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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을 가다(2편)
이 명순
여행 이틀째인 3월 24일,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전망이 좋은 앞좌석에 앉기 위해 서둘러 투어버스에 올랐다. 한참 후, 일행 중 마지막에 승차한 이가 캐리어가방이 없어졌다며 야단법석이다. 갑자기 차내가 술렁거렸다. 급기야 나에게 다가오더니 가방을 실었느냐고 묻는다. 당연한 일을 왜 묻나싶어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뿔싸! 알고 봤더니 내가 그 여행자의 가방을 내 것인 양 버스 짐칸에 얌전히 모셨던 것이다. 한 번 더 확인하지 않고 덤벙대다 실수를 한 것이다. 사라진 가방 때문에 인솔자, 호텔 측, 운전기사와 한참 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였던 모양이다. 내게 시선을 집중했던 여행자들은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집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놀려댄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정대로 빈에 있는 시민공원, 슈테판 성당, 링(반지)거리, 쉔부른 궁전을 관람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시민공원 입구에서 잘 정비된 넓이가 만만찮은 개천을 만난다. 서울의 청계천을 닮았다. 좀 걷고 싶어 강변 산책로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강아지 산책길이라는 걸 알고 얼른 발걸음을 멈췄다. 종종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과 동물 애호가들의 마찰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강아지가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곳곳에 송아지만한 여러 종류의 견공들이 주인의 손에 끌려 어슬렁어슬렁 보란 듯이 산책을 즐긴다. 굼뜬 움직임과 체구가 꼭 주인과 비슷하다. 부부도 오랫동안 살다보면 서로 닮는다더니 개도 그런가 보다.
공원에 들어서자 어릴 적부터 음악의 자질을 보였던 왈츠의 왕 요한슈트라우스 황금동상이 보인다. 동상 앞에 마주 서니 패전의 고통을 이기고 다시 힘차게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가 들리는 듯하다. 우~ 우~ 곡조를 콧노래로 흥얼거려 본다.'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샘솟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과 로맨틱하고도 풍부한 정서를 지닌 이채로운 작곡가 슈베르트 동상도 한편에 있다. 이는 하이든, 모짜르트에 이어 빈 고전악파의 마지막 세 번째 거장이다. 아버지가 궁중악사였던 모차르트는 그의 죽음과 원인에 대해서 수많은 전설을 낳았다. 그의 동상도 보인다. 베토벤이 만든 음이 하늘을 울리는 소리라면 모차르트의 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라고 했다. 그렇듯이 음악은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해서 재현되는 저마다의 사유를 고조시키는 종합예술이다. 조금은 우울해 보이는 브라암스의 동상, 클라라 슈만과 끝내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 까닭일까. 슬퍼 보인다. 발레의 곡 ‘나는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생각난다. 시민공원은 음악가의 흔적과 정취가 묻어나는 거장들이 모인 집합소 같다. 혹한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수시로 음악회가 열린다니 공원 자체가 야외 음악당인 셈이다.
잠시 음악가가 되어 호숫가를 거닐며 그 풍경에 젖어있는데, 뚱뚱하고 험상궂은 현지의 어떤 여인이 우리 일행인 아가씨를 향해 큰 소리를 지른다. 아마도 허락 없이 자신의 사진을 찍는 줄 알고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해명도 못하고, 우리 일행은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계속 야단을 치기에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내가 앞으로 다가가‘I am sorry.'라고 했더니 화가 좀 풀렸는지 가던 길을 재촉한다. 자초지종도 모르고 무조건 미안하다고 한 것이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어렵게 경비를 마련하고 시간을 투자한지라 곧장 찜찜한 마음을 털어버렸다. 어쩔 것인가, 외국어는 평생 나의 숙제인 것을.
청각장애자였던 베토벤동상은 시민공원에서 좀 떨어진 베토벤 광장에 있었는데 왠지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는 운명, 영웅교향곡 등을 자주 접했기 때문일 게다. 장애를 가진 그는 삶 자체가 희망의 메시지라고 했다. 갑자기 가이드가 학창시절에 “베토벤하면 ’영웅‘이 ’운명‘하였으니,’전원‘ ’합창‘ 합시다.”라며, 학창시절에 들려준 음악선생님의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고 한다. 여행자들은 박수를 치며 웃는다. 아마 베토벤의 4대교향곡을 그렇게 외웠던 모양이다.
