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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 출애굽기 17장 8절 ~ 16절
[예배 전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우리를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름 붓듯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지은 죄악된 모든 것들을 예수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씻어 주시옵소서. 죄 가운데 어두워지고 얽매였던 모든 것들이 주의 은혜로 새롭게 소생되어지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화목해 되어지며 영원토록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복된 저희가 다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시간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나이다. 아멘.
[대표 기도]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흩어져 있던 발걸음을 모아주시고, 각자의 형편 속에서도 예배를 지키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그저 익숙함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맞이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주님,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생각과 감정과 계산을 앞세웠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선택의 자리에서는 내 유익과 편안함을 먼저 붙들고 지나갔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한 주가 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니라 마음의 열매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봉사와 헌신과 사역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가 되게 하소서.
이 시간 선포되는 말씀이 성도들의 심령에 잘 박힌 못이 되어 성령의 양식이 되게 하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께 영육 간의 강건함과 성령 충만함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선포될 때 모든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삶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전한 회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손길과 찬양을 기쁘게 받아주실 줄 믿사오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본문 성경 봉독]
주일말씀: 출애굽기 17장 8절로 16절 말씀입니다.
[설교 말씀]
1. 인생이라는 치열한 전쟁터
요즘 뉴스를 들어보면 세계 도처에 이런 일, 저런 일,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 인생들은 누구나 태어나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저마다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켜 흔히 '전쟁 같은 삶'이라고들 말합니다. 교통 전쟁, 입시 전쟁, 직장 생활도 사업도 가정생활도, 심지어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 자체도 사는 게 전쟁입니다. 정말로 쉬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이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승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지나 이제 가나안 땅으로 가던 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 길목에서 아말렉 족속들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대로 된 군대 조직을 갖추고 있지도 못했고, 전쟁을 해본 경험도 전혀 없는, 그저 평생 노예로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을 데리고 피하고 피하다가 할 수 없이 맞닥뜨린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굉장히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따라서 산 골짜기로 나가 아말렉 족속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때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전쟁터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골짜기에서 싸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내서 이기고, 하루 종일 오랜 시간 싸우다 보니 피곤하여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 족속이 밀고 들어와 이스라엘이 점점 밀리며 공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때당시 나이가 상당히 많았는데 팔을 계속 들고 있으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지니까, 곁에 있던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혀놓고, 한 사람은 이편에서 오른손을 바치고 또 한 사람은 저편에서 왼손을 받쳐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두 손을 붙들어 바치고 있으니, 나중에 해가 질 무렵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쳐서 파하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 당시에 벌어진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사건을 책에 기록하여 남기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려 기념하라고 명령하실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후세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아주 중대한 교훈을 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2. 아말렉의 정체와 마귀의 기습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과 싸운 이 '아말렉 족속'이 누구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아말렉 족속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에서’의 후예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의 후예입니다. 에서가 누구입니까? 에서는 힘이 장대하고 들판에 나가 사냥을 하며 철저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삶 가운데 별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팔아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하나님의 장자권을 멸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비록 이삭의 장자였지만 장자권을 파죽 한 그릇에 넘길 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없었던 것처럼, 그 후손인 아말렉 역시 에서의 핏줄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에서’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족속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행진해 갈 때 전혀 예기치 못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아말렉이라는 무서운 방해자를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하는 악한 영적 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는 아말렉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신명기 25장 17절~18절에 보면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함에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오늘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방식을 보면 악한 사단의 전략과 매우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당당하게 전면전을 선포하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걷다가 피곤하여 지쳐 있을 때, 그 행렬 뒤에 처져 있는 노인이나 노약자,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노리고 비열하게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사탄도 아말렉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할 때, 대열의 맨 뒤에 처져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믿음의 확신이 없이 겉돌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사단의 주요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아가다가 갑자기 큰 일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를 오히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이 허전하고 무너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무당을 찾거나 종교를 찾아 헤매다가 이상한 이단 사이비에 빠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메워보려 하다가, 바로 그때를 마귀가 틈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시험에 들 때도 보십시오. 예수님이 붙잡혀 끌려가실 때, 자기는 자신이 없으니까 예수님을 '멀찍이' 쫓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 가다가, 결국 모닥불 앞에서 계집종 하나가 "너도 저 예수라는 무리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하고 추궁하니까 두려움이 확 밀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다가, 결국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인하자마자 닭이 울었고,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함께 다닐 때는 무서울 것이 없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을 멀찍이 떠나 혼자 있다 보니 보잘것없는 계집종 말 한마디에도 두려워 떨며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한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도 나는 주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했던 고백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험악한 현장에서 직접 부딪쳐 보니까, 자기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실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예배드리고 찬양할 때는 믿음 안에 살겠다고 굳게 맹세하지만,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주님과 멀어지고 나 혼자 뚝 떨어져 있을 때는 늘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으면 우리는 삶 속에서 늘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늘 성령으로 예수님과 함께해야 하며, 주님을 꼭 의식하고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드려야 합니다.
