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45년 여름부터 1847년 가을에 걸쳐
월든 호반에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
그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검소하고 소박한 삶이라고 말한다.
▣ 저 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2~1862)
18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고, 1837년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졸업 직후 콩코드의 공립학교 센터 스쿨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나 2주 만에 사직하고 형과 함께 콩코드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소로는 스승이자 친구인 라프 왈도 에머슨이나 엘러리 채닝과 함께 산책과 대화를 나누면서 평생을 콩코드 마을 주변에서, 특히 콩코드의 황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좀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월든 호숫가에 소박한 오두막을 지었고, 그 오두막은 다섯 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것이었다. 소로는 1847년 9월 6일 월든 호숫가를 떠났으며, 그의 책 『월든』은 1854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1862년 5월 6일, 그는 평생 동안 시달려 온 만성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 Short Summary
『월든』은 그것이 씌어졌던 시대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좀 더 절실하게 다가오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에 담긴 메시지가 보다 선명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것은 흔히 얘기하듯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식의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상실돼 가는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힘겨운 시도의 하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풍부한 시적 통찰력으로 설득력을 얻으며 문명에 의지하지 않는 ‘순결한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탐색하고 있다.
▣ 차 례
첫 번째 이야기 - 삶의 경제학
두 번째 이야기 - 내가 살았던 장소와 삶의 목적
세 번째 이야기 - 독서
네 번째 이야기 - 삶의 소리
다섯 번째 이야기 - 고독
여섯 번째 이야기 - 손님들
일곱 번째 이야기 - 콩밭
여덟 번째 이야기 - 마을
아홉 번째 이야기 - 호수
열 번째 이야기 - 베이커 농장
열한 번째 이야기 - 더 높은 법칙
열두 번째 이야기 - 동물 친구들
열세 번째 이야기 - 따뜻한 집
열네 번째 이야기 - 예전의 주민과 겨울 손님들
열다섯 번째 이야기 - 겨울 동물들
열여섯 번째 이야기 - 겨울 호수
열일곱 번째 이야기 - 봄
열여덟 번째 이야기 - 맺음말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삶의 경제학
내가 이 책을 썼을 때 나는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 속에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혼자 살았다. 그곳은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숫가였다. 나는 그때 오로지 내 두 손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내가 그곳에 산 것은 2년 2개월 동안이었다. 지금 나는 다시 문명의 세계로 돌아와 있다.
내가 월든 호수에 간 것은 보다 싼 생활비로 살기 위해서라거나 화려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방해 없이 나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의 상식과 모험심, 사업적 재능의 결여로 그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리석다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일인 것 같았다. 나는 일반적으로 필요한 자금조차 없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우선 당면 문제로서 의복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용성보다는 새것에 대한 선호와 남들의 평판을 염두에 두게 마련이다.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 옷을 입는다는 행위의 목적은, 첫째 생명의 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노출을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임을 상기시켜 준다면,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고 중요한 일일지라도 새로 옷을 구하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낡은 옷을 입고 해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가지고 할 무엇’이 아니라, ‘해야 할 무엇’ 또는 ‘되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해지고 더러운 낡은 옷이라 해도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헌옷을 입고도 새 사람이 된 듯이 느껴질 때까지는, 또 헌옷을 새 술을 담을 낡은 부대처럼 느낄 수 있을 때까지는 새 옷을 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털갈이할 시기는 새들이 그러하듯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여야만 한다. 뱀 역시 이런 식으로 허물을 벗고 쐐기벌레 역시 내적 활동과 확장으로써 애벌레의 껍질을 벗는 것이다. 의복이란 인간의 외피이며 속세의 번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가짜 깃발을 달고 항해하는 셈이어서 결국 인류는 물론 스스로의 심판에 의해 반드시 징계를 받고 말 것이다.
삶의 필수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처음부터 또는 오랫동안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너무나도 중요하게 되어서 이제는 야만인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철학적인 이유에서든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주거 역시 삶의 필수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이곳보다 더 추운 지방에서도 오랫동안 집 없이 삶을 영위했다는 실례는 아주 많다. 따라서 살 집을 지을 작정이라면 감화원이나 박물관, 양로원, 감옥, 또는 화려한 왕릉처럼 지을 필요는 없다. 집주인에게 집세를 달라는 시달림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집, 그런 집이면 족하다. 상자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을 텐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보다 크고 화려한 상자 속에 살며 세를 지불하느라 죽도록 고생하고 있다. 나는 지금 결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경제를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집을 소유한 농부는 집 때문에 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질 뿐이다. 오히려 집이 그를 소유한 셈이 되고 만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집들이 우리가 그 집 속에서 거주한다기보다는 갇히는 결과를 야기하는 다루기 힘든 재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해야 할 나쁜 이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천박한 자아인 것이다. 이 마을에서 거의 한 세대가 지나도록 교외에 있는 자기 집을 팔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가족이 적어도 한두 집 있는데, 그들은 죽어야만 집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이다.
