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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문학] 여름호 평론 원고/ 2015. 4. 30.
쓸쓸함의 등 뒤에 묻어 있는 슬픔
-황영선 시집 『우화의 시간』론
조 명 제
𝟏
슬픔은 너무 낡았다. 슬픔은 너무 오래 되어 낡을 대로 낡았다.
유가(儒家)의 맹자(孟子)는 인간의 본성을 ‘仁․義․禮․智’(四端)라 하고, 그 사단(四端)을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았다. 한편『禮記』와『中庸』에는 “喜, 怒, 哀, 懼, 愛, 惡, 慾”의 일곱 감정[七情]이 나오는데, ‘슬픔(哀)’을 포함한 이 칠정(七情)이 인간의 도덕론과 결부되어 오래 묵은 사상논쟁의 중심을 이루어 왔다. ‘四端七情論’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열띤 논쟁을 일으켜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세계적 논쟁사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 四端과 七情에 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을 둘러싼 8년간(四七論辨 기간만)의 뜨거운 논쟁이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 벌어진 이후로 수많은 성리학자에 의해 한국 성리학 이론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어 왔던 것이다. 기대승의 주기론(主氣論)은 율곡 이이에게 계승되어 한 흐름을 이루어 나갔다. 주리론(主理論)의 대가인 퇴계는 사실상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한 바, 즉 理가 發하여 氣가 이에 따르는 것은 四端이며, 氣가 發하여 理가 氣를 타는 것[乘]은 七情이라는 주장을 하여 퇴계학파를 이루었다.
四端七情을 중심으로 한 理氣論은 서양 사상론에서 설명되는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에 해당되는 것으로, 정치․경제를 포함한 사회적 사상 이념의 근본 문제를 이룬다. 그것이 문예학에 가 닿으면, 독일 작가 리히터의 치통을 더욱 심하게 만든 바 있다는 ‘형식과 내용’ 논쟁의 뿌리를 이루고, 하위 개념으로 말하면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하는 식의 쟁론의 근원이 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논쟁은, 김현이 지적했듯 사실상 가짜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빵만으로도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살 수 없는 모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참으로 오랫동안 이 낡은 문제를 가지고 여직 논쟁하고, 혹은 이념적 대립으로 투쟁하고 있는 것은 그 문제가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단은 무서운 유혹처럼 인간을 환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서 이른바 주정시(主情詩)와 주지시(主知詩)로 갈리는 그 근저에도 理氣論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시에 있어서는 ‘시’ 하면 ‘서정시’를 떠올리게 된 현시대에 있어서 주정시는 물론 주지시도 서정시의 범주에 드는 만큼, 현대시는 방법론에서 먼저 주기론적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모름지기 시는 정서[氣]를 통한 주리론적 이상세계를 암시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정시류가 흔히 지나치게 정서[氣] 과잉으로 흘러 시적 효과를 반감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대개 주지적 서정시가 보다 효과적 방법의 시적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𝟐
