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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점리 |
추점리는 법정마을인 추점리의 중심마을이다. 예로부터 가래나무(추자나무)가 많아서 추동이라 하였다. 가래올·가래울·가래월로도 부른다. 전답의 비율이 균일하고 땅이 비옥해 의식주가 풍족한 마을이다. 장연면에서 가장 장수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마을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오가천이 증보들과 용산들로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마을의 뒤쪽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난다. 자연마을로는 본 마을인 가래울과 구름들, 뒷골이 있다. 하지만 뒷골은 1970년대 화전 정리로 없어졌다.
조선 세종 당시 추동(추점)은 충주 동면의 수안보 지역으로 교통 요충지였고, 외지인들의 통행량이 많았다. 외부인의 통행량이 많아지면 자연히 주막이 발달하게 되는데, 당시의 통계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789년(정조 13)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면의면 지역에 주막이 5군데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정골(주점골)도 이중 하나가 아닌가 추정된다. 이로써 추점리가 수안보와 통하는 교통의 요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연풍현의 지역 편제가 게의 집게발톱마냥 들쑥날쑥(게 어금니처럼)해 연풍현에서 새로운 지역 편제를 상소하였다. 이후 충주에 속했던 추점리를 연풍현으로 이속하고 관할케 하였는데, 이때부터 추점리는 연풍현 관할로 면의면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연마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ha) |
추점리 |
가래울, 구름들, 뒷골 |
101 |
205 |
517 |
∎주요 생산물
추점리에서는 마을 중앙을 흐르는 오가천을 따라 좌우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장연사과 재배를 위해 논을 과수원으로 바꾼 곳이 많다. 마을 뒷산 쪽에서는 옥수수와 고추를 많이 재배한다. 또 구름들로 부르는 운평(雲坪)에서는 벼, 옥수수, 잡곡 등이 많이 재배된다.
∎지명 유래
• 가래올(가래울·가래월·추동·추점):추점리의 중심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마을 뒷산 참나무 숲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백로 서식지로 유명하였다. 또 운평 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추점 삼거리에는 천연기념물인 미선나무 자생지가 있어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 구잿말(점골):가래올 북쪽에 있는 구름들 지역의 골짜기이다.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예전에 몇 가구가 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 구름들(운평):가래올 북쪽 마을이다. 앞들이 매우 기름진 곳으로, 안개구름이 자주 낀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 뒷골:가래올 뒤편에 있던 마을이다. 10여 가구가 거주하다가 1974년 일제 화전 정리로 모두 이주하고 현재는 과수원과 계사만이 쓸쓸히 뒷골을 지키고 있다. 한자어로는 후곡(後谷)이다.
• 서당말:저수지 속골에 서당에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서당골이라고도 한다. 주정골 입구이다.
• 상산천:뒷골 입구. 저수지 앞들이다.
• 봉골:수안보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곳이라 해서 봉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는 노인 요양원이 들어서 있다.
• 옷나무골:가래울 북쪽에 있는 들이다.
• 샛골:추점에서 방곡으로 넘어가기 전에 있는 계곡이다.
• 웃잿말:운평 앞들이다. 밑들은 중골이다.
• 뒷무실:운평 뒷산이다. 칼밭골도 있다.
• 안밭들골:추점 속구렁 박달산 쪽이다.
• 천장골:추점에서 베리산 쪽으로 보이는 비탈이다.
• 밤람재:추점 삼거리에서 수회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속새들:석산교 밑에서 추점까지의 들을 일컫는다.
• 중보들:추점에서 추점 삼거리에 걸쳐 있는 오른쪽 들이다.
• 용산들:추점에서 추점 삼거리에 걸쳐 있는 왼쪽 들이다.
• 구재말들:추점 삼거리에서 바람재 사이에 있는 계곡이다.
• 베리산:뒷골 앞산, 추동 뒷산이다.
• 오가천:오가리에서 발원해 추점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 바람재산:추점 삼거리에서 수회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 큰 산이다. 해발 고도는 301.1m이다.
• 운평 뒷산: 운평 뒤쪽에 있는 큰 산이다. 해발고도는 404m이다.
∎마을 유래비
추점리의 마을 유래비는 따로 없다. 추점리 입구에 서 있는 장수동네 표지석이 마을 자랑비를 대신한다. 마을 표지석에 나와 있듯이 추점리는 장연면의 대표적인 장수마을이다.
이 마을 주민 202명 가운데 60세 이상이 90여명으로 마을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 중 60대가 30명(남자 17명, 여자 13명), 70대가 42명(남자 19명, 여자 23명), 80대가 18명(남자 8명, 여자 10명)이고, 101살 할아버지도 한 분 계실 만큼 장수 인구가 많다. 101살 김차응 옹은 현재 서울의 자녀 집에 머물고 있다. 장수 비결은 박달산의 맑은 물과 수려하고 깨끗한 마을 환경이다.
∎마을 문화유산
• 추점리 미선나무 자생지(‘문화유산’ 편 참조)
∎공공기관
• 추점 마을회관
• 추점교회
• 운평리 마을공동작업장
∎역대 마을이장
추점리 역대이장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유재호 |
1946. 01.31 |
14대 |
이상록 |
1983. 01.22 |
2대 |
김순귀 |
1949. 08.31 |
15대 |
유영승 |
1986. 01.01 |
3대 |
임봉규 |
1952. 12.19 |
16대 |
유석환 |
1988. 01.01 |
4대 |
김정인 |
1957. 01.15 |
17대 |
이상록 |
1990. 01.05 |
5대 |
심상택 |
1959. 12.30 |
18대 |
유석환 |
1997. 01.01 |
6대 |
심상택 |
1961. 06.25 |
19대 |
유병태 |
1998. 01.01 |
7대 |
김봉기 |
1965. 01.07 |
20대 |
이상록 |
2000. 01.01 |
8대 |
오정환 |
1965. 12.29 |
21대 |
정선택 |
2001. 01.01 |
9대 |
유보룡 |
1967. 02.15 |
22대 |
유춘재 |
2003. 01.01 |
10대 |
오정환 |
1969. 04.30 |
23대 |
오세명 |
2005. 01.01 |
11대 |
김종학 |
1972. 01.01 |
24대 |
유춘재 |
2008. 01.01 |
12대 |
정영택 |
1977. 01.01 |
25대 |
윤재학 |
2012. 01.01 |
13대 |
유영태 |
1981. 02.0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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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08. 31일 추점과 석산이 병합되어 당시 추점리 이장 김순귀씨가 전체 이장을 역임 |
∎역대 노인회장
1대 정운욱, 2대 최기용, 3대 정영택, 4대 최영탁, 5대 정선택, 6대 정영택, 7대 최영탁
∎역대 여성노인회장
1대~3대 이창남, 4대 정승진
∎역대 새마을지도자
1대 조흥달, 2대 정영택, 3대 유영태, 4대 한선옥, 5대 이상록, 6대 임종국,
7대 오세명, 8대 엄장옥, 9대 안창환
∎역대 새마을부녀회장
1대 이복순, 2대 최청자, 3대 이상전, 4대 귀혜자, 5대 배순옥, 6대 류경연
∎마을을 빛낸 인물
김차응 - 장연면장 역임
김태윤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한종수 - 예비역 소령
김태오 - 경찰공무원(경감 퇴임)
지용옥 - 충청북도 문화국장, 소설가
이대중 - 장연면장 역임
유남성 - 육상(투창) 국가대표
유영태 - 괴산군수 표창(지역 개발 부문)
안창환 - 대한적십자사 총재 표창(봉사 부문)
김경식 - 문인, 시인
이선규 - 검찰직 공무원
지용민 - 법무사
∎삶의 현장
추점 삼거리를 지나 가래울 마을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을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육중한 두 개의 돌로 만든 마을 표지석에는 ‘추점리, 장수마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표지석 양 옆으로는 사과나무가 빼곡하다. 최근 장연사과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면서 추점리에서도 사과농사가 활발하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마을회관이 나온다. 마을회관은 마을 어른들의 쉼터이자 생활 터전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이 마을 어른들은 매일 마을회관에 모여 각자 내놓은 쌀로 점심을 만들어 먹는다. 식사 준비는 70대 할머니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한다. 10여 년째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이곳이 마을 어른들의 생활 터전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추점리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꾸준히 동고사를 지내 오고 있다. 동고사 때는 박달산 자연식수가 마르지 않고, 마을 주민들이 평안하게 해 달라고 기원한다. 이 동고사는 해마다 음력 오월 단오 때면 어김없이 열린다. 박달산 중턱에 위치한 옹달샘에 돼지머리로 제상을 차리고 기원제를 올린 뒤, 주민 화합잔치의 일환으로 줄다리기를 한다.
마을에서 박달산 쪽을 바라보면 옛 백로 서식지가 눈에 들어온다. 1970년대 초까지 이곳은 백로 서식지로 유명하였다.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추점교회가 나온다. 장연면을 둘러보면 잘 알 수 있듯이 큰 마을마다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 교회도 1955년 생긴 이래 지금까지 주민들과 한 가족처럼 지내 왔다.
추점리의 주요 농산물은 대학찰옥수수와 장연사과이다. 517번 지방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사과 밭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유혹한다. 마을 뒤편으로도 사과나무가 빼곡하다. 장연대학찰옥수수는 이제 장연면 전역에서 재배되는 장연면의 효자 농산물이다 이곳 추점리도 예외가 아니다. 추점 삼거리에서는 여름이면 도로변에 대학찰옥수수 판매점을 열어 여행자들에게 직접 판매한다.
이 마을의 장수 비결 중 하나로 박달산에서 나오는 풍부한 임산물을 빼놓을 수 없다. 각종 야생 버섯과 산나물이 많아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 줌은 물론 마을 소득원이 되기도 한다. 추점리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마을 어른들로 이루어진 게이트볼 팀이다.
장연면에 구성된 6개 팀 가운데 4개 팀(남자, 여자 각 2개 팀)이 이 마을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회관의 할머니들 방에는 전국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고 받은 컵이 즐비하다. 마을 앞에 게이트볼장까지 만들어져 있어 1주일에 2∼3번씩 게임을 즐긴다.
가래울 마을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뒷골이다. 1970년대 화전 정리로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다. 뒷골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추점리 미선나무 자생지가 나온다.
