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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즉문즉답
2020.07.09.
구원의 초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해서 아버지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영이신 하나님 자신을 사람들 통해서 표현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표현되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포함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첫째 조건이다.
이 연합을 위해서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구속이다. 원래 지은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 세계에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찾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결한 처녀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 정결한 것인가? 하나님이 짓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 정결한 것이다.
그래서 구속이 필요하다. 구속은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위치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들이 사라져야 한다. 그러려면 예수님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야 하고 그와 연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음받은 사람인지 모른다.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아는 것이지 그 사람이 원래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래의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참선을 통해서 불필요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참 나를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는 길이 불교에서 수행하는 길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그렇게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벗고 원래의 사람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서 드러났다. 거기서 보니까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던 예수, ‘신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저런 일을 하겠느냐?’라고 보여졌던 예수가 완전히 폭로되고 전시되고 실체만 남았다. 그런 모습이 보였지만 사실은 그분이 가진 소유에 비해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하나님 같았으니 그 소유가 얼마나 컸겠는가. 세상 어떤 것도 그만한 것은 없다. 그에 비해 우리는 기껏해야 배우고 보고 듣고 만진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앞에 서면 저절로 정결해진다. 정결해지려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정결해진다. 여러분이 스스로 정결해질 사람이 있으면 해 보면 되겠지만 여러분 일생만으로는 정결해지기가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저절로 원래대로 가난한 사람이 된다. 사람은 원래 가난하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되기 때문이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합해야 되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안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가난하다.
그런데 원천적으로 가난한 것이 묻혀버렸기 때문에 사람은 가난한 줄도 모른다. 마치 남자가 없는 세계에 여자들만 살면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남자가 필요한 여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한지 아닌지도 모른다. 다른 것이 많이 있으면 부자라고 생각하고 없으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원천적으로 가난하다. 혼자는 아무것도 안된다.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가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구속이다. 예수 안에 있는 것, 그것이 구속이다. 구속을 어떻게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이 곧 가난한 것이다.
이런 사람으로서 나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로 중매하려던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여러분 앞에 서 있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사람으로 그분과 연합하기 위해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가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내가 여러분보다 한 발 앞에서 길을 인도하지만 그 날에는 다 한 사람으로, 한 주님 앞에 서게될 것이다. 나도 혼자 못서니까 여러분과 함께 서기를 원한다. 혼자 못가니까 여러분과 함께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연합되기를 소원한다.
이순묵
1. 예수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은 자식이므로 요셉과 예수는 아무 관계가 없고 요셉의 조상 아브라함과도 아무 관계가 없는데 성경이 예수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유는?
2,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과 요즘 일반 교회에서 하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차이는?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참 방언은 무엇인지?
이현래 목사
성령으로 잉태했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잘 모르는데 이런 연관성이 있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어 모든 것이 끊어졌다. 믿음도 끊어지고 다 끊어졌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다.
이 아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아들이 오랜 시간 과정을 거쳐서 결국 예수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런 맥락에서 느껴보시면 좋겠다. 어느 날 이것이 여러분에게 뭔가 실재가 되어 비치면 그때 여러분이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어떻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는 이삭의 후예로 온 것이다. 예수만 아니라 이삭도 예수처럼 온 것이다.
방언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과 알아듣는 방언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는데 어떤 사람은 같은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별된다고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알아듣는 방언은 생명의 방언이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은사라는 것이다. 은사는 선물이니까 받았다가 못받았다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생명의 방언은 그와 다르게 서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나는 방언을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한번 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방언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그런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고 방언하는 사람은 굉장히 열심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해 보려고 했지만 못해서 늘 부담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방언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기에 편리한 사람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난 후에 방언에 대한 생각이 없어졌다. 어떻게 쓰시든 하나님이 쓰시면 되지 꼭 방언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안해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다. 미안하다.
김영국 목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마지막 복음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삶은 무엇인가?
