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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41호 1923년 11월 01일
이조李朝에 공헌貢獻만흔 청송靑松
일기자一記者
청송靑松은 고구려高句麗의 청기靑己, 신라新羅의 적선積善, 고려高麗의 부이鳧伊, 운봉雲鳳, 청부靑鳧 등의 현명縣名을 역전歷傳하야 오다가 이조李朝 태종太宗 초년初年에 일으러 진보眞寶와 합하야 청보현靑寶縣이 된 후 다시 세종조世宗朝에 일으러 진보眞寶와 분리하고 송생현松生縣을 병倂하야 비로소 청송군靑松郡이 된지 말기末幾에 부府로 승격되얏다. 그러나 태황太皇 당시에 도로 군郡으로 강격降格되얏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의 결과 맛츰내 진보군眞寶郡의 대부분을 겸유兼有하얏다. 지세地勢는 도처 산악山岳이 기복起伏한 중에 특히 동남방은 주왕산周王山의 대관령大關嶺과 보현산普賢山의 천험天險이 영덕盈德, 영일迎日 영천永川의 군계郡界가 되고 다시 보현산普賢山의 지맥인 삼자현三者峴의 장맥長脈은 동서로 중앙을 횡단하야 안동군경安東郡境의 연점산鉛店山을 연連하야 자연 남북의 지형을 양분兩分하얏고 하천은 읍전邑前을 우회하는 용전천龍纏川을 제하고는 별로이 기명記名할 것은 업서뵈인다. 그러나 대소大小의 세류細流가 모다 동남에서 발원되얏슴과 따라서 만절필서萬折必西의 유향流向을 보면 이 지방의 동남부가 얼마나 놉흔 줄을 이로써 짐작하겟다. 그리고 본래 이 지방은 이조李朝 세종대왕世宗大王 어혼御婚 당시 기담奇譚만턴 소헌왕후昭憲王后(심비沈妃)의 발상지로 찬경루讚慶樓의 성사盛事와 현비암賢妃岩의 유래를 지금까지 유전遺傳하고 또한 고려말高麗末의 창의사倡義士로 이태조李太祖의 보좌가 되야 창업의 원훈元勳이 된 청성백 심덕부靑城伯沈德符의 탄생지오. 일즉이 곽단우郭丹祐를 종從하야 임란壬亂을 평정하고 다시 갑자괄변甲子适變과 병자호란丙子胡亂에까지 유공有功한 조형도趙亨道의 형제도 모다 이 지방의 태생인물이다. 그러하야 이 지방은 무엇이라고 함보다도 차라리 이조李朝에 공헌만은 고군古郡이라고 할 만하다.
주왕산周王山의 기승奇勝과 부곡釜谷의 탄산수炭酸水
주왕산周王山은 천연미와 인공미를 구전俱全한 명구名區로 고래 청송팔경靑松八景의 존재와 일군一郡의 성가聲價가 여긔 잇다고 한다. 그러나 도세일반道勢一班에 누기漏記되얏슴은 저윽이 섭섭하다. 이 산은 청송靑松 읍내에서 상거相距 삼리여三里餘되는 청송천靑松川의 상류 유역인 부동면府東面 상의동上宜洞에 잇다. 그리고 이 산의 일홈이 훤전喧傳되기는 왕석往昔 신라新羅 당시 중국中國 반장叛將 주도周鍍의 전망지戰亡地임으로써이다.
