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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굳은 의지
생명은 늘 화두처럼 ‘한의약의 과학화’에 골몰하였다.
과학은 똑같은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재현성이 있어야 하고 반복적으로 수치나 그림으
로 보여주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의학이나 한약은 개념도 애매하고 뚜렷한 지
표로 변화과정을 설명할 수 없으니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약의 효과를 혈액분석기, 초음파 진단기, 심전도를 이용하여 효과를 측정해 내려
고 노력했고, 기공의 효과를 측정해내기 위해 6,000만원을 들여 체열측정기(IR)를 이용하여 측
정해내려는 노력도 하게 되었다. 그때 독일에서 수입된 거금 3,300만 원 짜리 ‘베가 진단기’
를 본 순간 한방진단기가 재현성이 낮아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을 때 새로운 가
능성을 발견하고 바로 구입하였다. 그래서 ‘베가진단학회’를 구성하여 연구하고 보급하여 이런
진단법을 한방의료보험으로 숫가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정식으로 전자맥진기와 베가 진단기가
한방진단기기로 자리 잡아 한방의료보험으로 숫가화시키고 과학화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그 결과 한국정보산업진흥원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정보화 성공사례”에 남부한의원이 한방진
료를 정보화에 도입시킨 사례로 추천되어 홍보지에 공공기관은 항만청, 종합병원은 삼성의료
원, 의원부문에서 남부한의원이 뽑힌 것이다. 1996년 조선일보에서는 특집으로 “한국이 산업
화에서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는 특집에 남부한의원이 한 면에 걸쳐 자세히 소개되
었다. 신문에 나오는 날부터 한의원 전화에 불이 나도록 걸려오고 1명의 간호사는 하루 종일
전화 상담에 매달려야 했다. 하루에 80명 내지 90명의 환자를 혼자서 소화시켜야 했다. 어느
해군병원의 병원장은 가족들을 비행기로 데리고 남부한의원에 찾아와 이런 과학적인 진단을
하는 한의원에서 진찰을 받아보았으면 했다며 찾아오시기도 하였다.
또 미국의 한 회사에서는 민소매 상의처럼 옷에다 센서를 심어 광섬유로 엮어서 야외 활동
중에도 심장이나 폐, 내장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하는 블랙박스 즉 ‘라이프셔츠(Life shirts)’가
출시한다는 뉴스를 보고 생명은 거기에 맥진기만 붙이면 한방진료의 완성이라는 생각이 떠올
랐다. 사실 맥은 아침을 먹기 전, 즉 위맥이 활동하기 전에 보는 평단맥이 기본인데 그 시간
에 의사나 환자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 시간에 사망자도 가장 많기 때문에 중요
한 시간이라고 본다. 그래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사이의 '라몬트' 라는 조그만
시골에 있는 의료기기 연구소에 맥진기를 연구하러 가겠다고 부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부인은
혼자 보낼 수 없단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지내서 정이 없단다. 모든
가족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족이 함께 가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명은 시골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라 와
성공을 했는데 이젠 자식들은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니 세상을 향해 나가 더 큰 외국에서 성
공해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독립심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식 교육은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엄마를 찾다가 끝나는 ‘마마보이’로 고착된다. 미국식처럼 사막에 떨어 뜨려 놓아도 북
두칠성을 찾아 바닷가로 나가고 그곳에서도 사업을 할 구상을 하는 지혜로운 ‘독립성이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문제는 주위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아이들을 데리고 공부시키러 가면 아이들이 예의도 없는 불
량아가 되어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만류를 한다. 그래서 그러면 동부에 뉴욕 근교의 뉴저지
주로 이민 가서 학교를 다니고 생명은 맨하탄에서 한의원을 개업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민
수속을 했다. 이미 친한 고등학교 동창들을 집에 초대하여 환송식도 하고 15년간 조원동에서
경영하던 남부한의원도 전세를 주고 이민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미리 한국에서 3개월간 공부
를 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시험을 보아 미국 침술사 자격증(NCCAOM)도 따 놓았다.
그리고 이민 가기 1달 전 현지를 돌아보기로 하고 일가족이 10박 11일 동안의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제일 먼저 뉴욕에 내려 맨하탄을 구경하였는데 대낮에도 총격전이 일어난다는 할렘가를 구
경해 본 아이들은 미국이 너무 무섭고, 복잡하고 더럽다며 미국이민을 안가겠다고 한다. 하기 는 그 때 안 가기를 잘했다. 만약에 갔으면 911사태에 갇히어 오도 가도 못했을 수도 있었다 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 한국에서 잘 커주었다.
그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로얄 한의과 대학을 방문해 보니 그 대학의 규모는 작았는데 이미
중국계, 일본계, 한국계, 아랍계, 히스패닉 등의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앞으로 미국이 대체의학에 손을 대면 바로 세계화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또 이미 거기에 학생 한 분이 경락 경혈을 3D 그래픽으로 움직이고 또 입체적인 화면으로
경혈부위를 보여주는 CD를 만들어 상품으로 내 놓은 것을 보고 이것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
국에서 출시하자고 하니 한국에서 출시해보았자. 복사본이 나돌아 지적소유권을 보장받지 못
하여 번역비도 안 나온다며 안 하겠다고 한다. 그런 발전된 연구들을 보고 생명은 앞으로 우
리도 한의약을 미국서 수입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느꼈다. 결국 어느 나라가 자금을 많이 투입하느냐 에 따라 이 산업도 그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무주공산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국 이민을 포기한 생명은 자포자기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모교인 곶대골 토성초등학
교의 동문체육대회를 주최하는 주관하는 준비위원장으로 뽑혔다. 2년 후인 2002년의 동문체
육대회의 행사를 대비하여 준비모임부터 시작되었다. 그 모임에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토성
초등학교전자앨범’이었다. 곶대골에서 1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토성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면 소재지인 내수초등학교의 분교형식으로 개교하였다. 그 당시 초가집
3칸 정도의 교실을 마련하여 시작된 토성초등학교는 역사가 약 60 여년 된 아주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 마침 많은 역사적인 자료가 학교에 많이 남아 있어서 스캔으로 모든 자료를 떴다.
