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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
1.관광 : 낙화암
< 낙화암 >
부소산성을 한바퀴 돌아본 우리는 부여의 명소로 알려진 낙화암(落花巖)으로 향하였다. 백마강(白馬江)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절벽 위에 육각형으로 지어진 백화정(百花亭)이 자리하고 있다.사비가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유린될 때에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천궁녀전설로 하여 ‘낙화암’ 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이 얻어졌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곧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 이다.
낙화암의 전설은 아마도 나라 잃은 서러움을 가눌 길 없는 백성들에 의하여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 또 이 백화정이라는 정자는 1929년에 지방 유림들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니 이 또한 나라 잃은 서러움의 간접표현이 아니었겠는가.낙화암 옆으로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면 절벽 중턱에 자그마한 절 고란사(皐蘭寺)가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서 있고, 절 뒤에는 왕이 마셨다는 약수가 있는데 그 위에 이곳에만 있다는 세계적인 희귀 식물 ‘고란초’ 가 있다.
그런데 그 절 뒷벽에 걸려 있는 고란초의 내력이 흥미롭다. 원효대사가 백마강 하류에서 물맛을 보고, 그 물맛을 따라 이곳에 와서 특이한 난초를 발견하여 고란초라 이름하였으며,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고란사라고 했단다.고란사 바로 밑에 백마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이 있고, 그 유람선을 타야 낙화암을 비롯한 백마강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련만 아직은 겨울이어서 관광객이 없으니 유람선이 뜰 것 같지 않았다.아쉬움을 안고 다시 산으로 오르려 하는데 배낭을 멘 여학생 두 명이 선착장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다. 최소 7명이 되어야 운행을 한다는데 우리가 합세하면 5명, 그래도 두 명이 모자란다.운임을 좀 더 부담하고서라도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가서 어리광을 부리더니 유람선이 생색을 내며 출발한다. 학생들은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두 주일의 여정으로 호남을 시발로 하여 익산을 거처서 부여에 왔고 이곳을 보고는 공주로 갈 예정이란다.여행목적도 우리와 똑 같은 백제유적 탐방이었고, 가보려고 하는 곳도 우리와 같았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엇을 전공하는 학생들인지는 모르지만 역사의식과 문화유적에 관한 조예가 상당한 수준임을 알고 부여에서의 여정을 함께하기로 했다.과연 백마강 위에서 바라보는 낙화암과 그 주변은 참으로 절경이었다. 선착장의 약간 상류쪽에 한 바위섬이 있는데 이를 조룡대(釣龍臺)라 하여 용을 낚은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박마강을 건너려고 하면 갑자기 안개가 자옥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고, 강물은 소용둘이처서 건널 수가 없었다고 한다.의자왕(義慈王)의 부왕인 무왕(武王)이 용이 되어 백마강을 지키고 있기 때문임을 안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올인 곳이 바로 이 바위섬이란다. 그래서 백마강이 되었을까? 한 나라가 120여년이나 도읍했던 곳이면서도 변변한 유적 하나 남아 있지 않는 곳 부여, 그래서 유민들은 애잔한 정서를 지니고 가는 곳마다 조금씩은 서글픈 전설을 흘리고 있는가 보다.백마강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유람선은 부소산을 돌아 구드래나루 선착장에 도착했다. ‘구드래’ 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 나루터 이름 외엔 남아있지 않고,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지금도 백제를 가르쳐 ‘구다라’ 라고 한다.구드래는 예로부터 부여에서 청양으로 통하던 나루터였다는데 지금은 현대식 조각공원으로 가꿔져 있고, 몇 점의 석탑과 목제 장승들을 한쪽에 모아서 옛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 공주 ]
2.관광 : 무령왕릉
한반도의 중심 너른 평야에서 탄생하여, 바다에서는 해상왕국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던 백제. 이 백제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고 있나요?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내려온 주몽의 자손인 온조가 한강 유역의 비옥한 땅과 풍부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차례로 정벌하여 백제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어요. 초기 350년, 근초고왕은 북으로 황해도 일대를, 남으로는 마한 전 지역을 확보하며,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해상무역을 통해 주변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해외로 활동무대를 넓히며 백제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강한 백제도 위기를 겪게 되었어요.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한 거에요. 당시 백제의 개로왕은 한성을 빼앗겼고, 동생인 문주왕에 이르러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며 정치를 안정시켰지만 암살을 당하였어요. 이 혼란을 수습한 왕이 바로 무령왕입니다. 무령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백제의 위상을 보여줬어요.