황영선 시인은 그의 첫 시집『우화의 시간』에서 낡은 칠정(七情) 가운데 가장 근원적 정서의 하나인 ‘슬픔’의 문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고래(古來)로 수많은 시인이 슬픔을 노래하거나, 슬픔의 정조(情調)를 그 핵심의 자리에 박아 놓았다. 일찍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편곡자 여옥의「공무도하가」를 비롯해서 고구려 유리왕의「황조가」, 통일신라기의 고승 월명사의「제망매가」가 그렇고, 여말(麗末) 원천석의 ‘興亡이 有數하니…’, 조선시대 임제의 ‘靑草 우거진 골에…’, 이명한의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 곧 나랑이면/님의 집 窓 밖의 石路ㅣ라도 닳으련만/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가 그렇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주요한의「불놀이」, 소월의「진달래꽃」, 만해의「님의 침묵」, 정지용의「유리창」, 서정주의「귀촉도」, 김영랑의「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춘수의「눈물」등등 유명 작품만 해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슬픔을 우려낸 시는 많다. 하지만 낡을 대로 낡아 익숙해져 버린 ‘슬픔’을 슬픔답게 노래하거나 격조 높은 시작품으로 형상화해 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지 않은 부위가 있다
오랫동안 등 뒤의 그늘을 보여주지 않던 그 사람도
쓸쓸한 뒷모습을 가졌다
누구나 응달에 쌓인 눈처럼
차디찬 고독의 시간을 거쳐 견고해진다
한사코 나를 먼저 배웅하고 돌아가던
따뜻한 가슴의 그 사람도
그만의 어쩔 수 없는 쓸쓸한 등을 가졌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내밀한 부위의 쓸쓸함
마음의 갈피를 휘돌아 나와 생즙처럼 우려진 뒷모습
그 쓸쓸한 등이 너에게로 나를 이끌었다
내 몸 어딘가에 뿌리내린 그리움도
그 곳에서 왔다
쓸쓸한 하루가 등 뒤에 있다
등 뒤의 그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
누구나 보이고 싶지 않은 뒷모습이 얼굴일 때가 있다
—「뒷모습」전문
인용시「뒷모습」은 황영선 시인의 시적 특성이나 기질을 종합적으로 암시해 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뒷모습’, ‘고독’, ‘쓸쓸함’, ‘그리움’이라는 시어들이 ‘희망 없이 살기’(「행운목」)의 시인 황영선의 특질을 잘 말해 준다. 실제로 그의 시집 전체를 읽어 보면 ‘쓸쓸함’과 ‘그리움’, 또는 ‘슬픔’이라는 말이 적잖이 쓰이고 있지만, 텍스트의 문면에 드러난 그 같은 시어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작품 자체가 구축하고 있는 존재의 근원적 인식에서 오는 쓸쓸함과 그 등 뒤에 묻어 있는 ‘슬픔’의 내밀성에 의해 진한 그리움과 쓸쓸함의 정조(情調)를 감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황영선의 시적 표현은 사상(事象)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생의 실존적 담론을 무게 있게 형상해 내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일상적 경험을 보편적 인식의 문제로 승화시켜 내는 시인의 사유체계는 삶에 대한 녹록잖은 깨침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준다.
겨울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찬물을 뒤적일 때마다
은박지처럼 구겨진 아침 햇살이 반짝인다
기름기가 윤활유처럼 배어나온 잿빛 머리칼과
청동 작업복의 그는
이 아침 빈 소주병이다
—「갈대」부분
마늘 감자 뿌리가 살찔 때쯤이면
강물처럼 야윈 노인네들이
새참에 구름 한 덩이 강물에 말아먹고
흙 속에서 갓 뽑아낸 발 그대로
그늘에 누워 바람을 쐬는 그림 같은 마을
—「석전리」부분
산다는 것은 저무는 것
일몰의 저녁이 오면
함께 저물어도 좋을 그리운 그 사람을 기다리다가
막차가 끊기면
어느 지붕 낮은 민박집에 엎드려
파도 소리에 잠을 설쳐도 나는 행복하겠네
—「바다가 있는 그리운 간이역」부분
이런 정도의 대목은 유별난 것을 찾아 고른 게 아니다. 황영선의 시 거의 대부분이 이처럼 진지한 성찰적 사유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대상(사물)과 본질(Idea)을 이원론적으로 분석하여 풀이할 수는 있어도 그 실제는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듯, 모름지기 시적 표현에 있어서는 이기 일원론적 경지의 구조로 형상됨이 바람직할 터이다. 그에 넉넉히 부응하는 가운데 황영선 시인이 투시하고 있는 ‘슬픔’은, 마치 스펀지에 흡수된 상태의 물기처럼, 담담한 어조로 직조해 놓은 시편들의 심층에 스며들어 있어 잘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러 시적 장치들, 이를테면 조사(措辭)와 어조, 구문율(構文律)과 사유의 특성 등을 잘 파악해야 슬픔의 물기를 제대로 감촉해 낼 수 있다. 황영선의 경우 겉으로 드러낸 ‘쓸쓸함’과 ‘슬픔’이라는 말이나 담담한 어조마저 슬픔의 깊이를 쉬이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시적 장치로 보인다.