이현래 목사
마지막 복음이라고 말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나로서는 마지막이고 전체 기독교사로 본다면 아직 한 번도 없었던 것이라는 뜻이다. 이천 년 기독교 사에서 이런 말은 없었다고 한다. 없고 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고 여러분이 들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삶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최종적인 삶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해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그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그분이 통치하는 영역이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 표현에 있다. 만일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의 표현체가 되지 않으면 사람은 그냥 짐승일뿐이다. 여섯째 날 동물이 창조되었고 사람도 여섯째 날 창조되었다.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은 문화나 문명 때문에 인생이 고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동물도 고상한 놈이 있고 지저분한 놈이 있다. 고양이는 시간만 있으면 자기 몸을 닦는다. 그러니까 항상 깨끗하다. 돼지는 자기 몸을 닦을 줄 모른다. 그래서 항상 지저분하다. 그렇지만 둘 다 동물이다.
문명이 있다 해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명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람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쓰임받는다는 것은 그의 표현이 되고 그의 대리자가 되고 그를 대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 귀중하다.
양생회 김성은
1. 천사를 부러워한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능력, 소유를 부러워하는 것이 왜 천사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2. 이현래 목사님이 ‘이천 년 만에 발견한’이라는 수식어가 중요한 부분인지?
3. 십자가에 달려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나라고 아는 것은 개개인의 인식에 달린 문제인 것 같은데 이것이 어떻게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지? 사실이라고 인식된 사람에게만 사실인지 일반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지?
4. 왜 이현래 목사님께로 시집가야 하는지 궁금하다. 목사님은 우리가 예수께로 시집가기를 원하시는데 내 생각에는 자길 삼촌 자신이 중매장이가 되어서 예수와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5. 돌아가신 상옥 이모, 혜리 이모, 상구 삼촌, 옥현 삼촌, 천출 삼촌, 숙희 이모는 예수와 결혼한 사람인가요?
이현래 목사
천사를 부러워한다는 말은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사람에게 무엇이 제일 필요한가,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 제일 중요한 것은 죽지 않는 것이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죽으면 다 끝나버린다. 그러니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천사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천사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능력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천사는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한다. 사람이 제일 부러워하는 존재가 천사다. 능력이냐 소유냐 하는 것은 이것을 해석해서 하는 말이다. 소유도 중요하고 능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천사같이 되고 싶은 것이다.
아담이 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일을 먹었는가? 사탄은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는데 사실은 “나같이 된다.”는 뜻이다. 신과 같이 되고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물어보지도 않고 먹었다. 다른 일 같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았겠지만 이것은 물어볼 수 없는 말이다. 무조건 먹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처음에는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선과 악은 없어도 살 수 있는 문제다. 그래서 만일 죽지 않고 산다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도 있다. 그러나 그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모든 사람이 제일 원하는 것이 죽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를 부러워하면 그때는 천사의 종이 된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누가 하나님의 상속자인가? 결국은 이 문제다. 천사를 부러워하면 상속자가 될 수 없다. 천사가 부럽지 않아야 상속자가 될 것 아닌가. 지금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간절한 복음은 천사에게 이 자리를 빼앗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누가 상속받을 것이냐는 문제인데 이 자리를 빼앗기면 안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왜 천사보다 못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상속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천사를 부러워하면 상속을 받을 수 없다. 여러분이 이 권리, 인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죽음을 지고 온 예수가 왜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부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죽어야 하는 사람인가, 왜 죽은 사람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확실하게 갈라 준 책이다. 1장에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라고 했고 2장에는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라고 하였다. 지금은 죽음이 있는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의 후사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천사와 인간은 완전히 구별된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 복음이 우리 자신을 밝혀주면 죽는다는 것 때문에 천사에게 이 위치를 빼앗기기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이래서 죽음이 있구나. 예수님이 이래서 죽었구나.’라고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인권을 빼앗기면 사람은 동물이나 마찬가지가 되거나 천사의 종이 되어 평생 끌려다니게 된다. 천사의 능력을 사모하고 영생불사하기를 흠모하면서 그 뒤를 따라다니게 된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긴 예수를 따라야 한다.
부활이 좋지만 어디서 부활생명이 나왔는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다.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고 어떻게 부활에 참여가 되겠느가. 성경에 있는 모든 약속이 바로 이 자리에서 성취된다. 모든 것이 여기 와서 성취된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은 여기 와서 성취된다. 여기 와야 상속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삭은 상속자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상속을 받아봐야 당시로서는 굉장히 큰 것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상속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완전한 상속이 있다. 완전한 상속자 안에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완전한 상속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이 중요하다.