산하山下 동구洞口의 대전사大典寺는 주도 망후周鍍亡後 기자其子 대전도군大典道君이 즉시 사문沙門오로 거름을 옴기여 건축한 고찰이요. 백련암전白蓮菴前에 용기聳起한 이대二大 입암立岩은 모다 신라장新羅將의 전첩기념물戰捷記念物이 되얏스며 이 산내山內의 관문인 자하성紫霞城은 주도周鍍의 옹성籠城하얏던 연무延袤 30里에 선亙한 당년當年의 대공사로 아즉도 1,450척尺의 잔첩殘堞이 구태舊態를 보존하얏고 성우城右에 운림雲林이 울밀鬱密한 궁곡窮谷, 석병石屛이 필위匹圍한 녹애만장하綠崖萬丈下에 동문洞門을 열어노코 중앙에 웃둑 소슨 주왕암周王菴도 주대전周大典이 부왕父王 거후去後 진세塵世를 피하야 명복을 기원하던 곳으로서 전면은 주왕周王의 사적과 산수山水의 절경을 풍자한 시부詩賦로써 수식한 가학루駕鶴樓가 잇고 우견右肩에는 나한羅漢의 안치安置와 반괘화槃掛畵의 고색古色이 심후한 나한전羅漢殿이 잇다.
기암奇岩을 포옹한 관목灌木, 괴석怪石을 점철點綴한 청태靑苔의 영경靈境을 헷치고 죽순가티 장단삭출長短削出한 옥순玉筍, 연화蓮花, 칠성七星, 관음觀音의 제봉諸峯과 육박골립肉縛骨立, 쟁영최외崢嶸崔嵬한 운외천인雲外千仞에 고비高飛하는 나한羅漢, 비로毗盧, 지장地藏, 미륵彌勒의 제봉諸峯은 일견에 흡연恰然이 우화승선羽化昇仙의 감이 잇고 주왕굴周王窟은 암후菴後 폭포동瀑布洞애 잇는 장여丈餘의 심굴深窟이다. 양도糧道와 수도水道가 구절俱絶된 주왕周王의 피난처로 소빙배수消氷排水, 절치역작切齒力作한 대전大典의 최후最後 거역巨役이라 한다. 지금까지 절벽絶壁의 단면을 세하洗下하는 폭류瀑流의 비말飛沫은 굴문屈門을 심쇄深鎖하야 어렴풋시 영웅의 유령이 배회하는 듯 하다. 더구나 미륵봉彌勒峯 배후에 평토화平土化한 궁지宮址 초아조樵兒曹의 완구玩具가 된 고적품古蹟品은 회고懷古거리가 넉넉하다.
다시 좌곡左谷의 금용봉金容峯(증암甑岩)의 기험奇險과 학소대鶴巢臺, 청학동靑鶴洞, 취수암醉水岩, 급수대汲水岩, 향로봉香爐峯은 모다 위관偉觀을 정呈치 안은 것이 업다. 개중 학소대鶴巢臺의 전면은 백척도립百尺倒立한 위암危岩 하下에 대전大典의 수도장修道場의 가기家基가 완연하고 대상臺上에는 일쌍선학一雙仙鶴의 서식처로『청송백학수무분벽수단산진유록靑松白鶴雖無分碧水丹山儘有綠』의 가구佳句를 구전口傳하야 온다. 일보一步 일천一喘의 복력腹力으로 추진推進하야 내원동內浣洞으로 들어가는 연로沿路의 외용추外龍湫와 천외절도天外絶道로부터 경공비하擊空飛下하야 영원永遠이 도군道君의 원한寃恨을 읍소泣訴하는 내용추內龍湫의 명탄鳴灘 기타其他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기승奇勝은 실로 필설筆舌이 구절俱絶이다. 더구나 춘春의 *, 추秋의 홍엽紅葉의 탐승探勝에 이랴. 이제 가루판상駕樓板上 시詩의 수절數絶을 일독一讀하면 누구라도 경이驚異치 아니치 못하리라.
漠漠漠山高水又淸 周王去後百年情 道君忠孝龍三泣 壯士英名馬四聲. 典寺四風黃葉下 霞城斜日白雲平 諾皐記憶貿人過 精采如今曠感生. 矗々尖々看看奇 仙岩物色摠難知. 先賢遺墨無餘景 自此以來不敢詩.