𝟑
가난한 사랑이여!
슬픔은 시작일 뿐
얼마나 오래 웅크리고 있었을까?
어둠이 긴 혓바닥으로 그녀의 벗은 몸을 핥고 있다
눈물이 새나오지 않게
그녀가 그녀를 감싸 안고 있다
견고한 슬픔, 저 요지부동의 자세!
둥글게 몸을 말아 웅크린 채
우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나오길 기다리며
그가 석필로 돌을 문지른다
슬픔에 갇혀 버린 그녀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
그녀는 기다리고 있다
삐질삐질 눈물이 새나올 것 같은
깡마른 몸 가득
발효된 슬픔이 차 있다
‘오늘밤 저를 사 주세요’
‘슬픔을 나눠 드립니다’
—「Sorrow」전문
빈센트 반 고흐의 석판화「Sorrow」는, 창녀로 보이는, 가녀린 알몸의 아가씨가 두 팔로 감싼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다. ‘둥글게 몸을 말아 웅크린 채’ 석고처럼 요지부동인 알몸의 아가씨를 그린 이 그림은 그림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전연 없는 상태에서 보더라도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슬픔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황영선 시인의「Sorrow」는 광기의 화가가 그린 석판화「Sorrow」를 방불케 하는 언어의 연금술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이 긴 혓바닥으로 그녀의 벗은 몸을 핥고 있다’, ‘그녀가 그녀를 감싸 안고 있다’, ‘슬픔에 갇혀 버린 그녀’, ‘삐질삐질 눈물이 새나올 것 같은/깡마른 몸 가득/발효된 슬픔이 차 있다’ 등등의 빛나는 표현을 중심으로 짜여진 황영선의 시「Sorrow」는 작품의 소재가 된 그림을 세밀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조각하듯 빚어낸 솜씨에 의해 오히려 화가의 석판화「Sorrow」를 압도하고 있다. 이 처연한 슬픔의 이미지에서 이 만만찮은 시인이 밝혀 낸 ‘존재의 근원적 슬픔’은 역시 ‘둥글게 몸을 말아 웅크린 채/우화를 기다리고 있다/그녀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나오길 기다리며/그가 석필로 돌을 문지른다’는 대목이다. 시「Sorrow」는 화제(畵題) ‘슬픔’보다도 더 슬픈 그림의 정황이 ‘발효된 슬픔’의 시인 황영선을 만나 폭발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Sorrow」는 그대로 바로 ‘황영선의 슬픔’이었던 셈이다.
‘슬픔’은 인간이 갖는 꿈의 불가능성과 관련된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라지만 꿈을 이루고 나면 이루어 낸 만큼 이루지 못한 꿈과 이루어 내야 할 꿈, 나아가 이루어 내지 못할 꿈이 더 큰 산으로 다가와 가로막는 법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그 불가능성의 꿈을 예로부터 ‘우화(羽化)’의 이미지로 나타내어 왔다. 절망의 작가 이상(李箱)이 쓴 소설「날개」의 끝 장면,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죽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지가 띡슈내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길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잤구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잤구나.”라는 대목은 얼마나 눈물겨운 인간의 절망감을 말해 주는 것이던가. ‘슬픔을 나눠 드립니다’라는「Sorrow」의 마지막 시행이 시인의 세계 인식의 근본성을 함축적으로 말해 주는 듯하다.
