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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세계관 (worldview)
5.1. 세계관 개념의 발달 역사
- 1920년대 -- Boas, Kroeber, Linton 등과 같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들은 1920년대에 문화를 여러 특성들의 집합으로 보면서 이 특성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당시 영국의 Malinowski와 Radcliffe-Brown 등은 문화를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보고자 하였다.
* 미국 전통 -- 문화는 여러 특질들이 모여서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고 봄
* 영국 전통 -- 사회 인류학 (혹은 사회학) -- 사회의 기능을 전체적으로 보고자 함
** 세계관이란 말은 독일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Weltanschauung)
- 1930년대 --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의 테마 혹은 주제에 대하여 이해하기 시작.
Ruth Benedict는 Patterns of Culture에서 개개 문화는 가장 핵심이 되는 양식 (pattern) 혹은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Morris Opler는 문화적 테마라는 개념을 도입. 그에 의하면 모든 문화는 열 개 안팎의 문화적 테마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 테마는 내부인들이 믿는 그들의 신념이며 믿음들이다. Opler의 문화적 테마는 Redfield, Kearney, Kraft가 말하는 worldview의 개념이다.
- 1940년대 -- Hoebel은 기본적 전제 (basic assumption)라는 개념을 사용.
Robert Redfield는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문화 요소들 (cultural universals)의 개념을 개발함. 즉, 자신, 타자, 공간과 시간, 원인, 분류, 가치 등. Redfield에 의하여 세계관 (worldview)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53).
- 1950년대 -- 언어학자들에 의하여 문화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시도. Noam Chomsky는 언어의 표면구조와 심층구조를 나누어 언어의 세계를 분석하였고, Kenneth Pike는 음운론 (Phonemic)을 음성학 (Phonetic)에 더하여 표면적 음성과 내면적 의미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의하여 etic 연구와 emic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용어는 오늘날 문화인류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Etic | Emic |
외부에서 들여다 봄 | 내부에서 보는 견해임 |
절대적 기준치를 사용함 | 상대적인 기준치를 가짐 |
교차 문화적 | 어느 특정한 문화를 연구 |
비교하기 위함 | 특수성을 찾음 |
- 1960년대 -- Edward Hall 은 문화의 수준(level)들에 대한 개념을 개발함. 즉, Technical (학교에서 등 외견적 습득), Informal (스타일, 모방을 통하여 습득, 감정이 부착됨), Formal (문화의 핵심, 가치가 자리 잡음, 가장 깊은 감정이 자리함, 믿음과 전제가 위치함)의 셋으로 구분하였다. 즉, 문화는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심층구조에 감정과 신념들이 자리잡고 있다고 함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세계관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Spradley는 언어의 의미론을 문화 연구에 도입, 문화의 내면적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연구 대상인 문화권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분류법을 통하여 외부인들에게는 숨겨져 있는 문화적 의미들을 찾음으로써 그 문화의 테마들을 알고자 하였다. 그가 말하는 이 테마 역시 worldview의 개념을 가리킨다. 그의현장 조사법은 민속지(民俗誌, ethnography) 작성 방법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1970년대 -- Clifford Geertz는 문화의 중심은 인간의 존재 의미에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인 의미의 체계를 명시하여 주는 것으로 보았고, 종교와 문화의 저변에 세계관 전제가 작용한다고 보았다.
- 1980년대 -- Kearney (1984)는 그의 책 World View에서 Redfield의 cultural universals를 더 발전시켰다. 그리고 Opler의 문화적 테마를 더욱 발전시켜서 문화의 가장 내부적인 구조로서 세계관을 보았고 세계관에 의하여 형성되는 문화적 테마를 worldview universals로써 정리하는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Opler와 Redfield와 Kearney의 영향을 받은 Charles Kraft는 그들의 세계관 이론을 기독교 선교에 적용하였다. 그는 문화의 가장 기저에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세계관은 모든 문화 영역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종교 현상도 이러한 가장 근본적인 세계관의 표현 중의 하나이다.
5.2. 세계관 이해
5.2.1. 문화와 세계관
사람이 살아나가는 삶의 총체를 가리켜서 인류학(anthropology)에서는 “문화”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문화는 사람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사회에 유리하게 이용함으로써 험한 세상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과 그 결과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집단을 이루고 사는 모든 인간 사회는 문화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문화가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는 또한 그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정신 및 물질세계를 다 포함한다. 문화를 장기 게임에 비교해보자. 장기를 두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장기라고 하는 게임의 내용들, 그리고 이 게임에 부수되는 모든 것들을 문화의 내용들이라고 말한다면, 이 장기 게임의 규칙은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규칙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키며 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삶의 규칙은 문화권들마다 다르고 또 세분하면 사회마다 다른데, 그 이유는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민족 혹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같은 말을 사용하고 같은 관습 속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며 살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정신적인 힘과 그 구조를 가리켜 문화인류학에서는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이 세계관의 내용들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이해란 세계관의 이해와 다름 아닌 것이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요, 한 문화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의 내용과 구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또 서로 다른 문화권의 세계관을 어떻게 발견하고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들이 본 장에서 계속 다루고자 하는 주요 관심이다. 세계관의 개념이 비록 전문적이고 기술적이기는 하지만, 이 개념에 익숙해지게 되면 다양한 문화권에 노출되어 살며 사역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인간의 다름과 다양함이 문화적 세계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는 데에 큰 힘을 얻은 것이다.
세계관의 이해를 이처럼 추구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서이다. 참 인간애(人間愛 the loving of people)는 진정한 인간이해(人間理解 the understanding of people)에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의 절정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닿아 있음을 잘 증명해 주는 사건이다. 바로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이러한 삶이 기독교 선교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사랑과 선교의 실천을 위하여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5.2.2. 세계관의 정의
Kraft에 의하면 세계관이란 문화적으로 구조(構造)된 전제(前提)들과 가치들과 충성 등을 가리킨다. 이 세계관에 따라서 부족 혹은 민족 혹은 사회마다 실재를 인식하는 방식과 내용이 다르며 또 그 인식된 실재들에 대한 반응들이 다르다. 전제들이라 함은 문화화(enculturation)과정을 통하여 한 아이가 자신이 속한 문화권 속에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면서 형성된 지식들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지식들은 믿음 혹은 신념들을 내포하며 감정적인 지식들도 포함한다. 또한 이 지식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가치들이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존재이며 생각할 뿐만 아니라 삶 가운데서 가치를 추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각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전제된 가치를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또한 자신들의 가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위하여 자신들을 헌신한다. 이것을 충성 혹은 헌신 (allegiance or commitment)라고 Kraft는 부르는데, 바로 이 부분까지가 바뀌어야 회심(conversion)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Kraft와 함께 기독교 선교에 크게 공헌한 학자는 Paul Hiebert이다. 그는 문화란 습득을 통하여 형성된 행동양식과 생각들과 그 사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산물들의 통합된 체계라고 정의한다. 그는 문화의 개념을 세 가지의 차원으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지적차원, 감성적 차원, 그리고 가치적 차원으로 구분한다. 그도 역시 세계관은 모든 문화 현상의 기저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본다. 한 문화권 내에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들과 그에 따른 행동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러한 생각과 행동들의 저변에서 그러한 것들을 창출하는, 무의식적으로 사고되는, 현실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 혹은 전제들을 세계관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iebert의 Anthropological Insigjhts for Missionaries의 2장을 참조 바람.)