이러케 경승景勝과 고적古蹟이 전비全備한 주왕산周王山이야말로 이제야 세계적 개방의 신기운新機運을 당함인가? 듯건댄 당지當地 관민유지官民有志는 주왕산고적보존회周王山古蹟保存會를 조직하고 다년多年의 현안懸案에 손을 대이기 시작하얏다 한다. 이러케만 되고 보면 이로부터 청송군靑松郡일대는 불원不遠한 장래를 두고 현상이상의 번영이 천하에 소개될 것을 기필期必하노라.
탄산수炭酸水는 읍내邑內 동방東方 20리里되는 부곡동釜谷洞 월외천변月外川邊 수개소數箇所에서 용출湧出한다. 이 용천涌泉은 고래古來로 백병통치百病通治의 약수라 하야 춘하절春夏節이 되면 사방으로부터 운집하야 음용飮用하는 남녀가 일일 평균 수백百餘에 달한다고 한다.
이제 본수本水의 시험분석 성적을 보면 무색징명無色澄明하고도 취기臭氣업는 청량성淸凉性의 감산미甘酸味가 잇고 반응은 약산성弱酸性을 정呈하고 섭씨 15도度에 대한 비중은 1,002를 산算하고 고물체古物軆의 총중總重은 일립돌중一立突中 1,840와瓦를 유有하얏다 한다. 이로써 보면 본수本水는 다중의 탄산와사답炭酸瓦斯答을 유有하고 또 유해성有害性물질을 유有치 아니하야 가장 음용에 적절하다고 한다. 그리하야 이것의 이점利點을 발견하고 이기의 야욕이 발발勃勃한 도인島人들은 수만원數萬圓을 인석吝惜치 안코 염치廉恥업시 들어 덤비다가 도리여 지방발전의 안목이 다른 군당국郡當局의 눈총을 마자 마츰내 몰락을 당하고 말엇다 한다.
주왕산周王山 전기傳記(원한문原漢文)
주왕산周王山은 본명 석병산石屛山 일명 주방산周房山 우又 일명 대둔산大遯山이다. 당唐 덕종식德宗時에 주도周鍍라 하는 자가 있섯다.
이 자는 동진東晉의 세신주의世臣周顗의 8세손世孫으로 기부其父의 명名은 동衕이오 기모其母는 위씨魏氏인데 년만年滿 42에 무자無子함을 근심하야 옥정산玉井山에 기복祈福한 결과 기모其母는 맛츰내 당대종제唐代宗帝 영태永泰 11년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씨황氏皇이 떠러저 회중懷中으로 비입飛入함을 몽견夢見하고 유신有娠한 지 13개월箇月만에 주도周鍍를 생生하얏다. 골격이 초범超凡하고 치아가 생거엇스며 출생 당시 백액白額의 호虎가 옥정산玉井山으로부터 출현하야 일두一頭의 저猪를 획거擭去함을 보앗다 하고 또 출생한 지 겨우 12개월箇月에 언어를 능해能解하야 일일은 기부其父 여남공汝南公에게 『천天은 엇지하야 존尊하며 지地는 엇지하야 비卑함니까』 물어보앗다. 이 질문을 밧은 부父는 맛츰내 해답하야주지 못하고 다만 기기우其氣宇의 이당異當함을 경탄하얏슬 뿐이다.
5세歲에 시서백가어詩書百家語를 일람이해一覽理解하고 11세歲에 천문지리와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장상掌上에 옴기고 협산초해挾山超海의 장울壯鬱한 기氣는 감히 억제키 어럽엇다. 항시 장언壯言하기를 『황하黃河는 가표可杓요 태산은 가려可礪』라 하얏다.
일일은 신정新亭(중국中國지명)을 지나다가 주의周顗의 고사를 추억追憶하고 『하용선조읍산하자무이何用先祖泣山河自無異』라 일수의 시를 제題하얏다. 이것은 석昔 진대晉代예 기인재其人才가 핍乏하얏슴을 개탄하야 다시 국조國祚를 광복하랴함 이얏다.