시인은 지금 슬픔에 대한 말 걸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뒷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황영선 시의 종합편 격인 이 작품의 ‘그 쓸쓸한 등이 너에게로 나를 이끌었다/내 몸 어딘가에 뿌리내린 그리움도/그 곳에서 왔다’라며 말 걸기를 하지 않았던가. 정현종 시인에 의하면 ‘시 쓰기는 사람 세상과 세상사는 사람의 안부를 묻는 행위이며, 시는 필경 안부를 묻는 말’이다. 사람 세상의 안녕뿐만 아니라 만물의 안부도 항상 궁금해서 가만 있지를 못하는 것이 시인이고, 그런 시인에 의해 에둘러 안부를 묻는 양식인 시는 태어나는 것이리라. 황영선 시인은 자신의 비애사상이 자기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의 문제라고 믿고 공감의 말 걸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 저를 사 주세요’, ‘슬픔을 나눠 드립니다’(「Sorrow」), '누구나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 얼굴일 때가 있다’(「뒷모습」)라는 시적 언술은 시적 자아의 슬픔이 사람 세상의 보편적 슬픔일 것이라는 인식 위에서 타인(세상사람)에게 말을 걸고 안부를 묻는 소통 행위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견고한 외로움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에게 내장되어 있는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임을 확인하고, 허름하지만 정겨운「국밥집 풍경」이 그려 주는 ‘뚝배기처럼 몸과 몸을 맞대고/식구로 산다는 것은/얼마나 따뜻한 행복일까’라는 소박한 꿈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비 내리는 분황사 뜰에
막 핀 배롱나무 꽃송이들이
제 몸의 꽃빛을 풀어
시를 쓰고 있었지
받아 적기도 전에 지워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 말고는
이 저녁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가슴에 물기처럼 번지는 그것이 시가 아니었을까?
귀 열고 문 열어 두어도
나는 아직 캄캄한데
한 몸인 듯 편안해진 모습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있던 풍경소리
백 년도 못 견딜 한 생애
쓸쓸한 저녁이 찾아오면
흐린 불빛에 기대어 시를 읽다 잠이 들겠네
못다 읽은 시편들은 가슴으로 읽으리
—「옛 편지를 읽는 저녁」전문
이 세련되고 아름다운 시는 이번 시집의 ‘서시’격이면서 동시에 황영선적 ‘슬픔의 미학’을 가장 잘 갈무리해 낸 작품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에는 ‘슬픔’이라는 시어마저 쓰이지 않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물기를 머금은 스펀지처럼 ‘발효된 슬픔’이 내밀한 언어로 녹아 있는 가작(佳作)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천 년 고도 경주의 고즈넉한 옛 절 분황사를 찾는다. 마침 비는 내려 그 유명한 석탑이 있는 분황사 뜰의 배롱나무 꽃송이들이 시보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평지에 자리잡은 천 년 고찰의 창연(蒼然)한 뜨락과 여름 배롱나무의 선홍색 꽃송이들이 저녁 비에 젖는 그림 같은 풍경은 ‘받아 적기도 전에 지워지는’, 그러나 ‘가슴에 물기처럼 번지는 그것이 시가 아니었을까?’하는 환상에 젖게 한다. 시인은 그저 시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 말고는/이 저녁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흐린 불빛에 기대어’ 읽을 시를 얻었다. 오래 된 ‘풍경소리’는 ‘어둠과 빛’의 경계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적 경계마저 허물어 버린다. 길고 긴 전통적 역사의 시간과 대비되는 ‘백 년도 못 견딜 한 생애’는 천 년의 시간을 단숨에 건너뛰어 분황사가 전하는 ‘옛 편지를 읽는 저녁’의 쓸쓸함과 슬픔에 수렴된다. 시인은 과거의 시간과 흔적을 찾아 여행하면서 역사적 존재의 쓸쓸함과 슬픔의 내력을 살피며 과거의 사람 세상에 말 걸기를 하고 과거와 소통한다. 천 년 고찰 분황사의 저녁 뜨락 풍경은 그대로 과거가 그려 보여주는 한 편의 시이고, 과거의 세상 사람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전하는 한 장의 편지인 것이다. 유한한 개별 인간의 꿈은 무한 시간 속에서 허무와 슬픔의 집을 지을 수밖에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쓸쓸함이나 슬픔은 현존과 과거의 시간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𝟒
시인은 문명사적 시간의 뒤안길과 시간적 존재의 흔적을 찾아 여행하고, 그 시간의 쓸쓸한 흔적과 즐겨 대화한다. 시인은 「뒷모습」에서 ‘등 뒤의 그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라고 했다. 그가 돌아보는 것은 화려하고 웅장한 유적이 아니라 퇴락한 과거의 쓸쓸한 공터나 외지고 한적한 곳을 버텨 주고 있는 삶의 흔적들, 혹은 사라져 가는 것들의 그리운 풍경이다. 「고란사」「개운포에서 길을 잃다」「천마총 가는 길」「뒷모습이 아름다운」「황룡사지에서」「푸른 수염고래를 찾아」「고도 경주에서」「적멸보궁 가는 길」「실상사」등등은 과거의 자취를 찾아 대화하고 쓸쓸한 존재의 슬픔을 교감하려는 시인의 전통의식(역사의식)을 반영해 준다.
