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도 초등학교 5학년때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내 손위 형에게 당시 다니던 공항 중학교 반에서 1등을 했다고 부친께서 당시 고급기타였던 세고비아기타를 사주셨다. 형은 학교를 마치면 집에와서 방에서 당시 가장쉬운 노래 '울밑에선 봉선화야~ ' 로 시작하던 노래를 부르면서 기타를 쳤다. 기타줄 6줄중 맨 위줄을 3번치면 울밑에가되고 두번째줄을 치면 선이되고 봉선와야는 두번째줄 3째마디와 두째마디를 번갈아 치면 된다. 지금도 기타줄을 맞출땐 울밑에선음으로 4번짜줄까지 내려가면서 잡고 5번째줄만 원래 방법으로 잡고 6째줄은 다시 울밑에선 으로 음을 잡는다.
당시 집은 지금은 강서구로 편입되었지만 영등포구 염창동 187번지였다. 내가 태어난해는 경기도 김포군 양천면 염창리였다가 60년대초 서울 변두리로 편입된곳이었다. 새마을 운동이 있던 1970년도 이전엔 마을의 60%이상이 초가집이었고 친구네 집에 가면 전기가 안들어와 초롱불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봤었다.
당시 우리집은 기와집이었으나 크지 않은 집이었다. 집 건평이 10평(350SQ FT정도 일거 같다) 안방이 2평이었고 작은 방2개있고 부엌이 있었다. 그리고 앞마당과 뒷마당이 조금 있었는데 가내 수공업 공장이었다. 즉 현관문에서 대문까지와 뒤마당을 위에 스레트를 덮어 공장으로 사용하였고 만드는 제품은 방짜유기라는 당시엔 생소한 제품이었다. 방짜유기란 구리 78%와 주석 22%를 합금하여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들겨서 만든 청동제품을 일컷는 말이다.
방짜유기의 원산지는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읍이라는 곳인데 국사책엔 평북 정주로 소개되어있다. 예로부터 남한은 안성유기가 유명했고 북한은 방짜유기를 알아줘 임금님 밥상은 이 방짜유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부터 방짜유기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안성유기는 참고로 주물유기로 틀에 부어 안성맞춤을 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말이다. 그런데 방짜는 틀에 맞추는 기술이 아닌 망치로 두들기고 작두로 자르고 구멍을 뚫고 다듬어서 각종 식기나 악기를 만든다.
부친은 정주출신으로 6.26사변전에 월남하여 방짜유기 공장을 가내 수공업형태로 했다. 직원은 고향출신 즉 정주에서 방짜유기를 만들었던 고향분들 5분과 같이 만들었고 그분들을 대장이라고 불렀다, 즉 가질 대장(물건 깍는걸 가질이라고 부른다), 앞망치(망치를 앞에서 치는 기술) 등 각각 전문 분야가 있고 내 부친은 원대장이라고 불렀다. 그분들의 조수는 내 누님 2분 형하고 나 석탄으로 불피우는 일부터 단순한 심부름하면서 일을 했다. 난 6살때부터 일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님은 공장일하는분 들 밥해드리는 일을 하셨다.
징, 꽹과리. 양푼이. 세수대야, 요강,모두 방짜로 만들었고 이 만들때나는 망치소리와 소음은 그야말로 당시 대표적인 굴뚝산업 산업 전선의 생생한 소리였다.매일 집에 망치소리와 용광로 불소리, 기계로 돌리는 커다란 해머울리는 소리가 나는 이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하여 집안일 도우면서 반에서 1등을 했으니 부친의 기쁨은 매우컸고 이로 인해 당시 귀했던 기타를 종로에서 사왔다.
당시 기타는 다 그렇듯이 어께너머로 배우는 시대였고 레코드판에 녹음된 소리 들으면서 배웠다. 일단 난 로망스를 배웠다 물론 정통으로 배운게 아닌 대충배운거다. 즉 대충 로망스를 쳤다. 중학교 2학년에 되고 벤쳐스가 연주했던 파이프라인을 쳤다 역시 오리지널음이 아닌 대충을 쳤는데 전문인이 아니어도 좀 이상한걸 느낄수 있을만큼 엉성한 파이프라인을 쳤다.
당시 학교를 다녀오면 일을 했는데 배달일도 했다. 징 꽹과리, 바라, 놋그릇을 마대자루 같은데 넣어 버스를 타고 종로에 있는 만물상(한일 만물상사, 종로만물등 상호 이름이 기억이 난다)에 배달을 했고 인천까지 배달을 했다. 인천을 가려면 염창동에서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에서 동인천가는 기차를 타고 걷거나 버스를 탔다 6학년때 신체검사때 29kg였다 즉 30kg 가 안되는 체력으로 무거운걸 배달했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3살위여 물론 징같은 아주 무거운걸 날랐고 누나들도 같이 배달을 했다. 종로에가면 당시 지겟꾼 이라고 불렀는데 차에서 짐을 내려 이분들께 돈을 드리면 물건을 날라다 주었다 .