미기未幾에 장사壯士 백여인百餘人으로 더부러 웅이산熊耳山(중국中國 지명)에 들어가 도중 만여명萬餘名을 두취紏聚하야 스사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장차 장안長安을 도屠코저 하다가 (당정원唐貞元 15년年, 신라新羅 소성왕원년昭聖王元年) 맛츰내 당장唐將 곽자의郭子儀에게 패하야 요동遼東으로 둔찬遁竄하얏다.
당제唐帝 다시 신라왕新羅王에 조회照會하야 토벌케 함으로 나왕羅王은 이에 평장사平章事(관명官名) 마일성馬一聲을 상장上將을 삼아 요격邀擊하얏다.
주왕周王은 군세軍勢가 퇴축退縮되야 부득이不得己 종자 천여千餘를 더불고 관동關東방면으로 망명하다가 다시 원성주原城主(관명官名) 천해제天海齊에게 견패見敗하야 도로 퇴병하야 평주平州로부터 진성眞城(금진보今眞寶)에 일으러 비로소 석병산石屛山의 심험深險함을 탐지하고 입거入據한지 수년만에 평소 마일성馬一聲을 증오하든 염세청廉世淸이란 자가 당정唐廷에 상소하기를『나왕羅王과 마일성馬一聲이 반역 주도周鍍로 더부러 모반謀叛하야 불구不久에 황성皇城을 범한다』하야 당제唐帝의 노怒를 격동激動식히얏다.
이 찬소讚䟽에 끽경喫驚한 당제唐帝는 다시 곽자의郭子儀에게 주도周鍍를 격파하고 나왕羅王을 금상擒上하기를 엄명하얏다. 그러나 곽분양郭汾陽은『신라왕新羅王은 동국東隔에 벽재僻在하야 백년의 광비筐篚가 극히 기성其誠을 진盡하고 또한 신례臣禮가 지극함을 불구하고 이제 소적小賊의 고故로써 보사報私의 언言을 신청信聽하고 만리萬里의 왕사王師를 동動함은 기책其責이 불감不堪할 뿐 아니라 더구나 적신賊臣 주도周鍍는 본本 대국大國의 생生으로 일시 소국小國에 도타逃躱한 자이라. 이것은 원恐컨대 소국민小國民으로 하야금 도리여 대국大國에 인물이 업슴을 조소게 할 뿐이라』하야 동병動兵의 중지를 걸乞하얏다.
그리하야 황제는 다시 사使를 유遺하야 나왕羅王을 위문慰問하고 속히 주도周鍍의 두頭를 상上하기를 종용慫慂한 결과 나왕羅王은 다시 마일성馬一聲을 상장上將으로 기제其弟 이성二聲은 선봉으로 우又 기차제其次弟 삼성三聲 사성四聲 오성五聲은 각각 후봉後鋒을 배拜하야 철기鐵騎 백여百餘를 솔率하고 갑오甲午10월회月晦에 진성계眞城界에 지到하야 장여丈餘의 대설大雪를 모冒하고 유진留陣하얏섯다.
시是에 선先하야 서자庶子의 희曦(대전도군大典道君)가 생生하얏다. 4세에 서書를 기모其母 기씨奇氏에게 수학受學할재 일즉이 기모其母에게『무엇을 충이라 하며 무엇을 효라 함니가』 물엇다. 모母는『군君을 사事함에 기신其身을 치致함을 충이라 하고 친親을 사事함에 역力을 갈竭함을 효라』고 대답하얏다.
이 말을 들은 희曦은 즉시 권卷을 권捲하고 궤跪하야『그러면 충효의 행은 다시 어느 선書에서 구하리까』 모母 『일日을 가暇하야 성경현전聖經賢傳을 섭렵涉獵하야 보라』 하얏다.
