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피리 소리는 하늘이 내는 소리”
경기도 무형문화재 오세철 명인의 풀피리 인생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팔호마을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이곳을 제 고향처럼 느끼게 된다. 이제는 시골 어디서도 듣기 힘든 구성지듯 청아한 풀피리 소리를 이곳에서는 늘 들을 수 있다. 호미를 들면 평범한 농부요, 풀피리를 불면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8호 예능보유자인 풀피리 명인 오세철(51)씨.
“꾀꼴 꾀꼴, 소쩍 소쩍, 후르르르 후르르르~.” 새벽 4시, 청아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상쾌하게 들려오는 새소리는 바로 오세철 명인이 하루를 여는 소리다. 올해로 37년째. 매일 새벽 전통음악부터 민요, 동요, 새소리까지 한바탕 연습을 할 때면 날아가던 새들도 모여든다.
글.사진 김혜균
“하늘이 낸 사람만이 경지에 이른다” “풀피리는 인간이 자연과 함께한 이래 가장 먼저 생긴 악기입니다.” 왜 아니 그럴까. 그 어떤 악기도 산에 들에 지천인 풀잎보다 먼저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명인에게는 모든 풀잎이 그냥 악기가 된다. 논에서 뽑은 피, 논두렁을 거닐다 본 땅콩잎, 개복숭아잎, 밭에 난 고구마 잎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오세철 명인이 처음 풀피리와 인연을 갖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1971년 여름 방학 무렵 경기도 가평에 있는 친척집에 가던 길에 우연히 풀피리 소리를 듣게 된 것. 홀린 듯 소리를 따라간 그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싸리문 앞에서 눈만 빼꼼히 들고 바라보았다. “아버지 고향이 가평이었는데, 평소 아버지께서 ‘내 고향 가평에 가면 풀잎 한 장으로 피리와 대금소리를 넘나드는 유명한 분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어떻게 불기에 저리도 감탄하실까 궁금했던 차에 직접 듣게 된 거예요.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툇마루에서 아카시아 잎으로 창부타령을 부셨는데 얼마나 잘 부시는지 넋을 놓고 들었지요.” 열네 살의 오세철은 이미 우리 소리에 관심이 많았던 터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철원은 한국전쟁 때 북쪽에서 피난을 왔다가 휴전선으로 인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사람들이 정착한 곳으로 실향민들의 애환이 담긴 서도소리(황해도, 평안도 등에서 불리던 민요)로도 유명했다.
부전자전, 아버지를 닮아 우리 소리를 곧잘 따라하던 그는 그날 들은 풀피리 소리가 너무 좋아 잠을 뒤척였다. 그 후 소년 오세철은 틈만 나면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도 가평까지 50리 길을 자전거로 내달렸다. 6~7번에 걸친 간곡한 부탁 끝에 할아버지는 비로소 빡빡머리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니, 그의 스승 전금산(田今山) 선생이다.
“스승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풀피리가 좋긴 한데 아무나 배우기가 힘든 거다. 이건 하늘이 내는 소리다. 하늘이 낸 사람이라야 제대로 소리를 내고 경지에 이른다고요. 그래도 얼마나 좋았던지 자나 깨나 풀피리 연습이었죠.”
일년 동안 매일 부친의 묘소에서 풀피리 연주 정식으로 제자가 되고부터는 스승을 따라다니며 산에서 들에서 시냇가에서 풀피리를 배웠다.
풀피리 잡는 요령부터, 경기민요 6~7곡과 메나리 가락, 풀피리 전문 기법인 서치기, 혀치기, 목더름 등을 전수받았던 것. 그렇게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전금산 선생이 향년 81세로 타계하자, 소년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큰 슬픔에 며칠간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도 연습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다. 스승을 잃은 슬픔을 달래려는 듯 소년 오세철은 뒷동산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 밑에 앉아 아카시아 잎으로 풀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잎이 찢어지면 다시 하나 따고, 입김에 말라붙으면 또 하나 따고…. 나뭇잎들은 어느새 무릎을 덮었다.
독초인지도 모르고 연습하다 정신을 잃기도 여러 번. 옻나무 잎을 불다가 목구멍까지 붓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맹독성 풀인 박새풀을 물고 불다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래도 풀피리가 좋았어요. 어떤 소리도 다 낼 수 있으니까요. 풀피리 불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길이었다.