천사냐 인간이냐? 여기서 잘못하면 천사에게 인권을 뺏기고 천사의 종이 되고 만다. 그러면 일생동안 그것을 위해서 땀 흘리고 살아야 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실 때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 지금 사람이 그러하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할 자리가 없는 것이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다. 왜 이마에 땀이 흐르는가? 자기를 가릴 나무를 만드느라고 종신토록 수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밥 먹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고라고 할 수 없다. 소가 풀을 뜯어먹으면서 사는 것은 수고하는 것이 아니다. 소는 하루종일 입을 놀리지 않는다. 생풀을 뜯어먹고 나면 반추를 해야 하니까 입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노동인가. 인생도 먹기 위해 일하는 것은 수고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는가? 인권을 뺏기고 나면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 명함 한 장을 만들려고 수고해야 하고 땀을 흘려야 한다. 명함이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어떤 분이 명함을 주는데 이름만 써 있었다. 이름만 써놓으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런 명함이 가장 무서운 명함이라고 한다. 나는 아예 명함이 없다. 줄 사람이 없으니까 쓸 데가 없다. 나도 무서운 사람인 셈이다.
우리는 꼭 인권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다 함께 살 수 있다. 이것은 내가 귀가 닳도록 하는 말이다.
두 번째로 ‘이천 년 만에 발견한’이라는 수식어가 중요한 부분인지 물었는데 이것은 내가 발견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천 년 만에 처음 있는 복음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이 조사해 보면 알 것이다. 내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이 지금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의 생애에 이 복음이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에 많은 복음이 있었다. 복음 아닌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거기서는 완성이 되지 않았다. 오는 과정이었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복음이다. 사람이 지어졌다는 것이 복음이다. 다 복음인데 이 복음이 열매가 되어야 하는데 열매가 없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무엇을 전할지 모를 것이다. 왜 그런가? 아직 열매를 못먹었기 때문이다. 열매를 먹고 나면 열매만 주면 되는데 열매를 못먹었기 때문에 너무 할말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이다. 단순한 복음이 히트를 쳤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인생 문제에 완전한 답이 안된다.
우리가 인권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는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찾아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죽으심으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고 하신 것이다.
내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이 복음이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전에 사람은 이 말을 못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불행했던 것이 아니다. 거기까지는
고무신을 신었지만 그때도 좋았다. 흰고무신은 함부로 둘 수 없어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얼마나 귀중하면 그렇게 했겠는가. 엿장수에게 찢어진 고무신을 팔아도 흰고무신과 검은 고무신은 차이가 많았다. 흰고무신이 값이 더 비쌌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것도 그때는 좋았다. 그렇지만 지금 고무신을 신겠는가. 그만큼 우리는 좋은 시대를 살고 있다.
복음도 더 좋은 복음이 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이 이 복음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 받은 것도 아니고 이웃집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이야기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받은 것이 율법이다. 그것은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은 없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였다. 모세 시대에는 은혜와 진리가 아닌 율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율법과 은혜와 진리가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검은 고무신이 흰고무신이 된 것처럼 달라진 것이다. 더 좋게 더 쉽게 하나님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복을 주셨다.
그렇다고 그 시대에 주신 것을 안받고 다른 데로 빠져버리면 되겠는가. 고무신 시대에 고무신을 안신고 다음 시대에 더 좋은 것을 신으려고 하면 고무신도 못신고 다음에 더 좋은 것도 못신는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가장 좋은 것을 신으면 된다. 이상한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서 최선의 것을 취하면 된다. 인생을 사는데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야 되지 중요한 것이 따로 어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평생 못갖는다. 지금 이 순간이지 따로 어디 있겠는가?
