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마다 국화꽃이 가득한 곳, 이름도 어여쁜 국화향기 은은한 국수리菊水里이다. 푸른 안개를 찾아 가끔씩 새벽길을 나서는 동네. 1988년 강하면 왕창3리(바탕골소극장 부근) 물가에 앉아 강 건너 처음 국수리 이야기를 들었다. 국수리에 부임한 초임교사와 중학생의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사랑 이야기. 지금도 그렇지만 스물몇살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의 이야기였다.
다시 국수리 이야기를 들은 것은 돌아가신 시아버님과의 설악산 여행길, 국수리에 외가가 있어 어린시절 가끔씩 왔던 동네라고 했다. 포목장사로 천석꾼의 꿈을 이룬 할아버지에게 시집온 할머니의 친정붙이들이 늘 집안에 복닥거려 <국수리>는 아버님에게 늘 그리운 곳이라고 했다.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었던 어린시절 남한산성까지 차를 타고 온 후 강을 건너 걸어 걸어 국수리에 다녀오곤 했다고 했다.
그 국수리를 지날 때마다 국수리에 국수집을 하나 내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국수리에 정말 국수리국수집이 생겼다. 한동안 <우리밀국수집>이란 별 특색없는 간판이 걸린 이 집을 우리 맘대로 <국수리국수집>이라고 불렀는데, 어느날 거짓말처럼 <국수리국수집>으로 바뀌었다. 이 집에서 파는 국수와 국수리의 국수는 뜻도 한자도 다르지만 그래도 <국수리국수집>이다.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맛집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양수리 추어탕집이나 수종사 아래 뽕나무해물칼국수 집과 마찬가지로 국수리국수집 역시 도공의 소개로 드나든지가 어언 10년은 넘었을거다.
요런 풍경을 요렇게 푸르딩딩하게 찍어내는 실력이니, 음식에서 푸른빛을 벗겨내고 그 맛을 상상하시길. ㅠㅠ
오로지 삼시 세끼 주구장창 밥만 먹고 사는 내가 그래도 가끔 은근한 된장 맛 때문에 찾는 집이다. 이 집의 메뉴래봐야 달랑 우리밀로 만든 칼국수와 수제비, 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은 칼제비에 부추를 넣은 빈대떡, 몇가지 국수가 다이다. (토요일 몇 년 만에 용문에 가다가 들렀는데, 만두가 생겼다. (평소대로 빈대떡에 수제비, 순발력 부족으로 만두는 못 먹었는데, 생긴 모양이 장난이 아니다)
수제비, 칼국수, 칼제비, 녹두빈대떡, 만두 모두 가격도 착한 오천원.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집에 처음 갔던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름없는 가격이다. 국수리국수집의 맛의 비결은 배추 잎사귀나 근대잎을 넣고 끓인 시원한 해물된장 국물. 푸른 부추를 넣은 얄포롬한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은 수제비와 두 장이 한접시에 나오는 빈대떡이 언제나 나의 선택메뉴인데, 소면도 아니고 칼국수도 아닌 밀가루 덩이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해가 서쪽에서 뜰 드문 일이다.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은 된장국과 밀가루 덩이의 조합이 어찌 잘 어울리는지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훌훌 마시고 나면 땀이 뻘뻘 나면서 해장으로는 그만이다. 달랑 부추만 넣어 1센치쯤 되게 두툼하게 부친 빈대떡의 감칠맛 또한 장난이 아니다.
아버지와 동네 이웃 어르신 몇의 고향이 황해도 사리원이었다. 갈 수 없는 고향의 푸짐했던 겨울을 그리워한 아버지 때문에 우리집은 겨우내내 김치만두와 시래기 넣은 콩비지, 빈대떡을 부쳐 이웃과 나누곤 했다. 만두를 위해 특별히 속을 많이 넣지 않은 김장독 하나를 따로 마련한뒤 지치지도 않고 만두를 만들어 얼려 놓고는 봄이 올 때까지 멧돌에 녹두를 갈아 김치와 돼지고기를 나위 넣어 돼지 기름을 넣어 두껍게 부친 빈대떡과 함께 먹곤 했다.
