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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어머니와 자식들
“자식들에 제대로 못해줬다” 항상 빚진 마음 아들들 줄줄이 감옥행 한많은 어미로 죄책감 |
이희호 여사는 결혼 이듬해인 1963년 11월 42세에 홍걸을 낳았다. 늦은 출산이었지만 임신 중에 입덧 한번 하지 않았다. 당시 두 아들 홍일, 홍업 형제는 각각 16세와 13세였다. 작고한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두 소년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이 여사는 홍걸을 안아주거나 귀여워하는 것에도 조심했다. 다행이 두 형제와의 관계는 원만해졌는데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홍걸이 문제였다. 홍걸은 원래 말수가 적었는데 커가면서 눈에 띄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홍걸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부터 기관원들이 학교까지 따라다녔다. 그리고 고2 때인 81년에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부터 경찰들이 집을 지키고 아무도 못들어오게 했다. 이런 상태에서 학교를 다닌 홍걸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낮잠만 잤다고 한다. 이 여사는 “나는 얼굴 들고 학교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다. 남들은 과외공부를 시키는데 집 상황이 안좋아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줄 수가 없었다”면서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다. 이 여사는 미국 망명 중이던 80년대 중반에 홍걸이 학업을 계속해주기를 원했는데 아들이 ‘한국에 가서 교수도 못할 텐데 박사는 해서 뭐 하냐’고 반발하는 바람에 더 이상 권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자식들에게 제대로 못해줬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장남 홍일은 80년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언어장애와 신체장애를 얻었고, 차남 홍업은 야당 정치인의 자제라는 이유로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고, 결혼도 어려웠다. 막내 홍걸은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연구원의 신분으로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2000년 여름,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국정원의 정보라인에 홍걸과 최규선의 부적절한 행적이 낱낱이 보고된 것이다. 이 여사는 홍걸에게 “최규선을 만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홍걸은 “뭐가 문제냐”며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2002년 5월 홍걸이 구속됐다. 홍걸의 구속 이후 한달 만에 다시 차남 홍업도 구속됐다. “괴로웠다. 신문도 보기 싫고, 누구 만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둘째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까지 그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아이가 그러면서 들어가니까 그때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긴 터널을 거쳐 마침내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아들들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내야 했던 ‘한 많은 어미’가 된 이 여사의 토로다. “여사님의 체중이 갑자기 줄었다. 자식 때문이었다. 더욱이 대통령이 아들을 청와대에 못 오게 하고, 집에도 못 오게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대법원 확정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던 장남 홍일은 지난 2월 사면됐으며, 차남 홍업은 국회위원 출마를 준비 중이고, 막내인 홍걸은 광고 사업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전세를 살던 홍걸이 “동교동으로 들어와 살겠다”고 어머니를 조르자 이 여사는 “차라리 내가 나가 살마” 하며 가슴을 쳤다고 성인숙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이 전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
DJ와의 결혼
"이희호가 사람보는 눈은 있었다" 결혼식에 빨간 양말 신고 나타난 낭인 DJ |
1962년 5월10일 이희호 여사의 외삼촌 이원순옹의 체부동 한옥 대청. 한 남자가 늦을세라 헐레벌떡 대문에 들어섰다. 신랑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이었다. 그가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서자 하객들 속에서 갑자기 웃음보가 터졌다. 신랑의 감색 예복 아래 드러난 새빨간 양말이 너무도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당시 DJ는 거듭된 낙선으로 인해 경제적·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첫 부인과는 사별했으며 셋집에서 칠순 모친과 심장판막증을 앓는 누이동생, 그리고 자식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더욱이 누이동생의 자녀도 둘이나 있었다. 양말을 챙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혼반지도 이 여사가 준비했다. 이 여사 나이 41세, DJ가 40세 때의 일이다. DJ와의 결혼에 대해 이 여사의 집안에서는 물론, 이 여사 주변에서도 찬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여성지도자로서 이 여사의 미래에 기대를 가졌던’ YWCA 동료들은 이 여사의 결혼 소식에 잠도 못자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반대를 했다. “그때는 대통령 꿈도 꾸지 않았다. 서로 좋으니까 결혼했다. 그이는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사회적 지위도, 집도, 재산도 하나도 없을 때 나는 그이와 결혼했다. 