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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리풀이 무성하여 이곳을 상초리(霜草里) 또는 서리풀이라 하였던 서초동의 이름을 따서 서초구라 하였다, 본래 시흥군 신동면(新東面) 지역으로 1963년 1월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5년 10월에는 강남구가 영등포구에서 나누어졌다, 1988년 1월 강남구에서 나누어져 서초구가 신설되었다,
@ 유래 동명 순서
(1) 1)내곡동 2)반포동 3)방배동 4)서초동
(2) 5)신원동 6)양재동 @말죽거리 유래와 양재역 벽서 서건
7)염곡동 8)우면동
(3) 9)원지동 10)잠원동
① 내곡동(內谷洞) 반포동(盤浦洞) 방배동(方背洞) 서초동(瑞草洞)
☞ 내곡동은 조선 말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 지역으로 본 마을의 안쪽에 있는 안골 또는 안말이라 하였던 곳이므로 한자를 빌려 내곡동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헌, 인릉(내곡동 산13-1)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 여우 등의 짐승이 출몰(出沒)하던 지역이었다 지금은 경내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내곡동과 강남구 사이에 있는 높이 290,8m의 산 모양(模樣)이 늙은 할미 같다고 하여 우리말의 할미산 또는 대고산(大姑山)이라 불렀으나, 이곳에 능으로 정한 후 어명에 의해(아마도 세종 때인 듯) 대모산(大母山)으로 고쳐졌다,
내곡동의 @샘마을은 1972년에 창경궁, 창덕궁 인근의 종로구와 와룡동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함으로써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박석고개 왼쪽에 정착했으나 1979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때 헌릉로 현재 신흥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헌, 인릉 입구 박석고개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흥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광복 후 월남민들의 개척단이 이룩한 새로 생긴 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어둔골이라 하였는데 나무숲이 우거져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 호랑이도 자주 출현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전국에서 제일 품질이 뛰어난 수제양털이불 생산업체가 들어 서 있다,
내곡동 산 13~1번지에 태종(太宗)과 그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이 있다, 태종은 태조의 제 5남으로 조선개국에 큰 공을 세웠고, 관제를 개혁하고 신문고를 설치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왕권확립에 큰 업적을 남겼으나, 1,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 헌릉의 오른쪽에는 순조(純祖)와 그 비 순원황후(純元皇后) 인릉(仁陵)이 있어 헌 인릉이라고 한다, 대모산의 남쪽 맞은편 산을 인릉산(326,5m)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반포동은 마을로 흐르는 개울물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 곧 반포(蟠浦)라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 반포(盤浦)가 되었으며 반포의 원 마을을 반포본동이라 한다, 고속터미널 부근에 강남꽃시장이 있고 2~1번지에는 옛 동재기 나루터의 표석이 서 있다, 반포동은 조선말 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 하반포리 지역이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 산도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이 동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훼손되었기 때문에 찾아 볼 수가 없다,
1960년대만 해도 신반포로 이서지역의 대부분은 모래사장 또는 늪지 대로 강물 속에 있었다, 약간 높은 지역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대밭과 뽕나무밭이 우거 져 있었으며 채소농업과 양잠업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큰 비가 내려 한강 의 수위가 높아지며 이곳 대부분이 침수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자주 있었다, 일제 때에는 지금의 반포아파트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유사의 사리채취로 생계를 잇는 이가 많았다,
이곳 반포동의 자연 부락으로는 @서래마을은 사평로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에는 예부터 이곳에 살아온 20여 호의 원주민들이 있는데, 이 일대를 서래마을 또는 서애마을 서릿 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해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서애라는 마을 이름은 (현 조달청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마뉘꿀이라는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이 자기네 서쪽 물가에 있고 뒤에 깍아지른듯 한 산이 있으므로 불렀던 이름이다, 서래마을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의이죽으로 요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래마을은 월래 반포 15차 한시아파트가 지어져 있는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고 이주해와 형성되어있다,
@원곡마을은 둥근말이라고도 불린 원곡마을은 산모퉁이에 둥근게 이어져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현재의 강남성모병원 뒤쪽이다, 현재 이 병원의 기숙사 자리는 전에 빙고꿀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곳은 골짜기가 깊어 겨울에 언 얼음이 늦봄까지도 녹지 않아 이 같은 이름이 생겼다한다,
