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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력과 사연을 알면 재미있는 그림 1
1. 미술사조(思潮)
2. 그림 속에 숨겨진 화가의 마음을 자
3. 중세기 종교화에서 사실적인 르네상스시대를 연 지오토 디 본도네
4.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3대 거장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5. 사실적인 시각 보다 사실적인 느낌의 바로크 미술
6. 프랑스 귀족의 화려한 삶을 그린 로코코 미술과 그 반대의 신고전주의
7. 평범한 사람 평범한 일상의 사실화, 구스타프 쿠르베
1. 미술 사조(思潮)
미술사조는 미술의 사상 형식면에서의 일반적 경향을 분류하는 것을 말한다.
원시미술
고대미술 - 이집트미술, 그리스미술, 로마미술, 메소포터미아미술
중세미술 - 비잔틴 미술, 로마네스크, 고딕미술, 카타콤미술
르네상스 - 매너리즘
17~18세기 - 바로크미술, 로코코미술
근대미술 -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 분리파
현대미술 - 야수파, 나비파, 독일표현주의, 입체파, 추상파, 미래파, 절대주의, 구성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다리파, 청사기파, 신조형주의, 바우하우스
2차 대전 이후 -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극사실주의, 옵아트, 키네틱아트, 미니멀아트, 파리파, 즉물주의, 플럭서스
2. 그림 속에 숨겨진 화가의 마음을 찾아라
“생긴 건 산적 두목인데 지내보니 진국이네”하는 사람은 겉보기엔 와일드 하지만 깊은 속심을 접해보니 전혀 다른 인간미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림도 금방 보기엔 잘 그렸다 싶은데 더 이상의 음미해볼만한 여흥이 없는 것과, 언뜻 보기엔 “이게 그림이냐, 도대체 뭘 그린거야” 했는데 속뜻을 알면서 깊은 생각에 잡히게도 한다.
작가가 그림을 구상하게 된 마음의 세계를 알고 이면에 숨은 화가의 마음을 만나면, 그가 부르짖는 간절한 소리, 영혼이 절망하며 고통 하는 아픔, 아니면 장님이 개안해서 대명천지의 사물을 보듯이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되는 기쁨이나, 아무리 보고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신비감에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없는(심지어 내가 받는 느낌을 말하면 그림을 잘못 알고 감상한다며 나의 무지함을 탓할 것 같지만 화가 자신도 “이 느낌을 느꼈을까?” 하는)묘하고 은밀한 즐거움도 음미하게 된다.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우선 화가의 삶과 화가가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상은 내 몫이다. 그 이상에 대해선 화가도 자기 그림이라 해서 자기가 원하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고 잘못 봤다 할 수 없다. 아니, 화가가 그림을 감상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보였다면, 그 그림은 이제 그에게 선물한 것으로 이제 그림을 가진 자(보는 자)가 어떤 느낌을 가져도 무방하고 틀렸다 할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내게 선물로 준 작품의 창작 의도와 배경을 알고 난 이후에 자기만의 감상을 하는 것은, 창작자에 대한 예우에서라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3. 지오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1267~1337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
종교가 강요한 중세기의 그림에서 벗어나 사실적인 그림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아이들이 시장에 가는 엄마를 그릴 때, 대부분의 엄마들이 대충 옷을 입고 나가지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빨간 입술에 잘 단장된 파마머리를 하고 있다.
바지만 입고 시장을 가는데도 멋진 치마를 입고 즐겁게 집을 나선다. 그러나 실제는 즐겁게 시장가기 보다 그냥 장거리를 보러 가는 게 일반 가정주부다. 이처럼 그림에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그릴 수도 있고 자기 마음의 느낌인 ‘이상화’를 그릴 수도 있다
중세기는 대부분이 성경내용을 그리면서 그림 속에 감정의 표현이 거의 없었다. 풍경화든 인물화든 전쟁화든 모든 게 정물로 그리면서, 어떻게 하면 더 실감나게 그릴까하고 고민하지 않았다.
