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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운동 20년,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성과와 한계
임 영 일 (노동사회교육원 이사장)
1. 글머리에
2006년 상반기에 이루어진 금속산업 대기업노조들의 대대적인 산별노조 전환으로 한국 민주노조운동 최대의 조직적 과제인 산별노조 건설은 중요한 고비를 넘었다. 돌이켜보면 기존의 기업별노조들을 단일한 산별노조로 재편하는 첫 단계의 산별노조 건설 과정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는데 1987년 이후 20여 년, 민주노총이 출범한 1995년 이후로도 12년여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민주노총은 2006년 12월 말 기준으로 산하 조합원의 75.6%인 568,803명이 모두 27개의 대·소 산별노조로 편재되어 있으며, 2007년 중 이 비율이 90%이상으로 높아져 산하 조직의 산별 재편이 사실상 완성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민주노총, 2007) 산별노조 건설은 한국노총에 있어서도 최대의 조직적 과제로 이야기되고 있으나, 실제 한국노총 산하 조직의 산별노조 전환 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결국 거의 온전히 1987년을 계기로 새로이 출발한 민주노조운동 세력들에 의해 추진되어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민주노총으로 규합되어 있는 민주노조운동 세력에 의해 추진된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기업별노조 체제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다고 하는 것은 세계 노동운동사상 전례가 없는 과제이며, 따라서 추진 과정에서 많은 선구적이고 실험적인 실천, 견해의 대립, 그리고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는 1987년 이후 이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현황을 검토한 후 향후의 과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산별노조의 모색: 선도적 사례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급성장한 민주노조운동 세력은 이후 독자적인 노조 연대조직 결성을 진행시켜 1989년 말에 이르면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조직을 건설하고 있었다. 제조업 부문의 생산직 노조들이 중심이 된 지역별 연대조직, 비제조업 분야의 사무직, 전문직 노조들이 중심이 된 업종별 연대조직, 그리고 대기업 생산직 노조들이 중심이 된 재벌그룹별 연대조직이 그것이다.
기업별노조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에는 이 중에서 비제조업 업종노조들이 한 걸음 먼저 나서고 있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조직들은 당시의 노동법에 의해서도 합법적 연맹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업종노조들의 중 다수의 노조들이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었는데, 이들은 임금교섭, 단체협약 교섭의 과정에서 개별 사용자가 거의 아무런 자율성이 없고 정부가 사실상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단위 노조별로 정부를 상대로 요구를 관철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 이 부문 노조들은 보다 큰 단위로 확대 개편된 조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셋째, 단위노조들의 지역적 밀집성이 매우 강했다. 업종연맹 산하 대부분의 노조들은 병원연맹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특정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따라서 1993년 이후 업종 노조들은 빠른 속도로 조직 재편에 힘을 기울여 나갔고, 그 과정에서 실질적인 성과도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89년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영향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교조는 그 자체 산별노조라기보다는 단일 직종노조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지만,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전교조 사수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강력한 조직력과 대중 동원력은 기존의 기업별노조와는 전혀 다른 전국적 단일노조의 조직체계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전교조를 포함하여 이 시기 산별조직화를 위한 비제조업 업종노조들의 노력의 사례 중 유형별로 중요한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전국적 단일노조: 전교조
전교조는 출발부터 기업별노조와는 전혀 다른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전교조는 전국 중앙조직, 도별 지부조직, 그리고 시·군 단위 지회조직의 3단계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학교별 조직은 처음부터 상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조합원은 중앙에 직접 가입하고, 모든 재정은 원칙적으로 중앙에 집중되었으며, 노조 사무실도 당연히 사업장 ‘안’이 아니라 ‘밖’에 위치하였다. 조합원 가입자격에 있어서도 전교조는 모범적이었다. 즉 전국의 “유치원,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문교부 및 기타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교직원”이 모두 가입 대상으로 규정되었고(「규약」 제5조 1항), 해직된 자나 임용제외된 자에게도 조합원 자격이 부여되었으며(5조 2항), 나아가 ‘준조합원’ 자격을 신설하여(1989년 12월 10일 개정 규약) 교육대학, 사범대학 등에서 교사 자격을 취득하고도 미발령 상태에 있었던 ‘예비교사들’을 포괄하고자 하였다.
전교조의 이러한 조직체계는 단순히 규약상의 체계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운용되었던 조직체계였다. 비록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강력한 탄압에 직면해 있었지만, 일상 활동의 모든 체계는 이 조직체계를 골간으로 하고 사안별로 설치된 상설, 비상설의 ‘특별위원회’를 두어 교육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들을 포괄하는 등, 전교조는 전국적 단일노조 체계가 지니는 장점을 골고루 보여 준 모범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전교조 조직이 지니는 최대의 강점은 강력한 ‘중앙집중성’에 있었다. 하나의 정책 방침은 의사결정 구조의 사다리(총회-대의원대회-중앙위원회-중앙집행위원회-중앙상임집행위원회)를 따라 민주적 토론과 다수결에 의한 투표로 결정되고, 결정된 정책은 중앙조직-지부-지회의 모든 수준에서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② 단위노조 통합을 통한 단일노조의 건설: 과기노조, 연전노조, 방송사 단일노조
전국과학기술노조(과기노조)는 1988년 7월 창립된 전국연구전문노조협의회에서 출발하여 1989년 연맹으로 전환한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1993년 합법화, 이하 ‘전문노련’) 산하의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 연구소 노동조합들이 단위노조를 해체하고 하나의 노조로 통합(일종의 노조 합병)함으로써 생겨난 최초의 (소)산별 단일노조이다(1994년 4월 15일). 과기노조는 전문노련의 산별노조 조직화 방침에 따라 치밀한 준비 끝에 합법적 단일노조로 전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당시의 노동법 하에서도 산별노조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 중요한 사례였다. 모두 18개 노조가 해산되고 3,500여 조합원을 하나의 노조로 묶을 수 있었다. 여파는 컸다. 우선 전문노련 산하 노조들의 산별 단일노조 조직화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인문사회계 연구소 노조들이 ‘전국연구전문기관노조’(연전노조)를 결성하였고, 다른 연맹 산하 조직들도 과기노조의 사례를 기준으로 단일노조를 추진에 나섰다.
아직은 많은 한계를 지닌 소규모 산별노조였지만, 과기노조는 기업별로 분할되어 있었던 연맹체제와는 비교되기 힘든 강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우선 단체교섭의 구도가 바뀌었다. 과기노조 결성과 함께 단체교섭의 대상은 소속 사업장 대표(기관장)들이 함께 참여하는 교섭구조로 바뀌었고, 나아가 예산배정권을 가진 정부(경제기획원)가 실질적인 교섭대상이 되었다. 재정의 확충, 중앙집중도도 점차 강화되어 갔다. 정치활동의 능력도 크게 신장되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연구기관 통폐합·민영화 방침에 따른 고용위기에 대해 강력한 동원투쟁을 전개함으로써(1994년 12월-95년 2월) 결국 정부의 방침을 철회시키는데 성공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95년 5월의 지방자치제 선거에 4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그 중 3명을 당선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확대된 교섭력과 동원력을 기반으로 노조결성 지원(2개 노조), 노조탄압 저지 등에서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장 조합원들의 신뢰도 크게 높아졌다.
