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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도 불교사
6. 불교의 사상 -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 삼법인三法印
싯다르타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것은 연기의 법칙이다. 앞에서 살핀 중도를 비롯한 불교 사상들은 연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붓다는 또 연기의 법칙을 발전시켜 무상-고-무아의 형태로 체계화하였다.
무상(無常, anicca)은 불교의 존재론적 기본입장을 대변하고 있고, 고(苦, dukkha)는 불교의 인생관을, 그리고 무아(無我, anattā)는 불교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무상-고-무아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들 세 가지는 후대에 내려오면 불교의 기본교리인 “삼법인三法印”으로 정착한다. 초기불교 시대에는 삼법인이란 용어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개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불교인들에 의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특징을 해명하고자 해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붓다 자신은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추측하건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앞의 문답에서 사용되었던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제까지 별로 지적하는 학자가 없었던 듯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p. 205~207.)
불교의 근본교리인 삼법인은 후대에 정비된 개념으로, 초기불교 시대에는 무상-고-무아의 체계로 가르침을 폈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미린다 왕과 나아가세나 존자와의 대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문답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왕은 물었다.
『존자여, 지식을 가진 자는 지혜도 가집니까?』
『그러합니다, 대왕이여.』
『지식과 지혜는 둘 다 같은 것입니까?』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함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당혹當惑하는 일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어떤 일에 대해서는 미혹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당혹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당혹합니까?』
『아직 익히지 않은 기술의 영역이나, 아직 가 본 적이 없는 지방이나 아직 들어 보지 못한 명칭과 술어 등에 대해서는 당혹할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당혹하지 않습니까?』
『통찰에 의하여 달관達觀한 것, 즉 무상無常이라든가, 고苦라든가,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당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친 사람의 어리석음癡은 어떻게 됩니까.』
『지혜가 생기자마자 곧 어리석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사람이 어두운 방안으로 등불을 가져왔을 때, 어둠이 사라지고 밝음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지혜는 어디로 갑니까.』
『지혜는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성취하자마자 곧 사라집니다. 그러나 지혜에 의하여 성취된 무상이라고 알며, 고(苦)라고 알며, 무아(無我)라고 아는 깨달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徐景洙 譯, 現代佛敎新書 3,『미린다 팡하』3. 해탈하면 지식은 없어지는가? pp. 59~60.)
나아가세나 존자는 지식과 지혜가 같은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지혜에 의해 무상-고-무아를 알게 되면 무명이 사라진다는 것과, 또 그렇게 성취된 깨달음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무상-고-무아를 아는 사람이 지식과 함께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존자는 무상-고-무아의 구조로 설명하면서도 이들을 ‘삼법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다만 지혜를 가진 사람은 지혜로써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된다고만 하고 있다. 나아가세나 존자가 당시 유명한 불교 논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삼법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아직 삼법인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되지 않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기불교 시대에는 무상-고-무아라는 초기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제행무상’은 모든 존재는 변하므로 모든 행行은 무상하다는 것이고, ‘제법무아’는 무상이므로 자아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어 모든 법法은 무아라는 것이며, 그리고 ‘열반적정’은 이를 알면 해탈하여 지극히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괴롭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넣어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하는데, 제행무상이면 제법무아이고 이를 깨달으면 열반적정인데 반해 이를 깨닫지 못하면 일체개고라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도식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일체개고 ←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 |
우주의 진리인 ‘제행무상’을 깨달으면 ‘제법무아’를 거쳐 ‘열반적정’이 되지만 깨닫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고통을 겪는 상태인 ‘일체개고’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이 원리에 실천의 단계를 가미하여 이른바 이론-수행의 투톱 체계인 “사성제四聖諦”를 새로이 정립한다.
2) 사성제四聖諦
싯다르타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어 12인연을 유추해 낸다. 싯다르타는 정등각正等覺하고 나서 선정에 들어 초저녁 무렵 ‘순관順觀’의 연기법을 관찰하였고, 이어 한밤중 ‘역관逆觀’의 연기법을 생각해 내었다고『자설경』은 전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비로소 정각(正覺)을 나타내신 부처님은 우루벨라(優樓毘羅) 네란자라(尼連禪)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한번 결가부좌한 그대로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앉아 계셨다. 7일이 지난 후 초저녁경(오후8시경)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기(緣起)의 법을 생각해 내셨다.
