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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7장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산 위에서 주신 빼어난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한 번에 하신 설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셨다는 말씀의 단편들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면서 여러 해를 지나고, 그 전승들이 단편적으로 기록되었다가, 예수님 사후 50년이 지나서 마태복음의 저자에 의해 비로소 하나로 엮어진 것입니다. 1~12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2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이 본문은 여덟 가지 복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도 들어있는데 분위기가 마태복음과는 사뭇 다릅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을 보겠습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제자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팔복의 첫 부분만 소개해드렸는데, 어떻습니까? 마태복음과 내용이 같은 것 같으면서도 분위기가 꽤 다른 것을 느끼셨는지요? 마태는 첫 시작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는데, 누가는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그냥 가난한 사람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냥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면 사회적인 문제가 됩니다.
게다가 마태는 8가지 복을 말하고 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는데, 누가는 4가지 복과 4가지 화를 말합니다. 복을 선언하는 부분에서도 마태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늘나라’라고 하면 죽은 후에 가는 저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할 이상적인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하셨다는 말씀들이고 내용도 거의 유사한 것 같지만 마태와 누가의 신학은 이렇게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팔복 말씀이 교회 강단에서 설교될 때는 대부분 마태복음에서 인용됩니다. 그러면 이 본문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교인이 비신앙인들에게 비웃음을 받거나 핍박받는 상황에 대한 위로의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을 인용해서 설교하는 교회가 더러 있는데, 이 경우에는 대부분 진보적인 교회에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어느 쪽이 복음의 원형, 그러니까 예수께서 전하신 원래의 복음에 가까울까요? 그것은 이어지는 산상수훈을 교리의 전제에 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읽으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13~16절을 보겠습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그러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니,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기독교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말씀이지요.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기도 하고, 음식이 썩지 않도록 보존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너희도 그런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역할도 하고, 세상이 썩지 않도록 지켜내는 역할도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세상에 깃들어있는 모든 어둠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 앞에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는 무관심하고 그저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천국 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말해도 되는 것인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특히 마지막 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한국 개신교회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을 보겠습니다.
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랍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외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성서에 들어온 쓰레기’ 라고 말하면서 신약성서 목록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도 이렇게 성서무오설을 믿지 않았는데 그의 후예라는 개신교인들은 왜 그렇게 성서무오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신약성서의 공동저자인 바울과 야고보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의 주장만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에는 조화가 필요합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 믿음과 행실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다음 주제로 넘어가서, 17~20절을 보겠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폐지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행실을 능가해야 한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복음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행위로 받는 구원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낳는 내면의 동기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21~22절을 보겠습니다.
21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기록된 율법의 문자를 뒤집어엎거나 넘어서는 해석을 하십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쓰여진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그 내용을 뒤집거나 달리 해석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들을, 겉으로 볼 때는 뒤집어엎는 것처럼 보이는, 또는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곧잘 하셔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지금까지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표면적으로만 알고 속뜻은 놓치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한 ‘율법은 그 시대의 기록이기에 새로운 시대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속뜻을 밝히시고, 또한 시대적인 한계도 짚어내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게 다시 해석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 계명 자체보다 훨씬 더 지키기 어려워 보이는 해석을 하십니다.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의회에 불려가고,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형제나 자매를 무시하거나 욕하는 것이 살인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자매란, 일차적으로는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넓게는 유대인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결과 못지않게 내면의 동기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살인이 왜 일어납니까?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 또는 무시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미움이나 증오, 무시하는 마음이 싹터서 살인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결국 살인이나, 사람을 무시하는 것 또는 미워하는 것이, 크게 다른 것 같지만 뿌리는 하나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미워하고 욕하고 무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의 의욕을 꺾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실지로 우리 주위에서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언어폭력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우리는 매스컴에서 자주 접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 해석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해석보다 훨씬 더 엄격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 지옥에 가야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한 번도 미워하거나 무시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참된 의도는 살인으로 연결될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까지 죄다 살인행위와 동등한 죄로 묶어서 우리를 죄의 노예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의도가 금방 드러납니다. 23~24절을 보겠습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결국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더불어 사는 모든 이웃과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며 살라는 것이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판결 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도를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것이 광포하고 무자비한 사람만 저지르는 행위가 아니다. 그건 조그만 미움이나 원망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불어 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런 조그만 갈등이라도 생기면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풀어라. 하나님은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온전한 이웃사랑부터 실천하여라. 이웃과 싸우고 미워하고 엉망진창으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물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겠느냐?’
다음 주제로 넘어가서, 이번에는 성적인 본능과 범죄에 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27~28절입니다.