그 상태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랑 결혼했을까 하고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운명 같다. 1962년에 다시 만났을 때 결혼할 마음을 두고 만났고, 그때 청혼을 해서 ‘네’라고 대답했다.” 신혼생활 9일 만에 남편이 정부전복 혐의로 잡혀가는 불상사가 있기는 했으나 결혼 이후 10년간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이 여사는 이듬해 아들 홍걸을 낳았고, DJ는 고초를 많이 겪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다. 결혼 이듬해 DJ는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67년에는 재선의원이 됐다. 그리고 70년에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DJ가 대통령 후보가 되자 이 여사의 결혼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희호가 과연 사람 보는 눈은 있었다”고 감탄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
[내가 본 이희호] 측근·전문가 좌담회
여성정책 가로막힐때 늘 도움의 손길 ‘활짝’ 권위의식 없이 편안한 스타일 영부인으로서 행할 권력 거부 |
▲ 지난해 7월 21일 여성신문사 회의실에서 측근과 전문가들이 참석해 열린 이희호 여사 관련 좌담회.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승희 민주당 의원(전 청와대 여성정책 비서관), 신낙균 민주당 수석부대표(김대중 정부 문화관광부 장관), 진행을 맡은 조은희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장, (한 사람 건너) 김영희 전 청와대 제2 부속실장,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여성정책 비서관을 지냈던 이상덕 한국폴리텍1대학 학장은 “남녀차별금지법을 만들 때 추미애 의원이 성명서를 내면서까지 반대하는 등 역풍이 심했는데, 윤후정 당시 여성특위 위원장이 이 여사에게 SOS를 치자 이 여사가 한화갑 총재를 설득해 통과시킬 수 있었다”면서 “여성정책이 제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 이 여사는 늘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고 전했다. 이 여사의 초대 부속실장을 지냈던 김영희 전 KBS PD는 역사상 첫 1급 제2부속실장이 된 주인공이다. 제2부속실장 직급을 별정직 2급으로 하자고 논의가 모아졌는데 이 여사가 “어떻게 2급이냐, 1급을 줘야 한다”고 주장해 퍼스트레이디를 보좌하는 제2부속실장의 직급이 1급으로 격상되었다. 또한 김 전 실장은 “처음에는 이 여사가 집무할 수 있는 공간도 비서실장 방 밑의 조그마한 지하공간에 배치돼 있었다”면서 “‘이 여사가 도대체 우리가 이 좁은 방에 다 있으란 말이냐’고 야단을 치고 나서야 아래층 전부가 퍼스트레이디의 집무실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말했다. 후반기 제2부속실장을 지낸 성인숙 전 청와대 부속실장은 상사로서의 이 여사 스타일에 대해 “당신이 갖춘 것이 너무 많아서인지 권위의식이 없어서 모시기가 편했다”고 말했다. 성 전 실장은 “이 여사는 대통령 배우자로서 행할 수 있는 권력을 스스로 거부한 아주 ‘독립적’인 분”이라고 평가하면서 “늘 ‘나는 내조자에 불과해요’ ‘나는 힘이 없어요’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성 전 실장은 “옷로비사건도 이 여사가 적극적으로 대응했었더라면 그렇게 비화되지 않았을 것인데, 아마 무대응이 체질화되신 분 같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여성정책 비서관을 지낸 이승희 민주당 의원은 “이 여사는 초기에 많이 고민했다. 나름대로 창의적으로 활동을 하려고 영부인 활동에 대한 예산 배정을 요청했는데 ‘백악관에도 없다’며 거절당했다”고 비화를 소개했다. 이 의원은 “영부인 연구를 해보면 영부인만이 감히 할 수 있고, 바로잡을 수 있는 고유의 역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 국민에겐 그 역할이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면서 “2000년 2월부터 가을까지 노력하다가 포기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이 여사는 나름대로 사고와 커리어가 앞서가는 분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역할모델을 할 수 있었다”면서 “만약 이 여사가 제대로 뜻을 폈으면 여성에 대한 사회인식이 훨씬 빨리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했다. ‘사랑의 친구들’과 ‘여성재단’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던 박영숙 여성재단 이사장은 “미국의 앨리노어 프랭클린 여사처럼 한국의 모범적인 영부인상을 정립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옷로비사건으로 위축됐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이사장은 “청와대 전체가 나서서 잘하면 보통이고, 못하면 마이너스라는 논리로 이 여사의 활동영역 확장을 막았다”면서 아쉬워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
[전문가 진단] 한국의 민주주의와 김대중 대통령
개혁 드라이브속 비리 얼룩 |
1997년 말 외환위기의 혼란 속에서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상황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국민적 지지도 취약했다. DJP 연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당후보인 이회창씨를 39만표 정도로 이겼을 뿐이고, 2위 3위의 득표율 합은 57.9%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가 더 많았다. 더욱이 국회에서는 여소야대의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자민련과의 연합정권은 총리와 장관을 공동으로 운영해야 했다. 이러한 취약한 국민적 지지기반, 여소야대의 의회, 자민련과의 공동정권 등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과 비전을 관철하는 데 큰 제약을 주었다. 경제개혁 사회양극화 심화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은 IMF 위기를 극복하고 4대 개혁을 통해 새로운 국가발전모델의 기초를 구축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경제개혁 정책은 금융개혁, 기업구조조정, 노동개혁, 공공개혁 등 4대 개혁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고통의 분담을 위한 생산적 복지정책,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서의 지식정보화가 추진되었다. 