3. 마귀가 공격하는 '그때'
여기서 우리는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언제' 공격해 왔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8절에 "그때에 아말렉이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귀가 공격하는 이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원수 마귀는 절대로 우리가 영적으로 강하고 충만할 때는 공격하지 못합니다. 성도가 강할 때는 그 주변을 비행하며 기회만 엿보다가, 우리에게 약점이 생길 때, 허점이 보일 때, 삶에 곤고함이 찾아올 때 기습적으로 덮쳐옵니다. 어려움이 올 때는 꼭 한 가지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뭉탱이로 싸가지고 와서 우리를 사방으로 우겨쌈으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완전히 기권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말렉이 쳐들어온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의 고단함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 하던 르비딤 원망 사건 직후였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원망이 터져 나오고 내적인 안정이 무너졌을 때를 기가 막히게 알고 공격해 옵니다. 이 원리는 국가든,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약해지고 마음이 허전할 때 공격합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뭔가 갑자기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세상에서 방황하며 그것을 채우려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무당에게 빠지고 이단에 빠져 방탕하게 세월을 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빠지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참 이상하게도 우리가 큰 은혜를 받고 나면 마귀가 먼저 와서 알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은혜를 충만히 받고 기쁨이 넘쳐서 집에 돌아갑니다. 은혜를 받으니 안 하던 하수구 청소도 하고 쓰레기통도 치우며 기분 좋게 움직이는데, 생각지도 않게 집안에 이상한 일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긁고, 아내가 긁고, 자식이 거품을 물고 대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받고 주를 위해 헌신하며 "이제부터 정말 믿음으로 살아야지!" 결단할 때, 우리 주변에는 생각지도 못한 시험거리와 마귀의 방해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궤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4. 골짜기의 전투와 산꼭대기의 기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살펴볼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아말렉의 전쟁터가 '두 가지' 영역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군대를 거느리고 직접 칼을 들고 부딪쳐 싸우는 '저 밑 골짜기'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기도하던 '산꼭대기 언덕'입니다.
여호수아가 골짜기에서 치르는 전투는 우리가 매일매일 직접 겪으며 부딪치는 '실제 일상의 삶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내가 사람을 만나고, 사업을 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치열하게 추진해 나가는 현장입니다. 반면에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이고 영적인 영역'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오늘 이 두 개의 전쟁터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두 영역의 전쟁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것은, 이 전쟁의 승패가 직접 군사들이 부딪쳐 싸우는 골짜기 현장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보았듯이,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기기도 하고 밀리기도 했습니다.
