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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이야기
<5> 1800년대 홍어상인, 필리핀에 갔다오다
#1
아쿠다가와 류노스께가 쓴 소설 중에 ‘밀차’가 있다.
여덟 살의 료헤이는 공사장에서 흙을 실어 나르는 밀차를 밀며 재미있게 논다. 인부에게 들켜 더 이상 놀이를 할 수 없게 되자, 밀차는 꿈과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절한 인부가 밀차를 실컷 밀게 한다. 하지만 너무 멀리까지 가고 말았다. 혼자 돌아와야 하는 저녁이 되자 불안해졌다. 가파른 언덕을 지나, 대나무 숲을 지났다. 가던 길과 오는 길이 바뀌어져 달음질을 하던 그의 옷은 흠뻑 젖었다. 사방은 어두워지고, 땅거미 속의 마을 공사장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끝내 울고 말았다.
그리고 속세(俗世)에 처한 스물 여덟 살의 료헤이. 잡지사에서 교정을 보는 그는 때때로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한 숲과 언덕이 있는 길이 가늘게 한 줄기 끊겼다 이어졌다 하였다.
어느 누구에게나 힘겨운 삶이 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있다. 예기지 못했던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여덟 살 료헤이처럼 ‘가고 싶어서 갔지만, 너무 멀리 가버린’ 길도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전히 어른이 되고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대부분 ‘어두컴컴한 숲과 언덕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으리라.
▶갈림길을 잘 포착했다. 한 곳에서 갈라지고, 다시 한 길에서 또 갈라지는
'인생길'과 '운명'을 상징하는 듯 하다. 1988년 백마역. 사진=한영희
나도 그렇다. 가고 싶었던 길도 있었다. 가지 못한 길도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 이 길도 아직 ‘끊겼다 이어졌다’ 하기도 한다. 존재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면 너무 철학적인가. 우리는 운명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산다는 것의 불확실성’을 아예 받아들이는 것, 말하자면 지나온 길 자체를 ‘예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못 편리하기도 한 생각이다.
길은 그렇게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길을 가다 맺는 인연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 글은 ‘네 사람의 인생 길’ 또는 ‘길을 가다 만난 사람들’이랄 수 있다. ‘예기치 않은 운명과의 만남’ 이기도 하다. 그 시작은 ‘홍어상인’이다.
#2
1800년대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 ‘우물 밖 세계’를 만나고 온 이가 있었다. 당시 조선인으로선 대단히 특이한 경험이었다.
1801년 홍어를 사러 흑산도에 간 사람들이 있었다. 우이도에 사는 문순득(文淳得) 등 여섯이었다. 태사도(대흑산도 남쪽에 있다)에 갔다가, 갑자기 바람에 소흑산도에서 수백리 남쪽으로 떠내려 갔다. 진도의 서쪽에 있던 조도를 향해 가려고 했지만 갈 수 없었다. 앞을 보니 큰 바다였다. 한 점의 산도 볼 수 없었다. 밤이 깊었고, 돛을 펼 수도 없었다. 가는 대로 배를 내맡겼다. 날이 밝았다. 큰 산이 바라보이니, 제주라고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서북풍을 만나 동남으로 나아갔다. 다시 날이 밝아 큰 섬을 보고 닻을 내렸다. 사람들로부터 물과 죽을 대접 받았다. 3일을 먹지 못했었다. 물어보니 유구국(琉球國, 당시는 별개의 나라, 지금은 일본에 병합돼 있다. 오끼나와이다)이라고 했다.
▶표류 주인공 문순득이 구술하고, 정약전이 기록한 '표해시말'. 왼쪽 빨간 부분이 홍어를 사러 갔다는 표현이다.
