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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금북정맥 (차령고개-곡두재-각흘고개) 2010,12,01.안개속에서 하루를..날씨는 푹하고.. 5시23분에 떠나는 전철을 타기위해 아침 5시에 집을 나선다. 용산역에 06시05분 전에 도착해야 되는 데 조금 연착(정시도착06시03분)해서 06시07분에 도착하니 옆 노선에서 천안행 급행전철이 출발 대기 중이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 개찰을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 가니 서서히 차는 출발한다. 고양이 닭 쳐다 본 꼴이 되고..12월 첫날 새벽부터 나원참... 씁쓸한 기분으로 다시 서울역으로 간다. 06시45분발 천안행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07시53분에 천안도착. 동부역 광장으로 나와 710번 버스를 기다리는 데 근 한시간여를 기다려야한다.한시간에 한대꼴로 다니기 때문이다. 09시40분경에 차령고개에 도착,안개가 심하게 끼어 분간이 안될정도다. 대략 준비를하고 산행시작. 오늘은 된비알을 치고오름이 자주 있어 빨래판 구간이랄까.. 암튼 힘든 구간이 몇번 있었다. 오른발쪽에 통증이 갑자기 와서 더욱 더 .. 특히나 오늘은 차를 기다리고 타고 한 시간이 갈때 4시간40분이고,올때 4시간반,8시간하고도 40여분을 소비했으니 산길 걷는 시간보다 한시간 반을 더 허비한 셈이다. 산행거리;약17km 산행시간;6시간40분 차령고개에있는 공주시 관광안내판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군 편에는 고을 남쪽 40리에 쌍령고개가 있고, 남쪽 45리에 차현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책 공주목 편에는 차현은 북쪽 57리, 쌍령 봉수는 북쪽 50리라고 적혀 있다. 한양을 떠난 전라도 길이 차령을 넘으면 바로 광정역(廣程驛)에 닿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충청도 공주에서 관할하던 큰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정창은 지금의 공주시 정안면 소재지 광정리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광정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이괄(李适)의 난(1624)을 피해 공주로 몽진하던 인조를 전라도 관찰사 이명(李溟)이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맞아 공주까지 호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차령고개는 금북정맥을 넘어가는 매우 중요한 고개였다. 쓸쓸함이 남아 있지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차령고개인 것이다.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차현이란 차령고개를 말함이고 공주강이란 금강을 이름이니 차령고개 이남 사람들은 나라에 등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왕건이 공주 일대의 백제 사람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천안지역을 거점으로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를 물리치고 승리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공주와 청주의 지방호족들은 고려 창업 이후까지도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고 왕건의 군사들을 괴롭혔던 사실에 기인한다. 그래서 자연적인 지리에서는 그다지 높지 않는 능선길이지만 역사적인 지리에서는 세력판도와 패권 쟁패의 능선이 된다. 그러하므로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을 역사적으로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봉수산(쌍령산)정상 모습
골프장 도로가 보이는 데 시야가 가려 보이질 않는다 장고개;광덕면 지장리. 장티, 늦은목 고개라고도 하며 공주시 정안면 사람들이 온양장을 보러 다니기 위하여 넘어 다니던 고개. 오늘 구간엔 자작나무 조림지가 많다 개치고개 ;광덕면 지장리. 석지골 남쪽에 있는 고개. 전에는 공주에서 온양온천으로 통하는 큰 길이었는데 갯골 뒤가 된다. 420.9m봉
마지막 오름길을 올라서니 헬기장이다.이곳에서 산행기를 보니 각흘고개에서 매시 30분경에 버스가 다닌다고 씌여있다. 산행기를 쑤셔 넣고 냅다 뜀박질로 20분만에 고개에 도착,한숨 고르고 스틱을 접어 배낭정리를 하고 나니 100번버스(아산여객)가 고개를 넘어 온다.온양온천역에 도착,17시38분에 출발하는 청량리행 전철을 탄다.
날머리 각흘고개;해발 213m의 각흘고개는 아산시와 공주시를 이어주는 39번 국도가 금북정맥을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고개의 아래에 있는 아산시 송악면 거산리 성골마을이 와우형으로 소가 누워있는 형상인데 각흘고개가 소가 누운 형상 중에서 뿔이 있는 부분이라 하여 각흘(角屹)이라 하였다. 각흘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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