‘이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면 이것이 생긴다. 즉 무명(無明)에 의해서 행(行)이 있다. 행에 의해 식(識)이 있다. 식에 의해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에 의해 육입(六入)이 있다. 육입에 의해 촉(觸)이 있다. 촉에 의해 수(受)가 있다. 수에 의해 애(愛)가 있다. 애에 의해 취(取)가 있다. 취에 의해 유(有)가 있다. 유에 의해 생(生)이 있다. 생에 의해서 노(老) ․ 사(死) ․ 수(愁) ․ 비(悲) ․ 고(苦) ․ 우(憂) ․ 뇌(惱)가 있다. 모든 괴로움은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하 역관 부분 생략) (增谷文雄 지음, 홍사성 옮김,『근본불교 이해』 pp. 27~29. 이상과 같은 내용의 서술은 남전의 율장《대품(大品)》(1.1)을 비롯해 한역 율장의 《오분율(五分律)》 제15권, 《사분율(四分律)》제31권과 그 밖의 자료에서도 보이고 있다. (같은 책 p. 29).)
이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이미 논의하였지만, 연기법이란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말한다. 연기법의 대표적인 예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로 노사의 원인을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12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근본 문제인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무명(無明, ajnana)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은 인간이 갖는 모든 번뇌의 근원이자, 모든 고통의 원인이 무명에서 비롯된 애愛(=갈애渴愛)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12연기설 중 유독 갈애를 내세운 것은 갈애가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갈애, 즉 욕망은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이렇다.
요컨대 인간 실존의 비극적 근원은 무명이라고 하는 미혹(迷惑)에 있는 것이다. 그 어리석음[惑]을 없애는 것이 곧 인생 문제의 해결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실존은 괴로움[苦]이라고 이해할 것, 이 괴로움은 고락(苦樂)으로 대립되는 그런 괴로움이 아니고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비록 행복의 절정에 있을 때라도 거기에 필연적으로 맺어져 있는 것이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인간적 실존의 별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괴로움의 원인을 밝힐 것, 우리들 생존의 바닥에는 욕망과 욕구가 가로놓여 있다. 갈망이라고 할 수 있고 맹목적 의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개체적이기도 한 동시에 집단적 혹은 생물적 본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셋째, 괴로움의 원인인 갈망을 없앨 것. 이것이 실제적인 해결이 된다.
넷째, 갈망을 없애기 위해 올바른 방법이 필요하다. 이것을 도(道)라고 부르는데 불교의 실천덕목이 여기에 해당된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44.)
고와 고의 근원인 갈애, 갈애의 소멸과 소멸을 위한 실천 방법 등 고를 없애는 네 가지 단계를 말하고 있다. 이 넷이 이른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cattari ariyasaccani)”이다. 사성제는 고의 원인을 밝히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구조로, 1) 고[苦], 2) 고의 일어남[集], 3) 고의 소멸[滅], 그리고 4) 소멸에 이르는 길[道]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인간의 고를 말하고[苦諦], 고의 원인을 밝힌[集諦] 다음, 그 원인을 제거하는[滅諦] 방법을[道諦]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의 원인이 집이요, 집의 결과가 고요, 멸의 원인이 도면, 도의 결과가 멸인 구조이다. 고·집의 2제는 중생이 겪는 생사유전의 고의 과정인 “유전流轉연기”를 나타내고, 멸·도의 2제는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과정인 “환멸還滅연기”를 나타낸다.
정리하자면 십이연기설의 순관과 역관을 네 가지 진리인 사성제로 집약한 것이다. 사성제의 형태는 병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없애기 위해서 올바른 치료를 하는 것과 같은 구조라고 하겠다.
사성제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와 거기에 이르는 수행과정을 포함하고 있어, 그의 모든 구도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사성제의 중요성은『중아함경中阿含經』「상적유경象跡喩經」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사리풋타(pali. Sāriputta, 舍利弗)의 사성제에 대한 설명이다.