내일 쌀밥을 먹자고 오늘 보리밥을 안먹겠는가. 오늘 안먹으면 오늘 배고프다. 오늘 보리밥이 있으면 보리밥을 맛있게 먹고 내일 쌀밥이 나오면 쌀밥을 먹으면 된다. 답답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그 날의 양식은 그날로 족하다. 오늘 최선이면 그것을 하면 된다. 다음 날 잘못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오늘 최선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더 이상 다른 것을 택할 수 없으면 그것을 택해야 한다.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의 양식은 오늘에 족하면 된다. 내일 가서 후회할 필요가 없다. 나이키 신발을 신고 ‘그때 고무신을 안신었으면 좋을 것을…….’ 하겠는가. 그날은 고무신이 제일 좋은 것이었는데 그렇게 인생을 되돌아보면 후회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어떻게 내일을 알고 살겠는가? 아무도 내일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하늘의 것을 잡으려고 좇아다니다 마지막에 발견한 것은 나는 내일 일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니까 묘하게 거품이 빠지고 평안해졌다.
세 번째로 아주 중요한 문제를 질문했다. 내가 인식한 것만 있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부처님 말로 하면 유아독존이다. 김춘수의 시가 그런 데서 나왔다. 내가 꽃이라고 하니 꽃이라는 것이다. 내가 꽃이라고 하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도 할 수 없지만 사실은 여전히 사실로 있다.
내가 대구에 앞산이 없다고 생각해도 앞산은 있다. 내가 앞산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대구에 앞산이 없겠는가. 나의 인식과 사실은 다를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인식하지 않아도 있는 것을 어쩌겠는가. 죽는다는 사실이 내 앞에 있는데 내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안죽겠는가?
‘예수가 나구나. 저 사람이 나구나.’ 이것은 말로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는데 그 사람 자신을 내 운명으로 시인하면 내가 설 자리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내가 설 자리가 없다. 이 자리를 부인하고, 안보고 한번 서 보자. 설 자리가 있는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데가 없다.
이 자리보다 나를 더 확고하게 지켜준 자리가 없다. 이 자리보다 더 확고하게 나를 지켜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 이 사실은 눈 감아도 있다. 이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을 보았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 사람인데 그래도 죽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안죽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개인의 인식에 달린 문제라고 하며 피해 가면 내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인식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것은 너의 인식이지. 너는 그렇게 인식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인생을 잘 사는 것이겠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꼭 김성은만의 개인적인 질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태평양이 없다고 한다고 없겠는가. 절에 가니까 스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 “돈 들여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필요가 있겠느냐. 눈 감으면 미국에 가 있고 눈 뜨면 북암사 절이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신통하게 들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미국에 갔다온 것도 아니다. 그런 분과 일 년을 같이 있었다.
그분은 매일 참선을 하셨는데 참선을 하고 나올 때면 얼굴에 환한 빛이 보였다. 차라리 그렇게 혼자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러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개인의 인식도 사실일 수 있고 단체의 인식이라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독일 국민의 85%가 기독교인이었어도 히틀러의 설득에 넘어갔다. 그렇다고 히틀러의 비전이 사실이었는가?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도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으면 허구다. 어떤 예수를 믿는지 구체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냥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안되고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예수를 믿는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인식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의 문제가 동시에 모든 사람의 문제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사는 것은 지극히 개인의 문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의 문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것이 개인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보편적인 문제입니까?”라고 묻기에 나는 나 개인의 문제라고 했다. 나 개인의 문제가 자기 문제로 여겨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나 개인의 문제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말을 다시 안하기 원한다.
네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런 질문이 있는 것 같다. 내게로 시집온다고 되겠는가? 내가 정결한 처녀로 여러분을 그리스도께로 중매하려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내게로 시집온다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그런 것 같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께로 시집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내가 했다면 연합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웃이니까 이웃사람끼리 연합해야 더 크게 연합될 것 아닌가. 그런 의미로 한 것 같다.
성은이가 자길 삼촌 밑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면 우선 자길 삼촌과 연합이 돼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 또 나와 연합될 것이고, 나와 연합되면 또 다른 형제들과 연합될 것 아닌가. 이것은 누구를 높이고 낮추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개념이 너무 딱하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제시한 것은 누가 높고 누가 낮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와야 모두 같아진다고 한 것이다.