1965년 괴산 경찰서 장연지서의 강찬구 순경이 처음 발견한 미선나무 자생지는 추점리의 큰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미선나무 자생지 바로 옆에는 약수터인 추점유샘이 있다.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면 계곡 사이로 구름들(운평)이 나온다. 구름들은 마을 앞에 안개가 자주 끼어 붙은 이름이다. 구름들은 긴 골짜기 사이에 있는 데다 마을 앞으로 오가천이 흘러 지형상 물안개가 자주 낀다. 운평에는 농협 대학찰옥수수 창고와 이만규 대표가 운영하는 잡곡 생산공장 월드그린이 자리 잡고 있다.
추점리의 성씨분포는 다음과 같다.
이씨 12세대, 최씨 4세대, 유씨 11세대, 지씨 2세대, 고씨 4세대, 심씨 1세대, 안씨 1세대, 박씨 7세대, 정씨 4세대, 장씨 3세대, 엄씨 3세대, 김씨 3세대, 오씨 4세대, 석씨 2세대, 변씨 2세대, 임씨 1세대, 전씨 1세대, 허씨 1세대, 신씨 1세대, 한씨 1세대, 조씨 3세대, 윤씨 2세대로 모두 22개의 성씨가 마을을 이루어 화목하게 살고 있다.
추점리 백로 이야기
추점리 뒤편에는 수백 년 된 늙은 참나무들로 가득한 야트막한 숲이 있다. 이 참나무 숲에는 전부터 황새, 왜가리, 뱁새, 백로가 번갈아 가며 떼 지어 살아왔다. 이 네 종류의 새들은 모두 철새다. 이른 봄에 날아와서 여름 한 철을 이곳에서 보내고 늦은 가을이 되면 다시 남쪽나라로 날아갔다가 이듬해 이른 봄이면 다시 옛집인 이 고목을 잊지 않고 찾아오곤 하였다. 이 새들은 양서류와 파충류를 즐겨 먹고 각종 벌레도 잡아먹는 습성이 있다. 이 때문에 항상 논과 연못 등 습지에 깃드는데, 물이 없는 야산이나 자기 집이 아닌 다른 나무에는 앉지 않는다. 간혹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와서 습도가 높을 때는 높이 나르지 않고 가까운 곳을 힘없이 나르다가 혹 소나무 등 다른 나무에 않을 때도 있다. 원래 구한국(舊韓國)때까지는 <황새>가 500~600마리씩 이 나무에 살아왔었는데 경술국치이후에는 황새가 오지 않게 되고 200~300마리의 <왜가리>가 와서 살았으므로 가까이 사시는 노인들이 “왜놈의 세상이 되니까 왜가리가 득세하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은근히 이 새들을 증오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광복 후에 일본의 세력이 물러가면서 실세한 세력인 왜가리는 더 이상 오지 않고 <뱁새>와 <백로>가 교차해 가면서 와서 살았다고 한다. 1965년과 1966년에는 이른 봄에 왜가리 몇 마리가 먼저 와서 집을 짓고 살다가 뱁새와 황새의 큰 무리가 와서 쫒아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1969년 발행된 괴산군지 529p> |
석산리 |
∎연혁
추점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돌이 많아 돌산이로 부른다. 동쪽은 충주시 상모면, 서쪽은 추점과 박달산이고, 남쪽은 신촌과 우령이다. 북으로는 운평과 접한다. 마을 앞으로는 517번 지방도가 지난다. 1946년 추점리에서 석산으로 분구한 뒤, 1949년 다시 추점리로 병합되었다가, 1950년 또다시 석산으로 분구하였다. 현재 법정리·행정리 모두 석산리에 2개반과 2개 자연마을이 있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연마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ha) |
석산리 |
돌산이, 주정골 |
28 |
53 |
410 |
∎주요 생산물
석산은 마을 앞으로 오가천이 흐른다. 오가천 일대에서는 주로 논농사를 짓고, 마을 뒷산 쪽에서는 사과와 옥수수를 주로 재배한다.
∎지명 유래
• 돌산이[石山]ː가래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에 돌이 많아서 돌산이로 부른다.
• 주정골:석산 앞 오가천 건너 산 너머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에 주막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주점골로 부르기도 한다. 전에는 몇 가구가 거주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이거하고, 현재는 과수원을 관리하는 두 가구만이 거주한다.
• 석장골: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던 골짜리로, 석산 동남쪽 깊은 골에 위치한다. 몇 가구가 거주하다 1970년대 화전 정리로 모두 이주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 굴당골산:석장골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 큰 산이다. 해발고도는 466.3m이다.
• 오가천:오가리에서 발원해 석산리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 사기장골:주정골과 서당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서당골:추점저수지 위에 있는 골짜기이다.
• 주막앞산:석산 앞에 작은 산이다. 윗산과 사이에 주막집이 있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윗골:석산과 기렁목재 사이 골짜기이다.
• 굴당골:석장골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기룡목재:기렁목이재라고도 한다. 석산(돌산이)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기룡목(기린의 목)처럼 길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 그렁목재:돌산이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고개로 그렁이 풀이 많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렁이목재, 그렁목재, 기룡목재, 길용목재는 모두 같은 재의 이름이지만 어원에 따라 이처럼 부르는 지명이 다르다. 그렁목재는 그렁이풀 또는 기렁이풀로 불리는 풀이 많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는데, 실은 발음이 비슷한 데서 오는 차이로 보인다. 수안보와 장연면의 경계 지점인 주정산 고개 표지판에는 ‘길용목재’로 나와 있다.
• 그렁메기고개:장연면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고개로 515번 지방도에 있다. 험하기로 유명한 고개였으나 지금은 수안보 와이키키 스키장 개설로 노선이 바뀌고 평탄한 모습으로 변했다.
• 가는골:석장골과 짚은개울 사이에 있는 계곡이다.
• 두루모퉁이:석산에서 석장골로 들어가는 입구 주변 일대를 말한다.
• 가마소들:석산 앞 오가천 건너편에 있는 들이다.
• 석산들:석산 앞, 석산교 윗들을 말한다.
∎공공기관
• 석산리 마을회관
∎역대 마을이장
석산리 역대이장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배한현 |
1946. 01.31 |
13대 |
이규복 |
1978. 01.01 |
2대 |
김신배 |
1946. 12.15 |
14대 |
최한수 |
1986. 01.01 |
3대 |
김순귀 |
1949. 08.31 |
15대 |
이규복 |
1988. 01.01 |
4대 |
이상진 |
1952. 06.27 |
16대 |
최한수 |
1993. 01.01 |
5대 |
김종석 |
1954. 01.05 |
17대 |
김동훈 |
1996. 01.01 |
6대 |
정동진 |
1960. 04.09 |
18대 |
이규복 |
1997. 01.01 |
7대 |
정동진 |
1961. 06.25 |
19대 |
박찬교 |
2003. 01.01 |
8대 |
권태순 |
1964. 01.10 |
20대 |
이규복 |
2005 01.01. |
9대 |
정동진 |
1966. 03.01 |
21대 |
유산종 |
2007. 01.01 |
10대 |
김종원 |
1969. 12.24 |
22대 |
박찬교 |
2011. 01.01 |
11대 |
유산종 |
1974. 02. 01 |
23대 |
김종관 |
2012. 01.01 |
12대 |
최룡회 |
1976. 01.01 |
|
|
|
1949. 08. 31일 추점과 석산이 병합되어 당시 추점리 이장 김순귀씨가 전체 이장을 역임 |
∎역대 노인회장
1대 김종원, 2대~3대 최한수
∎삶의 현장
석산리는 신촌리와 추점리의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돌산이와 주정골이 있다.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는 석장골에도 마을이 있었으나 1970년대 화전 정리로 모두 이주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2009년 말 추점 삼거리와 오가리를 잇는 517번 지방도가 2차선으로 확 포장되어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가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렸다. 석산 북쪽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마을 표지석이 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을 반긴다. 반듯하게 난 마을 길 양 옆으로는 석산들이 펼쳐져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이 굴당골산으로 부르는 마을 뒷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터가 나온다. 마을회관 터이다. 산에 돌이 많아 돌산이로 부를 만큼 마을 뒷산은 밭을 일구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곳이어서 이 마을에서는 밭농사가 그리 많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을 뒤편으로는 충주시 수안보면과 경계를 이루는 주정산이 솟아 있다. 마을 아래쪽에서부터 주정산 정상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나 있다. 이 고갯길이 바로 굴당골 그렁목재다. 이 고개는 아주 옛날부터 장연면 주민들이 수안보를 오가던 지름길이다. 마을 앞 도로 건너편은 주정골이다.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으나 한때는 주막집이 있었을 만큼 번성했던 곳이다.
주막골 뒤에는 추점저수지가 있다. 추점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주정골 입구를 막아 만든 것이다. 하지만 담수량이 적어 1985년 추가 공사를 통해 담수량을 5배 증량하였다. 공사비는 1억 2천만 원이 들었다.
지금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가로놓인 추점 저수지 위 골짜기가 서당골이다. 옛날에 서당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지금은 밭만 있을뿐 서당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제 5장 방곡리(방곡 간곡)
방곡리는 크게 방곡리와 간곡리로 나뉜다. 1946년 법정리 방곡에서 간곡이 행정리로 분구하였다가, 1949년 다시 방곡리로 병합된 뒤, 1950년 또다시 간곡으로 분구하였다. 따라서 현재 법정리인 방곡리와 2개의 행정리동(방곡·간곡)에 7개반, 9개 자연마을이 있다.
방곡리는 지리상 군사요충지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병방(兵房)이 있었던 곳이다. 방곡리는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충주·청주·진천·음성 등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군사 지휘소인 병방이 설치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병방골[兵房谷]을 중심으로 아래쪽에 많은 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넓은 뜰, 곧 광진리 진대에 군사들이 진(陣)을 치고 간곡(間谷)의 소년골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적 지명으로 이외에도 ‘말무덤들’, ‘과니골’, ‘왜마루’ 등이 있다.
또 병방골은 조선시대 사창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라와 고려 이래의 빈민 구제시설을 일층 확장 강화하였다. 그 종류로는 상평창, 의창, 환곡, 제민창, 사창 등이 있었다. 연풍현에는 장풍면과 면의면에 있던 두 개의 사창을 비롯해 5개 면에 총 6개의 사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지금의 장연면에도 2개의 사창이 있었는데 장연면 송덕리 양지마을의 서사창(西社倉, 당시 장풍면)과 방곡리 병방골의 북사창(北社倉, 당시 면의면)이 그것이다.
