니, 이는 삼물(三物)42)로써 인재를 양성하는 본래의 도리가 아닙니다. 때문에 태학(太學)은 현사(賢士)의 관문인데도 교양하는 도리는 난리 이전에 이미 폐지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습이 황폐한 나머지 의리에 어두워서 효제(孝悌)·충신(忠信)의 도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릅니다. 이러고도 어려서 배운 것을 커서 실행하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상의 하교에서 이른바 말만 잘할 따름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허언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께서는 각별히 경계하고 신칙하여 사유(師儒)를 극선(極選)하여 제생을 가르치도록 하되 몸소 솔선하여 사습을 바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 말은 오로지 해사(該司)의 관원을 가리킨 것이다. 말을 가지고 뜻을 오해하지는 말라.”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학궁(學宮)이 다 폐지되고 하나만이 남아 있으니, 대사성에게 명하여 날마다 중학(中學)에 나아가서 《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읽혀서 교도하는 실상을 삼도록 한다면 사습이 하루 아침에 당장 혁신될 수는 없더라도 자연히 바른 데로 귀결될 것입니다. 근일 제생이 오현(五賢)을【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에 대해 누차 상소(上疏)하고 있는데도 여태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작은 나라에서 종사하는 자가 다섯 사람이나 되니 성상께서 중난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논의가 발의된 지 오래고 정학(正學)의 한 줄기가 정몽주(鄭夢周)에게서 비롯하여 이 다섯 사람에게 전수되면서 사습(士習)이 용동된 것이 기묘년보다 더 융성한 때가 없었습니다. 종사된 사람이 당(唐)나라는 3백 년 동안 한유(韓愈) 한 사람뿐이지만 이것이 적은 것이 아니고 송(宋)나라 때는 뭇 선비가 배출되었지만 그것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합당한지의 여부를 논할 따름이지 어찌 많고 적음에 구애되어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다섯 사람은 모두 종사할 만한 사람입니다.
지금 조사가 나오고 문묘의 모습도 새로워졌는데 이러한 때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시행하겠습니까. 이처럼 다난한 때를 당하여서는 모든 일을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이보다 더 절실하고 급박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 일을 시행한다면 하늘이 일대(一代)의 인재를 낸 것은 일대의 용도가 자족하게 제공하기 위한 것이어서 사업을 이룩하는 공효가 여기에서 확대될 것인 만큼 장상(將相)의 인재가 찬연히 배출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대(事大)하는 나라입니다. 문장으로 말하더라도 지난번 원접사가 종사관을 고를 적에도 적격자를 얻지 못하여, 파산(罷散)이나 참하(參下) 가운데서 선발하였으니, 인재가 절핍되었다는 사실을 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현을 종사하는 일은 실로 온 나라의 공론이기 때문에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모두가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습을 바로 잡는 데 있어서는 이들을 존숭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홍식은 아뢰기를,
“심희수의 말은 곧 온 나라 대소 신료의 공통된 의논입니다. 상께서 깊이 유념하신다면 국가가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하고, 황진은 아뢰기를,
“소신은 용렬하고 무상한 몸으로 이처럼 다사한 때에 예관(禮官)의 자리에 있으나 전의 등록(謄錄)이 분명하지 않아서 고증할 길이 없습니다. 전일 정원의 계사에 ‘태평관 유조의(太平館留詔儀)에는 문무 백관·유생으로 되어 있으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영조의(迎詔儀)에는 문무백관으로만 되어 있고 유생이라는 말은 들어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소신은 본조(本曹)의 의논대로 《국조오례의》에 보이지는 않지만 전에 조사가 왔을 때 이미 시행한 규정에 의거하여 유생을 반으로 나누어 모화관(慕華館)과 태평관으로 보낼 것으로 마련하여 입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친(宗親)은 유생과 해야 될 듯합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유생을 반으로 나누어 진참(進參)시킨 일은 분명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친은 들어가는 것이 옳은 듯하나 유생은 《국조오례의》에 없다니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황진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영위사(迎慰使)가 되었을 적에 보면 종배례(終杯禮)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종배례를 하지 않고 중배례(中杯禮)를 하니 너무 미안스럽습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조사는 흑칠(黑漆) 교의(交倚)에 앉고 상께서는 주칠(朱漆) 교의에 앉는다니 이것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배 삼고두(五拜三叩頭) 및 유생이 입반(立班)하는 일은 모두 공용경(襲用卿)이 왔을 적에 생긴 것이다. 《국조오례의》는 조종 때에 일찍이 시행한 일인데 하루 아침에 조사의 말을 듣고 폐지하는 것은 극히 미안하다. 《국조오례의》를 따라서 하는 것이 옳겠다. 그리고 내가 누차 조사를 접대하여 보았지만 예식이 각기 달랐다.”