그리고 1990년대 이전에는 요즈음처럼 책으로 된 앨범은 없었다, 단지 흑백 사진 한 장에 한
해 졸업생 100여 명의 학생과 교사가 한 컷으로 찍은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졸업할 때 졸업 사진 1장 값이 보리쌀 1되 정도의 값인데 이것도 너무 비싸 사진 찍
는 날은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거나 사진이 나와도 안 찾아가는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초
등학교 졸업생 전체 4,200여 명을 한 장의 씨디에 담아 기념으로 주자는 생각이었다. 기수별
졸업사진이 약 반 정도는 학교에 자료로 남아 있지만 없는 기수도 꽤 많았다. 사진이 학교에
없는 기수들은 찾아다니며 자료 들을 모으고 또 사진만 있지 이름이 없으니 그 소장자에게 이
름을 물어물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완성해 나갔다. 마침 앨범을 정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가 있어 사들였다. 그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부러 클릭을 안 해도 한 장 한 장 자동으로 넘어
가며 모니터에 한 장의 흑백 졸업사진을 뽀샵 처리하여 한 사람 한 사람 오려 붙여 진짜 실제
의 졸업앨범처럼 기수별로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때 마침 정주 방송국에 동문체육대회를 특
집으로 소개한 동영상이 있어 동영상도 수록하고 한 페이지마다 빈 곳에는 야생화로 메우고 추억의 mp3 음악으로 잔잔하게 깔아주었으며 각 페이지 귀퉁이에 인쇄 명령 버튼을 심어 클
릭만하여도 그 페이지를 인쇄할 수도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옛날 초등학교 사진 옆에 현재의 사진을 달라고 하여 옆에 수록하여 정리해 나갔다. 이런 노력을 노동의 대가로 치면 어마어마한 가치였다.
일일이 자료조사를 해야지 사진을 뽀샵 처리하여 한 장 한 장 오려 붙여야 하고, 개인의 이
름을 알아내야 하고, 끝에는 주소록을 작성했으니 어느 대학 한해 졸업생을 한 장에 수록한다
고 해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렇게 작업한 CD의 내용을 인쇄만 한다고 해도 인쇄비만 칼
라 잉크로 하니 1권에 약 5만 원 정도의 값어치가 나가는 앨범을 CD 한 장으로 만들어 모든
동문 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나이 많으신 졸업생은 자기는 이제껏 초등학교졸업 사진도 없었는데 자기의 초등학교
때 사진을 보니 자기 손자랑 똑같이 생겼다며 정말 고마워 하셨다. 1년 반 동안 부인이 진료
를 소홀히 한다며 잔소리를 퍼부어도 시작한 일을 중단할 수 없다며 집에까지 가져와 밤을 지
새우기도 하며 끝없이 완성해 나갔다.
어느 날은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내셨던 사촌 형님이 그 작업내용을 보시고는 “너는 왜 그렇
게 힘든 일을 자청해서 하느냐? 혹시 고향에서 국회의원 나오려고 그런 짓을 하느냐?”며 오
해를 사기도 했다. 이렇게 2002년에 준비한 토성초등학교 동문체육대회를 어느 동문체육대회
보다도 기억에 남게 해주었다.
이처럼 이생명은 컴퓨터를 활용하여 진찰과 한의원 경영에 잘 이용하였다. 보통 한의원에서
진료할 때 환자의 모습을 보고 물어보고 들어보고 진맥을 하여 증상의 군집상태를 보고 무
슨 무슨 ‘증’이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맥을 보고 침을 놓고 한약 처방을 처방해준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그냥 한의사의 머릿속에만 그려져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그 과정을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환자들이 보기에는 그때그때 마다 다르고 특히나 사상체질
판단은 다른 한의사가 내리는 진단은 또 다른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모든 데이터를 집어넣고 컴퓨터로 해결하고 싶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한의학의 기초 이론으로 근거한 동양철학에서는 모든 개념을 자세히 구별하
여 규정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고 많은 뜻을 포함한 ‘통개념’을 썼다. 마치 세탁기 속의 큰 드럼
통처럼 한 통에 담아 활용하였다. 예를 들면 옛날에 어떤 남자와 여자가 둘이 만나 데이트를
했다면 데이트가 끝나고 "우리 다음에 어떻게 만나지?" 하면 “보름날 물래방아 거리서 또 만나지 뭐!” 하고 대충 어림잡아 말하여도 서로 뜻이 통하고는 하던 것이다.
즉 요즘 사람들처럼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규정해서 전달하지 않아도 달이 가장 크게 뜨
는 보름날 그날은 남자의 양기가 충만하여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이니 무심코 이야기해도 여
자가 알아듣고 또 장소도 방앗간 주위에는 저녁에 사람들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을 피해서 편
하게 만날 수 있었고는 하던 것이다.
그래서 ‘기(氣)’라고 하면 옛날 사람은 무엇인지 알고 느끼며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요즘 사
람들에게 기라는 것을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전달하려 한다면 ‘우주 자연과 모든 만물 간에 변
화의 움직임이 있으려 할때 나타나는 일종의 에너지’라고 길게 설명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에너지라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 물질이 정의되어야 에너지를 규정하게 되는데 아직도 인체 내에서 '기'란 대상물질이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고 본다. 대략 중국에서는 원적외선, 미세전류, 유도자장, 입자와 파동 이런 것으로 관찰한 것을 근거로 에너지라고 한다. 물론 이처럼 기를 인체 내에 국한시켜 관찰하면 범위가 한정되어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한의학에서는 비교적 확신을 가지고 변화를 추적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인체의 기는 비교적 ’과학적인 기‘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한의학에서 일련의 증상들을 분석 종합하여 변증하고 맥을 보고 처방을 선택하는 시 스템을 전자차트로 집약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즉 진단과정에서 한의학적인 병 의 원인과 병리과정으로 규정지어 관찰하다 보면 일정한 규칙이 생기니 이것을 수학의 집합이나 행렬로 풀어서 현대 과학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아이디어가 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생명은 맥진기를 함께 연구하던 소드전자회사와 이런 정보를 컴퓨터 모니터에서 구현되는 전자차트를 제안하여 함께 연구하였다. 한의과 대학에서 강의가 도제가 아닌 주입식으로만
강의를 하고 각 분야별로 나누어 교육받다 보니 한의학의 장점인 종합적인 사고가 형성 안 되
어 고민하고 서양의학의 분석적인 사고만 머릿속에 들어오니 종합능력을 키워줄 필요가 있었
다. 그리고 한의대 학생들이 한 환자를 놓고 임상 실습에서 토론해 볼 수 있는 기회마저 가져보지 못하니 진찰기술의 차이가 너무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학생들이 시뮬레이션으로 가상 환자의 증상을 입력하면 프로그램이 결론을 내려주고 정확한 종합진단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같은 클래스에서 함께 교육받은 동창생들이 대학교 교육도 모자라 임상대가들을 좆아 다니며 많은 공부를 해보지만 졸업하고 만나 토론해 보면 결론은 없고 큰소리 친 사람만 진리로 보여지는 결말이 정말 안타까웠다.
