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28수복과 함께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문예중대가 창설되어 많은 가요인들이 문관으로 종군하였다. 이 문예중대에 입대한 작사가 유호와 가요작가 박시춘은 북진하는 아군의 사기를 돋우는 노래로 「전우야 잘자라」를 만들었다.
전시라서인지 이념적인 군가만이 불리던 시절 어딘가 현실감이 물씬 풍기는 노래 「전우야 잘자라」가 유행하기 시작, 전쟁 3년 동안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유행하였다. 가사의 1절은 다음과 같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아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이 노래를 취입하였던 인기가수 현인의 창법은 독특한 감정표현으로 이색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노래가 정식 군가로 채택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지나친 감상주의적인 노래로 낙인찍혔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노랫말의 2절 중에서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라는 대목이 문제의 초점이었다.
군가는 아니지만 이런 유형의 노래는 진중가요라는 신조어로 불렸고, 딱딱한 군가보다 많이 불리기 시작하였다. 6·25동란 중에 수많은 군가들이 새로 만들어졌지만, 6·25를 상징하는 노래라면 「전우야 잘자라」를 첫손꼽는 것이 세정의 흐름이었다.
본명 유해준(兪海濬). 1921년 11월15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유진명(兪鎭明)과 모친 백천 조씨(白川 趙氏) 사이의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남은 황주에서 태어나 황준, 차남은 연안서 태어나 연준, 그는 해주서 태어나 해준이라 불렸다. 네 살 때 사업을 하시던 선친을 따라 서울로 이사해 39년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42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도안공예과 2년을 수료했다. 명콤비였던 가수 현인의 고교 1년 후배이기도 하다. 귀국 후 1943년부터 1년여 동안 연극 상설극장인 동양극장의 미술부와 문예부에서 일하며 극본 두 작품을 써서 청춘좌(靑春座)에서 공연했는데 이 때 처음으로 ‘兪湖’라는 필명을 썼다. 유(兪)자는 ‘맑을 兪’라고도 해서 ‘맑은 호수’를 연상해 지은 것. 이어 그의 낭독소설 두 편이 경성방송국(후에 서울중앙방송국, 현 KBS의 전신)에서 방송된 것이 인연이 돼 광복 후 45년 10월, 편성과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라디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일제에 의해 잃었던 우리의 역사와 말을 되찾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의 신설과 편성에 참여하며 해방 후 처음으로 방송된 연속 낭독소설 ‘기다리는 마음’을 집필, 본격적인 방송작가의 길을 걸으며 이 땅에 처음으로 연속 방송극 시대를 열었다. 당시 중앙방송국은 47년 박시춘, 손목인 두 거장을 앞세워 경음악단을 발족한다. 이어 조선방송사업협회에서 건전가요 보급의 일환에 동참, 그는 처음으로 ‘목장의 노래’와 ‘하이킹의 노래’의 노랫말을 쓰며 작사를 시작한다. 이 때 작곡을 맡은 박시춘 선생과의 인연으로 그의 ‘노랫말 인생’이 시작된다. 본격적으로 대중가요에 손댄 것은 1947년 ‘신라의 달밤’. 이듬 해 시공관(당시 명치좌) 무대에서 첫 발표될 당시 아홉 번의 앙코르를 받은 일화로도 유명한 이 노래의 빅히트를 계기로 박선생은 럭키레코드를 설립한다. 이 무렵 방송국에서 경향신문사 문화부로 자리를 옮긴 그는 럭키의 문예부장 직을 제의받으며 소공동에서 충무로까지 걸어 10분 거리를 분주하게 오가며 오전엔 신문사, 오후엔 레코드사를 통해 회사 마크, 로고, 음반 라벨, 포스터, 가사지의 디자인까지 도맡았다.
럭키 1호 음반인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는 고향만리-비나리는 고모령-럭키서울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또한 ‘서울야곡(현인)‘ ‘낭랑18세(백난아)’ ‘아내의 노래(심연옥)’ ‘가을인가 가을(남인수)’ ‘선죽교(이인권)’, ‘여인애가(장세정)’ 등도 모두 이 시절에 발표된 명작들이다. 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불꽃처럼 빛을 발한다. 6.25전쟁이 터졌지만 피난을 가지 못해 적 치하를 청파동 집에서 겪어야 했던 그는 9.28 서울수복을 맞자 일단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으로 오랜만에 시내를 거닐다 명동에서 우연히 밀짚 벙거지차림의 박시춘 선생과 마주친다. 피난에서 돌아온 박선생은 가족을 필동 집으로 보내고 명동이 그리워 나오던 길이었다. 이 잿더미 속의 해후는 명동술집에서의 통음(痛飮)을 거쳐 필동 박선생의 적산가옥으로까지 이어지며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 날 밤, ‘전우야 잘자라’가 만들어진다. 둘은 밤새 술을 마시며 북진, 통일, 해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선생이 먼저 ‘이제 우린 살았다. 북진 통일이 임박했으니 군인들의 사기를 돋울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1절을 낙동강, 2절은 추풍령, 3절은 한강, 4절은 삼팔선으로 골격을 정한 뒤 한 소절의 노랫말이 지어질 때마다 동시에 기타가 튕겨지며 멜로디가 오선지에 그려져 갔다.
1.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자라. 2.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느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전우야 잘자라’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50년 10월 발표)
이 노래는 곧바로 정훈국을 통해 전군에 악보가 뿌려지며 군의 사기를 한껏 북돋았다. 북을 향한 진격의 주제곡이 된 이 노래는 그러나, 1.4 후퇴에 즈음해 육본에 의해 금지된다.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대목이 불길하다는 것으로 휴전 이후에서야 노래가 복권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