“여러분이여, 모든 동물의 발자취는 다 코끼리의 발자취 속에 들어온다. 코끼리의 발자취는 그 크기가 동물 중에 으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여, 모든 착한 진리는 다 네 가지 성제 안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란 고(苦)의 성제, 고의 발생의 성제, 고의 멸진(滅盡)의 성제,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中部經典] 28 象跡喩大經. 漢譯同本, [中阿含經] 30 象跡喩經) (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 55.)
사리풋타는 붓다가 설한 사성제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코끼리 발자취의 비유’를 들고 있다. 땅위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큰 발자국 안에 들어가듯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사성제에 다 포괄된다는 선언이다. 붓다가 설한 온갖 가르침 속에서 사성제가 차지하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론과 실천의 투톱체계는 사성제로 수렴한다고 하겠는데, 한 마디로 사성제는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반니원경般尼洹經』에는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가 다 이 사제를 알았고, 앞으로 오는 모든 부처도 또 이 사제를 볼 것이니라.’라고 하고 있어 수행의 중심에 사성제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니원경}에는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습니다. 즉, “옛날의 모든 부처님들은 모두 사성제를 깨쳤고, 사성제를 가르치셨다. 후세의 부처님들도 역시 모두 사성제를 깨치고, 사성제를 가르치실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사성제를 깨닫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래서 {반니원경}에서는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마땅히 사성제를 배워야 한다고 설합니다.
“제자들이여, 불법을 배우려하는 자는 반드시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랜 번뇌 속에서 끝없이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 괴로움을 알고 그 집착을 끊은 자는 바로 마음의 눈을 얻은 자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서재영, 동국대 강사, www.buruna.org,「고해를 건너가는 네 가지 진리[四聖諦] 3. 불교를 배우려면 사성제를 배워야 한다」기초교리 강좌에서 인용.)
그러나 경전 어디에도 붓다가 사성제를 깨닫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최초로 설한 가르침이 사성제이지만, 이는 그가 깨달은 것을 정리한 것이지, 사성제 자체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화엄경華嚴經』「사제품」에는 사제의 이름이 부처님마다, 세계마다, 다르다고 하고 있어, 대체적인 진리를 말한 것이라면 수긍할 수는 있다.
부연하자면, 싯다르타는 사제를 깨달아 정각을 이룬 것이 아니고, 성도 후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체계화한 것이 사성제다.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립한 것으로, 그가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리한 싯다르타만의 수행체계인 것이다.
3) 사성제四聖諦,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가 있고, 더하여 애별리고哀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등 팔고八苦에 시달린다. 그것이 바로 고제로, 인생자체가 고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럼 고란 무엇인가? ‘고’란 산스크리트어로 ‘둑카 dukkha’, 즉 원 뜻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히로 사치아 지음, 강인 옮김,『집착을 버려라』 p. 189.) 인간의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그러면 고, 즉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집제集諦는 그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고 있는데, 그 괴로움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생물적 본능에 의한 욕망, 그 타는 목마름[渴愛]으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다. 인간은 원래 괴로움 속에 살 수밖에 없게 설계된 존재인 것이다. 붓다는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악마 파피만의 말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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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악마 파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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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는 것과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는 대비가 재미있다. 둘 다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은 동일한데, 한쪽은 기쁨이 없다고 했고, 한 쪽은 근심이 없다고 했다. 자녀 때문에 소 때문에 어떤 이는 기뻐하고 어떤 이는 근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자식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어떨 때는 기뻐하고, 어떨 때는 근심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과 근심 중 선택하라!
기쁨[樂]과 근심[苦]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착이 어떨 때는 기쁨이 되고 어떨 때는 근심이 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집착은 원래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뿐 것도 아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善] 있고 나쁠 수도[惡] 있다. 자녀나 소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혹은 욕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이 가지는 욕망 중에 하나인 식욕을 보자.
예를 들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하나에 식욕(食慾)이란 것을 들어서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식욕에 의해서 음식을 먹는다. 적당히 먹고 몸을 잘 양육하면 그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탐욕스럽게 먹음으로써 도리어 몸을 손상하게 하는 일도 있다.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훔쳐서 먹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은 ‘선’이 아니다.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 p. 94.)