※ 벌바위터와 말무덤 옛날 어는 임산부가 산기가 있어 친정인 마포로 가다가 진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 길옆 갈대밭에 들어가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태를 끊을 수가 없어 어려워 할 때에 갑작이 하늘에서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태는 갈대잎으로 끊으면 되나 아기가 걱정이다, 라고 하여 당부하기를 뒤에 말 탄 병사 누군가 올텐데 그가 아기 는 어떻게 낳았으며 태를 어떻게 잘랐느냐고 추궁할 것이니 그때 갈대로 잘랐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말 하다면 아이를 죽일 것이다, 하고 일러주고 하늘로 사라졌다,
곧이어 말 탄 병사가 뒤쫓아 산모에게 추궁을 하자 산모는 할 수 없이 사실도로 대답하니 병사는 즉시 아이를 죽였다, 이 때 하늘에 시커멓게 변하면서 아기가 죽은 뒤편 큰 바위에서 무수히 많은 왕벌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 병사를 향해 날아가 병사와 말을 쏘아 죽였다, 그 후 벌이 나온 큰 바위를 벌바위라고 불렸다, 현재 이곳에는 반포전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병사를 태우고 온 용마가 별에 쏘여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긴 마을 사람들은 용마를 정성껏 묻어 주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반포동 1번지 경남쇼핑센터 옆이다,
☞ 방배동은 우면산(牛眠山)을 등지고 있는 고을 이라는 설과 이 동자체가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세종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세종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의 왕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란 설도 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상북면 방배리였던 이 동리는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관악구가 설치되자 관악구 사당1동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1일 사당1동의 분동으로 방배동은 독립하게 되었고 이때 인구는 8,480명이었다, 1978년 10월 10일 방배동은 1, 2동으로 분리되고 1980년 4월1일 사당동의 일부를 편입 강남구로 이관되는데 이때 편입된 부분이 방배본동이 된다, 1985년 9월 1일 방배2동에서 방배3동이 갈라져 나오고 1988년 1월 1일로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91년 9월 방배본동과 1동의 서문로와 동광로 남쪽과 사당로 북쪽을 갈라내어 방배4동이 신설됨으로써 방배동의 행정은 방배본동, 1, 2, 3, 4동에서 나누어 맡고 있다, 사당 사거리 부근에 방배풍물시장이 있고, 방배역 앞 효령대군묘역에는 방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카페골목이 유명하다,
방배동의 자연 부락 ◈ 천촌말, 이 지역은 근래에 신흥주택가로 발전한 곳이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부락 명칭들을 통해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천촌말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골짜기를 뒷굴, 그 뒷골에 있는 논은 뒷글논, 천촌말 고개 너머의 벌을 뒷벌 천촌말과 시궁말앞 벌을 앞벌, 천촌말 근처의 산개천둑을 갤둑이라 하였고 거꾸로 넘어간다 하여 가꿀고개, 논이 깊어 구래논, 쪽박 엎어 놓은 것 같다하여 쪽박산, 아래로 뱅돌아간다 하여 뱅도래미, 새로 생긴 마을은 새말, 옛날에 큰 마을이 있었던 터는 새텃말, 뱀장어가 많아 장앗들, 치달은 골짜기라하여 치골,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바위 돌 한쪽으로 건너던 다리로 임금이 거동하던 길을 쪽다리 부귀영화를 누리개 해달라고 하여 이복촌 이라고 불렀다,
☞ 서초동은 옛날 서리풀이 무성하여 이곳을 상초리(霜草里) 또는 서리풀이라 하여 한자로 옮겨 서초동이라 하였다, 본래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 지역으로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에 편입 되었다, 이 마을은 당산마을 당골마을과 마산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당꿀로도 불러쓰며 반포대로와 남부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서초동 1451번지 일대에는 완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왕씨가 정착하여 500년 동안 거주해 온 곳이다, 조선 건국 후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태조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더 이상 멸족시키지 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성계가 특명을 내려 왕씨들을 더 이상 처형시키지 말고 찾아서 잘 살게 해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 왕씨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서초동 산 127번지에 그의 아들 왕효곤을 비롯하여 100기의 왕씨 선조의 묘가 있었으나 1971년 도시계획사업에 따라 모두 이장되었다, 개발 전 까지 만해도 20가구의 왕씨 가문이 살고 있었다,
서초동 삼풍아파트 남쪽 일대를 장안말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 들이 대대로 살라왔다, 세종10년(1428년) 임영대군에 봉해졌고, 세종 21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일시 직첩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문종 1년(1451년) 왕의 지도로 신무기인 화차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세조를 보좌하여 조정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곡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를 말하는데 옛 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입구에는 자연석 2개에 정곡(鄭谷)이라 정중만(鄭重萬)의 글씨로 새긴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로변 해주정씨 대종친회 건물 앞에 옮겨져 있다,
현재 남부터미널이 있는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10여 호의 집들이 마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 산제를 지냈던 당이 있었다, 이 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렸다, 이와 연관되어 양재역 부근에 사도감고개가 있었고 그밖에도 사도감개울 사도감들, 사도감다리 등도 있었다,