그러면 다음 항목에서는 이러한 인간사고 구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5.2.3. 세계관의 형성
세계관이란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실재(reality)에 대한 인식(perception)을 가리킨다. 이것은 철학이나 역사학에서 이야기하는, 지성인들이 고민하면서 얻어낸 그러한 종류의 철학적 세계관과 다른 개념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구태여 증명하고자 하지 않고, 늘 믿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이해들을 가리킨다.
Piaget나 그의 영향을 받고 세계관의 개념을 발전시킨 Kearney와 같은 학자들은 세계관을 형성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환경을 꼽는다. 이에 대하여 나 자신도 실제 사역과 현장 연구 등을 통하여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은 환경이라고 하는 실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변 환경을 통하여 자기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면서 형성된 믿음의 전제들(assumptions)과 가치들(values)과 감정들(emotions)을 포함하는 사고의 구조를 세계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환경은 특별히 물리적인 환경과 사회적 환경과 정신적(혹은 영적) 환경의 셋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리적 환경은 그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환경, 즉 지형이나 기후 및 동식물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환경은 어느 한 집단이 계속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른 집단들을 가리킨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 역시 사회적 환경에 포함된다. 따라서 정치적 내지 외교적 기술을 필요로 하는 환경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환경에 대하여서 일반 문화인류학자들은 거의 동의한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의 정신적 혹은 영적 환경은 많은 경우에 무시되거나 간과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진화론에 입각하거나 실증주의와 이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정신적 내지 영적 세계는 사람들의 환경이기보다는 하나의 내면의 현상 혹은 자연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서구 세계에 속한 대다수의 사회는 영적 세계와 여기에 속한 영적인 존재들을 자신들의 주변 환경으로 믿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역하고 또 현장 리서치를 하였던 아프리카 동해안의 스와힐리(Swahili) 무슬림들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진(jinn)이라고 하는 영들과 또 아프리카 전통인 미지무(mizimu) 영들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며 이 영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온갖 종교 의식들을 만들어낸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이처럼 영들을 다루는 종교 의식들을 발달시킨 것은 이들의 세계관 때문이다. 이들이 역사 속에서 계속 경험하여 온 영적 환경에 대한 인식이 이들의 세계관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세계관은 계속해서 자손들에게 전수된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은 물리적인 환경에 대한 이해, 사람들이라고 하는 환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우주 및 영적 환경에 대한 이해들로 구성되어 있다. Redfield나 Kearney 등의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보편적인 인간의 인식 범주들이다.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환경들을 어느 한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들과의 만남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게 되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문화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그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든 문화의 부산물들과 제도 및 관습들은, 주위 환경들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그 문화권 사람들의 세계관의 반영이기 때문에, 문화적 형식들을 깊이 연구하게 되면 그들의 세계관이 보이게 된다.
문화충격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세계관의 충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문화충격을 훨씬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만한 인간관계의 기술도 익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더 진실하게 사랑하기를 원한다.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은 진실한 인간 이해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러한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기 위하여서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계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그럼 다음 항목에서는 한 개인의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하여, 즉 문화화(文化化) 과정이라고 하는 enculturation에 대하여, 그리고 그 결과 형성된 세계관의 구조와 기능들에 대하여 예를 들면서 좀더 자세히 다루어보고자 한다.
5.2.4. “문화화(enculturation)"
어느 공동체 혹은 집단이든지 문화는 표층구조와 심층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문화적 사고와 행동들과 부산물들을 문화의 표층구조라고 한다면, 이러한 문화적 현상의 저변에서 사람들의 습관적인 사고와 행동들을 창출해주고 지배하는 잠재의식적인 믿음들(assumptions or beliefs)과 가치들(values)과 충성들(allegiances), 그리고 이에 부수되는 감정들(emotions)의 구조를 세계관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구조를 가리킨다. 이 세계관은 어느 한 사회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어린 시절에 형성되게 마련인데, 어린 시절에 내면의 사고의 구조와 외적인 행동의 양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가리켜서 “문화화(文化化, enculturation)"라고 한다.
(1) 문화화(enculturation)의 과정과 내용
Piaget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perception)은 어린 시절에 그 기본적인 구조가 형성된다고 한다. 인간의 세계 인식이 곧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천적인 지식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고의 구조와 세계 인식의 카테고리(범주)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그 외의 모든 세계에 대한 이해와 그 내용들은 후천적으로 습득되고 발전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인식하는 첫 번째 것은 “타자(Other)”를 통한 “자기(Self)” 인식이다. 일반적으로 아기는 태어나서 젖을 주는 어머니를 가장 편안하게 인식하면서 자기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자기를 인식하면서 아기는 “관계(Relationship)”라고 하는 개념을 자연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그리고 아기는 크면서 사회적 환경(사람들)과 자연적 환경, 그리고 나아가서 우주적 (혹은 영적) 관계들을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어린아이가 홀로 맺어갈 수는 없다. 어린아이는 이제 지각이 자라면서 자기가 속한 사회의 선배(어른)들로부터 어떻게 이러한 주변 환경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가를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사회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과 우주적 환경들의 구성 요소들을 “분류(Categorization/ Classification)”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관계를 적절하게 맺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분류인 것이다. 어느 사회 혹은 집단이 환경들을 어떻게 분류하는가를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그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과 사고의 논리들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약 12-14세 정도까지 이러한 세계인식의 기초를 기존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배우게 된다. 어떻게 사고하는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여야 생존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배움으로써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세계관을 자기 것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관이 형성되는 이 기간 혹은 과정을 문화화(enculturation)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의 내용들을 사람들은 대부분 의심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신의 문화적 사고의 틀(frame of reference, or cultural lens)을 형성하게 된다.
앞에서 약 12-14세라고 하였는데, 이 나이는 흔히 말하여서 사춘기에 접어드는 연령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여서 어른이 되기 위한 신체적인 변화를 경험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의 의존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도기 기간(puberty)의 시작을 대충 13세 정도로 본다.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아직도 중요하게 여기는 통과의식(passage rites)들 가운데 하나인 “성인식”으로 불리는 initiation ceremony들도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바로 이 나이 때에 행하여진다. 다시 말하여서 enculturation의 졸업식쯤 된다고나 할까. 신체적으로 성인이 되어감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그 사회의 정상적인 정식 구성원으로서 모든 문화적인 지식을 갖추고 성인들 틈에서 준성인(semi-adult, adolescence)으로서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갓난아기에서부터 바로 이 성인식에 이르는 나이까지가 문화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며, 이 때에 사람들의 세계관의 골격과 내용들의 거의 대부분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화화 과정의 다름이 곧 세계관의 다름과 연결된다. 흔히들 말하는 성장과정이 달라서 갈등이 있다고 하는 말들은 세계관이 다르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2) 예: 아프리카 세계관과 미국의 세계관의 비교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세계관과 미국의 대도시에서 성장한 미국 백인들의 세계관을 비교하여 보자.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세계와 우주는 조물주가 창조하였고 세계 혹은 우주는 하나이며 사람들은 그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자연” 혹은 “초자연”이라는 단어의 분류는 무의미하다. 그들의 우주관은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일원론이다. 물론 존재물들에 대한 여러 분류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이 분류는 대립적인 분류이기보다는 조화로운 분류이다. 아프리카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조화 및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특별히 자연에는 온갖 영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노출되어 자기가 믿는 바들이 도전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믿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다.
