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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수산악회(대한가수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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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들 이야기 스크랩 윤심덕, `死의 讚美 (죽엄의 찬미)`
이건형 추천 0 조회 161 11.10.27 12: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홍난파의 짝사랑..

윤심덕 '死의 讚美 (죽엄의 찬미)'

 

 

나라면 그렇게 몸을 던졌을까...이탈리아? 프랑스 아니 일본 쯤에서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사의 찬미 윤심덕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당시에 일본과 조선을 오가던 관부선]

 

 

死의 讚美

 

몇 년 전 8 월 한여름 시모노세키 부두에서 부관(釜關)페리를 탄 적이 있다.
부관페리는 부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320 km 의 거리였다.
갑판에 오르니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가는 학생들, 신혼부부, 보따리 아줌마 그리고 이상한 아저씨들의

왁자지껄함이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배는 ‘마의 해협’이라는 현해탄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현해탄의 바닷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현해탄은 한국과 일본을 물길로 이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 이 바다를 부르는 이름은 달랐다.
한국에서 건널 때는 현해탄(玄海灘)이고, 일본측에선 겐가이나다(玄界灘)가 된다.

바닷물은 검지 않았으나 마음은 어둡고 험한 곳이 그곳이었다.


왜의 관정(寬政) 10 년, 즉 1798 년 기록에 의하면 현해탄은 ‘조선 부산해(朝鮮 부산해)’라 하고 있었다.
한참 항해 중 안내 방송은 왼쪽으로 멀리 대마도가 보인다고 했다.  후쿠오카에서 떠나는 배는 대마도를

스치듯 지나가는데 시모노세키 항로는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해도를 보니 지금 지나는 지점은 오키노시마(沖の島) 쯤 되는 것 같았다. 

지도에도 그려지지 않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1926 년 8 월 4 일 밤,  현해탄,  그러니까 70 여년 전 일이었다.

시모노세키를 떠난 관부연락선 두쿠슈마루(德壽丸)는 부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배는 오키노시마를

지나 대마도를 왼쪽으로 두고 있었다.  새벽 4 시 모두 잠든 시간,

갑판 위에는 김우진(金祐鎭)과 윤심덕(尹心悳)이 서 있었다. 

칠흑 같은 밤바다에는 물을 가르는 뱃소리만 넘쳐흘렀다.  그때 그들은 둘이서 약속한 대로 순식간에

바다로 몸을 던졌다.  매우 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 날 1926년 8 월 5 일자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비교적 신속히 보도하고 있었다. 

그 신문을 다시 꺼내 본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

 

극작가와 음악가가 한 떨기 꽃이 되야 세상시비 던저두고 끝없는 물나라로...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지난 3일 오후 11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釜山)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

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그 승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金水山, 30),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1 정목 73 번지

윤수선(尹水仙, 30)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  남자는 김우진이오 여자는 윤심덕이 였다.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1백 40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부산 전보’)”

 

신문은 그날 이후 속보를 계속 내고 있었다. 유명 예술인이었던 그들이 죽게 된 이유라든가, 정사의 찬반

여론 같은 것까지도 실었다. 1926년의 여름을 뜨겁게 달군 기사였다. 

그 이후 우리는 김우진은 잘 몰라도 윤심덕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면 그들이 떨어져 죽은

그 장소는 어디였을까. 신문 기사 외에 기록이 하나 더 있다. 

김일엽 스님은 1962 년 낸 <청춘을 불사르고>(文宣閣)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오키노시마 통신장들은 오키노시마와 대마도 사이에서 가끔 자살을 한다고 말했다. 이곳은 적막하고

물살이 세어 자살자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물길 위에서 그 오키노시마를

보고 있는 것이다.

 

관부연락선 시대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추천으로 관비 유학생에 뽑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1919 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1 년 전인 1918 년 4 월이었다.  당시 일본 관비 유학생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여기에 선발된 것이다. 관비 유학생 제도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 조선의 능력 있는(?) 학생들을

공부시킨다는 명목으로 시행하던 제도이다.  결국 친일파를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거기 선발되었는가. 어쨌든 윤심덕은 시라기마루(新羅丸)라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을 출발했다. 

당시 관부 연락 기선은 고라이마루(高麗丸)와 신라환 등이 있었는데 이 배는 3천 102톤 짜리로 6백 11인

승이었다.(1등 43인, 2등 128인, 3등 440). 두 배는 똑같은 규모였다.