그러므로 식욕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식욕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욕구이지만, 지나치게 많이 먹을 때는 건강에 나쁠 뿐 아니라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다시 말해 욕구는 나쁜 것이 아니나 지나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앞서 고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마음먹은 대로 하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지나친 욕망이나 욕심에서 비롯된다. 이는 재앙의 씨앗이 되기도 하는데, 아무리 많이 가진 자라도 만족할 줄 모르면 항상 부족할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충고가 “소욕지족少欲知足”이다. 작은 것,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붓다의 遺訓을 담은『유교경遺敎經』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지만,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함이 적어 근심 걱정도 없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남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첨하지 않고, 마음이 편해서 아무런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으며, 하는 일에 여유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 이것을 가리켜 소욕(小欲)이라 한다.
모든 고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알라. 넉넉함을 알면 부유하고 즐거우며 평화롭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지만, 만족할 줄 모르면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흡족하지 않은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 듯해도 사실은 부유하다. 이것을 가리켜 지족(知足)이라 한다.
‘지족자부知足者富’, 족함을 아는 사람이 바로 부자인 것이다. 똑같은 조건을 두고도 한쪽에서는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심 걱정의 원인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억지를 부리지 마라.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되 할 수 없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이다.
또 다시 정리하자면 탐욕의 원인은 무엇인가? 12 연기설에 의하면 노사老死의 고는 생生→유有→취取를 거쳐 애愛에 이르고, 이어 수受→촉觸→육입六入→명색名色→식識→행行을 지나 무명無明에 이른다. 여기서 애愛는 갈애, 욕망, 욕심, 애착, 탐욕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탐욕의 원인은 결국 무명, 무지가 된다. 무명을 없애면 갈애 혹은 탐욕도 없고 연하여 고도 없게 되는 것이다.
『잡아함』에도 ‘탐욕을 떠나면 집착과 마음에서 생긴 얽맴[縛]이 끊어지고, 색에 대한 집착과 마음에서 생긴 얽맴이 끊어진 뒤에는 반연攀緣이 끊어진다. 반연이 끊어지고 나면 그 식識은 머무를 곳이 없게 되어 다시는 성장하거나 뻗어나가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탐욕을 떠나 만족할 줄 알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수행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구야, 색의 경계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나면 색에 대해 뜻이 일으킨 얽맴[縛]도 끊어진다. 색에 대해 뜻이 일으킨 얽매임이 끊어지고 나면 식의 반연(攀緣)도 또한 끊어져, 식(識)은 다시는 머무르지 않게 되고, 늘어나거나 나아가거나 넓어지거나 커지거나 자라는 일이 없게 된다.
(중략)
식이 머무를 곳이 없기 때문에 자라지 못하고, 늘어나고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활동하는 바가 없으며, 활동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머무르고, 머무르기 때문에 족한 줄을 알며, 족한 줄을 알기 때문에 해탈하고, 해탈하기 때문에 모든 세간에서 전혀 취할 것이 없게 되며, 취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게 되고,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열반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아느니라.
비구야, 그러면 나는 ‘식이 동방·남방·서방·북방·4유·상·하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탐욕을 없애고 법을 보았고, 열반을 얻어 번뇌가 완전히 다하였으며, 고요하고 맑고 시원하다’고 말하느니라.”
기독교가 사랑을 강조하는 반면, 불교가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 갈애는 집착이자 탐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다음 단계인 갈애의 소멸과 그 방법에 대한 성제인 멸도滅道로 이어진다.
4) 사성제四聖諦 - 멸제滅諦와 도제道諦
멸제滅諦는 갈애를 없애면 고는 사라진다는 진리이고, 도제道諦는 그 실천 방법이다. 우리는 앞에서 갈애의 원인은 무명이라고 하였는데, 그럼 무명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무명無明은 “유명有明”으로 없앨 수 있다. 무명[어둠]은 유명, 즉 빛, 밝음, 지혜가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육체를 학대하는 지독한 고행을 경험하고 나서, 고행으로는 해탈할 수 없다는 지혜를 얻는다. 육체의 요구에 자신을 내맡기는 ‘향락의 길’과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의 길’을 모두 경험하고는 두 가지 극단極端을 떠난 ‘중도’를 깨달은 것이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오 비구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각묵스님 역,『상윳따 니까야』6권 p. 384.)
