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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마운틴<이용대의 등산칼럼>
350만 농민운동의 순교자, 산악인 이경해를 기억한다.
1973년 1월 한국빙벽등반의 과제로 남아있던 설악산 토왕폭에 한 젊은 등반가가 출사표를 냈다. 그는 등반을 시도하던 중 빙벽 중단에서 후등자의 추락에 딸려 내려오면서 120여m의 허공을 날았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토왕성 빙벽 등반사의 첫 희생자로 기록된 그의 이름은 요델 산악회 송 준호다.
그로부터 1년 뒤 송준호의 연인 김백이와 한 남자가가 설악산 노루목에 잠든 송준호의 무덤을 찾아왔다. 그 남자는 제물을 차려놓고 향을 사른 뒤 무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 ‘당신의 뜻대로 이 여자가 잘 살도록 성실하게 보살피고 사랑하겠노라’고 그 일이 있고나서 두 사람은 1년 후 결혼했다. 이날 노루목을 찾은 남자는 동양 산악회회원으로 77에베레스트훈련대에 참가했던 산악인 이경해다. 그는 훗날 한국의 350만 농민의 권익을 위하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걸고 투쟁한 농민운동의 순교자가 된다.
이날 무덤 참배에 동참했던 이영식(요델 산악회. L.A서 농장경영)은 이경해의 남자다운 아량이 멋스럽고 감동적이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김백이는 그 후 교통사고로 그의 곁을 떠난다.
이경해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금년은 그가 간지 9주년이 되는 해다. 고향에서는 그를 기리는 갖가지 행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다.
그는 행동하는 농민운동가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TO 본부로비에서 한국의 한 농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농민은 이 경해였다. 한국 농업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WTO 사무총장을 만나고 나오다 농산물 수입개방에 반대하며 주머니칼로 할복을 시도했다. 그 당시 우루과이(UR) 협정은 우리농업의 둑이 무너진다 해서 이를 반대하는 온 국민의 함성이 높았던 시기였다. 스위스에서 있었던 그의 자해사건은 우리 농업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43조원의 정부예산이 농어촌 구조 개선사업에 들어가는데 일조를 했다.
그의 고향은 전북 장수다. 대학졸업 후 곡괭이와 삽을 들고 5만여 평의 험한 산지를 개간해 농장을 만들고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고 젖소 75마리를 기르며 영농현장에서 땀을 흘렸다. 처음에는 학사농부인 그를 백안시하던 주변의 50여 농가들도 높은 수익을 올리는 그를 따라 낙농에 나섰고 장수군은 대대적인 목축 붐마저 일었다. 그 후 이 땅의 농업과 농민을 위한 길에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해왔다. 전국농업인 후계자협회회장. 초대 한국 농업경영인 협회장을 맡았고 한국농어민신문을 창간하기도 했으며, 중앙연수원 교수. 전라북도 도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외골수 농민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그런 그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 무역기구 제5차 각료회의장 정문 앞에서 우르과이 협상을 반대하며 또 한 번의 자해를 시도한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 농민들의 절박한 입지를 설명할 길이 없자 “누가 우리 농민을 죽이는가?”라고 외치며 가슴에 칼을 꽂고 우리농업의 어려움을 세계에 알린 후 운명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를 농민운동가로 기억하고 있지만 한 때 그는 에베레스트 등정의 꿈을 키워왔던 산악인이다. 그는 내 첫 선등의 자일 파트너이기도하다. 그는 당시 서울 시립농대에 재학 중인 성품이 조용하고 온화한 학생이었다. 내가 세 번째 맞는 바위에서 선등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그는 자못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로프의 끝을 묵고난 뒤 그를 향해 “경해야. 혹 내가 등반도중 추락하면 내 목숨을 확실하게 챙겨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형님의 신중함을 저는 믿습니다.”라고 응수했을 뿐이다. 선배가 신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으니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한다. 새내기 바위 꾼인 나는 오르고자하는 인수봉의 B코스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자연스레 뻗어있는 등반 선을 향해 출발했다. 지금의 표현을 빌자면 온 사이트(On Sight)등반이다. 행운의 여신이 도왔다고나 할까 이 루트의 크럭스 피치인 항아리 크랙도 무사히 통과한 후 마지막 피치의 말 등(당시는 접착력이 떨어지는 군용 워커를 신고 등반하던 때라 이곳을 말 등에 올라타는 자세로 올랐다.)도 수월하게 오른 후 정상에 서니 사계가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지며 온 세상이 내발치 아래에 놓여 있었다. 서해를 향해 길게 굽이져 흐르는 한강의 도도함과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오봉. 선인 봉의 웅자가 한 눈에 펼쳐진다.
등반은 자연 속에 나를 묻고 섞는 행위다. 등반에 집중하다보면 무상무념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 속에서 산 아래 두고 온 복잡한 일상사를 잊게 해주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등산은 스포츠이자 탈출이고 정열이기도하며 일종의 종교와 같다.”라고 등산을 찬미한 장 프랑코의 말을 곰씹으며 가슴 가득한 열정과 충일한 기쁨을 안고 노을이 비낀 서북면의 하강루트를 내려왔다.
그 당시 나는 자신의 능력보다 더 높고 어려운 곳을 오르려는 오만함이랄까 아니면 무지에서 오는 용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첫 선등에 성공했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이 반복된 등반이었으나 후배 앞에서 두려움을 감춘 채 여유를 보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내 젊은 날의 허장성세였다. 나는 첫 선등의 성공으로 간덩이가 부어올랐으며 몇 년 후 이런 오만함이 나를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한다.
