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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현대시인 - 김관식, 김광규, 김광균, 김광림
김관식
거산호(居山好) Ⅱ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 데다가
보옥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같은 산정기를 그리며 산다.
거산호 Ⅰ - 김관식 -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석상(石像)의 노래 - 김관식 -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먼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 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김광규
나뭇잎 하나 - 김광규 -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면서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대추나무 - 김광규 -
바위가 그럴 수 있을까.
쇠나 플라스틱이 그럴 수 있을까.
수많은 손과 수많은 팔
모두 높다랗게 치켜든 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 마음 벌거벗은 몸으로
겨우내 하늘을 향하여
꼼짝 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겨울이 지쳐서 피해간 뒤
온 세상 새싹과 꽃망울들
다투어 울긋불긋 돋아날 때도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다가
초여름 되어서야 갑자기 생각난 듯
윤나는 연록색 이파리들 돋아내고
벌보다 작은 꽃들 무수히 피워내고
앙징스런 열매들 가을내 빨갛게 익혀서
돌아가신 조상들 제사상에 올리고
늙어 병든 몸 낫게 할 수 있을까.
대추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상행(上行) - 김광규 -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으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저녁 길 - 김광규 -
날을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요즘은 달리려 하지도 않는다.
걷기조차 싫어 타려고 한다.
(우리는 주로 버스나 전철에 실려 다니는데)
타면 모두들 앉으려 한다.
앉아서 졸며 기대려 한다.
피곤해서가 아니다.
돈벌이가 끝날 때마다
머리는 퇴화하고
온 몸엔 비늘이 돋고
피는 식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익숙한 발걸음은 집으로 간다.
우리는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간다.
파충류처럼 늪으로 돌아간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균
데생 - 김광균 -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설야(雪夜) - 김광균 -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성호부근(星湖附近) - 김광균 -
Ⅰ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Ⅱ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 머얼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다.
Ⅲ
앙상한 잡목림(雜木林) 사이로
한낮이 겨운 하늘이 투명한 기폭(旗幅)을 떨어뜨리고
푸른 옷을 입은 송아지가 한 마리
조그만 그림자를 바람에 나부끼며
서글픈 얼굴을 하고 논둑 위에 서 있다.
와사등 - 김광균 -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 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느린 그림자 이다지 어두어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외인촌 - 김광균 -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뭍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은수저 - 김광균 -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추일서정 - 김광균 -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림
산 - 김광림 -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海印寺)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쥐 - 김광림 -
하나님
어쩌자고 이런 것도
만드셨지요.
야음을 타고
살살 파괴하고
잽싸게 약탈하고
병폐를 마구 살포하고 다니다가
이제는 기막힌 번식으로
백주에까지 설치고 다니는
웬 쥐가
이리 많습니까
사방에서
갉아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신 헐뜯고
야단치는 소란이 만발해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운 세상을
살고 싶도록 죽고 싶어
죽고 싶도록 살고 싶어
이러다간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교활한 이빨과
얄미운 눈깔을 한
쥐가 되어가겠지요.
하나님
정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