兵房(병방) 조선 시대에, 한성부나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가운데 병전(兵典)의 실를 맡아 보던 서. 또는 그 일을 맡은 책임 향리(鄕吏). 지방의 군사 훈련, 경찰 업무, 군역(軍役) 부과, 성곽·도로·봉수의 관리 따위를 맡아보았다.
社倉(사창) 조선 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으로 문종 원년(1451)에 설치하여 점차 확대하였으나, 환곡의 문란으로 순조 5년(1805)에 호남·호서지방은 관찰사 재량으로 그 존폐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
방곡리 |
∎개요
방곡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적병을 막았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방곡리는 본래 연풍군 면의면 지역으로 병방골 병방동 안말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방동, 운곡동, 자약동 일부를 병합해 양방동의 ‘방’자와 운곡동의 ‘곡’자를 따서 방곡이라 하여 장연면에 편입되었다. 이중 양방동과 자약동의 일부가 방곡리 본 마을이다. 자약동의 일부는 현재 벌말로 불리는 평촌 지역이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 연 마 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ha) |
방곡리 |
병방골, 벌말, 양지말 |
86 |
196 |
456 |
∎주요 생산물
방곡리는 박달산 자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 논보다 밭이 많은 지역이다. 방곡리에 분포되어 있는 논은 평촌 일부와 기린비들에서 내려오는 약간의 논이 전부이다. 방곡리에서 주로 생산되는 작물은 옥수수와 고추, 사과 등이며 가을 김장배추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명 유래
• 병방골:방곡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적병을 막았다고 한다.
• 안말:병방골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 양지말:병방골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 벌말(배깥말):병방골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평촌을 가리키는 말로 동네 밖에 있다 하여 바깥말로 불린다.
• 동골:박달산 중턱에 있는 골로 전에는 민가가 있었으나 1970년대 화전 정리 이후 방곡리로 내려와 살고 있다.
• 작사골:방곡 안말 속구렁으로 동골 밑 부분이다.
• 새익이골:동골 옆 골짜기다.
• 진밭골:추점과 방곡 사이에 있는 골짜기다. 밭골이 길어서 생긴 이름으로, ‘긴밭골’에서 유래하였다. 현재는 대순진리회에서 운영하는 멧돼지 농장이 들어서 있다.
• 진밭골 고개:진밭골에서 추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성주고개:방곡에서 진밭골을 지나 운평으로 넘어가는 597번 도로 고개이 다.
• 기린비들(기린내):방곡고개 너머 597번 지방도와 공동묘지 사이에 있는 들이다.
• 소개들:장연신협 사무실 앞들이다.
• 솔모퉁이:장연신협 뒷들이다.
• 법봉:장연신협 사무실 앞산이다.
• 번들말림:방곡 안골이다.
• 관혁골:장연신협 사무실 앞쪽으로 옛날 활을 쏘던 과녁을 놓았던 자리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과니골로도 불린다. 지금은 방곡로터리로 변해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 마르갈래:방곡에서 간곡 사이에 있는 들 이름이다.
• 말무덤들:옛날에 말을 묻었다 하여 이름 붙인 들이다.
• 박달산:방곡 남쪽에 있는 산으로 장연면에서 제일 크고 높은 산이다. 해발고도는 825.4m로, 괴산의 35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 오가천:오가리에서 발원해 방곡 밑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광석에서 석문동천과 합류한다.
∎ 방곡마을 유래비
위 치:장연면 방곡리 방곡쉼터
비 명:방곡마을 자랑비
건립일:1996년 7월
사업비:2,500만원(군비 1,000, 자부담 1,500)
우리 마을은 군청소재지인 괴산에서 동북쪽 16㎞ 지점에 위치하며 동은 추점리, 서는 감물면, 남은 오가리, 북은 광진리와 접하고 산수경관이 아름다운 박달산 기슭 아래 아담한 마을이다. 원래 연풍군 면의면 지역으로서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호병을 막았다고 해서 병방골, 병방동, 안말이라고 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방동, 운곡동, 자약동 일부를 병합하여 양방동 방자와 운곡동 곡자를 따 방곡리라 하고 장연면에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괴산, 장연, 충주 방면의 교통 중심지로 1960년대 5일, 10일 오일장이 서 시장통이라 불리는 회관 앞 광장이 바로 장옥이 서 있던 곳이다. 1985년부터 괴산문화제에 풍년농악을 출전시켜 3회나 우승했으며 도 농악제에 괴산군 대표로 출전 입상하는 등 활기가 넘치고 생동하는 마을로 양계, 사과, 인삼, 연초, 고추 등 다양한 복합영농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복지마을로서 박달산 정기 받은 맑은 물을 식수원으로 20여 성씨가 오순도순 화합과 인정이 넘치게 이웃사촌으로 살아감을 자랑으로 후손들에게 알리고자 이 비를 세우며 우리는 영원한 방곡민으로 긍지를 갖고 살아갈 것이다.
1996年 6月 20日
참고:비문 내용 가운데 병방골의 지명 유래가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호병을 막았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 기록은 1990년 9월 30일 『증보 괴산군지』에 나와 있는 내용이고, 1969년 발행된 『괴산군지』초판에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막아서 생긴 지명으로 나와 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약 2개월에 걸쳐서 조선이 항복한 전쟁이다. 위 사실로 미루어볼 때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호병을 막았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없는 기록으로 보인다. 따라서 방곡리 병방골은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지명임이 신빙성이 있다.
∎공공기관 및 산업시설
• 장연신용협동조합:1976년 9월 28일 창립
• 방곡 보건진료소:1983년 개소
• 무인중계소:KT 방곡 무인 중계소
• 방곡회관:1동 2층(46평)
• 방곡리 경로당
• 정보화마을 센터
• 방곡리 다목적 회관
• 방곡리 양조장
• 방곡리교회
∎역대 마을이장
방곡리 역대이장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김흥락 |
1946. 01.31 |
19대 |
황명섭 |
1979. |
2대 |
김선모 |
1946. 12.06 |
20대 |
최창연 |
1980. 02.01 |
3대 |
임재구 |
1947. 12.31 |
21대 |
전성진 |
1984. 01.10 |
4대 |
임재구 |
1949. 08.31 |
22대 |
도영기 |
1985. 08.01 |
5대 |
김동수 |
1952. 07.25 |
23대 |
황병기 |
1987. 01.01 |
6대 |
권태영 |
1953. 08.15 |
24대 |
강영수 |
1989. 01.01 |
7대 |
김종준 |
1954. 08.05 |
25대 |
도진수 |
1992. 01.01 |
8대 |
김동수 |
1954. 12.23 |
26대 |
황영기 |
1994. 01.01 |
9대 |
권태영 |
1956. 04.21 |
27대 |
손효길 |
1995. 01.01 |
10대 |
윤병섭 |
1958. 05.23 |
28대 |
도진수 |
1998. 01.01 |
11대 |
한의교 |
1961. 06.25 |
29대 |
이성만 |
2001. 01.01 |
12대 |
윤병섭 |
1963. 08.10 |
30대 |
손효길 |
2001. 09.17 |
13대 |
홍세화 |
1965. 01.07 |
31대 |
김동훈 |
2002. 01.01 |
14대 |
황찬기 |
1966. 01.05 |
32대 |
이영우 |
2003. 01.01 |
15대 |
도영기 |
1973. 01.01 |
33대 |
황태진 |
2006. 01.01 |
16대 |
최종용 |
1974. 01.01 |
34대 |
이상용 |
2008. 01.01 |
17대 |
김완식 |
1977. 01.01 |
35대 |
홍성기 |
2011. 01.03 |
18대 |
이종국 |
1978. 01.05 |
|
|
|
1949. 08. 31일 방곡과 간곡이 병합되어 당시 방곡리 이장 임재구씨가 전체 이장을 역임 |
∎역대 새마을지도자
이두우, 전종문, 황병기, 김현숙, 김순자, 이영숙 (역임 연대 순)
∎역대 노인회장(남)
1대 이종열, 2대 김지학, 3대 최기복, 4대 원영호, 5대 도영기, 6대 양재성, 7대 도영기, 8대 도영기,
9대 한갑수
∎역대 노인회장(여)
1대 박창남, 2대 김종분, 3대 이무자, 4대~6대 허영희
∎마을을 빛낸 인물
• 황석두 - (루까 黃錫斗)‘장연면 인물사’ 편 참조
• 황정기 - 장연면장 역임
• 박노동 - 광진초등학교 교사,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 최봉호 - ‘장연면 인물사’ 편 참조
• 이시우 - 교장 역임
• 이재우 - (사)한국가축인공수정사협회 전국회장 역임
• 황명섭 - 장연농협조합장 역임
• 김봉기 - 장연농협조합장 역임
• 전성진 - 장연신협 설립 및 초대 이사장
• 김기채 - 괴산군 재경향우회 부회장
• 김희채 - 제1대 대통령선거인단 역임
• 황승룡 - 광진초등학교 교사역임
• 박성규 - 카톨릭대학 경영대학원 원장
• 최관호 - 한국남발전주식회사 기획처장
• 박인규 - 박내과 의원 원장(인천)
• 박노한 - 군의원 역임
• 박재한 - PT.Busana Prima Global 대표이사(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황태진 - 보훈처장 표창(6·25 상이용사)
• 김구환 - 명장, 한전 KPS 기술사(공조 및 냉동 기계기술사)
• 윤남기 - 법제처 사무관
∎삶의 현장
방곡리는 보통 안말᠊웃말᠊넛말᠊바깥말(배깥말)로 구분하여 부른다. 안말은 옛 시장통 거리였던 정보화센터 주변을, 웃말은 옛 배구장으로 불리던 안말 위쪽 지역을 가리킨다. 넛말은 웃말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 우당 박한경 도전 생가 터 주변을 말한다. 바깥말은 옛 자약동 일부 지역으로 현재의 평촌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마을 바깥쪽에 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방곡 삼거리로 들어서면 장연면의 여타 마을과는 달리 마을을 감싸고 있는 박달산의 웅장한 모습이 정면으로 들어온다. 방곡 삼거리에는 주막거리 가든과 방곡식당, 일진네상가, 사계식당, 방곡다방이 동서남북으로 위치해 이곳이 방곡의 중심 번화가임을 단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주막거리가든(옛 영수네 가게)과 일진네가게는 현재까지 방곡리에서 가장 오래된 주민들의 쉼터이자 애환을 달래 주는 장소이다.