과기노조의 단일노조 건설운동은 연맹 수준에서 처음으로 합법성을 확보했던 언론연맹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언론연맹은 크게 신문사노조와 방송사 노조 두 부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신문사노조보다는 방송사노조들이 먼저 조직통합의 길을 모색했다. 방송사 노조들은 1990년 봄 KBS노조 파업, 같은 해 가을 평화방송노조 파업, 그리고 1992년 MBC노조 파업 등 몇 번에 걸친 대규모 연대파업 투쟁을 거치는 동안 신문사 노조에 비해 높은 조직력과 결속력을 보여 왔고, 이 경험을 기반으로 방송사노조 통합을 추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KBS노조, MBC노조가 추진 중심이 되고 있었는데(양대 노조는 1991년 현재 각각 5,160명, 2,598명의 조합원으로 전체 방송사 노조의 90%를 대표했다), 1992-93년 이후 지속적인 정책, 교육, 홍보사업을 추진하였다. 1994-5년을 거치면서 방송사 단일노조 운동은 우선 그 자체 아직 단일노조 체제를 가지고 못하고 있는 MBC노조의 내부 조직통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민간방송인 MBC는 각 지역의 방송사들이 각각 ‘독립법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체 조합원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서울MBC와 적게는 40명(청주MBC), 많아야 150여명(부산MBC)에 불과한 19개의 소규모 조직들의 연합조직이었다. MBC노조는 과기노조의 사례에 따라 이 20개 노조의 통합-단일 MBC노조의 경로를 먼저 상정하고 이를 먼저 추진했다.(MBC 단일노조는 1996년 11월 30일 출범함)
③ 지역조직 통합: 전국의료보험노조, 전국농협노조
과기노조의 결성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에 ‘전국의료보험공단노동조합’(의보노조), 그리고 ‘전국농업협동조합노동조합’(농협노조)의 전국 단일노조화 노력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과기노조의 경우와는 달리 이 두 노조는 전국적으로 산재한 조직들을 하나로 묶는 것으로 바로 ‘전국적 조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노조들이었다. 조직화는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시·군·구로 산재되어 있는 노조들을 도(道)단위로 묶는 일이었는데, 이 과정은 초기부터 비교적 쉽게 진행되었고, 합법적 지위도 얻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1993년에 이르면 이 두 노조는 도 단위로 통합된 노조들의 연맹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후 이 두 노조는 과기노조와 마찬가지 방식을 통해 전국 통합 단일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과기노조보다 훨씬 큰 조직규모(농협노조 23,000명, 의보노조 4,000여명), 전국적 확산성 등으로 사용자와 정부의 방해 및 불허 방침이 상대적으로 강했으나, 두 노조는 모두 과기노조의 전례를 내세우며 끈질긴 합법적 노조결성과정을 밟아갔다. 결국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의보노조의 합법화가 먼저 이루어지고(1994년 11월), 농협노조는 설립신고-반려-재신고-서류 보완요구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협노조는 합법화와 상관없이 ‘전국농협노조 준비위원회’의 형태로 1995년 11월 민주노총 창립시 이에 가입하였다.
④ 공동교섭: 병원노련, 전문노련, 건설노련, 사무노련
비제조업 업종노조 중 가장 생산직 노조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은 1989년 이후 산별조직화의 방침을 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기노조와는 다른 조건, 즉 가입 단위노조들이 전국적으로 산재해있으며, 임금·근로조건·고용조건에 있어 내부 격차(규모별 격차)가 매우 크고, 단위조합 내 조직원의 직종구성이 매우 복잡하며, 사용자의 구성도 매우 복잡하다는 등의 조건으로 인해 조직재편보다는 교섭의 집중화(공동교섭)의 과정을 먼저 거치면서 내부 통합력을 제고하는 전략으로 기울어 있었다. 공동교섭은 합법화(1993년 6월) 이후 연맹 중앙에 교섭권을 위임하는 방식을 주로 채택하였는데, 조직력이 비교적 강한 서울, 인천의 두 지역본부, 그리고 전국지방공사 의료원 노동조합협의회(지의노협) 3곳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병원규모에 따른 임금조건 등의 차이가 심하여 서울의 경우 대학병원급 7개, 중소병원급 5개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교섭을 진행시켰는데, 1단계는 집단교섭, 2단계는 대각선교섭의 방법이 채택되었다. 참여 병원 수가 적은 인천은 4개병원 집단교섭이, 지의노협은 집단교섭-통일교섭-대각선교섭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1995년의 경우 1994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두 5개 지역본부(서울, 인천, 지의노협, 부산, 대구경북)에서 공동교섭을 추진하게 된다. 연맹에 교섭권을 위임하여 공동교섭에 임한 노조의 수는 1995년에 모두 62개에 달하였다. 조직의 반이 공동임투의 틀 속으로 묶인 것이다.
이 공동임투는 병원연맹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병원노련과 유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전문노련, 건설노련, 사무노련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공동교섭이 이 시기에 추진되었다. 그리고 이 공동교섭의 목표도 모두 동일했다. 즉 이를 통해 내부의 조직간 동질성을 높이고, 중앙지도부에 대한 하부 조직의 신뢰도를 높이며, 조직간, 조합원간 연대의식을 제고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과기노조와 같은 방식으로 업종별로 (소)산별 단일노조를 조직해가는 것이다. 단, 병원노련의 경우는 전국 각 지역에 조직이 산재해 있는 조건을 감안하여 전국 단일산별노조의 전단계로 각 지역본부별 공동임투를 거쳐 지역별 단일 산별노조 조직화를 먼저 추진하고, 이를 토대로 전국적 단일 산별노조로 나아간다고 하는 단계별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들은 각각 1996-99년을 산별노조로의 조직전화의 기간으로 정하고 단계별로 그 조건을 다져가는 작업을 해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한계는 있었다. 우선 사용자들이 이 조직재편과 공동교섭 요구에 지극히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많은 경우 실질적인 효과 보다는 산하 조직들과 조합원들이 이런 작업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교육적 효과’가 더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업종, 그것도 동일업종 내의 소업종의 경계선을 따라, 그리고 고용주체의 성격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조직재편과 공동교섭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탓에 자칫 ‘조금 더 확대된 기업별노조’를 만들어 내는 데 그칠 우려도 있었다. 기업별 종업원 의식은 극복되는 조짐이 있었지만, ‘업종별의식’이라고 불릴 수 있을 또 다른 형태의 확대된 기업별의식이 재생산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들도 제기되었다. 산별노조의 핵심적인 조직원칙이 “자본의 경계선(기업, 업종, 산업 등)이 아니라 노동의 경계선을 따라 계급적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 때, 자본편성의 분리선을 따라 움직여 간 이 실천이 과연 계급적 대중조직 건설의 경로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진행된 이 노력들은 적어도 지도부의 관점에서는 경제적·조합주의적 수준에서나마 주어진 한계 속에서 가능한 한 계급적 산별조직으로 전환해가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 하에서 조직된 것이었다는 점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정부나 사용자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조직 내에서, 조직 간부의 수준에서, 이러한 변화가 기존의 기업별노조 체제 하에서 노조 간부, 특히 위원장의 ‘권한’을 희생하는 것이라는 반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금속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노력
이 시기에 생산직 노조들의 조직전환 과정, 그리고 산별적 공동교섭 실천의 경험은 한 단계 지체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산직 노조는 거의 예외 없이 기존의 한국노총과 조직중복의 상태에 있었고 따라서 노동법이 개정되지 않고서는 어느 연합조직도 합법적 지위를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직재편, 산별노조 건설의 문제보다는 노동법 개정투쟁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둘째,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과정 속에서 이미 연대조직의 틀은 업종이나 산업이 아니라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전노협 조직은 곧 지노협 조직들의 합과 마찬가지였던 상태였으며, 대기업 노조들은 현총련, 대노협 등 그룹별 연대조직의 틀 속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비제조업 업종노조들의 경우와는 달리 산별 조직화를 위해서라도 우선 기존의 연대조직의 틀을 전면적으로 해체-재구성해야 하는 일로 인식되고 있었다.