요즈음에는 학생들도 컴퓨터 자판으로 입력하는 것이 쓰는 것보다 빠르지만 대부분의 나이드신 구세대 한의사는 아무래도 ‘독수리 타법’ 이다 보니 이것을 ‘스크린 터치’로 입력하는 방법까지 구상하여 개발하고 각기 증상들을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쉽게 바코드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회사 개발자들이 다른 한의원 원장님들에게 이런 전자 차트 프로그램이 시장성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런 것 개발하면 약사만 좋아진다고 절대 개발하지 말라고 한단다. 그렇게 전차차트는 진전이 없었다. 정말 한의사가 이런 연구를 못하게 하여 만약 안하면 다
른 사람들은 연구를 안 할까요? 그래서 그 후 중단된 전자차트연구를 한의생명연구소에 가서
연구팀을 꾸리고 예산을 주어 이 연구를 수리과학연구소와 함께 공동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1997년 2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늦게 대학 다닐 때 강원도 정선에 농촌 봉사활동을 함께 갔
던 이념 서클 삼정학회의 정신적 지주이셨던 윤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대한한의사협회 중앙회
장에 출마하려고 하는데 런닝 메이트를 구해야 회장 후보를 나갈 수 있는데 친구 후배 7명에게 부탁을 해도 봉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친구나 후배가 없단다. 생명이가 함께 선거에 나가면
잘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하신다. 마감 시간 3시간을 남겨 놓고 허겁지겁 졸라댄
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것이 정치판의 시작일 수도 있기 때문에 부
랴부랴 집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사실은 당신도 잘 아는 삼정학회 윤선배가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에 런닝 메이트로 같이 나가자고 하는데 나가도 될까?” 그렇지 않아도 협회
일에 끼어들지 못해 방황하던 생명을 너무도 잘 아는 부인 신씨는 “당신 마음대로 해요. 날
원망만 하지 말고!” 그 말을 듣자마자 윤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과 함께 열심히 뛰겠습
니다!”
두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상대후보는 10여년 어린 같은 대학의 후배였다. 선거캠프를 윤선배
네 한의원에 차라고 매일 진료가 끝나면 모여 대의원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며 각종
연설에 대비한 리허설을 해나갔다 생명과 윤선배는 직접 차를 몰고 전국의 한의사 대의원
172명과 간부들을 한의원으로 찾아다니며 한 표 한 표를 부탁해야 했다. 대구를 시점으로 경
상북도를 상주에서부터 안동 대구 경주 포항 등지로 여관에서 자며 돌기 시작했다. 대의원은
대부분 젊은 층이라 함께 학교를 다니며 한의원 원장은 찾아보니 생명이 아는 대의원은 대부분 동국대 대전대 가천대학교 한의과 대학에서 강의할 때 수강하던 학생들이었던 한의사들이었다. 한의원을 찾아가 만나보면 “아이고 교수님 어인 일로 이렇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전화로 말씀하시지!” “그래도 대의원님이신데 찾아 뵈어야지요!” 주소록의 한의원 위치를 미리
파악하고 찾아가 “우리가 한의계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한 표를 부
탁합니다”라고 호소하며 돌아다녔다. 이리 뛰고 저리 달려 경상도를 다 돌고 나면 전라도로
광주로 갔다. 광주에서 전라도와 광주 대의원들이 광주시 모 호텔에 모여 정견발표를 한다.
회장후인 윤선배의 정견발표에 이어 생명은 찬조 연설로 늘 좌중을 웃기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는 학교 다닐 때부터 6개 외국어를 공부했는데 광주지역에서는 불어를 잘 해야겠더라
구요. ”술 따러 부러! “, ”술잔 부딪쳐 부러! “, ”마셔 부러! “ 전부다 불어로 통하던 데요”
... 미국대통령 연설은 5분 이내에 웃겨야 명연설이라고 하더라구요.
이처럼 생명이 연설을 잘 할 수 있게 된 동기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모르고서는 잘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의하면서 보니 안다고 하는 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가르쳐 보아야 다 아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거기다. 생명의 부친 이복환은 고향 곶대골에서 재담꾼이셨다. 그래서 부친은 80세가 넘으셔서도 늘 봄에 모내기 철에는 꼭 모셔가려고 한다. 힘든 일이 아닌 못내기 줄 넘기기를 맡으셨는데 일하는 사람들에게 재미난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를 잘 하셨다‘ 예로 “요즘에는 집집마다 새벽에 닭이 울지 않는 데요 왜 그러냐하면 요즘에는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시계를 차고 다니니 굳이 꼬끼요!! 하고 울 필요가 없단다. 또 요즈음에는 집집마다 있는 개가 도둑이 들어와도 짓지를 않는 데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주인도 도둑놈인데 뭐 하러 짓느냐?”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 하루 종일 모내기 일을 해도 피곤하지가 않다고 꼭 모셔갔다.
그래서 생명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유머러스하고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었다.
선거결과는 윤선배가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에 그리고 런닝메이트인 이생명이 수석부회장에 약 65%의 지지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생명은 한의원 진료하랴 협회 일하랴 연구하랴 정신이 없었다. 협회 회의실로, 국회로, 보건복지부로, 기타 관련 기관 단체 행사를 혼자 운전해가며 쫒아 다닌다는 것이 초인적인 힘이 아니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보건복지부에는 한방정책관이 정책을 담당하는데 동 네 한의원의 활성화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자고 여러 가지 정책을 건의하면 보건복지부내에서 한방정책국의 힘이 부족하여 이것도 저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물론 외국에도 중국과 대만을 제외한 국가에서는 한의사 제도도 없는데 한의사제도가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불과 백 여년 전만해도 “의사”, “의원”이 한의사 한의원을 지칭하는 말인데 서양에서 들어 온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서자 취급하는 온갖 제도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생명은 한방정책관에게 “우리는 마치 지금도 독립된 한국에서 대한독립 운동을 하는
기분입니다” 라고 울부짓기도 했다. 물론 누구나 잘 났고 응집력이 없는 한의사들도 문제지만
당국의 주관 없는 눈치 보기, 책임 안지기, 복지부동하는 담당자들에게 하소연 한들 바위에
계란 부딪히기 일뿐이었다. 한의사가 연구한 신약은 한의약육성법에 따라 제약회사에서 상품
이 되면 한의사는 쓸 수 없고, 현대 의료기기가 과학자들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쓸 수 있고 한의사는 쓸 수 없는 것이 한국의 의료법에 규정된 한의학이다. 간단히 말해서 한
의사는 돋보기도 쓰면 의료법 위반이고, 한의사는 우황청심환도 미리 만들어 두면 약사법위반
이다. 전근대적으로 반드시 오감으로만 진찰하고, 진찰이 끝나야 그 환자를 위한 약을 조제해
서 그 사람에게만 투약하고 남은 약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 현재의 실정법이다.