그 때 ‘조토 디 본도네’는 인물과 배경 모두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게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이나 그림처럼 사실에 가깝게 그린 ‘르네상스’ 곧 ‘그리스 로마시대 문화의 부활’이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B.C 450년 그리스의 미론은 원반 던지는 사람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동 조각상을 만들었다.(후에 로마시대에 이것을 본떠 만든 대리석 작품은 현재 남아있다.)
그리스의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 그림은 새가 포도를 쪼아 먹으려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시대엔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그리거나 조각하려 했는데, 세기이후 기독교 율법에 굳어진 종교 관념으로 모든 것에 경건함을 강요하여, 예술에도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최대한 경건하게 보이려한 시대적 소명으로 예술과 문화의 암흑기를 지내게 되었다. 그런 기간이 진행되던 중인 1300년경 ‘조토 디 본도네’가 당시의 시각으로는 충격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게 ‘사실화’다.
조토 디 본도네는 당시 교황이 그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견본이 되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자,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 보였는데, 교황은 아무 도구를 쓰지 않고 붓만 가지고 완벽한 원을 그렸다며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 하여, 후세에 ‘어떤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의미의 ‘조토의 원’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조토 이후 맞이한 르네상스 시대에 비로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그리고 먼 것은 작고 희미하게 그리는 ‘원근법’이 탄생하였고, 르네상스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늘 날 의사들도 놀랄 정도로 인체해부도를 세밀하게 그렸다.
이것을 보면 조토가 미술사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지를 잘 알 수가 있다.
천사에 둘러싸인 성모와 아기 예수 - 첸니 디 페포 치마부에. 1270년작
마리아와 아기예수가 천사에 둘러싸여 보좌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중세 화가들은 천상세계를 상징하기 위해 배경의 바탕을 황금색으로 칠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천사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부자연스럽고 딱딱하게 느껴진다.
애도 - 조토 디 본도네 1304~1306년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그림으로 당시에 이전의 화가들과 달리 사람들의 표정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게다가 금빛 바탕 대신 하늘색으로 배경을 칠해서 그림 속의 사람들이 현실의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렸다.
원반 던지는 사람 - 미론 B.C 450년 그리스
그리스의 미론이 만든 청동 조각을 로마시대 조각가가 본 떠 만든 대리석 복제품이다.
한 남자가 원반을 던지려는 순간을 표현한 조각상으로, 그리스시대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진짜’처럼 보이는 사실적인 작품을 만들면서도 진짜 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해 보이게 표현하려 했다. 따라서 이 조각상의 몸매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몸이라는 점에서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라 할 수 있겠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런 고대의 그리스 로마 예술이 부활했다.
모나리자 - 레오나르도 다빈치, 1503-1506년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서, 르네상스 화가들은 해부학에 많은 지식이 있었으므로 이전 시대 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인물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또한 얼굴의 굴곡진 곳이나 뒤로 들어간 부분은 희미하게 처리하고, 앞으로 드러난 부분은 선명하게 표현하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여인의 표정을 훨씬 자연스럽게 묘사했다.
황금방울새의 성모 - 라파엘로 산치오, 1505-1506년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세례 요한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라파엘로는 마리아의 얼굴을 세상 어느 누구보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상화시켰다.
전체적인 색도 편안하고 아름다워 보이며 부드럽고 고운 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당시에 많은 화가들이 라파엘로와 같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4.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3대 거장과 르네상스 시대의 ‘매너리즘’
미켈란젤로(1475~1564 이탈리아의 조각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이탈리아의 미술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
라파엘로(1483~1520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 다비드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501-1503년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비례를 계산하여 자연스러우면서도 이상적인 몸매를 과시하는 많은 조각품을 만들었는데,이 작품도 몸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크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3미터짜리(전체높이517cm)의 큰 조각품이 높은 받침대 위에 있어서 아래에서 조각품을 보는 사람들 눈에 머리가 작게 보일 것을 우려해서 의도적으로 제작했다.