방곡 삼거리 서쪽에는 방곡리 출신의 도애자 대표가 운영하는 방곡택배회사가 들어서 장연우체국과 더불어 장연면의 물류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방곡택배 옆으로는 방곡리와 인근 지역 주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방곡보건진료소가 있다. 간곡리 방향으로 평촌리 입구에는 박달산가든과 방곡주유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맞은편에는 장연공업사가 자리 잡고 있다.
방곡다방 옆 보강약방은 1960년대 보강약포로 시작해 지금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온 곳이다.
옛 방곡시장의 장옥자리는 지금 마을 앞 광장이 되어 있다. 광장 위쪽에는 정보화센터가 위치한다. 대학찰옥수수 정보화 마을은 1997년 행정자치부가 선정하였다. 방곡리 정보화 센터에서는 홈페이지를 구축해 대학찰옥수수와 절임배추, 장연사과, 잡곡 등을 홍보판매하고 있으며, 장연면을 외부 세상에 알리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방곡 안말의 끝자락에서는 방곡양조장이 반세기의 ,역사를 조명하며 그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웃말에는 방곡교회가 있고, 넛말에는 대순진리회에서 복원한 우당 박한경 도전 생가가 깔끔히 정돈되어 있다. 또한 관혁골에는 장연신협이 들어서 있다. 장연신협의 원래 이름은 방곡신협으로, 방곡리 주민 전성진씨와 이재우씨 등 뜻있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금융기관이다.
여기서 잠시 방곡리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은 들여다 보기로 하자. 방곡리에는 일찍부터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장연면 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연의 다른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동제나 성황제 등과 관련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마을공동체 신앙이 없었다는 것은 마을의 정주 인구 중 인구 유동성이 가장 많은 마을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방곡리는 장연면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가와 소규모 상공업이 발달해 외지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따라서 이곳에서 예로부터 터를 잡고 살던 토착민들 외에는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주해 왔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방곡리는 이주해 오기도 쉬웠지만 떠나기도 쉬운 지역으로, 그만큼 이주민들의 애향심이 토착 주민들보다는 덜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마을 주민의 단결과 협동, 질서체계 등을 바로 세우는 하나의 연례행사인 마을 공동체 신앙인 동제가 자연스레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곡리에서는 동제가 사라진 대신에 개인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신앙이 발달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특별히 무속인이 마을에 상주한 것은 아니고, 대신 박달산 주변에 산재한 여러 신격 대상물들이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동골 아래에 있는 아들바위와 박달산 정상 부근에 있는 집바위를 들 수 있다. 또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방곡리와 광진리의 중간 지점(중부내륙고속도로 교각 아래 지점)에도 신격 대상물인 서낭당 바위가 있었다. 이외에도 각 가정의 정갈한 장소에서 집안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방곡리는 장연대학찰옥수수의 고향 마을이다. 방곡리 출신 최봉호 박사가 개발해 보급한 대학찰옥수수는 겉피 모양이 개 꼬리를 닮았고, 익을 때는 옥수수통이 옥수숫대 바깥쪽으로 젖혀진다. 껍질을 벗기면 옥수수 알이 세로로 8줄부터 12줄까지 나타나며, 알곡 색깔은 흰색이다. 맛은 차지고, 껍질이 얇아 소화가 잘된다. 방곡리의 여름은 타 시군의 읍면에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활기차다.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밀려드는 택배 주문 때문이다.
대학찰옥수수는 1991년부터 방곡리에서 시범 재배를 시작한 끝에 2001년 연농1호로 상표등록하였다. 2004년부터는 장연면 방곡리 외 3개면에서 380㏊를 식재하였고 괴산군에서는 충북의 대표 농산물로 지정하였다.
현재 방곡리에서는 여름철 특화작물인 대학찰옥수수를 삶아 진공 포장한 뒤 겨울철 별미로 판매하고 있으며, 또 다른 겨울철 특화작물로 절임배추를 생산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방곡리의 농업 형태는 주로 밭농사이다. 이농 이촌 현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외지로 나가 있던 시절에도 묵묵히 고향을 지키며 농사에 전념해 온 현 방곡리 홍성기 이장을 중심으로 젊은 방곡인들은 오늘도 부농의 꿈을 이루어 가고 있다.
간곡리 |
∎개요
본래 연풍군 면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양방동, 운곡동, 자약동 일부를 병합해 방곡리라 하여 괴산군 장연면에 편입되었다. 1946년 간곡으로 분구한 뒤, 1949년 법정리 방곡리로 병합되었다가 1950년 다시 간곡으로 분구하여 현재에 이른다. 2010년 현재 간곡리는 행정리동으로, 법정리는 방곡리이며, 3개반에 6개 자연마을이 있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 연 마 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ha) |
간곡리 |
새골, 운곡, 소년골, 감나무골 |
44 |
117 |
352 |
∎주요 생산물
간곡리는 감물면과 경계를 이루는 박달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밭이 대부분이다. 간곡리에서 주로 생산되는 작물은 옥수수와 고추, 사과, 배추 등이며 다른 지역에 비해 조, 콩 등 잡곡 생산량도 많다. 요즈음은 대학찰옥수수와 가을 김장배추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명유래
• 샛골(사잇골):간곡의 중심 마을이다.
• 작은샛골:박달산 아래 샛골 앞마을이다.
• 새터말:간곡(샛골)에서 도로변 마을이다.
• 노루바우:새터말 위에 있는 마을이다.
• 운곡:박달산 아래 작은 샛골 위에 있는 마을이다. 안개가 많이 끼어서 운곡(雲谷)으로 부른다.
• 소년골:운곡 윗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소년병 훈련소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감나무골:느릅재 정상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감나무가 많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60년대까지는 일명 느릅재 마을로 불렸다. 유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고개는 간곡에서 감물로 넘어가는 고개로 해발고도는 397m이다.
• 성매(성산):간곡과 주월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정상에 성터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 박달산:박달산 정상은 아니지만 박달산 능선이다.
• 간곡천:감나무골에서 발원해 소년골과 간곡을 거쳐 오가천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 작은 소년골:소년골 밑에 있는 골짜기다.
• 사장(射場)마루:옛날에 활을 쏘던 활 연습장이다.
• 바부재골:소년골 뒤에 있는 골짜기다.
• 뒤띠기:운곡 뒤에 있는 골짜기다.
• 배저리:작은 샛골 위에 있는 능선이다.
• 뒤락골:박달산 바로 밑 부분 일대이다.
• 홍골:작은 샛골에서 방곡 쪽 골짜기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 농바위등:홍골 옆골이다.
• 동골:박달산 밑 첫골이다.(감물면 증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칼등:동골 밑둥이다.
• 매봉재:간곡에서 방곡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사장말:샛골 위 구렁이다.
• 웃새골:샛골 위쪽 지역이다.
• 매바우:바위가 매같이 생겨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 확골:소년골 건너편 골짜기이다.
• 승망지:확골 밑부분 일대이다.
• 귀신단지굴목:승망지 밑 골짜기이다.
• 두루봉:샛골 앞산 주월 방면에 있다.
• 감투바위:배내미재 옆 근처에 있다.
• 도적골:일명 더덕골로 더덕이 많아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옛날 도적이 나왔다 해서 도적골로 부르기도 한다.
• 찐디기골:배내미재 위 골짜기다.
• 줄령:배내미재에서 주월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산매봉:직사골 봉우리이다. 해발고도는 237m이다.
• 조회터:배내미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공터다. 옛 달산정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암제 안영중 선생이 후학을 지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공기관 및 산업시설
• 간곡리 마을회관
• 간곡리 경로당
• 대학찰옥수수 냉동저장고
∎간곡리 문화유산
• 달산정(達山亭)-‘문화유적’ 편 참조
∎역대 마을이장
간곡리 역대이장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황문기 |
1946. 01.31 |
13대 |
전한성 |
1982. 01.04 |
2대 |
양연옥 |
1949. 01.10 |
14대 |
홍석원 |
1984. 01.10 |
3대 |
임재구 |
1949. 08.31 |
15대 |
강인호 |
1989. 01.01 |
4대 |
홍창기 |
1952. 01.05 |
16대 |
윤정환 |
1992. 01.01 |
5대 |
황문기 |
1955. 06.13 |
17대 |
이규동 |
1995. 01.01 |
6대 |
황현기 |
1961. 06.25 |
18대 |
김기홍 |
1997. 01.01 |
7대 |
정규환 |
1961. 09.30 |
19대 |
이현우 |
2000 01.01. |
8대 |
강두봉 |
1966. 01.05 |
20대 |
이제홍 |
2003. 01.01 |
9대 |
조봉식 |
1969. 07.15 |
21대 |
유병동 |
2006. 01.01 |
10대 |
홍석원 |
1974. 03.01 |
22대 |
서동준 |
2009. 01.01 |
11대 |
홍석희 |
1977. 01.01 |
23대 |
정상진 |
2012. 01.01 |
12대 |
정규칠 |
1979. 07.01 |
|
|
|
1949. 08. 31일 방곡과 간곡이 병합되어 당시 방곡리 이장 임재구씨가 전체 이장을 역임 |
∎역대 노인회장
1대 박노태, 2대 권영원, 3대 김수영, 4대 황준기, 5대 윤병권, 6대 윤병권, 7대 홍석원
∎역대 새마을지도자
1대 김준환, 2대 강두성, 3대 정우석, 4대 이제홍, 5대 서동준, 6대 전한섭, 7대 전한태
∎역대 역대 새마을부녀회장
1대 이원삼, 2대 유이순, 3대 강순득, 4대 성옥환, 5대 심윤희, 6대 성옥환, 7대 심영순
∎마을을 빛낸 사람
• 안영중(1881~1965) - 간곡리에 달산정을 세우고 후학지도(인물사편 참조)
• 이찬재 - 광진초등학교 교사역임, 봉양조등학교 교장 역임
저서 : 에세이 모음집 '박달산에서 달천강까지'
• 조정주 - 국민은행 부 지점장(청주 용담점)
• 이제홍 - 제4회 괴산농업경영인 대상 수상
∎간곡 마을 유래비
위 치: 마을회관 앞
비 명: 희망찬 간곡마을
건립일: 2009년 12월 22일
사업비: 금융결재원 기증
본 마을의 옛 지명은 병방골 샛골이다. 후에 한자 표기에 의하여 간곡(間谷)으로 불렸으며 마을의 형성 연도는 1529년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된다. 즉 소년골이 임진왜란 때의 소년병 훈련소였다고 전하는바 이와 관련된 지명인 사장(射場)마루는 당시 활 연습장이었을 것으로 전하니 이때부터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옛적에는 경주김씨의 세거지로도 전하나 그 후에는 각성들이 모여 사는 농경촌으로 부촌은 아니었지만 인심이 순후하고 예절이 있던 예촌으로 칭송되었던 마을로 전한다.