27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여기서도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옛 계명의 한계를 들춰내십니다. 이 본문은 잘 알려진 말씀이기도 하지만, 많은 분들이 그 본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본능적 차원의 성적충동 자체가 죄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맛있게 만들어진 빵을 보고 본능적으로 식욕을 느꼈다면 그건 당연한 것이고 결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건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젊은 청년이 매력적인 이성을 보고 본능적인 성적충동을 느꼈다고 해서 그걸 죄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다고 해서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지 않고 빵을 훔쳐 먹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 일을 미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혹은 미수에 그쳤다 하더라도, 이미 마음으로 빵을 훔친 것이고, 실제로 훔친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마음으로는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젊은이가 매력적인 이성을 만났을 때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으로서의 성적충동은 죄가 아니지만, 그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보고 식욕을 느끼는 것과 같은 차원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의도를 가지고, 즉 성적으로 범죄할 마음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그 일을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는 미수에 그쳤다 하더라도 실제로 죄를 범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는 독실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자위행위를 죄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일부 답답한 교회에서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적본능은 식욕과 같은 차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식욕이 없으면 결국 생명체가 죽는 것처럼, 성욕이 없으면 개인뿐 아니라 인류 자체가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충분히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성욕이 생기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를 만들면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성욕에 대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말에 ‘이팔청춘’이라는 말이 있듯이, 십대 중반이 되면 육체적으로는 충분히 성장한 것이고 짝을 맺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옛날에는 거의 모든 인류가 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 연령이 자꾸 늦어집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문화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자위행위는 자연스러운 대안 중의 하나입니다. 본능을 참는 것은 한계가 있고 억지로 참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해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의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자위행위를 죄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답답한 보수주의 기독교와 유일신 종교의 신앙인들 중 일부는 아직도 자위행위를 죄라고 가르치면서 젊은이들에게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안겨주는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혹 주변에 이런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있으면 잘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눈이 범죄하면 빼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당연히 속뜻을 읽어야 합니다. 단호하게 죄와 인연을 끊으라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큰일을 내거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본문 31~32절을 보겠습니다.
31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어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시의 가치관 아래서 여성의 인권을 지켜주고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시대는, 남자는 이 핑계 저 핑계 만들어서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었지만, 여자는 이혼청구권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나마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음행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혼하지 말라고 본문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면, 성격차이로 이혼하는 것도 안 되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한테 매일 맞고 사는 아내도 이혼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되니까요.
그러므로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시대에 적절치 않다면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절대적인 계명으로 인식되었던 율법을 과감히 재해석하셨습니다.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그런 법이 필요했지만 세월이 흐른 새 시대에는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새 시대에 맞게 율법을 재해석하셨듯이, 이천년 전의 사회에 맞게 해석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오늘날 우리 시대에 맞지 않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주제는 맹세에 대한 것입니다. 33~37절을 보겠습니다.
33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또한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큰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했는데, 주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맹세하는 사람은 인생을 자신 있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신중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맹세하지 말고 매 순간순간 하늘을 우러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바르게 분별하여,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선택하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은 거부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5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좀 길지만 38~48절을 보겠습니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고 그가 원하는 이상으로 해주랍니다. 하나님에게는 원수도 없고 악인과 선인의 구별도 없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요 이웃이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햇빛과 비를 내려주신답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 사랑을 말씀하시는 너무나도 귀하고 은혜로운 말씀으로만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그런데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이 본문을 달리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오리가 아니라 십리까지 가주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시대였지요.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 군인이 행군할 때 식민지 백성을 동원해서 짐을 지울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단, 1500미터 정도까지만 허락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이런 당시 사회의 상황이 담겨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서기 66년부터 로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이 복음서에 종말에 대한 묘사로 담겨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성전이 파괴된 그 시기를 전후에서 마가복음이 쓰여졌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서기 80년대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쓰여졌다고 봅니다.
서기전 2세기에 유다 마카비우스의 독립전쟁이 시리아제국을 몰아낸 것처럼, 다시 한 번 독립전쟁으로 로마제국을 몰아내려고 유대인들이 거국적으로 힘을 모았는데 결과는 비참한 패배로 돌아왔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로마의 힘이 과거 어느 제국과도 비교할 수 없이 드세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힘으로 로마를 누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포악한 자들의 미움조차 넘어서는 사랑,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그 이상으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녹여낼 수 있는 포용심과 사랑만이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배경 아래서 이 본문이 탄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시각에 따라 이 본문을 원수의 욕구를 영원히 잠재우는 위대한 승리라고 찬양하는 신학자들이 대부분이지만, 힘없는 자들의 패배주의에 대한 변명이라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신학자들도 더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