생명은 전임회장단에서 추진해 온 “동의보감 유네스코기록유산 등재 사업”이 지진 부진한
것에 대해 메스컴에 나가 중요성을 설명하고 적극적 추진할 것을 제안하고 보건복지부 한방정책국 한방산업과장에게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예산이 책정되었고 나중에 생명이 “한의생명연
구소”에 소장으로 가서 그 사업을 추진하여 중국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등재에 성공하였
다. 중미의 끝 섬 바베이도스에서 토론을 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된 중요한
의서이기 때문에 바로 받아들였다.
이유는
1) 동의보감이 이미 400년 전에 국가에서 출판하여 각기 지방에서 공중보건에 이바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2) 그 후 중국에서는 해적판이 64판이 찍어 질 정도로 명저이었으며 일본 베트남 등지의
의서에 인용되었다. 3) 검색 없이 한눈에 수록된 차례를 알 수 있을 만큼 잘 기획된 책이다
라는 것이 호평을 받았다.
2007년 벌써 각 당에서 대통령선거캠프가 구성되어 가고 있었다. 회장님은 대한한의사협회를 대표하여 수석부회장이 공화당 캠프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받는다. 사실 생명은 군대에 있을 때 할 수없이 대통령선거 때 투료를 한 기억은 나는데 그 후로는 대통령 선거 때 투표도 안 해보았다. 일단 캠프에 가보기로 했다. 각기 직역을 대표하는 캠프에서 의사협회 약사협회를 대표하는 특보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의약단체 대표들이 평상시에는 서로의 고충과 구가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직역에 억매이지 서로 협조해서 국민의 편익을 위해 정책이 나가야 한다는 데는 대체로 동감을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하여는 서로의 감정이 너무 깊이 새겨져 서로 헐뜯고 물어뜯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공감대를 얻는다는 것이 어려웠다. 혹시 토론에서는 공감했던 부분들도 막상 협회에 돌아가면 소수의 골수분자들의 주장에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 일쑤였다. 이처럼 국가의 엘리트인 의약계 종사자들이 이 나라를 이끌고 갈 정책과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하나같이 구멍가게를 차려 놓고 내 밥그릇은 거드리면 안돼요라고 하며 국민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생명은 일단 강 모 국회의원의 보좌관과 함께 <대통령 선거 공약집>에 한의계의 국가 발전 사업의 일환으로 한방산업의 국가신성장 동력으로 한다는 꼭지를 만들어 대통령 선거 공약발전책을 수록하도록 하였다. “한방산업을 IT, BT 등의 첨단 기술과 융합하여 국가 신성장동력으로 구축 한다” 는 내용을 수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 세계의 한방산업시장은 유
럽이 약 33%, 중국이 약 30%, 미국이 약 17%, 일본이 약 15%, 한국이 약 3%대이다.
한국이 3%대를 10%대 만 올려도 자동차산업이나 IT의 수익구조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
다. 지금도 한방산업은 한방 화장품이 가장 커서 800-900억 대 이고 한방샴푸가 400-500억
대인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보조 식품과 제약시장은 너무 미미한 상태이다.
한방산업시장은 당장이라도 건강보조식품시장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사실 신약의 전단계
로 한방제제의 유통이 직역의 제동이 없다면 무궁무진한 시장이다. 미국은 이런 대체의학 시
장이 매년 20%씩 20여년간 성장하여 2015년 정도부터 미국 내 제약시장만큼이나 건강보조식
품시장이 커질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그동안 신약 개발을 위
해서 어마 어마한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사실 그 성공률이 희박하여 개발비가 결국 의료비로
전가되어 신약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싼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국은 5단계의 사보험이 있
는데 보험료가 너무 비싸니까 자꾸 낮은 단계로 이동하며 결국 건강보조식품 등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예방하는 인구가 계속 늘고 경제적으로 부담이 적다고 하여 발전 가능성이 좋은 산
업으로 전 세계에 다단계 혹은 직구로 큰 대체의학산업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대형 슈퍼마켓을 가보면 건강보조식품 코너가 어마어마하게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거대한 시장을 우리는 바라만 보고 있는데 중국은 이미 한약재 추출물을 독일로만
연간 2천 톤을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한약추출물 시장은 없다. 왜냐하면 한의
사는 반드시 생약으로만 처방해야 한다. 일본에는 한의사제도도 없는데 쯔무라제약에서는 한
약 엑기스만 연간 1조 1천 억 원어치 판매한다. 스위스는 인삼 한 뿌리도 안 나지만 효과가
낮은 북미의 인삼 ‘화기삼’에서 사포닌만 추출한 ‘사포니닌’이라는 성분의 알약 혹은 캡슐제제
를 우리나라 보다 200배 이상의 부가가치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상품화하여 생명공학으로 우리나라의 새로운 먹거리로 창출하자는 제안이다.
