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하였던 히치콕 특유의 버릇 '훔쳐보기'는 <현기증>에 이르러 마침내 관음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나 창조자의 도구 구실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현기증>은 자신 때문에 동료경관이 사망한 과거의 사건 때문에 고소공포증이라는 도덕적 마조히즘에 빠진 전직 형사 스카티의 '자기치료' 과정과 함께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을 다룬 전형적 이중플롯의 작품으로 히치콕의 관음주의와 환상주의가 만들어낸 지극히 남성적 시각의 작품이기도 하다.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아내 마들린을 쫓는 스카티는 언제나 마들린을 훔쳐보며 동시에 관객도 마들린을 훔쳐본다(이러한 훔쳐보기의 배후조정자는 물른 히치콕이다). 그것은 스카티에게 있어서는 환상이다. 스카티는 마들린이 죽고난 뒤 그를 꼭 닮은 주디를 발견하고는 그를 마들린으로 만들려 한다. 이제 스카티는 환상을 현실로 바꾸는 창조주의 위치에 서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시도는 실제로 주디가 스카티가 쫓던 마들린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 주디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스카티는 고소공포증에서 벗어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히치콕이 이 모든 과정에서 보여주는 남성적 시각은 너무도 뚜렷하다. 스카티의 시점은 분명히 제시하는 반면, 주디와 마들린, 그리고 마들린의 선조인 카를로타의 시점은 애매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히치콕이 노린 함정이다. 이를테면 주디가 연기하는 마들린은 그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딱 한번의 분명한 자기시점만이 보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 시점도 사실은 마들린이 아닌 주디의 시점이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결말부분에 간 뒤 다시 그 장면으로 피드백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마들린의 남편 엘스터와 스카티가 주디를 마들린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히치콕이 킴 노박을 주디로 만들고 또 마들린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히치콕의 이런 반페미니스트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 곧 죽음의 충동에 대한 이야기를 은밀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카를로타와 마들린으로 대변되는 죽음에의 욕망은 그에게 이끌리는 스카티의 심리상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처럼 은유적이고 우회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찾기 힘든다(물론 여성이 환상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또다른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관음주의와 환상주의 그리고 죽음에의 충동을 짜맞추어 나가는 할리우드의 프로이드 히치콕의 세밀한 연출기법은 범접하기 힘든 개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영화적 형식의 탁월함은 두고두고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4번에 걸쳐 사용된 줌과 트랙의 결합장면은 주인공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을 묘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고, 스카티의 시점에 관객을 동일화하기 위해 사용한 주관적 트래킹 숏은 이제는 영화문법의 고전처럼 이야기된다.
히치콕에게 영화는 환상의 실현수단이고 동시에 관객과의 게임도구다. 그래서 그는 늘 지적 우월감을 만끽한다. 그중에서 <현기증>에 감추어진 비밀들은 관객들에게 고난도의 지적 게임을 요구한다. 어차피 게임의 승자는 늘 히치콕이겠지만 관객은 패배를 기분좋게 받아들인다. <현기증>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