고도 경주에 와
지귀의 슬픈 사랑 얘기를 듣는다
겨울 철새들이 날아가는
첨성대 하늘 쪽
신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가면
지금도 웃는 기와 속
환한 그 얼굴 만나리
나 이 다음에 올 때에는
그대 사는 도솔 마을 입구
나무기러기로 내려앉아
천 년 세월을 함께 하리니
청동 거울 속 옛길을 걸어
나를 찾아가는 길
박물관 뜰 한 귀퉁이
눈도 코도 다 잃어버린
미완성 석불 앞에 서면
천 년 시간도 찰나처럼
노을 속에 저물리
—「고도 경주에서」전문
시인은 고도 경주에서 천 년의 바람소리를 듣고, 금관빛의 옛길을 따라 살아 숨쉬는 전설을 만나고(「천마총 가는 길」), 더는 잃어버릴 것도 추억할 것도 없는 쓸쓸한 황룡사 빈터에서 가만가만 얼굴을 만지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낀다(「황룡사지에서」). ‘이대로 또 천 년이 흘러갈’(「황룡사지에서」) 시간 여행,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사람 하나 그리워/그대 찾아 나선 길’(「푸른 수염고래를 찾아」)에서 ‘밤안개 스멀스멀 처용바위 전설 감싸는/사라진 포구에서/그대도 나처럼 길을 잃고’ 서성이는지(「개운포에서 길을 잃다」) 안부를 묻는다. 쓸쓸한 시간의 덫에 걸린 과거의 흔적들은 ‘눈을 감고 걸어도/생시인 듯 그대 알아볼 수’ 있지만(「황룡사지에서」), 아무도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슬픔(「푸른 수염고래를 찾아」)의 상징이다. 이 같은 전통의식 내지 시간의식은 모름지기 뜻있는 시인이라면 큰 수고를 통해서라도 지니지 않으면 안 될 기본 덕목이다.
T.S. 엘리엇에 의하면 이 역사의식은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은 물론,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의식도 포함하는 것으로, 작가로 하여금 그가 자기 세대를 골수(骨髓)에 간직하면서 작품을 쓸 뿐만 아니라, 호머 이래의 유럽 문학 전체(*세계문학)와 그 일부를 이루는 자국 문학 전체가 동시적 존재를 가지고 동시적 질서를 형성한다는 감정을 가지고 작품을 쓰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역사의식은 일시적인 것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영속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며, 또한 일시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식하는 것으로서 작가를 전통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작가로 하여금 시간 속의 자기 위치, 곧 자기의 현대성을 가장 예민하게 의식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고도 경주에서」는 이 같은 황영선 시인의 시간의식을 잘 함축해 보여주고 있다. 시의 전반부에서 화자는 이미 천 년 전의 도시 경주로 들어가 신라인들의 환한 얼굴을 만난다. 그리고는 ‘나 이다음에 올 때에는/그대 사는 도솔 마을 입구/나무기러기로 내려앉아/천 년 세월을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일시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을 일시에 의식하는 시간 감각으로서 천 년을 상거(相距)한 신라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는 까닭은 ‘청동 거울 속 옛길을 걸어/나를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과거성뿐만 아니라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문화사 전체를 꿰뚫는 예술가적 정신인 것이다. 그런 의식에서 ‘천 년 시간도 찰나처럼/노을 속에 저물리’라는 끝 연을 상정(想定)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간 속의 자기 위치, 곧 작가의 현대성을 날카롭게 의식하도록 만들어 주는 이 같은 역사적 시간의식은 황영선 시인의 튼튼한 작가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등 뒤의 그늘’ 그 쓸쓸하고 적막한 곳으로의 시간 여행은 ‘간이역’이나 ‘비둘기호 기차’, 또는 외진 산골 마을로 확산된다.