이생명은 또한 한방 진료의 불신이 되고 있는 ‘사상체질분류’에도 깊은 조예가 깊어 ‘뇌파를
이용하여 사상체질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하여 혼자 연구를 했다. 즉 소양인 태양인 등의 양
인은 모든 일에 도전적이고 태음인 소음인 등의 음인은 우회적이다. 그래서 조용한 방에 대상
자에게 뇌파 탐지기를 장착하고 분위기 좋은 음악, 시끄러운 음악, 우울한 음악 등을 5분정도
들려주면 뇌가 안정된 모습일 때 시간에 따른 알파파의 분포를 측정하면 될 수 있다고 확신했
다. 즉 태음인은 좋은 음악에 심취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파파가 많아져 안정된 뇌
상태를 유지할 것이고 소음인은 우울한 음악에 감정의 반응이, 소양인은 시끄러운 음악에 바
로 반응하고 좋은 음악도 시간이 지나면 집중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연구제안서를 전자통신연
구원에 견적을 내달라고 하니 성공할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약 20억 원이 들고 3년 정도 자문
을 해주셔야 한다고 답변이 왔다. 생명은 연구를 포기했다. 그간 연구해 온 것들을 모두 포기
하자. “꼭 내가 연구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자”, “내 후배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꼭 내가 해야 한다 는 생각을 하지 말자” 라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너무 아쉬워 국가연구기관인 한의생명연구소에 연구제안서를 냈다. 박소장에게 부탁
을 했다. 이 연구는 한의학을 과학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채택하여 주세요!” “그럼
책임연구자인 김고상 박사를 소개시켜 줄게요”, “감사합니다”, 김고상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대한한의사협회 수석부회장 이생명입니다. 전화상으로 설명을 드려 미안하지만 지난 번
사상체질 분류를 뇌파로 해보자고 제안서를 낸 사람입니다”. “아 네 그런데요?”, 귀찮다는 듯
대답을 한다. “제출한 뇌파검사를 이용해서 사상체질을 분류해 보면 어떨 가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 해 보지도 않고 단정할 수 있나요?”, “그럼 연구소에서는 어떻게 연구를 하
시죠?”, “사상체질을 분류한 다음 혈액검사를 통해 활성유전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럼
유전자 서열이나 분석이 이제 막 시작되어 언제 다 밝혀지게 될지 모르는데 그 때까지 계속
기다리시고 만 계실 겁니까?“, ”그렇죠!“, ”좀 답답하네요. 꼭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하시
다니,..“, ”저도 나름 20년간 환자를 진찰 해오며 연구를 집중해보았는데 체질별로 활성유전자
를 찾는 방법은 시냇가에서 사금을 모아 금덩어리를 만드는 것처럼 너무 우직한 방법 같네
요!“ 그러자 김박사는 갑자기 화를 내며 ”수석부회장님은 어디 가서 그런 무식한 소리하지 마십쇼!“ 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런 치욕적인 언사를 듣고 생명은 갑자기 ”남부한의원을 접고한
의생명연구소 소장이 되어 김고상을 연구원에서 자르는 것이 목표다!“ 라는 오기가 생겼다.
2009년 6월 어느 날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국가기관인 ‘한의생명연구소’에서는 소
장의 임기가 다 되어 새로운 차관급대 우의 소장을 초빙한다는 공고가 났다. 9명이 지원했다.
3배수에 생명도 뽑혔다.
어떻게 될지 답답하던 부인 강씨는 우연히 호주에 있는 친구가 사업이 잘 안 풀린다며 점집
엘 가자고 하여 같이 따라갔단다, 호주에 있는 외국 사람도 사주를 대면 너무 정확하게 그 사
람의 상황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씨는 급히 전화를 했다. 남편 이생명의 생일
은 알지만 태어난 시간을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몇 시에 태어났어요?”, “오후 4시
에 태어났지?”. “4시쯤 태어났데..” 그 날 저녁 생명은 낮에 왜 그걸 물었는지 알고 있다. “뭐 라고 점쟁이가 말을 하던가?”, “당신이 나라의 봉록을 먹을 팔자가 있다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데...”, 강씨는 아마도 대한 한의사협회 수석부회장도 나라의 봉록인가 생각했다. 설마 개업하고 있는 생명이 대부분 경성대 교수들이 소장으로 갔던 차관급 국가 고위직 공무원이 된다 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를 발표하는 1주일 전부터 여기저기서 소장으로 갈 것이라는 축하 전화가 여기저기서
왔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발표가 있는 날 아침 7시에 이사회로 면접하러 갔다. 11시에 합격
자가 발표가 있고 오후 5시에 대전에 있는 연구소에 가서 취임식을 하라는 것이다. 11시에 통
보를 받자마자 부랴부랴 대전에 내려가서 생활할 수 있는 옷가지며 짐을 쌌다. 한의원은 강씨
에게 알아서 처분하라고 맡기고 오후 1시쯤에 전용기사가 관용차를 몰고 집으로 모시러 왔다.
몇 개의 짐을 싫고 출발하였다. 대전으로 가는 도중 곶대골에 들려 부모님 산소에 절을 올렸
다. ”부모님의 기도 덕분에 제가 고위공무원이 되었습니다!“, ”크게 웃으세요!!“, ”제가 그 간
못 배웠다고 큰 아버지는 학무국장을 하셨고 둘쩨 큰아버지는 전매청 생산국장을 하신 큰 어
머니 들로부터 못 배우고 무식하다고 괄시받던 아버님 어머님의 체면을 드디어 회복시켜 드렸
습니다!“ 감격의 기쁨에 가슴이 울컥하였다.
오후 5시에 강당에 모여 이사장님을 모시고 취임식이 있었다. “여러분 제가 25년 전부터 꿈
꾸어 오던 저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습니다. 25년 전 저희 집사람을 만나 데이트할 때 집사
람에게 ‘한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쓴 기사가 전문지에 나왔을 때 보
여 주었더니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결혼했답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을 현실로 이
루어 낼 수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소망하는 것을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원장 취임사에서 변화의 법칙은 3가지가 있습니다.
1) 세상 모든 것은 이 시간에도 끈임없이 변화한다.
2) 그래도 반드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있다.
3)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해야만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변화가 꼭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은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위 환경의 변화에 어렵고 힘들어도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것을 연구를 해야 한의학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둘째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의학에 대한 사랑만큼은 절대 변치 말아야 합니다. 이 연구소는 1993년 저도 의약분쟁을 할 때 정부에 건의하여 만들어진 연구소입니다. 저는 성당에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저의 신앙은 한의학입니다. 한의학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셋째 변화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다른 연구소와 다릅니다. 이곳은 ’민족의학의 성지‘라는 생각으로 민족의학의 발전을 위해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불합리한 요소들을 과감히 없애버리고 환골탈퇴해야만 합니다.
한의생명연구소는 15년 전 1994년 의약분쟁이 있을 때 경성대와 보건복지부가 컨소시엄으로 만든 연구소로 서울 강남에 있을 때부터 생명은 연구소에 기공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과제에 참여를 하게 되면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기공으로 암을 치료한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나라에서 기공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나 연구해보라는 상부의 지시로 연구비가 지원되었다. 생명은 함께 수련하던 후배 제자들을 모아 강남연구소에 갔다. 그 당시 150여 평의 사무실에 약 30여 명 1년 예산 규모 30억 정도가 한의생명연구소의 전부였다. 그리고 실험실은 주택가의 창고에 위치하여 따로 있었다. 어두컴컴한 창고에 백열등을 키고 쥐를 키우는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가끔은 흰 쥐가 실험실에서 도망을 가 식당가에 돌아다녀 강남구청에 진정이 들어오니 직원들은 흰 쥐 잡으러 다니는 것이 일과 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생명은 중학교 2학년 때 과학반에 특활활동으로 여름방학 내내 생물 선생님과 ‘엽록소 추출’에 관한 실험에 참여를 해보았기 때문에 연구가 어떤 것이고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또 실험실장비에 관심이 많았다. 1974년 경성대 한의과 대학에 입학하였을 당시에도 한의과 대학 대학원에서는 모든 학위논문을 약학대학 또는 의과대학에 학위논문실험을 의뢰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 마침 한방생리학교실에 부임하신 조교선생님이 바로 땅 끝 마을에 무료 진료팀을 구성하여 해남에 함께 갔던 진교수이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내내 시간이 나면 진 교수님을 그림자처럼 쫒아 다니며 실험에 무급 봉사자로 참여하였다.