등산에 몰입했던 대학시절 그는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는 고등학교시절 태권도 공인 4단을 땄고 치기어린시절 누구와의 싸움에서도 밀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런 그를 눈여겨 본 주먹세계의 어른들은 유혹의 손길을 뻗쳐왔지만 등산을 하면서부터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해 겨울 그런 사실을 실제로 목격한 적이 있다.
수락산 내원암에 위치한 금유폭포에서 빙벽훈련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술에 취한 불량배 3명이 불공을 드리고 하산하는 젊은 여자를 희롱하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그가 제지 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그의 멱살을 잡고 행패를 부렸다. 그 순간 그의 발이 공중을 가르며 솟구치자 그중 한명이 벌렁 뒤로 쓰러지며 거품을 물었다. 나머지 2명도 그의 강철주먹 앞에 맥없이 쓰려졌다. 1대3으로 이루어진 순간의 결투는 맥없이 끝나버렸다. 그날의 격투장면은 이소룡이 연출하는 활극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1975년 설악산 동계등반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당시 동양 산악회는 일본 산학동지회(山學同志會)의 자누(Jannu.7710m) 훈련대와 몇 년에 걸쳐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북한산 인수봉에서 첫 만남이 있은 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은 토왕성 빙폭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으며 75년에는 토왕성빙폭 합동등반을 제의했다. 그들은 바다 건너에 있는 토왕성을 탐냈으며 상당수준의 정보와 장비를 갖추고 왔다. 등반장비를 보고 우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구경조차하기 어려운 방수로프(7mm x 150m) 2동과 샤레와 제품의 바르트 훅 50개 등을 준비해왔다. 이정도 장비라면 토왕폭 등반에는 부족함이 없는 장비였다.
우리가 토왕골로 들어갈 때 비룡폭포 못미처에서 한 산악인을 만났다. 일본인들의 장비를 유심히 살펴본 그는 이정도 장비와 그들의 기량이라면 초등의 영예를 일본인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들은 난감했다. 순간 민족적인 자존심이 발동했다. 자칫하면 일본인들에게 토왕폭의 처녀성을 내주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이들의 등반을 막아야했다.
하단 벽에 도착했을 때 토왕폭은 우리들을 거부하고 있었다. 심한 낙수 때문에 등반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날 이경해는 집채만 한 키슬링을 매고 나는 듯이 걸었다. 야수 같은 괴력에 놀란 일본인들은 그에게 ‘헤라클레스 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날 밤 우리들은 구비선대산장(지금의 비선산장 위쪽)에 짐을 풀고 취침을 했으나 온돌방의 냉기 때문에 추위에 떨어야했다. 이때 이경해가 땔감을 구해와 너무나 많은 장작불을 지폈다. 모두가 잠에 취한 한밤중에 나일론 섬유가 타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랫목에 잠자리를 마련했던 일본 산악인 오미야는 ‘베리 하트!!(very hot)’라고 외치면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그의 우모 침낭은 온돌의 열기로 검게 녹아 있었고 엉덩이 부분에 가벼운 화상마저 입은 상태였다. 침낭에서 빠져나온 깃털은 방안 가득히 흩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물을 퍼부어 방바닥의 열기를 식히며 한차례 소동을 벌렸다. 그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으로 뇌리 속에 남아 있다.
내 첫 선등의 동반자였던 이 경해는 농대 졸업 후 낙후한 농촌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북 장수로 귀농하였다. 산지의 자갈밭을 옥토로 일궈 수 만평의 농장을 개간하는 한편 농어민 후계자 육성에도 앞장선다. 그 공로로 F. A. O.로부터 “세계의 농부 상”을 수상하는 등 농민운동가로 변신한다. 그가 피와 땀으로 일군 농장이 전국 유일의 낙농 교육장으로 지정되자 낙농에 꿈을 둔 농촌청년들이 그의 문하로 모여 들었고 그는 열정적으로 이들을 지도한다. 그 성과를 두고 사람들은 현대판 상록수라고 격찬했다.
23년 전 그가 스위스에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반대 수단으로 활 복 자살을 시도했을 때 사용했던 칼은 내가 귀농 기념으로 선물한 스위스제 아미나이프였다. 그의 활 복 사건은 네델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를 연상케 할만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몇 년 동안 산행을 같이하면서도 그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 한 번 놀라워했다. 그는 설악산 적설 기 등반에서도 남다른 체력으로 반팔셔츠 차림에 무거운 키슬링을 메고 힘겨워하는 후배들의 짐마저 멘 채 걷는 등 힘자랑은 했어도 조용하기만 한 선비 같았던 성품의 소유자였다.
결국 그는 멕시코에서 있었던 우루과이 협상 현장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 농민들의 절박한 입지를 설명할 길이 없자 극단적인 의사 전달수단으로 두 번째의 자해사건을 일으켜 심장에 칼을 꽂고 이승을 떠난다. 우루과이라운드라는 두텁고 높은 벽을 인수봉 동양 길을 오르던 산악인의 열정으로 뚫고자 한 것일까.
그는 1976년 “77에베레스트 훈련대”의 마지막 훈련을 끝으로 산을 접은 채 귀농한다.
알피니스트로서의 그의 마지막 모습은 <everest 100日의 長征 / 등정 25주년기념>이란 책 속에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남겨져 인수봉과 설악산을 함께 오르던 옛일을 떠 올리게 한다.
첫댓글 아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던 선배님이셨는데...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