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적 미의식의 탐구
-한국화가 정암 이병오 論
강 경 호
1.
예술은 세계와의 만남, 또는 나와 세계와의 동일성 획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형식이 구체적인 어떤 사물의 형상화이건, 관념의 심상(心象)이건 불화(不和)에서 화해(和解)로 이동하려는 작가의 노력인 것이다. 특히 구체적인 사물인 자연은 예부터 작가가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다가가는 대상으로 궁극적으로 작가는 대상과의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문인화 역시 그 주제가 무엇이든지간에 인간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에로의 접근으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은 작가의 정신적 건전성을 손꼽는다. 그러므로 예부터 동북아시아 문화에서는 회화의 규범적인 성격을 정신과 물질의 일치로 여겨왔던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그림이 사대부의 정신세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인간 삶의 전체적인 환경을 예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규범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것의 구현을 삶의 원형적인 이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림을 통해 교훈을 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문화의 전통이 정신문화를 나타내어 왔다고 할 때, 오늘날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우리의 전통문화가 와해되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조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서구 정신으로 덧칠해진 문화가 우리의 얼굴인 양 위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여,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냈던 문인화가 의기소침해가고 있는 것 또한 오늘 우리 문화예술이 처해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시점에서 정암 이병오의 첫 작품전은 의미있는 행사이다. 또한 우리는 그가 그 동안 추구해온 작품세계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주시하는 바이다. 이는 한국문인화의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다는데 그 관심이 깊은 것이다.
이병오 수묵화의 몇 가지 특징으로는, 우선 그림을 통해 정신세계를 탐구해 온 전통적인 동양적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과 화제(畵題)를 한글로 쓰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심화시키겠다는 노력으로 파악된다. 또한 그의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일련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비언표적 모호성을 들 수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이병오의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예부터 중국에서는 빛은 낮을 상징하고 먹(墨)은 밤을 상징해 왔다. 그러므로 수묵은 ‘보이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데 적합한 표현매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먹의 세계에서 밤은 악(惡)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 속에 숨어있던 모성적인 에너지가 낮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화가가 수묵을 사유의 형식으로 삼고 그 묘법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자연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에도 먹의 어두움이 자연의 화사한 색상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고 먹의 논리로 색채를 제어하며 낮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묵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이분화가 아니라 오히려 상보성(相保性)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을 수묵화가 지켜온 ‘묘법’의 양의성(兩意性)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수묵화의 특징은 이병오의 회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앞에서 이병오 작품의 특징에서 지적한 것처럼 ‘비언표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일련의 작품을 살펴보면,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하나의 화면에 나타난다. 그 일례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언제나 그러하듯이, 날마다 좋은 날, 푸른 잎에 바람 일어…, 가을 노래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서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를 지워버리면 온통 먹물 투성이인 반쪽 화면은 추상적인 형상이 되고 만다. 즉 그림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고 하나의 암호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잘 터득하고 있는 이병오는 이를 피해가기 위해 한 화면에 구체적 대상과 추상적 형상을 동시에 배치한다. 이렇듯 작가가 한 화면에 구상과 추상을 동시에 배치한 것은 그리고자 하되 다 그리지 않는다는 수묵의 고전적인 필법을 적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산, 혹은 나무가 산이나 나무이면서 산이나 나무가 아니라는 비언표적인 모호성을 의도한 것이다. 그랬을 때 그림이 주는 미감(美感)의 다양성과 사색의 공간이 확장된다. 부언하면, 구체적인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에서는 기표(基表)와 기의(基意)의 간극이 일치하거나 그 틈이 좁다. 즉 그림이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이거나 감흥이 깊지 않다. 그러나 구체적인 무엇이 아닌 애매모호한 형태가 주는 느낌은 그림을 감상하는 이에게 많은 상상력을 제공한다.
원경의 강가에 민가가 있고 나무 몇 그루가 있는 날마다 좋은 날을 살펴보면 전경에 위에서 밑으로 먹을 담뿍 내리그은 구도로 되어 있다. 서양화의 원근법이 그대로 적용된 이 그림에서 왼쪽 화면에 배치된 먹물이 주는 느낌은 구체적인 어떤 형상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나무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무엇인가를 사색하게 한다는 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와 기법이 적용된 이병오의 그림은 쉽게 눈에 띤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는 아래로 뻗은 가지 끝에 꽃을 피운 백매(白梅)가 있다. 또한 화면 왼쪽에는 늙은 매화나무 등걸이 시커멓게 배치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몇 채의 집이 숲 사이로 보이고 태양이 떠 있다. 이 그림에서는 고결한 매화의 기상을 엿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경에 매화꽃을 클로즈업 시킨 것을 알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왼쪽에 배치한 매화나무 등걸의 먹물들이다. 반쯤 형태가 일그러지게 그려놓음으로 해서 주제인 매화꽃의 선비적 풍모를 한껏 강조할 수 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화면에 구체적인 자연과 형태를 파괴시킨 것을 배치하는 일련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보여줌으로 해서 정서와 의미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특히 매화나무 등걸을 클로즈업 시킨 또 다른 그림과 수직적 구도 속에서 달밤에 피어있는 난이 있는 그림 등에서 보여주는 힘차게 내리긋는 파격적인 붓질은 역동성을 보여주며 형상과 본질의 문제를 이상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이는 먹과 종이의 어울림을 이해하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3.