자, 이제 미국의 대도시의 백인들을 보자. 이들은 유신론자들이건 무신론자들이건 간에 세속적인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세계와 우주는 자신이 개척하고 정복하는 만큼 차지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개척지라고 배운다. 따라서 이들은 성취는 좋은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웠고 이를 위하여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우주는 조화로운 것이기보다는 기계적이라고 믿는다. 우주에는 어떤 과학적인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이 법칙을 알아내면 우주와 세계를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마음껏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고 믿는다. 영들과 같은 존재는 과학과 이성에 위배되는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과 우주는 인간의 이성의 지배 대상이 된다.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신 성경의 문화위임명령을 특별히 강조한다. 미국 백인들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를 비롯한 미국 사회의 교육제도를 통하여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들과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들의 생각에 도전을 받기 전까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믿든지 아니면 그렇게 믿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 아프리카 사람들의 전통적인 가치관은 집단주의이다. 함께 움직이고 함께 생각하는 것이 조화이며 선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자연과의 조화라고 하는 세계관과 의미적으로 연결이 되며, 따라서 조화를 중요시하는 이러한 관점은 대가족제도를 핵가족제도보다 우위에 둔다. 이에 반하여, 미국의 백인들은 개인의 차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다른 모든 가치들 위에 개인을 두게 되었고 이것은 개인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믿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인주의는 전체의 조화를 깨는 악으로 간주된다.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나중에 더 다루기로 하고 이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만나게 될 때에 일어나는 현상을 잠시 보기로 하자.
(3) 문화충격과 자민족중심주의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관의 배경에서 성장해온 아프리카의 흑인과 미국의 백인이 만났을 때 서로 불편해지는 현상을 가리켜서 문화충격(culture shock or culture stress)이라고 한다. 선교사들이나 해외 유학생 혹은 이민자들이 전혀 다른 문화권으로 이사해 갔을 때에 힘든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문화충격의 결과이다. 충격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이 강하다면 “문화충돌에서 오는 스트레스”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문화충격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극복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삶의 그 다음 단계가 결정된다. 그 동안 자신의 enculturation의 결과로 형성된 세계관의 틀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을 목격하거나 직접 경험하면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자칫 잘못하면 현지의 문화를 정죄하기가 쉽다. 문화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관의 틀로써 다른 문화권의 내용들을 판단하는 경향 혹은 자세를 가리켜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러한 자민족중심주의를 다 갖고 있다. 이를 극복한다 해도 백퍼센트 다 없앨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자신들 속에 이러한 경향이 다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 즉 어느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의 한 부분이다. 특별히 자신을 깊이 이해할 때에 비로소,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정 가능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화화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우리의 자아상과 세계에 대한 인식들이 과연 얼마만큼 성경적인가도 한번 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계관의 구조와 그 기능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5.2.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본 항목에서는 이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어떻게 역학적으로 기능을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용어들과 개념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본적인 용어들을 독자들이 잘 익혀 두기를 바란다.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구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인 정신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철학적이나 역사학적 세계관과 달리,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사회든지 나름대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지식들은 구태여 증명할 필요 없이 당연히 믿고 있는 지식들이며, 모든 종류의 사회적 삶은 이러한 지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믿음/전제(前提)들(beliefs/assumptions), 가치들(values), 그리고 충성/헌신 (allegiance /commitment) 등이 세계관의 주요한 세 가지 내용이 되는데 이 범주들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이 구분은 Fuller의 Kraft 교수의 것인데 이 세 구분은 인간의 지, 정, 의의 인격부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제들이 주로 문화적인 지식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가치들의 부분은 사람의 감정 혹은 “정서”(ethos)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성 내지 헌신은 인간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세계관의 요소들은 따로 독립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간의 한 인격 속에서 서로 섞여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좀더 설명해보자.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문화화”된 대로) 믿는다. 이 믿음들을 “전제 (assumption)"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전제들을 기초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에는 이성적인 앎과 감성적인 느낌이 함께 포함된다.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이 얻게 되는 지식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은 바람직하고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배우게 되는데, 바람직한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갖게 되는 것까지도 배움(즉, 문화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이해는 그 인식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화적 지식은 그 사회의 문화적 가치 체계를 설정해주며 이 가치 기준들에 따라서 사람들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 기준에 근거하여 그 나름대로 선과 악을 분류하고 대부분 선이라고 믿는 바들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신들이 믿는 중요한 가치들 혹은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고자 의지를 동원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인간의 사고 역시 세계관 전제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Kraft 교수는 “충성” 혹은 “헌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충성의 대상이 무엇인지 역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며, 그 대상들을 사람들은 은연중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인간의 내면에서 함께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그 동안 분리하여 생각해 온 경향이 크다. 특별히 지성과 감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지난 약 이백년 동안 서구 사회에 편만하였던 서구의 세계관의 영향에 기인한다. 18세기말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한창 꽃을 피우고 20세기의 서구 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실증주의 내지 과학지상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우상화시켜 버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시키는 듯한 경향을 보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감성과 직관의 부분들을 소홀히 하고 인간의 이성을 현실 검증의 유일한 도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서구, 특별히 유럽의 여러 교회 전통들은 성경을 인간의 이성이라는 권위 아래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19-20세기 서구인들의 생각을 지배하였던 “이성주의”의 세계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은근히 감정을 무시하거나 감성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정의 영역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지식의 동반자이다. 이성으로 판단한 지식 곁에는 그 지식에 대한 느낌이, 자신이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함께 있는 것을 우리는 눈치 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의 백인 John이 어떤 개를 바라볼 때 그는 이 짐승이 개라는 사실만을 인식하지 않는다. John은 개를 바라보면서 그 동물이 개라는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개에 대한 감정도 갖게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개라는 동물은 인간과 매우 가까우며 인간이 훈련시킬 수 있는 애완용 동물이라고 배워 왔고 그렇게 개들을 경험했다. 이러한 개에 대한 지식과 함께 그는 또한 개들은 인간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enculturation“ 과정을 지나왔기 때문에 어떤 개들을 보든지 더럽게 느끼기 보다는 일종의 애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무슬림들이나 아프리카의 유목인들과 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어 보라. 개는 그리 애정을 줄 만한 동물이 아니다. 개는 매우 천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욕할 때에 개를 들먹인다. 이것은 개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John이라는 사람의 문화권과 무슬림들의 문화권의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름으로 해서 그 사물에 대한 감정도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주변 환경(자연 환경, 사회적 환경, 영적 환경)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갖는가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 역시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을 통하여 또 후대에게 전수된다. 즉, 어떻게 감정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까지도 대부분 후천적으로/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며, 이것은 습관이 되어 자신의 감정의 구조를 형성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각 문화권의 유머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고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들과 같이 어려서부터 성장하지(문화화되지) 않았다면, 미국 백인들이 박장대소하는 그들의 유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알지만, 느낌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한 공동체가--이 공동체는 거의 항상 혈연 공동체가 기본인데-- 공유하는 지식들과 느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바람직하고 좋다고 믿어지는 것들,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별히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나 일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얻고자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기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지식들과 가치들, 그리고 헌신의 대상들을 늘 전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제들의 내용에 도전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거나 불편해 하며, 그 정도가 심하게 되면 화를 내게 된다. 만일 외부인이 들어와서 그 동안 전통적으로 믿어온 전제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들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 외부인은 그 지역에서 추방당하거나 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거나 도전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에 외부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문화관 중심으로 행하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좀더 다른 차원이므로 “세계관의 변화”를 다룰 때에 자세히 언급하려 한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 서구 세계와의 충돌은 전혀 다른 세계관들의 충돌이며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 인간관계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의로운” 입장을 주입시키려는 행위는 평화를 가져오기가 매우 어렵다. 오늘날 일어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테러리스트들(사실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의 싸움은 그 동안 누적된 세계관의 충돌이다. 부록인 "강의안 보충자료 V." 에는 이러한 세계관의 충돌의 한 예로서 이슬람의 보편적 세계관과 기독교의 일반적인 세계관을--이 부분은 순전히 문화인류학적이기보다는 약간은 교의적인 부분이 함께 동반되겠지만--비교해 놓았다. 독자들은 참조하기 바란다.