홍어를 사러 갔던 이들은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 뱃길을 잃고 오끼나와 까지 가게 되었다. 역관이 통역했다. 유구국 왕도(王都)에서 여섯 달을 보냈다. 다시 유구국은 중국을 향해 배 세척을 띄웠다. 사신들과 중국표류인들, 조선인표류인들, 유구국 사람들이 함께 탔다. 이번에는 서풍을 만나 또 10여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송(呂宋, 지금의 필리핀 루손섬) 서남쪽에 도착, 그곳에 정착한 중국 복건(福建)사람들에게 의탁해 넉 달 가량 먹고 지냈다. 이들은 다시 광동(廣東)의 상선을 타고 광동 오문(奧門, 당시 포르투칼의 조차지, 지금의 마카오)에 도착했다. 이어 남경, 금릉, 양주, 산동을 거쳐 북경에 닿았다. 마침내 그곳에서 고려관(高麗館)에 머물다, 중국에 들어온 사신들을 따라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의주, 서울을 거쳐, (전라도) 무안 다경포에서 배를 타고 1805년 정월 초8일 우이도 집에 도착했다.
▶<1>부근이 바로 사태도 앞이다. 지도에서는 사태도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상사태도, 중사태도, 하사태도 세 곳으로 나와 있다. 위 큰 섬이 대흑산도, 아래 큰 섬이 소흑산도로 표기되어 있다. <2>는 영산도이다. 흑산도 사람들이 왜구침입으로 강제이주정책(공도정책)을 쓰게 됨에 따라 나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때 영산도의 영산을 따서 영산현이라 했던 것이 지금의 영산포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도는 1872년 제작. 규장각 소장.
문순득은 그러니까 바다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풍랑에 휩싸여 3년 2개월을 전혀 낯선 땅, 이국에서 보내야 했다. 오키나와에서 8개월 17일, 필리핀에서 8개월 28일, 중국에서 13개월 26일을 체류했다.
홍어를 사러 갔다 표류한 문순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이름을 올렸다. 1809년(순조9년) 6월 26일자이다.
나주 흑산도 사람 문순득이 표류하여 여송국(필리핀)에 들어 갔는데, 그 나라 사람의 생김새와 옷차림을 보고 또 그들의 방언을 기록해왔다. 그런데 표류하여 머물고 잇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해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하니 절절히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문순득이 한자를 놓고 류구(오키나와), 여송(필리핀)에서 쓰는 말을 우리말로 적었다. '표해시말'에 수록돼 있다.
문순득이 표류하다 제주도에서 9년 동안 억류돼 있던 필리핀인들의 통역을 맡은 것이었다. 마카오와 마닐라를 오가던 무역선이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 것이다. 문순득은 “나는 떠돌이 3년 동안에 여러 나라의 은혜를 입어 돌아올 수 있었는데, 여송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문순득이 필리핀에서 돌아온 지 5년이 지났는데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필리핀말을 할 줄 아는 이가 그 밖에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폐쇄된 조선 사회의 단면이다.
문순득은 실록대로 필리핀과 유구국의 사정(풍속, 의복, 궁실, 토산)과 말을 기록해왔다. 그것이 오늘날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전이 남긴 저술 ‘표해시말(漂海始末)’에 전한다. 문순득이 말하는 것을 정약전(丁若銓·1758~1816)이 기록한 것이다. 앞에 소개한 표류과정은 바로 이 책에 근거를 두고 있다.
#3
우이도에서 문순득과 정약전이 만났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유배지 외로운 섬에서, 뜻하지 않은 인생 길에서였다. 잠시 정씨 형제의 처지를 말하자면, 약전의 동생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4)도 바다를 앞에 둔 남도땅 아랫녘 강진에서 기약 없는 유배 중이었다. 서양의 물결, 즉 천주교와의 접촉을 문제 삼아, ‘개혁과 개방의 세력’을 변방으로 내친 결과였다.
‘나주 바다와 강진 사이에는 이백리 거리/험준한 두 우이(牛耳)산을 하늘이 만드셨던가/아득히 먼 곳을 실컷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괴로운 마음 쓰라린 속을 남들은 모른다네/꿈 속에서 서로 보고 안개 속을 바라보니/눈은 물커지고 눈물 말라 천지가 깜깜하구나’
다산이 강진 뒷산인 보은산(牛耳山)에 올라, 흑산도 앞 우이도(牛耳島)에서 유배 중이던 둘째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시를 읊조렸다. 형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 받으며 지내다가 결국 형이 먼저 세상을 떴다.