바다가 그리운 날 기차를 타고 가다
쓸쓸한 발자국을 내려놓기 좋은 간이역을 만나면
그 이름 묻지 않아도 나는 알겠네
—「바다가 있는 그리운 간이역」부분
마음 한 쪽을 열어놓아 맑은 시내가 흐르는
좌천, 이 곳에 오면
눈 맑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역사만큼 오래 된 나무가 초록 지붕을 드리우는
좌천역에 내리면
수평선처럼 느긋한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
—「좌천역」부분
그대도 나도 마음에서 미처 걷어내지 못한 철길이 있어
오늘도 한 량 가득 그리움을 싣고 달려가는 비둘기호
낡은 객차일망정 이대로 곧장 가면
눈썹달이 뜰 때쯤 그대 사는 마을에 닿을 수 있을까
—「철도박물관 뜰에 놀러 나온 비둘기호」부분
시인은 문명의 화려한 혜택이 아니라 시간의 폐허 속에 묻혀 가는 과거의 풍물과 추억과, 눈 맑은 사람들이 정지된 시간 속을 살고 있는 산골 마을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쓸쓸함의 시학, 그리움의 시학, 슬픔의 시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원천적 소재임은 물론 시정신의 표층구조이기 때문이다. 고속화 시대가 되고 기능주의 시대가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간이역과 비둘기호며 순수한 시골 마을에 거는 시인의 기대(애정)는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에는 삶의 애환과 내력, 사랑과 추억이 있으며, 맑은 영혼과 느림의 미학이 있다. 그런 존재적 가치의 소멸은 크나큰 아쉬움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오죽하면 시인이 ‘구 서울역 앞 광장에/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비둘기호를 달리게 하자’(「빛을 찾아서」)라고 하겠는가. 시인이 낡은 슬픔 같은 비둘기호, 우리 마음의 협궤열차를 달리게 하자는 것을 단순히 유물의 보존이나 추억의 유보 차원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속문명의 바퀴에 치여 신음하는, 출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살 길을 트고, 살아 있음의 숨길을 트고자 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시인에게 간이역은 ‘쓸쓸한 발자국도 내려놓기 좋은’ 곳이며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낡은 의자의 쓸쓸한 어깨에 그대가 손을 얹을 때’(「그리운 애너벨 리」), ‘막차가 끊기면/어느 지붕 낮은 민박집에 엎드려/파도 소리에 잠을 설쳐도’ 행복할 것만 같은 곳(「바다가 있는 그리운 간이역」)이다. 또한 ‘저녁이 오면/따뜻한 연탄난로 같은 사람이/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고, ‘지친 맘 내려놓아도 허물될 거 없는/오랜 친구가/수평선 같은 긴 의자를 내 주며/쉬었다가라 이끄는 겨울 찻집이 있어/(…)/이별이 눈 앞이어도 외롭지’ 않을 것만 같은 곳(「좌천역」)이다. ‘오늘밤엔 그리움이 반달로 돋아나/후미진 산골짜기까지’(「산내 일기」)를 찾아드는 일이나 ‘개울물 소리에 발소리를 묻으며/찾아든 산골짜기/(…)/전설처럼 깊어가는 밤/자고 나면 그리움은 한 뼘 키가 더 자라고/추억은 더욱더 무성해지는’ 산여동 골짜기의 고요 속에서 쓸쓸함을 견디는 일(「고요 속에 나를 내려놓다」)도 그리운 간이역의 정서와 다를 바가 없다. 시인이 즐겨 쓰는 ‘고요’ ‘쓸쓸함’ ‘그리움’ ‘추억’은 그의 성정과 시정신을 함축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지만, ‘꿈 없이 사는 법’에 익숙해져 버린 현대인의 무딘 의식을 향한 항의의 언어는 아닐는지.
