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혜선 / 자연 친화와 깨달음의 시세계-이신경 시집≪짚베옷에 흘린 눈물≫ / ≪한강문학≫ 31호 권두평론
이 혜 선 _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자연 친화와 깨달음의 시세계
- 이신경 시집 《짚베옷에 흘린 눈물》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이신경의 시집 《짚베옷에 흘린 눈물》에는 서울을 떠나 귀촌해서 살면서 농촌과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쓴 자연 친화와 깨달음의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치열한 도회생활을 떠나서 ‘정문골’에 귀촌한 시인의 눈에 비치는 자연은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가운데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귀중한 객관적客觀的 상관물相關物이다.
“예술은 삶의 비평” 이라고 주장한 ‘매슈 아놀드’의 말처럼,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 준다”는 ‘알랭 드 보통’(《불안》)의 말처럼, 자연은, 삶은, 그대로 있을때는 그냥 자연이고, 그냥 일상의 삶이지만 시인의 예민한 감성과 깊은 사유思惟로 읽어낼 때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추체험追體驗하고 깨닫게 해 준다.
이처럼 이신경 시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보아넘기는 평범한 농촌생활과 자연 속에서, 시인만의 혜안으로 삶의 지혜를 깨달아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와 동시에 시인은 자기성찰과 함께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과 측은지심, 그리고 육친과 가족에 대한 사랑, 그에 더하여 조상을 섬기며 자녀들에게 뿌리를 존중하게 하는 교육을 실천하는 등, 삶의 전반적인 양상을 변용(déformation)시켜 감동적인 예술작품으로 펼쳐준다.
이신경의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영화 〈일포스티노〉(IL POSTINO)에 등장하는 섬[島] 청년 ‘마리오’를 떠올렸다. 작은 섬에서 어부의 아들로 자라난 순박하고 평범한 청년 마리오의 눈에 섬은 그대로 섬이고, 바다는 그대로 바다이며, 특별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는 일상적 환경일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온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에게 시를 배우고 나서, 마리오는 모든 것을 시적인 감성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가 살아 온 환경과 자연에 새롭게 눈 뜬 마리오는 시인의 눈으로 섬의 아름다움을 소리로 기록해 나간다.
이신경 시인이 살고 있는 정문골도 우리나라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시골이며 평범한 농촌이다. 그러나 그 평범한 농촌과 평범한 자연이 시인의 감성과 사유와 만나면서 깨달음과 사랑과 위안을 주는 귀중한 역할을 새롭게 부여받아 의미의 꽃을 피운다. 삶의 비평이며, 자연의 비평인 이신경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본다.
2. 농촌의 삶과 자연 친화
이신경 시인은 귀촌 생활 속에서 만나는 농부의 삶에 주목한다. 농부가 밭에서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기쁨과 더불어 기다림의 미학을 노래한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
논밭은 새벽을 연다
엊그제 심은 것 같은데
벌써 감자 수확이다
거두는 이 기쁨 누가 알랴
한 개의 과일 속에 씨앗은 셀 수 있으나
씨 속의 과일은 헤아릴 수가 없다
씨앗은 정직하다
땀 흘린 만큼 얻는다
농사는 기다림이다
초승달 둥글어 가는 모습 아름답듯
우리 인생도 그래야 한다.
-〈저무는 날에〉 부분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들으며 새벽을 여는 논밭, 씨앗은 정직하여 “땀흘린 만큼” 보답해 준다. “한 개의 과일 속에 씨앗은 셀 수 있으나/ 씨속의 과일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여, 한 해의 눈에 보이는 수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펼쳐 나갈 미래의 새 생명,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열어두고 있어서 시가 더 깊어졌다.
“흙에서 시작한 농부의 삶”, 기다림 속에 씨를 심고 기다림 속에 여물고 익어가고 드디어는 저물어가는 농부의 삶을 자연이 주는 지혜와 깨달음 속에 잘 형상화하고 있다.