셋째, 1987년 이후 생산직 노조운동의 중심축이 빠른 속도로 재벌 대기업 노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1992-93년 이후 이 노조들의 대부분이 대외적 연대보다는 내부의 조직안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산별조직화를 위한 논의는 ‘전노협’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추진되었던 데에 비해서, 대기업 노조의 관심은 거의 없었다.
넷째, 운동기조의 차이 문제가 있었다. 생산직 노조운동의 관점에서 보기에 업종 노조 쪽의 조직재편 노력은 그 자체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생산직 노조의 조건이나 ‘정서’에는 잘 맞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특히 생산직노조의 입장에서는 이 노력이 대중동원과 대중투쟁을 기반으로 한 투쟁적 방식이 아니라, 합법화된 연맹들이 지나치게 합법적 방식으로, 법에 의존해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졌다. 말하자면 이들이 보기에 이것은 조직발전이기는 하지만 운동적 관점에서는 다분히 ‘개량주의적’인 것으로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상황과 조건의 차이였다. 1987년 이후 생산직 노조운동은 산업·업종별로 보면 금속부문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노총과의 관계에서 보면 조직적으로도 금속부문은 민주노총 진영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섬유, 화학 등 여타 부문에 있어서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력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생산직 노조의 경우 산별조직화의 문제는 금속산별 조직화의 문제로 집약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금속산별의 건설은 전체 노조운동의 중심을 건설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를 위한 노력은 크게 세 단계(계기)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우선, 생산직노조 내에서 산별조직화의 문제, 특히 금속산별 조직화의 문제는 1991-92년 ‘전노협’ 내에서 먼저 논의가 시작되었다. 전노협은 당시 탄압 속에서 급속한 조직축소를 경험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노협의 조직강화와 산별노조건설’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이 기획되고 있었다. 구체적인 목표는 두 방향으로 잡혀 있었다.
하나는 전노협 조직의 축소가 1989년 이후의 강력한 탄압, 그리고 산업구조 조정과 이에 따른 중소제조업 기업들의 경영난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당시의 조건에서는 ‘상수’와 같은 것이고, 조직의 강화는 결국 전노협 참여를 보류해온 대공장 노조들과의 결합도를 높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기업 노조의 참여는 전노협 조직 강화의 의미와 금속산별노조의 주체 형성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를 위해 ‘대공장 특위’가 설치되었다. 다른 하나는 비제조업 업종노조와 비교할 때 생산직 노조의 업종별 조직분화가 지나치게 미진하다고 판단하고 섬유, 화학, 기계금속의 세 업종에 한하여 업종별 조직화를 적극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업종조직 강화 특위’가 설치되었다.
금속산별노조 건설 노력의 두 번째 단계는 1993년 6월 ‘전노대’ 출범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진전되었다. ‘전노대’에 참여한 생산직 노조들은 크게 ‘전노협’, ‘현총련’, ‘대노협’ 그리고 나중에 별도의 그룹별 노조협의회를 구성한 기아그룹 산하 노조들의 협의체인 ‘기총련’으로 분립되어 있었는데, 이 분립 자체가 ‘전노대’ 내에서 생산직 노조의 상대적 위상과 지위의 하락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등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었던 대규모 조선소 노조들에 의해 추동되었다. 조선소 노조들은 그동안 산재와 직업병 문제 등 사안별로 서로 협의하고 연락해오던 느슨한 연대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전노대’ 출범을 계기로 조선소 노조들의 업종별 조직체를 정식으로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집중적으로 기울여진 것이다. 실제 작업은 전노대 출범 전인 1993년 3월부터 시작되었으며, 4월 30일 대우조선 위원장이 정식으로 ‘제안서’를 발송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5월 1일 조선업종노동조합 대표자회의가 소집되었고 여기에서 월 1회 대표자회의의 정례화, 산안보건·후생복지·조사통계·조직·교육선전 부서의 교류 확대, 합동 세미나, 노조 간부 합동 수련회, 사업장 상호방문 및 조합원간 연대 편지보내기운동, 한라중공업 노조탄압 공동대응 조직 등 조직결속을 위한 실천 경험을 축적해갔다. 1993년 11월 10일 전국노동자대회에 즈음하여 ‘규약’이 확정되었고, 1994년 1월 6일 전노협이 주최한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노조간부들이 사업기조, 부서별 사업방침에 대해 의견을 정리함으로써 사실상 1년여에 걸친 준비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1994년 1월 30일, ‘전국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조선노협)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한진중공업, 한라중공업, 현대미포조선, 코리아타코마 노조를 참가노조로, 삼성중공업, 강남조선, 대동조선, 대선조선, 한진중공업 울산공장, 한진중공업 수리선 노조를 참관노조로 하여 정식 출범한다. 참가노조 조합원 총 수가 35,426명, 참관노조까지 합하면 모두 5만 여의 조직으로 출발한 것이다.
조선노협의 출범은 제조업 생산직 노조의 조직분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노협에 뒤이어 자동차 업종의 조직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조선과 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금속사업장 노조들을 ‘일반기계금속’으로 묶고자 하는 노력도 진행되어 갔다. 조선노협은 민주노총의 조직화를 앞두고 한 걸음 뒤쳐져 있었던 생산직노조의 전국적 재조직화를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특히 출범 준비 과정에서 향후 금속산업 부문의 노동조합들을 함께 묶어 ‘금속연맹’을 조직하고, 이를 토대로 금속산별노조로까지 조직발전을 추동해간다는 입장을 분명히 공유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조선노협 창립선언문은 그 내용의 2/3를 기업별노조를 넘어서 산별노조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금속산별노조 건설의 과제, 그리고 전노협과의 연대 등에 할애하고 있었다.