다른 데서는 아무래도 평등해질 수 없다. 자길 삼촌과 학생들이 있으면 아무래도 자길 삼촌이 한발짝이라도 앞에 있지 않겠는가. 똑같으면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러니까 차이가 있다. 우리 형제들과 나도 차이가 있다.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됨으로 가는 길이다. 길을 가다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계급인가, 높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자길 형제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길 형제를 높이는가? 이런 문제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벌써 오래 되었다. 옛날에 문경에서 천막 집회를 한 적이 있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안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였고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난장판이었다. 그때 어떤 형제가 나와서 “목사님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가 버렸는데 그분은 평생 목회를 하셨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셨다. 정년퇴임을 하신 분인데 충주에서 형제들이 모인 것을 보고 ‘이런 모임이 다 있는가.’ 하고 찾아오셨던 것이다. 우리 장인어른과도 잘아는 분이다. 그런데 그 말을 돌아서고 말았다.
그래도 원체 점잖으신 분이라 내가 찾아갈 때마다 “이 목사는 어떻게 그렇게 시끄러운 난장판에서 말씀을 하십니까.”라며 늘 좋은 점만 칭찬하셨다. 그런데 재승 형제가 찾아가니까 “이 목사에 대해서 말하려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시며 원래 이단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높이다 보면 이단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누가 높인다고 높아질 수도 없는 사람이고 낮춰도 낮출 수 없는 사람인데 오해하셨던 것이다. 누가 높인다고 높아지고 낮춘다고 낮아지겠는가. 십자가 안에 와서 보면 사람은 똑같다. 높이고 낮추는 것은 선생보고 하는 말이다. 무엇을 배울 때 선생님은 가르치는 분이고 나보다 위에 있는 분이다. 당연히 무릎 꿇고 배워야 되지 가르치는 분에게 “당신과 나는 똑같소.”라고 하면 공부가 되겠는가. 그런 것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한국 사회에는 그런 경향이 있다. 사람을 높이면 안된다고 하고 헌금하는 것도 알리지 말라고 한다.
미국 어떤 교회에 가니까 돈을 엄청나게 들여서 지었는데 발로 밟는 돌 위에 누가 얼마를 헌금했는지 새겨놓았다. 그런 것을 그 사회에서는 장려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기부하면 비꼰다. 돈자랑한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것도 아니고 시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풍조다. 우리 사회도 기부를 장려해야 한다. 그래야 기부를 할 것 아닌가.
미국의 대학들은 대부분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대신 등록금이 굉장히 비싸다. 기부금을 모아서 장학금으로 주니까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니겠는가.
그러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개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높아지겠는가.
다섯 번째 질문도 많이 있는 질문이다. 아브라함은 예수를 알았는가? 그는 예수라는 사람을 몰랐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네가 채 오십도 못되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라고 반문했다. 이것은 다른 판이다. 다른 판에서 한 말이다.
상옥 이모, 혜리 이모 같은 사람들이 예수와 결혼한 사람인지, 이것은 우리가 물어볼 문제가 아니다. 나와 결혼하자고 하신 것이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결혼했는지 가르쳐 주려고 한 말이 아니다. 주님이 나에게 오시면 나와 결혼하자고 찾아오신 것이지 남의 결혼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라는 이름도 몰랐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이삭은 예수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와 하나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가 하나라고 해서 몸이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재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말이다.
남의 일에 이러니 저러니 할 필요가 없다. 고무신 시대에는 고무신이 최고니까 최고의 신을 신었으면 됐지 지금 나이키를 신으면서 ‘그때 그 사람이 나이키를 신었겠는가?’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나이키가 최고면 그때는 흰고무신이 최고였다. 최고를 누렸던 것이다.
예수와 결혼한 사람이 누군가? 그 시대에는 그 사람이고 지금은 이 사람이다. 하나님이 언제 누구와 만나겠는가. 예수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만나겠는가. 하나님은 그때 그때 하실 일이 있다. 그때 수준에서 그때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있다. 지금 부르심 안에 있는 것이다. 옛날 사람 부르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의 부르심 안에 있으면 안된다. 지금 부르심을 모르고 옛날 일을 생각하고 있으면 안된다.
지금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복이다. 옛날 것은 소용없다.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누렸을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옛날 사람보다 내가 더 가난할지라도 지금 내가 최고면 된다.