60년대 6살때 아주 추운 겨울날 부친이랑 징이랑 꽹과리를 종로에 배달을 하기 위해 당시 염창동 비포장 도로(1977년 12월에 지금 염창길이 포장되었다)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택시가 섰다가 새끼 가마니 자루에 포장된 징과 남루한 옷차림(석탄이 옷에 묻어 검게 여기저기 보인다)을 보더니 도망치듯 갔다. 차가 섰다가 물건을 보고 도망가는 거였다, 몇대를 보내고 겨우 배달했다. 어린 나이에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하나를 느꼈다. 70년대 중반이후 염창동이 공장이 많던 지역에서 주택이 많이 들어서면서 소음 민원으로 더이상 하기 어려워 78년도에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으로 공장을 확장 이전했다.
당시 다 어렵게 살때 부친은 남들이 힘들어서 못하는 방짜 기술을 계속 이어 즉 전통 기술을 이어가고 있을때 1983년 이분야를 학계에서 보고, 당시 문화공보부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할것을 건의하여 부친께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이후 부친께서 만든 제품은 더이상 제품이 아닌 작품이 되었다.
그해 부친께서 일본에 사시는 부친의 사촌형님 댁을 다녀오실 일이 있었다.
일제시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셔서 일본말 구사가 가능하셨다. 동경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랑 이야기를 나누던중 부친이 한국에서 인간문화재라는 말을 하였고 그말을 들은 기사가 어느 한적한 거리에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부친께 길에서 큰 절을 올렸고 내 평생 인간국보(일본에서는 인간국보라고 부른다고한다)를 내 손님으로 모신걸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뜻을 전했고 싸인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명함에 한자로 써있는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77호(重 要 無 形 文 化 財) 옆에 싸인을 해주셨다는 말을 들었다. 6세때 택시가사들이 도망가듯한 모습을 본게 그때 많이 나에겐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을 졸업한 형은 좋은 직장을 가질수 있는 조건이었으나 가업을 잊기위해 부친과 함께 계속 방짜공장을 이어갔고 이젠 가내수공업이 아닌 더이상 가족들이 버스타고 가서 직접 또는 지게로 나르지 않고 직원을 고용하고 기계화하고 차량을 구입하고 규모있는 제조업체로 등록하여 국내 생산은 물론 해외에도 수출하는 제조업체를 이루었다.
십수년전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때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듣기를 진품 명품이란 TV쇼 프로에서 부친께서 만든 징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감정 평가를 했다고 한다. 부친께서 제작한 큰 징 한개 가격이 6억으로 평가되어 그당시 까지 그프로 이래 가장 높은 가격으로 평가 되었다고 들었다.
1926년생이신 부친께서는 2015년도에 국가문화재를 반납하셔서 지금은 명예보유자로 타이틀이 주어졌고 문화재청에서 실시한 공재경쟁 시험에서 내 위 형이 국가 무형문화재 77호로 인정되었다.
1972년도 형이 반에서 1등한 기념으로 기타를 사주셨을때 보다 2015년도 국가무형문화재77호(중요무형문화재에서 명칭이 국가 무형문화재로 변경됨)로 인정받은 모습을 보셨을때가 더 기뻤을것이다.
난 그시절 배운 기타실력이 더이상 발전을 못해 어려운 곡은 더이상 연주를 못하고 대중가요나 팝송을 기타 치면서 부르나, 어렸을때 부친께서 형에게 사준 인연으로 지금도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
https://youtu.be/N5_zUqGZFVA?si=Udu3ZXl33zB8BAPX
https://youtu.be/-09TV_TKYec
https://youtu.be/5nVrKG1YEC4?si=HweTs9aXeUXv-u_8
https://youtu.be/M0sSaJUCsnQ?si=oAOfV9Z7Pw6QyEv9
www.napcheong.com
첫댓글 이형만 선생님, 훌륭하신 아버님과 형님을 두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방짜유기가 얼마나 땀과 노력이 들어가서 완성되는 지 처음 자세히 보고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Living Next Door to Alice, Wonderful Tonight 도 오랜만에 잘 들었어요 :-)
댓글 감사드립니다. 노래 들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한국의 전통문화가 주목 받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영상을 보는 내내 감동뿐 아니라 방짜유기에 대해 새롭게 알았습니다. 젊은 날 저를 사로잡았던 본차이나의 매력도 고국을 떠나 환갑도 지나고 보니 방짜유기의 멋스러움에 비교할 바가 아니네요. 방짜유기라는 용어도 처음 알았고, 여럿이 함께 어우러져야만 빛을 발하는 것인 줄 역시 처음 알았습니다. 훌륭하신 아버님과 형님 덕분에 방짜유기의 전통문화가 이어질 수 있음에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글을 읽다 보니 선생님과 제가 연배가 비슷하지 않을까....^^싶네요.
네, 댓글 감사 드립니다. 68년도에 배운 국민 교육 헌장 자금도 외우는 세대입니다. 지금은 없겠지만 당시엔 건치아동 대회도 있었지요. 제가 학교에서 1등해서 선물로 당시 럭키치약 많이받아와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었던 기억납니다.
저의 중학교 시절이 떠오르며 저절로 미소가...
죤덴버의 애니송은 저도 즐겨부르는 노래입니다.
기회되면 선생님과 듀엣으로 한번 꼭 부르고 싶군요.
음역대가 상당히 맑은 고음이셔서 제가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화음 연습을 해서
문협의 '싸이몬과 가펑클'에 한번 도전해 보면 좋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듀엣 좋은idea라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