5.3. 복음전도에 있어서 세계관 연구의 필요성
한 민족 혹은 부족의 세계관은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assumptions)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서 어느 한 민족/부족이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형상화하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해석은 세계관 전제(worldview assumption)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서는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잘못 해석되고 있어도 그것을 복음전도자는 감지할 길이 없는 것이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진정한 회심이 세계관의 변화에 있다면 복음전도자는 듣는이들의 세계관의 특질들을 잘 파악하여 어떤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할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종교의 개종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관의 변화의 문제이다. 즉, 근본적으로 생각이 바뀌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믿어온 믿음의 전제들과 가치관에 충격이 옴으로써 paradigm의 변화(shift)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그의 세계관이 성경적 복음적으로 바뀐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세계관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변화는 전체적인 변화라기보다는 부분적이라는 점이다. 즉, 사람들의 세계관은 환경의 변화에 의하여 바뀌게 되는데, 사람의 세계관 전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전통적인 세계관을 고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외부의 충격이나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개인이나 그 개인이 속하여 있는 사회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날 때에, 세계관은 그 전체가 전면적으로 교환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 않고, 실질적으로는 부분적인 변화와 변형이 사고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루도록 한다.
5.4. 세계관의 특질들
5.4.1. 세계관은 어린 시절부터 그 사회의 어른들로부터 배워지는 것이므로 사실 또는 진리로 받아들여지므로 그것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따를 뿐이다.
5.4.2. 문화의 하위 구조인 subsystem 역시 하나의 독립된 문화/사회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 각 subsystem을 지배하는 신념들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하위구조들의 기저에는 그 문화권을 구성하는 민족/부족 전체가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점은 앞의 4강에서 이미 언급하였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위구조들의 크기이다. 만일 종교라고 하는 하위구조가 다른 subsystem보다 크다면 그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세계 혹은 그들의 세계관은 종교 하위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초자연주의적 세계관이 될 수 있다. 아마도 아프리카의 많은 사회들 가운데서 이러한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구 사회는 경제나 기술이라고 하는 하위구조들이 종교나 다른 것에 비하여 크게 발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의 세계관은 주로 물질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는 군사 하위구조가 비대해져 있으므로 이들의 세계관 안에는 분명히 전쟁에 대한 개념이 많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어떠한지 연구해보자. 이렇게 어떤 한 하위구조가 특별히 발달됨으로써 그 사회 전체의 사고방식/세계관을 이끌고 가는 경우 이러한 세계관의 압도적인 경향을 “세계관의 방향 (worldview orientation) 혹은 세계관의 특성화 (worldview specialization)"라고 부른다.
5.4.3. 한 민족/부족의 세계관은 그 사람들이 밖의 실재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렌즈 혹은 모델이나 지도(地圖)를 제공하여 준다.
5.4.4.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가 어떠한 대상에 충성할 것인가를 안내하여 주며,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에 무의식적으로 충실하게 복종한다(allegiance). 이러한 충성의 내용들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그 민족/부족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세계관 속에 감추어져 있는 가치체계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5.4.5. 소위 문화 충격(culture shock 또는 cultural stress)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날 때 항상 일어나게 되는 세계관의 충돌이다.
5.5. 세계관의 기능들
세계관은 인간의 사고 구조를 가리킨다. 따라서 세계관 자체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사람이 사고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본 사고 구조는 enculturation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습관적”인 반복을 통한 “관습”에 의하여 형성되기 때문에 마치 세계관의 내용들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도하거나 이끄는 것처럼 관찰된다.
예를 들면, A라고 하는 사회에서 온 사람이 B 사회를 방문해보니 사람들이 A사회와 아주 다르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A 사회에서 온 사람은 B 사회에 오래 살면서 점점 B 사회의 사람처럼 변하고 그의 자녀들은 거의 B 사회의 자녀들과 같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B사회의 “문화의 힘”이 강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은 B사회에 들어간 A 사회 사람들이 B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B 사회의 문화의 내용들을 선택한 것이므로 B 사회의 문화가 힘이 있다기보다는 A 사회에서 온 그 사람들의 “선택”이 그러한 결과를 나았다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문화권에 젖어드는 것은 그 문화의 힘이라기보다는 그 문화의 내용들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관계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본인이 지각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바뀌기도 하지만, 이것도 그 심층구조를 들여다보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본인 자신이 조금씩 선택한 것들이 누적되어 그 문화권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반복을 거듭하여 형성된 사고방식 및 그 구조이다.
이러한 세계관이라고 하는 인간사고 구조를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고하는 “양식 (pattern)”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양식은 마치 사람들의 사고를 지도하고 안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세계관의 기능”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마치 세계관이라는 구조가 인격적인 실체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고 행위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사고가 어떤 정해진 틀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주어진 사고의 틀이 세계관이며 이 사고의 틀을 좇아 사람은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미 인용한 Kraft의 도표는 이러한 세계관 구조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사람의 행위하기 (personal behaving) | 문화적 구조화 (cultural structuring) | |
표면구조 | 행위하기 (behaving) 습관적 행위하기 드러난 행위하기 (--하기, 말하기, 감정표현하기) 숨겨진 행위하기 (생각하기, 느끼기) 창의적으로 행위하기 드러난 행위하기 (--하기, 말하기, 감정표현하기) 숨겨진 행위하기 (생각하기, 느끼기) | 행위의 양식들 (patterns of behavior) “—” 하기와 말하기와 감정표현하기 등을 양식화하는 드러난 관습들 생각하기와 느끼기 등을 양식화해주는 숨겨진 관습들 |
심층구조 | 전제하기 (assuming) (대부분 습관적임, 때때로 창의적이기도 함) 기본적 차원에서 전제하기 선택하기 느끼기 이유/논리를 생각하기 동기를 갖기 성향을 갖기 의미를 부여하기 해석하기 평가하기 부여된 의미들에 반응하기 설명하기 헌신/충성하기 관계하기 적응/차용하기 규칙화하기 심리적 강화를 추구하기 일관성 내지 통합을 추구하기 | 세계관 전제들의 양식들(patterns) 기본적 차원의 행위들을 기저의 전제 양식들 선택 [방식] 이유/논리 [방식] 동기 결정 [방식] 성향 [방향] 의미부여 양식들 해석 방식 평가 내지 가치부여 방식 의미에 반응하는 양식들 설명하는 방식 헌신/충성하는 방식 관계하는 방식 적응/차용하는 방식 규칙화하는 방식 심리적으로 강화하는 방식 통합하고 일관적으로 통일하는 방식 |
5.6. 세계관의 구조와 주제들(themes)
한 문화권의 세계관은 Opler에 의하면 6 가지 내지는 약 12 가지 정도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이 테마는 Spradley에 의하면 한 문화권 내에 존재하는 여러 문화범주(cultural domain)에 반복하여 나타난다. 예를 들면 스와힐리 무슬림들은 알라가 인간은 진(이슬람에서 말하는 영들)과 함께 살도록 했다고 믿는데, 이 믿음은 문화적 테마가 되어 모든 삶의 자리에 나타난다. 통과의식에서도 진을 의식하고, 병이 들어도 진을 원인자로 보며, 상업을 하여도 진을 의식하고, 예배를 드려도 진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진에 대한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인 내용이 아니라 스와힐리 무슬림들이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테마가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집단성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아시아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문화적 테마가 된다. 서구 사회의 개인주의적인 성향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집단주의는 삶의 여러 곳곳에서 발견된다. 상업을 해도, 정치를 해도, 교회를 가도, 놀이를 하여도 집단주의적 성향은 발견된다.