▶강진 다산초당 언덕배기에 세운 천일각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 이 언덕배기에서 다산은 우이도에 유배하고 있던 둘째 형 약전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사진=정정현
약전은 흑산도 사리마을에서 먼저 유배생활을 했다. 사리마을은 흑산도 예리항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 곳이다. 조그만 관광버스를 타고 몇 년 전에 갔던 사리마을 앞바다는 짙은 남색으로 출렁거렸다. 그곳에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쳤다. 이어 우이도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자산어보’를 썼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 그가 우이도에서 문순득을 만났다. 정약전은 문순득의 집 가까이에 거처했다. 정약전이 문순득의 표류전말과 경험을 기록한 것이었다.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天初(천초)’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우리나라 개벽 이래로 해외 오랑캐 나라를 이 사람이 최초로 보았다고 하는 뜻’이라고 했다. 실학의 입장에서 문순득의 견문은 ‘놀랍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산의 제자로 우이도에 들어온 이강회(李綱會)가 쓴 ‘운곡선설(雲谷船說)’에 나와 있다.
▶문순득이 표류했다가 돌아와 지은 집이라 한다. 지붕은 슬레이트, 하지만 기둥이나 구조는 옛 모습이다. 가장 왼쪽이 문채옥씨. 문순득이 그의 고조부. 이 집에서 '표해시말' 등이 수록된 이강회의 '운곡잡저' '유암총서' 등이 나왔다. 사진=신안문화원, 운곡잡저, 2007,31쪽
이강회는 문순득의 집에서 기거했다. ‘운곡선설’이란 책은 문순득이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에서 본 선박제조법과 제도에 관해 구술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문순득은 ‘총명함이 두루 미치어 보통 사람과 다르다’ ‘사물을 살펴보는데 정확하고 치밀하다’는 평을 이강회로부터도 받았다. 이강회는 ‘정약전과 문순득 두 선생이 변방에서 문명이 앞선 중국을 흠모하여 그 논찬한 바가 나라를 걱정하며 당시 처한 처지를 탄식한 말이 아님이 없다’고 했다.
#4
이강회는 다산이 총애하던 제자였다. 유배지 강진이었다. 다산은 강진읍 주막집 등지에서 보내던 시절, 양반과 향리(鄕吏), 그리고 양민의 아들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이강회는 과거시험 공부를 했지만, 다산의 영향을 받아 경학연구로 돌렸다. 서른 살 되던 1818년 겨울로, 다산이 해배되어 몇 달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강진을 떠나 우이도에 사는 문순득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묵으며 저술에 착수했다. 다산의 형 약전이 유배생활중 문순득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 정황을 알고 있었던 이강회가 약전도 죽고, 다산도 올라가자 문순득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문순득과 정약전, 정약전과 정약용, 정약용과 이강회, 이강회와 문순득의 만남과 인연이 고리를 갖고 중첩적으로 이어졌다.
▶강진읍 동문밖에 복원된 다산이 묵었던 사의재(四宜齋).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 도착하자 주막집에 머물렀다가 바로 옆에 거처를 마련했다. 사진=연합뉴스
이강회의 생각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가장 실학적이고 선진적인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 그의 저작을 통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경세(經世)에 치중했다. 현실의 학문을 한 것이었다. 실학을 집대성한 스승 다산의 영향을 받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운반수단으로서의 수레의 유통의 필요성과 제작방법을 주장하고, 이를 시행할 공인(기술인)의 파격적인 양성책을 또한 주장한다. 이것은 국방의 문제, 국가의 건설에 필요한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선박에 관한 저술도 했다. 문순득의 구술에 힘입어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에서 견문한 서양선박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선진적인 선박제조와 이를 제조할 수 있는 제도적인 환경정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스스로 1816년 진도 도합도에 나타난 영국군함과 조선선박을 비교하고, 또 1819년 흑산도에 표류한 중국선박을 관찰하였다. 선박은 ‘국가를 경영하는 자의 큰 정사’, 즉 국가적인 정책과제로 규정하였다. 우리나라 선박의 취약성과 결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선진적인 선박제조법을 제시했다. 그의 실용학문은 국방과 경제 부문에 초점을 두었다.