빈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꿈과 그리움의 대상인 것 같다. 특히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천상의 소리를 찾아 왜 이곳을 찾는지 배경과 분위기로 금방 알 수가 있다. 그에 걸맞게 바이올린의 모양을 닮았다는 오스트리아, 빈에는 음악회 삐끼도 있다. 주점 삐끼는 들어봤지만 음악회 삐끼라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본 단어이다. 음악회가 얼마나 자주 열리면 그런 신종어가 등장했을까 생각하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난다. 오페라하우스마다 음악회 현수막이 나부끼는 것을 보면 비엔나 전체가 음악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쯤 묵어 오페라도 감상하고 음악의 천재들이 모인다는 빈의 거리도 여유를 가지고 걸어봤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 겉만 보고 속맛을 느끼지도 못한 채 슈테판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슈테판 성당은 12세기 중엽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 후 1258년 화재로 서쪽 벽면을 제외한 다른 건물은 사라져 버렸으나, 한 세기 반에 걸쳐 네이브가 고딕양식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다양한 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성당 전면부는 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높은 뾰족탑과 현란한 스테인드글라스는 고딕 양식이다. 137m 높이에 화살처럼 뾰족한 첨탑이 있는 거대한 이 성당에서,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고, 그의 장례식도 치러졌다. 길이 65m에 넓이 35m의 성당 지붕은 선명한 청색과 금색 타일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태어나서 최고로 큰 파이프 오르간과 프레스코화를 보는 순간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시간 투자와 난이도가 높은 예술 작품을 내 머리로는 감히 저울질할 수가 없었고, 다만 감탄사만이 연거푸 나올 뿐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나 슈테판, 빌립은 성령과 권능이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나 빌립과 비교하여 슈테판은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반감을 불러 일으켜 돌에 맞아 순교를 했다.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그것도 잠시,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보기 위해 목을 꼿꼿이 세우고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니다가 하마터면 다른 사람과 부딪쳐 넘어질 뻔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에는 아쉬움이 남는지라 성당 안 맨 앞자리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서울에서의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이곳에 올 수 있게 된데 대한 감사함과, 또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일 없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고 기도를 올린 것이다. 기도가 끝나자 한 일행이“뭐라고 기도했어요?”라고 묻는다. “거대한 슈테판성당을 서울 한 복판에 옮겨다 주시고, 어쨌든지 나를 이곳에 떨어뜨려 놓고 비행기가 뜨게 하소서”라고 했더니 모두 박장대소를 한다. 오늘날 넉넉하고 부유한 유럽이 있기까지는 가톨릭의 근검절약 정신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부럽다. 짧게 머문 시간이었지만 오래토록 간직하기 위해 디카에 내면의 웅장한 장면들을 담았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현지 주부들이 겨우내 집안에서 손수 수를 놓은 레이스 탁보를 들고 다니며 사 주길 간절히 권한다. 수틀도 없이 수를 놓은 작품들은 짜임새가 화려하고 예뻤으나 생각보다 비싸기 때문에 선뜻 지갑을 열 수 없었다. 사실 친정어머니가 혼수로 해준 베게 잇에 놓은 수에 비하면 바늘땀이 고르지 않아 고급스럽지는 않았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자수 솜씨는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일정대로 빈의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따라 지어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보기 위해 링(반지)거리로 향했다. 링거리는 원형의 반지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리마다 전동차가 선로가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얽힌 듯 보였으나 달리는 자동차와 잘 어우러져 서울의 교통 혼잡과는 달리 질서 정연하다. 빼곡히 들어찬 콩나물시루 전동차나 만원버스는 눈을 닦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여유로움이 배어난다. 가는 곳마다 훤한 대낮인데도 차량마다 전조등을 켜고 다니기에 이유를 물어봤더니,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그때 앞서간 인솔자를 따라 잡기 위해 차도를 가로질러 건너려 하자, 저만치서 승용차가 멈추더니 안전하게 건너갈 때까지 한참 동안을 기다려 주었다. 이렇듯 인간을 우선시하는 국가인데 나로 하여금 한국은 교통질서도 모르는 국가로 낙인 될까 좀 부끄러웠으나, 사실 차도를 급하게 건넌 것은 국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색다른 광경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가로등이 길가 전신주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동차가 다니는 도로 중간 전동차 전선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가로등 전신주를 만드는 경비를 줄이고, 새로운 것보다는 옛것을 고수하는 정서라고 한다. 바람에 흔들리기에 불안해 보였으나, 태풍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안전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절약과 옛것을 고수하는 미덕이다.