이러한 큰 주제로서의 문화적 테마 아래에는 이 테마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있다. 그것들을 하위테마/하위주제(sub-theme)라고 한다. 또 이 하위테마들은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에 예를 든 내용은 필자가 아프리카에서 현장 리서치를 통하여 발견한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구조 및 내용들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스와힐리 사람들의 세계관은 그 모든 내용들을 다 망라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한 공동체 혹은 민족 및 부족의 세계관의 구조와 그 내용들의 상호연관성을 잘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주목할 것은 세계관의 테마들은 믿음 내지는 신념의 전제들(assumptions)이므로 다분히 선포적인 뉘앙스를 갖는다는 점이다.
스와힐리 사람들의 세계관 구조
아프리카 동해안에 위치한 Swahili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은 다음 몇 가지의 주제들로 설명될 수 있다. Swahili 세계관은 Supernaturalism(초자연주의), 조상숭배, 과거지향주의, 집단주의, Baraka(축복, 혹은 능력의 개념), 사건 및 사람 중심주의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좀더 연구하면 몇 가지 범주가 더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 여섯 가지의 주제만 해도 엄청난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주제들을 깊이 분석하면 스와힐리 사람들의 믿음들과 가치들, 그리고 충성의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 설명된다고 보인다. 그럼, 각 주제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초자연주의 (Supernaturalism)
[스와힐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들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들은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고 믿는다. 이 진술은 스와힐리 사람들이 믿는 세계관의 대 주제가 된다. 이 믿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믿어지는 내용으로서 스와힐리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이 대 주제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하위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Sub-theme 1. 뭉구(하나님의 스와힐리 말)는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분은 엄격하고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히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내용이다. 전통적으로 스와힐리 사람들이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 어떠한 신관을 갖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아프리카 반투족의 신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의 영향으로 신에 대한 친근감은 훨씬 약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믿음은 다음 하위 주제들 즉, Paradigm들로써 설명된다.]
Paradigm 1. 하나님은 인간 마음의 모든 것들을 아시고 모든 행위들을 아신다.
Paradigm 2.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인간들이 따라야 하는 규칙을 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의 규율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을 화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Sub-paradigm 1. 하나님은 악행하는 자들을 벌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
Sub-paradigm 2. 하나님은 매우 엄격하셔서 사람들은 반드시 그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Paradigm 3.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다른 영들이나 조상들보다 덜 관여하신다.
Paradigm 4. 보통사람들이 하나님께 부탁을 할 일들이 있으면, 사람들은 이슬람 성인들이나 조상들에게 중보를 부탁해야 한다.
[이 첫 번째 Sub-theme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스와힐리 사람들의 신관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사 늘 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리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믿음은 신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인 것이다. 이것은 현지 스와힐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알 수 있었는데, 나는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른 스와힐리 사람들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동일한 내용과 느낌으로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 혹은 지식은 그 사회의 세계관의 주제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Sub-theme 2. 알라는 인간들로 하여금 진(jinn)과 함께 살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진들과 함께 사는 것은 신의 정한 이치이다.
Paradigm 1. 진은 이 세상의 어디에든지 있으며 특별히 인간에게 가까이 있다.
Sub-paradigm 1. 어떤 짐승들은 사람이 못 보는 진을 볼 수 있다.
Sub-paradigm 2. 진은 대부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뱀이나 고양이나 개나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Sub-paradigm 3. 진은 인간의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Sub-paradigm 4. 진은 여러 면에서 인간과 흡사하다. 진은 태어나며 성장하며 결혼도 하고 성관계도 갖고 자식도 낳고 늙어 죽기도 한다. 따라서 진도 인간처럼 가문과 뿌리가 있다.
Paradigm 2. 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좋은(유익한) 진”과 “나쁜(해로운) 진”이 있다.
Sub-paradigm 1. 진은 일반적으로 변덕이 심하고 예측이 불가하며 미성숙하고 이기적이고 인간에게 매우 해롭다.
Sub-paradigm 2. 사람들이 병을 앓는 것은 종종 진 때문에 그렇다.
Sub-paradigm 3. 심지어 좋다고 하는 진[특별히 “루하니”라고 알려져 있음] 역시 언제 해롭게 변할지 모른다.
Paradigm 3. 사람들은 사회를 평화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진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Sub-paradigm 1. 사람들은 진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들의 노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Sub-paradigm 2. 진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 진들을 달래주는 의식을 행하여야 한다.
Sub-paradigm 3. 평민들은 진을 통제하는 능력이 없으나 “waganga”는[스와힐리어로 치유자를 의미하며 곧 샤만들을 가리킴] 능력을 갖고 있다.
Paradigm 4. 진은 인간의 머리에 올라탈 수 있다.
[사람들을 (말하자면) 귀신들리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Paradigm 5. 오직 waganga들만이 진을 다룰 수 있다.
Sub-paradigm 1. waganga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Sub-paradigm 2. 진이 머리에 올라타면 waganga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Sub-paradigm 3. 진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진과의 의사소통이 대단히 중요하다.
Sub-paradigm 4.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진들의 이름들과 출신을 아는 것이 waganga들에게 필요한데, 이는 진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
Sub-theme 3. (그러나) 공동체의 집단적인 문제들은 mizimu가 그 원인이다.
[mizimu는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영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슬람의 영계와 아프리카 전통적인 영계가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세계관 안에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조상(ancestors)에 대한 믿음
Sub-theme 1. 조상들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이다.
Paradigm 1. 조상들은 육신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조상님들”의 영역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킨다.
Paradigm 2.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야 한다. 즉, 죽을 때의 나이와 살아 있었을 때의 명성 등이 그 기준이 된다.