4. ‘전노협 해산/민주노총 건설’과 금속산별노조: 통합 ‘금속연맹’의 출범
이 시기에 ‘전노대’는 곧 ‘민주노총’으로 전환할 것임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조선노협의 출범과 함께 제조업 노조 조직의 업종 분화가 본격화되자 ‘민주노총’의 출범 일정을 앞당겨 1995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창립 목표 일자로 정하고 이를 위해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총(준))가 조직되었다(1994년 11월). 그러나 ‘민주노총’ 창립은 이후 1995년 11월 10일 전국노동자대회로 늦추어지게 된다. 그것은 생산직노조의 조직화, 특히 금속부문 노조의 총 조직화의 방안의 문제가 전노협을 중심으로 제기되면서 격렬한 내부 논쟁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과 그 결과는 생산직노조의 산별조직화 노력의 세 번째 계기가 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전노협의 해소는 불가피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전노협 조직이 대폭 축소되어 있었고, 업종 조직화 사업은 섬유와 화학에서는 거의 부진했고, 금속에서의 업종분화는 전노협으로 조직적으로 결합하기보다는 전노협의 해소와 금속 전체의 조직재편을 요구하는 분화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노협 ‘이후’의 조직발전 전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조직발전 논의는 이제 향후(전노협의 해소를 전제로) 금속산별노조, 그리고 그 전단계로서의 ‘금속연맹’을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의 문제로 제기되었다.
전노협 내에서는 이와 관련해 ‘제1안’과 ‘제2안’의 두 안이 따로 제출되었고(1994년 5-6월), 양자간의 논쟁은 곧 금속산업 부문 노조 전체로 비화되고 있었다. 이 두 안의 차이는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제1안은 민주노총 출범시까지 전노협의 해소를 전제로 금속 부문 노동조합들을 총규합하여 ‘금속연맹’으로 조직화하자는 것이고, 제2안은 조선, 자동차, 기계금속, 전기전자 등 업종별 연맹으로 분화 조직하여 민주노총에 가입하자는 것이었다.(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정책반, 앞의 자료, 1994) 이 논쟁은 결국 ‘절충’으로 끝났다. 즉 금속연맹을 주창하는 쪽과 업종별 연맹을 주창하는 쪽이 각자 조직화의 노력을 기울이고, 그 현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절충되었다.
‘조선’과 ‘자동차’ 양대 부문이 열쇄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듭된 협의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노협이 기계금속연맹(준비위)와 결합하여 전국민주금속연맹(금속연맹, 혹은 ‘구’금속연맹)을 조직하고, 자동차 업종은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자총련)으로 규합되었다. 이 논쟁의 와중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던 현대자동차에 새로운 민주집행부가 들어섰고(1995년 8월), 따라서 이 집행부의 방침이 양자간의 논쟁을 정리할 마지막 기회였다. 현대자동차 및 그 관련 노조 4-5만의 조직이 어디로 움직이는가가 결국 현실적으로 이 문제의 향방을 결정지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신임 집행부는 양 쪽을 모두 거부하고 ‘현총련’에 남기를 선택했다. 결국 금속 조직은 금속연맹, 자총련, 그리고 금속연맹 참여 조직을 제외한 나머지 노조들로 구성된 현총련으로 3분되었다.
이 시기에 전노협 산하의 대표적 지노협이었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마창노련은 ‘전노협’ 출발부터 실질적으로 전노협의 건설을 추동한 중심 세력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전체 민주노조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지닌 지역조직으로 존재해왔다. 마창노련은 가장 조직 운영이 어려웠던 1992-93년의 시기에도 지역의 미가입 노조들을 결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능한 조직활동가 1명을 이 미가입 중소기업 노조들을 위한 연대사업 담당으로 배치했고, 이 노조들은 미가입 상태에서도 ‘청송회’로 불리우는 위원장 정기 연석회의체(15개 중소기업 노조)를 조직하여 마창노련에 참관하고, 노조 간부들은 마창노련 산하 부서별 회의에 주 1회씩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공동사업을 벌여 왔다. (구)금속연맹이 조직되는 과정에서 마창노련은 가입노조 전부와 이 청송회 노조 전부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재조직되었고, 연대사업의 범위를 넓혀 진주 지역의 중소기업 노조들, 그리고 거제의 대우조선 노조를 포함하는 지역조직으로 탈바꿈했다. 금속연맹 산하 ‘서부경남지부’로 재편된 이 지역조직에는 모두 29개 노조가 가입하고 있고 조합원 수는 23,000으로 늘어났다. 마창노련의 이 확대개편은 금속연맹 조직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창한 지역조직인 마창노련이 서구의 금속산별노조와 같은 유형의 전국적 조직체계, 즉 업종 등의 조직은 산하 분과나 사업부회로 별도 편재하고 조직체계는 전국조직-지역조직-현장조직의 수직적 중앙집중 조직체계를 염두에 둔 조직재편 과정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부경남지부는 이후 산하 노조들의 지역적 통합을 위한 사업, 즉 단위노조들간의 직접적 결합(단일노조화)을 염두에 두고 노조 조직의 통합운영, 공동 수련회, 공동노보 제작 등의 구체적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1995년 민주노총의 출범 이후 3분할된 금속 조직들(금속연맹, 자총련, 현총련)은 다시 통합 금속연맹의 건설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지부진하던 이 작업이 가속도를 받게 된 것은 1997-98년의 IMF 경제위기의 와중이었다. 대규모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대중 실업의 물결 속에서 기업별노조 체제로서는 감당할 수없는 노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산별노조 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98년 민주노총 산하 조직 중 사실상 처음으로 병원연맹이 산별노조로 전환하여 보건의료노조를 출범시켰고, 금속은 3대 조직이 다시 모여 통합 금속연맹을 출범시키게 된다.
1993년 이후 금속부문 노조들이 보여 온 이러한 과정은 한국에서 산별노조의 건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한국의 노동자들을 계급적 조직으로 재편성, 재조직화 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대중조직 수준에서의 계급적 조직재편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그 위에 선 모든 정치적 강령이나 구호, 해방적 목표는 공허한 구호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 과정이 진행되지 않고서는 노동은 자본에 대해서도 국가에 대해서도 협상과 교섭의 파트너 조차도 될 수 없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1987년부터 10년의 기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IMF 경제위기에서 촉발된 노동의 위기를 겪으면서 비로소 지도부의 의지 수준을 넘어서서 대중적인 차원에서 이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다.
5. 민주노총 건설 이후의 산별노조 건설과정
1) 산별조직화의 지체
1995년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는 향후 건설될 민주노총의 조직방침을 산별노조 건설로 정하고 가입 노조들을 향후 건설될 산별노조의 전신으로서의 산별연맹 조직을 통해 가입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11월 창립 당시 민주노총에는 이 방침을 지키지 못하고 그룹별로 가입한 두 개의 조직이 있었고, 지역본부로 가입한 조직들도 다수 있었다.