붓다는 오 비구를 찾아가 행한 설법에서 고행도 향락도 아닌 중도만이 참다운 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럼 붓다가 주장하는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얼른 생각하기에 고행주의나 향락주의가 아닌 그 중간쯤으로 느껴진다. 어떤 형태로든 이들 두 극단에 빠지기 쉬운 미혹한 중생들을 염려하여, 그 중간에 머물라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붓다는 중도란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인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 말한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중도는 ‘팔지성도八支聖道’이며, 이들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라고 설파하고 있다. 붓다는 앞에서 옛 인도 사회의 고행주의나, 인간 사회에 만연한 향락주의의 양극단에 빠지지 말 것을 주문하였지만, 엉뚱하게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팔지성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팔지성도가 답이다?
팔지성도의 ‘성도聖道’는 ‘바른 길’, 즉 “정도正道”다. 팔지성도는 바로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인 것이다. 중도는 결국 정도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정도, ‘바른 길’인가? 바른 길의 “바른[正]”의 조건은 무엇인가? 일본의 석학 증곡문웅增谷文雄 선생은 팔정도의 첫째 항목이자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정견正見”을 예로 들어, 정견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하나는 망견(妄見)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를 지견(知見)하는 것이다. 그 두 번째는 전도顚倒의 견(見)을 버리고 정견(正見)에 들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 p. 109.)
첫째, 정견이란 망견妄見을 떠나는 것이다. 허망虛妄하거나 망령妄靈되게 보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注視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인간은 탐욕과 진에瞋恚 때문에 왜곡해서 볼 때가 많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사이에 여러 가지 요소가 개재介在되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나름대로의 안경을 쓰고 보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관과 객관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붓다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물통이 있어서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하자. 그러나 만약 그 물이 불에 데워져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든지, 또는 이끼나 풀로 덮여 있다든지, 또는 바람이 쳐서 물결이 일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그 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 155.)
그러므로 정견을 일으키면 사물과 나, 또는 물질계物質界와 정신계精神界 등의 차별이 없어지고, 아울러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에 구애받지 않게 되어, 일체의 번뇌 망상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전도轉倒된 견見을 버리고 정견正見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전도에는 네 가지가 대표적이다. 변해 가는 모든 현상을 변하지 않는다고 사유하는 ‘상전도常顚倒’,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사유하는 ‘낙전도樂顚倒’, 실체가 없는 현상을 실체가 있다고 사유하는 ‘아전도我顚倒’, 더러움을 청정하다고 사유하는 ‘정전도淨顚倒’가 그것이다. 무상無常을 상常으로, 고苦를 낙樂으로, 무아無我를 아我로,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그릇되게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상을 상으로, 고를 낙으로, 무아를 아로, 부정을 정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사전도四顚倒”로 지각과 마음, 그리고 견해의 네 가지 왜곡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뜬 구름 같은 부와 명예에 이끌려 올바른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수시로 접하는 전도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른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는 자칫하면 “비법으로 이익을 얻는 일”에 몰두하기 쉽고, “지혜가 적으면서 명성이 높기”를 바라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이런 전도된 사고방식은 인생의 모든 영역을 채워 버려서 사람들을 미망과 죄악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p. 157~158.)
끝으로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에 들어가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한 쪽으로 기울지 말고 중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그 유명한 “거문고 줄의 비유”이다.
붓다의 제자 중에 소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아주 엄한 수행을 계속했건만 아무리 해도 깨달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망상만이 일어나서 그를 괴롭혔다. 그것을 아신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물으셨다.
“너는 집에 있을 때, 무슨 일을 잘했느냐?”
“대덕이시여, 거문고를 좀 뜯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소나야, 거문고 줄을 아주 팽팽하게 죄면 어떻더냐? 켜기에 좋더냐?”