* 라오콘 - 엘 그레코, 1610-1614년
트로이 목마의 전설에 나오는 라오콘을 그림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엘 그레코는 이전의 르네상스 화가들과는 달리 음침한 색을 사용했고 인체의 모습을 길쭉하게 늘어뜨렸다. 르네상스 시대의 눈으로 보면 형편없이 못 그린 그림이지만 지금의 시각에서는 음산한 분위기가 훨씬 더 잘 전해지는 작품이다.
* 비너스(Venus : 아프로디테)
팔 없는 ‘밀로의 비너스’는 그리스 시대에 제작되었으며 원래는 팔이 붙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며, 팔이 있었다면 동체나 근육의 모양으로 봐서 한손으로는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잡고, 또 다른 손은 파리스의 심판에 등장하는 금 사과를 쥐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는 상태다. 조각상 기단부에 아가산드로스 혹은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조각가의 이름인지 분명히 확인 할 수 없어며 1820년대 밀로스 섬의 땅속에 묻힌 것을 발굴함으로 인해 ‘밀로의 비너스’로 통칭한다.
비너스 ; 마릴린 몬로) : 키 200 : 164cm, 바스트 94 : 90cm, 웨스트 66 : 60cm, 히프 96 : 90cm
비너스는 원래 로마 여신의 이름이었으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와 풍요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면서 모성과 아름다운 여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베누스라고도 하며 로마신화에서는 채소밭의 여신이었으나, 그 특성이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와 비슷하여 동일시되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특정의 민족 신화의 틀을 벗어나, 여성미의 원형으로 서양 문학과 미술에서 폭넓게 다루어졌다.
호메로스에서는 아프로디테가 하늘의 주신(主神)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 디오네의 딸로 되어 있는데, 헤시오도스에서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아들 크로노스가 어머니 가이아의 음부 속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졌다. 그런데 우라노스의 잘려진 성기가 바다를 떠다니다 성기 주위에 하얀 거품(아프로스)이 모이고, 그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생겨났다.
알몸의 처녀는 서쪽 바람의 신 제피로스에게 떠밀려 키테라섬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키프로스섬 까지 흘러왔는데, 여기서 그녀를 발견한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 아름답게 꾸민 후 여러 신들의 자리로 안내하였다.
르네상스기의 화가 보디첼리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은 이 같은 탄생 과정을 그린 것이다.
아프로디테 탄생 이야기가 남성 성기에서 비롯되어 키프로스와 관련을 갖고, 사랑과 열락(悅樂)의 여신으로 코린트를 비롯한 각지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여신의 기원이 풍요와 재생이라는 원시신앙을 바탕으로 한 오리엔트의 대지모신(大地母神)임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들 가운데 대표적 여신인 이슈타르나, 페니키아의 여신 아스타르테는 모두가 농경, 재생산과 연관된 풍요와 다산의 신이면서 사랑과 열락, 음탕의 여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오리엔트 원시신앙을 이어받은 아프로디테를 그리스인의 상상력과 미적 감수성이 미와 사랑의 여신인 인격으로 만들었다.
비너스의 천상성과 지상성
아프로디테는 육체의 쾌락을 찬미하며 자신도 신과 인간의 사랑에 몸을 맡긴다. 같은 올림포스의 여신이라도 처녀 아르테미스(로마 이름으로 디아나)는 연정을 품는 것을 징계하는 데,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권장하고 안내까지 한다. 그러나 여신으로서의 높은 정신성도 갖추어서, 여신의 관능은 정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미(美)의 세계에 이른다. 플라톤은 저서 '향연(饗宴)'에서 이 여신이 지닌 두 가지의 특성을 말하는데, 하늘의 신 우라노스로부터 어머니 없이 태어난 우라니아(하늘의) 아프로디테 이면서, 다르게는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난 판데모스(지상의, 대중적인) 아프로디테이다.
앞의 것은 고매한 천상의 사랑을, 뒤의 것은 관능적인 지상의 사랑을 뜻한다.
유명한 부조(浮彫) '루도비시의 대좌'는 플라톤의 해석을 뒷받침 해 준다. 부조의 정면은 두 처녀가 손을 뻗치면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아프로디테(아프로디테 아나디오메네)를 묘사하고, 양쪽 측면의 한쪽은 베일을 몸에 두르고 향을 피우는 청초하고 정숙한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알몸으로 다리를 포개고 즐거운 듯 피리를 부는 열락(悅樂)의 모습이 새겨졌다.