Paradigm 3. 조상들은 그들이 산 자들에 의하여 기억되는 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Paradigm 4. 조상들은 산자들, 특별히 그 사회 공동체의 어른들의 꿈에 나타나 자신들이 살았던 사회와 계속 교류(communication)하기를 원한다.
Sub-theme 2. 조상의 영들은[mizimu라고 하기도 함] 존중되어야 하고 전통이 가르쳐주는 대로 온당하게 그들을 대우하여야 한다.
Paradigm 1. 모든 가문은 mizimu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mizimu는 각 가문의 중심으로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Paradigm 2. 조상들은 정기적으로 mizimuni에서 예를 받아야 한다.
[이때 mizimuni는 mizimu를 모신 곳을 가리킨다.]
Paradigm 3. 각 사회 공동체에서 치르게 되는 대부분의 행사는 조상들의 허락이 필요하다.
Paradigm 4. mizimu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제대로 대우만 해주면 그 공동체를 보호하여 준다.
Paradigm 5.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상들은 산 자들에게 격노하게 될 것이며 후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도록 사회에 어려움을 주든지 아니면 벌을 내리게 될 것이다.
(3) 과거지향주의 (Past-orientation)
오래된 것들은 좋다. 따라서 노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Sub-theme 1. 전통(kitamaduni)은 좋은 것이며 인생을 사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Paradigm 1. 과거에 조상들이 만들고 누렸던 것들은 좋은 것들이다.
Paradigm 2. 자신의 가문의 족보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Paradigm 3. 전통은 지켜져야 하며 외부의 것들에 의해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
Sub-paradigm 1. 비스와힐리 사회에서 들어온 것들은 전통적인 방식과 목적대로 사용될 수는 있다.
Sub-paradigm 2. 현대적인 물질들은 전통적인 가치기준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Sub-theme 2. 늙는 것은 좋은 것이며, 존경과 영예를 받아 마땅하다.
Paradigm 1. 노인들은 전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지역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그 전통들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 아는 사람들이므로 존경받아야만 한다.
Paradigm 2. 젊은 사람들은 노인들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Sub-paradigm 1. 지역 공동체는 그 사회의 어른 지도자들을 순종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과 논쟁할 수 없다.
Sub-paradigm 2. 젊은이들은 자리와 좋은 음식들을 먼저 어른들에게 양보하여야 한다.
Sub-paradigm 3. 젊은이들은 어른들에게 먼저 인사해야 하며 모든 경의를 다 보여야 한다.
Sub-paradigm 4. 젊은이들은 어른들 앞으로 걸어가면 안 된다.
Sub-paradigm 5. 어른들이 말씀하실 때에는 끼어들면 안 된다.
(4) 집단주의 (Groupism: 개인주의의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Sub-theme 1. 공동체는 개인보다 더 중요하다.
Paradigm 1. 개인은 그 개인이 속한 집단에 의하여 그 정체성이 규정된다.
Paradigm 2. 사람들은 그들의 가문이나 부족의 한 구성원임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Paradigm 3. 공동체의 습관과 다른 행동들은 그 공동체에 의하여 정죄된다.
Paradigm 4. 개인의 수치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수치이다. 개인의 영예는 또한 모두의 명예가 된다.
Paradigm 5. 심지어 개인의 부는 공동체 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흉악눈(the evil eye)이 부자를 저주할 지도 모른다.
Sub-theme 2. 모든 사회 구성원의 협동은 대단히 중요하다.
Paradigm 1. 모든 통과의식들은 그 사회 집단에 의해서 거행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통과의식이란 없다.
Paradigm 2. 심지어 결혼이나 개인적인 축하 행사들과 같은 가족 의식들도 모든 마을에 광고되고 공동체 전체의 행사가 되어야 한다.
Paradigm 3. 어린 아이들의 교육은 마을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다.
(5) Baraka (복 혹은 능력)
이 땅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 baraka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Sub-theme 1. baraka는 영적 힘이다.
Paradigm 1. 영적 존재들, 즉 신이나 조상신들이나 (무슬림) 성자들, 그리고 진들은 baraka를 가져다 줄 수 있다.
Paradigm 2. 만일 사람들이 영적으로 능력 있는 지도자들이 제정하여 준 규칙들을 잘 따르면 그들은 baraka를 받을 것이다.
Paradigm 3. baraka는 영적으로 능력이 탁월하였던 사람들의 사후 유품들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다.
Paradigm 4. baraka의 매체가 되는 사람들은 sheikh나 sharifu(무함마드의 직계 후손들이라고 믿어지는 사람들)와 mganga 등이다.
Paradigm 5. baraka는 치유를 가져다 준다.
Sub-paradigm 1. 치유를 받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은 인간 영매들을 통하여 영적 존재들에게 호소해야 한다.
Sub-paradigm 2. 만일 누가 영적 존재들에 의하여 여러 번 치유를 경험했다면 그 사람은 baraka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Paradigm 6. baraka는 물질의 복도 가져다 줄 수 있다.
Sub-theme 2. 손님은 baraka이다.
Paradigm 1. 손님은 잘 대접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영들에게도 적용된다.
Paradigm 2. 주인은 억지로 손님을 떠나보내면 안 된다.
Paradigm 3. 손님들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주인집에 머물 수 있다. 그리고 주인은 손님의 숙식을 제공하여 주어야 한다.
Paradigm 4. 친척이나 친구 집을 방문할 때에는 미리 알리지 않아도 된다.
(6) 사건 및 사람 중심주의 (시간 중심주의의 대립 개념)
Sub-theme 1. 서두르는 것은 복이 없다. 천천히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다.
Paradigm 1.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다. 여유를 갖는 것이 덕이 된다.
Paradigm 2. 사람이 시간 약속이나 계획보다 더 중요하다.
Sub-paradigm 1. 모든 의식들은 사람들이 다 오면 시작한다.
Sub-paradigm 2.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인 후에 의식을 시작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사람들이 소식 없이 오지 않았는데 일을 시작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Paradigm 3.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며 그리고 누가 그것을 하느냐가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얼마나 빨리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Sub-theme 2.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것은 (특별히 손님이나 객에게) 삶의 모든 양상에 중요한 덕이 된다.
Paradigm 1. 인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인사는 다른 이들을 후대하는 것을 보여 준다.
Paradigm 2. 인사할 때에 서로의 가족 구성원과 심지어 친구들의 안부까지 묻는 것이 마땅하다.
Paradigm 3. 손님은 후대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족의 큰 수치가 된다. 그것은 집안에 들어온 baraka를 차버리는 행위가 될지 모른다.
이상에서 간단이나마 스와힐리 무슬림들이 당연히 옳다고 믿고 사는 문화적 지식 혹은 문화적 믿음들(assumptions)을 들여다보았다. 이 문화적 지식들은 이 사람들의 내면의 깊은 곳에 당연한 진리 및 가치로서 저장되어 있는 것이며, 이들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이 지식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끌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이 속한 그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믿음들과 가치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삶 속에서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옳은가 증명하고자 애쓰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들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스와힐리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이러이러한 생각은 틀렸소"라고 한다면 이들의 첫 반응은 불쾌한 감정일 것이며 결코 쉽게 외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내용에 또한 자신들을 헌신(commitment)시키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문화적 지식이야말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준 문화적 근거 및 바탕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권에 가서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한다고 할 때에, 외부인으로서 조심해서 이해해야 할 것은,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전에, 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헌신"(commitment) 혹은 "충성"(allegiance)이다. 따라서 복음이 전달되었을 때에 문화적 지식에 충격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결과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의 변화 및 이에 수반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선교사들에게는 필요하다. 이제 이에 대한 세계관의 변화, 그리고 이에 따라 함께 일어나게 되는 문화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다루도록 하겠다.