그때 진 선생님이 처음으로 하신 실험이 병아리 내장을 적출하여 양쪽 끝을 묶어 크로마토그래피에 걸고 한약재중 보약의 추출물을 넣어주면 안 넣어준 것보다 더 수축력이 좋은 가를 보는 것이었다. 너무도 간단하였지만 결과가 생각보다 잘 안 나왔다. 진 선생님은 마음이 여려 수없이 병아리를 잡아 실험을 거는데 마음이 아프고, 결과가 썩 좋지 않자 스트레스를 무척 받으셨다. 가끔 학교 앞 술집에 우리들을 데리고 가셔서 막걸리를 마시며 푸념을 털어 놓기 일쑤이셨다. 그 당시 코미디언 이기동씨의 유행어 “궁다라 닥닥 삐약! 삐약!”이 라는 단어 가 티브이나 라디오에 나오거나 학생들이 흉내를 내면 갑지기 화를 내시곤 했다.
어쨌든 그게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 진교수님은 나중에 한의생명연구소 2대 원장을 지내셨고
생명은 후임으로 6대 원장을 지냈다. 그렇게 실험실 사정을 잘 아는 생명은 서울 강남의 한의
생명연구소의 실험실이 한의대대학 실험실만도 못하게 왜소한 규모에 크게 실망 하였다.
암튼 그 실험실에서 6명이 참여하여 피부암에 걸린 마우스에게 1주일에 2번 씩 외기를 발사하여 암 크기가 줄어 드는지 실험에 참여를 하였다. 예비실험에서는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와 본격적으로 실험에 들어갔다. 참가한 대학생들은 중간고사가 걸리고 공력이 약한 학생 시술자가 참여하여 그런지 결과는 좋지 않아 발표하지 못했다.
그 후 다시 얼마간의 공력을 가진 생명과 다른 기공지도자를 대상으로 기를 수련할 때 뇌
에서 나타나는 혈당효소의 변화가 있나 측정하기로 하고 f-MRI 기계에 들어가 측정하기로 했
다. 그런데 생명이 아무도 없는 방에 기계에 누워 팔다리를 묶고 있는데 그 당시 기계가 구형
이라 그런지 찰칵 찰칵하며 돔에 끌려들어 가는 것이 마치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교수대에
끌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에 휩싸여 온 몸에 닭살이 돋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발을 들어 버
둥대며 소리를 질러도 밖에서 모니터링하는 기사들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온 몸에 진땀은 바
짝 바짝 나고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약 15분정도 지나 겨우 모니터에 이상 현상을 발견했
는지 들어 와 풀어주었다. 그 후 생명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압이 폭발적으로 올라가고 폐쇄
공포증이 생겼다. 그 후로 한의원 진찰실도 항상 문을 조금 열어 두어야 했고, 소장에 취임한
후에도 소장실 출입문은 항상 조금 열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서울 강남에서 대전으로 옮겨간 한의생명연구소는 5년 사이에 15,000평에 건평 약 1,200평
정도에 기숙사 500평 정도에 직원도 약 200여명에 1년 예산이 183억 정도로 규모가 크게 발
전하였다. 물론 같은 이사회 그룹의 다른 연구소에 비하면 보통 1/3내지 1/10정도로 왜소하
였다. 그래서 우선 내용도 중요하지만 외형을 계속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제대
로 된 연구동 건물을 지어 실험실을 늘리고 지방에 분원까지 구축하고 예산 규모며 연구비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활동내용을 홍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매스컴의 방송, 신문, 잡지, 인터넷
매체의 홍보력을 잘 아는 생명은 연구소의 홍보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
다 강연 특강 등을 하며 한의학도 과거의 포장된 전시장의 밀랍 속에서 나와 일상생활 속에
응용되고 미래의 산업화 가능성을 알려야 했다. 홍보관도 만들고 미래의 원격진료나 정보 로
봇화한 한방진료를 동영상으로 구현하고 실제로 만들어 보도록 제안하여 구축해 나갔다.
해외에도 많이 알리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을 연대한 국제한의학연구소포럼을 만들었
다. 한국에서 먼저 국가 대표 급 소장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가졌다. 중국은 이미 1950년대
마오쩌뚱(모택동)시절 마오쩌뚱의 할아버지가 중의사 이시었기 때문에 일찍이 정치적인 배려
로 중국헌법에도 중의학을 민족문화유산으로 빛내야 한다는 조항이 있고, 중의학 정책담당 차
관이 있고 중의과학원은 10개년 계획을 정부에서 수립하여 그에 맞는 원장을 공모하여 10년
간의 임기를 보장해주고 지금은 '중의학의 세계화' 란 기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다만 ‘동도서기(동양의 그릇에 서양의 기술을 담는다)’라는 목표하에 출발한 한의학의 연구가
서양의학에 동양의학을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오히려 순수한 중의학이 쇠퇴하는 수난을 맞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한의학을 나름 발전시켜 복부진단을 특징으로 하는 ‘황한의학’ 혹은
깜뽀메디슨(한방의학)을 특징으로 임상에 응용하고 있었지만 서양 문물을 대폭 개방하며 일으
킨 ‘메이지(명치)유신’ 이후 한방의학이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며 침구사제도를 남겨 놓고 나머
지는 없애 버렸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에 같은 방법으로 한의사제도를 없애려고 했다. 그
러나 일부 한의사 리더들이 일본 정부의 한국지배 본부인 척식회사 간부에게 로비를 하여 그
대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감뽀의학(한방의학)의 본산인 도야마라는 지역에서는
그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산업화하는데 성공하여 한의사제도도 없고 한의과 대
학도 없지만 한방산업시장을 우리보다 4배 큰 20%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한방에 관심이
있는 의사 약사 들 약 83%정도가 한약을 처방하여 써 본 경험이 있다고 하고 약 38%정도는
한방처방만 이용하여 진료하고 투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들은 한방을 깊이 교육받지 못
하였지만 객관적인 비교를 통하여 효과의 근거를 만들어 가고 있다.