2009년 12월 22일
오 기
- 1529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의 오기이다.
- 마을 유래비에서 간곡 마을의 형성 연도를 ‘1529년 임진왜란 전후’로 기록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방곡리 샛골(간곡리)에 사람이 거주하던 시기는 삼한시대 마한이전의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사람이 거주했다는 것은 마을이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소년골이라는 지명 유래로 보아 간곡리 중에서도 소년골만은 임진왜란 때 소년병 훈련소였다고 전해지는바 이 시기의 전후로 자연마을 ‘소년골’이 형성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기타 어법에 전혀 맞지 않는 일부 내용은 일부 수정하였다.
∎ 삶의 현장
간곡리는 샛골에서 운곡, 소년골, 감나무골로 이어지는 긴 협곡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얼핏 보기에는 하나의 마을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마을 사이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 간곡리는 본래 병방골에 속했던 마을로 군사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분포하는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소년병 훈련소였다고 전해지는 소년골과 활 쏘는 연습을 하던 사장마루를 비롯해 임진왜란 때 주민들의 피난처였던 확골 등이 그것이다. 이 확골과 관련 있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간곡리 방아확 전설 역시 전란과 관련이 있다. 장연면 방곡리 간곡부락 뒷동산에 있는 방아확은 임진왜란 당시에 우리 주민들이 왜구를 피해 오곡을 손으로 찧어 먹던 곳으로, 일명 ‘방아골’로 부른다. 주민들은 이 골짜기를 ‘확골’ 또는 ‘확고개’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의 큰 바위 3군데에 ‘방아확’이 있다. 방아확에는 고누(호박 따먹기)가 그려져 있어 이곳에서도 고누놀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간곡리는 박달산 서쪽 끝자락인 감나무골에서부터 박달산 동쪽 능사면에 걸쳐 형성된 마을로 소득원은 비탈밭이 거의 전부인 마을이다. 간혹 눈에 뜨이는 논도 다락논 형식의 작은 농지뿐이다. 마을 규모에 비해 농지가 적은 전형적인 산골 마을인 간곡리는 주로 잡곡 생산에 의존해 왔으나 현재는 방곡리와 더불어 장연대학찰옥수수와 절임배추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높은 일교차로 인해 과수 작목이 발달한 마을이기도 하다.
2001년 방곡저수지(간곡리소재)가 완공되어 하류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저수지에는 그린 청정에너지인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서서 전력도 생산하고 있다.
간곡리는 금융결재원 직원들과 자매결연해 지역 농산물 판매와 홍보에 도움을 받고 있다. 간곡리 마을회관 입구에 세워진 마을 유래비도 이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간곡리 마을 유래비는 괴산군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한 간곡리 주민들이 현 이장 서동준 씨를 중심으로 금융결재원의 협조를 받아 이루어 낸 성과이다.
간곡리는 생활 터전이 방곡리와 공유하는 관계로 상공업은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1922년 서당인 달산정(達山亭)을 설립해 주변 지역 교육을 담당했던 장연면 북부지역 교육의 산실이다. 현재 달산정이 있던 위치는 조회터주변이라고만 추정할 뿐 정확한 위치는 고증할 수 없다. 다만 간곡리에 달산정이 있어 장연면 교육의 일환을 담당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간곡리는 장연면 어느 마을보다 청정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이를 통한 주민 소득 창출도 기대되는 곳이다. 간곡리 저수지를 품고 있는 주월산(舟越山)은 괴산의 35명산 중 가장 낮은 산이지만, 경관만으로 볼 때는 그 어느 높은 산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명산이다. 주월산은 매바위, 학바위, 봉수터 등 수려한 자연경관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에서 바라보았을 때 동서남북으로 확 트인 시계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간곡리는 이러한 주월산과 박달산의 정기를 모두 품은 마을로 미래 청정 자연마을로 각광받고 있다. 간곡리에는 신천강씨 1세대, 안동권씨 1세대, 경주김씨 3세대, 광산김씨 2세대, 김해김씨 2세대, 연안김씨 1세대, 밀양박씨 1세대, 순천박씨 1세대, 달성서씨 1세대, 전주성씨 1세대, 창녕성씨 1세대, 영월신씨 1세대, 강릉유씨 1세대, 문화유씨 1세대, 파평윤씨 2세대, 경주이씨 1세대, 경주이씨 2세대, 성주이씨 1세대, 원주이씨 1세대, 전주이씨 1세대, 인동장씨 1세대, 천안전씨 3세대, 경주정씨 1세대, 나주정씨 2세대, 연일정씨 1세대, 남양홍씨 3세대, 황씨 1세대 등 38세대 성씨가 다복하게 살고 있다
제6장 조곡리(상리 중리 하리)
장연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광진리, 서는 불정면, 남은 감물면, 북은 충주시와 접한다. 19번 국도변 광진 입구에서 서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신원터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나온다. 조곡리는 문경새재의 끝에 있다 하여 예부터 ‘새실’로 불렀다. 조곡은 이 새실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상리, 중리, 하리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괴강 하류의 조곡천을 끼고 있는 하리는 ‘물가사실’, ‘아랫새실’로 불리는데, 예전에는 학군(學群)이 감물면 이담리와 불정면 목도중학교로 편입되어 있었다. 중리는 조곡리의 중심마을로 ‘중티’, ‘중말’, ‘공말’ 등으로도 불린다. 달천강 둔치에 자리 잡은 상리, 중리, 하리는 장연면에서 유일하게 민물고기가 흔한 마을이다.
상리 · 중리 · 하리 |
∎개요
조곡을 설명할 때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새가 많이 모이므로 사실·새실 또는 조곡으로 부른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과 『괴산군지』의 마을 명칭 표기, 지명사전 등에 나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즉 “문경새재의 끝 마을이라 하여 새실로 명명되었다”는 설명이 정확한 표현이다. 조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리(上理)·중리(中里)·하리(下理)를 병합해 조곡리라 하여 괴산군 장연면에 편입하였다. 1946년 사실리가 분구하였다가 1948년 다시 병합되었다. 법정리·행정리 모두 조곡리에 3개반, 3개 자연마을이 있다. 상리는 웃새실, 중리는 중말, 하리는 아랫새실로도 부른다. 현재 조곡리의 서쪽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고, 하리에서 감물면과 불정면으로 통하는 510번 지방도가 연결되어 예전에 비해 교통이 한결 편리해졌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 연 마 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 |
조곡리 |
상리, 중리, 하리 |
47 |
113 |
605 |
∎주요 생산물
조곡리는 왕답산 자락의 동편에 위치하며, 전체적으로 논보다 밭이 많은 지역이다. 조곡리에 분포되어 있는 논은 상리보다는 중리와 하리에 치우쳐 있고, 쌀 이외에 주로 생산되는 작물은 옥수수와 콩, 고추, 사과 등이며 특히 사과 재배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명 유래
• 상리큰덕골(상조곡):조곡리에서 가장 윗마을이다. 상리 또는 큰덕골로 불리는데 큰덕골은 옛날에 장군이 출생하였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 중리공말:조곡에서 가장 큰 마을로 상리와 하리의 중간에 있다. 공말 또는 중리라고도 한다.
• 물가사실:조곡리 맨 끝에 있는 하리마을을 가리킨다. 달래강(달천강) 물가에 위치한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조곡(사실․새실):새실은 문경새재 끝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새재’-‘새 +실’-‘사실’ 등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 조곡(鳥谷)은 새실 즉 새재 끝에 있는 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 큰덕골:상리에서 제일 큰 골로, 상리도 포함한다.
• 동막골(큰 동막골, 작은 동막골):상리 위에있는 2개의 골짜기이다.
• 양고개:조곡에서 광진 신운터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일명 조곡고개이다.
• 창고개골:조곡에서 배냄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날개실골:상리 앞산이다.
• 불당골:상리안골에 광진 쪽으로 나 있는 골이다.
• 즘터들:중리 앞들이다.
• 그시마골:중리에서 상리 쪽으로 있다.
• 집박골:중리안골이다.
• 제당골:중리 제당이 있는 골이다.
• 동막골:중리 밑골이다.
• 샛들:중리에서 하리 쪽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들이다.
• 언친바위들:샛들 건너편 언친(얹힌)바위가 있는 들이다. 언친바위는 바위 위에 바위가 얹혀 있는데, 위쪽 바위가 더 크다
• 웃새들:조곡 양수장 윗들이다.
• 거문동골:조곡 양수장이 있는 들이다.
• 아래샛들:조곡 양수장 밑들이다.
• 큰곱사골:양수장이 있는 곳에서 충주시 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다.
• 작은곱사골:큰곱사골 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 구렁들:아랫샛들 밑에 있는 들이다.
• 산지당들:하리 산지당 앞들이다.
• 건너들:하리 앞 건너편 들이다. 조곡에서 제일 큰 들이다.
• 앞들:하리 앞들이다.
• 달깃말:하리 뒷들로, 달천강 근처이다.
• 못단이:달깃말 뒷골짜기다. 언젠가 못안이 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원명은 못안이다. 못안이 변하여 못단이가 되었다.
• 솟다백이:하리 뒷산이다.
• 방아골(설탕골):하리 뒤쪽, 수주 앞쪽이다.
• 조곡 소류지:1966년 5월 30일 완공된 소류지이다.
• 조곡 양수장:중리 2단, 상리 3단 양수장으로 1979년에 완공되었다.
• 마당재:상리 뒷산이다. 충주시와 접하며, 해발고도는 435m이다.
• 왕답산:상리 뒷산으로 잿골 뒤쪽에 있다. 고려 태조왕이 밟고 지나갔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해발고도는 510m이다.
• 약사리봉:일명 옥려봉으로, 충주시와 접한다. 해발고도는 405m이다.
• 우륵산:조곡 앞산으로 해발고도는 367m이다.