② 신원동(新院洞) 양재동(良才洞) 염곡동(廉谷洞) 우면동(牛眠洞)
☞ 신원동은 조선시대의 원(院)터 아래 새로 생긴 마을로서 새원(院)이라 했으므로 한자로 옮겨 신원동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라 칭하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룬다, 1973년 영동출장소 관할이었고 1973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실실된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신원동의 마을 이름이 있게 된 신원(新院)은 신원동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새원이란 말 그대로 조선시대에 새로 이곳에 원(院)은 설치하였던 데서 생겨난 마을 이름이다, 새원마을중에서 근본이 되는 마을이 벌말 또는 본천(本村), 평촌(坪村)이다, 즉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고 하고 또는 한자명으로 편촌이라 하는데 본촌이란 새원에서 근본이 되는 마을이므로 칭해졌다, 벌말은 김해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고 6, 25 전쟁 때 한강을 건너온 북한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였다, 신원동 남쪽에는 새쟁이(신정(新亭)마을이 있다, 새쟁이란 마을 명칭은 수백 년 된 느트나무가 정자같이 서 있으므로 신정이라고 칭해온 것이다,
☞ 양재동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땅이고 그 이전에는 지금의 경계(境界) 수도(首都)가 된 과천현에 속했다, 이 일대는 조선조 때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이 있었던 곳으로 역촌(驛村) 말죽거리(양재역) 하방교(下方橋) 합방교(合方橋)등의 역말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역촌의 새 마을을 합하여 역삼동이 되고 양재동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 본래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양재역(良才驛) 역시 뜻밖의 사건으로 어진 선비에게 피해를 주게 된 것이다,
옛날 한양을 바라보며 선비들이 마지막으로 말에 말죽을 먹이고 막걸리를 걸친 후 짚신 끈을 다시 매었던 역촌이, 이재는 강남땅의 번영을 구가하면서 땅 밑으로 30분이 채 안 걸려 도성(都城)에 들어갈 수 있는 지하철(양재역과 역삼역)이 되었다, 그런 뜻에서 땅이름이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인 것이다,
※ 말죽거리 유래와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
㉮ 지하철3호선 양재역 4번 출구 입구에는 말죽거리의 유래의 표석이 있다,
말죽거리(馬粥巨里)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름이며 각종 기록에는 양재역으로 한양 도성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산도등 삼남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교통상의 요충지였다, 관리들은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말을 징발 하거나 삽십리마다 설치된 역에서 말을 바꾸어 탈수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먼 길을 가는 경우 역 부근의 주막에서 여장(旅裝)을 풀고 말도 쉬게 하였다,
긴 여정을 위해 말죽을 많이 먹여야 하는 거리였으므로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보여 지며 속설에 의하면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1624년) 피난 가던 중 이곳에 이르자 유생들이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께 바치니 말위에서 죽을 마시고 과천 쪽으로 갔으므로 그때부터 말죽거리로 불렸다고 전(傳)하여지고 있다,
㉯ 양재역 벽서 사건이란 1547년 명종(明宗)때 양재역의 벽에 붉은 글씨로,【여자 임금이 위에 있고 간신 이기가 아래서 국권을 농락하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가히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는데, 이 벽서로 인해 나라 안이 발칵 뒤집혀 소위 정미사화(丁未士禍)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는 당시 실권파인 윤원형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염곡동은 광주군 언주면 지역으로 지형이 염통처럼 생겨서 염통골 또는 한자지명으로 염곡동(廉谷洞)이라 하였다, 염곡동의 현재 위치는 동쪽은 내곡동과 접하고 서쪽은 양재동에 닿아 있다, 그리고 북쪽은 구룡산(九龍山)을 경계로 강남구 포이동과 분계 되어있고 남쪽은 야산을 경계로 신원동과 잇대어 있다, 염통골 또는 염곡동으로 알려진 이곳은 집성촌 창녕조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고 전주 이씨도 몇 거주하고 있는데 전주 이씨는 420여 년 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 후 20년 늦게 창년 조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이전까지는 조씨가 80-90여 호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떠나갔다,
염리동의 자연부락 탑성골은 염통골 남쪽 헌릉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버스정류장 이름도 탑성골로 되어 있다, 탑곡은 옛날 이곳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가 11대 이전부터 살기 시작하여 아직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과거 염곡동에는 아홉 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산 전설에 따라 아홉 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무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 동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8군데가 매물 되고 현재는 염곡마을 북동쪽에 구룡산 제1약수라는 옛날 옻 우물이 남아 있다, 이 옻 우물이란 약수 이름은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우물물을 마시거나 우물물로 씻어내면 옻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 우면동은 조선말 경기도 관천군 동명 우면동이었다가 1914년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로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우면동으로 되었다가 1973년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자 이에 속하였다가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 되면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소칭 우마니로 불려 왔으며 우면산(牛眠山) 아래에 있어 우면동이라 하였다, 우면산은 잠자는 소의 모습이라고 하며 이곳에 소의 구유에 해당하는 구융배미, 소의 불알에 해당이하는 알봉 등이 있다, 우면산 약수터 일대는 공원으로 만들어져 있고, 또 산기슭에 분재박물관이 있다,