3.관광 : 공주박물관
허리띠를 장식하였던 금속공예품들입니다. 두 개의 금판에는 도깨비얼굴과 두꺼비무늬가 맞새김 되어 있고, 허리띠장식 끝부분의 직사각형 은판에는 주작과 백호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깨비문양은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시물
신발(왕비),무령왕릉 출토 중국도자기, 청자뚜껑단지,
색유리구슬,박물관소개,무령왕릉실,무령왕은 누구인가?,무령왕은 누구인가?,무령왕릉의 발굴, 묘지석, 진묘수, 무령왕릉의 구조, 백제의 묘제, 벽돌, 금송(나무관), 관못, 꽃모양 은장식, 백제의 금속공예, 귀걸이(왕),봉황장식 큰칼, 신발(왕),베개·발받침(왕),유리동자상,귀걸이,글자가 있는 은팔찌, 오수전,모자형장식,여러 가지 모양의 금·은 장식,청동거울,등잔,동제수저,청동다리미,받침있는은잔,정지산 유적, 정지산 출토유물,금동관음보살입상,계유명천불비상,야외전시실,화살촉,검은간토기,양관와사의 전돌 ,흑갈유단지, 벼루, 연꽃 무늬가 있는 막새기와,잎모양관꾸미개,덩이쇠,짧은목단지,백제의 무기와 마구, 은새김고리자루칼, 송산리 고분군,선진문물의 수용,동전무늬가 있는 항아리 조각,웅진 백제의 여명-마한, 세발토기, 한성에서 웅진으로,웅진 백제의 융성,화살통장식,그릇받침,양직공도,닭모양주전자,신라/가야/왜의 교류,말탄 사람을 새긴 항아리, 공산성, 월평동 유적/나무창고, 백제의 악기, 백제 8현금 양이두, 백제의 불교문화, 대통사명기와, 흙으로 구운 불상받침, 대통사지석조, 기타 부대시설,서혈사지석조여래좌상,체험학습실
※백제 웅진시대 대중교류 재개
“백제의 웅진 도읍기 초기에는 남조의 송(宋)이나 북조의 북위(北魏) 등과 교류를 시도하였으나 천도 이후 내정이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교류의 유일한 통로였던 서해의 해상권을 고구려에 빼앗겨 교류가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성왕-무령왕 대를 거치면서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 남조의 남제와 송-양에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을 받는 등 활발한 교류를 재개하여, 천도 이후 어려웠던 국가 위기를 중국과의 국제 외교를 통하여 타개하려고 하였다.이러한 노력으로 무령왕대에는 고구려에 빼앗겼던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아 대중교류가 재개된다. 이와 같은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송산리고분군의 전축분과 무령왕릉의 중국 문물들, 그리고 부여-익산-부안 등 금강수계의 거점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 도자기들로 사서에 전하는 중국과의 교섭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송산리고분군의 6호분과 7호분(무령왕릉) 등의 전축분은 고구려에 빼앗겼던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아 대중교류(對中交流)가 재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전을 이용한 장묘문화는 중국 한대(漢代) 이래 왕, 또는 상류지배자들의 무덤으로 남조(南朝)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국제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됨에 따라 각지로 파급되었는데 무덤방과 널길 그리고 배수구 등 묘전으로 쓰인 무령왕릉의 전은 모두 28종류 이상으로 세분되며, 중국 남조 전의 형태와 일치하고 문자와 문양을 새긴 부위도 거의 일치 하는 등 남조의 전이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웅진시대에 재개되었던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써 무령왕릉과 송산리6호분, 교촌리3호분 등 송산리와 교촌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웅진도읍기 공주지역에만 한정되어 나타난다.그리고 웅진시대 후반의 장묘문화는 묘의 축조에 있어서만 중국의 풍습을 따른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부장품도 중국의 형식을 따르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묘실입구의 석수와 지석이 그것이다. 무령왕릉의 유물은 전축분과 함께 웅진시대의 대중교류를 밝히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무령왕릉의 전(塼)과 석수(石獸<돌짐승>), 지석(誌石)은 고구려에 빼앗겼던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아 대중교류(對中交流)가 재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수는 진묘수의 일종으로 진묘수는 기괴한 생김새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惡鬼)를 쫓아 죽은 사람을 지킨다는 중국 부장문화의 일종으로 대개 묘실 입구에 놓아 사자의 방을 지키게 하는 의미이로서의 부장품이다.그리고 무령왕릉 지석(능의 주인에 대한 기록과 땅의신<地神>에게 땅을 사서 죽은자를 안장한다는 일종의 주술적 가치를 지닌 널판형의 돌문서로 그 비용을 지불했다는 의미로 실제 쓰이는 돈과 함께 매장한다)은 왕릉의 널길 입구에 2장이 놓여 있었는데, 발굴당시 지석 위에서 오수(五銖)라는 글씨가 새겨진 철전(鐵錢<철로만든 돈>)이 한 꾸러미 발견되었다. 이 오수전은 토지 신에게 무덤 터를 사기 위해 실제 유통되는 돈을 무덤 안에 넣은 것으로 중국에서 유행하던 도교사상(道敎思想)의 영향으로 보이며 묘의 축조는 물론 부장문화 까지 중국의 풍습을 따른 것은 무령왕 대에 이르러 그만큼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낙화암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 소리를 들었고,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이던 의자왕(?~660, 재위 641~660)이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는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대로 음란과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났던 것인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해동의 증자’로 불리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서동요’로 널리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로맨스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인가?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가 외가가 적국인 신라이기 때문이고, 유난히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한 것이 그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서는 진평왕의 딸로 천명과 덕만 두 명의 이름만 기록했을 뿐 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해 언급해놓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선화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했으나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 지역 유력한 호족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존재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무왕 33년)의 일이다. 정확한 출생년도가 전하지 않지만 아들의 나이로 추정해보건대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견제 속에서 무사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행실을 반듯하게 해 좋은 평판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삼국사기]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까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당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했다는 인물이다.