소리를 좋아하는 아버지였지만 취미라면 모를까 당신의 아들이 아예 소리쟁이의 길로 들어서는 건 반대하셨던 것.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한 아들을 서둘러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뜻대로 부지런한 농부이자 성실한 가장으로서 살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풀피리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틈만 나면 풀잎을 만지작거리며 한숨 쉬는 남편을 보다 못한 아내 전대순씨는 “하고 싶은 걸 못하면 한이 된다”며 남편 손을 이끌고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이은관 선생을 찾아간다. 오세철 명인이 어릴 때 불렀던 소리 한 자락을 뽑아 올리자, 선생은 그 자리에서 전수자로 받아들인다.
명인의 타고난 끼를 한눈에 알아본 것.
전국에 제자 백여 명, 공연 횟수 700여 회 “풀피리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선 전문적인 연습이 필요했죠. 당시 이은관 선생님께 소리를 배우면서 틈틈이 연습실에서 국악 자료를 봤는데, 그때 처음 풀피리가 우리나라 궁중음악서인 <악학궤범>에 초적(草笛)이라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풀피리는 단순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게 아니라 궁중의 정식 음악이며 악기였던 것이다. 그것이 1999년의 일. 그 후 1년 반 만에 배뱅이굿 완창이 가능해진 오세철 명인은 풀피리 연주자이자 소리꾼으로서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게 된다.
기필코 소리꾼이 된 아들 걱정에 노심초사하던 아버지. 안타깝게도 부친은 명인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8호 예능보유자로 선정(2002년 11월)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만다. 명인은 그 후 일년 동안 매일같이 아버지 산소에 가서 풀피리 소리를 들려드렸다. 그는 “풀피리 소리가 아름다운 건 자연과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풀피리 전승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에게 풀피리를 보급하고 싶다는 명인은 지금도 무료로 가르치고 있는 제자가 전국 100여 명에 이른다. 그중 가장 끼를 보이고 있는 제자는 바로 막내딸 연경(18)양이다. “풀피리를 불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풀피리를 배운 연경양은 아빠의 대를 이어 세계적인 풀피리 연주가가 되겠다고 한다.
오세철 명인도 누구보다 풀피리를 좋아하고 누구보다 빨리 배우는 딸이 기특하고 흐뭇할 뿐이다. “풀피리 하면 어딘가 모르게 고향을 떠올리게 되는 거 같아요.
너른 벌판이 있고 시냇물이 흐르는 농촌 말입니다. 이렇게 정감 있는 소리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면 더한 행복이 없겠죠.” 고향의 소리를 담은 오세철 부녀의 풀피리 소리가 온 산천을 울리며 퍼져 나간다.
풀피리, <악학궤범>에 기록된 궁중악기
<악학궤범>의 기록에 따르면 ‘나무껍질이나 나뭇잎을 말아서 입에 물고 불기도 하며, 나뭇잎을 접어서 입술에 대고 불기도 한다’고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과 중종 때 궁중에 풀피리 악사를 두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선발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1744년 영조 20년 10월 4일 광명전(光明殿)에서 있었던 대왕대비와 중궁전의 진연과 10월 7일 숭정전(崇政殿)에서 있었던 대전 진연의 대왕대비전 내연에서 주악을 담당하였던 관현맹인 13인의 이름과 담당 악기가 밝혀져 있는데, 그중에 초적(草笛) 1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강상문(姜尙文)이라는 실명까지 기록되어 있다.
풀잎이나 나뭇잎을 이용한 풀피리는 잎의 두께나 강도, 탄력성, 섬유질의 함량에 따라 소리의 음역이 다양하다. 종류에 따라 1~3옥타브까지 가능하고 국악, 가요, 동요 등 다양한 연주가 가능하다. 남도의 육자배기 토리, 경기 굿거리 토리, 서도수심가 토리, 동부의 메나리 토리 등을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으며, 모든 국악기나 서양악기와 합주도 잘 어울린다. 풀피리는 잎이 넓적하고 옆면이 매끄러우며 섬유질이 많고 탄력성이 있으면서 타원형 모양이 좋다.
초보자가 가장 불기 쉬운 잎은 아카시아잎이며, 그 외에 복숭아나뭇잎, 목련꽃잎, 산수유 나뭇잎, 비비추잎, 옥잠화잎, 귤나무잎, 연잎 등도 좋은 재료다. 하지만 활엽수 중에서도 옆면이 톱니처럼 울퉁불퉁한 잎은 소리는 낼 수 있으나 불안정하며, 옆면이 매끄럽다 할지라도 호박잎처럼 탄력이 없으면 풀피리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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