※ 우면동에 남아있는 마을들의 이름과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시내꿀; 옛날에는 가시덤불이 우거졌던 곳이라 하여 일명 형촌(荊村) 또는 샛말이라고도 한다, @소동; 소나무가 무성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능터로 예정되었던 곳이라 하여 능안이라고도 하며 송부언군(宋府院君) 산소가 있다고 한다, @암산(岩山)(바위뫼, 밤애); 범바위라는 바위가 있는 산 밑 마을명을 일걸는데 서울공무원교육원과 경계를 이루는 산 아래에 있다,
@성촌(城村)(잿말. 큰발) 산이 성처럼 둘러 싸여 밤애(일명 바위뫼)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우머니의 중심으로 큰 마을이 있었다,
@우머니; 우면리를 우면이라 하다가 변한 이름이다,
형촌마을 옆에 있는 나직막한 봉우리를 태봉(우면동 291-1번지)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원산군의 태를 묻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돌 항아리 내에 태를 담은 백자(白磁) 항아리를 넣어두었다고 전해지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도굴해 현재는 돌 항아리마이 남아있다, 10년 전 일본의 한 미술관련 잡지에는 이와 관련하여 이 항아리는 2개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에서 갖고 왔다라고 게재(揭載)되어 있어 당시의 지명과 일치하고 태봉의 유래와 백자의 존재도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일대는 우면산에 둘러싸여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③ 원지동(院趾洞) 잠원동(蠶院洞)
☞ 원지동은 과천군 동면 신원동(新院洞)이라 불렀던 곳이며 일제 때에도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을 확정할 때 이 일대 바람골, 양수리, 원(院)터 등의 마을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신원동과 분리되어 원지동이란 새 이름이 생겨났다, 원지동의 바람굴은 청계산 밑에 있는 마을로 경북고속도로 부근에 있다, 본래 산이 높고 바람이 센 곳이었다고 하여 이 이름이 바람골 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양수리 마을은 관현사 입구에는 현재 유원지 주차장이 들어선 곳에 옛날 양수리라는 마을은 이곳에 양씨와 수씨가 살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지금은 폐동되어 단 지 그곳 골짝기와 들판이름으로만 불리는데 지금은 묘를 쓸수 없지만 이 골짜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마을 입구 경부고속도로 옆에 술바위란 유명한 바위가 있는데 이는 옛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선비들이 여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산 제2 야영장 부근에는 거인의 손자국과 머리자국이 있어 장사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와 넓적바위, 길마재, 부엉배 등이 옛 이름도 남아 있다,
원터(院基)마을은 삼남도로를 가다보면 청계산 제1야영장과 청계산기도원 입구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원터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한 원(院)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원터라 불려진것 이다, 원지동 400번지에 일대에 원이 있었는데 1970년대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석축이 없어지고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다, 이 원터마을은 경북고속도로가 놓임에 따라 주민들의 일부 가 이전하였고 옛 농촌주택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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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원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원리와 사평리로 불러왔는데 1914년에는 시흥군 신동명 잠실로 칭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본래 잠실이라 부르던 곳인데 송파구 잠실동 보다 늦게 생겼으므로 신잠실(신원(新院)이라 하여 원(院)자를 붙여 송파구의 잠실동과 구분하기 위해 잠원동이라 하였다, 세종 때 송파구의 잠실동에 동(東)잠실을, 이곳 남쪽에는 남(南)잠실을 두었다, 오늘의 설악아파트 1동 북쪽 한신 아파트 337동 쪽 잠원로 부근에는 지금부터 60여전까지 사평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아 돈대마당이라고도 불리던 곳인데 그 동쪽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농가공산품판매센터(잠원동 65-32번지)부근에는 할떡거리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양방이 묻혀 있다는 양반산소가 현재 잠원동 천주교성당 뒤쪽에 있다, 또한 원당동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이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 활을 쏘았던 시장 터가 있었고 예날 황새가 앉았다하여 황샛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왔다고 하다,
(서초구 10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