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사학의 시원에 관한 연구
(부제 : 고려시대 사학의 시원이 홍문공도인가? 문헌공도인가?)
일반적으로 이제까지 고려시대의 사학이라고 하면 최충선생이 설립한 구재학당에서 출발하여 유신
11명이 각기 사숙을 설립하여 고려시대의 12개의 사학을 설립하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시조의 일대기와 최충선생의 사학 개설시기를 확인하면 최초로 개설된 사학의 개설 시기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지식에 대한 재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후손으로서 조상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Ⅰ. 고려시대 사학의 성격
① 시조의 출생 배경
고려 태조 왕건이 어렵게 삼한을 통합하였지만 수많은 지방의 강한 호족들 때문에 고려 초기의 왕들은 왕권의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제7대 왕 현종때는 거란족의 2차, 3차의 침입이 있었으며 3차 침입시에는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1019년) 이로부터 고려, 거란, 송나라가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가 지속되는 시기로 이어졌으며 고려는 내부적으로 제도를 정비하여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다.
시조께서 출생하여 성장하던 시기는 바로 이 시기 직전으로 현종8년(1017년)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성종조(981~997) 후반기나 목종조(997~1009) 초반기로 추정된다.
② 사학의 성격과 역할
고려 4대 광종은 왕권의 신장을 목적으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과거를 통해서 기존 정치세력에 물들지 않은 신진관료를 선발한다는 면에서 왕권의 확대를 가져왔다.
과거에 응시하는 조건은 나라에서 세운 국자감에 입학을 하거나 12공도의 도생들이 가능했으므로 많은 귀족의 자제들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12공도에서 수학 하였으며 유력한 유신들이 설립한 사학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사람들이 많이 지원했다. 과거는 시험을 통한 인재의 선발 방식은 기존 정치체제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인재의 선발이라는 점에서 호족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신장을 가져왔다.
③ 사학과 국자감(고려 국립대학)과의 관계
사학이 성립되던 시기의 과거 응시의 조건은 국자감이나 사학 12도를 졸업해야 응시가 가능하므로 서로간의 관계는 동등한 같은 교육기관으로서 경쟁관계였으며 당대의 명망있는 유신들이 세운 사학 학도들이 과거 급제자 수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국자감의 무용론까지 등장하였다.
사학12도는 유신들이 자기 마음대로 세운 서당의 개념이 아니고 국가에서 전,답과 노비를 지원해준 일종의 공인된 학제였다. 즉, 국가에서 왕권의 강화를 위해 과거제도가 필요했고 과거에 응시할 일정한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 줄 교육기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자감과 사학의 경쟁에서 사학이 우위를 점하자 예종 3년 국학진흥의 일환으로 과거응시의 조건으로 사학 졸업 후 곧바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고 국자감에서의 일정기간 교육 이수를 의무화함에 따라 12사학은 국자감 입학을 위한 하위기관으로 전락하였으나, 사서에 사학 출신으로 과거급제자가 배출된 기록을 볼 때 시대별로 국자감과 사학과의 관계는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④ 사학 십이도의 개창자
고려 문종조초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고려시대의 사립종합대학 이라고 볼 수 있는 12개의 사학은 숙종초까지 12개의 사학이 거의 세워졌으며 12개의 사학의 창시자 및 설립시기 등은 아래와 같다.
설립자 | 문도명 | 주요경력 | 설립시기(추정) |
정배걸 | 홍문공도(일명 웅천도) | 중추원사 | 1051년(추정) |
최충 | 문헌공도 | 중서령 | 1055년 |
노단 | 광헌공도 | 좌복야 | 1090년 |
김상빈 | 남산도 | 우부승지 | 문종시기 |
김무체 | 서원도 | 복야 | 문종시기 |
은 정 | 문충공도 | 우부승선 | 문종시기 |
김의진 | 양신공도 | 평장사 | 문종시기 |
황 영 | 정경공도 | 평장사 | 1100년 |
유 감 | 충평공도 | 문종때 학자 | 문종시기 |
문 정 | 정헌공도 | 평장사 | 1092년 |
서 석 | 서시랑도 | 시랑 | 문종시기 |
(박양단) | 구산도 | (형부상서) | (1090년)(추정) |
고려 사학은 숙종시기(1095~1105)에 설립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종시기(1046~1083)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한 왕조의 정책적 판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초기에 설립되었다고 보여지는 것은 시조공께서 설립하신 홍문공도와 문헌공 최충 선생이 1055년경 설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공도이다.
⑤ 지공거와 사학
과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왕은 과거의 주임관인 지공거를 임시로 임명하여 과거의 선발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로부터 지공거와 과거에 합격한 사람과는 恩門(은문)이라고 하여 일종의 스승과 제자(또는 부자지간)와 같은 관계를 형성하며 지속해 나갔고 일종의 정치 세력화 하는 양상을 띠기도 했다. 같은 사학 출신이라면 지금의 명문고교, 명문대학 이상의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요한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입장을 같이 하기도 하였고 일종의
문중과 같은 연대의식이 있었다.
