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나온김에 첫번째 전쟁 이바구를 써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과 다를수도 있으니 이점은 그냥 양해 부탁드립니다.)
1592년 정명가도를 외치며 침략했던 일본군이 신나게 진격해서 평양성까지 함락합니다....
그리고 북진할 찰라 일본군한테 2가지 변수가 생깁니다~
첫째는 명나라 5만군사가 참전하였고,
둘째는 한산도에서 일본수군이 대패 당합니다.
수륙병진으로 수군을 통해 보급을 받으며 진격해야 하는 일본군이 보급이 불안해지니 주춤합니다.
(한산대첩이 학익진 펼쳐서 이긴것도 중요하지만 일본놈들이 진격을 묶어버린게 아주 포인트입니다)
그러다 명나라가 평양성을 공격 일본군이 평양에서 철수합니다(명군이 길을 살짝 열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쯤에서 일본도 조선군사력이 만만치 않은데다, 조선을 이기고 명나라를 처들어간다는게 불가능하다는걸 깨닫게 됩니다.)
암튼 평양성 승리로 도취되서 군기 빠진 명나라군대를 일본군이 벽제관에서 이겨버러죠....
이 벽제관 전투가 상당히 임진왜란을 애매하게 만듭니다.
이때부터 골때리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벽제관에서 패한 명나라는 평양에 틀어박혀서 싸울생각을 안하고,
일본은 한양도 포기하고 아주 아주 뒤로 후퇴해서 부산에 그냥 틀어 박힙니다...명군이 악착같이 싸웠으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지만 결국 7년동안 길게 끄는 원인이 됩니다.
이때부터 1593년부터 97년까지는 전쟁다운 전쟁없이 일본은 경남주변을 약탈하면서 밍기적 거립니다.
양국이 주력이 평양과 부산에 있는데 뭔 전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일본놈들이 그냥 허송세월 하면서 그냥 있었냐?? 그게 아니지요...
명나라와 계속 외교전을 합니다... 외교전이 핵심은, 경기,충청,전라,경상 4도는 우리가 나머지는 니내가 ~~~
농경국가들은 보통 영토에 집착합니다. 농경국가들의 전쟁은 글자그대로 땅따먹기 입니다. 땅뺏아서 땅나눠주기....
일본은 명나라가기는 틀렸고 일본 사무라이들 다 대리고 왔는데 빈손으로 갈수는 없고 봉토라도 나눠줄수 있게 이 4도를 계속 요구하지요..
그리고 또하나 이순신 장군을위험해 처하게 하는 첩보문서가 하나 입수됩니다...
일본 침략의 선봉에 섰던 가토 키요마사 일명 가등청정 이 쓰시마로돌아 간다는 첩보가 들어옵니다.
이에 선조가 수군을 끌고 부산성으로 처들어가 가토를 잡아 오라고 시킵니다.
이순신 개인의능력은 무시하고 수군이 겁나 잘싸우고 강한지 알고 어이없는 명령을 내려버립니다.
문헌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부산진에 모여잇는 일본의 배만 700~1000척(추정치)정도인데
당시 조선 수군은 3도 합처서 150척(없는재산 탈탈 털어 만든..눈물의 배들)
거기다 부산포 본진에 있는 왜군 5~6만의 군대는??
당연 이길수 없는걸 아는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거절했는데...
원균 이놈아가 사고를 칩니다.... 내가 통제사 되면 ~~~ 부산~공격할수 있다~~ 하고 장계까지 올립니다...
결국 이 장계 덕분인지? 아님 이게 발목을 잡던지.... 결국 여러분이 아시는데로 됩니다.
근데 자 ~여기서 과연 원균은 정말 부산을 공격하면 이길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요??
원균도 바보는 아니었을겁니다.
이순신장군을 시기하는 마음에 장계까지 올리면서 그자리에 올라 섰지만 본인도 승산이 없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그래도 나름 무과시험 1등 먹었는데)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거제도 앞바다에서 밍기적 거리다 선조에게 장계를 날립니다~~~
수군의 힘만으로는 이길수 없으니 육군 한 30만 정도의 저글링으로 공격을 하면 수군 뮤탈리스크 150기가 날라가서 공격해야 한다고... 장게를 올립니다.(당시 명군이 5만 조선군이 2만이 채 안되는데, 30만은 택도 없는 숫자라는..)
당시 저글링이 총대장이 누구입니까?? 권율 도원수 아닙니까?? 열받은 권율이 원균 소환술을 펼칩니다.
야~ 니가 이순신보다 잘싸운다며?? 니네 뮤털 150기 끌고 그냥 들어가~~ 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사실 이부분에서 권율도 뻔히 안될거라는
알터인데 왜 그랬는지...그래서 개인적으로 권율 장군을 그리 존경하지 않습니다. )
결국 명령 불복을 할수 없었던 원균은 길을 떠났겠지요... 아마 예상하건데 한번 찔러보고 오자 그런심정으로 갔으리라 추축됩니다.
암튼 수군들 엄청 혹사시키면서 부산앞바다 까지갔다.. 적의 교란작전에 휘말립니다.. 먼저 앞서 갔던 경상 우수사 배설휘하의 대략 30여척의
전선을 잃습니다.
자 일단 부산포 앞바다까지갔고 ~일본군한테 지긴 했지만 손실도 뭐 복구가능수준이고 원균은 자! 이제 됐다. ~~~ 다시 우리 한산도로 고고!!!!
그런데 원균는 이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이전까지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게 쫒겨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놈들이 쫒아 오기 시작한겁니다. 평소같음 그냥 한번 붙어 보는데 부산포까지 가는동안 힘을 다 쏟아부었고, 처음 격는 패배에 전부 우왕 좌왕하면서 해매기 시작합니다.