• 긴별산:하리 앞산으로 감물면과 경계를 이룬다. 해발고도는 400m이다.
• 조곡천:조곡 상리에 소류지 2개가 있었는데 1개소가 1995년 수해로 없어지고 지금은 1개소만 남아 있다. 이 소류지에서 발원한 물과 큰덕골 물이 합류해 중리를 거쳐 하리의 달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 조곡천이다.
∎공공기관 및 산업시설
• 조곡회관(중리): 1동
• 조곡경로당(중리): 1동
• 양계 공동사육장: 4동
∎역대 마을이장
조곡리 역대이장(상리 중리)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한우상 |
1946. 01.31 |
14대 |
정재천 |
1980. 01.31 |
2대 |
이종호 |
1946. 12.15 |
15대 |
조수현 |
1981. 02.01 |
3대 |
이종호 |
1949. 08.31 |
16대 |
김종학 |
1984. 01.10 |
4대 |
이종석 |
1950. 06.30 |
17대 |
심상철 |
1987. 01.01 |
5대 |
이종윤 |
1954. 01.05 |
18대 |
조수현 |
1989. 01.01 |
6대 |
이구호 |
1958. 03.22 |
19대 |
김종운 |
1992. 01.01 |
7대 |
안성준 |
1961. 06.25 |
20대 |
이종태 |
1995. 01.01 |
8대 |
안도준 |
1967. 04.14 |
21대 |
이종수 |
1997. 01.01 |
9대 |
이규호 |
1973. 01.01 |
22대 |
이찬수 |
2003. 01.01 |
10대 |
이종구 |
1974. 09.20 |
23대 |
심상철 |
2008. 01.01 |
11대 |
홍정식 |
1975. 05.01 |
24대 |
|
|
12대 |
안수준 |
1978. 01.01 |
25대 |
|
|
13대 |
홍정식 |
1979. 01.01 |
26대 |
|
|
조곡리 하리는 별도로 이장이 있었으나 1949. 08.31조곡리로 병합되어 당시 조곡리 이장 이종호씨가 상리 중리 하리 이장을 역임 |
조곡리 물가새실 역대이장(하리)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조규진 |
1946. 01.31 |
4대 |
임해성 |
1949. 02.22 |
2대 |
안철상 |
1947. 01.02 |
5대 |
이종호 |
1949. 08.31 |
3대 |
조현동 |
1948. 01.15 |
6대 |
|
|
조곡리 하리는 별도로 이장이 있었으나 1949. 08.31조곡리로 병합되어 당시 조곡리 이장 이종호씨가 상리 중리 하리 이장을 역임 |
∎역대 노인회장
1대 백종운, 2대 조현태, 3대 최돈원, 4대 조현태, 5대 이완규
∎삶의 현장
조곡리는 장연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광진리, 서는 불정면, 남은 감물면, 북은 충주시와 접한다. 19번 국도가 지나는 광진 마을 입구에서 서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조곡 고개를 넘으면 나온다. 조곡리는 문경새재의 끝에 있다 하여 예부터 ‘새실’로 불렀다. ‘조곡’은 이 새실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상리·중리·하리의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중리가 조곡리의 본 마을이다. 괴강 하류의 조곡천을 직접 끼고 있는 하리는 ‘물가사실’ 또는 ‘아랫새실’로 불리며, 학군(學群)이 감물면 이담리와 불정면으로 나누어 편제되어 있었다. 중리와 상리 역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중학교 학군이 불정면으로 편제되어 있어 불편함이 많았다.
하리는 장연면에서 유일하게 민물고기가 흔한 마을로, 옛날 뗏목으로 물건을 운반하는 나루터가 있었다. 불정면 목도리와 이곳 조곡천 하리에서 서울로 가는 목재와 양곡 등을 운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불정면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곡리는 행정구역은 장연면에 속하지만, 전통적으로 불정면 목도장을 많이 이용한 까닭에 장연 주민들과의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장연면 주민과 교류가 활발하다. 조곡리의 주요 생산품은 사과이고, 그 밖에 잡곡도 많이 재배한다.
조곡리는 일찍부터 따는 과수 농사에서 체험 과수 농사로 바꾸어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2005년 9월 1사 1촌 운동의 일환으로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해마다 농사철이면 찾아와 조곡리에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도움에 힘입어 조곡리는 체험 과수 농업의 메카로 발돋움하였고, 2011년에는 삼성전자의 도움으로 민박형 펜션까지 준공하였다.
이 민박형 펜션은 도시민들이 주말을 이용해 직접 농사를 체험하고 여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마을 공동 편익 시설인 펜션의 규모는 총 77㎡로, 과수목 체험장(분양 사과 54주, 배 45주)을 갖추고 있다.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는 자매결연 이후 꾸준히 농산물 직거래와 직판 행사를 해왔고, 조곡리 주민들도 삼성전자 공장과 애버랜드를 견학하는 등 활발한 교류를 해왔다. 또 농번기에는 삼성전자 직원들이 부족한 농촌 일손을 덜어 주는가 하면, 매달 삼정전자 구내식당에서 장연 조곡쌀 먹는 날을 지정 운영하는 등 돈독한 1사 1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10년 12월까지 총 교류 횟수는 10회, 삼성전자 측의 참여 인원은 1,900여 명이다. 여기에 206 농가가 참여해 소득 증대에 단단히 한몫을 하였다. 앞으로도 삼성전자의 편의시설(펜션) 제공으로 농촌 체험 관광 활성화,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 강화 등 도농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제7장 광진리(잿골 진대 광석)
법정리 광진리는 광진·진대·샘골·광석·작담을 포괄한다. 자약동(잿골)·진대·샘골은 본래 면의면 지역으로 1895년까지 연풍군에 속해 있었다. 광석과 작담은 1895년 이전까지는 수회면 지역이었으나, 1895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문산과 함께 연풍군 면의면에 이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산을 제외한 작담·광석·진대·샘골·자약동을 합해 광석동의 ‘광(廣)’자와 진대동의 ‘진(陣)’자를 따서 광진리라 하였다. 1946년 광석을 분구한 뒤, 1948년 진대를 분구하였다. 1949년 광진·진대·광석 마을을 법정리로 통합하였다가, 1950년 광석리를 분구하였다. 1975년 7월 1일 진대를 행정리로 분구하였다.
광진리(잿골) |
∎개요
광진리는 광진리의 중심 마을로서 북쪽은 진대, 동쪽은 추점리 운평, 서쪽은 조곡리, 남쪽은 방곡리와 접한다. 마을 앞으로 19번 국도가 지난다.
최근 괴산나들목이 생기면서 광진리는 큰 변화를 겪었다. 이보다 먼저 광진리는 광진초등학교 폐교라는 아픔을 겪었는데,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으로 수안보면, 살미면과 괴산나들목을 잇는 4차선 도로가 나면서 광진리 앞 도로는 괴산과 충주를 잇는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잃었다. 하지만 도로가 한산해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광진리와 그 주변 마을은 충주뿐 아니라 전국 어느 도시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함으로써 향후 비약적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 연 마 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 |
광진리 |
잿골, 신원터, 무실동 |
46 |
98 |
182 |
∎주요 생산물
왕답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광진리는 오가천을 끼고 있어 논과 밭이 고루 분포한다. 광진리에 분포되어 있는 논은 대부분 왜마루를 끼고 흐르는 오가천변에 자리 잡고 있다. 광진리에서 주로 생산되는 작물은 옥수수, 고추, 사과 등이며 장연면의 대표 작물인 가을 김장배추와 장연대학찰옥수수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 밖에 무실동 주변과 진대리 입구 왕답산 아래 쪽에서는 사과를 많이 생산한다.
∎지명 유래
• 잿골:잿골의 ‘재’는 기와를 일컫는다. 옛날에 이곳에 기와집이 많고 기와 굽는 터가 있어 ‘잿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잿골’은 ‘지왓골’의 줄임말이며, ‘지와’는 ‘기와’의 충주방언이다.
• 무수룡이:잿골 남서쪽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주민들 사이에 무시렁이 또는 무시랭이로 불리는 것은 무수룡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무수룡이란 뜻은 물이 많이 나는 골짜기란 뜻이다.
• 무실동 : 무실의 어원은 '물,과 '실'의 합성어로 물골이란 뜻이다. 무수룡이와 어원을 같이한다.
• 신원터:잿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나무꾼이나 행인이 쉬어가는 곳이라 해서 ‘쉬는터’로 불리다 신원터가 되었다.
• 왜마루재:운평에서 광진으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옛날에 왜인이 진을 쳤다하여 왜마루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진재:잿골 뒷골짜기이다. 맞은편에 왜인이 진을 치자 이에 맞서 아군 쪽에서도 진을 치고 대응하였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앵 골:왕답산 기슭이다.
• 외양골고개:신원터에서 조곡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소라티:신원터 밑 무수룡이 앞산과 들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 덕재고개:무수룡이에서 방곡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난도나무골:배내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난쟁이가 자살한 곳이라 해서 난쟁이골로 부르다 난도나무골로 변하였다.
• 선왕덩이:무실동과 방곡 사이 서낭당이 있던 곳이다.
• 도란모퉁이:광진초등학교 뒷들 진대산 모퉁이다.
• 한들:광진 앞들이다.
• 왕답산:일명 왕로산으로 부른다. 고려태조 왕건이 지나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산이다.
• 오가천:오가리에서 발원한 하천이다.