 

한일간의 이동 수단은 지정학적으로 뱃길 밖에 없었다.  초기는 군함, 부정기선, 우편선 등이 부산, 인천

등에 이어졌으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이란 이름은 1905 년 9 월 11 일 쓰여지기 시작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운행하는 배였던 것이다.  그 첫 배는 흥안환(興安丸)이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식민지가 되고는 그들 마음대로 배를 띄우게 된 것이다. 

1911 년 12 월 29 일부터 관부연락선이 정기운항을 개시, 조선은 해상으로 일본과 이어졌다.

1921 년에는 경복환(景福丸), 덕수환(德壽丸), 창경환(昌慶丸) 등 3 척을 여객전용선으로 띄웠다. 

주야 2 회 취항했다. 이 배들은 3,619 톤짜리였다.  여객이 폭주하자 신라환, 고려환 등 3 척을 추가로 배치

했다. 이 배들은 부정기선으로 화물을 주로 실어 날랐다.(有馬純吉, 1931년판 조선신사록, 43쪽, 조선신사록

간행회, 1931) 이 배들은 우리 나라의 옛 나라 이름, 그리고 궁궐의 이름을 붙여 한국으로 가는 배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

 

일제시대 전후, 일본에 가려면 일단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여관에서 1박 한다. 

그리고 부두에서 관부연락선으로 갈아타야 했고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下關)항에 내려야 했던 것이다. 

하루 두 번씩 연락선이 오갔는데 조선인은 통행증을 얻어 밤배 3 등칸을 빌어 타던 때였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는 당시 7시간 반 내지 8시간이 걸렸다. 

시모노세키 역에서 내륙 기차로 갈아타고 도쿄 등으로 가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었다. 

시모노세키 역에서는 아침 8시 50분발, 도쿄행 급행 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경우는 그 반대였다. 윤심덕 그녀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내렸다.

 

윤심덕의 신화

 

성악가 윤심덕(1897-1926)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숭의(崇義)여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다시 경성 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당시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신교육을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졸업 후 강원도에서 보통학교 교원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그녀의 집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가족이기도 했다. 언니는 소프라노 윤심성이고 둘째가 윤심덕이었다. 

남동생은 바리톤 윤기성이고 셋째 딸이 피아노 전공 윤성덕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윤심덕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박을 심하게 받았다고 한다. 

신여성인 그녀는 가정에 안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동경음악학교에 무시험 입학했다. 

우리가 흔히 우에노 음악학교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동경음악학교는 1887 년 관립으로 개교했다.  일본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음악학교였다. 

동경음악학교는 본과와 사범과가 있었다. 본과는 그야말로 연주가를 지망하는 학생이 들어가고 사범과는

음악선생이 되려는 학생이 입학했다.


윤심덕은 원래 관립학교만 다녀 동경음악학교가 그렇게 이질적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1918 년 4월 홍난파(1898-1941)와 동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나이는 윤심덕이 한살 위였다.

당시 김우진(1897 - 1926)도 일본에 와 있었다.  구마모토(熊本)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와서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었으리라.

윤심덕은 우에노 기숙사에, 김우진은 시바 구(芝區)에 있는 하숙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데이트는 주로 우에노 공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녀는 음악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간은 도쿄에 머물며 성악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후 1921 년 7 월 동우회 순회연극 공연 때부터 아주 가까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윤심덕이 그 공연 때 소프라노 가수로 찬조 출연했기 때문이다. 1921 년 귀국한 그녀는 1923년 6월

서울 청년회관(YWCA), 경성공회당 등에서 연주 활동을 해 대중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녀의 연주 레퍼토리는 보면  ‘메기의 추억’ 이 빠지질 않았다.

30 년대  ‘매기의 추억’ 이란 노래가 유행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졸업생 조지 존슨이 청년 때 쓴 시로

원제목은 ‘매기, 그대와 내가 젊었을 때(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이다. 

우리도 중학시절 많이 불렀던 노래이다.  그 2절은 다음과 같다.

