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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임은 여러분이 ’하는(do)' 것이 아닙니다
(How to Accept this Moment(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방법))
많은 영적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깨어남에 대한 가르침,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 지금 이 순간을 허용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더 깊이 머무는 것, 깨어남과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모든 가르침보다 앞선 어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스토리’보다 앞서서 진정한 당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초점을 돌려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서의 깊은 받아들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자기’가 어떤 일을 한 결과가 아닙니다. 실제로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본래 존재하는 받아들임입니다. 당신의 존재가 바로 받아들임입니다. 여러분의 본질이 바로 받아들임입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닙니다.
본질은 삶에 대한 스토리가 아니며, 과거나 미래에 대한 스토리도 아닙니다.성취, 달성, 미래에 대한 계획, 당신이 마주치게 되는 이런 모든 스토리가 여러분의 본질이 아닙니다. 또 스토리를 밀쳐 내거나 없애려는 것도 아닙니다. 없애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스토리 이전에 여러분의 본질을 발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본질이 바로 이 넓은, 열린 공간입니다. 넓은, 모든 것에 열려있는, 끝없는, 광대한 공간. 이것을 가리킬 수 있는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로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비슷하게 가리킬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의식, 자각, 현존, 존재, 영혼, 근원, 에너지 같은 말을 선호합니다. 어떤 이들은 공(nothing)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부르건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말도 결국에는, 그저 개념일 뿐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이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본질의 발견이 바로 이 넓은 열린 공간, 광대한 수용성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삶을 수용할 수 있는 광대한 그릇입니다.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생각, 감각, 감정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것들이 당신의 본질 안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무엇이 나타나건 사라지건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바다 위의 파도가 있습니다. 파도와 바다가 왔다갔다 하듯이, 생각, 감각, 감정, 소리, 고통, 두려움도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바다는 항상 완전한 전체로서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파도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파도가 너무 강하고 거칠지라도, 바다 그 자체는 언제나 전체로, 완전하게 평화롭습니다. 어떤 파도도 바다에게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파도가 바로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곧 파도입니다. 바다와 파도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바다’, ‘파도’를 분리해서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만, 적절한 비유입니다. 파도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상관없이 본질은 모든 파도를 담고 있습니다.
생각, 감각,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본질은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본질은 나타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생각, 모든 감각, 모든 감정. 그런 것들이 지금 나타나 있다면, 이미 바다가, 본질이 그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 나타나 있다면, 여러분의 본질이 이미 ‘YES'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본질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게 이미 YES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감각, 감정들에게 이미 YES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본질이 이 순간 그것들이 존재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입니다. 삶의 가장 깊은 받아들임이며, "내가 받아들인다“와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를 넘어섭니다.
받아들임은 여러분이 ’하는(do)'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이미 허용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본질은 모든 것을 허용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고통스럽거나, 두렵거나, 슬프거나, 절망스럽거나, 불편하거나, 어떤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허용된 것입니다. 본질은 이미 그것을 허용했습니다. 모든 것을 허용합니다. 그것은 조건없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자라면서 우리는 수많은 개념, 생각, 이론, 신념들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부모, 선생님, 심지어 영적 스승으로부터 얻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개념들을 가지게 됩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선과 악, 건강함과 쇠약함, 긍정과 부정. 요즘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부정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부정적이고, 슬픔도 부정적이라고 배웁니다. 이런 부정적인 ‘파도’가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나면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부정적’이라고 정했기 때문에, 항상 그것들을 피하기 위해 애쓰고 우리가 그것의 반대라고 배워온 ‘긍정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하려 애씁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난 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좋아하지 않는 ‘부정적’이라고 부르는 것들로부터 말이죠.
언제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씁니다. 우리가 깊은 수준에서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난 것들이 이미 허용되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가 더 깊은 받아들임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갈구하는 자가 되고, 벗어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받아들임에도 도달하려 애씁니다. 지금 이 순간에 바다의 깊은 평화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갈구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래에서 그것을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찾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려, 평화에 도달하려, 받아들임에 닿으려 애씁니다. 그것은 갈구하는 게임입니다. 평화를 찾으려 하고, 받아들임을 찾으려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의 평화와 받아들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초대입니다.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모든 것이 깊은 받아들임을 발견하라는 초대입니다. 어떤 것이 지금 나타나 있다면, 여러분 안에서 이미 허용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본질이 이런 생각, 감각, 감정, 고통, 두려움들에게 이미 ‘YES"라고 말했습니다. 본질이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항상 지금 이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타난 것은, 허용된 것입니다. 이미 허용되었습니다. 이미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려는 받아들임입니다. 받아들임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깊은 받아들임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 순간에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생각, 감각, 감정도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생각이 안으로 들어와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려고 애씁니다.
종종 우리가 지금 이 순간(고통, 두려움 등)을 받아들이려는 이유는, 우리가 은밀하게 그것이 변화하거나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동기나 기대를 가지고 받아들임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변화하거나 사라질거야‘. 이것은 진짜 받아들임이 아닙니다. 동기를 가지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진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부가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깊은 받아들임으로 이끄는 더 큰 초대입니다. 깊은 평화는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무엇이 일어나든 이미 평화롭습니다. 본질은 무엇이 일어나든 간에 변화, 통제, 제거, 도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가 평화롭기 위해서 파도를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반대편이 없는 평화입니다. 종종 우리는 ’평화‘의 의미를 ’전쟁(내면의), 불안, 시끄러움의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요‘를 ’시끄러움의 반대‘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와 고요의 반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어떠한 반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고요의 다른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평화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통, 두려움, 슬픔, 무엇이든 처음에는 고요나 평화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그것들 역시 바다입니다. 모든 것이 이곳으로의 초대입니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는 초대입니다.
어제, 지난 주, 지난 해, 내일, 내년, 무엇이든 모두 잊으십시오. 여러분이 어제 진정한 본질을 발견했든지 말든지 잊어버리세요. 스스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서 많은 스토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나는 깨어났어요! 작년에 나는 깨어남의 체험을 했어요!“ 그것은 멋져요. 그러나 기억일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고통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려고 할 때 고통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서 도망치려, 저항하여, 밀쳐버리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안에 있는 깊은 받아들임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깊은 받아들임을 아는 것이 바로 고통의 끝입니다. 본질은 고통받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미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본질이 지금 이미 허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영적 스승들이 말합니다. ”선택은 없다“.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허용할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고통의 대부분이 통제하기를 원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문 앞에 서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겠죠. ”이 파도는 들어와도 좋아, 아니 그 파도는 들어오면 안 돼.“. ”행복, 넌 들어오고, 슬픔, 넌 들어오지 마.“. ”기쁨과 평화, 들어오고, 두려움, 고통, 슬픔, 불편함은 들어오지 마.“. 우리는 필사적으로 통제하려 하고, 파도 관리자가 되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 순간에 이미 생각, 감각, 감정들이 허용되었습니다. 삶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 두려움, 고통 무엇이든 그것들은 당신에게 허락을 묻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그리고 당신은 예 또는 아니요 하고 말합니다. ‘아니요’라는 대답, 그것은 마음이 원하는 것입니다. 갈구하는 자가 통제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는 자신이 신과 같은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앎으로부터 옵니다.
출처 : " YouTube", 제프 포스터(Jeff F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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