𝟓
내 사춘기는 삼중당 문고 속에서 자랐다
내 첫사랑도 삼중당 문고판 크기였다
버스 차비 150원,
시오리 길을 두 번 걸으면
삼중당 문고 한 권이 되었다
검은 교복을 입고
국도 4번 길에서 가지가 뻗어나갔지
—「국도 4번, 세월은 가고」전반부
4번 국도는 충남 서천에서 대전-영천-대구를 경유하여 경주에 이르는 길이다. 황영선 시인의 고향인 영천에서 청송이나 경산, 경주 등지의 방향으로 갈라져 흘러가는 국도는 늙은 미루나무 가로수가 쓸쓸한 시골길의 운치와 신비감을 더해 주는 길이었다. 그 아름드리 포플러 가로수가 그리움처럼 구부러진 길을 지키고 섰던 4번 국도 위의 꿈 많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지나간 세월에 묻힌 사춘기가 아련히 떠오르게 마련이다. 시오리 등굣길을 더러는 버스를 타지 않고 차비를 아껴 구입한, 손바닥만한 삼중당 문고로 가난한 문학의 꿈을 키우며 걸었던 4번국도 미루나무 길은 ‘꿈 없는 어른’이 되어 버린 화자(話者) 세대들에게는 못내 그리운 ‘추억의 길’이 되어 하늘 끝에 걸려 있을 뿐이다.
‘삶의 변방을 달려 어딘가로 자꾸자꾸 길을 내고 싶던/국도 4번’ 어느 쓸쓸한 모퉁이의 한 꿈 많던 소녀는 지금 경주에 살며, 오래되어 낡을 대로 낡아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슬픔의 미학’을 천착하는 암팡진 시인이 되었다. ‘길이 없는 외딴 곳/나는 고립되어 있다/나는 나의 덫이다’(「우울」) 라는 절박한 표현에서 짐작되듯, 때로는 막막한 운명 앞에서 잠시 길을 잃을 때도 없지 않은 모양이지만, 힘겹고 쓸쓸한 세상에 ‘그래도 시가 있어 견딜 만하다’고 하니 그리 염려할 바는 아닌 듯 싶다.
「휴석」「뒤란을 갖고 싶다」「바람의 집」「방목이 그리운 날」「풋살구 같은 슬픔」「고독」「나의 옷걸이」등등 황영선의 또 다른 질감의 순도 높은 시편들을 따로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다. 자서(自序)를 통해 “독이 되지 않는 글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다.”라고 술회한 시인의 앞날이 자못 기대된다. ‘가슴에 먹먹한 울음 주머니가 있다.’는 토로는 시인이 일궈 온 ‘슬픔의 시학’을 떠받치고 있는 진정성을 드러낸 말일 터인데, 아무튼 시를 찾아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짐이라야 빈 몸뚱이 하나/달랑 한 칸/정선선 비둘기호 막차에 몸을 싣고//구절리 구절리 부르면/구절초 향기가 날 것만 같은/구절리를 찾아//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구절리를 아시나요」) 정선선 비둘기호를 타고 종착역을 찾아 길 떠나는 나그네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인다. 이젠 유물이 되다시피 한 비둘기호를 타고 오지 중의 오지인 정선선의 끄트머리 구절리 종착역을 찾아간다는 뜻은 삶의 막장을 향해 밀고 가려는 시인의 의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폐광된 지 오랜 막장/삶의 종착역 같은/(비둘기호의)구절리’는 따라서 한갓 강원도 정선 산골의 구절리가 아니라, 시맥(詩脈)의 끝장을 굴착하여 시로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는 시인의 꿈(의욕)이 창조해 놓은 새로운 공간(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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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제 약력>
경북 청송 출생. 중앙대 국문학과 ․ (同)대학원 및 우석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월간《시문학》시 천료, 계간《예술계》문학비평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제1회 일천만원 일지창작지원금 공모 당선. 제17회 중앙문학 대상 수상. 시집:『고비에서 타클라마칸 사막까지』『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노래』, 문학비평집:『한국 현대시의 정신논리』외 다수. 중앙대학교, 한국교원대 대학원, 백석대 대학원 외래교수 역임.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시현장〉․〈한국하이퍼시클럽〉동인. 계간《문예운동》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