이로부터 8,9세歲에 천지역수天地曆數를 일통一通치 못한 것이 업는 신동이라는 일홈을 들엇다. 그리고 부도父鍍가 취중聚衆하는 일을 당하야 그 천의天意가 안임을 역간力諫하되 가납嘉納치 안음으로 다시 『부주父主도 유시에 천존지비天尊地卑의 의의를 물어보신 바와 가티 이것은 군신의 명분을 범犯키 불가不可하온지라 진조晉祚의 망亡이 임의 백년을 지나엿고 또한 순순洵洵하신 천명을 성현聖賢도 여하如何키 불능하온데 하물며 인신人臣이 된지 백유여년百有餘年에 은恩을 배背함은 패천悖天이라 도리여 화禍를 밧음이 필연必然하다』고 만단萬端으로 회回를 여복걸慮伏乞하얏스나 의意를 일결一決한 부父의 태도는 더욱 강경함으로 『부자간 골육의 은恩은 저버리는 수 업다』하고 통곡종군痛哭從軍하얏다.
시년時年는 정正히 19세歲라 막중제료幕中諸僚는 희曦의 홍대弘大한 기국器局과 지효至孝의 성행性行을 보아 대전大典이라 하고 다시 만사에 달리達理함을 경모敬慕하야 도군道君이라 존칭하얏다.
기후其後 석병산石屛山에 들어간 일로부터 풍야風夜 3년年을 기암奇岩 상上에 단좌端坐하야 부군을 위하아 수袖로써 저성氐星의 문文을 가리우고 천天을 호呼하는 성聲이 끈지 안어섯다. 11월月 갑인甲寅에 나장羅將 마이성馬二聲이 진군도전進軍挑戰함에 당하야 주장周將 단수필段秀弼이 마평馬坪에서 응전하다가 생금生擒되얏다. (마평馬坪은 현금 부동면府東面 상평동上坪洞이라. 당시 마이성馬二聲의 초전처初戰處로 인칭因稱된 곳이다) 이성二聲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야 산문외山門外에 지至함에 도군道君이 앙천사배仰天四拜하고 연화전蓮花箭으로써 이성二聲을 사격射擊하자 이성二聲은 백근百斤 철추鐵椎로써 방어하얏다. 그려나 강대한 비전飛箭은 맛츰내 철추鐵椎를 횡관橫貫하야 적중한 갑위甲胃를 삼십리외三十里外 전토중田土中에 비락飛落케 하얏슴으로 기전其田을 갑위전甲胃田이라 인칭因稱하얏다. (현금 영일군迎日郡 천북면川北面 옥계동구내玉溪洞區內이다)
도군道君이 계속하야 우중철右重鐵을 명하야 출영충돌出迎衝突하고 패失敗한 이수二數은 격분激憤되야 더욱 명고진격鳴鼓進擊하야 이러케 이성二聲은 삼전삼위三戰三危의 곤박困迫을 밧은 곳임으로 이곳은 삼위동三危洞이라 명칭名傳한다. (금삼의동今三宜洞) 이로부터 이성二聲은 그 불리함을 촌도忖度하고 삼위동三危洞에서 견벽불출 堅壁不出하고 삼성三聲은 60리외里外 고라동古羅洞(금라동今羅洞)에 퇴군하얏다가 다시 삼일만에 자지현紫芝峴에 퇴둔退屯하고 사성오성四聲五聲은 팔각산八角山(금옥계동今玉溪洞 후산後山)에 복병伏兵하얏다가 을미乙未 삼월三月 갑자야甲子夜에 관암봉冠岩峯을 넘어 병산상屛山上에 지至하야 망기望氣하고 둔진屯陳하얏섯다.