정보화의 추진은 내실을 거두면서 세계 제일의 지식정보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만들어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복지정책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1997년 0.29에서 2001년 0.35로 악화된 것처럼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비판된다. 정치개혁 별 성과없이 불발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이른바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대북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1999년 말 경제위기의 종언을 선언한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관심을 햇볕정책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결국 노벨평화상의 수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전환적 개선을 추구한 김대중 정권은 부시 정권의 수립과 그에 따른 대북 강경정책으로의 전환, 북한의 핵개발에 직면하면서 한반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922호 [기획] (2007-03-23)
김용복 /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 |
[조은희의 대통령 배우자론] 한국편(5) 이희호 여사
업적 뚜렷한‘소통령’ 역대 영부인중 가장 고학력·고령 젠더 이슈 직접 제기하고 움직여 |
▲ 대통령 퇴임 후 안착한 DJ 동교동 자택에 예나 다름없이 나란히 붙어있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문패.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생 민주화를 향한 역경을 함께 해온 ‘동지’의 표시이자 ‘평등부부’의 상징적 증거다.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대한민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이 여사는 젠더 이슈를 직접 제기하고, 그것을 움직여나간 첫 영부인으로 꼽힌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여성운동가 출신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여성 관련 이슈들이 쉽게 풀렸다. 이 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의 정례적인 단독 해외순방 영역을 개척한 첫 영부인이기도 하다. 비록 전임 손명순 여사가 단독으로 베이징 여성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지만 1회에 그쳤다. 반면 이 여사는 단독의 정례적인 해외순방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해외순방을 한 것과 유사하다. 이 여사는 또 역대 영부인 중 가장 고학력의 대통령 영부인이다. 이화여전에다 서울대, 그리고 미국 스칼렛대 석사 출신의 유학파로 영어가 능통하다. 고교 졸업 후 고학을 했던 남편과 대조적인 학력이다. 이 여사는 퇴임 후에도 재임 중 만들었던 영부인 사업인 ‘사랑의 친구들’과 ‘한국여성재단’의 명예총재와 명예고문 등 다양한 분야의 명예직을 맡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역시 대통령 영부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이 여사는 역대 영부인들 중 가장 고령의 나이인 76세에 청와대 안주인이 되었다. 만일 이 여사가 10년만 젊은 나이에 영부인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퍼스트레이디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재임시절 논의됐던 ‘엘리노어 프로젝트’도 좀더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집권 중반기 이후 옷로비사건과 두 아들이 구속되는 사건들이 이어짐으로써 이 여사가 대통령 영부인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와 활동영역이 많이 축소됐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도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 되기 전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해온 한국 사회의 여성지도자였다. 이 여사의 삶은 40세 이전에 여성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 40대 이후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로서의 내조기, 76세 이후 영부인 재임기, 그리고 퇴임 이후 등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40대 이전의 ‘히히호호’ 시대가 가장 찬란한 시기였을 것 같다. 연극의 극본은 물론, 주인공에다 연출까지 맡아 활동하면서 ‘21세기의 김활란’을 꿈꾸던 그 시기 말이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이 여사의 삶은 40대 이후에 더욱 빛난다. 결혼 이후 겪은 풍상으로 활달한 개성은 사그라들어갔지만 대신 이 여사는 ‘김대중’이라는 남자를 통해 더 큰 관점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여사에게 김 전 대통령은 남편이기에 앞서 독재에 맞서 조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려는 수호자였고, 이 여사는 그 수호자의 ‘동역자’였다.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없다’는 말 자체가 이희호 인생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 여사도 저서 ‘나의 사랑, 나의 조국’에서 “일생을 그에게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DJ의 동교동 자택 문패에는 ‘김대중 이희호’라고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DJ, 이희호 부부가 서로를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 문패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