대만은 중의학을 좀 더 서양의학과 밀착시켜 발전시켜보려고 의대와 한의대를 7+1제도 즉
7년짜리 대학에서 의학과 한의학을 공통으로 공부하여 의사나 한의사 자격을 따면 1년을 더
교차하여 인턴십을 마치게 하여 다른 자격을 부여하여 복수 면허자를 많이 배출시켰다. 하지
만 정부의 국립대만중의학연구소에 대한 지원은 신통치가 않았다.
한의생명면구소의 한의학 발전책 세미나에 참석한 대만 연구소장은 한국의 한의생명연구소
의 눈부신 발전을 부러워했다. 개인석상에서 생명에게 물었다. “한국 정부에서 이 연구소의
그런 지원을 많이 받게 된 비법이 무엇입니까?”, “아 그것은 제가 삭발하여 이 연구소가 만들
어 졌고 제가 정부에 많은 로비를 했기 때문 이지요”, “아 그럼 이 원장을 수입해가면 되겠군
요?”, “ 네, 맞습니다. 하! 하!”
4개국 전통의학연구소의 공통점은 일반 국민의 한방진료 이용율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어
떻게 국민 들에게 인정받는 새로운 연구를 할 것인가? 등 이었다. 결론은 획기적인 연구 성과
를 내야 하는 것이었다. 2008년 12월 중국은 중의학의 세계화의 일환으로 북경에서 세계전통
의학 대표단 약 600여명을 모아 포럼을 통해 ‘각국 정부는 전통의학을 1차 진료에 포함시켜
야 한다‘ 는 베이징 선언을 하였다.
생명은 이 대회에 참석하고 나서 중국의 중의학 실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한국 한의생명 연
구소의 파트너인 ’중의과학원‘은 직원이 약 5,000명에 이르며 본원을 비롯한 6개의 부속병원
이 있는데 모두 중국에서 암 중풍 등의 만성질환을 가장 잘 치료한다고 정평이 나 있는 유명
한 한방병원들이었고 여기에 종사하는 양의사들은 중의학을 연구하는 데 별다른 거부감이나
갈등이 없이 함께 협조하여 연구하고 공동의 연구실적을 쌓아 가고 있었다.
실험실은 그다지 최신 시설들은 아니었지만 간단한 쥐 실험만 하는 것이 아니고 돼지나 개
정도의 영장류 실험도 낙후한 시설들을 가지고 실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약 개발을 위한 여
러 가지 정보 시스템이나 약학자들과의 거리감 없는 협동연구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직업을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국가적인 원대한 사업을 위해 목표만 설정하면
무조건 참여한다는 것이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한방산업시장도 어마어마하여 쿤밍(곤명)을 방문하였을 때 그 곳의 한방제약 회사인
‘백약제약’은 그 회사 단독으로 매년 매출이 우리나라 돈으로 4조5천억 원 정도의 규모로 매
출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북경의 ‘동인당’약국 은 한 곳에서 외국인을 상대
로 연간 약 800-900억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내수가 크고 의료 시설이
낙후한 중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중국의 상품이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 비법이 무엇이냐 무엇을 연구해서 그렇게 산업화 하느냐 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국가기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연구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적인 과학 잡지에 구체적인 처방과 실험방법
을 공개해야 연구실적으로 인정하는데, 중국서는 돈이 될 만한 것은 국가 기밀이고 부작용은
무조건 없다고 일관한다. 중국은 그냥 경험에 의하면, 실험결과에 의하면 효과가 있다 고 보
고한다. 우리처럼 보이는 것, 실적을 중시하다 보면 많은 돈을 들여 연구한 논문들이 쉽게 공
표되어 다른 나라에서 먼저 상품화되어 돈은 다른 나라에서 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공개를 꺼리는 공산국가가 그래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비 인륜적인 생체실험도 무차별적으로 실행하기도 한다.
문제는 공산국가에서는 사실(fact)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성’ 즉 충성도이다. 당성이 좋으
면 모든 결과는 인정된다. A라는 의사가 암을 38%치료하는데, 당성이 높은 B라는 의사가 암을 90%치료한다고 하면 무조건 OK이다.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것이 가장 큰
취약점이다. 또한 공산국가의 문제점은 직역의 분화다. 한국에서는 한 교수가 할 일을 3사람
이 한다. 그러다 보니 일관성이 없다. 중국의 한의과 대학에 가보면 중의학에 대하여 교과서
를 쓰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 책을 갖고 강의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 논리와는 관계없이
진료하는 교수가 ᄄᆞ로 있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를 보면 논리 정연하고 간결해 보인다. 하지
만 그 내용대로 처방하여 환자를 치료해보면 별 효과가 없다. 실제로 북경의 ‘동인당’ 약국에
가서 진맥을 하고 약을 지어다 먹어보면 진찰은 잘 하는 것처럼 보이나 약효는 별로라고 흔히
말한다.
이렇게 복잡하고 난맥상을 이루는 연구현장은 실적급(인텐시브)이 없으니 열정이 없이 모두
형식적이다. 외국에 나가 잘 배워왔다고 하여도 중국의 현실은 충분한 실험환경이나 지원은
없고 연구실적만 내 놓으라고 하니 짜깁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가 벤치
마킹을 해야 할 나라는 독일이라고 본다. 미국 등의 다국적 제약회사 들이 화학물질에 기초한
화학물질의 신약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독일은 이미 생약에 기초한 치료제를 집중하여 개발하
고 거기서 다시 신약을 찾아내는 두 가지 과정을 병행하여 효율성을 높이었다. 실제로 신약이
라는 것도 알고 보면 약 65%가 생약에서 개발된 것이다.
생명은 이미 1997년부터 3차례나 독일을 다녀왔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성안 지하에 있는
‘의약사 박물관’에 가보면 오늘날 서양의학이 발전되기 전에 이미 그 옛날부터 수도원이나 수
녀원에서는 동양의 모든 약품이나 민간의약까지도 다 구해서 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
물성 한약재는 물론 동물성 한약재인 녹용, 사향, 뱀 껍질 등을 다 볼 수 있다. 심지어 한국산
적송도 이미 식물원에서 키우고 있으며, 생약에서 추출한 신약 예를 들면 한국산 은행잎에서
추출한 혈액순환 개선제 징코민, 겨우살이에서 추출한 면역 증진제인 ‘미즐토’ 등이 바로 그것
이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중국산 생약을 1년에 2천 톤 씩 수입 하여 쓰고 있다
또한 생명은 1997년 스위스 국경 근처 ‘쉴타흐’ 라는 조그만 도시의 ‘베가’ 라는 회사에 연
수를 가보니 그 회사는 이미 200여 년 전에 벌써 동서양의학을 마스터한 간단한 진단기 베가
‘DMF-2000진단기’ 등의 동종요법 진단기와 치료기를 상품으로 내 놓았는데 이를 독일 내에
서 임상에서 쓸 뿐만 아니라 외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환자들이 옷을 벗고
검사를 하는 기존의 검사법이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우니 간단한 신체 정보로 어느 부분이 제일
않 좋은지 먼저 테스트해보고 나서 집중적으로 안 좋은 쪽을 자세히 검사하는 방법을 쓰고 있
었다.