퇴각을 하려면
이렇게 칠천량을 빠져나와야 하는데....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쫒기던 원균이 역사에 길이 남을 오판을 또 한번 합니다... 한참 도망치다 보니일본놈들이 안보이는 겁니다~~
일본군의 추격이 멈춘지알고 ~~~ 우리 거제도에서 물이나 마시고 좀 쉬었다 가자~~~ 그리고 배에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거제도로 상륙합니다.
그런데 이때 선봉에서 호되게 당한 경상우수사 배설(이름도 참~ 거시기함)휘하 남아 있던 12척은 쉬긴 뭘쉬냐 그냥 우리는 목적지 가서 쉬자 하고 통과해 버립니다.
(이12척이 명량의 12척이 되는거지요~~)
하지만 거제도에는 이미 상륙한 일본군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완전 방심중인 조선수군에 그날밤 기습공격을 합니다~~
칠천량 전투는 수군과 수군이 싸운게 아니라 일본 수군이 육지에 상륙한 조선 수군을 학살한 전투입니다~
일본군 피해 500명 조선군 2만명 전사및 부상 으로 괴멸 판옥선및 거북선 140척 침몰....
원균은 물론이고 이순신과 함께 나란히 싸웠던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전사합니다.
조선의 판옥선들은 최소 인원만 남아 있던 관계로 전투 인원도 없이 그냥 바다위에 둥둥 떠있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던게 명량해전 직전
칠천량 전투의 상황입니다. (사실상 해전이라 볼수도 앖습니다~~)
일본에선 갸들 기준으로 뽑은 임진왜란 삼대첩중 가장 큰 승리로 이 칠천량 전투를 칩니다.
단 하나 원균이 그나마 잘한게 있다면.... 이순신 장군을 죽여야 한다는 조정중신들 틈에서 지도 뭔가 불안했던지.. 죽이는데는 반대표를 던졌다는거....
첫댓글 왜국와 명국의 입장이...
왜국으로서는 조선땅 먹은 걸로 가신덜 분빠이 하는 것으로 쫑내려 했고
명국은 이이제이전법 명나라땅 침범 없으면 알아서 시마이 하는 걸로... 분할해 먹으려 했지요.
마치 1945년 조선땅 갈라먹은 미군과 소련군처럼.
덧붙여 당시의 군사체계상으로는 이순신 장군만큼 수군의 운영을 할 수 있는 인재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육군 운영하듯이 3차원적인 군사작전이 아니라는 것과 수군의 운영체제(관리)를 원균이 말아먹었다는 것이 문제입죠.
오랜동안 조선이 전쟁이란걸 안해봐서 그랬는지 몰라도, 용맹한 장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전략전술에 능한 지장은 정말 얼마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립만 하더라도.... 모래밭에서 기병 돌격을 시켰으니...
지금가지는 그냥 해전에서 진줄 알았었는데..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육지에서 살아 남은 병사들이 가까스로 배에 올라타긴 했지만 머 이미 승패는 갈린후였지요
재미있게 잘 풀어서 썼네. 임진왜란이나 6.25나 보면 비슷해.
임금이나 대통령이나 개뿔도 없으면서 아랫 것들 사탕발림에 녹아나 결국 나라를 망치지.
우리나라 하는거 보면, 만약 북한에서 정은이가 처들어오면 과연 일사불란하게 움직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엄청난 인명피해 입고...저기 한 대전쯤 내려가봐야 거기서 전열 정비할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어 보다 중요한게 역사를 지대로 배우는건데... 에효
칠천량 전투... 권율이 친히 공개된 자리에서 원균의 곤장을 치는 것으로 기억 하는데... 나름 원균이도 억울 하겠죠. 그리고 원균과 이순신 뒤에는 모두 정치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여간, 그리고, 전 명량해전을 왜 대첩이라 하지 않는지 궁금 했었는데.... 역시 대첩이라 하기는 좀 거시기 하더라구요. 사실 명량에서 이순신이 격파한 부대는 보급부대란 썰이 있더군요. 하여간 얼마전 읽은 칠천량 전투에 대해 다시 보니 반갑네요.
원균이 권율한테 곤장을 맞았다는 부분이 역사서마다 의견이 분분하더군요, 실제 때렸다 때리지는 않았다.... 암튼 권율에게 엄청 호되게 갈굼을 당한거는 확실한듯합니다. 유성용의 천거로 거의 8단계 가까이를 초고속 승진을 했으니 정치적입김이 당연 작용했겠지요. 명량해전에 대해서는 쇠사슬이 있어네 없었네 부터 133척이 아니네 맞네 등 논란이 많지요.. 문헌에 보면 조선소 여기저기서 30여척의 판옥선이 만들어 지고 있어서 조금 더 있다 싸우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13척 끌고 나가 사워야 할믄큼 상황이 급하긴 한거 같습니다.계속해서 전라도를 침입하려면 보급이 이루어져야 하니 보급부대란 설도 타당하네요
얼마전 영화 "노량"에 대한 글을 봤었는데, 명량해전의 의미는 칠천량 전투 이후 우리 수군이 괴멸 된 것으로 알고 활개 치는 왜 해군에 대해 다시금 긴장하고 활개치지 못하게 한 점이고, 보급부대 외 실제 전투부대와 결판을 낸 노량해전이 정규 해전이란 주장을 하더군요. 노량에서는 승리하긴 했어도 조명 연합군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던 전투란 해석을 하더군요. 그리고 한산대첩은 재해권을 놓고 격돌 했고 해전의 규모도 가장 컷고, 의미도 크고, 상대 함선의 손실도 66척의 전투함으로 그 의미가 있어 대첩으로 인정 받는 것이라 하더군요. 명량에서는 33척으로 의의도 작을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