Ⅱ. 정배걸.최충의 일대기 비교
① 관련 역사기록
홍문공도와 문헌공도의 개설시기를 확인하기 위해 설립자의 주요 이력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려사와 동사강목에 1051년(문종5년) 정배걸과 정걸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망년도, 사망월, 관직명이 동일한 것을 보면 정걸은 정배걸의 오기임을 알 수 있으며 최충 선생은 1055년(문종9년) 치사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문종12년에 퇴관한 최충에게 여러 가지 물품은 하사한 기록이 있다.
정배걸 | 최충 |
고려사 문종 5년(1051년) | 8월 초하루 기묘일에 중추사 예부상서 정걸이 죽었다 | 고려사절요 문종9년(1055년) | 7월에 최충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
동사강목 문종 5년(1051년) | 8월 중추사 정배걸이 졸하였다 | 고려사절요 문종12년(1058년) | 4월에 최충을 내사령으로 올렸더니 치사하므로 의대와 은그릇, 비단, 포백과 안장 갖춘 말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
※ 족보에 기록된 시조의 1050년 사망 기록은 정정되어야 한다. |
※ 해설 : 고려사에는 정걸(鄭傑)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외 사서에는 정배걸로 기록되어 있다. 기존 역사학계 에서는 고려사의 정걸과 정배걸을 동일인물로 보지 않으며 시조의 홍문공도 개설 시기에 대하여 이의 없음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기존의 사회적인 통념을 인용하고 있다. 최충은 1055년 치사한 기록이 있으며 추후 9재학당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사후 문헌공의 시호를 받음에 따라 구재학당이 문헌공도로 바뀌게 된다.
② 정배걸과 정걸은 과연 다른사람인가?
국사편찬위원회 등 기존 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정배걸과 정걸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기존 역사서를 자료로 하여 반박하고자 한다. 아래는 정배걸과 정걸로 기록된 주요한 역사 기록이다.
정배걸(鄭倍傑) 기록 | 정걸(鄭傑) 기록 |
년도 | 내용 | 참고문헌 | 년도 | 내용 | 참고문헌 |
1017년 (현종8년) | 정배걸에게 급제를 주었다 | 고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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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년 (정종원년) | 정배걸을 좌습유 지제고에 임명하였다 | 고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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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9년 (문종3년) | 정걸을 동지중추원사로 삼았다 | 고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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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9년 (문종3년) | 정걸을 비서감 지중추원사로 삼았다 | 고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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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0년 (문종4년) | 정걸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 고려사 |
1051년 (문종5년) | 중추사 정배걸이 졸하였다 | 동사강목 | 1051년 (문종5년) | 8월 초하루에 중추사 예부상서 정걸이 죽었다 | 고려사 |
1080년 (문종34년) | 예부상서 중추사 정배걸에게 관직을 추증하라 | 고려사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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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배걸과 정걸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보는 근거는 고려사의 문종 3년부터 문종 5년까지의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고려사 이외에는 정걸이라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면 1051년(문종 5년) 중추사 정배걸이 졸하였다고 하여 고려사의 1051년(문종 5년) 중추사 예부상서 정걸이 죽었다고 기록한 자료와 내용이 동일하다.
동년 동월에 동일한 관직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이름의 사람이 죽었을리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는 1080년(문종 34년) 예부상서 중추사인 정배걸에게 관직을 추증하라는 왕명이 내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배걸이 곧 정걸임을 알수 있다. 고려사절요의 예부상서 중추사 정배걸과 고려사의 예부상서 중추사 정걸과 동사강목의 중추사 정배걸이 서로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③ 시조공과 문헌공의 주요일대기 비교
홍문공도와 문헌공도의 개설시기를 확인하기 위해 두사람의 주요 일대기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두분의 이력중 가장 중요한 기록은 사학의 개설시기와 관련된 부분으로 시조공께서는 1051년(문종5년) 졸하셨고 최충선생은 1055년(문종9년) 치사를 하고 관직에서 물러 났다는 기록일 것이다. 문헌공은 관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문하시중으로 백관을 통솔하며 국왕을 보필하는 재상의 자리에 있었으니 퇴임전에는 학도를 모아 후진을 양성할수 없었다고 본다.
시조 정배걸 | 문헌공 최충 |
내용 | 연도 | 내용 | 연도 |
과거급제(현종8년) | 1017년 | 출생(성종3년) | 984년 |
좌습유(정종1년) | 1035년 | 우습유(현종2년) | 1011년 |
중추원부사(문종1년) | 1047년 | 우산기상시(덕종2년) | 1033년 |
지중추원사(문종3년) | 1049년 | 참지정사(정종3년) | 1037년 |
중추원사,예부상서(문종4년) 홍문공도 설립 졸(문종5년) | 1050년 ~ 1051년 | 문하시중(문종1년) | 1047년 |
내사령(문종9년), 치사 | 1055년 |
문하시중 추증 | 1080년 |
구재학당 설립 (후에 문헌공도로 개칭) | 1055년 |
졸(문종22년) | 1068년 |
Ⅱ 사학 개설시기에 대한 결론
① 시조의 홍문공도
시조의 홍문공도 개설시기에 대한 설명은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일찌기 개성의 남문밖에 설립하였다”는 설명이 있으나 시조의 일대기중 1051년 8월 졸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홍문 공도의 설립시기는 늦어도 1051년 8월 이전이라고 보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② 최충의 문헌공도
최충선생은 1047년(문종1년)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1055년(문종9년) 중서령으로 치사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사숙을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볼 때 사학의 설립시기는 빨라야 1055년(문종 9년) 부터이다.
