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정리가 끝나면 옮겨 가실수 있도록 열어놓겠습니다
(8) 1961년 5.16 혁명 전후의 군악대원 모집 정리중임
군악1기 (1957.10.입대) 군악2기(1958.06.입대)가 전원 하사관으로 임명되어 복무를 했고 군악3기
(1959.04.입대)는 전원 병으로 복무했기에 1961년부터 전역 대상자가 동시에 늘어나면서 군악4기
(1961.04.입대)군악5기(1961.06.입대)군악6기(1961.08.입대)등 3개 깃수를 2개월 간격으로 모집하게
되었다.
군악1,2,3기와 7기는 서울의 한남동 막사에서 진해신병훈련소와 비슷한 하사관과 신병교육과정및 군악교육을
받았지만 군악4,5,6기와 8기 이후부터는 진해신병훈련소에서 정규훈련을 모두 마치고 각 4개 군악대로 배치를 받았다.
(아래사진=1962년 군악7기의 사령부군악대 뒷산에서 전투훈련 받는 모습-사진제공-군악3기 이재창)
특기할것은 군악6기중에는 5.16혁명 직후 병역기피자 단속이 심해지자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미8군쇼의
악단 중견멤버(대부분 20대후반)들이 대거 지원해 진해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 진해군악대에 파견근무를
나오게 된것이다. 5.16혁명 직후 행사도 평소보다 많아졌고 전역대상자도 많아져서 파견을 나왔지만
시민을 위한 행사때 타군 군악대보다 훨씬 뛰어난 프로급 베스트 멤버로 스윙빅밴드를 조직해서 연주하므로서
해병대군악대의 위상이 아주 높아지기도 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은 해병대군악대원중에 가장 힘들었던 깃수가 군악3기생이고 제일 괜챦었던 깃수가
군악4기생이라는것이다. 3기생은 말단 대원으로서 만 2년간 시집살이를 하다 6개월후에 전역을 한데 비해
4기생은 2개월 말단 생활에 28개월을 고참병 생활을 누린것이다.)
(9) 한국 초유의 해병대고적대 탄생
(ROKMC Drum & Bugles Corp)
1960년에 美해병대 고적대가 해병대사령부연병장에서 시범공연을 한적이 있었는데 군악대에서는 이것을 관람한 후,
당시 사령부의 이봉출 대령의 지시에 의해 서둘러 미해병대를 통해 고적대 악기를 구입하는 등(당시 국내에는 고적대용
뷰글악기가 없었음) 당시 한국에 온 축소형 편성인 4x4=16인조의 고적대의 마칭 쇼를 모델로 삼아, 화면을 보고
군악대 자체에서 동작 안무와 음악 편곡을 하고 훈련을 해서 1961년7월4일에 국내에서 해병대고적대가 처음으로 탄생케
되었다.
지금은 여러 여자고등학교에 고적대가 있고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등 대형공원시설에서 고적대를 볼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국내에 하나뿐인 해병대 고적대의 마칭 쇼가 장안의 화제거리였었다.
군대행사 외에도 사회 각 기관장들이 서로 자기네 행사에 출연시키려고 애를 쓰는등 그 인기가 정말로 대단했다.
군악4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사령부군악대내에 연주대와 고적대가 소속되게 되었고 고적대 드럼메이저에는
김경태 하사가 임명되었고 1년후 고적대장에 김성태 중사가 임명되어 국내 초유의 고적대 마칭 쇼의 훈련및 공연행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편곡은 안진영 군악대장이 직접했었다. (김영방 前군악대장 회고)
이 사령부고적대는 사령부 해체와 더불어 사령부에서 김포여단(여단군악대도 해체됨)으로 그 소속이 바뀌었고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되는 1981년4월에 다시 군악대로 재편되면서 해병대고적대의 모습이 20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마지막 고적대장 박흥선 현 사령부군악대장 회고)
(1964년7월4일 미국독립기념일행사 오산미공군기지 고적대 시범장면. 자료제공:군악3기 이재창)
(10) 4개 군악대의 활동상황(1961~1973)
(A) 사령부군악대
사령부군악대는 1957년10월에 한상기 중령 후임으로 안진영 대위가 군악대장으로 부임해 와서
우선 연주력 향상에 총력을 기울였고 해병대군악대 역사상 가장 탁월한 연주력을 대외적으로
자랑했던 시기가 이때였다. 군악대원의 대부분 인원을 하사관으로 복무케 함으로서 음악적훈련이 잘된
대원을 장기간 활용할수 있었던것이 그중 큰 원인이라고 봐야 할것이다.
원각사 공연을 정점으로 타군에 비해 보다 많은 국가행사와 외부행사를 담당하게 된것이 이를 뒷바침한다.
