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문학 3호, 여름호
* 기사 중 고딕체는 강위수 著書《나의 숨결》에서 그의 육성肉聲을 가려냈다.
* 나는 자신에게서 무엇인가 찾으려 끝없이 방황하는 유랑인의 품성 같은 것을 느끼는 때가 있다.
나의 고향, 지금은 휴전선 완충지대 지뢰밭 잡초 속에 묻혀 있는 판문점 근처 장단長端의 시골 마을, 두루뫼, 주산周山. 그곳에 살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 흙은 생명의 근원이고 우리 모두의 고향이다. 우리들의 고향 집 뒤뜰 장독대에 놓여 지던 옹기는 바로 흙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흙으로 빚어 만든 흙의 문화인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여유를 풍기는 옹기처럼 살아온 우리 선인들에게는 어른 공경하고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정이 있었고, 의를 지키고 부정을 삼가는 선비 정신이 있었다.
* 우리는 그동안 물질적인 풍요만을 쫓아 허겁지겁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문화에 바탕을 둔 인성교육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 고유의 전통과 문화, 자연을 훼손하고 잃어버린 데서 오는 문화결핍증의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 뒷동산의 할미꽃! 어릴 적 만 해도 내 사는 주변에는 야생화가 널려 있었다. 민들레, 할미꽃, 들국화, 붓꽃, 냉이, 나리꽃~. 그것들은 뒤울안 장독대 주변은 물론이고, 동네 주변의 논두렁이나 산허리 여기저기 자리 잡은 산소 주변에 숲이 우거져 그늘지지 않는 양지바른 곳에서는 어디서고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풀꽃들이었다.
뒷동산에 할미꽃
가시 돋는 할미꽃
…
싹 날 때에 늙었나
호호백발 할미꽃
나는 장성해서도 야생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1998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서편 지역에 첫 박물관을 개관할 때에도 박물관 주변 경사지에는 재래종 국화, 민들레 등 각가지 야생화를 가꾸었다. 특히 할미꽃은 당시에도 드물어서 주변 지역을 지나다 어쩌다 눈에 띄면 씨앗을 받아다가 심어보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2003년 박물관 터를 법원리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초리골로 이전한 후에는 할미꽃을 되살리려는 시도는 아예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그 후 할미꽃의 소멸은 점점 도가 심해져서 2천년대 초반에 와서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식물이 되었다. 그 후 2013년 봄, 그 할미꽃 무리는 근처 백여미터 주변까지 확대되어서 일종의 할미꽃 단지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렇게 그 꽃을 재배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는데 여기서는 왜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그것을 어떻게 유지, 확대할 것인가 고심하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보리밭 종다리! 내가 좋아하는 한국가곡의 하나는 박화목 시에 작곡가 윤용하가 곡을 입힌 <보리밭>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보리밭 사잇길을 걷다가 문득 발길을 멈추게 하는 선율, 그것은 초록 물결이 일렁이는 동심이기도 하고 가슴을 불태우던 젊은 날의 환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보기도 하지만 그 소리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고 석양에 노을 진 빈 하늘만이 가득하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이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노을 진 하늘만
눈에 차누나.
보리밭,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서정적인 곡을 만든 윤용하. 그의 생애는 40대 초반에 세 들어 사는 단칸방 판잣집에서 아사 상태로 이승을 마감했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도 신앙심과 순수성을 잃지 않았던 예술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 <보리밭>은 박화목 시인의 서정성과 어울려 더욱 애절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 도랍산, 내가 기억하는 그 산의 명칭은 도라산이 아니고 도랍산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6.25 전쟁이 나기까지 살았던 사천내(사천강)변 ‘두루뫼’ 마을에서 남쪽으로 건너다보이던 산봉우리, 그 아래쪽으로 군청과 면사무소가 있는 장단군소재지가 자리를 잡았다. 거기 내 다니던 장단초등학교에서 늘 접해야했던 산봉우리는 도라산이 아니고 분명히 도랍산이었다.
* 북편으로 내려다보이는 구릉과 들판 이곳저곳을 눈길로 더듬으며 그 옛날의 고향 마을을 떠올린다. 구릉처럼 야트막한 산줄기가 감싸 안 듯 둘러있어서 ‘두루뫼(周山)’로 불려지게 되었다는 동네 한가운데에는 큰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마을 어귀 방앗간을 지나오면 오리 길 초등학교를 오가는 길목에 대장간과 솥전이 있었던 두루뫼. 마을에서 산자락 텃밭을 끼고 마을 입구에 외롭게 자리 잡았던 우리 집 주변에는 곳곳에 민들레, 할미꽃, 산나리 등의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두루뫼 뒤편으로 멀리 보이는 산줄기, 그러나 지금은 북한의 군 요새가 되어 있을 덕물산, 노적산, 천덕산이 윤곽을 나타내고, 그 앞으로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임진강의 지류 사천내(사천강)가 희미하게나마 예전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두루뫼 마을의 흔적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 영화에서 박물관 운영까지~ 충남 대전에 정착한 피란민 출신에 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어렵사리 대학을 마치고 일거리를 찾아 헤매야 했던 나의 60년대 초반은 어려운 시기였다. 신문사, 방송국, 금융기관 등 신입사원 공모에 시험을 치르고 여기 저기 일자리가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이력서를 냈으나 어디 한군데 오라는 데가 없었다. 1964년 방송인 문시형 선생의 추천으로 방송작가로 입문하고 남산 KBS 사옥 1층 문예계 사무실을 드나들며 문예극장, 농가방송, 국악무대, 국군의 방송 등 닥치는 대로 단막극 대본을 쓰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건너편 KBS-TV에서 편성책임자로 있던 신윤생 씨에게 발탁되어 TV극본까지 쓰게 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당시 KBS-TV에서는 후일 TV문학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금요무대(1시간 방영물)가 방영되고 있었다.
* 1965년 1월 8일이 나의 작품 <산국화 설화>가 이남섭 연출로 첫 전파를 타고 이어서 <바다가 보이는 산정>, <새옹지마> 등의 작품이 방영된다. 이로 인해 그해 여름 난 농협중앙회로부터 새농민상 홍보영화 시나리오 집필 청탁을 받는다. 1961년 전국적인 거대조직으로 태어난 농협중앙회의 역점사업은 농민을 조합에 참여시키기 위한 지도사업이었고, 그것의 일차적인 사업수행매체가 KBS 라디오 등의 공영방송이었다.
* 직접 만들어 세운 야외 두루뫼박물관! 두루뫼(周山)는 내가 태어나 유년을 보낸 북녘에 두고 온 마을 이름이다. 민속생활사 전문박물관으로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우리 박물관의 전시 특징을 야외전시물 복원에 두었다. 곳곳에 너와집을 비롯하여 초가지붕을 씌운 방앗간, 헛간, 대장간, 솥전, 원두막, 상여막을 만들어 세우고, 그 주변에는 장독대, 터줏가리, 솟대, 장승, 서낭당 등 민속물을 복원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산간 경사지에 들어앉은 박물관의 지형 특징을 살려 산나리, 붓꽃, 할미꽃, 원추리 등을 심어 나름대로 야생화 조경을 했다. 그러자니 그것들을 매만지고 잡초 뽑아주는 작업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일해도 표가 나지 않는 그런 일거리가 산적하다. 그것은 누구를 시키거나 위임할 수도 없는 거의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