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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해] 최강의 군벌 한국사 고려 말 명장 이성계의 활약(3) ─ 왜구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다
신불해 추천 0 조회 2,133 12.03.26 19:22 댓글 5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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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3.26 20:19

    첫댓글 강화도와 수원까지 침탈당하고 개성 코앞까지 쳐들어 왔었다니 이건 뭐.... 임진왜란 ver.0 수준이네

  • 12.03.26 21:48

    ...! "불쌍하니 생포하거라" 지상전의 치트왕

  • 12.03.26 22:35

    헐;;; 용장 그 자체네.

  • 12.03.26 22:37

    허 수원사는데 여기까지 왜구들이 쳐들어왔다니.. 근데 일본측 기록을 보면 오우치가문이 한창 잘나갈때 이들 왜구들을 지휘해서 조선을 쳤다고 나오던데 아 이건 좀 후대인건가. 고려때는 정말 극성이었군요

  • 12.03.27 00:47

    저 시대 큐슈에서 가장 세력을 떨치던 세력은 오우치(大内)가문이 아니라 쇼니(少弐)가문 입니다. 대마도의 宗氏세력은 쇼니씨의 수호대(守護代)였고요(물론 반 독립세력이긴 했지만). 큐슈의 쇼니씨 세력이 당시 대마도 큐슈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영(李領)교수(현 한국방통대 조교수, 동경대 석,박사 과정 수료)는 당시 왜구들이 전쟁의 전문가 들이며, 쇼니씨의 정규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계시죠. 오우치 가문과 왜구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시대는 '왕직'의 후기왜구 시대 입니다

  • 나라 세울 만하네요 ㄷㄷㄷ;;

  • 12.10.27 03:20

    -_-ㄱ 고려 안 망한게 오히려 신기하군요 허허허허허

  • 12.03.26 23:14

    얼마 전 나온 소설인 <시골무사 이성계>가 바로 저 황산 대첩을 소재로 했죠. 지금 여러 사람들이 호평을 하고, 저도 구입해서 읽어 보았는데 무척 잘 쓴 소설이더군요. 여러분들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12.03.26 23:46

    흠... 근데 고려에도 중국의 위왜까지는 아닐지라도 내통자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를일이져... 위의 사료만 봐도 조운선을 턴다던지 내륙포구를 쑥밭으로 만든다던지 하는데 저게 말이 쉽지 조운선이 지나는 경로나 포구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잖슴 ㅡ.ㅡ;;;;

  • 12.03.27 00:45

    일본의 무라이 쇼스케교수(村井章介, 동경대교수) 는 왜구에 30~40%정도가 한반도인이었다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왜구들의 '배'에 주목을 하여, 왜구들이 타고 있는 그 '많은 수'의 배가(세종대왕 시절 조선이 대마도 공격할때 동원한 수보다도 더 많은 수이니.....) 왜구들이 '탈취'한 고려의 조운선 등이며, 그 선박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고려의 배에 익숙한 고려인'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을 하고 계시죠. 즉 '수부, 격군'등의 성격으로 고려인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계시는 거죠.
    뭐....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교수(이분도 동경대 교수셨죠, 무라이 교수 이전세대 분)처럼 90%이상이 고려인

  • 12.03.27 00:55

    이었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죠.(이 분은 우익성향 입니다) 일본교수들의 성향이 다 똑 같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무라이교수는(이분은 '좌익계열'입니다)애초에 그 당시 왜구들의 세계에는 '지금의 국가의식'이 없었다고 주장을 하고 계시는 분이며 (일본인이니 고려인이니 언급할 가치가 없다), 일본의 골수 우익세력에게 '비판당하는' 분이니 성격이 전혀 틀립니다

  • 12.03.27 01:17

    ...그당시 기록 보면 해얀선 마을이니 섬이니 하는건 죄다 왜구들로 초토화되고 내륙지까지 심심찮게 왜구들의 공세에 직면했는데 고려인이 많다면 대체 어느지역 주민들이 왜구로 뛰었다는 걸까요. 왜구에 힘겹게 버티던 사람들이 왜구로 뛰었다? 황당한 이야기지엽.

  • 12.03.27 01:41

    글쎄요, 가왜등의 활동도 나타나고, 노예 등의 '예속적'인 상태에서 왜구에게 '할수없이' 동조한 것까지 친다면(여기서 문제가 되는건 자발적이냐 아니냐는 건데...) 왜구로 뛴사람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죠. 더구나, 왜구들이 '자유자재'로 서,남해안의 험한 '물길'을 이용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임진왜란때조차 일본은 조선의 물길을 이용하는데 애먹었습니다.......) 협력세력이 없고서는 불가능 합니다.