 

북망산 수풀은 고요타
매기 영웅호걸이 묻힌 곳
흰 비석 두러서 적힌다
매기, 아 우리가 놀던 곳
고운 새들은 집을 짓고
기쁜 노래 지저귀며 부른다
우리도 노래를 부르자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지금 가사와는 다르다.  왜 그렇게 부르지 않는가. 1925 년 윤심덕은 테너 안기영(安基永)과 함께 이 노래를

음반으로 취입하기까지 했다.  일본 축음기회사(1928 년 일본 콜럼비아로 개칭)에서였다. 

그녀는 이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레코드 가수, 즉 목소리를 남긴 성악가가 되었다. 

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개벽> 잡지 1923 년 7 월호에  ‘1 년만에 본 경성 잡감’이란 글을 쓴다. 

그 글 속에 윤심덕에 관한 비판이 실려 있다.

 

‘청년회관 음악회’ , "듣기에 하도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씨이기에 마침 기회가 있어서 들어간 것이다. 

음량은 충분하나 소프라노 음이 아니요 엘토 음이었다.  다른 때 독창한 것도 그러한지 모르지만

이날 두가지 독창한 것은 음악이란 것보다 창가이었다. 없는 표정을 일부러 내는 것은 비열한 편이 많았다. 

그리고 호의로 보면 활발하다고 할는지 너무 껍쩍대는 것 같았다. 

좀 자연한 태도를 갖도록 수양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두 여류 예술인들은 나이도 비슷,  유명세도 비슷한 때라 아마 라이벌 의식이 강했나 보다. 

윤심덕은 아름다운 눈에 키도 크고 날씬한 몸매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그녀는 악단에서 자취를 감춰 극단 토월회 여배우로도 활동했고 라디오 방송과 레코딩을 하기도

했다.  요새 식으로 하면 만능 탤런트였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말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염문이 계속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도피생활이 이어졌다. 

집을 나온 그녀는 서울 종로구 수은동(授恩洞) 60번지 오쿠다(奧田) 사진관 뒷방에 세를 얻어 숨어들었다.  단성사 부근(수은동 58)이었다.

 

어두운 사회를 버리기로

 

1926 년은 대정(大正) 시대의 마지막 해였다. 시대는 암울했다. 

사회주의, 염세주의 풍조가 지식인들 사이에 깊숙이 퍼져들고 있었다.  이 해의 사회상황을 대충 훑어보면, 

4월 25일 순종이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고, 

5월 9일 긴자 마쓰야(松屋) 백화점에서 첫 투신 자살이 있었다. 

건물에서 떨어져 자살한 사건은 이것이 최초였다.  6월 10일에는 6·10 만세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7월 29일 도쿄에는 박열(朴烈), 김자문자(金子文子) 사건이 일어난다.

 

이 시점에서 서른 살의 두 남녀는 죽음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1923년 정사를 해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1878-1923)와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의 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리시마는 소설가이며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를 김우진은 숭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루이자와(輕井澤) 별장에서 정사했다.

 

김우진은 인산(因山) 날인 6월 10일 하루 전날 목포에서 서울로 온다. 

수은동의 윤심덕을 찾아 가 그녀보고 동경으로 가라 하고 그는 7월 9일 먼저 도쿄 시바 구(芝區)에 있는

자신의 옛 하숙집으로 간다.  윤심덕은 7월 16일 여동생 성덕과 함께 서울을 떠나, 

7월 18일 오사카의 오카하루 여관(岡春旅館)에 묵는다. 그곳에 김우진은 찾아든다. 

‘죽엄의 찬미’를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녹음은 1926 년 8월 1일이었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NITTO)였다. 

 

1920년 창립한 이 회사의 사장은 다누치(田內)였다. 이바노비치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김우진과

윤심덕이 가사를 바꿔 놓은 것이었다. 

우리가  ‘사(死)의 찬미(讚美)’라고 하는 노래의 원 제목은  ‘죽엄의 찬미’ 였다.  

여기서  ‘찬미’는 ‘창가’, ‘음악’이란 말이었다.

 

그 때는 음악을 찬미라 썼다.  이 노래는 그들의 죽음과 함께 큰 유행을 하게 되었다. 

녹음 후 그들은 자신들을 정리하고 시모노세키로 간다. 그리고 그 관부연락선을 탄다.

그들의 정사 뉴스 후 레코드 회사는 돈방석에 앉고-.
윤심덕의 서울 주소 서대문정 1 정목 73 번지는 서소문동 서소문 파출소 앞의 한길이 된다. 