본문 11절에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골짜기에 있는 군대의 숫자가 많거나 적으냐, 혹은 얼마나 좋은 무기로 싸우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 있는 모세의 손이 올라갔느냐 내려갔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삶의 성패가 갈린다는 뜻입니다.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는 포경선을 보십시오. 고기 떼가 나타나면 배 위에서 도트를 올리고 줄을 당기고 노를 저으며 온 선원들이 정신없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실제 고기를 잡느냐 못 잡느냐를 결정짓는 핵심은 맨 앞에서 작살 창을 들고 고기를 정확히 찌르는 그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것을 정확히 찍느냐 안 찍느냐에 고기가 잡히느냐가 결정됩니다. 배 뒤에서 구경하던 관광객들이 아무리 흉내 내며 찔러보려 해도 다 허탕을 칩니다. 이 작살은 그냥 힘으로 찌르는 것이 아니라, 찌르는 순간 전기가 통해 물고기를 기절시켜 포획하는 원리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현장에서 이런 일 저런 일 내 노력, 내 계획, 내 수단과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무리 분주하게 움직여도 그것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성패는 내가 골방에서 기도로 원수 마귀를 정확히 찍어 누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마주치는 기도의 사람이 되면 여러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모세가 손을 드는 것은 참으로 상징적인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 삶에는 늘 이 두 개의 전쟁터가 공존합니다.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내가 직접 나서서 사람을 만나고 발버둥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힘과 수단이 인생의 성패를 가르지 못합니다. 당연히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고 성실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신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영적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시고 부어주셔야 내 노력이 비로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내 힘으로만 열심히 살아가려다 보면, 돈은 좀 모은 것 같으나 결국 건강이 빵꾸 나고, 아내가 빵꾸 나고, 남편과 자식이 빵꾸 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사방으로 아말렉 강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이나 교양이 아닙니다. 그저 좀 착해지려고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실제 삶에서 부딪치는 치열한 영적 전쟁입니다. 아주 실제적인 세계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치러야 할 싸움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한 사단 마귀와의 영적 전쟁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 싸우라고 명하십니다. 이 영적인 싸움을 우리는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로봇이 움직이며 달나라, 우주를 논하는 첨단 시대에 무슨 귀신이 있고 마귀가 있냐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악한 영의 역사는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작동하는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무슨 계획을 세우고 누구를 만날지 수많은 스케줄을 짜지만, 그것을 최종적으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진정으로 어렵게 하고 고통을 주며 우리 앞길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돈 문제나 건강 문제, 인간관계의 꼬임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영적인 문제'에 있습니다. 성경은 마귀의 실제를 정확하게 폭로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나타나신 이유는 바로 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마귀의 머리를 박살 내시고 완전히 승리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우리는 그 예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주님이 이루신 승리를 내 삶에서 그대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존재를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마귀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면 그 수가 읽히고 도망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삭은 이스마엘보다 인간적으로 약해 보였습니다. 야곱 또한 형 에서에 비하면 집안 부엌일이나 돕던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하며 힘이 펄펄 넘치는 강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약하디약한 야곱과 이삭이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비록 약하고 연약하나, 우리가 믿음 안에 서서 주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므로 우리는 반드시 마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승패가 인간의 노력이나 재능, 좋은 여건, 혹은 운이 좋아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일부 그럴지 몰라도, 정말 밤낮으로 열심히 살았는데도 쓰라린 실패를 맛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겉으로는 대단히 성공한 것 같아 보여도, 그 인생의 속 뚜껑을 열어보면 삶이 황폐해지고 자식 문제, 가정 문제, 남모르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비참한 인생들이 참 많습니다.
돈은 좀 번 것 같은데 영혼은 이미 다 망가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만사 인생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냥 방치해 두지 않으시고, 직접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며 지금 이 순간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인생의 모든 해결 열쇠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이 지구는 총알보다 7배나 빠른 무서운 속도로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우주의 운행을 보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과학이 덜 발달해서 만원경으로 별들을 보며 그저 몇천 개, 몇만 개인 줄 알았지만, 최근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같은 첨단 장비로 수조 원을 들여 우주의 깊은 곳을 찍어보니,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깜깜한 공간 속에 은하와 별들이 수두룩하게 빽빽이 차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 만물이 어떻게 우연히 생겨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줄 알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생명의 신비는 놀랍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물질의 최소 단위가 분자인 줄 알았더니 그 안에 원자핵이 있고, 더 들어가 보니 DNA가 있고, 그 속에는 완벽한 생명의 설계도인 게놈 지도가 들어있었습니다. 단백질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도 우연히 조합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설계도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링크, 한 링크 결합되어 위는 위대로, 장은 장대로 정확하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확률적으로 이 단백질 구조 하나가 우연히 만들어지려면 10의 184승분의 1이라는 숫자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공이 184개가 붙어야 하는 숫자입니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무한대의 확률'입니다. 이 정도 확률은 바다에 태풍과 해일이 몰아쳐서 바닷속 모래와 쇳가루가 우연히 결합되어 어느 날 갑자기 완벽한 핵잠수함 한 대가 저절로 조립되어 떠오르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확률입니다.