하고, 또 이르기를,
“조사가 까다롭고 성미가 급하다면 대접하기가 극히 어렵지만 탐욕스런 자라면 대접하기가 매우 쉽다. 또 한마디 할 말이 있는데 우리 나라 유생의 관복(冠服)은 벽색(碧色)으로 만든 청금(靑衿)인데 이는 간색(間色)이다. 중국인은 우리 나라를 두고 예를 아는 나라라고 하는데, 청금을 지적하여 비웃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중국의 태학생도 벽색으로 청금을 하였습니다.”
하고, 최천건은 아뢰기를,
“선현을 추존하고 선비를 양성하는 일이 오늘 이 자리에서 논의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상께서 깊이 유념하셔야 합니다. 《실록》에 ‘선조관(宣詔官)은 한어 문신(漢語文臣)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으니, 찬례(贊禮)는 한어에 능한 사람으로 차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조(宣詔)를 한어로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하였다. 사시 말에 파하였다.
선조 198권, 39년(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4월 15일(계축) 6번째기사
대제학이 우리 나라 대가들의 시문으로만 책을 고쳐 낼 것을 건의하다
정원이 대제학의 뜻으로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시문(詩文)이 상하 수천 년 동안 대가(大家)가 없지 않은데, 근세에 한두 시구(詩句)를 잘하는 사람까지 아울러 한 책 속에 넣어 논하니, 중국에서 본다면 필시 낮춰 볼 것입니다. 뛰어난 대가들의 시문으로만 개찬(改撰)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나의 의견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황(李滉)이 정민정(程敏政)을 논한 일은 시비를 막론하고 중국 사람에 관계된 일이니 중국인에게 써 주는 것은 체면에 합당하지 않을 듯싶다. 팔준도(八駿圖)는 그 어세(語勢)를 보건대 옛 제왕의 고사를 많이 인용해서 또한 혐의스러우니, 조사(詔使)에게 써 주기에는 역시 온당치 못한 듯싶다. 아울러 의논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선조 202권, 39년(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8월 23일(기미) 2번째기사
신료들과 일본과의 강화, 서계, 일본에 파견할 사절의 명칭 등에 관해 의논하다. 성영이 성학십도의 인출을 요청하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가강(家康)의 서계(書契)가 이미 대마도에 도착하여 장차 나오려 한다고 합니다.
당초 능침(陵寢)을 범한 왜적은 평조윤(平調允) 부자라고 들었는데, 그것은 귤지정(橘智正)과 박대근(朴大根)이 서로 말할 때에 말 끝에 나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조윤 부자란 말은 내가 못 들었다.”
하였다. 영경이 아뢰기를,
“박대근은 헌부의 아전인 박연수(朴連守)의 아들입니다.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에 있을 때 박연수가 왜적과 사이가 좋아 서울의 대가(大家)까지도 편히 살게 하였지만 결국 왜적에게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서울에 있는 왜적의 소행을 박대근이 자세히 압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조윤 부자라는 말이 박대근에게서 나왔는가?”