민주노총 가입조직의 조직형태별 구성 변화(1995-99)
|
95.11.5(창립당시) |
97.5.31 |
98.8.31 |
99.9.30 | ||||
노조수 |
조합원수 |
노조수 |
조합원수 |
노조수 |
조합원수 |
노조수 |
조합원수 | |
전체 |
862 |
418,154 |
1,147 |
525,325 |
1,305 |
508,200 |
1,283 |
535,203 |
산업가맹 그룹가맹 지역가맹 |
734 20 108 |
313,872 52,438 51,844 |
1,083 12 52 |
455,664 57,517 12,144 |
1,276 4 25 |
501,381 4,405 2,414 |
1,251 0 27 |
528,173 0 2,542 |
민주노총의 산별연맹 총연합체로의 조직편제를 지체시킨 가장 주된 원인은 앞에서 말했듯이 금속부문 대기업노동조합들이 금속연맹(당시에는 전국민주금속연맹)에 결합하지 않고 별도의 조직단위를 구성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 계열의 대공장 노조들, 대우조선, 대우중공업 등 대우그룹 계열의 대공장 노조들은 각각 다른 계열사 노조들과 함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를 구성하여 가입하였고, 그 밖에도 기아자동차, 쌍룡자동차 등은 별도로 자동차연맹을 구성하여 가입하는 등, 금속부문 노조들이 3개의 조직으로 분리된 것이다. 민주노총의 핵심 조직인 금속부문 노조들의 산별노조 건설 방향이 불투명한 가운데,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서도 3개 조직으로 분리된 금속부문 노조들의 재통합이 선차적인 과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이 산별노조 전환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절감한 것은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였다. 대규모의 정리해고와 실업, 구조조정 등을 겪으면서 기업별노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전국적, 전산업적 과제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민주노총은 산하 조직의 산별노조로의 조직전환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성과는 매우 미미했다.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 가입형태별 조직현황(2003년 12월말)
노조형태 |
노조수(개) |
조합원수(명) |
비율1(%) |
비율2(%) | ||||
'02.12 |
'03.12 |
'02.12 |
'03.12 |
'02.12 |
'03.12 |
'02.12 |
'03.12 | |
기업별노조 |
796 |
752 |
326,398 |
357,912 |
88.5 |
88.1 |
55.0 |
57.6 |
산별노조 |
25 |
26 |
254,868 |
253,033 |
2.8 |
3.0 |
42.9 |
40.8 |
지역노조 |
78 |
76 |
12,615 |
9,867 |
8.7 |
8.9 |
2.1 |
1.6 |
합 계 |
899 |
854 |
593,881 |
620,812 |
100.0 |
100.0 |
100.0 |
100.0 |
주) 1. 비율1은 노동조합수 기준, 비율2는 조합원수 기준
2. 지역노조는 지역본부를 통해 직가입한 노조임
위에서 보듯이 2003년 말에 이르러서 형식적으로는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의 약 40% 정도가 산별노조 소속으로 되어있지만, 대부분의 산별노조들은 기존의 기업별노조들이 산업, 업종별로 단순히 합병한 조직에 불과했다. 실제로 산별노조 전환과 더불어 산별교섭 등 산별노조로서의 정상적인 기능을 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조직은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의 둘 뿐이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조직들은 산별노조로서의 최소한의 정상적인 활동을 전개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왜소했다. 조합원 9만 정도로 가장 큰 조직인 전교조는 산별노조라기보다는 전국적 단일 직종노조이며, 법에 의하여 단체행동권이 금지되고 단체교섭권도 극히 제한되어 있는 특수 조직이고, 이를 제외한다면 그나마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가 가장 큰 조직이나 그 규모는 3-4만 정도에 불과했다.
이 두 노조 중에서도 1998년 산별노조로 먼저 전환한 보건의료노조는 전환 당시 기존의 기업별노조를 산별노조 산하 기업지부로 단순 개편하였고, 이 기업별 지부에 교섭권과 파업권 등 노동조합으로서의 핵심기능을 여전히 부여하고 있어 정상적인 산별노조로 보기 힘들다. 금속노조는 이와 달리 기초 조직을 지역지부(Local)로 설정하고 기업단위 지회에는 교섭권과 파업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를 기준으로 할 때, 사실상 산별노조로서의 최소한의 조직형식이나 체계를 구비한 것은 금속노조가 유일한 사례라 할 것이다. 금속노조는 금속연맹의 적극적인 주도로 2001년 창립한 이후 2003년에는 최초로 산별 중앙교섭을 성사시키기도 하는 등 모범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왜소한 조직규모, 사용자들의 집중적인 견제와 압박, 그리고 소속 사업장 중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사업장(지회)들의 소극적인 참여 등으로 그 활동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 왔다.
2) 병원연맹과 보건의료노조
병원연맹의 산별노조 건설은 연맹 합법화 직후인 1994년부터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연맹은 우선 매년 계속되던 단체교섭과 파업투쟁을 합법 연맹의 지휘하여 한 단계 높은 ‘공동교섭, 공동투쟁’으로 진행시킨다는 목표를 정하였다. 이를 위해 단위노조들은 연맹 중앙으로 교섭권을 위임하고, 연맹은 지역본부 단위로 집단교섭과 대각선교섭을 추진하는 상황이 1997년까지 계속되었다.
다른 한편, 병원연맹은 ‘산별노조연구소위원회’를 설치하여(1994년 하반기) 산별노조 건설방향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였고, 1997년 3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1년 뒤인 1998년 2월 산별노조를 건설하기로 확정하고 ‘의료산별노조건설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4월에는 ‘의료산별노조건설기획단’을, 10월에는 ‘의료산별노조건설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여기에 6개 분과를 설치하여 세부적인 안을 준비하였다. 단계적 건설론과 동시건설론의 두 입장이 있었으나, 1998년 1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동시건설론을 확정하고 전조직에 걸쳐 일제히 ‘조직변경 결의’를 추진했다.
1998년 2월 27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병원노련 130개 노조 중 93개 노조(71.5%), 조합원 34,286명 중 25,704명(75%)이 산별노조로 전환했고 1998년 3월에 신고필증이 발부되어 합법적 노조로 인정받았다. 미전환 사업장들이 있어 병원노련도 유지되었지만, 주요 노조들은 사실상 100% 전환한 상황이어 이로써 병원노련 시대는 마감되고 보건의료산업노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노조는 산별노조 출범의 의미를 스스로 제한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보건의료노조는 1998-99년은 여전히 산별노조로의 이행기이며, 2000년에 연맹을 해산하고 이후 2004년까지가 산별노조의 모습을 제대로 완비하는 시기가 될 것이고, 2005년 이후에는 더 큰 대산별노조로 발전해 나간다는 조직발전 전략안을 가지고 있었다. 병원노련의 산별노조 건설 과정은 산별노조 건설운동 전체에 있어 기념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이 경험은 다른 모든 조직의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주요한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다.