시야是夜 삼경三更에 도군道君이 담룡潭龍의 삼도비명三度悲鳴함을 듯고 대경大驚하야 씨성氏星의 기을 앙견仰見함에 성광星光은 발서 괴무怪霧에 싸이여 명기明氣을 실失하얏다. 즉시 옥폭동玉瀑洞 심곡深谷에 석굴石窟(금今 주왕굴周王窟)를 착鑿하고 부왕父王을 닉찬匿竄케 하얏다. 미기未幾에 사성四聲의 형제는 암정岩頂에 박迫하얏스나 주왕周王의 거취去就가 아조 불명不明한으로 오성五聲은『금일은 갑자일甲子日이라 명일에 금포擒捕하야도 아즉 더듸지 안타』 하얏다. 기예氣銳한 사성四聲은 청종聽從치 안코 더욱 분진奮振하야 제봉諸峯을 일주一周한 후 맛츰내 은복처隱伏處를 발견하고 효천曉天을 긔다려 세면하랴고 굴문窟門으로 출입하는 기機를 규사窺伺하야 대철균大鐵鈞로써 주왕周王의 군신君臣을 순차로 조상釣上하야 천궐하天闕下에 봉헌奉獻하자 즉시 수급首級을 취敢하야 당경唐京으로 향하는 중도 요하遼河에서 돌연이 복선覆船되야 그 수급首級을 백실白失하얏다. 주왕周王의 피금시被擒時 대전大典은 신身을 공중에 연挻하야 향남向南 탈주脫走하얏다가 나사羅使의 요동행遼東行의 일을 기대하야 호풍환우呼風喚雨, 양사주석揚沙走石의 마력魔力을 작作하야 망부亡父의 신수身首를 수습收拾하야 병산후려屛山後麗에 은폐隱弊하교 즉시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에 들어가 삭발피치削髮被緇하고 지눌대사知訥大師에게 도道를 학學하야 지금의 주왕암周王菴 대전사大典寺(금今 보광전普光殿) 백련암白蓮菴 등을 건축하기에 일으럿더라.
조선인朝鮮因의 상계商界는 전멸?
교통 불편의 산군山郡으로 유명한 이 지방은 영양英陽의 다음이라 한다. 순후질박淳厚質朴한 민풍民風은 상존尙存한 듯 하나 그러나 신문화 접촉의 기회가 적음으로 사회사정에 암묵暗黙함과 시대추이時代推移에 낙오자 됨을 불구하고 독서열讀書熱과 단결력團結力의 전핍全乏한 오만오천五萬五千의 주민의 운명은 다만 소수 강자의 도량蹈梁과 관권만능官權萬能의 발휘의 방임放任하야온 것 갓다. 이제 먼저 읍내의 경황을 둘너보면 300호戶에 근近한 선민鮮民 중에는 일개의 점포가 업고 그 대代로 발서 중국인中國人의 포목상, 요리점과 일본인日本人의 주상잡화업자酒商雜貨業者가 전매적專賣的 세권勢權을 신장할 뿐이다. 이것이 엇지 읍내에 한햐랴. 칠개七箇 시장을 통하야 모다 그런 모양이다.
목하目下 일본인日本人 강전岡田의 경영에 귀歸한 자동차조합도 내구성耐久性의 핍乏한 조선인朝鮮因 조합원으로부터 그 권리를 파격적 외상의 헐가歇價로 매수하야 착착 양적良績을 거擧하는 중이요 다시 작년 중일선인中日鮮人의 주류 판매고를 비교하야보면 선인鮮人측은 도매상都賣商 일호一戶에 대하야 겨우 오승五升 내외에 불과하되 일인日人측은 무려無慮히 십여두十餘斗를 초과하얏다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시정촌市町村 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본日本 나막신(하태下駄)을 신는 것을 보던지 동가홍상同價紅裳은 고사하고 현금現金이면 외인外人에게로, 외상이라야 동족同族을 차자보는 것이 그들의 유행성이 되얏슴을 보면 마츰내 일군의 조잔彫殘을 면치 못할 뿐이 사실이 안인가?
아아 위기일발에 빈濱한 청성형제靑城兄弟의 운명!
산업발전과 청송靑松의 장래
본군本郡은 총면적 54방리여方里餘 8면面, 76리里, 주민호수 1만732내內(일본인日本人 O七, 중국인中國人 5) 경지면적은 전田 7,224정보町步, 답畓 2,809정보町步, 농호農戶는 9천여餘가 된다.