  • 12.03.27 13:20

    임란은 10년이 안되는 단기간이고(그나마 제대로 전역 펼처진 건 2년 미만.) 경인년 왜구는 수십년간 한반도 근역을 털었습니다. 협력세력이 없으면 불가능이란 건 임란처럼 몇년 안되는 단기전역에서나 먹히는 소리에요. 수십년을 같은 지역 해적질하면서 물길 모르면 나가 죽어야죠.

    그리고 그때 고려는 사실상 해금령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요. 예속적 상태로 할수 없이 동조했다는 것 이상으로 왜구를 두려워해서 아예 해얀가에 사람이 끊겼는데 말이죠.

  • 12.03.27 14:06

    왜구에게 잡혀갔던 사람들이 협력했을 수도 있죠. 보아하니 왜구의 습격으로 끌려간 경우도 꽤 되는 것 같은데.

  • 12.03.27 14:25

    글쎄요.... 예를 하나들면 태안반도지역은 고려때부터 조운등의 해로역할을 해왔습니다. 근데 이 지역에서 사고가 빈번하여 운하의 설치를 여러차례 건의 합니다(조선후기까지도 건의를 합니다, 물론 운하 설치가 지형상 불가능에 가까워서 포기했지만요) 위의 예처럼 몇 백년동안 꾸준히 사용했던 해로조차도 사용하기 힘든 서해의 연안해역을겨우 수십년 침략의 경험으로 왜구가 완전히 자유자재로 간파할 수가 있었을 런지. 조수간만의 차, 조류, 바람 등등을 파악해야 겨우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한 것이 바닷길입니다 서해의 바다가 이것에 특히 그악스러운 바다임은 다들 아시는 것이 아닐지.....

  • 12.03.27 14:34

    내부협력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운선 약탈 등에서 생포한 포로등을 협박내지 회유하여 바닷길 안내에 이용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죠. 바다의 사정을 조사하는일에는 간자를 사용하는 것보다 그편이 더 효율적이니까요. 그리고 임란을 예로 든것은 전기왜구 시절보다 임란때 일본의 선박, 항해술이 더욱 발전해 있었고, 무엇보다 일본의 수군 장수중에는 왜구세력이 포함이 되어있었기때문입니다(대표적인예가 구루지마형제죠 형,동생이 이순신장군에게 관광당함). 조선, 중국을 약탈했던 그들의 경험을 이용하고자 히데요시가 그들을 포함시킨거죠. 그런 그들이 조선의 바다에 아예 몰랐을리가 없죠...... 세부적인 파악까지는 아니더

  • 12.03.27 14:54

    라도 임진왜란때 일본수군은 대략적인 조선의 바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해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물론 그 당시 그들의 정보력이 고려조 왜구의 정보력 보다 더 강했는지 약했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는 없지만, 히데요시가 침략전 조선에 대해 세세하게 조사를 했다는 것(풀한포기까지 조사를 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니 뭐....)은 유명하니 바다길에 대한 정보력도 상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 12.03.27 01:45

    음 중간에 보기 비율이 4:1은 기병이 지나치게 많은것 아닌가요? 일반적으로 12:1수준 아닌가요? 그리고 노획한 말중 상당수가 왜구가 고려에서 노획한것을 고려군이 재노획한것 아닐까요?

  • 12.03.27 01:57

    일본교수들은 이 말의 출처를 제주도의 고려에 적대적이었던 '목호'세력과 연관을 지었지만, 이영 교수는 고려가 한반도 연안 섬에서 방목하던 말들을 노획한 것이라 주장하더군요(실제로 진포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목호세력은 1374년에 최영장군에게 작살났으니 왜구에게 말을 공급할 수는 없었겠죠). 근데 황산전투가 발발하기 전까지 진포에서 상주까지 갔다가 다시 전라도 까지 계~~속 약탈을 하면서 왔다면 섬에 있던 말들이 아니라 내륙지역의 말이지 않았을 런지........

  • 작성자 12.03.27 07:48

    저 때 기록을 보면 저 루트를 타는동안 왜구가 정말 미친듯이 약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다 불태우고 하니, (고려군은 패배하거나 지리고 도망가고) 고려 안에서 조달한 말들도 꽤 있긴 있을것 같습니다.

  • 12.03.27 14:53

    실제로 당시 한반도 내륙에도 말들이 꽤나 많았으니까요.....

  • 12.03.27 10:35

    신불해님, 출처를 적으셔야죠. 삼갤의 매그니토님이 쓴 글인거 알만한 분들은 다들 아실텐데...

  • 작성자 12.03.27 11:14

    삼갤의 매그니토가 접니다.