로마시대 베누스 게네토리쿠스는 풍요와 생산의 비너스로서 만물의 생명의 근원으로 숭배되었다. 특히 카이사르(시저)는 B.C 46년 이 여신을 선조로 삼아, 여신들을 모시는 웅장한 신전을 지었다. 이 여신과 상반되는 두 가지 특성은 생산 종족보존이라는 사회적 필연성으로부터 사랑이라는 정신적 경지로 높여짐으로 영원한 아름다움에 이른다는 발전적인 방법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비너스의 사랑 편력
올림포스의 12신 중의 하나이며 미와 사랑과 생산의 수호신인 아프로디테는, 역시 12신 중의 하나로 절름발이에다 추한 용모를 지닌 근면한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로마 이름으로는 불카누스)와 결혼하였다.
제우스는 용모는 추하지만 그의 근면성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신과 인연을 맺게 하였으나, 여신은 얼마 안 가서 군신(軍神) 아레스(마르스)와 정을 통하여 둘 사이에 에로스(쿠피도 또는 아모르), 안테로스, 디모스, 포보스, 하르모니아가 태어났다. 한편 '오딧세이'에서는 아레스와의 통정을 알게 된 헤파이스토스가 침대에 투명한 그물을 쳐두었다가 둘의 통정 현장을 붙잡아 신들에게 그 추태를 보인 다음, 다시 그물을 풀어주자 여신은 키프로스 섬으로, 아레스는 트라키아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포보스는 이 도망의 의인화이다. 아프로디테의 사랑의 편력에 관해서는 그녀가 미와 사랑과 생산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헬레스폰트(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 근처에서 신앙으로 생산력을 상징하는 프리아포스(남근)는 앞서 나온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주신(酒神) 디오니소스(Bachos:바코스)와 님프의 아들이라고도 하며, 또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소년 아도니스와의 사랑은 그리스의 소년애에 그칠 뿐, 아도니스 신화의 어디에도 그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여신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흘린 눈물에서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또한 여신은 산중에서 가축을 몰던 안키세스가 마음에 들어 프리지아의 왕 오트레우스의 딸로 변신하여 그에게 접근하고 통정하여 아이네아스를 낳았다. 이 아이네아스가 바로 트로이의 영웅으로 훗날 로마 건국 시조가 되었다. 이 밖에 12신 중의 미남신 헤르메스와 통정하여 남녀 양성을 가진 헤르마프로디테를 낳았다는 전설은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합성어로서의 그 이름을 설명하기 위하여 억지로 만들어낸 이야기인 듯하다. 또한 주신 디오니소스와의 사이에서 결혼의 신 히멘이 태어났다는 전설도, 여신이 결혼과 사랑을 주재하는 신인 데서 생긴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미술사에서의 비너스
비너스상의 원형은 멀리 구석기시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최초의 조형(造形)으로서 유럽의 산악지방에서 많이 출토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나 '로셀의 비너스' 등 나체 여인상이 바로 그것인데, 흔히 ‘돌의 비너스’라고 한다. 이 여인상들은 모두가 국부를 극단적으로 과장 표현한 사실로 보아 생산과 풍요의 상징, 또는 주술적 욕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엔 메소포타미아의 니네베(니느웨)나 우르, 알 우바이드에서 출토된 토우(土偶:BC 3700년경), 키클라데스제도의 대리석 우상(BC 2000∼BC 1200) 등도 모두 나체로, 구석기시대 ‘돌의 비너스’ 만큼 국부를 과장하진 않았으나, 이것들도 모두 풍요와 다산의 신과 관계가 있다. 이 같은 여성상이 풍요 다산이라는 원시적·주술적 구속을 벗어나 미의 여신으로 미술의 역사 속에 크게 부각된 것은 그리스 이후부터다.