이러케 전주민의 구할九割 이상을 점한 농호農戶로 보아서는 경지의 면적은 너무나 협소하다. 그러나 이 지방은 지미地味가 그리 불량치는 안은데다가 수리水利의 편便이 만코 한해旱害의 적은 관계상 농작물재배農作物栽培에 상적相適하고 부업으로는 천견蚕繭의 삼만여원三萬餘圓과 일농호一農戶의 일두一頭로 평균 수에 근한 8,852두頭의 축우畜牛와 9만4천여원餘圓의 산직産織 기타 연초煙草, 도기물陶器物, 당초唐草 등의 특산액特産額도 적지 안타. 종래 청송포靑松布는 안동포安東布에 비하야 표백법의 연구가 업고 또한 일정치 못한 가금價金과 척수尺數로 자유판매에 방임하야 온 적폐積弊의 방지책을 확립하여야 할 일이며 더구나 도기陶器 개량의 장려는 이 지방의 독특한 사업이다.
목하目下 부동면府東面 신점동新店洞에 산출되는 그 제조의 원료인 고령토高嶺土의 품질은 다만 불란서佛蘭西, 일본 내지日本內地의 수개 소數箇所를 제한 외에는 다시 구견求見할 데가 업는 극품極品이라 한다. 그리하야 이 원료만을 채취하야 내외 각지로 수출하야도 상이相異한 수익이 잇슬이라 한다.
이제 제조품의 특점을 거擧하면 첫재 경강輕剛하고도 애기성鍮器聲이 잇고 둘재는 화력의 감내성堪耐性이 풍부하야 구렬龜裂의 폐弊가 전무全無하다. 그러나 재래의 제법製法을 묵수墨守하는 당업자當業者들은 생산품의 불량으로 하야 천사天賜의 복리를 자실自失하는 비운에 함陷치 아니치 못하게 되얏섯다. 이러케 시세時勢의 진운進運과 생활 향상의 민도民度는 아모리 하야도 그들을 용납처 아니하야 오랜 동안을 두고 심극甚極한 자극을 바다온 당지當地 유지有志들은 이들을 구제키 위하야 맛츰내 지방비의 보조를 어더 객춘客春부터 강사講師를 초빙招聘하야 전속력으로 제조법을 개선하고 아울너 판매의 확장, 사업자금의 융통알선融通斡旋에 애쓰는 중이다. 이들의 성의 이야말로 조선朝鮮의 산업계를 위하야 찬축讚祝함을 말지 안는다... 만은 어느 지방에나 발전의 장애障碍되는 것은 교통의 일관一款이다. 자동차의 편이 잇는 청송靑松, 의성義城간 삼등도로三等道路의 험준險峻과 교통 상으로나 운수運輸상으로 모다 중철中鐵의 연락連絡을 취치 아니치 못할 청송靑松, 영천永川간 선로의 미성未成은 모다 이 지방 주민의 수미愁眉를 전개치 못하는 초점이 되야잇슬 뿐이다.
양광佯狂이냐? 진광眞狂이냐?
본군本郡 내內에 분포된 종교는 3개소箇所의 불찰佛刹과 십수개소十數箇所의 기독교 전도실基督敎傳道室이 잇슬 뿐이요. 학교는 겨우 십여명十餘名의 아동을 수용한 일본인日本人 경영에 계係한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1개소와 조선인朝鮮人 측으로는 청송靑松, 진보眞寶, 화목和睦 등 3개소의 공립보통학교가 잇서 400여명餘名의 아동을 수용하얏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 시대의 요구하는 진리를 부인하고 신교육을 배척하는 마교魔敎에 유혹誘惑되는 자가 축일逐日 격증激增하는데다가 더구나 잇때가 천재일시千載一時라 하야 관허官許를 어더가지고 부탕자婦蕩子를 소취嘯聚하야 조선인朝鮮人의 사상계를 파괴하기에 열중하는 소봉원작小峯源作의 숭신파崇神派를 환영하야 학교신축낙성연회學校新築落成宴會에서 까지 황잡추괴荒雜醜怪한 소위 별신別神이라는 노름을 공개함은 실로 해괴망측該怪罔測할 뿐이다. 아아 이것을 양광佯狂이라 할가 진광眞狂이라 할가. 관계가 공인하고 학교가 그러하고 여염閭閻이 그러하고 그나마 식자칭識者稱의 계급까지 그러하야 도함여시滔淊如是로다. 이러타 하면 이 지방이야말로 광란의 마굴화魔窟化가 아니고 무엇이라고 할가?