  • 12.03.27 11:16

    헐킈 ㅎㅎ

  • 12.03.27 13:32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 12.03.27 13:39

    ㅎ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 12.03.27 13:5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12.03.27 14:41

    po역관광wer

  • 12.03.27 18:54

    헐.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2)

    영웅의 등장!

  • 12.03.28 00:53

    반전!!

  • 12.03.28 18:37

    이 카페에 용자가 많다. ㅎㄷㄷ

  • 12.05.06 00:35

    ㄷㄷㄷㄷㄷㄷㄷㄷ

  • 12.03.27 14:50

    만약에(역사에 만약은 필요없지만 서도......)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승리만했어도, 이성계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의 명성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 런지......(걍 후손인지라 쓰잘데기 없는 소리 주저리 주저리~~).

  • 12.03.27 17:12

    한두번 승리했어도 뒤에 들어오는 물량을 보면....

    전쟁초반에 한동안은 조선이 수세로 갈수밖에 없지요=.=;;

    수군+게릴라+동장군 디버프 걸리려면 좀 시간이 걸리니까요.

  • 12.03.27 17:30

    어쨌든간 탄금대에서 패하기 전까지는 나라를 구한 명장이었다는 평가에서 무능한 장군이었다는 평가로 확 뒤바뀐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은 끝이좋아야 하는 건가.....

  • 12.03.27 19:08

    북쪽과 남쪽에서 계속 전쟁이 일어나는군요..않망한게 신기할정도네요..

  • 12.03.27 20:21

    거기다 '내정'도 ㅈㅁ 수준이었죠...-_-;

  • 12.03.28 09:20

    애초에 이성계가 정권을 잡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봅니다.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말로가 너무 비참해서 엉뚱하게 개국시조 이성계에게 화살이 돌아가고 위화도회군과 더불어서 한민족의 '역적'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데 너무 결과론적인 생각입니다.전지적 시점에서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흔히 실수하는게 언제나 지금의 입장으로만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현재에 대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결과론적 시각으로 그 당시의 현실을 간과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고려에 마지막 충신들인 정몽주나 최영이 있어서 반짝 국운이 상승했다고 하나 이미 고려는 그 시스템자체가 마비된 상태였죠.

  • 12.03.28 09:27

    반대로 논리를 제시한다면 조선 개국이후 세종,문종조의 충신들도 고려말보다 훨씬 많았고 능력또한 고려보다 좋았습니다.조선개국이 한반도 정치시스템과 사회시스템을 개선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단지 이것이 후대로 갈 수록,역대 세계왕조들이 그랬듯이 전성기가 지난 왕조가 조금씩 부패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겁니다.20세기의 변화에 적응못하고 식민지로 떨어지게 만든 조선위정자들의 책임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개국시조까지 올라가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연관성은 없다 봐야 합니다.과거가 부끄럽다고 부정하고 몸서리치기만 하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미래의 불안정성을 헤쳐나갈 용기따윈 없을 것이라 말하고 싶네요.

  • 12.03.29 15:45

    어찌되었든 망국은 원래 끝이 조선이나 고려만큼 안좋은건 당연하죠.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단지 조선이 바로 윗대의 나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비참하게 느껴진거지... 그래서 까이기도 많이 까이고... 근데 님들아. 신립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진짜 신립의 병력 중 제대로 된 기병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탄금대가 기병대 조총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 얘기가 나올정도로 기병동원력이 당시 조선에 없었을거라고 보는데요. 북방에서도 기병은 커녕 성에 틀어박혀 방어전 펼칠 정도인데...

  • 12.03.29 18:04

    조선은 평시엔 육군의 절반을 기병으로 운용했습니다만. 평시 함경도에서 주둔하는 기병만 6천 5백여에 달합니다. 전시 동원 들어가면 더 높고.
    국경인이 일본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을때 끌고 나온 병력이 '갑기 5천' 입니다. 그냥 기병도 아니고 '갑기' 요.
    거기다가

    최황(崔滉)은 아뢰기를,
    “병가(兵家)는 제각기 장기(長技)가 있습니다. 왜적은 칼을 잘 쓰고 우리는 활을 잘 쏘는데 장기인 궁마(弓馬)로 하지 않고 지친 군졸만을 먼저 내보냈다가 한번 무너지고 나면 맹장(猛將)마저도 패합니다. 또 우리는 척후(斥候)를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매번 복병(伏兵)에게 패합니다.”
    선조 25년 5월23일

    장기를 '궁마' 라고 하고 있죠.