“땅속 보물 찾는 호미 신이 난다/ 흙 속 아이들 보니/ 탯줄에 매단/ 자식들 생각에 가슴이 뛴다// 검은 홑이불 걷어차고/ 줄줄이 끌려 나온 녀석들/ 세상구경 낯 설다// 괜찮아 못생겨도 고맙다/ 올망졸망 살찐 개구쟁이// 구름속에 숨어있는 초승달같이/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들/ 너희들 속에서 우주를 그려 본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하지감자 쪄내며 나의 꿈을 뒤적인다”
-〈감자〉 부분
하지가 가까워오면 “땅 속 보물” 인 감자를 캔다. 검은 홑이불 걷어차고 끌려나오는 감자를 보면서 “탯줄에 매단/ 자식들 생각” 을 떠올린다. 더 나아가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들” 속에서 생명의 순환과 우주의 섭리를 깨닫는다. “나의 꿈”도 탯줄이 되어 함께 퍼져 나갈 것이다.
“숲속에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 있다// 영혼의 길// 매미는/ 땅속에서/ 7년을 수행하고// 세상에 나와/ 짝을 찾아 사랑하고// 육신을 버리고// 길 따라 하늘에 오른다.”
-〈하늘로 통하는 길〉 전문
귀촌생활에서 얻는 좋은 점은 자연과 농촌과 농촌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영혼의 길”을 발견하는 일이다. “길 따라 하늘에” 오르는 길은 매미의 길이지만, 시적 화자를 비롯하여 사람들 모두가, 생명 가진 모든 자연이 궁극적으로 가야 하는, 가지 않을 수 없는 “영혼의 길” 의 상징적 표현이다.
“모든 생명체를 끌어안고 잠든 숲// 그곳에 가서/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두 눈을 감고 흰 구름 속으로 날아보자// 초록 베개에 얼굴을 부비면/ 숲이 자장가 부른다// 인자한 어머니 품속 같은/ 숲이 나를 부른다”
-〈숲이 부른다〉 부분
“산그늘에 앉아 푸성귀 뜯는다// 보리밥 양푼에 비벼/ 허기 채우고 숲속을 걷는다// 동쪽으로 십 분쯤 걷다 보면/ 옹달샘이 그곳에 있다// 다람쥐 기다리고 있겠지/ 노루 녀석 다녀갔을까.”
-〈삶의 여유〉 전문
숲은 언제나 그곳에서 인자한 어머니 품을 열고 “나”를 부른다. 시적 화자는 그 부름에 이끌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산촌으로 돌아온다. 귀촌 삶의 여유와 행복을 누린다. “모든 생명체를 끌어안고 잠든 숲”에서 하늘이 되고 흰 구름이 된다. 〈삶의 여유〉에서도 제목 그대로 산촌이 베푸는 자연 속에서 여유를 누리며, 다람쥐와 노루와 함께 자연에 동화同化되어 사는 동화적童話的인 삶을 그리고 있다.
“감나무 끝에 까치밥 몇 개/ 찬바람에 가지 움켜쥐고 매달려 있다// 홍시를 쪼아 먹는 참새/ 젖을 빠는 아기/ 꽁지 파르르 떨면서 잘도 쫀다// 흔적만 남은/ 감나무 젖꼭지에서/ 할머니 얼굴 떠오른다// 조건 없이 베푸는 할머니 사랑.”
-〈할머니 생각〉 전문
“산등성이 골짜기 이곳 저곳 숨어서/ 다래순 취나물 두릅들이 봄을 내준다// 봄나물 채취하는 데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 뿌리째 뽑지 말고 한두 잎 남기고 채취한다/ 내년에도 우리 다시 만나야지// 무쇠솥에 나물을 데치니/ 앞산이 우러나고/ 뒷산이 들어앉는다”
-〈망태기 속 봄처녀〉 부분
〈할머니 생각〉에서는 자기를 다 내어주는 자연의 사랑과 그 사랑 속에 흡족하게 자라나는 생명을 조건 없이 베푸는 할머니 사랑을 환치시키고 있다. 이처럼 조건 없이 아낌없이 내어준다고 해서 인간은 그 자연을 송두리째 앗아 와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시인은 〈망태기 속 봄처녀〉에서 자연에 대해 배려하고 자연의 생명을 존중하는 우리 민족의 따뜻한 헤아림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나물을 채취할 때 뿌리째 뽑지 않고 한잎 두잎 남겨두기, 너무 어린잎은 뜯지 않기, 익지 않은 열매는 따지 않기, 까치를 위해 감나무가지 끝에 홍시 몇 개 남겨놓기를 노래한다.