거리마다 르네상스식 주상복합건물인 귀족의 집들이 즐비하다. 007영화 촬영장인 법원, 자연사박물관, 왕국극장, 신상옥 영화감독 납치사건이 이뤄졌던 인터콘티네탈호텔, 국립오페라하우스, 고딕 양식의 멋진 건물인 시청사, 그리스 신전 양식을 모델로 1883년에 지어진 국회의사당 등 링거리를 차를 타고 다니며 수박 겉핥기식으로 봤지만, 그래도 입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링거리를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일정에 맞춰 발길을 쉔부룬 궁전(Schonbrunn Palace)으로 향했다.
쉔부룬 궁전은 2차 대전 중에 연합군이 쏜 포탄이 3발이나 명중되었는데도 다행히 불발탄이 되어 파괴를 면했다고 한다. 가톨릭이 국교인지라 신(神)의 도움이 있지 않았을까.
이 궁전에는 1,441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방이 많은 것은 당시 왕이 왕족과 귀족들을 거느리고 휴가를 즐기기 위함이라고 한다. 왕가의 여름별장이었던 이곳은 슈테판 성당을 나와 비엔나에서 남서쪽으로 2km 정도 거리에 있다. '쉔부룬'은'아름다운(schoen) 샘(brunn)' 이란 뜻이며,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을 발견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합스부르크 왕조 때 베르사이유 궁을 능가하는 웅장한 궁전을 지을 계획으로 시작된 여름궁전이었는데, '레오폴트 1세'가 공사 도중에 사망함으로써 중단되었다. 50년 후, 테레지아 여왕시대에 완성되어(1749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16명 자녀 중, 막내딸인 '마리 앙뜨와네뜨'가 15세까지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당시 정략결혼을 하여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어 무관심한 남편과 주위의 시기심 때문에 늘 외로워하다 프랑스 혁명 때, 30세의 나이에 도박과 무도회에 빠져 국고를 낭비한 죄로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인물이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궁전 건물 곳곳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가장 좋아하던 짙은 황금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래서 궁전의 한 방은 벽이나 가구를 온통 금으로 장식해 놓았다. 금값만도 원화로 16억 정도나 된다고 한다. 우아하고 호화로운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내부에는 18세기 후반 여왕이 수집한 자기, 칠기, 가구, 회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실내 천장엔 프레스코화,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금박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통으로 깎아 만든 연결부분이 없다는 엔틱가구와 12년이나 걸려서 짰다는 양탄자 형식의 그림도 전시되어 있다. 그 중 45개의 방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었으나, 20개의 방만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중 모차르트가 6살 때, 궁중악사인 아버지를 따라 대연회장에 초대되어 여왕 앞에서 연주를 하고 마리 앙뜨와네트에게 구혼을 했던 유명한 '거울의 방(Spiegelssaal)'도 볼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 모차르트는 같은 또래의 마리 앙뜨아네트와 놀면서 자신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관람한 여러 방 중, 빈 회의 때 연회장소로 무도회가 펼쳐진 '대홀'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중국식 좌담실'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 1세가 포기각서를 쓴 '치욕의 방' 그리고 금으로 치장한 방 등이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 당시만 해도 빈대가 많았던지라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기 전에 3명의 시녀를 먼저 황금침대에 눕혀 빈대에게 잔뜩 물리게 한 다음 왕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 얘기 같았지만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이 궁전은 1809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고, 프랑스 제국이 망한 뒤 나폴레옹의 아들인 로마왕의 저택으로도 사용되었다. 궁전 내에 1690~1918년까지의 마차가 전시되어 있는 마차 박물관(Wagenburg)에는 나폴레옹의 아들이 사용하던 호화로운 사륜마차와 8마리의 백마가 끄는 화려한 카를 6세의 황금마차도 볼 수 있다.