B.C 7~6세기 그리스 아르카이크기(期)의 여신은, 이오니아풍의 키톤을 걸치고, 한 손에는 비둘기나 사과를 든 정숙한 처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고전시대에는 여신이 고귀한 정신의 밑받침으로 정숙하게 표현되었으나, 후반에 들어서 여신의 모습은 플라톤의 설명처럼 정숙한 천상의 비너스에서 차차 지상의 비너스로 이행하였다.
B.C 4세기의 거장 프락시텔레스는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에서 여신을 관능적인 알몸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우아한 모습은 아름다운 여성상의 이상형이 되어 그 후 다양한 발전을 보인 나체 비너스의 원형이 되었다. 그 후 헬레니즘 시대에 여신은 한층 지상적·현실적으로 되어, 도이달사스의 '웅크린 비너스'나, 우물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아름다운 엉덩이의 비너스' 등, 관능의 기쁨에 취하는 자유분방한 모습이 되고, 마침내는 남녀 양성을 갖춘 헤르마프로디테상이 나타난다. 또는 '밀로의 비너스'나 '메디치의 비너스' 등 고전 양식에 따른 걸작품도 만들어져 다양한 발전을 보였다.
여신을 알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내는 형식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점차 일반화하여 로마시대에는 물론 나체를 죄악시하던 금욕적인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창세기'의 이브나 그 후 막달라 마리아 등의 상을 통하여 이어졌다. 그리고 고대 부흥으로 돌아선 14~15세기에서 여신은 일찍이 헬레니즘 시대의 조상(彫像)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답고 관능적 모습을 르네상스 회화 속에 다시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C. 조르조네는 그의 명작 '잠자는 비너스'에서 자연의 대기 속에 꽃과 같은 육체를 화면 가득히 드러누운 모습으로 묘사하였고, V.티치아노는 '우르비노의 비너스' '큐피드와 비너스', '성스러운 사랑와 속세의 사랑' 등을 그림으로써, 여신의 이름을 빌어 풍만한 여성의 육체를 찬미하였다. 이 같은 경향은 시대 흐름에 따라 더욱 현저해져, 근대 회화의 한쪽에는 이 여신을 중심으로 한 나체 여인상이 회화의 한 장르를 이루었다. 또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비너스가 손에 들고 있는 성스러운 것 가운데, 동물로는 비둘기, 백조, 제비, 참새이고, 식물로는 천인화, 장미, 모과, 사과로 되어 있다.
- 르네상스시대는 천재들의 무대였다.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를 비롯한 뛰어난 예술가들이 많은 작품을 쏟아내면서 이제 더 이상의 위대한 화가나 미술작품은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르네상스는 종교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진 시대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간 중심적인 문화’를 되살린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미술작품은 대부분 매우 사실적이다. 그러나 대상을 똑 같이 혹은 닮게 만들지 않고 요즘의 ‘포샵’처럼 대상을 실제보다 훨씬 아름답게 포장하는 ‘이상화’ 기법을 썼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면 3m 높이의 전신상 조각품이 높은 받침대 위에 있어서, 그 아래에서 조각품을 보는 사람들 눈에 머리가 작게 보일 것을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조각상 몸을 실물 비율대로 하지 않고 머리를 더 크게 조각하였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얼굴의 들어간 부분은 희미하게 처리하고 앞으로 드러난 부분은 선명하게 표현하는 ‘원근법’의 방식을 얼굴의 굴곡진 부분에 사용하여, 여인의 표정을 훨씬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황금방울새의 성모 역시 마찬가지다. 라파엘로는 전체적으로 편안한 색상에 부드럽고 고운 선으로 그림을 그려서 마리아의 얼굴을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평온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상화’ 시켰다.
5. 엘 그레코의 바로크 미술.
(1541~1614 그리스 태생,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궁중화가)
‘사실적인 시각’ 보다 ‘사실적인 느낌’을 그린다.
너무 아름답고 완벽한 것은 오히려 낯설거나 거리감이 느껴지며 싫증이 쉽게 난다.
이 때 엘 그레코(1541~1614)는 음침한 색상에다 인체의 모습을 길쭉하게 늘어뜨려 불안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나타낸 새로운 느낌의 ‘라오콘’을 선보였다.