인간만이 최고이며 인간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은 희생해도 된다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모든 생명과 자연과 삼라만상과 공존하며 배려하며 살아온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전통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무쇠솥에 나물을 데치니/ 앞산이 우러나고/ 뒷산이 들어앉는다” 등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혼연일체, 마음을 헹구는 성찰의 주제와, 주제를 형상화하는 표현이 돋보인다.
“보랏빛으로 다가서서/ 자줏빛으로 유혹하고/ 슬그머니 목을 감는다/ 한 번 휘감으면 끝장을 낸다// 이제는 도로까지 내려와서/ 손을 흔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너의 끈질긴/ 생명력에 유혹 당한다// 돌아오는 길에/ 칡꽃 한줌 따서 찻잔에 녹인다/ 보랏빛 유혹을 마신다”
-〈보랏빛 유혹〉 부분
“강인한 생명력/ 고단한 삶을 끌고 능선 넘을 때/ 우리에게 희망을 준 계란 꽃/ 지구촌 굶주린 아이들에게/ 달걀프라이 하나씩 나누어 주자// 너의 손을 잡고 이름을 부른다/ 이제 너를 희망꽃이라 부른다”
-〈희망꽃〉 부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젖 먹는 힘으로/ 파란 하늘을 향해 오르자// 밀어주고 끌어줄 때에 올라가야 해/ 허공을 잡고 꿈을 포기해서는 안 돼// 비바람 휩쓸고 간 아침/ 오월의 장미”
-〈여왕이 잠들어 있다〉 부분
화자는 자연이 보여주는 생명력과 희망을 “칡”과 “망초”와 “덩굴장미”등 도처에서 읽어내고 그 생명력에 유혹 당한다. “칡꽃 한 줌 따서 찻잔에” 녹여 보랏빛 유혹에 즐겨 침잠한다. 또한 “망초”라는 이름 대신 “희망꽃”이라 부르면서, 지구촌 굶주린 아이들의 생명이 되고 양식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기원한다. 〈여왕이 잠들어 있다〉에서는 덩굴장미에게 “젖 먹는 힘으로/ 파란 하늘을 향해 오르자”고 격려한다. 허공을 잡고 오르더라도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또한 시인은 산촌에서 “문을 두드리”고 자꾸만 부르는 봄에게 이름 불리어(〈산촌의 봄〉) 자연과 동화되고 “두근두근 내 마음 속에” 봄을 세운다. “초록 물감 찍어 그려놓은/ 오월 한나절”에 “오늘은 어떤 시를 불러 올까”하고 “서정의 시 군락지”인 자연 속에서 종달새와 시를 노래한다.
이신경 시인은 주제의 형상화뿐만 아니라 표현 면에서도 다양한 개성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성공한 작품을 보여준다. 〈종달새와 시를〉에서 “개울 건너 찔레꽃/ 볼 부벼대는 소리 향기롭다”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의 묘미를 살린다. 〈빗방울〉에서는 의인법을 통한 빗방울의 생동적인 묘사와 사랑 가득한 동화적 표현, 〈가을이 그려놓은 풍경화〉에서는 가을로 하여금 하늘 캔버스에 풍경을 그리게 하는 의인화 기법, 〈유월의 숲〉에서는 “조그만 연두아이 사춘기 지나/ 성년으로 달리고 있다”라고 인간의 성장으로 비유한 뛰어난 의인화 기법, 〈봄은 도둑고양이처럼〉의 감각적 표현, 버들잎 타고 내리는 봄비를 통해 그려내는 “버들가지 음표”의 독특한 표현(〈버들가지 음표〉) 등 여러 편에서 이신경 시인만이 가진 개성적 표현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생생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3. 자기 성찰과 사회의식
이신경 시인은 자연을 보면서 곳곳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면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뒤에 오는 후손에게 이정표가 되기를 염원한다.