그림에 제발(題跋)하는 것은 동진(東晋)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림에 이름을 적어 누구의 작품인지를 알렸는데, 문인화가 발전하고 흥함에 따라 화가들은 점차로 ‘시를 적어 넣음으로 해서 그림의 뜻을 한층 강화하게 된다’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그림에 시를 써 넣었다. 시와 그림은 동일하면서도 그 기능이 서로 다르다. 그림은 공간적 미의 형식을 표현하고, 그림 속의 시는 주로 시간적 흐름의 상상을 유발한다. 좋은 그림에 좋은 시를 배합하면 조형예술과 언어예술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어 금상첨화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문인화의 시(詩)・서(書)・화(畵)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림 속에 글씨를 주로 한자(漢字)로 써 왔다. 오늘날도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병오는 과감하게 아니, 당연하게 우리 한글로 시를 적어 넣는다. 이는 내용 파악이 곤란해진 한문 제발을 우리 문법에 맞는 제발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로, 우선 한글을 쓰는 기존의 필법을 터득하고 개선하고, 나아가 한글의 새로운 필법을 창안해야 하는 어려움과 맞서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정신, 우리의 정체성 확립에 대한 그의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문화적 사대주의를 극복하고 우리의 정서, 우리의 글로 우리의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매우 값진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시 쓰는 사람 따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각기 따로 존재하지만, 조선조 때만 하더라도 모름지기 선비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시화(詩畵)가 시인과 화가로 이원화된 시대에 시와 그림의 적절한 조화는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시대적 요구사항이지만, 그러나 문인화 본래의 정신을 생각할 때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 속에 시를 지어넣는 것이 보다 작품의 완성도에 접근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랬을 때 주제가 선명해질 것이고, 심오하면서 드넓은 정신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문인화가들은 그림쪽에 무게를 더 두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병오의 작품은 우선 관념을 탈피해야 할 줄로 안다. 이것은 비단 이병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문인화단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는 전통성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현대성을 창출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 형식주의 이후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낯설게 하기’의 한 방식인데, 낯익고 낡은 옛 시인들의 문체를 지양하고, 참신하고 개성있는 현대적 어법으로 시를 그림 속에 적어 놓았을 때 그 그림은 보다 새롭고 낯설어질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이 요구는 매우 무리한 요구가 될 것이다. 그것은 화가들이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필자가 욕심을 부리는 것은 오늘날 의기소침한 문인화의 발전을 위해 변화를 시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문인화의 큰 틀은 역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림의 형식을 통해 변화를 추구할 때 한국 문인화가 보다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응노, 김기창, 성재휴, 박래현 등이 시도한 여러 형식의 실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모더니즘에 접근하는 가능성을 나름대로 시도했지만, 이들은 문제의 본질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는 창조적인 화가로 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박봉수와 홍석창이 보여주는 추상, 혹은 반추상의 세계는 문인화 발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4.
이병오의 회화에서는 인간의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간혹 나타난다 해도 아주 작게 나타나는데, 이는 자연의 한 모습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르네상스 이후 신(神)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세계관이 옮겨간 서양의 경우에서는 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그런 결과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환경파괴는 인간이 주범이다.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 감춰져 있다. 이에 반해 동양적 사유를 지배해온 세계관에서의 자연은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에 비해 왜소하게 나타난다. 그러다보니 눈에 보이는 것과 욕망을 좇아온 서양의 가치관에 의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세계에 엄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자연을 스승, 혹은 경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동양적 세계관이 지구를 구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병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동양적 세계관을 지닌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이다. 그러한 결과로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찾아보기 쉽지 않고, 설혹 인간의 모습이 나타난다 해도 거대한 자연 앞에서 왜소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나타나며, 겸손한 모습을 지닌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늘 민가 서너 채이다. 그것도 전경에 클로즈업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나무와 숲, 또는 먹물 뒤 사이사이에 배치된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자연의 미물인 새들이 날고 있어 인간과 새가 하나의 등가(等價)임을 말해준다.
오히려 이병오의 작품에서 물고기, 닭, 나무, 매화 등 인간으로서는 등가를 같이 매길 수 없는 미물들이 클로즈업되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예를 들어 수련잎 몇 장으로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과 봄바람을 맞으며 생기 발양하게 걸어가고 있는 수탉과 병아리,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물방울을 튀기며 솟아오르는 물고기 등에서 강한 생명의 역동성을 느끼기에 충분하게 묘사되었다.
