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연구
출생은
1918년12월2일(음력)이었다.
전북 부안군 상서면 고잔리(나뭇개)였다.
3남1녀중 첫째였다.
27세, 23세였던 부모에게서 출생하셨다.
김재문씨 집 헛간채에서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심한 가뭄이 있고나서 모두가 굶주렸던 때가 있었다.
3일을 꼬박 굶었다.
그리고
죽을 먹었다.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하였다.
들려주셨던 단편
들려주셨던 이야기
아버지 기억의 1번지였다.
12살부터
가마니를 짰다.
그것을 부안읍내에 가져다 팔았다.
그것이 양식이었다.
고잔에서 읍내는 이십리길이었다.
곧은 도로였다.
동생과도 함께 가마니를 짰다.
들려주셨던 단편
들려주셨던 이야기
아버지 기억의 2번지였다.
교회에 나가시면서,
김교선장로
김애란집사를 만났다.
22살 되던 해에
19살이던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전북 부안군 동진면 오중리의 권옥순여사였다.
장로님 집사님의 중매였다.
들려주셨던 단편
들려주셨던 이야기
아버지 기억의 3번지였다.
25살 되던 해
1941년
징용에 가셨다.
사이판이었다.
3년동안
거기에서 비행장 닦는 일을 하셨다.
징용기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오는 배를 타려는데
줄을 섰는데
아버지 앞에서
승선인원초과로 커트되었다.
부득이 다음배를 타게 되셨다.
그런데
먼저 떠났던 배가
미군이 설치해놓은 어뢰를 맞아 좌초
그배에 탔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고를 당했다.
해방전의 일이었다.
들려주셨던 단편
들려주셨던 이야기
아버지 기억의 4번지였다.
1950년
33살되던 해
6.25가 터졌다.
지역행정을 담당했던 미군철수시
미군주둔시설물 철거가 있었는데
여기의 철거시설 자재
확보 때문에
경쟁이 되었다.
즉
그 마을사람들 중
동학교 사람들과
교회사람들간에 갈등이었다.
각각 그 자재들을 확보하여
동학교당 또는 교회당을 짓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쟁의 결과는 교회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교회청년들중 일원이었다.
이 일이 있었는데
6.25가 터져 동학교도 다수가 인민군특에 가담하였고
세력을 얻은 동학교도들 앞에서
아버지는 타겟1호였다.
그들에게 많이많이 두들겨맞았다.
그리고는 인민군들에게 넘겨졌다.
부안경찰서유치장에 갇혔다.
40일간 거기에서 갇혀있었다.
8월과 9월초순이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과 9월28일 서울수복으로
김일성의 후퇴명령이 인민들에게 은밀히 하달되었다.
인민군들이 갑자기 퇴각하는 날이 닥쳐온 것이었다.
인민군들은 거기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모두 몇대의 트럭에 태워
그들 모두의 손과 발을 묶은 채,
전북 부안군 백산면 망산으로 데려다가
미리 준비된
깊고 깊은 구덩이에다
몰아넣고
흙을 덮어버렸다.
그때
그 트럭에 그 감옥 사람들을 태우던 인민군 하나가
아버지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아주 앳띤 인민군 하나가
아버지를 총살할 것처럼 다른 쪽으로 따로 불렀다.
부안경찰서 성황산위로 달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방향에다 총을 갈겼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길로
아버지는
부안군 동진면 오중리(처가)로, 그리고는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신월-당숙의집)으로 가셨다.
부안군 상서면의 고향마을에는
변산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빨찌산들이 많이많이 있어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아버지는 너무 많이 두들겨 맞았다.
그 후유증으로 온몸이 아파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다.
지네를 닭에 넣어 삶아서 약으로 드시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까
내가 너댓살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고생을 하셨다.
들려주셨던 단편
들려주셨던 이야기
아버지 기억의 5번지였다.
내가 고3때 봄
내가 19세
아버지는 53세때였다.
아버지는 큰 낭패를 만나셨다.
가계에서 엄청난 낭패였다.
빚보증에서 낭패였다.
아버지는 식사중에
한숨 내쉬면서
'이래도 내가 살아야 되느냐?'
식구들 앞에서 혼자서 질문을 하셨다.
다음해 내가 전주교대에 입학하였다.
집에는 양식이 1년동안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단둘이 계시게 되었다.
나는 전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누나는 조금 전에 결혼하여 친정집을 이미 떠나있던 상황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신월부락 집에서
단둘이서 1년동안 손가마니틀로 가마니를 짰다.
그것을 부안읍내에 가지고 가서 팔았다. 그리고는 밀가루를 사왔다. 1년내내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어서 드시고 생명을 버티셨다.
그해에 어머니께서 아버지 몰래 들었던 쌀20짝짜리계도 파탄이 나버렸다. 쌀20짝을 탈때였는데 어머니께서 남의집 베틀에 올라가 명주베 모시베 삼베를 짜주고 벌었던 돈으로 부어왔던 계인데 그해에 파탄이 나버렸다. 쌀7짝만 겨우 탈 수가 있었다. 그것을 돈으로 바꾸었더니 당시 돈으로 2만1천원이었다. 이 돈으로 전주교육대학 입학 등록금을 내었다. 당시 대학입학등록금이 2만원이었다. 그래서 집에는 일체 먹을 것이 없었다. 빚을 얻을 수도 없었다. 이미 많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전주시 교동 165번지 최준호씨댁에 들어가서 입주과외선생이 되어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 모든 실상을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월이 지난후에야 듣고 알게 되었다.
들려주셨던 단편
들려주셨던 이야기
아버지 기억의 6번지였다.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밤
식구들이 모두
한 이불 덮고 다같이 누워 이제 막 잠을 자려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께서
사랑방에 다녀오시더니
'마을 어른들의 입에
버릇없는 아이
인사깔 없는 아이로
내 이름이 올라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마을 어른들에게는
어른을 보면 보는 대로
어른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아버지 자녀교육이었다.
전주시 중화산동 동원아파트 502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 던때,
어느 날이었다.
A4종이에다
검은색볼펜으로
'1분만 참자'라고 써서
거실 벽에다 붙이셨다.
아버지 유훈이었다.
결혼후60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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