“또박 또박/ 매화꽃은 들고양이 발자국/ Y자는 아기 산토끼/ V자는 고라니/ 산새들 종종종 ㅅ자로/ 댓잎을 찍어놓았다// 거친 반항아 멧돼지가/ 성난 파도를 밀고 갔다// 나의 발자국/ 어떤 발자국을 남겨야 할까”
-〈눈 위에 발자국〉 부분
“뒤돌아보니/ 비틀 베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다// 부끄럽고 아쉽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 내가 디딜 발자국/ 후손에게 이정표가 됐으면 좋겠다”
-〈흔적〉 부분
시인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들고양이, 아기 산토끼, 고라니, 산새들, 멧돼지 등 제각기의 개성이 뚜렷한 발자국을 보면서, 자신은 어떤 발자국을 남겨왔는지, 앞으로 어떤 발자국을 남겨야 할지,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에 잠긴다. 〈흔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발자국을 뒤돌아 살피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후손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직설적인 진술 속에 더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창공을 나는 새가 틈틈이 나래를 접고/ 나뭇가지에 앉아 쉬는 것은/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함이다// 쉼표 없는 악보/ 좋은 음악이 될 수 없지// 나이 먹을수록 쉼의 골은 깊어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간은 많아진다// (중략)// 작은 쉼표하나 찍고 가자”
-〈쉼표〉 부분
“거센 파도에/ 깎이고 뒹구는 몽돌이 노래 부른다// 나는 물이 될 거야// 나는 바다가 될 거야.”
-〈젊음의 노래〉 전문
흰 구름이 산마루에 앉아 쉬고, 바람이 꽃잎에 앉아 숨고르기 하는 것은, 새가 나래 접고 나뭇가지에 앉아 쉬는 것은, 모두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함이다", 쉼표 없는 악보가 좋은 음악이 될 수 없듯이 힘겨운 삶을 잠시 내려놓고 쉼표를 찍노라면 더 좋은 인생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통하여 얻는 “잠깐 멈춤”의 삶의 지혜가 빛난다.
〈젊음의 노래〉에서는 “몽돌”이라는 자연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자연의 꿈을 “나”의 꿈으로 환치시켜 놓고 있다. 몽돌이 꿈꾸는 미래는 곧 시적 화자가 꿈꾸는 미래이며 모든 “젊음”이 꿈꾸는 미래이다.
“새벽 가르는 닭의 울음소리/ 산골이 눈을 뜬다// 불을 밝히고 올리는 새벽기도/ 인묵印黙의 목탁소리// 나는 신에게/ 이 땅에 평화를 주소서/ 소외받는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소서 // 우리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기도한다”
-〈새벽기도〉 부분
“새해 첫날이다/ 희망을 품고 물들어 오는/ 동쪽 하늘 향해/ 나의 창문 활짝 열어 둔다// (중략)// 희망의 길/ 찾아가는 새떼처럼/ 이 아침에 날개를 단다// 새해를 품어 안는다”
-〈해를 품다〉 부분
여명이 창문을 두드리는 시간, 새벽을 가르는 닭의 울음소리에 일어나 불 밝히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옆에 있는 동반자의 목탁소리에 맞추어 함께 올리는 소박한 성찰과 참회, 기도의 힘이 모여서 그 선한 기운으로 세상은 평화를 유지하고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돌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선한 기운이 모여서 해마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가슴에 품고 벅찬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새해를 품”는 것은 중의적 표현으로, 하늘의 태양을, 그 기운을 품는 것이며 우리 앞에 펼쳐진 새해, 새날을 품는 진취적이고 희망적인 발걸음의 시작을 의미한다.