3) 금속산업연맹과 금속노조
민주노총 출범 당시 금속부문의 노조들은 민주금속연맹, 자동차연맹, 그룹별 노조협의회인 현총련 등 3개 조직으로 나뉘어 이에 가입하였다. 이 3대 조직이 하나로 재규합된 것은 IMF 경제위기 이후인 1988년이다. 세 조직의 통합으로 다시 출발한 금속산업연맹은 이후 산별노조 전환을 핵심적인 조직방침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2001년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의 출범 당시 조직전환을 통해 이에 참여한 노조들은 거의 중소기업 노조들로서 그 규모는 3만에 불과했다. 금속연맹은 이후 연차적으로 산하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금속노조 가입)을 추진했고, 2003년에는 대의원대회에서의 결의를 거쳐 전 조직에 걸쳐 대대적인 산별전환 투표를 추진했으나, 대부분의 노조들은 전환 투표 자체를 실시하지 않았고, 현대자동차나 대우조선 등 주요 대기업노조들이 조합원의 2/3 이상 찬성을 얻지 못해 실패하였으며, 중소기업 노조들을 중심으로 5천여 명이 가입하는 데 그쳤다. 금속 대기업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 실패 내지 거부로 금속연맹은 중소기업 중심으로 재편된 하나의 산별노조(금속노조)와 대기업 중심으로 기업별노조들의 연맹체로서 정상적인 상급조직으로서의 사업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속연맹은 산하 조직들의 산별전환 추진을 핵심 사업으로 정하고, 특별위원회인 ‘산별완성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2006년까지 모든 조직을 산별노조로 전환시킨 후 연맹을 해산한다는 방침까지 정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노조들의 전환 여부가 이 방침의 현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금속노조는 대기업들의 불참 속에서도 독자적인 산별노조로의 활동을 전개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금속노조는 산하에 14개의 지역지부와 1개의 기업지부(만도기계), 그리고 2004년 현재 170개 사업장 지회와 39,677명의 조합원을 가진 단일산별노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체교섭권과 체결권, 파업권 등 노동조합의 핵심 권한은 위원장에게 있으며, 각 15개 지부의 지부장이 위임받은 교섭권을 행사한다. 단체교섭은 지부교섭이 중심이며, 교섭형태는 지부 집단교섭이 중심이나 사용자의 거부로 집단교섭에 불참하는 사업장의 경우에는 대각선교섭이 이루어진다.
창립 첫 해인 2001년에는 지부별 대각선교섭을 추진하는 정도였으나, 2002년에는 대부분의 지부에서 집단교섭을 실시했고, 이를 통해 108개 사업장에서 본조에서 마련한 ‘산별 기본협약’을 기존의 기업별 단체협약에 도입할 수 있었다. 2003년에는 100개 사업장의 사용자들이 산별 중앙교섭에 응하도록 강제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 노동운동사상 처음으로 산별 중앙교섭이 이루어지고 산별협약이 체결되었다. 2004년 중앙교섭에서는 사용자단체를 구성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금속노조의 이러한 성과는 그 자체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지만, 금속노조는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있다. 첫째, 대기업노조들의 가입 지체는 금속노조의 활동에 근본적인 제약으로 작용했다. 작은 규모의 전국적 조직으로서 조직 활동을 정상적으로 전개하기 힘들 정도로 노조 자체의 인적, 재정적 가용자원이 제한되어 있다. 둘째, 대기업노조의 불참은 금속노조 참여 조직들에게도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산별 중앙교섭에는 소속 지회의 절반 정도가 참여하고 있으며, 불참 지회의 대부분은 노조 내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조직들이다. 셋째, 사업장 지회는 노동조합 조직으로서의 독자적 권한이 부여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회는 여전히 선출직 대표(지회장)와 집행부, 재정의 50%와 각종 지회단위 기금, 상근인력의 대부분을 가지고 일상적인 노조 활동을 지속하는 기초 단위가 되어 있었다. 지역지부(Local)는 산하 지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 없이는 산별노조의 핵심 조직으로서의 최소한의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6. 산별노조 건설의 전기: 2006년의 산별전환
지지부진하던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2005-06년에 즈음하여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민주노총은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해서는 총연맹으로서의 독자적인 구체적 기획안, 혹은 실질적 실천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단지 2000년의 전략위원회 및 산별 기획단 등을 통해 마련된 개략적인 방침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IMF 이후 계속되고 있는 조직위기, 특히 조직률 하락, 내부 격차의 확대, 비정규직의 급증에 다른 조직 대표성의 위기 등에 대하여 이를 타개할 조직 방침을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대대적인 강화 외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민주노총은 2005-06년을 민주노총 전조직의 산별전환, 이를 위한 조합원 총투표의 시기로 설정하였다. 산별노조 건설의 실질적 주체인 민주노총 산하 주요 연맹조직들 역시 지지부진하던 산별노조 건설 작업을 이 시기에 맞추어 대대적으로 다시 전개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둘째, 소위 ‘2007년 문제’가 외부적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1998년 노동법 개정 당시 도입된 기업(사업장) 단위 복수노조의 도입, 노조 전임자에 대한 기업의 임금지불 금지 조항의 발효는 이후 두 번에 걸쳐 5년씩 유예되어 2007년부터 발효될 예정이었다. 이 두 조항은 기업별노조 체제를 고수하는 한 극복될 수없는 조직위기를 불러 올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유일한 방안은 산별노조 체제로의 전환 뿐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었다.
셋째,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하여 가장 관건이 되고 있었던 두 조직, 즉 공공연맹과 금속연맹의 지도부들이 이 시기에 들어 산별노조 건설을 최대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특히 금속연맹 산하 대기업 노조, 그 중에서도 금속 뿐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에 가장 튼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국 최대의 기업노조인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산별노조 건설에 가장 적극적인 의지를 지닌 집행부가 2005년 가을 들어섬으로써, 산별노조 건설의 핵심 추진 주체가 형성되고 있었다.
2005-06년의 산별전환은 이런 배경 속에서 유례없는 긴장감 속에서 추진될 수 있었다. 핵심 추진 조직은 공공연맹과 금속연맹이었고, 그 중에서도 금속연맹, 특히 현대자동차를 위시한 자동차 완성사 대기업노조들의 산별전환이 관건이었다.
1) 통합 금속노조의 건설
대기업노조들의 산별 전환이 지체되고 있는 가운데 금속연맹 지도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소수노조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금속노조는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직 확대, 산별교섭의 쟁취, 사용자단체 구성 등 다양한 성과를 쌓아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과소한 규모에서 기인하는 인적, 재정적 자원의 취약함, 상대적 대기업 사업장들의 교섭 불참과 조직 이탈, 선도적 산별노조로서의 활동과 투쟁에 뒤따른 조직피로도의 증가 등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이에 따라 금속연맹은 더 이상 산별전환 사업의 지체를 용인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2006년 상반기 산별전환에 총력을 집중하고 이어 금속연맹을 해산한다고 하는 비상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2005년 가을 조합원 규모 4만 여의 최대 노조인 현대자동차 노조에 산별노조 건설에 가장 적극적인 박유기 집행부가 들어섬으로써 금속연맹의 산별전환 작업은 강한 탄력을 받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상황적 조건들, 민주노총의 방침, 금속연맹의 방침, 그리고 박유기 집행부의 노력이 어우러지면서 현대자동차 내의 여러 현장조직들이 산별전환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박유기 집행부는 한편으로는 짜임새 있는 내부 준비작업을 진행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우차, 기아차 등 완성차 노조들과의 조율작업, 나아가 연맹 내의 다른 사업장들의 간담회나 교육에도 동참하여 산별전환에 대한 자신감을 확산시켜 나갔다.