서울, 경기 중심의 경화사족이 권력을 농단하며 나라의 운명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당시, 외국과 교류하던 접점은 오히려 변방이었다. 그것도 변방의 섬들이었다. 나라를 걱정하던 이들은 유배된 자들, 변방의 지식인들, 보잘 것 없던 양인들이었다. 그곳에선 신분의 벽을 넘어선 교류가 있었고, 동지애가 있었다. 정약전이 문순득의 집에 거처하며 ‘표해시말’을 기록하고, 뒤이어 다시 스승의 형이 묵었던 그곳에 찾아 들었던 이강회가 다시 문순득에 힘입으면서 선박제조 등에 대한 주장을 더욱 정밀하게 내세울 수 있었다.
일본 근대화의 인물 중에 사까모토 료마가 있다. 사무라이였다. 시바 료타로가 그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료오마는 간다’를 나는 기자생활 4년차 무렵 읽었다. 막부제를 타도하고 천황에게 통치권을 돌려준 이른 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성사케 한 인물로 33살에 암살당했다. 그는 그리하여 메이지 유신의 발판을 마련,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평가를 달리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추앙받고 있다. 시골 사무라이 출신 료오마에게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글과 관련, 통상과 해운을 대단히 중시하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해운으로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과 집착은 소설에도 잘 그려져 있다. 굳이 단순화한다면 시코쿠 고치현 변방 출신 료오마의 주장은 일본의 근대화로 이어지고, 우리나라 변방 남도끝자락 이강회의 주장은 한낱 골방 속 저술로 잠을 자고 말았는가. 우리나라 ‘변방의 실학’은 그렇게 스러졌다.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갔지만, 조선은 어떤 길을 걸었는가, 자문해본다.
“삼면이 바다인 해국(海國)으로서 미개한 상태를 고수하고만 있으니 식자의 한탄이 어찌 그칠 수 있으랴!”
이강회가 그의 책 속에 남긴 말이다.
#5
다산이 남긴 글은 허다하다.
2006년 다산의 편지가 다수 공개되었다. 강진 다산유물전시관에서였다. 그중 1816년 우이도에 사는 문생(文生)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 있었다. 둘째 형 약전의 상을 당하여 애통한 심정을 말하고, 형의 상(喪)때 도와준 우이도 사람의 후의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에 등장하는 문생은 문씨 성을 가진 이란 뜻으로, 문순득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다산이 우이도에 사는 문씨가 형 약전의 상(喪) 때 도와준 것에 감사한다는 뜻을 전한 서신. 빨간 부분은 우이도에 사는 문씨성을 가진 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아들에게 ‘呂還(여환)’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한 사이였다. 여송국에서 돌아와 낳은 아들이란 뜻이다. 정약전이 문순득의 집 가까이서 거처했었다. 약전의 사후 곧바로 다산에게 직접 인사를 하러 갈 수 있는 관계에 있는 그였다. 그 때 강진에서 문순득과 정약용, 이강회가 만났으리라. 이강회의 우이도행은 그 때 예비되었을 것이다. 이강회는 다산의 해배 직후 곧바로 우이도 문순득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현주서실’을 열고 문씨 아들을 가르치며 실천적 학문의 저술에 몰두했다.
홍어를 소재 삼아 개인과 나라의 길과 만남, 운명을 생각해보았다.
다음 <6>편은 '김지하, 흑산도에 숨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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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문의 글 잘읽었다네...고맙고 날 더분데 잘 지내고 아들 퇴원했다니 다행이네...수고^^
와11읽다가 글씨가 아련거려서ㅠㅠ 나머지는 낼 ... 무사히 아들 퇴원을 추카....^^*
점신시간에 읽기로는 그만일세. 글을 읽다보면 많은 지식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아...한번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친구의 좋은글 감사드리네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것, 또 하나의 즐거움을 준다네.
친구 덕분에 숨어있는 귀한 역사의 한페이지를 이렇게 접하게 되어 고맙고 반갑네....잘 낭독하고 갑니다...친구 건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