도로가 되었다.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글 : 김정동(목원대 교수)

 

 

 

 

 

 

 

윤심덕

 

1.여류 성악가.

2.본관 : 파평(坡平)

3.활동분야 : 예술

4.출생지 : 평양

5.생존년도 : 1897 - 1926

 

본관 파평(坡平). 평양 출생.

1918년 경성여고보(京城女高普)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그후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하면서 음악회에 출연, 성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1925년 토월회(土月會) 배우로

활약하다가 유행가수로 전향하여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레코드를 취입,

                                                                                          특히 '사(死)의 찬미'로 인기를 끌었다.

 

1926년 레코드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 갔다가 귀국길에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위에서 애인 김우진(金祐鎭)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情死)하였다.

 

 

 

1920년에 창간한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윤심덕의 공연을 주선하기도 하고 지면을 할애해서

널리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레코드에 취입한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레코드가 잘 팔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방송국에서 정식 방송을  할 때는 윤심덕님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윤심덕은 대 스타가 되었지만 얼마 안있어 애인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다가 바다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많은 분들은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본 사람도 없고 또 그 뒤에

유럽에서 윤심덕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어 그의 생사에 관해서는 두고두고 미스테리로 남아서

그의 명성만큼이나 큰 화제꺼리 였습니다.

어찌되었던 윤심덕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하추동 방송)

 

 

 

가져온 곳 : http://kr.blog.yahoo.com/jeong663/6391

 

 

   [1926년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발표한 음반 "사의 찬미"의 가사집.]

 

 

 

 

 

 

한국유성기음반 전집 출간…`사의찬미` 등 희귀곡 수록

 

"우리나라는 그동안 문자ㆍ영상ㆍ음향 3대 기록물 중 하나인 음향기록물이 완전한 공백상태였습니다.

이 유성기 음반 자료는 근대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고리가 될 것입니다."

1907년부터 1945년까지 국내에 유통됐던 유성기(留聲機ㆍ축음기) 음반을 총정리한 전집 `한국 유성기음반`

(한걸음더 펴냄)이 출간됐다. 또한 이 정보를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로 만든 검색 시스템도 갖춰져 7월 1일

오픈을 앞두고 있다.

 

동국대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단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 6년간 연구에 몰두해 왔다. 연구를

이끈 배연형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교수는 "유성기 음반에는 대중음악이나 전통음악뿐 아니라 연극ㆍ

영화극ㆍ코미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형식의 공연 예술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데이터베이스에 포함된 유성기 음반 중에는 윤심덕(1897~1926)의 `사의 찬미` 등 당시에 유행한 대중가요

뿐 아니라 손기정(1912~2002)의 올림픽 우승 이후 일제가 선전용으로 녹음해 배포한 경기 증언,

재담가였던 신불출(1905~?)의 만담 등도 들어있다. 배 교수는 "일부 유성기 음반에는 아이들이 책을

낭독해놓은 것도 있어 당시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책에 실린 유성기 음반은 총 6500여 종으로, 곡 수로는 1만3000여 곡에 달한다. 음반회사들이 보유한

녹음 대장이나 음반의 원판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져 연구자들은 당시의 카탈로그나 신문 광고를

뒤져 음반 정보를 정리했다. 회사마다 매겨놓은 음반 고유번호를 바탕으로 추정한 결과, 당시 유통된

유성기 음반 중 90% 이상을 찾아낸 것으로 연구단은 보고 있다.

 

올 7월 데이터베이스가 오픈되면 음반 목록뿐 아니라 레이블ㆍ가사집ㆍ신문 광고 이미지 등을 일반인들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다만 디지털화된 음원의 경우 저작권 문제로 일반 공개 여부를 논의 중에 있다.

28일에는 `유성기 음반` 전집 출간에 맞춰 동국대학교에서 `동아시아 고음반 연구의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도 열릴 예정이다.

 

(mk뉴스/정아영 기자)

 


 

 

‘사의 찬미’ 남기고 실종된 윤심덕 죽음 둘러싼 미스터리..

 90년 흘렀어도 여전히 미궁


6월 5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갑자기 실종된 조선 최초의 대중가수인 '사의 찬미'

윤심덕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1926년 8월 부산을 향하던 배 도쿠주마루 호에서 짐을 집으로 보내달라는 메모지와 주소가 발견됐다.