“소리를 잃어버린 세상/ 두 개의 귀가 모자라/ 세 개의 귀로 세상 이야기를 듣는다// 몸짓과 표정을 보고/ 소리를 읽어내는/ 농아는 세상과 소통한다// 이어폰을 낀 젊은이들/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세상 소리를 차단한 달팽이관/ 그 섬 속에 섬이 자리를 잡고 있다// 보청기는 세상을 연결하는 창/ 답답한 노년층의 귀”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부분
“눈이 부셔 눈을 떴다/ 빛 하나가 창틀 사이로 새어 들어와/ 고양이 눈으로 얼굴을 핥고 있다// 가시에 찔린 나의 삶/ 어쩔 수 없이 맺은 어두운 인연/ 그렇지만 내 몸에 맞게 재단해 입고 나니/ 위로의 안식처가 되었다/ 습기와 곰팡이 냄새도 익숙해졌다// (중략)// 언젠가 내게도 꽃피는 희망의 계절이 오겠지/ 더 높은 곳을 향해 기지개를 켜자// 바닥이 있어 일어설 수 있다”
-〈바닥이 있어 일어설 수 있다〉 부분
시인은 자신을 성찰하며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는 동시에, 사회의식을 지니고 어렵고 힘든 이웃의 삶에 눈길을 보내고 위무하며 희망을 노래한다.
위의 시에서는 몸짓과 표정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소리를 읽어내는 농아와, 세상소리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채 자신의 섬 속에서 표류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소리를 잃고 보청기로 세상과 연결하는 노년층 등을 대비하여 그들의 삶을 문제의식으로 보여주기 한다.
〈바닥이 있어 일어설 수 있다〉에서는 반지하 단칸방의 삶이지만 “내 몸에 맞게 재단해 입고”, “내 마음에 불을 켜자” 고 희망을 노래한다. “가난한 자의 겨울은 위태로운 외줄타기”(〈겨울밤을 너에게 맡긴다〉)이지만, 바닥을 치면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작품이다.
“유모차에 파지 싣고/ 고물상으로 들어선다// 가쁜 숨 몰아쉬며 굽은 허리펴고/ 하늘을 쳐다본다/ 오늘은 얼마를 받을까// 동전 몇 닢/ 손에 쥔 따뜻한 온기// 피곤한 몸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바람이 스쳐간 눈물자국/ 눈 밑이 빨갛게 헐었다// (중략)// 처마 밑에 유모차 세워놓고/ “고생했다 어서 쉬어라”/ 할머니는 고물TV 앞에 하루를 부린다”
-〈할머니의 유모차〉 부분
“부표 하나 떠 있다/ 가슴에 닻 하나 내리고// 나를 버린 날들/ 신음하는 파도 소리// 잊지 않으려는 저 바깥의 힘/ 세상 이기지 못하고/ 섬으로 찾아든 몸”
-〈소록도〉 부분
유모차나 리어카에 파지를 싣고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등 노년 빈곤의 삶이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일본에서는 노년층이 7%일 때부터 종합노화연구소를 설립해서 노년문제, 노년의 건강 등에 대해 연구하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2026년에 노년층이 20%의 초고령 사회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는데도 아직 노인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소가 없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조선일보2022년 7월 13일자).
할머니는 하루 종일 거리와 상점을 떠돌며 폐지와 박스를 주워 모아 “오늘은 얼마를 받을까” 기대해 보지만 손에 쥔 것은 “동전 몇 닢”이다. 눈 밑이 빨갛게 헐어서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그래도 처마 밑에 유모차를 세워놓고 “고생했다. 어서 쉬어라” 동반자에게 위로의 눈길 보내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마치 김종삼의 시 〈묵화〉에서의 물 먹는 소와 할머니의 모습처럼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소통의 강으로 서로 치유하는 정을 느끼게 해준다.
시인은 〈소록도〉에서도 “세상 이기지 못하고/ 섬으로 찾아든 몸”의 신음을 소환하여 소록도가 상징하는 사슴을 통해 측은지심을 보여주고 있다.
