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의 을지로
‘황금정’으로 불린 일제침략기의 을지로 모습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1914년에 구리개와 뜻이 통하는 황금정(黃金町)이라고 고쳤다. 추측컨대 을지로 입구의 동현과 을지로 4가 부근의 은동(銀洞)이란 동명을 따서 황금정이라고 붙인 것 같다.
을지로는 1910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을지로4가~광희문까지 폭 12간, 길이 113간의 확장공사가 있었다. 1912년 12월 당시 을지로에는 서울 최초로 차도(車道)와 인도(人道)가 구분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고시 제78호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의 발표에 따라 경운궁 대한문 앞 광장~황금정을 직통하여 광희문 밖에 이르는 폭 12간의 노선을 제8호선으로 정하였다.
일제는 1927년에 <경성부 주요가로 기정계획노선일람표>를 발표할 때 을지로를 250 간 길이의 ‘황금정통(黃金町通)’으로 이름 붙였다.
1939년 조선총독부고시 제757호로 계획가로망을 발표할 때 을지로는 대로 2류 1호의 시청앞 광장~을지로5가에 이르는 폭 30m, 길이 2,070m와 동 2번의 을지로6가 광장~신당동 광장까지 폭 28m, 길이 220m로 나뉘어졌다.
일제침략기의 중구의 충무로, 명동, 을지로 등지는 서울의 번화가였다. 오늘날 대기업체 본사가 집중해 있는 중구 관내보다 오히려 잡다한 상업 기능은 일제침략기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일제는 종로의 6의전 중심의 500년 북촌 상권을 탄압하면서 진고개 즉, 본정통(충무로)을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로 키워 나갔다. 그들은 남촌을 근거지로 삼아 진고개를 혼마치(本町)라고 부르면서 서울 제일의 번화가임을 자랑하였다. 남촌의 일본인은 충무로 1, 2, 3가를 정점으로 명동2가 ․ 을지로2, 3가 ․ 남대문로2, 3가 ․ 회현동1가 ․ 소공동 ․ 남창동 일대가 피라미드의 상층부를 형성하였다. 당시 상경한 시골사람이 “나는 서울사람이 무엇하느라고 그렇게 밤낮으로 길거리에서 복작복작 하는고 했더니, 진고개 일본사람에게 돈 털어 바치러 가노라고 그러하더만”하였다.
일제침략기에 번화가를 형성한 명치정(명동)은 일반 점포가 많기는 했으나 경식사집․까페․다방․당구장 등이 집중한 곳으로 더 유명하였다. 극장 양화관과 송죽극장이 이곳에 있었고, 까페는 환(丸)빌(마루비루)․국수(菊水)의 두 곳이 컸으며, 중국요리 봉래각과 중화정, 뱀장어 전문의 일식요리 강호천, 서양요리집 천대전 그릴, 화월실당 등이 명치정을 대표하고 있었다.
또 일제 때 황금정과 명치정의 특징은 이곳에 증권회사들이 집중해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증권거래소의 전신인 경성주식현물취급시장이 1920년 명동 1가와의 경계인 황금정 2정목 199번지에 있었고, 또한 일제 때 가장 조선인들이 즐겨했고, 또 그 때문에 패가망신한 조선미곡시장도 명치정(명치정 1가 59의 10)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경제침략 3대 본거지인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가 남대문로, 을지로에 위치했다는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서울의 금융지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의 본사 사옥이 남대문로2가에 1927년에 준공되었다.(*)
일제 때의 명동거리와 상점들
첫댓글 옛 기억을 되살려 주신 글 입니다.
本町에 간 기억은 있는데
黃金町에 간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늘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