5.7. 세계관의 보편적 범주들 (worldview universals)
문화인류학자들 가운데 cognitive anthropologists, 즉 인지(認知) 문화인류학의 전통에 있는 학자들은 문화의 중요한 내용을 사람들의 세계 인식으로 파악하고 이 인식된 지식을 찾아내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세계 인식의 결과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이 지식들을 세계관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세계관은 그 내용이 비록 문화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그 안에 배어 있는 인간의 “사고의 범주”들은 동일한 것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동일한 사고의 범주 혹은 인식의 범주를 가리켜서 세계관의 보편적 범주라고 부른다. 이 말은 Redfield에 의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Kearney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기독교 선교학에 Kraft가 처음으로 접목시켜 타문화권의 세계관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Redfield와 Kearney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의 범주 가운데 가장 뼈대가 되는 것은 자기(self)와 타자(other)의 인식이다. Kearney는 Piaget의 인식과정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개인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갓난아기의 자기 인식은 일반적으로 어머니라고 하는 타자를 통하여 이루어져 간다. 점점 성장하면서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 자연 환경들과 사회 환경들을 통하여 한 개인은 자신을 인식한다. 인간은 홀로서는 결코 자신을 알 길이 없다.
이것은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편견은 다른 공동체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단일문화권에서만 계속 성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세계관의 자리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타문화권에 노출될 때에는, 자신이 사용하던 상징과 의미와 행동 양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다른 문화권의 삶의 내용들을 열등한 것으로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든지, 아니면 그 다른 문화권에 압도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든지 하게 된다.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집단도 다른 집단과의 관계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든지 아니면 생존하기 위하여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든지 하는 반응들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자신(self or person)" 혹은 ”자기집단(group)"이라고 하는 인식의 범주를 갖고 있으며 이 개념은 “타자(other)"에 대한 상대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범주는 상호관계적이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님을 또한 알 수 있다. 따라서 “관계(relationship)"라고 하는 보편적인 범주를 생각하게 된다. 또 자신과 타자 등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주의의 모든 환경, 곧 세계를 분류한다. 이 ”분류(classification or categorization)" 역시 중요한 세계관의 보편적 범주가 된다. 인간의 지성은 모든 것을 분류하는데, 이 분류의 방식이나 동기 혹은 이유 등을 살펴보면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세계관의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Spradley 같은 학자는 세계관을 찾는 현장조사법의 핵심으로서 현지인들의 분류법과 분류된 범위들을 찾고자 하였고, 이것은 현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 되었다.
다음으로 언급할 보편적 범주로서 “원인자(causality)"를 들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원인을 생각한다. 일어나는 일들의 현상 뒤에 ”왜“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서구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연과학적 원인을 찾는 반면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믿는 수많은 비서구사회의 사람들은 더 깊은 영적인 원인자를 찾고자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원인자를 찾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식 성향이다. 이 원인이라고 하는 개념은 곧 힘(power)이라고 하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원인자“라고 하는 보편적 인식 범주는 인지 문화인류학에서는 ”힘“과 동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간과 공간 개념도 보편적인 인식 범주가 된다. Kraft는 시간에는 사건(event)을, 공간에는 물질세계(material world)를 포함시켜 생각한다. 즉,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은 보편적으로 모든 문화에서 다 발견되지만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그 시간 개념이 아니고 오히려 사건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Kraft는 본 것이다. 공간도 단순히 공간만이 아닌 물질세계의 물질에 대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을 Kraft는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세계관의 보편 범주를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 문화적 테마의 내용들을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1) “자기(self)" 혹은 “개인/집단(person/group)”의 개념(범주)
스와힐리 사람들은 개인의 존재를 자신들이 속해 있는 스와힐리 사회의 부분으로 인식한다. 개인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진(영들)보다 그 힘에 있어서 열등하다. 영들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매우 연약하게 인식된다.
(2) 분류(Classification/Categorization)
영들의 분류를 예로 들어보자. 스와힐리 무슬림들은 영들의 분류를 실용주의(utilitarian)적으로 한다. 즉, 자신들의 삶에 얼마나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가가 분류의 기준이다. 따라서 좋은 진들은 병을 치유하여 주거나 부를 가져다주는 진들이다. 즉, 좋다는 개념은 도덕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다.
또 영들의 분류를 보면, 그 진들의 기원이나 종교성 및 얼마나 스와힐리화되었는가를 기준하여 분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타자(other)들, 특별히 자신들의 주위에서 만난 이방인들에 대한 그들의 해석들을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과 해석들을 영의 세계에 투사(projection)하는 것을 그들의 영들 분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루하니(ruhani) 진들은 이슬람의 영들로서 아랍 출신이며 깨끗하고 종교적이며 힘이 세고 이슬람의 신봉자이다. 이 루하니 진에게 들린 환자들을 치유하는 seance 때에는 하얀 천을 환자에게 덮어줌으로써 루하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즉, 루하니는 흰색을 좋아하며 이슬람 세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프리카 내륙이나 스와힐리 해안에 원래부터 있던 영들은 문화적으로 스와힐리화 과정에 있지만 아직도 아프리카의 이방적 속성을 갖고 있어서 이슬람의 신앙이 없고 사람들에게 항상 병과 재난을 가져다주며 못된 성격들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들은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영들에게는 빨간색을 적용한다.
그러나 이 빨간색은 검은색처럼 적대감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적대감은 검은색 천으로 표현되는데, 특별히 아프리카의 기독교 사회, 예를 들면, 마다가스카르나 이디오피아의 기독교 사회에서 온 진들이라고 믿는 영들에 들린 환자들을 치유할 때에는 검은 천을 덮어씌움으로써 스와힐리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아프리카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주고 있다. 전통적인 정령숭배 사회인 아프리카 내륙이나 해안 사회에서 왔다고 믿어지는 영들이나 유럽 사회에서 왔다고 믿어지는 영들에게 빨간색을 적용함으로써 빨간색은 어느 정도 이방인들에 대한 스와힐리 사람들의 호의를 표현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렇듯이 스와힐리 사람들의 영들 분류는 그들이 어떻게 이방 사람들을 해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스와힐리 무슬림들은 또한 그들의 핏줄이 아프리카의 뿌리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세계관에 근거하여 영들을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동부 아프리카의 반투족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미지무(mizimu)에 대한 신앙이 있다. 미지무는 조상의 영들을 가리키거나 혹은 이들이 시간이 오래 지남으로 인하여 자연영들(nature spirits)이 된 그러한 영들을 가리킨다.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영들 분류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이슬람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슬람과 아프리카의 전통 세계관을 나름대로 혼합시키고 통합시킴으로써 스와힐리 이슬람이라고 하는 독특한 지역 이슬람을 만들어 낸 것이다.