“산과 들도 가마솥이다/ 내 마음도 가마솥이다// 부채로는/ 너를 당해낼 수 없어//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을 노하게 한 죄/ 자연에게 용서 구한다”
-〈용서를 구한다〉 부분
하늘을 노하게 한 인간들이 부메랑으로 받아야 하는 기후위기, 온난화 현상은 “산과 들도 가마솥이다/ 내 마음도 가마솥이다”, 답이 없는 탄식을 이끌어낸다. 시인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자연에게 용서를 구”하며, 인간이 망쳐가는 자연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4. 육친애와 조상 섬기기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신경 시인도 육친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부모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을 섬기는 깊은 정신의 아름다움까지 시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 우헌 이영순, 우리 아버지”/ 허공을 쪼는 딱딱딱/ 공명소리// 내 나이 여섯 살 때/ 아버지 먼 길 떠나실 적에/ 짚베옷에 흘린 눈물/ 상여 뒤따르는 철부지 어린 딸// 못 잊어 눈에 밟혀/ 어찌 그 길 가셨습니까// 남계천 푸르게 흐르는/ 이 봄날 보리밭에// 부모은덕 못다 갚는 불효 여식/ 흰 구름 한 자락 끌어다 하늘길 내고/ 천도의 길 닦으오니 극락왕생 하옵소서”
-〈짚베옷에 흘린 눈물〉 부분
시인의 나이 여섯 살 때 먼 길 떠나신 아버지이지만 시인은 아버지가늘 그립다. 시조시인으로 한의사로 살다 가신 아버지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아버지의 문인 기질과 DNA를 물려받았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시인은 아버지 산소 밑에 와서 손녀와 봄나물을 캐면서 아버지의 부름 소리를 듣는다. 여섯 살 때 영 이별한 아버지이기에 부모은덕 갚을 길 없는 아쉬움 속에 다만 극락왕생을 기원할 수밖에 없다. 각주에 지사로서, 한의사로서, 시인으로서의 아버지 삶을 기록해서 아버지를 기리는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청솔가지 타는 내음/ 아궁이 앞 불빛에/ 어른거리는 어머니 고운 얼굴// 부지깽이로 가갸거겨 써가시며/ 그렇게 배웠느니라 하시며/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셨던 어머니// (중략)// 어머니 정문골 토굴에/ 저녁연기 피어오릅니다”
-〈저녁연기〉 부분
“거북등손 우리 엄마/ 굵은 손마디에 앉은 싯누런 쇳물// 시멘트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검붉은 핏줄/ 호미자루 잡은 손에 핀 옹이꽃// 로션한 번 바르지 못하고/ 찬바람과 흙에 닳고 닳아/ 지문조차 찾아볼 수 없는 손// 무엇이 부끄러워 감추셨지요// 거친 손톱에 봉숭아물 들여 드리자/ 저승길이 밝아진다고 웃으신다.”
-〈엄마의 저승꽃〉 전문
어머니는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로 “가갸거겨”를 쓰고, 그렇게 배웠다고 하시며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셨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땔 때면 그 어머니 얼굴이 어른거린다. “눈물 콧물/ 옷소매에 배어나는 그리움” 안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정문골 토굴”에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시간은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는 시간이다.
〈엄마의 저승꽃〉은 “거북등손 우리 엄마”, “찬바람과 흙에 닳고 달아/ 지문조차 찾아볼 수 없는 손”으로 어머니의 고된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 “거친 손톱에 봉숭아물 들여 드”리면 “저승길 밝아진다고 웃으”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며 시인도 마주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보름달 소나무 숲 위로 걸어온다
쪽진 머리 달빛 곱게 차려입고
어머님이 걸어오신다
넉넉하고 인자한 모습 매운 손맛
차례상 준비하며 따라 부르라 하셨던
어머니의 노래
조율이시棗栗梨柿, 홍동백서紅東白西,
생동숙서生東熟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고서비동考西妣東, 반서갱동飯西羹東
차례상 풍년이다
손주들 부모은중경 독송하며
조상님 음덕 기린다
며느리 앞세워 뜰에 나가
임자 없어 따라오신
고혼들께 축원 올리니
중천에 우리 어머님이 환하게 웃고 계신다
-〈달맞이〉 부분
시인은 조상님을 모시는 추석 명절에 어머님과 함께 차례상 준비하면서 따라 부르며 배웠던 차례상 진설 노래를 생각한다. 차례 지내면서 손주들에게 〈부모은중경〉을 독송하게 하여 조상님 음덕을 기리고, 조상과 뿌리에 대한 교육이 저절로 스며들게 한다. 내 조상 섬기기에 그치지 않고 임자 없는 고혼孤魂들까지 살피는 깊은 배려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이러한 가정교육 속에 자라난 후손들은 아무리 나쁜 환경에 처해도 근본을 잃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갈 것이다.