김수산, 윤수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후에 극작가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윤심덕은 1920년대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 최초 국비 유학생, 최초 소프라노이자 대중가수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일본 유학 때 만난 사이로 김우진이 당시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남을 지속했다. 당시 윤심덕 김우진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사건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음반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26곡을 녹음할 예정이었지만 윤심덕 요청으로 ‘사의 찬미’라는 곡을 한곡 더 녹음했다.

'사의 찬미'는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 붙인 노래로 윤심덕이 '사의 찬미' 녹음을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흘렸다는 일화도 전해졌다.

 

사고 발생 일주일 후 윤심덕 '사의 찬미' 앨범이 발매됐고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런데 윤심덕 '사의 찬미'가 일본, 조선 양국에서 인기를 얻을 무렵 이탈리아에서 윤심덕 김우진을 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윤심덕 김우진 두 사람이 살아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점,

윤심덕이 동생 윤성덕에게 자신을 찾지 말라고 편지를 보낸 점, 당시 유부남과 처녀의 연애가 용납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어서 자살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생존설을 주장했다.

 

윤심덕 생존설과 관련돼 닛토레코드사에서 노래를 히트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런 가운데 이탈리아 영사관은 이탈리아 내에 김우진 윤심덕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고

공식 통보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윤심덕 김우진 두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건이 발생한지 9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뉴스엔 권수빈 기자]


 

 

김우진, 관심법으로 보아허니 미륵 이라 주장하던 궁예, 김영철을 닮았어...

 

영화 : 사의 찬미 (Death song 1991)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한국 | 160 분 | 개봉 1991-09-21 | 
감독 김호선
출연 장미희 (윤심덕 역), 임성민 (김우진 역), 이경영 (홍난파 역), 김혜리 (윤성덕 역), 김성수 (이용문 역)

 

줄거리

 

성악가의 재능을 인정받은 윤심덕(장미희)은 1919년 최초로 국비유학을 떠난다.

동경음악대학에서 성악가의 수련을 닦게 된 그녀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학생들의 인기를 얻는다.

그녀의 유학 동료 홍난파(이경영) 역시 그녀에게 각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윤심덕은 홍난파를 통해 알게 된 극예술협회의 김우진(임성민)을 사랑하게 된다.

섬세한 감성을 가진 김우진은 불 같은 정열의 윤심덕과 처음에는 부딪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유부남이었던 김우진은 도덕적 갈등을 겪고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려 한다.

한편 윤심덕은 타의에 의해 성악무대에서 대중무대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던 두 젊은 연인은 역경을 겪고 재회하지만 앞으로도 변할 수 없는 현실 앞에

무릎을 꿇고 현해탄 선상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1969년의 영화 '윤심덕']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1897∼1926.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소프라노)·배우. 호는 수선(水仙).
윤심덕은 당대의 김일엽,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효시이며 최초의 여자 관비 유학생,
또한 당대 최다 레코드 판매량을 보유한 최초의 대중 가수 이기도 한 윤심덕.

 

1926년 8월3일 밤 11시 시모노세키 항.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가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부산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믐을 사흘 앞둔 여름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 시간이 지나 날이 바뀌자 아스라이 보이던 항구의 불빛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증막 같은 객실에서 사람에 부대끼며 비지땀을 흘리던 삼등실 승객들도 지쳐 차례로 골아 떨어졌다.

 

새벽 4시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앞바다를 통과할 때,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실 객실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니 승객은 오간 데 없고 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어놓고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갑판 위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여행가방 위에 ‘보이에게’로 시작되는 메모지 한 장과 팁 5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

 

급사는 메모지를 움켜쥐고 황급히 조타실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밤새도록 승객들의 숙면을 방해하던 둔탁한 엔진 소음이 멈췄고,

도쿠주마루의 모든 객실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라진 일등실 승객 두 명을 찾기 위해 승조원들과 승객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항로 주변을 수색했다.

 

도쿠주마루는 예정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항에서 하선한 승객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탑승한 승객보다 두 명이 적었다.

 

 

 

이튿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는 물론 ‘도쿄아사히신문'까지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한 청춘 남녀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동아일보’ 1926년 8월5일자) 

 

기사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서로 껴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전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에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투신했는지, 과연 투신한 것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윤심덕의 유류품에는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의 유류품에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있을 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심덕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음악가였고,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다.