주민의 자력비교資力比較
6천원圓이상 3, 5천원圓이상 1, 4천원圓이상 5, 3천원圓이상 14,
2천5백원圓이상 30, 1천5백원圓이상 109, 1천원圓이상 206.
청송靑松은 청송靑松!
산악이 만코도 동탁불모童濯不毛의 지地도 적지 안타만은 특히 본군의 임야 면적은 실로 칠만수천정보七萬數千町步로 총면적의 칠할오분七割五分를 차지한 만산창취滿山蒼翠의 다산국多山國이다. 그러하야 이 지방 임업의 소장消長은 일군성쇠一郡盛衰에 막대한 영향을 밧지 안을 수 업다고 한다.
종래 군내 각면을 통하야 이러한 삼림은 모다 거민居民의 난벌亂伐에 방임하야 이 대부원大富源으로 하야금 거의 오유烏有에 도라가지 아니치 못할 뻔 하야섯다. 그러나 개중 임상林相이 가장 양호한 부남府南, 현동縣東, 현서縣西 등 3지대에는 아즉 동량棟梁의 거재巨材는 그리 좃치 못하나 무립목지無立木地에도 치수稚樹가 번무繁茂치 안은 데가 업슬 뿐 아니라 만근이래挽近以來 대大속력을 가하야 식림열殖林熱을 고취鼓吹하는 관력官力과 애림愛林사상이 도발되는 민지民智는 일거월래日去月來 착착 인합引合하야 다시 청청靑靑한 청송靑松의 신천지를 보게됨은 엇지 이 지방의 장래만의 복리가 될 뿐이랴!
주민의 1년간 생활비
종별 가족수 식량대 의복대 농비農費 잡비 공과급 계
상류 10 470엔円 180엔円 300엔円 300엔円 140엔円 1,390엔円
중류 7 220엔円 90엔円 150엔円 200엔円 90엔円 750엔円
하류 4 100엔円 20엔円 · 50엔円 5엔円 180엔円
변색變色된 진보眞寶
진보眞寶는 신라新羅의 칠파화현漆邑火縣으로 조람助攬, 진안眞安, 보성甫城, 재암載岩, 청보靑寶, 진해眞海 등의 역사가 잇던 고읍이요 일즉이 고려高麗 당시 정세운鄭世雲의 홍적토벌군紅賊討伐軍을 종從하야 대공을 수립한 송안군松安君 백운민白云敏의 탄생지로서 대정大正 3년年 3월月 부군폐합의 결과 맛츰내 영양英陽, 청송靑松에게 분할을 당하얏다.
남각南角의 산읍山邑은 고금古今이 다름업다 만은 송명연암松明烟暗하던 광덕동廣德洞의 명교악지名敎樂地에는 맥수麥穗가 점점蔪蔪하고 옥류금당玉流琴堂은 간 곳이 업다만은 남안단벽南岸丹碧을 포류抱流하는 신한천新漢川의 파성波聲은 속절업시 명인鳴咽할뿐이다. 그러고 당지 학교의 아동모집난兒童募集難은 무슨 변괴일가? 이것이 빈민굴의 비참일가? 남반향南班鄕의 망조亡兆일가? 아니 민도民度의 저열低劣을 표현할 뿐임인가? 팔도산하八道山河가 정비鼎沸하는 교육열에 포위된 금일에 변색된 진보眞寶는 발서 여입도원시아향如入桃源是我鄕이 안인 줄을 모름인가? 아아 돌돌괴사咄咄怪事!
7月2日 망미정望美亭에서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