2006년 6월 말-7월의 금속연맹 산하 조직들의 대대적인 산별 전환 투표는 사용자와 정부, 그리고 특히 보수 언론들의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 등으로 유례없는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현대차를 위시한 완성차 노조들 모두, 그리고 철강, 기계, 조선 등 여타 대기업노조들의 대다수에서 예상과 달리 압도적인 찬성률을 이끌어 내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2006년 11월 23일 금속 산별노조 완성 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으나 조직체계 등 합의되지 못한 쟁점들로 휴회에 들어갔다. 이후 노동법 개정 문제를 둘러싼 총파업 투쟁으로 회의는 계속 연기되었으나 12월 20일 최종적으로 완성대의원대회가 개최되어 마침내 144,492명의 조합원을 지닌 통합 금속노조(전국금속노동조합)가 출범하였다. 이와 더불어 금속연맹은 해산했다. 대우해양조선 노조를 포함하여 산별노조 전환에 성공하지 못한 사업장의 조합원 1만 6천여 명은 참관노조로 남았다.
통합 금속노조 출범 과정에서 최대의 쟁점이었던 조직체계 문제는 본조-지역지부-사업장지회 체계로 일원화하되 3년간의 유예기간을 두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노조들은 기업단위 지부의 지위를 과도적으로 인정받았다. 금속노조는 이후 미전환 노조들의 산별전환, 기업지부들의 지역지부로의 재편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2) 공공부문 노조들의 산별 재편
공공부문 노조들의 산별 재편의 중심축인 공공연맹은 금속연맹에 비해 훨씬 어렵고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공공대산별노조 건설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공공연맹은 2005년 말 현재 그 내부에 운수, 정보통신, 공공서비스, 환경에너지, 공공시설환경, 사회복지, 사회서비스 등 7개의 업종본부로 나뉘어 소속된 300여개 사업장, 10만 여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노조들은 다시 기업별 단위노조, 전국단위 단일노조, 소산별노조 등 다양하고 복잡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공공연맹과는 별도 조직인 택시(11,834명), 버스(1,588명)의 두 개의 소산별노조, 그리고 화물운송 부문의 화물통준위(13,493명) 등 ‘운수 3조직’이 공공연맹 운수본부와 함께 운수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공공연맹은 2006년 9월 27일 대의원대회에서 산별기획단이 중심이 되어 진행해온 논의를 종합한 “산별노조 건설 기본안”을 통과시켰다. 이 안은 2007년 12월 공공연맹과 ‘운수 3조직’을 아우르는 통합 대산별노조(가칭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되, 우선 2006년 말까지 ‘운수 3조직’은 운수노조, 공공연맹은 공공서비스노조의 두 산별노조로 전환할 계획을 담고 있었다. 연맹 산하 노조들의 복잡한 조직체계를 감안하여 공공서비스노조는 노조중앙-지역`업종본부-지부로 복합 구성하되 업종본부는 금속의 경우와 유사하게 3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지역본부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담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많은 의견 대립과 갈등이 있었으나, 2006년 11월 30일 대의원대회에서 공공연맹은 먼저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을 출범시켰으며, 이어 12월 26일에는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이 출범하여 대산별노조 건설의 첫 단계를 넘어섰다. 2007년 1월 19일 통합대의원대회를 통해 공공연맹은 공공운수연맹으로 재편되었다. 통합 공공운수연맹에는 미전환 단위노조들과 함께, 기존의 소산별노조 3개, 그리고 새로 건설된 두 개의 대규모 노조가 포괄되어 있다. 공공운수연맹은 2007년 말까지 이들 조직을 통합하고, 미전환 노조들의 산별전환을 추진하여 예정대로 대산별노조를 출범시키려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공공운수연맹 |
산별노조 |
사업장 수 |
조합원 수 |
산별전환률 |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
42 |
4,944 |
72.21% | |
전국연구전문노동조합 |
29 |
1,984 | ||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
5 |
6,400 | ||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 |
161 |
52,075 | ||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 |
50 |
35,249 |
3) 화섬노조와 제조산별노조 문제
화섬연맹의 산별노조 추진은 2000년 화학연맹과 섬유연맹이 통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001년 산별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4년여가 흐른 2004년 10월 29일 전국화학섬유노동조합(화섬노조)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006년 2월에 이르러서도 화섬노조는 화섬연맹 전체 조합원 2만7천여명 중 6천여명만을 포괄하고 있으며, 산별전환을 결의했음에도 실제로 화섬노조에 가입을 유보하고 있는 사업장도 다수 있었다.
화섬연맹은 조직 규모의 과소함, 조직분포의 업종 및 지역적 불균등성, 산업공동화와 구조조정으로 인한 조직 약화 등 많은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연맹 단위로 독자적인 산별노조 건설운동을 힘 있게 추동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2006년 상반기 화섬연맹도 민주노총의 일정에 맞추어 산별전환 투표를 실시했으나, 대상 사업장 60여개 중 산별전환 투표를 실시한 곳은 중소노조 3곳에 불과했다. 금속연맹의 대대적인 산별전환은 화섬연맹 및 화섬노조에게도 큰 자극이 되어 같은 해 9월22일 연맹 임시대의원대회에서 10월 하순에 다시 미전환사업장들의 동시 산별전환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참여 노조는 역시 7개에 그쳤고, 그나마 가결된 사업장은 중소사업장 1곳 349명에 그쳤다.
화섬연맹의 산별전환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연맹이나 단위사업장 지도부의 의지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화학섬유 산업 자체의 악조건으로 인해 산별노조의 전망이 불투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화섬 내부에서는 화섬 자체의 독자 산별보다는 금속노조와 함께 제조산별노조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미 있었다. 2004년 10월 화학섬유산별노조 창립대회에서도 제조산별노조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2006년 산별전환 노력이 별다른 성과 없이 진행된 속에서 화섬연맹 내에서는 다시 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2006년 11월 23일 금속노조의 산별완성 대의원대회 당시 일부 활동가들이 제조산별 건설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참관했던 바 있고, 연맹 정책 당국자가 이런 흐름을 정리하여 금속노조에 대해 제조산별 건설을 주창하는 제안을 했던 바 있다. 금속노조 역시 내부적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7. 산별노조 건설의 현황과 과제
1) 현황과 전망
아래의 표에서 보듯이 2006년 말 현재 민주노총 산하에는 모두 27개의 산별노조가 존재하고 있으며, 여기에 민주노총 조합원의 75.6%인가 소속되어 있다. 또 현재 규모의 크기와 상관없이 전국단위 대산별노조의 성격을 지니는 산별노조는 금속노조, 공공서비스노조, 운수산업노조, 보건의료노조, 공무원노조, 전교조, 언론노조, 대학노조, 화학섬유노조 등 9개 노조이고 그 조합원은 50만 9천 147명으로 대산별노조 조직률은 67.7%에 달하고 있다.