즉위 후 민심을 안정시키고 권력 기반을 다지다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태자 책봉이 늦었던 원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해 국내를 순무하며 죄수의 정상을 기록하여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진 뒤, 외부적으로는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바로 다음달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다.
그런데 문제는 대야성의 성주 품석이 김춘추의 사위이고, 이 싸움의 와중에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는 데 있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 그러고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며 벽제 멸망에 온 힘을 쏟기로 결심했다고 전한다. 그 뒤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한다. 비록 당이 김춘추의 설득에 신라와 군사 연합을 맺었지만, 이전까지 백제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을 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재위 3년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했다. 당항성은 신라와 당나라의 해로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당항성이 공격 당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고, 그것을 안 의자왕은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등 국제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벌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 신라의 일곱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탁월했다. 의자왕 집권 전반기 백제와 신라는 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분명 백제에게 있었다.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러나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의 치세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해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듬해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나당연합군의 침입에 700년 역사의 백제는 무너지고
백제가 이러한 분열을 겪고 있을 무렵 나당연합군이 침입했다. 13만 대군을 이끈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물도에 정박했고,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백제의 동부 전선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의 조정은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에 맞서게 했다. 백제군은 열 배가 되는 적들과 만나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후 당나라 군사까지 사비성에 들이닥치자 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변읍으로 달아났다.
이때 달아난 곳이 웅진성이었고, 이곳은 선왕인 무왕 때 임시 수도로 쓰이기도 했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게다가 가까이 임존성이 있어 두 성이 서로 지원하며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듯하다. 실제로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부흥 세력들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3년간이나 지켜낸 성이기도 하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들어가 지방군을 모으고 적들이 차지한 사비성을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웅진성으로 들어간 지 닷새 만에, 특별히 적들이 공격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의자왕은 항복을 하고 만다. 그 닷새 동안 웅진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의자왕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새로운 단서
2008년 의자왕의 마지막에 대한 단서를 주는 유물 하나가 발견되어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 북망산에서 예식진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묘비가 출토된 것이다. 그는 당나라 좌위위 대장군에 오른 사람으로 백제 웅진 출신이라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데 할아버지 대부터 좌평을 지냈던 백제의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인데 우리 역사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구당서] ‘소정방’ 편에서 다시 그 이름을 찾아냈다.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려와서 항복했다.
여기서 예식은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당나라에 항복한 주체가 의자왕이 아니라 예식이라는 말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전하는 백제 멸망 과정과도 이어진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
이 두 기록은 의자왕이 스스로 당나라에게 항복했던 것이 아니라,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했음을 증언한다. 의자왕이 예식진이 지키고 있는 웅진성으로 들어왔는데,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에 항복했다는 말이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은 뒤, 태자 효, 왕자 융∙연 및 대신과 장병, 그리고 백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700년 역사의 백제는 이렇게 무너지고, 의자왕은 망국의 주범이 되었다.
‘삼천궁녀’를 거느린 호색한으로 낙인 찍힌 의자왕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 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백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에 흡수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의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중기 시인이었던 민제인의 [백마강부]라는 시에서 ‘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을 처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문인들이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지금까지 대중가요에 삼천궁녀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수십 곡 불리면서 의자왕은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왕으로 왜곡되었다. 그러니까 삼천궁녀는 방탕했던 호색 군자라는 의자왕의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첫댓글 삼천 궁녀 뒤에 숨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정확이 검증 해볼 필요 가 있다고 봄니다 역사는 왜곡 되어서도 안 되지만 진실이 묻히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고 생각 함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감니다 감사 함니다 늘 행복 하시고 건승 하소서
역사인문학강좌를 가끔들으면 역사를 새롭게 아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정보있으심 남겨주세요
도울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남니다 역사는 사기라고, 그이유는 그 역사는 승자에 기록 일 뿐이기 때문임니다 승자는 패자에 역사를 마음대로 유린 할수 있기 때문이죠
정말 그런것 같아요 역사기록은 한시대가 지나면 쓴다는 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