학교 교육이 지식 위주로만 흐르고, 사회 교육에는 기대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제1의 교육자는 부모라는 교육관을 지니고 가정교육에 더욱 신경 써서 실천해야 할 필요성을 각성시켜 주는 작품이다. 많은 독자들이 교훈적으로 읽고 그 정신만이라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솔바람 시원하다/ 평상에 마주앉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달빛 내려와 밥상에 앉는다/ 숯불에 구워 낸/ 짭조름한 자반고등어/ 보리밥에 오이냉국이 감칠맛이다// 인묵거사/ 막걸리 한잔에/ 이백의 장진주將進酒 뒤척인다// 금술잔 비워두고 어찌 달을 대하랴/ 하늘이 낸 나의 재량 반드시 쓸모가 있을지고// 달도 한잔 나도 한잔 당신도 한잔// 술잔이 넘친다.”
-〈술잔이 넘친다〉 전문
육친의 사랑 위에 더 진한 부부 사랑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작품이다. 평상에 마주앉은 저녁 밥상에 달빛이 내려와 함께하고, 막걸리 한잔에 흥이 오른 ‘인묵거사’는 ‘이백李白’의 〈장진주〉를 읊는다. “금술잔 비워두고 어찌 달을 대하랴/ 하늘이 낸 나의 재량 반드시 쓸모가 있을지고” 정신적 여유를 즐기며 풍류가 있고 격조 높은 시인 부부의 삶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술을 즐기는 풍류 속에서도 시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이백李白’처럼, 두 시인도 ‘나의 재량’을 쓸모 있게 쓰겠다는 소명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거위 한 마리 호수를 지키고 있다//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지치고 힘들 때/ 나는 당신에게 기대고/ 당신은 나에게 기대는// 한 잔의 커피 같은/ 우리 사이/ 인생 참 무상하다// 겨울 찬 서리 내리는/ 벤치에 앉아/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겨울꽃 바라본다”
-〈겨울 호숫가 벤치〉 부분
부부는 겨울 호숫가를 거닐다가 혼자 호수를 지키고 있는 “거위 한 마리”를 보면서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인생 참 무상하다”는 탄식이 나온다.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기대고/ 당신은 나에게 기대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겨울꽃”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5. 마무리
이신경의 시집 《짚베옷에 흘린눈물》에는 서울을 떠나 귀촌하여 살면서 농촌과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쓴 자연 친화와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의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보아 넘기는 평범한 농촌생활과 자연 속에서, 시인만의 혜안으로 삶의 지혜를 깨달아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자기성찰과 함께 측은지심으로 어려운 이웃에 대해 관심기울이며, 육친과 가족에 대한 사랑, 그에 더하여 조상을 섬기며 자녀들에게 뿌리를 존중하게 하는 교육을 실천하는 등, 삶의 전반적인 양상을 감동적인 예술작품으로 펼쳐낸다. 이신경 시인의 이러한 시세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높고 깊게 확장되기를 기원한다.
-------------------------------------------------------
이혜선
경남 함안,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집:《흘린 술이 반이다》, 《운문호 일》, 《새소리택배》, 《神한마리》 외,
저서:《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 《문학과 꿈의 변용》, 《이혜선의 명시산책》, 《아버지의 교육법》 외, 《시문학》등단(1981),
윤동주문학상, 대한민국예총예술문화대상, 한국현대시인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 평론상 외,
동국대 외래교수, 세종대 강사, 동국문학인회, 시문학문인회, 강동문인회 회장(역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현대향가 동인,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유튜브:이혜선시인 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