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별책부록으로 산다
심은섭
영화가 끝난 후 의자 밑에 떨어진 슬픔을 줍는 저녁이거나
크리스털와인 잔을 받드는 플라스틱 쟁반으로 사는 일이다
나는 하얀 모조지를 꿈꾸지만, 폐지로 만든 골판지이거나
바다가 될 수 없어 바다로 가야하는 발목 젖은 실개천이다
유통기간이 지난 우유를 마실 수밖에 없는 가장으로 살거나
비에 젖어 땅바닥에 주저앉은 종이상자처럼 사는 일이다
나는 배추꽃 입술 주변을 배회하는 하얀 겨울나비로 살거나
한낮에 비명을 외치며 거리를 깨우는 호외로 사는 중이다
운명의 실체를 알고 태어나 서럽지 않은 유기견이고, 나는
과일상점 진열대에 진열된 바나나 옆에 끼여 있는 모과다
서로 눈치 보며 먹지 않는 접시의 마른 사과 한 조각이다
빈 지갑으로 화투판 뒷전에서 판세만 읽어주는 훈수꾼이고
나는 기관총의 총구를 빠져나가던 탄알이 밀어낸 탄피이고
폐업의 식당처럼 한 장의 독촉장도 찾지 않는 e메일함이다
찢어진 채 게시대를 붙잡고 태풍에 떨고 있는 현수막이고
머뭇거리며 직함이 없는 명함을 건네는 은퇴자의 불안이다
나는 고독의 처방전을 받으려고 공원벤치에 앉은 바람이고
보이스피싱의 전화에도 가족의 안부를 묻고 싶은 우울이다
길 잃은 하현달이 가끔 찾는 역세권을 벗어난 변두리이다
-출처 : 2024년 가을호 『다층』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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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 도라지
심은섭
오로지 꽃만 피워야 한다고 말하기에
산기슭에 살면서
흰꽃, 보라꽃 가리지 않고 피워냈지요
오로지
흙냄새만 맡으며 살아야 한다기에
자갈밭이랑에 두 발을 묻고 살았지요
하지만
내 몸에 통통한 살이 오르던 어느 날
푸른 지폐들이 모여
온몸의 갈색 피부를 벗기어서
흰 속살이 드러낸 나를 마트 진열장에
진열해두었지요
흰 달빛으로 운명의 천을 짰을 뿐인데
무엇을 더 하라는 말씀인지요
허기가 져도 화전밭으로 돌아가렵니다
-출처 : 2024년 봄호 『시마』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