이것은 ‘사실적인 시각’보다는 ‘사실적인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라우콘’은 트로이 성의 사람들에게 스파르타가 트로이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면 멸망할 거라는 경고를 한 라우콘과 그 아들들에게, 스파르타의 편이었던 아테나 여신이 큰 뱀을 보내어서 물어 죽이는 내용으로 트로이의 멸망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에 사실적인 화법이 꽃피우며 그런 화법이 오히려 틀이 되어버린 매너리즘에 빠졌는데, 그 때 엘그레코가 이런 화법을 깨트림으로 인해서 바로크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화에서 나타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양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모진 고난을 받고 돌아가셨는데도 최고의 모델로도 손색이 없는 멋진 몸매와 멋진 얼굴을 가진 몸 짱 형상으로 그려졌다.
마리아 역시 시골 목수의 아내로 고생한 아낙네가 아닌 왕비나 귀부인처럼 우윳빛 피부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양새로 그려졌다. 그러나 미켈란젤로 메리시바 카라바조(1571~1610)가 그린 그림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와 아줌마의 모습으로 예수님과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했는데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보기엔 성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불경스럽게 그려놓았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너무 위대한 인물을 너무 초라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화가들은 벽화를 그리며 생업을 하였는데 당연히 카라바조의 이런 그림은 어느 교회의 벽화에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주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명암법’에 있다. 그는 밝은 부분은 지나치게 밝게 그리고 어두운 부분은 실제보다 더 어둡게 그렸다. 이것은 마치 연극무대의 조명효과처럼 보인다. 즉, 자기가 나타내고자 한 대상의 느낌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의도를 더 뚜렷하게 한 새로운 표현기법이라 하겠다. 이런 바로크 미술의 그림은 그림속의 사람이 금방이라도 다음 동작으로 이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페테르 파울 르벤스 (1577~1640)는 카라바조처럼 명암에 대비를 크게 하진 않았지만 생기가 넘치게 하기 위해 구불거리는 선을 활용하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두고 ‘불규칙한 진주’라는 뜻의 바로크 라고 조롱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아 멋져, 어쩜 저렇게 아름다워”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바로크 시대의 그림 앞에서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그림 속 저 사람의 고통과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아” 라는 감상을 갖게 했다.
TV앞에서 미인선발대회를 볼 때는 “예쁘네”라고 한 마디 하던 엄마가 드라마 속의 못된 시어머니 역의 탤런트에게는 다듬고 있던 콩나물을 던져버릴 기세로 “아이고 저런 못된 년, 지독한 년이네” 하는 것 같이, 바로크시대의 그림이 그런 실제적인 느낌을 받게 하려 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2년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으로 구불구불한 선을 많이 사용하여 그림 속 사람들의
몸 동작이 고스란히 느껴지도록 했다. 이전의 르네상스 그림은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우아했지만 루벤스나 카리바조 같은 바로크 시대의 그림은 금방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엠마오에서의 저녁 식사 -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1601-1602년
성경 속 내용을 바탕으로 그렸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또한 빛을 받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의 차이를 크게 하여 그림 속 사람 들이 마치 연극 무대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6. 프랑스 귀족들의 화려한 삶을 그린 ‘로코코 미술’과 로코코의 방탕함을
꾸짖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웅화와 교훈적이거나 정치적 의도의 그림
프랑스의 ‘태양왕’ 이라 불리는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 베르사유에 궁전을 건설하여 수도를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옮겼다. 당연히 귀족들은 아무 불평을 못하고 왕을 따라 거처를 옮겨 갔다. 그리고 매일같이 열리는 파티에 지겹도록 참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넓은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딱 하나로 루이 14세의 전용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그 파티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파티인 것을 알 수 있다. 용변이 급한 귀족과 시종들은 궁의 잔디나 숲에 실례를 했고, 그 천연비료 덕분에 식물이 잘 자랐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 때 어디서 밟을지 모르는 실례 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멋쟁이 여자들이 신는 굽 높은 하이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왕은 자기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종교화를 많이 주문하였다.