∎공공기관
• 광진초등학교(폐교)
• 광진리 마을회관:1동(24평)
• 광진리 노인정:1동(16평)
∎역대 마을이장
광진리 역대이장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황명복 |
1946. 01.31 |
11대 |
김경열 |
1979. 01.01 |
2대 |
유룡규 |
1947. 01.02 |
12대 |
김기석 |
1984. 01.01 |
3대 |
강순갑 |
1949. 04.20 |
13대 |
김경열 |
1989. 01.01 |
4대 |
정만화 |
1949. 08.31 |
14대 |
김기석 |
1995. 01.01 |
5대 |
정희원 |
1961. 06.25 |
15대 |
최금용 |
2002. 01.01 |
6대 |
강태회 |
1968. 01.01 |
16대 |
김기호 |
2004. 01.01 |
7대 |
백성기 |
1969. 02.01 |
17대 |
송영범 |
2011. 01.03 |
8대 |
정회원 |
1972. 01.01 |
18대 |
|
|
9대 |
김경열 |
1975. 01.01 |
19대 |
|
|
10대 |
황홍규 |
1977. 01.01 |
20대 |
|
|
1949. 08.31 광진 진대 광석이 병합되어 당시 진대리 이장 정만화씨가 광진리 진대리 광석리 이장을 역임 |
∎역대 노인회장
1대 이상재, 2대 김호복, 3대 김용문, 4대 유명식, 5대 유명식, 6대 정창화
∎역대 새마을지도자
김교원, 이상구, 송치범, 이원재, 송영범, 유희길, 손덕수, 지상옥, 김복기, 문효근, 박용남, 지금자, 김민복, 최용환, 김명자, 오화수
∎마을을 빛낸 사람
유선규 - 부산외국어대학교 총장, 충청대학총장(광진초 3회)
김용문 - 6·25 참전용사(국가유공자 표창)
박대규 - 포스코 포웰 기술혁신실장, 재 포항 충북도민회 운영위원, 재포항괴산향우회장
∎광진 마을 유래비
위 치:광진리 845번지
비 명:광진마을 유래비
건립일:1998.11.15.
사업비:2,000만원
(군비 1,300, 자부담 700)
우리 마을은 장연면의 북쪽에 자리하며 동은 추점리, 남은 방곡리, 서는 조곡리, 북은 진대리와 접하고 마을 앞으로 19번 국도가 지나간다. 본래 연풍현 면의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진대(陣垈), 잿골(自若)과 수회면의 작담(鵲潭), 광석(廣石)을 병합, 광진리라 하여 장연면에 편입되고 1946년 행정구역 세분화에 따라 광진과 광석이 분구되면서 광진마을은 잿골, 신원터, 무시렁이의 3개 자연마을을 포용하여 오늘에 이른다. 마을 앞쪽은 박달산 정기받은 맑은 계곡수가 오가천 상류에서 흘러 산자수려한 들이 훤히 곡창을 이루며 병자호란 때 왕이 지나갔다는 왕답산비가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주고 마을 뒤로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진(陣)을 쳤다는 진터(진재)가 마을을 수호해 준다. 마을 주민들은 선조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협동정신을 이어받아 일찍이 70년대 초부터 재래식 영농을 탈피하고 과학영농으로 시설채소, 사과재배단지 등을 조성하여 높은 소득에 생활이 풍요롭고 유서깊은 광진초등학교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마을이 활기차다. 이에 우리 마을 10여 성씨(姓氏) 58가구 주민들은 선조들의 후한 인심과 화합정신을 본받아 더욱 잘사는 마을로 가꾸어 자랑스런 광진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이 비를 세운다.
1998년 10월 광진마을주민 일동
김기석 강성우 강태희 곽승철 김교원 김기순 김기영 김기웅 김기윤 김기철 김기호 김복기 김순임 김왕개 김용문 김주호 김호복 김희순 나춘자 문찬성 박광호 박삼순 박승태 박용남 박재성 박종수 박팔용 손덕수 송모범 송성희 송영범 송재범 안광진 안태찬 안화순 어수길 유명식 유성규 유현택 이경식 이기영 이상재 이일종 이재원 이정규 이종현 이준노 정연철
오기(誤記):
- 비의 원문 ‘진대(陳垈)’는 ‘진대(陣垈)’로,
- ‘진(陳)을 쳤다’의 ‘진(陳)’은 ‘진(陣)’의 오기(誤記)로 바로 잡았다.
∎삶의 현장
잿골은 광진리의 본 마을이자 광진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은 광진초등학교가 폐교되어 북적대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폐교된 광진초등학교 교정은 현재 청소년 체험캠프와 도자기대장경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도자기대장경연구소 정금택 소장은 이곳이 고향으로 최근 직지 30쪽을 각각 도자기활자판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폐교된 광진초등학교에선 해마다 동문들이 모여 동문회와 한마음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언젠가는 다시 이곳에 광진초등학교가 들어설 것을 기원한다.
또 광진초등학교 교정에서는 매년 대학찰옥수수축제가 열린다. 2006년 제1회 장연대학찰옥수수축제 때는 옥수수 종자 개발자인 최봉호 박사가 직접 찾아와 축제를 뜻 깊게 하였다.
광진 마을은 사과, 대학찰옥수수, 봄배추, 가을 절임배추를 주로 재배하고 생활이 비교적 여유로운 마을이다. 왕답산 동남쪽 사면에 자리 잡은 광진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자약동(잿골)이 광진리로 통합될 때 자약동 일부가 방곡리로 편입되었다.
예전에는 광진리도 왕답산 앵골에서 동고사를 지냈다.
오월 단오를 전후해서 배를 가르지 않은 통돼지로 제물을 마련해 제를 지낸 뒤, 온 동민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1970년대 화전 정리와 맞물리면서 동고사는 없어졌다.
광진 마을 위쪽에는 자연마을인 무실동과 신원터가 자리 잡고 있다.
본 마을인 잿골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오랫동안 지역민들과 함께 해온 광진이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광진리를 비롯해 이 지역 일대에서는 유일한 이용시설이다. 광진이발관은 광진초등학교가 있던 시절인 1970년대에 생겨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광진리의 성씨 분포는 다음과 같다.
김씨 9세대, 나씨 1세대, 남씨 1세대, 문씨 2세대, 박씨 6세대, 손씨 1세대, 송씨 2세대, 안씨 2세대, 어씨 1세대, 오씨 1세대, 유씨 3세대,이씨 4세대, 정씨 4세대, 지씨 1세대, 최씨 2세대, 홍씨 1세대 등 총 17개의 성씨가 마을을 이루어 다복하게 살고 있다.
진대리(진대 샘골) |
∎개요
광진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은 광석, 북쪽은 충주시, 남쪽은 잿골, 서쪽은 조곡과 접한다. 마을 앞으로는 19번 국도가 지난다. 진대리는 임진왜란 당시 군대의 진이 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2010년 현재 42가구 88명이 살고 있다. 진대리는 1975년 광진리에서 분구되었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 연 마 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 |
진대리 |
진대, 샘골 |
42 |
88 |
163 |
∎주요 생산물
진대리의 주요 농업은 벼농사였다. 하지만 장연대학찰옥수수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최근에는 옥수수를 가장 많이 재배하고 있다. 그 외 배추와 사과 등의 재배도 꾸준히 늘고 있다.
∎지명 유래
• 진대동:진대리의 중심 마을이다. 옛날에 진(陣)터가 있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샘골:진대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까치샘이 있다.
• 부처당골:진대 뒤 구렁이다. 진대 마을에서는 부처당골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은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농로가 나 있다.
• 벼락바위:진대 앞 광석 뒤에 있는 바위이다.
• 까치소(작담):진대 앞 오가천에 있는 깊은 웅덩이다.
• 병풍바위:진대 뒷산인 왕답산 정상 부근에 있는 바위로, 진대 마을 사람들은 금성으로 부른다. 왕답산 정상에는 일제강점기에 왜인들이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아 놓았는데, (사)민족정기선양회와 지역 주민들이 힘을 합해 이 쇠말뚝을 제거하였다.
• 의진봉(義陣峰):진대 앞들의 구릉으로, 조선시대 아군이 진을 쳤던 곳이다.
• 왕답산:왕로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병자호란 때 왕이 지나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오가천:오가에서 발원해 샘골 끝자락에서 살미면 문광리를 거쳐 흘러드는 문산천과 합류한다.
• 진터 : 진재라고도 불리우며 왕답산 아래에서 잿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임진왜란때 이곳에 아군이 의진을 쳤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공공기관
• 진대회관:1동
• 진대경로정:1동
∎역대 마을이장
진대리 역대이장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유회량 |
1946. 01.31 |
11대 |
이승우 |
1990. 01.05 |
2대 |
정만화 |
1948. 01.15 |
12대 |
정호헌 |
1991. 01.01 |
3대 |
정만화 |
1949. 08.31 |
13대 |
최창원 |
1994. 01.01 |
4대 |
백성기 |
1975. 01.01 |
14대 |
김호경 |
1996. 01.01 |
5대 |
박용학 |
1978. 01.01 |
15대 |
문영상 |
1999. 01.01 |
6대 |
윤만섭 |
1981. 02.01 |
16대 |
정호헌 |
2002. 01.01 |
7대 |
최창원 |
1982. 01.04 |
17대 |
김정기 |
2005. 01.01 |
8대 |
최영실 |
1984. 01.10 |
18대 |
최치범 |
2010. 01.04 |
9대 |
박영묵 |
1985. |
|
|
|
10대 |
홍영우 |
1987. |
|
|
|
1949. 08.31 광진 진대 광석이 병합되어 당시 진대리 이장 정만화씨가 광진리 진대리 광석리 이장을 역임 |
∎역대 노인회장
1대 최석구, 2대 이범승, 3대 강회창, 4대 최거부, 5대 김희수, 6대 정희원, 7대 정희원
∎마을을 빛낸 사람
• 석천순의 처 연안이씨 -‘문화유적’ 편 참조
• 최거부(84세) - 장연농협 조합장 역임
• 유순택(75세) - 반기문 UN사무총장 영부인
• 최영실(72세) - 괴산군의회 1대, 2대의원 역임
• 구오권(68세) - 대구 달서구 구의원 역임
• 정만교(53세) - 교장역임
∎문화유산
• 연안이씨 열녀각(延安李氏 烈女閣)-‘문화유적’ 편 참조
∎삶의 현장
광진리에서 충주 방면으로 자리 잡은 마을이 진대리다. 진대리에서 충주 쪽으로 다시 100여 미터 올라가면 샘골 주유소가 있고, 그 주유소의 뒤편이 샘골이다.
진대리는 왕답산의 동사면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왕답산 자락이 진대리로 흘러내려 오는 형상인데 그 자락의 골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왕답산의 정기를 받은 마을이어서인지 진대리는 고즈넉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마을이다.
‘한들’은 진대리와 광진리 앞들을 일컫는다. ‘큰 들’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이 한들을 가로지르며 오가천이 흘러 토계 방면으로 빠져나간다. 한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 농촌의 변화상을 보는 듯하다. 예전에 한들은 여름이면 진초록 벼들로 넘실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한들 여기저기도 옥수수 밭이다. 논에 옥수수를 심을 만큼 대학찰옥수수의 인기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옥수수를 수확하고 나면 가을배추를 심는다.