어떤 사람은 여름에 냉장 수박을 먹으면서 “이 수박은 세종대왕도 못먹어 본 것이야.”라고 한다. 세종대왕보다 자기가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먹으면 행복하지 굳이 옛날로 돌아가서 ‘우리 조상들은 못먹었는데 세종대왕이 혼자 맛있는 것을 다 먹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그러면 평생 가도 행복이 안된다. 그러므로 현재로 살기 바란다.
항상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때에는 이삭의 하나님, 야곱 때에는 야곱의 하나님이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죽은 사람은 우리가 관리할 수 없다. 관리하실 분은 따로 있다.
김경수
내 자신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과 다양성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드리겠다. 내가 볼 때 교회에서 불만이 많은 것 중 하나는 예수의 실체를 통해서 발견된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정체성이 다양하다면 정체성이 없다는 것인데 정체성만 말하다 보면 다양성은 포기하고 무시해야 되는가? 미덕이나 친함 같은 것도 다 필요없는가?
정체성이 없는 상황에서 소유가 필요하다고 하면 소유가 정체성이 될 수 있다. 정체성과 다양성의 혼란을 정리해 주시면 좋겠다.
이현래 목사
다양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필요다. 밥상에는 반찬이 여러가지 다양하게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잘 먹고 어떤 사람은 저것을 잘 먹는다. 한꺼번에 놓아두고 골라먹는 것이 우리 식탁이니까 다양성은 우리의 필요다.
정체성은 필요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다. 내가 누군가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를 이랬다 저랬다 하면 되겠는가. 오늘은 이런 모양이고 내일은 저런 모양이면 그런 사람과 어떻게 생활하겠는가. 우리 정체성이 다양해지면 안된다. 필요는 다양해야 되지만 정체성은 다양하면 안된다.
아마 다양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입장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와 독재 사회를 생각하고 한 질문인 것 같다. 독재사회에는 다양성이 없다. 정해져 있는 것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유가 있으니까 다양성이 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 같은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유와 존재가 구별되기 바란다.
김원섭 목사
지난 주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답변을 잘 들었다. 감사드린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리워가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다. 기도한지 열흘만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다. 목사님도 기도를 다시 시작하시기 바란다.
보름전부터 기도를 온라인으로 배우고 있다. 유튜브에도 50일 기도학교라는 것이 있다. 신대원에서도 하지 못한 기도를 졸업한지 20년이 지난 지금 30분 강의를 듣고 한 시간을 기도한다. 기도에는 “하나님 아버지, 이현래 목사님이 성령님을 받게 해주십시요.”라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내 질문을 목사님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위해서 확인하시기 부탁드린다.
이현래 목사
오랜만에 부흥회에 참석한 것 같다. 원섭 형제는 장신대를 나왔는데 저런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김치현 목사도 장신대 출신인데 너무 다르다.
내가 기도가 필요없다거나 기도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무조건 기도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배워서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속에서 우러나야 되지 이렇게 저렇게 배워서 기도하는 것은 온당한 기도가 아니다. 나도 기도를 한다. 하지만 다르게 한다. 기도는 자기 혼자 해야지 기도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서 하는 기도도 있다. 다.
나도 다 해 보았는데 여러가지 기도가 있고 그 기도가 응답되는 수도 있지만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를 안했어도 당나귀도 하나님이 사용하셨다. 필요하니까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필요로 하시는 사람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이지 기도를 하니까 들으시겠는가? 기도 안하면 안들으시고 기도하면 들으시겠는가?
우리가 기도를 하되 자기만큼밖에 못한다. 기도학교가 있다고 했는데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큼만 기도하게 된다. 소는 소만큼, 개는 개만큼 기도한다. 사람만큼만 기도한다. 입으로 뭐라고 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아시니까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들으신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모세가 기도하니까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모세를 써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백 살에 아브라함은 믿음도 떨어지고 기도도 못하고 다 끊어졌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와서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웃으며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사라는 장막 뒤에서 웃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가져왔는데 감사하고 받아야 될 일인데 그것이 웃을 일인가. 아브라함이 그렇게 말하는데도 기어코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라고 통지를 하고 갔다.