이처럼 이병오의 작품에서는 문인화의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문기(文氣)가 흐른다. 즉 선비정신을 추구해온 전통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문인화가 됐건 서양화가 됐건 그것을 직업으로 삼기 때문에 그 대가를 보상받지 않고는 작품생활을 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옛날 문인화를 삶의 여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직업으로 삶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면 물질적 욕망을 배제한 ‘청빈한 정신의 추구’가 문인화의 본질임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즉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사군자를 살펴보면, 풍상을 겪어낸 끝에 찬바람 속에서 잠자리 날개 같은 연약한 꽃잎을 피어올리는 매화의 기상, 매화처럼 눈 속에서 꽃대를 밀어 올려 온 골짜기를 그윽한 향기로 채워 정신을 맑게 하는 난, 그리고 서리에 세상 꽃들이 시들해질 때 서리를 맞으며 의연하게 피어있는 국화의 깊은 향기와 빛깔, 세상이 부귀의 공명을 탐하고 있을 때 삿된 욕망을 버리며 청빈의 모습으로 바람을 맞고 있는 곧고 의연한 죽의 모습에서 군자가 취할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선비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이병오의 수묵화는 1980년대 이후, 수묵이 색채와 결합하고 먹보다 채색의 기능이 우위에 서는 시대, 즉 수묵의 고유 영역이 무너진 오늘날 수묵회화의 기능은 물론 무너진 정신을 오늘의 상황에 적응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하겠다.
5.
이제 우리나라의 문인화는 보다 적극적으로 전통의 틀 안에서 일탈을 해야 한다. 안주해서는 안된다. 본래 문인화는 유교적 이념의 구현을 위해 발달한 회화의 영역이다. 사대부들의 여적으로 한가하게 시나 짓고 그림을 그리던 문화의 한 일면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인화가 추구했던 정신적 세계관이 매우 숭엄하고 고상한 것이었음 또한 사실이다. 오늘날 후기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전통적 문인화는 분명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이고 보면 현대에 알맞은 문인화로의 변신은 당연한 일이다. 필자가 이 글의 서두에 모든 예술은 불화(不和)에서 화해(和解)로의 이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21세기에 알맞은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기 때문에 문인화도 전통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성을 전면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선 우리의 전통의 미덕인 정신적 세계를 이어받아야 할 줄로 안다. 산・나무・바위・사군자는 물론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고매한 품격과 절개・지조・강인함 등을 비롯해 인간이 배워야 할 가치를 시와 회화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 문인화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대에 맞게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형상화시켜야 함은 현대예술의 상식이 되어버린 새로움의 옷을 입어야 할 줄로 안다.
그렇다면 이병오의 작품에서는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이병오는 작품을 통해 문인화의 미덕을 매우 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문인화의 전통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에서는 수직으로 내리긋는 매우 광폭한 붓질을 통해 먹빛과 터치 속 보이지 않는 공간에 추위, 또는 시련의 공간을 생성해 놓고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맑은 향기를 피워낼 줄 아는 난의 기개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꽃 피는 봄이 오면과 봄바람을 맞으며에서는 수탉과 병아리의 천진성을 화면 가득히 담아내고 있다. 또한 푸른 잎에 바람 일어에서는 연방죽에 피어있는 연꽃을 통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연꽃의 품위를 보여줌으로 해서 세사(世事)에 찌든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전언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각박하고 혼돈의 요지경을 보여주는 현대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들을 자연을 통해 그의 조형미는 매우 정직하게 일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병오는 전통적인 문인화의 정신세계에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것들이 이병오 문인화의 내용에 관한 것이라면 형식적인 면에서도 문인화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기(茶器) 앞에 정숙하게 앉아있는 여인의 맵시는 찻향이 흐르는 고요 속에 매우 고결한 인간의 품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 전체적인 구도나 화면 한 구석에 매화꽃 가지를 드리운 것 또한 전통문인화 양식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가을노래를 비롯한 비언표적 모호성을 드러낸 일련의 작품에서는 화면 한쪽을 검은, 그러나 아주 맑고 투명한 먹물을 대담하게 칠한 것에서는 이병오 문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대부분 왼쪽이나 오른쪽 화면에 그것도 수직으로 내리그은 검은 먹물들이 주는 심상(心象)은 그림을 보는 이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사색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이병오는 전통수묵화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집을 지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분방하게 죽죽 그어내린 매화꽃의 향기는 수행이 잘된 군자처럼 우아한 선비의 기상을 말없이 느끼게 해준다. 그가 이러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타락하고 퇴폐한 현대인에게 말없이 충고를 하는 것이리라. 아니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선비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그림의 의미가 아무리 좋다해도 문인화는 분명 시와 그림이 만나는 지점이다. 즉 언어와 이미지의 어울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보다 내밀한 내용과 형식의 실험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아직은 멈칫멈칫 더디게 발전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미래를 지고 가야 하는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영문도 모르고 시간의 노예가 되어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는 디지탈시대에 이병오는 느리게 가라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 사색하며 인간다움을 생각하며 천천히 가라고 자꾸 발목을 잡는 것이 분명하다.
강경호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
2009년 11월 10일 인쇄
2009년 11월 14일 발행
지은이 | 강 경 호
펴낸이 | 강 경 호
인쇄・기획 | 도서출판 시와사람
등 록 | 1994년 6월 10일 제 05-01-0155호
주 소 | 광주시 동구 금동 8-1번지
전 화 | (062)224-5319, 227-5319
팩 스 | (062)225-5319
E-mail | jcapoet@hanmail.net
ISBN 978-89-5665-262-7 03810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