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평조윤 부자가 어떤 왜적과 함께 앞장서서 능침을 범하였다는 말은 대근이 귤지정과 함께 말하는 사이에 나왔는데, 평조윤의 부자는 이미 죽었고 그 당여(黨與)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귤지정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가강의 서계는 믿을 수도 없고 능침을 범한 적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죄를 지은 사람을 능침을 범했다고 하여 잡아 보낼 수도 있으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왜적의 꾀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잡아 보낸 것이라면 우리 나라가 어찌 그 진위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받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근래 대마도의 정형(情形)을 보면 강화에만 급급한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화에 급급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평의지(平義智)는 행장(行長)의 딸과 이혼을 하였으나 이미 행장의 사위였고, 평경직(平景直)은 행장의 선봉으로서 가강과 서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가강에게 뜻을 얻지 못하였고 또 어쩌면 대마도를 차지할 뜻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강화하는 일로 가강에게 속죄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전계신(全繼信)을 보내어 왜인의 본초(本草)를 구해보게 하여 만약 우리의 뜻과 다른 점이 있으면 그 문서를 고쳐 주기를 청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미 거론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치기가 쉽겠는가?”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계신이 고치기를 청하면 저 사람들은 곧 따를 것이니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다만 사신을 미리 정하여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을 보낸다면 중국에 고하여야 하는가?”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진주사(陳奏使)를 먼저 중국에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병부(兵部)의 이자(移咨)에, 귀국에 일이 있으면 스스로 처리하라고 하였으니, 지금 중국에 고하더라도 지휘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신을 일본에 보내고 한편으로는 중국에 진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반드시 중국에 고하여 결정을 기다린 뒤에 일본에 통사를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저 사람들이 너무 지연됨을 의심할 것이니,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한편으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중국에 고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적(夷狄)은 비유하면 밤과 낮이 찾아오는 것 같아 거절할 수 없다. 그러나 강화를 한 번 허락하면 왜노들의 왕래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니, 우리 나라의 잔약한 힘으로는 형편상 지공(支供)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절영도(絶影島)에 머물게 하여 접대하면 저들은 필시 그들을 섬 가운데에 유폐시킨다고 할 것이고, 육지로 내려오게 하면 몰래 물건을 가지고 장사하는 폐단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니, 오늘의 계책은 어떻게 하여야겠는가?”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왜선이 와서 머물면 온 나라의 장사꾼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몰래 상통하면서 사고 파는 폐단을 이루 금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강화를 허락하면 섬 가운데 두지는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절영도에 머물게 할 수 없으면 부산은 괜찮겠는가?”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이 계획은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유홍은 아뢰기를,
“절영도의 일은 신이 잘 압니다. 전일에 귤지정이 와서 밤이면 몰래 물건을 어선에 싣고 나와서 박대근을 시켜 값을 정하여 매매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태평할 때는 경관(京館)과 부산 두 곳에 항상 머무는 수가 적어도 수백 인을 밑돌지 않았다. 이제 만일 전과 같이 된다면 지공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영경이 아뢰기를, “경오(1570)년 이후로 접대하는 일은 많이 감축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약조를 정하여 감축하는 것이 의당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감축한다면 자들은 반드시 서계를 올려 옛 규정대로 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였다. 영경이 아뢰기를,
“저들이 중국에 진공(進貢)하겠다고 청하면 어떻게 조처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다. 이 일은 전례가 없었다.”
하자, 성영이 아뢰기를,
“전례에 없는 일은 버틸 수가 있지만 허다한 물건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 폐단을 염려하여 거절한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영경은 아뢰기를,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관문(關門)을 닫고 거절한다면 모르겠거니와 지금 이미 왕래를 허락하여 그것을 중국의 뜻이라고 핑계한 지가 이미 5∼6년이나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거절하면 난처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막을 수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은데 백성을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는가.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
하였다. 영경이 아뢰기를,
“서북(西北) 지방에도 걱정이 있으니 수년 내에는 혹 무사할지라도 계속 이같으면 육진(六鎭)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육진의 수령을 특별히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국토가 작고 삼면으로 적의 침입을 받으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지당한 의논이 있을 것이니 비변사와 상의하여 정해야 한다.”
하였다. 영경이 아뢰기를,
“통신사(通信使)로 칭할 것이 아니라 통유사(通諭使)로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성영은 아뢰기를,
“증 영의정 이황(李滉)이 성학 십도(聖學十圖)로 병풍을 만들어 전하께 올렸습니다. 그 사람의 학문은 근세에 얻기 어려우니, 유사로 하여금 성학 십도를 인출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한가한 시간을 틈타 보시어 유신(儒臣)을 잊지 않는 뜻을 보이소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