우리 인간과 이 만물은 결코 거져 왔다가 거져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세밀하게 개입하시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거대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인간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나는 몰랐다"고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만물이 어떻게 거저 생겨났겠습니까? 무식하고 믿음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만물이 예전부터 그냥 저절로 있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5. 내 삶의 승리는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결코 이스라엘 자체의 군사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보잘것없는 약체 중의 약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14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주셔서 직접 싸워주셨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힘이 세서 아말렉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이 되시니 승리한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승부는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느냐,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아무리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면, 어떤 험난한 상황과 문제 속에서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예수님을 믿어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같고,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삶에 역사하시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인생의 결말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맨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뒤집어서, 결국에는 더 아름답게, 더 복되게, 더 신령하게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잔치를 마지막에 더욱 빛나게 하십니다. 시편 146편 말씀처럼, 도울 힘이 없는 방백들이나 인생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들이 하려던 모든 계획은 그날로 소멸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진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승리와 축복과 성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잠언 16장 3절 말씀처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체도, 건강도, 가정도 오직 여호와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경영을 복되게 인도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친히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고 그 도우심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면, 이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삶, 행함이 있는 삶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다면, 야고보서 말씀처럼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없는 믿음입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마냥 쭈려 앉아 불평만 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부족하고 약할지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몸부림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이 그 삶을 붙드시고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모세는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를 임명하여 전쟁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최전선으로 나가 아말렉 군대와 부딪치며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현장에서 땀 흘려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산 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우시고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교훈은,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성패는 바로 '기도'에 달렸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도 전쟁의 판세는 여호수아의 칼날이 아니라 모세가 기도하는 손에 따라 승부가 갈렸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부는 내 수단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에서 판가름 납니다.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그때 모세가 손에 무엇을 들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했습니다. 이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처음에 미디안 광야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너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거절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거길 갑니까?
내가 혈기 왕성하던 40대에도 실패했는데, 이제 나이 80이 된 늙은이가 어떻게 갑니까? 애굽 왕 바로가 나를 죽이려 할 텐데 그 호랑이 굴속으로 어떻게 다시 들어갑니까?" 하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 땅에 던지니 뱀이 되었고, 다시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팡이를 통해 "내가 이 지팡이와 함께하듯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즉,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지팡이를 들고 기도했다는 것은, 자기 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아주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실 때는 바로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단 거리에 와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가동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재미교포 목사님이 한국에 나와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서울 시내에 무슨 '방'들이 그렇게 많냐는 것입니다. 노래방, PC방, 찜질방, 비디오방... 사람들이 육신의 쾌락을 즐기고 건강을 챙기기 위한 방들은 참 많이 만드는데, 정작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방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다의 골방'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쁜 일과 중에서도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기도의 시간을 꼭 구별하여 떼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시간이 무조건 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5분을 기도하더라도 내 중심과 마음을 주님 앞에 다 쏟아놓는 진실한 기도,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기도에 움직이십니다. 혹시 기도하다가 지쳐서 낙심하여 기도를 중단하신 분이 계십니까? 다시 기도의 손을 드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그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리라 하셨습니다.
6. 연대와 동역의 소중함
마지막으로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 볼 영적 원리는,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믿음의 동역입니다. 본문 12절에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히고, 하나는 이쪽에서 하나는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한 영적 지도자라 할지라도, 인간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육신이 피곤하여 팔이 점점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팔이 내려오면 골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에게 밀려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이 위기를 보고 곁에 있던 아론과 훌이 급하게 모세를 돌 위에 앉히고 그의 팔을 양쪽에서 붙들어 받쳐주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론은 모세의 친형이었고, 훌은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의 남편, 즉 모세의 매형이었습니다. 나이로 보나 항렬로 보나 다 모세보다 손위 사람이고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지도자인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겸손히 양옆에서 모세의 팔을 받쳐주며 동역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협력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완전히 물리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이룰 수 있는 승리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하늘에서 직접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내 곁에 믿음의 동역자들을 붙여서 일하십니다.
어떤 교회에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 계셔도 목사님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성도들의 열심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의 약함을 붙잡아 주면서 뜻을 모으고 겸손히 협력해 나갈 때, 비로소 그 교회에 놀라운 은혜와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에 그토록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바울 자체도 훌륭했지만 그의 등 뒤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희생적인 협력자들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은 어떤 동역자를 향해 "이 사람은 내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내 목숨을 위해 자기 목이라도 내놓았던 사람이다",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 사람이다" 고백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바울을 위해 자기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여정에도 이처럼 내 기도의 손을 붙들어주는 아론과 훌 같은 동역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혼자 가면 넘어지나 함께 힘을 모으고 협력하면 안 될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식구가 아론과 훌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원망하고 헐뜯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붙들어주고 기도의 무릎으로 협력해야 그 가정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정이 서로 찢어발기며 싸우는데 어디 그 집안이 잘되는 역사가 있겠습니까?