루이 14세의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수도를 다시 파리로 옮겼다. 귀족들 역시 자신과 조상들이 살던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시기에 중요한 미술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때 파리로 돌아온 귀족들은 왕처럼 화려한 장식품들로 집안을 꾸미면서 주로 파티를 하고 있는 혹은 사랑에 빠진 귀족들의 달콤한 날들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 그림들은 예전과 달리 밝고 낙천적이었는데, 이 시대의 미술 사조를 ‘로코코 시대’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이렇게 흥청망청 살아도 되는 거야?’ 라는 생각과 “감정에만 치우쳐서 세상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반발하며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이 나오면서, 다시 화가들은 영웅들을 그림 속에 부활시키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자는 것이다. 또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를 통해 “이들을 본받아라.”라는 훈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림 속 세상은 잘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고, 모두들 영웅 혹은 신만을 외쳐댔다.
이제 너무 아름답고 우아하며 교훈적으로 포장되어 고단하고 힘겨운 평범한 사람에겐 아무 상관없는 것이 그림이었다.
* 카테라 섬으로의 여행 - 장
앙투안 와토 1717년
와토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티테(비너스)를 모신 키테라 성에 놀러 온 남녀들의 모습을 밝고 환한 색채로 묘사했다. 사치를 일삼던 프랑스의 귀족들은
자신의 집안을 이처럼 밝고 화사하며 즐거운 내용의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꾸몄다.
* 나폴레옹의 대관사 - 자크 루이 다비드 1806-1807년
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폴레옹황제의 대관식 장면으로 그림 속 나폴레옹은 이미 황제의 관을 쓴 채 아내인 조세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고 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로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그림으로 남기는 한편 프랑스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그림을 그렸다.
7. 구스타프 쿠르베(1819~1877 프랑스 화가)의 사실화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 오르낭의 장례식 - 귀스타브 쿠르베 1849-1850년
6미터가 넘는 대형 캔버스의 평범한 시골 사람의 일상을 역사화 형식으로 그렸다.
화가는 누구나 무엇을 그릴까? 누구를 그릴까? 하는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중세의 그림은 기독교의 종교화가 대부분으로 예수님, 마리아, 베드로, 요한 등 성경 속의 인물들을 주로 그렸다. ‘르네상스’나 ‘바로크’시대에는 종교적인 것을 어느 정도 떠나긴 했지만, 역시 신화나 역사 속의 영웅 또는 성경속의 인물에 초점을 맞춘 멋있는 풍경화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바로크시대는 절대왕권 시대에 맞게 왕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4세 때엔 화려한 ‘로코코’ 그림을 그렸고, 거기에 반발해 다시 영웅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때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쿠스타파 쿠르베가 등장하였다.
‘퀴스타브 쿠르베(1819~1877)’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며 주변에서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쿠르베는 오르낭이라는 시골의 한 농부의 죽음을 엄청나게 큰 화면 속에 그려 넣었다.
사실 그 정도 크기의 캔버스에 왕이나 왕비가 아닌, 가난한 농부의 죽음을 그렸다는 것은 당시엔 파격적인 일이었다. 지식인들은 그런 그의 그림을 보고 “고작 시골농부의 죽음을 저렇게 큰 그림으로 그리다니 물감이 아깝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몇몇 영웅들만이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삶에 충실한 보통사람들의 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쳐다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때로는 손해를 보고, 강한 자들에게 힘없이 당하며 사는 사람들, 그들을 그림 속 주인공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쿠르베였다.
쿠르베는 거만하고 화려한 큰 힘 보다, 내 주변의 사사롭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 실제의 내 삶을 찾으려 했다.
이런 구스타프 쿠르베는 최초의 모더니즘인 리얼리즘을 창시한 모던 아트(modern art)였다.
* 구스타브 쿠르베 작 - 만남, 안녕하세요 크르베씨
쿠르베는 사실주의 화가로서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사를 본 적이 없으므로"라고 했다.
그는 당시 어느 화가도 그림의 주제로 삼지 않았던 시골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림 속에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