그 외 프란츠 요셉의 어머니였던 소피의 서재, 함스부룩 왕가의 황제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걸린 붉은 방, 꽃그림으로 장식된 작고 아담한 테라스가 있는 작은방, 마리아 테레지아 침실에서 나폴레옹이 거주하였다는 나폴레옹 방,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락실이자 작업실로 사용하였던 도자기방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고궁들이 잠시 오버랩 된다. 영월 사진박물관에 가면 서울의 경복궁, 덕수궁 등 궁궐을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궁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일본인들이 마구잡이로 나무를 심어 궁의 기를 꺾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감추고 싶었을 모습들을 그것도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다. 판이하게 다른 화려함과 크기에 놀란 반면 우리나라는 왠지 작고 미력하다는 느낌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벽에 붙은 초상화, 벽화의 크기와 예술성이 뛰어나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궁금하였다. 신의 손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당시 화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알 수 없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그린 그림이 왕의 눈에 흡족하지 않으면 바로 그림을 찢어버리고 화가를 처형시켰다고 한다. 하늘을 찌르는 것 같은 권력의 위세에 이슬처럼 사라진 화가들의 영혼이 그림에 깃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보기에는 화색 톤이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과 비슷해 보인다. 궁전 안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자 많은 분수와 화목류, 조각상 등을 기하학적으로 조화롭게 배치한 멋진 정원이 펼쳐진다.
쉔부른 궁전 정원은 1569년에 막시 말리안 2세가 수렵장으로 쓰기 위해 동물원과 정원을 만든 데서 기원했으며, 궁에서 내려다보이는 형태가 여느 정원과 다르다. 1775년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프러시아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고, 전몰자 위령을 위해서 세운 그리스 신전 양식의 전승비가 우뚝 서 있다. 전쟁 당시 사라져간 위령들의 떠도는 영혼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위로가 될지 잠시 생각에 젖었다.
글로리에테가 세워진 언덕에 올라서면 비엔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정원 안에 17세기 초 '마티아스 황제'가 설치했다는 분수와 세계 최초의 동물원(700여 종)과 열대식물원이 있다. 동물원은 그 당시 사냥을 하고 싶을 때, 사육한 동물들을 정원에 풀어 놓고 사냥을 했다고 한다.
정원의 나무들은 모두 높이를 맞추어 직각으로 반듯하게 전지하여 깔끔하기는 하나 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빈틈이 없는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를 연상케 한다. 그런 조경이 프랑스식 정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진작가에게 받은 프랑스 풍경의 작품사진과 흡사하다. 궁전 계단 입구서부터 촬영금지인지라 눈으로만 담아 올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다.
점심은 말로만 듣던 호이리게식 특식으로 했다. 빈 외곽에 위치한 호이리게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음식인데, 엄밀히 말해 이 지역에서 나온 포도주를 호이리게라고 부른다. 감자, 다양한 종류의 고기, 햄, 소시지와 함께 직접 담근 화이트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와인과 더불어 고기는 각종 소스에 찍어 먹었으나, 양이 많아 반이나 남겼다. 돈을 버리면 남들이 주워서라도 쓸 수 있지만 버린 음식은 추하기 때문에 적당량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남편의 지론이 생각났다. 그날따라 입맛에 당기는 포도주가 알코올기만 없다면 실컷 마시고 싶었다. 돈 주고 마시는 술 취하라고 먹는다지만 술에 약하고 대낮부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싫어 참았다. 이 호이리게식 레스토랑에서는 보통 악사가 나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식사의 흥을 돋아준다. 1137년에 오픈하여 클린턴, 소피아로렌을 비롯한 여러 유명 인사가 다녀간 곳이다. 유명인들의 사진이 도배지가 되어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870여 년이나 된 나지막한 전원적인 허름한 가정집 같은데, 내부의 천장과 기둥은 연륜의 흔적이 쌓여 반들반들 윤이 나고 정갈하다. 멀쩡한 건물을 뜯고 재건축이라는 명분하에 신축하기를 좋아하는 우리네와는 다른 정서다. 그리고 현지인들은 직장에서 퇴근을 하면 바로 집으로 가고, 삼일만 늦게 귀가하면 이혼대상감이라니 우리 남편은 이혼을 당해도 벌써 수십 번을 당했을 것이다. 남편에게 한국은 애주가들에게 지상천국이라고 했더니 지옥(?)이라고 한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부장적인 책임과 경기 불황에서 오는 압박감 때문인 듯싶다. 그 나라는 복지차원에서 국가가 개인의 노후를 책임져 주기 때문에 경제활동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 집안의 정원을 가꾸는 일은 정시에 퇴근하는 남편들이 도맡아서 한다기에 집안일을 잘 돕지 않는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못들은 척해버린다. 가는 곳마다 상점의 쇼윈도와 가정집 창문에 비치는 작은 화분들이 꽃을 피우고, 행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일정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빈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음 목적지인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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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명순선생님, 동유럽여행기 글 정말 놀라우십니다 덕분에 저도 따라 간접 여행 흐뭇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