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13 05:44
[한 사회개혁운동가의 '변심'… 이영희 前 노동부장관]
한일협정 반대시위 주도해 학생운동권의 '元祖 이론가'
조영래·박세일·장기표씨 등이 학창시절 그가 지도한 후배들
"시민운동과 연을 끊고 정치권 근처에 얼씬 안 해
'정치개혁에 꼬리 내렸느냐' 주위의 비난도 많았지만"
이영희(71) 전 노동부장관이 최근 3부작 책을 출간했다. 각각 제목이 '삶 죽음 의식' '비종교적 삶의 길' '무(無)와 초월'이다.
그를 모르면 위의 문장은 의미를 잃고 만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씨나 한복연구가 이영희씨보다는 대중에게 덜 알려졌지만, 그는 참여지식인 그룹 안에서 명망가였다.
노동법 전문가로서 그는 시민운동의 첫 세대였다. 정치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노동법과 사회정의(正義)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그의 3부작은 자신의 전공(專攻)과는 전혀 무관했다. 삶·죽음·영혼·육신·종교·절대자·믿음·의식·무(無)·초월 등이 키워드였다. 그것도 노년의 회상조 수필이 아니라,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 정리한 '철학 개론서'에 가까웠다. 주석을 빽빽하게 달고 참고문헌을 붙여놓았다.
그를 모르면 위의 문장은 의미를 잃고 만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씨나 한복연구가 이영희씨보다는 대중에게 덜 알려졌지만, 그는 참여지식인 그룹 안에서 명망가였다.
노동법 전문가로서 그는 시민운동의 첫 세대였다. 정치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노동법과 사회정의(正義)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그의 3부작은 자신의 전공(專攻)과는 전혀 무관했다. 삶·죽음·영혼·육신·종교·절대자·믿음·의식·무(無)·초월 등이 키워드였다. 그것도 노년의 회상조 수필이 아니라,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 정리한 '철학 개론서'에 가까웠다. 주석을 빽빽하게 달고 참고문헌을 붙여놓았다.
- 이영희 전 노동부장관은 “수술받기 전 병실에서 쓰던 책의 원고를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한 번밖에 살 수 없고 또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를 묻게 된 거죠. 정치 같은 바깥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나의 삶이 더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지요. 육십이 넘어서도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확신이 없거나 흔들린다면 매우 답답하고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까요."
한 사회개혁 운동가의 이런 '변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서울대 법대 시절 한·일협정 반대시위(1964년)를 주도하다가 제적됐다. 제적과 복학으로 대학원까지 마치는 데 10년이 걸렸다. 학생운동권의 '원조(元祖) 이론가'였다고 한다. 당시 그가 지도했던 후배 중에는 고(故) 조영래 변호사, 박세일 전 의원, 양건 전 감사원장, 장기표씨 등이 있다.
그는 한국노총에 들어가 노조운동을 했고 독일에 유학해 노동법을 전공했다. 1970년대 말 귀국해서는 강원룡 목사가 주도한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노동교육을 담당했다.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실천적 관점에서 뛰어든 것이지요. 하지만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보니 국내의 노조운동은 강성 좌파로 바뀌어있었지요. 노사 간 균형과 조화를 주장하는 나는 '개량주의자'로 취급됐어요. 그러다가 인하대 법대 교수로 갔어요. 체제를 거부하는 재야(在野)운동이 아닌, 체제 안에서 개혁하는 시민운동에 더 관심이 있었지요."
그는 지방자치제 시행에 맞춰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를 조직했다. 첫 지자체 선거에 사회적 명사들을 출마시켜 진정한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해보자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그 자신도 서울시의원에 출마했다. 하지만 모두 낙선했다.
그 뒤 정치개혁 운동에 나서 '나라정책연구회' 회장을 맡았다. 그때 그를 따랐던 젊은이들이 김성식 전 의원, 고성국 정치평론가·정관용 방송진행자 등이다. 1995년에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게 됐다.
"내가 강연 등에서 '새정치를 하려면 개혁적인 인물을 영입하고 구세력은 물러나야 한다'는 발언을 했어요. 민정계인 김윤환(金潤煥)씨가 당대표가 되면서 8개월 만에 해임됐어요. 그는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 소장은 어느 지역구를 생각하고 있어?'라고 물었을 때 난 매우 기분 나빴어요. 정치는 그런 거였는데, 나는 이상(理想)으로만 정치를 생각했던 것이지요. 결국 공천을 받지 못했고 대학으로 돌아왔어요."
"적극적으로 있었지요. 하지만 정치를 하려면 보스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지요. 나는 YS에게 충성한다는 소리를 안 했으니, 그와의 인연이 안 따랐죠."
―정치의 꿈을 접고 대학으로 돌아갈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면 어쩌면 능력과 열정보다 개인적인 운(運)과 시대적 운이 따라줘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지요."
―그때 기회가 됐다면 어떤 정치를 하고 싶었나요?
"계보정치와 지역주의를 타파해보고 싶었지요. 제대로 된 보수ㆍ진보 정당으로 정착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지금도 보수는 여전히 기득권 집단인 퇴보적인 보수이고, 진보는 좌편향된 종북적인 진보가 아닌가요?"
대학으로 돌아간 그는 강의와 집필 활동에 주력했다. 10년 남짓한 기간에 '법학입문' '노동법' '법사회학' '정의론' 등을 출간했다.