(3) 관계(Relationship)
영들은 스와힐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환경이다. 영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스와힐리 사람들의 세계관이요 믿음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영들은 위험하다고 믿는다. 루하니 진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믿을 수 없다. 언제 어디서 개인을 공격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지 모른다. 이러한 예측불허의 영들의 세계와 관계해야 하는 스와힐리 사람들은 피곤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영들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하여 “샤만”은 도래하게 된다.
(4) 원인자 혹은 힘(Causality/Power)
모든 영들과의 관계는 힘의 관계이다. 영들을 이기고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영적인 힘을 갖거나 그러한 힘이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여야만 한다. 모든 병들과 재난의 궁극적인 원인을 진들로 보기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고 타협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들에 대한 지식과 그들을 다루는 지식은 곧 능력이요 힘이 된다. 음강가(mganga)라고 불리는 스와힐리의 샤만은 이러한 지식과 힘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스와힐리 무슬림의 사회 안에도 영적인 두려움과 투쟁이 항상 존재한다.
진들이 항상 힘 있는 원인자로 작용하고 있다고 믿고 사는 스와힐리 사람들의 내면의 문제를 복음적으로 해결하여 주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어 줄만한 또 다른 힘을 경험케 해야만 한다. 그것은 모든 영들과 신들 위에 뛰어나신 예수의 영을 경험케 하는 일이다. 복음의 참 지식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지식들을 교정해 주어야 하며, 이 때에 복음은 단순한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혹은 가시적인 힘으로 나타날 필요가 있다.
(5) 시간/사건(Time/Event)
스와힐리 사람들의 시간 개념은 이중적이다. 즉, 순환적인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시간 개념과 이슬람의 시간 개념이 혼합되어 있다. Mbiti는 아프리카의 반투 시간개념을 “싸싸(sasa)"와 ”자마니(zamani)"의 개념으로 분류한다. 즉, 현재적인 싸싸는 인간의 세계에서 경험되는 시간이며 자마니는 신비의 세계로 영들이 속해 있는 시간 개념이다. 반투 아프리카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보다 이러한 이중적인 공간과도 같은 시간 개념을 더 현실적으로 갖고 있다.
싸싸는 특별히 “기억됨”과 관계가 깊다. 즉,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의 반경 안에 들어와 있는 사건들은 거의 현재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기억이 멈출 만큼 오래된 사건들은 자마니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투의 시간 개념은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설명하면 한마디로 과거지향적인 시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반투의 혈연과 문화를 이어받은 스와힐리 무슬림들은 이러한 아프리카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또한 무슬림들로서 이슬람의 종말론적 시간 개념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미래 의식이 약한 반투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미래의 개념을 하나 더 첨가해 준 격이 된다.
스와힐리 사람들은 또한 시간의 양보다도 시간의 질을 더욱 중요시 여긴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정확도나 양의 개념은 희박하며 시간을 마치 고정된 공간처럼 생각한다. 마치 수영장에서 마음 놓고 수영하는 것처럼, 시간은 흐른다기 보다는 주어진 것으로서 마음 놓고 자신들의 할 일들을 한다는 개념이 더욱 강하다. 그러므로 많은 외국인들이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스와힐리 사람들을 가리켜 시간 개념이 “없다” 혹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시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그들의 시간 개념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산업화/현대화를 추구하는 아프리카 인들에게 있어서 시간 개념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 되고 있다. 필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이 시간 개념에서 여러 모로 혼돈을 겪고 있는 듯하다. 주어진 시간 내에 업무를 이루어야 하는 비인격적이고도 비인간관계적인 산업사회의 요구는 전통적인 인간관계 중심적인 사고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는 심한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들의 내면에 혼돈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와힐리 사람들은 어떤 행사가 있을 때에는 비록 시간을 어느 정도 정해놓기는 하지만 그것은 “--까지”의 약속이기보다는 “--부터”의 시간 약속이 된다. 필자도 이러한 시간 개념의 다름으로 인하여 많은 고충을 겪어야만 하였다. 한번은 케냐의 중요한 목사님 한 분과 계속 만나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이 분은 거의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분은 한 번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 필자는 한 번은 화가 나서 그분에게 약속 좀 지키라고 역정을 내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말씀은 케냐 사람들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열쇠가 되었다. 그분은 말하기를 약속을 하였으므로 그 때부터 기다리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제 시간을 맞추어서 나오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한 교회의 목사로서 시계도 없고 전화도 없으며 목사 사택을 찾아오기 위해서 없는 돈을 내어서 버스를 타고 와야 하는 그들을 시간 약속이라는 것 때문에 물리치고 올 수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그분은 서구인들은 시계를 만들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시간을 만든다고 하였다. 필자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었다. 이러한 케냐 사람들 혹은 스와힐리 사람들의 시간 개념을 가리켜서 사건중심의 시간관(event-oriented time concept) 혹은 사람중심의 시간관(people-oriented time concept)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시간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가 처한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시계가 없던 농촌에서는 예배 시간이 유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 시간의 길이도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사용하여야만 생존이 가능한 전형적인 산업사회로 변환되면서 교회의 예배 시간 엄수 및 그 길이까지도 “영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본다.
스와힐리 사람들의 시간관은 또한 아랍 이슬람의 점성술에 영향을 받은 부분들을 보여주고 있다. 진이 사람에게 들어간 시간을 알면 그 시간에 해당하는 진들을 찾아낼 수가 있고, 그렇게 하여 진들을 마치 병균을 발견하듯이 알아내면 처방이 나오는 것이다. 또 이슬람의 종말론이 있기 때문에, 스와힐리 시간관은 아프리카 시간관 더하기 이슬람의 종말론적 시간관의 모습으로, 그 이미지가 나선식 진행형태이다.
(6) 공간/물질세계(Space/Material World)
공간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주관이다. 이 우주관(cosmology)은 철학적 우주관이 아니라 일반 평민들이 은연중에 믿고 있는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인식 및 해석이다. 절대신 알라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 우주에는 천사들과 온갖 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이러한 신의 창조 세계의 한 부분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계를 문화적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개념이 희박하다. 이 세계와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자 하며 특별히 자연과 사회에 거하는 영들을 건드리지 않고자 무진 애를 쓴다. 따라서 인간의 존귀함과 가치에 대해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고 수많은 두려움 속에서 산다.
이러한 macro-cosmos에 대한 개념과 함께 micro-cosmos 즉 인간 세계의 모든 공간과 물질도 의미를 갖는다. Foster가 정리한 “제한된 선 (limited good)"의 개념은 공간과 물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잘 예를 들어주고 있다. 많은 농경사회의 사람들은 모든 유익한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Foster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 사회 구성원 가운데 누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잘 살거나 잘 되게 되면 그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가져야 할 선을 차지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질시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와힐리 사회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 특별히 부를 획득하게 되면 그 사람은 부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는 제스처를 보여주어야 한다. 적어도 엄청난 잔치를 벌여주든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든지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흉악눈(the evil eye)의 저주를 누가 걸지 모른다고 믿는다.
세계관의 보편적 범주들에 대하여 매우 간략하게 스와힐리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았다. 이 보편적 인식 범주들을 etic의 잣대로 하여 emic의 내용들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현장 연구방법이 될 것이다. 이 보편 범주들은 세계관 내에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특별히 체계화된 현장연구방법을 필요로 한다. 차후에 8강에서 이 현장 연구방법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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