그 후 개발한 것이 ‘ETASCAN 파동진단기’ 등을 비롯한 진단기, 또 중의사 들과 공동 개발
한 ‘어혈치료기’, ‘골다공증치료기’ 등의 치료기 등은 전혀 신개념의 한방 의료기기들 이다. 어
혈치료기는 환자 자신의 혈액을 헌혈봉투에 빼서 혈액투석기 같은 기계에 돌리면 산소, 자외
선, 자장을 거쳐 혼탁한 혈액이 맑은 피로 걸러지는 기계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골다공증치
료기로 등록된 물리치료기는 침을 맞지 않아도 의자에 앉아만 있어도 경락을 풀어주어 통증이
개선되는 통증치료기이다. 이런 것들이 한의학의 기와 혈의 개념을 접목시킨 의료기기들이다.
지금 현재도 독일의 의료진은 75%가 대체의학을 이용하고 있고 통증 전문의 중에는 75%가
침 요법을 치료방법으로 제공하고 있고 약으로 간주되는 한약제가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
이 현실이다.
이제 우리의 나라 한방산업의 실태는 어떤가?
한방상품의 대표적인 생산품은 한방화장품이다. 연간 약 800-900억 정도의 한방화장품시장
이 가장 크고, 모발제품이 400-500억 정도 이고, 그리고 제약시장은 겨우 20-30억 정도의 한
방제제로 그 규모가 미미하다. 그러면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큰 한방 산업 시장을 키울 수 없
는 것인가?
우선은 가장 큰 문제점이 한국에서 양방 한방의 의료체계가 서로의 발전이나 국가적인 이익
보다는 서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익단체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로 헐뜯으면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구멍 가게적 마인드’의 소아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런 생각을 버리고 국가경영 그리고 수요자인 국민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국민에
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국민복지에 기여할 것인가 라는 입장에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나
아가 더 큰 세계시장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해야 서로 발전이 있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
하고 어떻게든 상대를 비하시키고 침몰시켜야 내가 돋보이고 내 주머니가 불러진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국민의 입장에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는 실용적인 컨셉으로 개인
서비스 차원이 아닌 산업으로도 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이것을 잘 극복하면 무궁무진한
건강산업 시장이 열려있다. 미국은 매년 건강보조식품시장이 22%씩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
5년 후에는 지금의 의약시장 만큼 커질 것이다. 지금 세계의 전통의학 시장은 미국이 35%,
유럽이 30%, 일본이 20%, 중국이 10%, 한국이 5%대이다. 이것을 15%만 올려도 순수익이
자동차산업이나 IT의 수익구조에 버금가는 신 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건복지부나 식약청에서도 연구비를 들여 새로운 한방산업을 통해 고용증
대와 수입의약품을 대치할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다국적 기업의 하수인으로 끌려
다닐 것인지? 어쩔 수 없이 많은 선진국과 FTA를 맺어야 한다면 가장 취약한 농산물과 의약
시장에 고도의 하이테크 인재와 연구비를 투입하여 극복해야 한다.
또 앞으로 ‘생명공학 시장은 2030년 정도만 돼도 의약품은 약 23%정도, 그리고 해양농축산
분야에 약28%정도, 기타’ 로 식량, 종자, 의약품원자재, 식물성 연료, 해양식물 등의 해양농축
산분야에 더 메리트가 있어 그 시장은 무궁무진하다고 본다. 앞으로의 정부는 이런 분야에 우
리나라 엘리트들을 집약시켜 연구해야 한다 고 생명은 신문 칼럼에서도 주장하였다. 고품질의
한약재 개발, 유기농 한약재 재배, 한약재내에서 추출한 것을 상품화 하는 것은 한의약연구에
빨리 착수해야 할 문제다.
지난 60-70년대 우리나라의 우수한 엘리트들이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화학공학과에 진학
하여 지금의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다면 앞으로 21세기에는 그 동안 엘리트 들이 의대, 한의
대, 약대에 몰렸으니 지금부터 그들이 이 나라의 간성이 되어 이끌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지
금 IT, 조선, 자동차산업들이 노동 집약 적인 사업이고 후발 주자들이 바짝 추격하여 머지않
아 수익구조에 빨간 불이 들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개발의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는
생명공학분야에 착수해야 한다. 이미 선진국 다른 나라에서도 화두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
핵심 내용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녹아져 있는 한방산업이 그 시발점일수 있다. 왜냐하면 한
국의 여러 과학 분야가 그간 서구의 연구를 추격하여 업그레이드 하는 것으로 먹고 살았다면
이미 한국은 여러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한국은 과학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그것은 전통과학을 개혁하여 새로운 컨셉으로 개발해 나가는 것이 가장 성공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다소 구태의연한 것으로 방치되었으나 첨단과학을 동원하여 조사해보
면 정말 훌륭한 컨텐츠가 숨어 있다. 이생명이 이미 대전 중앙과학관 전통과학지원 프로그램
에 심사의원으로 참여하며 깨달았다. 그 예로 경주의 에밀레종을 새로이 건물을 지어 옮기면
서 그 종이 18톤인데 그 무게를 지탱하는 쇠가 너무 낡아 새로이 가장 강한 쇠로 교체를 하
였는데 지탱을 못해서 다시 버린 녹슨 쇠를 찾아다 복원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쇠는 강판
을 돌돌 말아 만든 것 이었다. 돌돌 말아 강도를 높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또 우리가 흔히 먹는 간장은 3년이 지나야 골다공증에 좋은 효소와 유방암을 예방하는 효
소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2년까지는 그 물질이 안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묵은 된장
을 이용한 화장품이 나와 히트를 치고 있다고 한다. 묵은 된장에 노쇠한 조직을 복구하는 효
소가 있다고 한다. 그 예로 한 동안 암환자들이 묵은 된장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또한 최근
에는 미국서 관절염치료제로 닭발에서 추출한 콜라겐으로 만든 알약이 수입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닭발을 먹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경기도 어느 한의원에서는 관절염, 신경통 등
근 골격계 질환에 약을 한 보따리 지어 주고 반드시 닭발을 넣고 삶아 먹고 3일후에 다시 오
라고 하며 지어주는 처방이 있다. 이런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바로 한의학에 무궁무진하게 널
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