Ⅳ 사학의 개설 시점에 관한 연구
① 홍문공도(일명 웅천도)
고려사에 나오는 시조의 사망시기가 1051년(문종 5년) 8월이므로 홍문공도의 개설시기는 아무리 늦추어 잡더라도 1051년 8월 이전이 된다.
시조께서 언제까지 관직에 머무르셨는지 알수 없고 다만 어떠한 계기로 퇴임하셨고(작성자의 추론으로는 문종의 특별한 명령을 받고 사숙을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하게 언제 개설 하였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사서에 “일찌기 사숙을 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② 구재학당(문헌공도)
반면 문헌공은 1055년에 치사하여 송악산 아래에 9재를 두어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하니 구재학당의 개설시기는 아무리 빠르게 잡더라도 1055년 이전은 될 수 없다.
최충선생은 당시 국가의 원로로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퇴임전에 별도로 사숙을 열어 후진을 가르쳤다는 일부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구재학당이 최충 사후 최충의 시호를 인용하여 문헌공도로 불리게 된다. 혹시 재상으로 있기전 개인적으로 학동들을 가르쳤을 수는 있는데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학과는 전혀 개념이 다른 것이다.
Ⅴ 홍문공도가 번성하지 못한 이유
대략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조께서 퇴임하시고 홍문공도를 개설하기까지 자세한 사서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1년 내외의 짧은 기간으로 추정되며 이때까지도 정간공께서 태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다. 천만다행으로 유복으로 정간공이 태어나셨으나 홍문공도를 이어 받아 관리하기까지 많은 시일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반면, 문헌공 최충의 경우 1055년 퇴임후 송악산 아래에 9재학당을 설치하고 후진을 양성 하였고 1068년 졸하였으니 십여년의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도 있었고 사망당시에 문헌공의 아들인 첫째 아들 최유선은 중서령이었고 둘째 최유길은 상서령이었다.
그리고 유선과 유길의 후손들인 최사제, 최사량, 최사추, 최약, 최용, 최수, 최원금, 최진금 등도 모두 현달하여 고위 관직을 지냈으니 일족이 크게 흥하였으며 더불어 문헌공도도 크게 흥성하였다고 본다.
Ⅵ 홍문공도는 과연 어떻게 운영, 유지되었는가?
최초의 사숙 개설자인 유신들이 사숙을 개설하고 사망하게 되면 그 사숙이 어떤식으로 운영 되었는지에 대해 밝혀진 바는 없다. 특히 우리의 홍문공도의 경우처럼 개설자가 일찍 사망 하고 이어 받을 자녀가 장성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 공도는 어떤식으로 운영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① 개설자의 아들이 장성하였으면 물려받아 운영할 것 같고, 미성년이면 일가 친족중 누군가가 임시로 관리했을 수 있다.
② 개설자가 일찍 사망하였다면 12공도를 통해 과거에 급제한 후학을 통해 관리가 이루어 졌을 수도 있다고 보며 나중에 아들이 장성하였을 때 인계되었을 수 있다.
③ 국가에서 임시로 관리를 파견하여 운영하다 나중에 아들들에게 전승되었을 수도 있으며
④ 이것이 아니라면 개설자가 사망후에는 국가에서 해당공도의 출신자중이거나 아니면 아예 전혀 다른 인물을 관리자로 지정하였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여기에 관하여 연구된 바는 없으며 4가지 모두 작성자의 추정일 뿐이나, 어찌되었든 홍문공도는 대대로 전승되었으며 명맥을 이어오다가 과거의 급제자를 배출하다 고려말 사학의 일제 정비 시기에 철폐 되었다는 사실이다.
Ⅵ 후손들에게 맡겨진 사명
몇가지 자료를 조금만 정리하다 보면 고려시대 사학의 출발점이 어디였냐에 대한 기존 사학계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먼저 돌아가신 시조가 설립한 홍문공도가 돌아가신 후 몇 년이 지나 설립된 구재학당보다 늦게 설립되었다고 하는게 사학계의 우스운 통설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그러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점을 가리기 위해 시조의 돌아가신 년도를 구재학당 설립후 10여년 후인 1065년으로 아무 근거없이 멋대로 주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통탄할 노릇이다.
심지어 초계정씨 족보에서 조차 시조의 가장 큰 업적인 사학 개설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음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또한 시조의 돌아가신 년도가 사서와 일치되고 있지 않은 현실이다. 선조의 발자취를 찾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