나는 내 일생에서 기도를 해서 얻어 본 것이 없다. 기도하기 전에 다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꼭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냥 보통 하는 말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너무나 역력하게 받았다. 지난 번에 하도 오래 아파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전에는 구하지 않아도 주셨고 내가 모를 때도 다 준비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기도해서 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나는 제한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좀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돌아서니까 ‘내가 왜 이런 기도를 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알아주시는데 내가 왜 기도를 했지?’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렇지만 기도를 후회한 것이 아니다. 그때는 그렇게 쉽게 해 주시더니 지금은 왜 응답이 없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도 자체를 이렇다 저렇다 하면 안된다. 그 사람 자신이 해야 되지 가르칠 문제가 아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라거나 이렇게 저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칠 문제가 아니다. 자기가 급하면 기도할 것 아닌가. 나도 급하니까 기도를 하게 되었다. 기도를 안한다고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인데 줄 사람에게는 주고 안줄 사람에게는 안주고, 다 하나님이 아시는 일이 아닌가.
김원섭 목사님은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중환자실에서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누군지 모르는데 와서 “목사님, 말씀을 해야 되잖아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속에서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울먹이면서 “집사님, 나를 위해 좀 기도해 주세요. 집사님 기도는 꼭 들으실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감동적인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중환자실에는 아무도 못들어오는데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지그렇게 다녔는데 그분의 이름도 성도 모른다. 뒤로 보니까 나이 많은 대장이 있는데 그분을 뒤따라다니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저분이 나를 부탁하는 모양이다.’라고 느꼈다. 아마 런 분의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이 생겼다. 그분의 기도를 들으셔서 안줄 것을 주셨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게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습관적인 기도나 배워서 하는 기도로 기도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외국인 선교사가 부흥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우물에 빠졌을 때 “아!”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자기 일생에 그때보다 간절한 기도는 없었다고 했다.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이 기도였다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된 만큼 내놓는다.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형식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문을 두드리라고 하셨다고 해서 드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내 기도관은 이렇다.
성령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대구교회에 가면 성령이 없다는 사람이 많다. 꼭 김 목사님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성령을 잘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서 어려운 문제는 다 성령이다. 칼빈이 우리 구원의 정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했다. 그러나 연합할 길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연합할 수 있다고 했다. 성결의 생활을 아무리 해도 답이 안생기니까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이른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한 데는 그런 말이 없다. 의롭다 함은 믿음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안되는 문제는 다 성령이 하신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래야 하는가? 하나님도 우리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야 하고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꼭 성령이 와서 하라고 하면 하고, 성령이 와서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한다면 이상할 것 같다. 실제로 성령을 따라서 한다는 사람들을 경험해 보고 ‘저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느꼈다.
하라는 말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여러분이 된대로 기도하면 된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교육을 받아서 하는 기도는 안하는 것이 좋다. 자기 속에서 우러나면 해야지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그 집사님을 누가 오라 했는가 가라 했는가. 와서 나를 보더니 앞에 앉아서 “목사님은 말씀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그분은 기도하는 분 같았다. 지금이라도 주소라도 알면 고마운 말이라도 하고 싶고 교통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모른다. 중환자실은 외부사람은 못들어오는데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지 그곳에 와 있었다.
자연스럽게 되면 그보다 좋은 것이 없다. 나는 김원섭 목사님이 저렇게 사는 것은 김 목사로서는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김 목사님이 다른 사람도 다 자기처럼 바란다는 것은, 되지도 않겠지만 문제가 복잡해진다.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란다. 나는 기도파도 아니고 반대파도 아니다. 나는 필요하면 한다.
양문회 권유경
내가 이탈한 것을 발견했다. 나도 판을 바꾸고 싶다. 예수 구속의 판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과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율법인가?
이현래 목사
아주 간단하고 쉽다. 왜냐하면 예수를 찾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기다렸던 복음이다. 안찾던 사람에게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찾는 사람에게는 복음이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난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사람들이 “뛰어내려보라. 그러면 믿겠다.”고 했던 그 사람을 만난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보고 뛰어내려보라고 했겠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다. 그분은 스스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했고 증거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나가서 그렇게 퍼뜨렸다. 여러가지 증거로 보아도 그분은 뛰어내려보라는 말을 듣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다.