시래기 넣은 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즘처럼 두부를 뺀 뒤에 끓이는 비지나 도무지 콩의 깊은 맛을 내지 못하는 원형을 잃은 빨갛기만 한 비지가 아니었다. 알맞게 불린 콩을 멧돌에 간 뒤 겨울바람에 말린 시래기와 돼지고기를 넣어 끓여 놓고는 먹을 때마다 양념간장으로 간을 해 먹는 하얀 콩비지의 그 깊은 맛을 어찌 잊겠는가.
어린시절 이후에 한번도 먹어보지 못해 내게 가장 그리운 음식 두가지가 바로 시래기 넣은 비지와 된장을 풀어 끓인 아욱죽이다. 입이 짧아 비쩍 말랐던 내가 이성을 잃고 국물 한 방울 남김 없이 비웠던 음식이 바로 아욱죽, 아욱죽에 코 빠뜨리고 먹을 때마다 엄마는 <흉년에는 어른도 죽 한그릇, 아이도 죽 한그릇이라더니> 라고 했다. 먹을것이 없으니 어른은 당연히 죽 한그릇, 어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아이는 맛 있어서 죽 한 그릇이었다.
몇 해 전 어린시절의 콩비지가 너무 그리워 엄마한테 부탁했더니 믹서에 갈아 정성껏 만드셨지만, 아무리 곱게 갈았던들 멧돌에 간 부드러운 맛에 비하랴. 입 속에서 까실까실하게 겉도는 콩입자 때문에 제대로 먹지 않아 엄마를 서운하게 만들어 아욱죽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있던차 국수리국수집의 된장수제비를 만난 것이다. 푹 퍼진 쌀알 대신 쫄깃한 수제비가 들었있긴 했지만 된장국물에 푸른 야채가 그토록 그리워한 아욱죽의 맛과 거의 흡사했다.
국수리국수집에서 감칠맛 나는 맛있는 것이 된장수제비와 빈대떡만은 아니다. 수제비에 딸려 나오는 보리밥과 비벼 먹는 무우청 김치와 봄동 것절이가 거의 환상적인 맛을 자랑하는데, 처음 한번만 갖다주고는 알아서 퍼다 먹은 이 두가지 김치의 맛은 먹어 보지 않고는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연일 계속되는 술판으로 정오까지 헤롱거리던 김모씨는 이 된장국물이 들어간 후 속이 확 풀어졌음은 물론, 여태까지 맛 본 빈대떡 중에서 가장 품위있는 맛이라 평하며 부지런히 두 가지 김치를 소복하게 담아왔다.
테이블 근처에서 켜켜이 쌓인채 익고 있는 무우청김치통을 바라만 보아도 그저 입이 헤벌레, 마음이 든든해진다. 남들이 선호하는 총각김치의 달랑무우는 한 개도 먹지 않고 무우청만 주구장창 갖다 먹어 식당아줌마의 총애를 받았던 나의 특별한 무우청 사랑이니 이 또한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보리밥에 무우청김치를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쓱싹쓱싹 비벼먹는 맛 또한 장난이 아닌데, 모두 다 공짜이다.
팔당에서 국수까지 연장된 중앙선 전철역 근처에 있어 오기 편해서인지 근처의 청계산에 산책 나온 이들과 오랜만의 기차여행으로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중년의 여고동창생들이 꽤 눈에 뜨인다. 국수역까지만 오는 전철이 용문까지 연장되는 12월 23일 이후에 팔당에서 이 기차를 타고 용문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 이곳 국수역에 내려 국수집국수집에 다시 들러야겠다. 그때는 잊지 말고 꼭 만두를 시켜 맛봐야겠다.
개성식의 닝닝한 만두 말고 어린시절 먹던 김치가 들어간 칼칼한 만두였으면 좋겠다. 참 창 밖으로 보이는 졸졸졸 흐르는 실개천도 나름 운치가 있다. '김치추가셀프, 바지락 껍질 조심하세요. 다쳐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검정칠 주인白'이란 경고문은 멋을 잔뜩 부린 메직으로 써 붙였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컴퓨터로 출력물이 아닌 매직펜 글씨도 정답다.
첫댓글 1박 2일에 도루묵하고 김치 수제비가 나왔었는데.. 우연인가요... ㅋㅋ... 올해는 맛있는 아욱국 좀 먹어 볼라고 밭에 한 봉지 씨앗을 뿌렷는데... 서리가 오는 바람에.. 목적 달성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내년 가을을 기다려야 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