결국 그동안 진행된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업별 단위노조들을 업종, 연맹 단위로 통합하여 단일 노조로 재조직하는 것, 둘째, 소산별노조들을 재통합하여 연맹단위 대산별노조로 편성하는 것, 셋째, 필요한 경우 연맹의 경계를 넘어 통합 대산별노조를 건설하는 것이 그것이다.
민주노총 산하 연맹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 과정을 밟아 왔다. 금속노조의 경우처럼 2006년을 고비로 이 과정을 일단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조직, 공공연맹의 경우처럼 단계적인 대산별노조 건설의 과정 속에서 세 가지 작업을 모두 병행하고 있는 조직, 사무금융연맹처럼 기왕에 조직된 소산별노조들을 대산별노조로 재통합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하고 있는 조직, 화섬의 경우처럼 연맹 단위 독자 산별보다는 타 조직과의 통합을 모색하는 조직, 언론노련의 경우처럼 조직체계의 추가적 변화보다는 산별노조로서의 내실을 기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는 조직 등 다양한 편차가 존재한다.
민주노총 산별노조 현황 (2006.12.31)
소속 |
노조명 |
지부(회) 수(개) |
조합원수(명) |
비율 (산별/전체) |
건설산업연맹(2개) |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 |
16 |
6,950 |
31.37% |
전국타워크레인노동조합 |
7 |
1,100 | ||
공공운수연맹(5개) |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
42 |
4,944 |
72.21% |
전국연구전문노동조합 |
29 |
1,984 | ||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
5 |
6,400 | ||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 |
161 |
52,075 | ||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 |
50 |
35,249 | ||
교수노조 |
전국교수노동조합 |
8 |
1,062 |
100% |
공무원노조 |
전국공무원노동조합 |
253 |
123,000 |
100% |
금속노조 |
전국금속노동조합 |
201 |
144,492 |
91.5% |
대학노조 |
전국대학노동조합 |
137 |
8,987 |
100% |
병원노련 |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
131 |
35,848 |
|
비정규교수노조 |
전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
4 |
1,000 |
100% |
서비스연맹 |
전국학습지노조 |
4 |
400 |
2.7% |
사무금융연맹(8개) |
전국농업협동조합노동조합 |
76 |
9,474 |
47.13% |
주한외국금융기관노동조합 |
14 |
322 | ||
전국상호저축은행노동조합 |
13 |
352 | ||
전국수산업협동조합노동조합 |
28 |
1,000 | ||
전국생명보험노동조합 |
8 |
2,994 | ||
전국손해보험노동조합 |
14 |
9,545 | ||
전국증권산업노동조합 |
9 |
3,864 | ||
전국축산업협동조합노동조합 |
68 |
3,800 | ||
전국새마을금고노동조합 |
50 |
400 | ||
언론노련 |
전국언론노동조합 |
110 |
16,661 |
92.46% |
전교조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
183 |
90,983 |
100% |
화학섬유연맹 |
전국화학섬유노동조합 |
67 |
5,917 |
23.76% |
지역본부 |
직가입 일반노조 |
86 |
8,227 |
|
총 계 |
27 |
1,688 |
568,803 |
75.60% |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6년을 경과하면서 민주노총의 산별조직화는 한 단계 구획을 짓는 성과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산별노조 건설의 전체적인 목표와 경로가 조직 전체에 걸쳐 공유되기에 이르렀다. 기업별노조 체제를 벗어나 산별노조 체제로 단계적으로 이행하되, 기왕의 산업업종별 조직 구획에 구애되지 않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대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가는 것이 곧 그것이다. 둘째, 전체 산별노조 건설운동을 견인하는 핵심 주체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주노총 내에서 금속과 공공의 두 핵심부문의 중심성과 선도성이 확고해진 것이다. 셋째, 첫 단계 산별노조 건설 작업의 성과 위에서 산별노조 건설의 다음 단계의 과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2) 과제들
한국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아직도 산적했다. 산별노조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우려를 가지고 있는 지본과 정부의 입장은 그간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의 산별교섭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부와 자본도 이것이 한국 노동조합의 조직전환의 대세가 되어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하며, 따라서 산별노조 그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산별교섭을 해태하거나 자본의 입맛에 맞는 교섭구조를 고집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산별 노사관계와는 걸맞지 않는 법제도적 문제들을 감안할 때, 제도개선의 과제 역시 산적해있다. 민주노총은 산별교섭을 뒷받침하고 나아가 산별협약의 효력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데 필요한 법제도 개선 방안을 이미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민주노총, 2007: 43-48)
그러나 한국의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아직은 해결해 나가야 할 주체적인 과제가 더 많고 더 중요하다고 인식되어야 한다.
첫째, 한국의 산별노조 건설 운동은 해당 조직의 조합원의 권리를 단체교섭과 투쟁을 통해 더 신장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지금까지의 산별노조 건설은 기존의 기업별노조의 조직형태를 변경함으로써 큰 규모의 단일노조를 만드는 첫 단계를 겨우 경과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다음 단계의 조직 과제로 나아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조직과제는 산별노조의 집중화된 인적, 재정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가동하여 90%에 달하는 미조직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산별노조들은 교섭모델보다는 조직화모델에 더 비중을 두는 활동 전략을 구체화해 나갈 과제를 안고 있다.
둘째, 지금 현재의 대부분의 산별노조는 여전히 ‘반쪽짜리’ 산별노조들이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산별노조로의 조직재편 이후에도 기업별노조의 유산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산별노조의 기초 단위가 여전히 기업 혹은 사업장단위로 되어 있어, 조직의 중앙집중성이 여전히 약하고 노조 활동의 중심이 여전히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 조직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 산별노조의 기초 단위를 지역조직(Local)로 온전히 전환시키고 있는 노조는 없다. 금속노조가 그나마 한발 앞서 적어도 조직체계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아직 매우 부실하고 불완전하며, 나머지 조직들의 경우는 사정이 더 심각하다.
셋째, 지난 20 여 년 동안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총괄적 과제를 향한 많은 노력이 있었고, 상당한 정도의 진전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노동운동의 핵심적 기반인 현장조직의 약화 현상이 전 조직에 걸쳐 눈에 띠게 강화되고 있었다. 불가피한 객관적인 연건의 변화가 있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노동운동의 주체적 요인들 역시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산별전환에 이어 노동운동의 기조를 재정립하고 지도부와 평조합원들간의 벌어진 간극을 메우기 위한 집중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금속을 위시해서 여러 산별노조들이 기존의 단위노조 집행부-조합원 체계를 조합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현장위원 체제로 개편하는 것을 현장조직 재편(재강화)의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침이나 실천은 아직 없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는 산별 본조-지역지부(Local)-작업장에 이르는 산별노조의 전 조직운영체계에 대한 세밀한 설계, 선도적인 실천 경험의 축적, 단계적 환산 등의 주도면밀한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매우 예민하고 어려운 일이긴 하나 이 문제는 대규모 조직의 관료화를 방지하고 대중적 참여와 동원에 기반한 노동운동의 역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적 과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