7. 여호와 닛시, 대대로 싸우시는 하나님
본문 16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은혜는 어쩌다 한번 도와주고 끝나는 일회성 은혜가 아닙니다. 한 번 도와주고 모른 척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대로 승리의 깃발을 꽂아주시고, 대대로 우리를 도우시며, 대대로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 한 사람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와 후손 대대로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의 단초가 되어 우리 집안과 삶 가운데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여호수아와 군대를 맞이하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국가마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가 있고, 군대 부대마다 그 부대의 명예를 상징하는 부대기가 있습니다. 6.25 전쟁 때 자기 부대의 깃발을 적에게 빼앗긴 부대는 지금도 부대 마크는 복원했어도 정식 깃발은 쓰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이 '기(Flag)'라는 것은 그 조직의 정체성이자 가장 자랑스러운 상징입니다.
우리 교회 주보에도 보면 우리 교단을 상징하는 마크가 자랑스럽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장로교단 중에서도 우리 합동측과 통합측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데, 이 마크를 다는 것도 아무나 함부로 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정식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교단 감찰단이 다니면서 불법으로 마크를 쓰는 교회가 있으면 조사해 가기 때문에, 함부로 달 수 없는 자부심의 상징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자랑스러운 깃발과 마크가 있지만,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삶의 중심에 높이 들어 올려야 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깃발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모세는 전쟁의 승리가 자기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고백하며 여호와의 승리의 깃발을 높이 꽂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모세의 지팡이보다 더 확실한 승리의 깃발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깃발'입니다. 모세는 기도의 지팡이를 들다가 육신이 피곤하여 팔이 내려왔고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히 피곤치 않으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완전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아낌없이 다 쏟아 주셨고,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이 땅에 마귀를 이기는 완벽한 여호와의 승리의 깃발을 꽂으셨습니다.
"이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어서 저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으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의 자리에서부터 이미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날마다 삶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비록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지치고 넘어질 때가 있을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깃발을 바라보는 자의 삶에는 날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현실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 안에는 여러분이 삶에서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과 평안과 추구하는 모든 진정한 가치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더하여 주십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루 종일 돈만 바라보며 돈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집이 필요하다고 온통 집 생각에만 사로잡혀 살지 마십시오. 아이들 중에 불안하거나 정서적으로 초조하면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빨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손톱 뜯지 말라고 손을 때리고 야단친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거나, 야구를 하게 하거나, 그림을 그리게 해서 아이의 손과 마음을 다른 유익한 곳에 몰두하게 하면 그 나쁜 버릇은 자연스럽게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눈앞의 척박한 환경만 바라보며 한탄하지 마시고, 아픈 몸만 쳐다보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돈이 없다고 비어있는 은행 통장만 백날 쳐다보고 한숨 쉰다고 통장에 공짜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텅 빈 환경을 보지 마시고, 그 눈을 들어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의 모든 결핍 위에 하나님의 채우시는 은혜가 더하여지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삶에 완벽한 승리의 깃발을 꽂으셨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자는 그 누구도 삶의 실패와 저주 속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어둠은 떠나가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 삶의 모든 아픔과 상처들이 아름다운 승리로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과거에 어떤 좌절이 있었고 쓰라린 실패를 겪었든지 간에, 좋으신 하나님은 그 모든 실패까지도 다 합력하여 결국에는 선을 이루시고, 우리 입술에서 아름다운 승리의 찬가가 터져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이 승리자 되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자리에서 낙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시되, 기도의 끈을 놓지 말고 합심하여 기도의 손을 높이 드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의 모든 골짜기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여호와 닛시, 승리의 깃발을 활짝 휘날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해 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영원한 승리의 깃발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삶의 현장에서 기도의 손을 들어 날마다 승리하기를 다짐하는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의 머리 위에와, 그들의 가정과 일터와 자녀들의 앞길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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