"나 스스로 시민운동과 연을 끊었고, 개혁적인 정치 담론에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정치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어요. 주위에서는 '정치개혁을 주장하면서 왜 꼬리를 내렸느냐'는 등 말이 많았어요. 비난도 섞여 있었고."
―시민운동과 정치 참여를 통해 지식인의 역할을 찾았던 것이 아니었나요?
"마르크스주의자인 아담 샤프(폴란드의 정치사상가)가 쓴 논문에서 '소련의 사회주의는 모든 인민에게 행복을 준다고 했지만 막상 병들어서 내일 죽을 사람에게 사회주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다고 기독교(종교)를 믿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존재적 삶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사회주의도 공허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논문 하나가 갑자기 삶의 태도를 바꿀 수가 있을까요? 혹시 개인 신상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느 날 비문증(飛蚊症)이 나타났어요. 눈의 동공에 검불이나 실오라기 같은 것이 나타나 사라지지 않고 계속 떠다니는 증상이죠. 병원에 가니 노화 때문이고 자칫 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요. 그때 처음으로 내 삶에 의문을 갖게 됐어요."
―어떤 의문을?
"만약 실명이 되면 정치 참여는 하고 싶어도 못하지 않는가, 내게 정치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지요."
―이번 3부작이 그렇게 해서 집필된 겁니까?
"당초 젊은이들을 위한 '인생론'을 쓰려고 했지만, 돌아보니 인생을 모르기는 나 자신도 다를 바가 없었어요. 삶과 죽음 문제를 깊이 공부해봐야겠다는 쪽으로 바뀐 거죠. 종교를 가진 사람은 종교가 이끌어주지만, 종교적 세계관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거죠."
―온몸을 던져 사회를 바꾸려 했던 삶은 의미를 잃게 됐나요?
"삶과 죽음에만 골몰하거나 사회와 등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성취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세상에 와서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성취적 삶'과 '완성적 삶' 중에서 후자에 더 관심을 갖게 됐지요."
하지만 3부작의 첫째 권 '삶 죽음 의식'을 탈고한 직후, 그가 열망했던 현실정치의 기회가 뒤늦게 왔다. 후배들의 권유로 이명박 후보의 선거 진영인 선진국민연대 공동상임의장을 맡게 된 것이다. 정권 출범 후 그는 노동부장관에 임명됐다. 사회개혁의 꿈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재임 동안 그는 뚜렷한 성과나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노사문제를 정상화시키라고 나를 노동부장관에 임명한 줄 알았어요.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과 복수노조, 비정규직 법안을 글로벌 기준에 맞게 개혁하려고 했지요. 법 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함께 국회를 설득해줘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신이 국회에 돌아다니면서 하라'는 말만 했을 뿐 전혀 힘을 안 실어줬어요. 하지 말라는 것과 같았지요. 그런 MB에게 솔직히 실망도 했지요."
―비정규직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안을 추진하려다 오히려 노동계의 '공적'이 됐지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기득권 집단으로 변해 노동 권력이 됐어요. 실제 비정규직이나 실업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없어요. 여하튼 그걸로 참여적 삶과는 완전히 작별한 것이지요."
―이론가(理論家)이니, 누군가가 또 부르지 않을까요?
"내가 꼭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가서 무얼 하겠습니까. 이 나이에 기웃거리는 것을 추하게 생각해요."
―윤여준씨 같은 분도 있고, 요즘은 70대 정치인들이 대거 무대 전면에서 활동하고 있지요. 이들은 언제까지 해야 멈출 줄 알까요?
"정치를 처음에는 사명감으로 하지만, 좀 지나면 정치인이 되기 위한 정치를 하게 됩니다. 시민운동도 그런 식으로 평생 하게 되지요. 사회에서의 성취적 삶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자신의 완성적 삶을 생각하면 바깥 문제에 거리를 두겠지요."
그는 장관에서 물러난 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집 안에 칩거해 자신의 3부작을 완성했다. 작년 말 출간된 3부작의 마지막 책인 '무(無)와 초월'을 쓰는 동안 그는 담도암 수술을 받았다.
"당초 이런 상황을 예견해서 책을 썼던 게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발견된 겁니다. 입원해서 수술받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 쓰던 원고를 마무리했어요."
―병실에서 원고를 마쳤다는 겁니까?
"큰 수술이라 결과를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수술받기 전에 자신과의 약속대로 '책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는 6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방사선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체중은 18㎏ 줄었다. '무와 초월'의 후기(後記)에는 '이 책은 나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 이제 집필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종료하고자 한다'라고 적혀있다.
―이렇게 3부작을 쓴 뒤 삶과 죽음 문제를 해결했나요?
"마음의 정리가 좀 됐어요. 수술받기 전 딸에게 '내 나이 칠십이다. 슈베르트는 31세, 모차르트는 35세에 죽었다. 네 할아버지는 52세에 돌아가셨다. 내 친구들은 아직 건강하게 살고 있으나 나는 떠나도 유감이 없다. 내가 학문적으로 해야 일도 다 정리됐다'고 말했어요."
―비종교인으로서 죽음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요?
"완전한 소멸이죠. 하지만 개인의 죽음은 종(種)의 생존을 위한 겁니다. 우리가 죽고도 자녀를 통해 유전자가 이어지듯이 말이죠. 탄생과 죽음을 통해 전체 생명체는 유지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