목격자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아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동반 자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지만,  언론은 정사라 단정하고 앞 다투어 추측기사를 쏟아냈다.

 

도쿠주마루에 몸을 실은 수백 명의 승객들은 제각기 그리운 고향을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갑판 위에는 다만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사납게 출렁거리는 물결을 굽어보며 가끔 길게 한숨을 내쉬어 무엇인지

비상히 한탄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멀리 남실거리는 수평선 저쪽을 바라보며 애조(哀調)에 넘치는

애련(哀戀)한 목소리로 ‘사의 찬미’를 불렀으니 그의 오장에서 끓어 나오는 처량한 노랫소리는 다만

으르렁거리는 모진 파돗소리와 함께 수평선 저쪽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버릴 뿐이었다.

그 순간 그들은 푸른 바닷물 속에 몸을 날렸다. (‘윤심덕 김우진 정사사건 전말’, ‘신민’ 1926년 9월호)

 

김우진의 가족은 현상금 500원을 걸면서까지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유서도 없고 시신도 없는 의문의 정사였다.

사고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오사카 닛토(日東)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死)의 찬미’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사고 발생 일주일 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매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사의 찬미"는 그렇듯 불행하게 태동되었으며

3.1운동이 수포로 돌아간 뒤 대중의 마음은 좌절과 허탈감 그 자체였으며,
이런 시대상황에서 애조띤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 "이 풍진 세월" 이 발표됩니다.

 

<이 풍진 세월>은 당시 학도가수이던 박채선과 이류색이 듀엣으로 취입하였습니다.
<이 풍진 세월>은 고복수선생님의 노래로 잘 알려진 <희망가>의 원곡입니다.
사람들은 외국곡을 편곡 개사하여 '희망가'라고 칭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불렀다.
작사자와 편곡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고 암암리에 취입되어 우리나라 최조의 대중가요라 보긴 힘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사의 찬미"는 윤심덕이 최초로 정식음반을 취입하였으며

대중앞에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불려지진 못하였지만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다.

정사 사건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사의 찬미’는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유서도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동반자살한 이후의 상황도 의문이었지만, 자살 동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큰 의문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제각기 아픔과 고민은 있었지만 함께 정사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여러 남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김우진 역시 함께 죽어야 할 만큼 윤심덕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왈녀’라 불리던 여인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했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모친 김씨가 윤심덕을 임신했을 때 쌍둥이를 임신한 듯 보일 정도로 배가 불렀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노릇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 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김우진과의 만남

 
도쿄에서 윤심덕은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윤심덕은 왈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 없이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홍난파, 채동선, 김우진 등 숱한 남학생과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으면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람이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윤심덕은 짜증을 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느냐?”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윤심덕이 동경에 있을 때 특히 친하게 지내는 청년이 두세 사람 있었다.

그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윤심덕과 그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아주 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윤심덕의 정숙지 못한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웬만한 사람의 입에는 거의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면 할수록 윤심덕은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청년들에게 더욱더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그러다 보니 윤심덕을 헐뜯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쳐 다시는 그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일도 흔히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윤심덕은 자기 속만 결백하면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떠들거나 머리털 하나

까딱하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동우회 순회공연단은 일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여관방이 모자라서 윤심덕은 독방에서 자지 못하고

남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윤심덕과 가장 가깝다는 그 청년도 같은 방에서 잤다.

밤이 조금 이슥해서 같이 자던 청년이 윤심덕의 정조의 단물을 한번 맛보고자 윤심덕에게 수상한 행동을

했다. 그때 윤심덕은 갑자기 일어나며 그 남자의 뺨을 치고

“나는 네가 그 같이 더러운 남자인 줄 모르고 가깝게 사귀었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며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너무도 무안하고 민망해서 당장 백배사과하며 이후 다시는 그 같은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애걸복걸했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윤심덕은 여전히 그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한다.

(‘석일은 악단의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1930년 제기된 윤심덕 생존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두 사람이 과연 정사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이다.  윤심덕은 김우진만 사랑한 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사람도 없었다.

1920년대 조선사회에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정사할 이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글 가져온 곳 : http://cafe.daum.net/soriulchorus/

 

 

 

 

 

    ♬

 

    노래의 시작부, 앞부분 일부가 죽음의 노래라고 말하는

   '글루미 썬데이(Gloomy Sunday)'의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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