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탄과 국정원
번개탄은 국정원 매뉴얼에 있을 것이다. 정식메뉴얼은 아니어도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조직의 안전과 비밀을 위해 자살을 택해야 한다는 묵계로서. 진짜 첩보원이나 첩보영화 같이 극약에 의한 세련된 자살이 아니라 서민적으로 번개탄 자살을 하는 것은 죽음을 개인화하기 위해서다. 모든 비밀을 개인이 떠안고 죽음으로써 즉 죽음을 철저히 개인화함으로써 국가폭력이 개입된 음모를 무마하려는 것이다. 책임과 의리를 죽음과 맞바꾼다는 점에서 국정원은 조폭과 유사하다. 죽은 자에게 보장되는 것은 이후 남은 가족의 생계일 테고, 조직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조직 안에서의 명예일 것이다. 이렇게 국가폭력기구가 조폭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적은 해방공간에서였다. 서북청년단 졸개였던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고 전쟁과 함께 복권되고 끝내 역사의 비밀을 끌어안은 채 죽은 것과 국정원 직원과 같다. 그들의 명분은 애국이지만 무엇이 참된 애국인지에 대한 성찰력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임무완수와 책임만이 애국이라고 믿을 뿐이다.
아무튼 스스로 도마뱀 꼬리가 되어 자기 자르기를 자행하는 것이 저들의 비장한 선서에는 들어 있을 것이다.
국정원 직원이 자살한다는 것은 그 만큼 국정원이 무모하고 어설픈 공작을 많이 하고 그러다보니 꼬리가 드러나고, 하지만 꼬리 자르기로 아직까지는 건재할 수 있는 국가폭력을 등에 엎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 것일까? 왜 개인은 조직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가?
얼마 전 서울에 갔다가 버스를 탔는데 마침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과 언니로 보이는 직장인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여대생은 약간 들떠 퀴어문화제 참가한 이야기를 하고 직장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삼성 같은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퀴어는 취미와 문화이고, 대기업은 생계인가? 그에게는 두 가지 사고가 공존가능한가보다. 나로서는 퀴어는 주체와 다양의 선언으로 들리고, 대기업은 객체와 종속의 선언으로 들려 공존불가한데 말이다.
옛날 대학 다니던 시절 운동권 선배가 농담처럼 운동이 깨어지니 시험 준비해서 국정원이나 들어갈까 하고 말을 하는 걸 들었다. 그 선배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국정원직원이 된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환멸 때문인지 포섭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대기업보다 국가공무원에 대해 국민들은 분명 매력을 느끼고 있다. 정부기관에서 일하면 일반기업보다 안전하고 점잖다고 생각한다. 관료와 공직사회는 본성상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부속기관으로서 체제순응적이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철저히 서열 중심이어서 소위 안정되고 보장되고 예측 가능한 공무원이야말로 보수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보수성보다는 청렴한 공직수행이라는 대외적 명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공직사회란 국가라는 가장 막강한 폭력기계의 부속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안기부나 국정원은 그 속성상 음모와 공작으로 국가폭력의 유지와 실천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안기부와 국정원이 파시즘 기관이라는 것이다. 주임무는 국민을 감시하고 국가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국가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음모와 공작을 수시로 자행한다. 한국사회에서는 독재국가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간첩과 종북빨갱이 사건을 꾸준히 조작하는 기능을 하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번과 같은 대국민도감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상시적 도감청의 한 사례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평범한 그리고 나름 머리도 좋은 보통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애국의 이름으로. 하기야 간디를 암살한 힌두청년이나,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나,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강탈한 박정희나 모두 애국을 이름으로 내세운다. 그러므로 애국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명예욕이고, 조직과 권력의 이름일 것이다. 사람들은 왜 개인을 조직의 부속이 되도록 허용할까?
나는 광주학살이나 보도연맹학살이나 유태인 포로수용소학살이나 국정원 직원의 자살이나 모두 동일한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조직에 대한 자발적 복종과 주체의 부속화이다.
학교를 나오고 군대를 나오고 직장에 들어가면 개인은 사라진다. 이들 모든 조직이 위계사회이고 복종을 강요한다. 나는 전교조나 노조도 근본적으로 학교나 기업의 조직에 부속된 관계를 철폐할 수 없기 때문에 위계적 조직사회에 순기능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전교조 선생은 잘 하고 있고, 국정원 직원은 잘 못하고 있는가? 아니다. 전교조 선생도 열심히 학생들 대상화해서 지식을 주입하고 평가하고 서열화하고,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규율을 내면화하게 한다. 어떻게든 조직에 적응해 살아가는 인간을 주조한다. 다만 단계와 정도가 다를 뿐이다. 국가기계 전체로 보면 학교나 군대나 직장, 국가기관이 잘 작동하고 있고 또 그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종이 있는 한 인간은 죽게 된다. 매년 250명의 학생들이 자살하고, 매일 40명의 사람들이 자살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한다. 물론 세계 최고의 위계사회 조직사회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안두희든 국정원직원이든 또 우리 자신이든 부족한 것은 성찰력이고 통찰력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도 자명한데 모두가 컨베이어벨트 위를 따라가니 따라갈 뿐이다. 죽음이 만연한 가운데.
개인을 종속하고 부속화하는 조직은 거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