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가 거듭됨에 따라 이젠 점점 서울 도심에서 많이 떨어진 곳을 찾게 된다. 그러다보니 당일로 마칠 수 있는 곳이 줄어 들고 두차례 정도 지나면 최소 1박2일은 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매번 성지순례를 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 천주교 박해 100여 년간 수 많은 분들이 순교하였지만 그중에서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이국에 와서 순교하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행적이 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일가족이 신앙을 위해 순교하여 한 곳에 묻혀 있거나 귀양으로 인해 죽어서도 한곳에 묻히지 못한 흔적들을 여기저기에서 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번 성지순례는 인천교구에 소재한 네곳의 성지 중 한곳으로 중국에 사신의 일행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 와서 전교활동을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시 서소문에서 순교하여 이곳에 묻혔던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 베드로 선조의 묘역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다산 정약용이 설계, 축조하였다는 수원성, 그리고 병인박해 때 신자들을 모두 대피시킨 후 혼자 남아 있다가 채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 김헨리코 신부님 등의 묘가 있는 순골성지 등 3곳을 순례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 베드로의 묘역이 있는 반주골이다. 이승훈 베드로의 유해는 1981년 천진암으로 옮겨져 초성만 조성되어 있으나 그 밑으로 신규, 택규의 묘가 있는 곳이다.
서울외곽순환도로 장수IC를 나와 서창IC방면으로 가다보면 고가도로가 나오고 고가도로 오른쪽으로 가다 우회전하여 50미터 정도에 이승훈(베도로)성지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바로 옆에는 장수정수장 철책이 길다랗게 설치되어 있고 100며 미터를 가면 승용차는 더이상 갈 수가 없는 곳이다.
철책에 이승훈 베드로 성현 역사기념관 조성사업 예정지라고 안내가 되어 있는데 사업시행이 빨리 되어야 할 것 같다.
좁운 길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십자가의 길을 만나게 된다. 너무 오래되어 낡고 퇴색되고, 탈락된 곳이 많아 신앙 선조에 대한 송구스럽기 그지 없다.
우리나라 천주교 유지재단이 첫 번째 신자인 분에 대한 예우를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차라리 대표성지로 선정을 하지 않았으면 이런 줄 몰랐을 터인데 너무 소홀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비가 그친지 얼마 되지 않고 습도도 높은 가운데 잡초가 많아 모기떼들의 공격을 온몸에 받으며 꿋꿋하게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순례를 하였다.
드디어 이승훈 베드로 묘역에 도착하였다. 바로 밑에는 아들 두 분의 묘가 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기저기 봉분이 패어 흙이 드러나는 등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창 이씨인 이승훈 베드로는 부친 이동욱과 모친 여주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나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당대의 석학 이벽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동지사 서장관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가 되었다.
영세 후 천주교 서적, 십자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전, 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였고,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을 이저 첫 번째 배교를 한다.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를 주도했으나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요으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참수되었다.
반주골에 안주되었던 이승훈의 유해가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권철신,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마친 후 이승훈 베드로 묘를 참배한 후 인증샷을 하였다.
두 번째로 찾은 수리산 성지 입구입니다. 예수상이 넓은 품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수리산 성지에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성지 입구에 최양업 신부님께서 지으신 천주가사의 일부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이주한 후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정착했던 고택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았던 고택 마당 한켠에 바뇌의 성모상이 서 있다.
최경환 성인의 묘역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묘역이다. 본래 충청도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으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협잡꾼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유랑길을 나서 이곳 수리산에 청착하였다고 한다.
수리산을 담배를 재배해 온 곳으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던 곳이다.
최경환 성인은 1837년 수리산에 들어와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열렬한 선교 활동을 피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그 후 부인 이성례 마리아도 치명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부터 시복되는 이성례 마리아의 집이라고 한다.
세 번째 순례지인 수원 화성이다.
순교자 18위가 복자로 시복된다는 수원으로서 이곳은 화성 행궁 맞은 편에 있는 수원순교성지 북수동 성당이다.
화성 행궁 앞에서의 기념촬영. 일정 상 행궁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기념촬영으로 대신하였다.
오늘 마지막 순례지인 손골성지 입구
이곳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선교 준비를 하는 곳이었으며 피정도 하고 쉬기도 하였다. 손골은 순교지는 아니나 손골에서 생활하던 신자 중에도 여럿 있다. 손골에서는 특별히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로 신부를 기념한다. 도리 신부는 한국에서 머문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냈으며,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오매트로 신부는 손골을 포함한 지금의 수원교구 지역에서 사목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도리 헨리코 신부의 동상
손골성지에는 '순교자들의 길'이라는 기도처를 조성해 놓아 십자가의 길 처럼 각 처에 머물며 해당 순교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 등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순교자들의 길'은 총 7처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처에서는 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에 대한 생애와 편지 묵상, 제2처에서는 성 오매트로 신부, 제3처에서는 제4대 교구장이셨던 성 장 베르뇌 시므온 주교, 제5대 교구장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백 브르뜨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서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민 위앵 루카 신부, 제4처에서는 1784년에 시작해서 1886년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100여 년간 혹독한 박해를 받고 순교하신 무명 순교자들, 제5처에서는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 등 이름이나 행적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순교자들, 제6처는 1984년 5월 6일 시성되신 우리나라 103위 성인들, 제7처에서는 고향이 북한인 정국보 프로타시오, 유정률 베드로,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을 묵상하고 나서 무명순교자 묘 앞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까지의 순교자들에 대한 호칭기도로 끝맺는다.
손골성지의 '순교자들의 길'은 '십자가의 길'기도와는 다르게 순교자들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들의 편지나 박해 시대의 신자생활, 증언록 등을 묵상할 수 있어 또다른 감명을 받았으나 시간 상 전부를 읽고 묵상할 수 없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