진대리 입구 양편에도 어김없이 옥수수가 심어져 있다. 마을 안쪽으로는 마치 마을의 상징이라도 된다는 듯 옥수수 보관 창고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엔 옥수수 대신 사과를 심는 농가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진대리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영부인 유순택 여사가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2009년 8월 반기문 사무총장이 고향 음성군 원남면을 방문했을 때는 장모의 묘소가 있는 진대리를 찾기도 하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가운데 가장 윗길로 들어서면 먼저 연안이씨 정려각이 눈에 띈다. 이 여각의 주인공은 후손이 없는 탓에 예부터 부락 공동 소유의 위토(位土:위탁한 토지) 560평에서 두 말 닷 되의 경작세를 받아 개초(매년 여각을 수리하는 일)에 충당해 왔다. 전에는 해마다 1회씩 부락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해 제사를 지냈다. 현재는 옛 여각 자리(현 버스정류장 옆)에서 마을 쪽으로 40여 미터 옮겨서 새로 단장해 관리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으로 목조 기와 건축물이다.
이 정려각 위쪽에 마을회관이 있다. 수안보에서 괴산나들목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생기면서 마을 앞 도로는 차량 통행이 줄어 한산해졌다. 이로 인해 도로변을 따라 있는 장연대학찰옥수수 판매대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대신 한 번 주문해 먹었던 소비자들이 매년 주문하는 데다 인터넷 판매가 활성화되어 가판 때보다 더 바쁘다고 한다. 장연대학찰옥수수로 인연을 맺은 도시 소비자들은 가을에도 절임배추와 사과를 주문한다.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 삼조인 셈이다. 현재 광진리에는 김씨 5가구, 강씨 2가구, 정씨 5가구, 지씨 2가구, 백씨 1가구, 이씨 5가구, 문씨 1가구, 박씨 3가구, 우씨 1가구, 최씨 5가구, 구씨 1가구, 홍씨 2가구의 12개 성씨 33가구가 최치범 이장을 중심으로 다복하게 살고 있다.
광석리(광석 작담) |
∎개요
본래 충주군 수회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면의면의 진대동 자약(잿골)과 수회면의 작담동·광석동을 병합해 각각 광석과 진대의 첫음절을 따서 광진리라 하여 괴산군 장연면에 편입하였다.
광석은 당시 광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뒤에 큰 바위가 있어 이런 이름을 붙였다. 작담은 광석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있는 까치소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광진리 본 마을 북쪽에 위치하며 북동쪽은 충주시 살미면, 서쪽은 진대리와 접하고, 남쪽은 추점리 운평과 산을 넘어 접한다. 마을 앞으로 19번 국도가 통과한다.
∎마을 현황
행정리 |
자 연 마 을 |
세대수 |
인구 |
면적(㏊) |
광석리 |
광석, 작담 |
73 |
144 |
213 |
∎주요 생산물
수안보 온천 지역과 인접한 경계 마을로 진대리와 함께 넓은 들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요 작목은 벼, 사과, 배추, 옥수수, 고추 등이다.
∎광석 마을 유래비
위 치:광석리 183 번지
비 명:광석마을 유래비
건립일:1994년 11월 30일
사업비:1,700만원(군비 1,000만원, 자부담 700만원)
우리 마을은 조령산맥(鳥嶺山脈)의 지맥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옛날에는 횃불을 올렸다는 봉화봉(烽火峰)이 있고 봉화봉 맥락에 구기봉이 있는데 구기봉 위에는 옛날 성터의 흔적(돌로 쌓은 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 구기봉 아래 위치한 우리 마을은 앞들이 넓고 뒷산에는 옛날에 절이 있어 바위 위에서 스님들이 염불했다는 염불암(念佛岩)이란 바위가 있으며 앞들이 넓다고 하여 넓을 광(廣)자와 염불암의 돌 석(石)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광석이라 지었다 합니다. 동 마을은 조선조 말까지도 연풍현 수회면에 소속되었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현재의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광석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 마을은 안산김씨(安山金氏)의 세거지로 조선조 태종대왕을 도운 좌명공신 연성군 김정경을 모신 사당(威靖祠)과 신도비가 있으며 안산김씨 선조들이 심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수백 년째 웅장함을 자랑하며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 마을 50여 가구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삶의 터전인 광석을 떠나지 않고 화합단결하여 오순도순 사는 모범부락으로 발전시키고자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 碑를 세웁니다.
1994년 12월 광석 주민 일동
오기(誤記)
유래비 원문의 ‘봉화봉(峰火峰)’은 ‘봉화봉(烽火峰)’으로, ‘1916년에 행정구역의 개편’에서 ‘1916년’은 ‘1914년’으로 각각 바로잡았다.
∎지명 유래
• 광석:광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뒤에 큰 바위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작담:광석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앞에 까치소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염불봉:광석 뒷산이다. 옛날 봉화봉과 염불봉 사이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바위위에 앉아 염불을 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해발고도는 168m이다.
• 선왕당넘: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으나 빈대가 많아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도 절터가 남아 있다.
• 두방망이:작담과 광석 사이의 공간을 말한다.
• 뒤매:광석 앞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
• 골무니:광석에서 문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은행난골:작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공산골구렁:작담 뒤 번들이다.
• 풀무들:광석 위 번들이다.
• 마우들:광석에서 살미면 문산 쪽으로 넘어가는 모퉁이 들이다.
• 노적봉:작담 뒤에 우뚝 서 있는 봉우리로, 해발고도는 135m이다.
• 옻샘:작담에 있는 샘으로, 옻이 올랐을 때 병을 낫게 한다고 한다.
• 선바위:작담 뒤에 서 있는 바위를 일컫는다.
• 봉화산:수회리와 경계 지점에 있는 산이다. 봉화를 올렸던 산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해발고도는 404.3m이다.
• 구기봉:봉화산 앞산이다. 해발고도는 335m이다.
∎공공기관
• 광석리 경로당
• 광석교회
• 농업인상담소
∎역대 마을이장
광석리 역대이장
구분 |
성명 |
임명일 |
구분 |
성명 |
임명일 |
1대 |
김제민 |
|
11대 |
지상달 |
|
2대 |
김제화 |
|
12대 |
김준채 |
|
3대 |
정만화 |
|
13대 |
김제용 |
|
4대 |
김제화 |
|
14대 |
윤종대 |
|
5대 |
최찬백 |
|
15대 |
김제흥 |
|
6대 |
장형식 |
|
16대 |
김제용 |
|
7대 |
장응지 |
|
17대 |
윤종대 |
|
8대 |
김준채 |
|
18대 |
김교채 |
|
9대 |
권용운 |
|
19대 |
|
|
10대 |
김제완 |
|
20대 |
|
|
1949. 08.31 광진 진대 광석이 병합되어 당시 진대리 이장 정만화씨가 광진리 진대리 광석리 이장을 역임 |
∎역대 노인회장
• 권영호, 김봉채, 김제완, 김영일
∎역대 새마을지도자
• 김승채, 임정숙
∎마을을 빛낸 분들
• 김정경 - '장연면 인물사'편 참조
• 김 옥 - '장연면 인물사'편 참조
• 김제안 - 장연면장 역임
• 김응렬 - 공군 중령 예편
• 김응채 - 육군 소령 예편
• 김인재(1963~)농학박사
∎문화유산
• 위정사-‘문화유적’ 편 참조
∎삶의 현장
광석리는 장연면과 충주시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장연면 소재지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마을이나 충주시 쪽에서는 장연면의 첫 마을인 셈이다. 작담은 샘골에서 광진교를 건너면 나온다. 광석리는 안산김씨 집성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마을 뒷산은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하여 염불봉으로 부른다. 지금은 수안보와 괴산나들목을 잇는 4차선 도로가 마을 뒤를 가로지르며 지나간다.
광석리 역시 광진리와 진대리처럼 넓은 들에서 주로 벼를 재배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옥수수와 배추 같은 작목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먼저 광석리의 역사를 대변하듯 수백 년 묵은 웅장한 느티나무가 오는 사람을 맞는다. 느티나무 바로 옆에는 광석리 경로당이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광석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입구의 산 아래에는 안산김씨 신도비가 있어 이곳이 집성촌임을 알게 해준다.
광석리에는 해마다 기능인들로 이루어진 봉사단체가 방문하는데, 2010년 여름에도 어김없이 이들이 찾아왔다. 여러 대학과 괴산군의 봉사단체가 합동으로 실시하는 봉사활동으로, 이들은 광석리 외에도 인근의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거동이 불편한 어른들의 이미용과 농기계 수리 등을 해준다.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 뒷산을 등지고 민가가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은 세 갈래로 갈라져 10여 호씩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이 가옥들 사이는 온통 밭이다. 조그마한 동산이 모두 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안쪽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위정사다. 조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오른 연성군 김정경을 모신 사당(威靖祠)과 신도비가 있는 곳으로, 이 마을의 오랜 연원을 알게 해준다.
마을에서 남쪽 동산을 넘으면 작담이다. 작담은 작은 동산 하나를 경계로 광석리와 붙어 있다. 마을 규모는 작으나 넓은 앞들과 마을 뒤편을 뒤덮은 밭들로 비교적 풍요로운 마을이다. 광석과 작담 역시 마을의 주산물이 장연대학찰옥수수로 바뀌었다고 할 만큼 옥수수를 많이 심어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광석리는 충주시 살미면 문강리와 경계를 이룬다. 문강교를 건너면 바로 문강리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오가천은 석문천과 만나 토계로 흘러든다. 이곳에 민보가 있다. 지금은 석문천을 경계로 두 지역이 갈라져 있으나, 조선시대 이전에는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문광강를 건너면 충주시와 이류면, 수안보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여기가 장연면 소재지에서 북쪽 끝이다.
광석리의 성씨 분포는 다음과 같다.
강씨 1세대, 권씨 4세대, 고씨 1세대, 김씨 21세대, 정씨 3세대, 박씨 1세대, 신씨 3세대, 심씨 1세대, 안씨 1세대, 엄씨 1세대, 윤씨 5세대, 이씨 6세대, 장씨 1세대, 전씨 1세대, 조씨 1세대, 지씨 1세대, 최씨 1세대, 표씨 1세대가 거주한다.
안산김씨 집성촌이던 광석리에는 아직도 김씨 세대가 월등히 많다. 하지만 김씨를 제외하고도 17개나 되는 성씨들이 서로 한 가족처럼 살가운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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