(원각사는 1958년에 을지로2가 명동입구의 식당을 개조해 만든 관립극장으로서 "소극장운동의 산실"이라고
일컬어지던 당시 최고급 공연장이었으나 1960년12월5일 화재로 그 모습을 볼수 없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1959년 원각사에서의 공연 장면 지휘: 안진영 대위 자료제공:군악3기 이재창)
(B) 진해기지사령부군악대
(아래사진은 진해기지군악대의 1961년9.28.기념행사마친후 병사앞에서 촬영. 병은 군악3기.4기.5기생과
훈련중인 6기생의 일부가 파견근무중이었음.<대장:인석환 준위, 선임하사관:고중갑 중사>-자료제공: 군악5기 서봉석)
진해에서는 행사내용이 주로 신병훈련소에 매월 실시하는 입소식과 퇴소식 및 기지 전체의 열병및 분열
행사들의 대내 연주행사가 항상 있고 덕산비행장에 귀빈들이 오게되면 영접행사가 있었고 국경일의
경남지역 도시의 시가행진,진해의 벚꽃축제,진주의 개천예술제,미스코리아 경남대표 축하퍼레이드등과
시민위안연주,모병홍보 순회공연등이 대외행사의 주 내용이었다.
우리가 잊지못할 행사중 하나는 신병들이 3개월 동안의 해병대 특유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소속부대로 가기
위해 경화역에서 열차를 타고 모두 출발하게 되는데, 군악대가 항상 전송(餞送)의 연주를 하러 나가곤 했다.
처음에 연주할때는 떠들고 좋아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 이별곡(Auld Lang Syne)을
연주하게 되면 훈련동안 시커멓게 그을은 무적해병대가 갑자기 순한 양으로 바뀌며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큰소리로 엉엉 우는 모습이 너무나 안스러워 연주를 하는 우리 군악대원들도 눈물을 닦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62년에 대장으로 부임한 김영방소위가 해군통제부군악대장 도정삼중위와 연세대 동문인
관계로 1962년12월20일에 진해중앙극장에서 해병대와 해군군악대가 합동으로 성탄축하음악회를 가졌던것이다.
(1962년12월20일 진해중앙극장-해군,해병군악대 합동성탄축하연주회 장면 지휘: 김영방소위 자료제공:군악5기 서봉석)
(C) 김포여단군악대
정리중
(D) 포항사단군악대
정리중
(11) 최장기 복무 군악대장 김영방 소령과 김성태 준위
해병대군악대는 장교 대부분이 장기근무를 하지 못한것 같다. 군악대내의 계급 정원 관계일것이다.
그중에 1961년부터 김포여단과 진해기지 군악대장을 역임하고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사령부군악대장을
맡은 김영방소령이 가장 오래 복무한 장교이다.
그리고 군악대 창설기 하사로서 시작하여 해병대군악대에서 처음으로 준위에 진급했고 해병대군악대의
"살아있는 전설" 이랄수 있는 김성태 준위가 최장기 복무자이다. 군악대에서 준위 진급은 참으로 힘들다.
군악대 창설때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환입대한 4명의 군악요원 이후 순수 해병대군악요원으로서는
처음이었다.
(A) 군악대장 김영방 소령 약력
연세대학교음악대학 졸업
해병대군악대 입대(1959)
해병대군악장교(1960 해병대간부후보생교육 수료후 사령부군악대)
해병대군악대장(1962 김포여단 -1962 진해기지-1967~1973 사령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한국관악협회 창설(초대 사무국장)
제1회 동경 아시아 관악제 한국대표로 지휘
미국으로 이민(1976~ )
백제예술대학 교수(1993~2002)
일본고등학교 취주악경연대회 심사위원
한국 마칭밴드협회 회장
세계마칭밴드 경연대회 한국유치(제주도)
중국 콘서트밴드 경연대회 심사위원
아시아태평양(APBA)밴드협회 창설(부회장)
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현재)
한국관악총연합회 이사장(현재)
(시가행진 후 여학생으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김영방 대장-1961.10.01.국군의 날)
(B) 김성태 준위 약력
해병대군악대 창설기 입대(1951~1973)
해병대사령부군악대 선임하사관-보좌관
해병대제1여단 군악대장
해병대사령부 해체로 예편(1973)
김성태와 그 악단
해병대군악대 전우회 회장(2006~2009)
(12) 통한의 해병대사령부 해체 (1973.10.10.)
해병대가 창설된지 24년6개월만인 1973년10월10일은 국방부 훈령 제157조에 의거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는 불운을 맞으며 해병대 현역은 물론 예비역들 모두가 흥분하고 슬픔에 잠겼던 통한의 날이기도 하다.
아래의 명령서가 박정희대통령의 명에 의하여 유재흥국방부장관이 해병대장 이병문사령관에게 전달한 날이다.
사령부가 해체되니 자연히 사령부군악대도 해체가 되고 진해기지사령부가 해체되니 진해기지군악대도 해체
되었으며, 김포여단은 여단군악대를 해체하고 사령부 소속이던 16인조 고적대로 대체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병들의 일부는 포항사단군악대와 해군군악대로, 일부는 일반병과로 전출되고 장교와 하사관은
대부분 예편하게 되므로서 해병대 전체에 군악대는 포항제1사단군악대 하나만 남게 되었다.
(아래 동영상은 1973년10월10일 사령부해체식 장면임. 사령부군악대의 마지막 연주장면도 보임)
정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