우리는 죽어도 그런 말을 못듣는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누가 와서 내려와 보라고 하겠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예수님에게 내려와 보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못내려오고 죽었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제자들도 그분이 내려오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그 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못내려오니까 다 가버렸다. ‘그러면 그렇지. 제가 무엇이라고.’ 하고 가 버렸다.
예수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쓸모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그들에게는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질문을 십자가에서만 받은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광야에 나가서 사십일간 기도하느라고 주리셨을 때 마귀가 한 말도 같은 말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라고 한 말이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말이 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 말들이 다른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같은 존재가 한 말이다. 십자가에서는 여러 사람이 합해서 한 것이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귀가 찾아와서 했다는 차이가 있을뿐이지 내용은 같다. 그러면 이 사람이 누군가?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우리도 잘하면 다 그렇게 될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둘이 연합해서 하나되도록 지으셨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도록 지어졌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과 몸을 가진 인간이 연합해서 한 실체로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될 것 아닌가.
모세를 예를 들면 산위로 부름받았을 때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놓으라고 하라.”고 하셨다. 모세는 “내가 누구기에 바로를 굴복시키고 내 백성을 데려고 나오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라며 극구 사양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라서 사양한 것이다. 그때 여호와께서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출7:1).”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바로에게 간 것이다.
바로에게 가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던 것은 모세가 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모세로 보였으면 내보냈겠는가. 장자들이 다 죽으니까 ‘안되겠다. 신이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은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세가 신인가? 모세는 신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쓰실 수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큰 경험은 아니지만 ‘내 말을 듣고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할 때가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면 신으로 쓰실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담이 속았지 전혀 신이 될 수 없다면 속지도 않았을 것이다. 속을 때는 뭔가 내 안에 있어서 속는 것이다. 속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같이 된다. 신이 된다.” 이 말을 듣고 아무나 하겠는가. 그럴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이다.
이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만 되었으면, 나도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못되지만 우리를 대표해서 되신 분이 있다. 그분이 못내려오고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은 무엇을 해도, 어떻게 되어도 도로 사람이다. 신처럼 되어서 일 했어도 사람은 도로 사람이다.
무슨 곡식을 얼마를 생산했든지 흙은 흙이지 흙이 곡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이라는 것은 그런 법칙이다. 여자가 남자와 연합해서 아기를 낳았다 해서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여자다. 이것이 연합이다.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연합을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죽은 것이다. 신이 어떻게 죽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가현설이라는 것이 생겼다. 영지주의자들은 우리 눈에 사람으로 보였을뿐이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처럼 보였을뿐이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 신처럼 될 때는 신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어찌해도 신이 될 수 없다. 결국은 사람이다. 이것이 판명되었다. 여기서 나 자신을 비춰보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은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개에게 “네가 잘하면 사람같이 된다.”고 하면 믿을 개가 있겠는가. 아무도 안믿는다. 그런데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믿었던 것이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해도 사람이다.’ 여기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여기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사탄이 그냥 두겠는가. 그러므로 여기 뿌리를 내려야 사탄이 발붙일 데가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자리를 정해 놓으셨다.
우리에게는 유혹의 여지가 늘 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유혹의 여지가 없다. 사탄이 떠나가는 자리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신다. 딱 갈라지니까 세상이 조용해진다.
왜 시끄러운가? 섞이니까, 혼란이 되니까 시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신은 신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갈라지니까 시끄러울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완전한 사람을 상속자로 삼으신다. 반신반인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을 후사로 삼으신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다. 어떻게 죽음이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아이고, 안되겠네.’ 하면 사람은 끝나는 것이다. 인권을 빼앗겨 버린다.
그러므로 구속은 간단하다. 예수 판에 와 보면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자기 스스로 알게 된다. 돌아가기는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그 자리에 있는데 어디로 가겠는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어떻게 해야 되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어떻게 할 것이 없다. 그냥 판명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과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율법이냐고 물었는데 기본적인 예의는 필요하니까 지켜야 하는 것이다. 율법이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기본적인 예의를 안지키면 야만이 되니까 자기가 원해서 지키는 것이다. 안지키면 야만이 되니까 율법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실례가 안되도록 해야 되지 굳이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안하면 된다. 마누라가 싫어하는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안하면 된다. 그러면 밥 얻어 먹기도 편하다. 이런 것은 상식적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