“대덕이시여, 너무 팽팽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소나야, 아주 허술하게 하면 어떻더냐?”
“대덕이시여, 그리해도 안 되나이다.”
“소나야, 네 말 대로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너무 허술해서는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도(道)의 실천도 그와 같으니라. 쾌락에 빠지는 일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는 아니다. 또 지나치게 서둔다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을 푼다면 게을러지기 쉽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p. 160~162.)
붓다는 쾌락에 빠지는 일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과 극단을 떠나 중도에 설 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에서도 누누이 밝혔지만 욕망을 악한 것이라고 배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어느 한쪽에 지나치지 말라는 것으로, 두 극단을 여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조율을 잘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 사상의 핵심이 되는 이른바 ‘중도’의 참 뜻이다.
이들 세 가지가 ‘바른 길[正道]’의 조건이다. 그리고 정도=중도이고 이는 무명을 타파하는 지혜의 길인 것이다. 수행의 목적은 지혜를 얻기 위함이요, 간화선을 하는 목적 또한 지혜를 기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5) 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앞에서 논의한 대로 사성제 중 도제道諦의 구체적인 실천법이다. 앞에서 언급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을 말한다. 그런데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성도를 이루는 각 부분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각각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팔정도는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하며,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道)’라는 의미이다. 이 도는 팔리어로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는데, 이는 8개의 것이 하나의 성스러운 도의 각 부분을 구성하고 있고, 8개 가운데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7개가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해진다는 상섭(相攝)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팔정도 [八正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팔정도는 정견正見의 “견도見道”와 나머지 일곱 가지의 “수도修道”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모두는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럼 중심이 되는 정견은 무엇인가? 정견은 사물을 바르게 보는 방법으로, 사전적으로는 사제四諦의 이치를 알고 제법諸法의 진상眞相을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智慧를 말한다. 그러므로 정견은 나머지 일곱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자, 정견 또한 나머지 일곱을 온전히 달성해야 이룰 수 있다.
욕망에 어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그것은 비뚤게 보인다. 흐트러지지 않은 맑은 눈으로 우리들은 사물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을까? 그것은 8 정도에서 ② 이하의 항목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예를 들면 올바른 말씨 - 허풍을 치고 거짓말을 하면 우리들의 생각 방법은 엄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게끔 무디게 된다. 올바른 생활 - 폭음, 폭식, 밤새워 도박하기, 이러한 생활을 하면 그만 안이한 사고방식에 빠지게 되고 만다. 이와 같이 고찰하여 8정도의 ②~⑧ 까지 실천에 의해 ①의 正見이 몸에 배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들은 ①의 正見을 체득하지 않고서는 ②~⑧의 항목을 실천할 수 없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07.)
한편, 팔정도는 또 계戒·정定·혜慧 삼학으로 축약 정리할 수 있는데, 정견, 정사는 지혜에 해당하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은 계에 해당하며, 정념, 정정은 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계정혜는 곧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곧 중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팔정도는 평범해 보이지만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실천 수행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정견(正見)을 기체(基體)로 하는 팔정도의 구성은, 그러한 점을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올바른 견해를 갖는다, 올바른 사유(思惟)를 지닌다, 올바른 생업(生業)을 갖는다, 올바른 생업에 몸을 둔다, 그리고 올바른 정진을 계속한다, 이런 것에 의해서 인간 생활의 당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는 붓다의 가르침은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아마 여기에 인간실천의 큰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붓다는 처음으로 그 큰 길을 인류의 세계 속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확립시켜 준 사람이다.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 pp. 242~243.)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간 형성에 있어 아직까지 붓다가 제시하고 있는 팔정도보다 더 훌륭한 덕목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의 설법은 실질적이고 단순하며 실증적이고 현실적이다. 그의 교법은 눈앞에 볼 수 있으며 증명되고, 때를 가리지 않고 적용될 수 있는 명쾌한 것이기도 하다.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 pp. 132~134.)
경조(京兆) 흥선사(興善寺) 유관(惟寬)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매우 좋은 산이구나.”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학인이 도를 물었거늘 어째서 좋은 산이라 하십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산밖에 모르니, 어찌 도를 통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