  • 12.03.29 18:15

    함경도에서 성에서 방어전을 벌이곤 했던건 기병부족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인구가 적어서 함경도군의 규모 자체가 부족했던 데 기인합니다. 성종 24년의 전염병 영향때문인지는 모르나 성종 24년, 함경 북도 전역의 방위병이 6천, 함경 남도가 5천이였습니다. 그 넓은 함경도 전역에 병사가 1만대였던 시절이 있다 이말이지요.

    내륙지대인데다 대부분의 군역이 수군으로 전용되는 경상우도에서 군수 한명(유숭인)이 기병을 1천씩 끌고 다니다가 충무공장계에도 이름이 올라옵니다. 물론 유숭인은 단순한 일개 군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수군쪽으로 비중이 높은 경상우도에서 기병 1천의 집단이 포착되고 있지요.

  • 12.03.29 16:00

    북방에서도 대기병전을 펼칠 기병대가 없어서 똥줄 타고 있었는데... 군마 관리도 안된다고 난리나던 시절... 기병은 둘째치고 수도에서 제대로 된 병력도 끌어모으지도 못해서 귀중한 시간 날려먹던 당시 조선에게... 모을 수 있는 기병이 몇이나 될을런지... 이 근거 대는 경우를 본 경우가 없고(근거라고 책에서 떠들어 대는데 전혀 증거라고 보기도 힘듦)... 진짜 내가 신립이었음... 그냥 단기돌격하고싶었을듯... 게임은 그래도 근위대라도 있지. 설마 그냥 승마 가능한 한량들 데리고 나간건가? 니탕개의 1만칠때 신립군은 여기저기 중앙에까지 지원받아서 그 중 기병만 500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 12.03.29 18:21

    신립이 서울에서 끌고 내려간 병력은 8천~1만이며, 이들을 위해 도성에서 마필을 대규모로 징발해 배분해주기까지 합니다. 근거요? 징비록, 수정실록, 정만록 등입니다. 이런 사료들을 근거라고 보기도 힘들다 말하는 학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거기다 이 중에는 활 잘쏘는 한량도 있었다 하지만 도성의 무사, 즉 왕실을 지키는 친위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충청도군 포함해서 최대 1만 6천 이상이 나옵니다. 절반 이상이 기병으로 추정되는. 충청도+서울에서 다 모으지도 못한 병력이 이정도입니다. 조선군이 훈련도가 부족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동원력이 부족했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 12.03.31 15:42

    신립이 탄금대에서 회전을 결정한건 자포자기가 아닌 철저히 신립의 판단으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기록에서 분명하게 "신립이 조선군의 주력인 기병을 활용하려고 조령을 포기했다" 고 밝히고 있고, 또 신립이 거느린 조선군의 규모와 편제 또한 FM을 어기고 경군을 편성해 내려보내서 -패배의 상황에서 연거푸 돌격을 시도할 정도로- 조선에서 제일가는 군대의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승방략 체제의 실패로 상주에서 참패를 당한)이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립이 탄금대에서의 회전을 결정한건 다른 이유보다 조선 최고의 장정들을 모은 최고의 군대라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12.03.31 15:40

    그리고 흔히 탄금대가 기병 대 조총의 싸움이라 하는데, 탄금대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일본군의 빠른 진격으로 사움터를 선점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두번째는 조선군의 탄금벌에서의 기동실패입니다. 고니시군이 당시 상식을 뒤엎는 기동으로 신립이 도달하기 전에 문경, 조령 등에 척후병을 보내고 있었고, 조령 주변에 여러 일본군 돌파구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이는 조선군이 이로운 싸움터를 쉬이 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보면 조령을 주장한 김여물 등이 오판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당연히, 신립은 그에따라 차선책인 탄금대에서 열악한 상황에서의 기병회전을 선택한 것이졍.

  • 12.03.31 15:46

    그리고 회전 직전에 신립의 수차례 실수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조기에 포착하지 못했고, 이는 전투 당시에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진격하는 고니시군에 삼면이 포위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등 뒤는 달천강이고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황한 조선군이 연거푸 돌격하는 장면이 바로 그 유명한 탄금대에서의 돌격이고 말입니다. 조총과 같은 전술적인 무기는 큰 틀에서 보면 그닥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는 없죠. 탄금대에서 고니시가 압승을 거둔것은 조총과 같은 개인무기 차이가 아니라 고니시의 탁월한 전략운영 능력입니다. 신립과 같은 명장을 몰아쳐서 싸우기도 전에 이겨버렸으니 대단한 능력을 가진 양반이죠.

  • 12.04.01 22:04

    3편 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12.04.05 06:01

    이글 보기 전까지는 몰랐었는데 한국사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네요. 여태 이순신/을지문덕/연개소문/강감찬/광개토왕 밑으로 생각했던게 부끄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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