1845년 3월이 끝나갈 무렵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집을 짓기로 작정한 곳에서 가까운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간 다음 재목으로 쓰기 위해 크고 꼿꼿하게 자란 한창 때의 백송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하루는 도끼날이 빠져 히코리의 푸른 가지를 잘라 돌멩이로 쐐기를 박았다. 그런 다음 자루를 물에 불리기 위해 도끼를 통째로 호수 얼음 구멍 속에 담갔다. 그 순간 물 속을 지나는 줄무늬 뱀이 보였는데 그놈은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아마 15분은 더 되었을 것이다) 아무 불편 없이 호수 바닥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어쩌면 아직 완전히 동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문득 어쩌면 인간도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지금처럼 비천하고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이 자신을 일깨우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 분명 보다 고결하고 더욱 성스러운 삶을 영위할 것이다.
일을 서두르지 않고 정성을 들였기에 4월 중순이 되어서야 뼈대를 세울 준비가 끝났다. 나는 고운 모래가 나올 때까지 사방 6피트에 7피트 깊이로 식물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지하 광을 팠는데, 그 정도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감자가 얼 염려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땅을 파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는데, 그것은 어느 지방에서든 땅 속을 파고 들어가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오랜 세월이 흘러 지상의 건물이 사라지고 나면 후세 사람들은 땅에 파인 자국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집이란 것은 여전히 굴 입구에 만들어 놓은 일종의 현관인 셈이다.
화가들이 알고 있듯이 이 나라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거 형태는 통상 가난한 이들이 사는 아무 꾸밈도 없는 소박한 통나무 오두막이다. 그런 집을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 집을 외피삼아 사는 그곳 주민들의 삶이지, 결코 그 표면적인 형태가 아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굴뚝을 세우고 이미 방수처리가 된 측벽에 통나무에서 잘라낸 첫물 목재를 불완전하고 물기가 많은 그대로 지붕널을 달고, 널 모서리는 대패로 반듯하게 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내게는 폭 10피트에 길이 15피트, 8피트짜리 기둥이 서고 다락방과 벽장이 있고 양편으로 큼직한 창이 나 있으며 뚜껑 문이 둘 달리고 한쪽 끝에 문을 내고 맞은 편에 벽돌로 벽난로를 만든, 야무지게 지붕널을 달고 회반죽을 바른 집 한 채가 생겼다.
내가 무엇보다 선호하는 일은 특히 내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또 험하게 살더라도 나로서는 행복할 수 있으므로 지금 당장은 값비싼 양탄자나 좋은 가구, 맛있는 요리, 그리스 식이나 고딕 양식의 주택을 손에 넣기 위한 돈을 버는 데 내 시간을 써버릴 생각은 없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유가 생길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이들에게는 일을 두 배로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래서 몸값을 다 치르고 자유를 살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나로서는 날품팔이야말로 무엇보다 독립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특히 그 일은 한 사람의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1년에 3, 40일정도만 일하면 되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것과 더불어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그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다. 그런 반면 끊임없이 사업에 몰두해야 하는 그의 고용주는 일 년 내내 휴식을 누릴 짬이 없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념과 경험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소박하고 현명하게만 산다면 이승에서 한 사람이 먹고사는 일은 힘겨운 일이 아니라 유희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소박한 민족이 영위하는 직업이라는 것이 아직도 인위적인 민족의 경우에는 스포츠인 것과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쉽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 한 꼭 이마에 땀을 흘려 가며 생계비를 벌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나는 독립된 주거지를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이웃과 가능한 유일한 협력은 극히 부분적이고 피상적이게 마련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화음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어딜 가든 똑같은 신념으로 협력할 것이다. 반면, 신념이 없는 사람은 어떤 무리에 속하든 세상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것이다. 가장 고상한 의미든 아니든 협력이란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독립적인 삶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이지 나는 지금껏 자선사업에 그다지 관여한 적이 없다. 나는 일종의 의무로 몇 가지를 희생시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시켰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선에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 선행이라는 일자리는 이미 만원이다. 게다가 나도 그 일이라면 꽤 해본 편인데,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일이 내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선행을 하기 위해, 또는 세상을 파멸로부터 건지기 위해 나만의 소명을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어딘가 이 세상과 비슷하면서도 거의 무한대로 더 큰 어떤 불변성이 있어 현재의 세상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일에 소질이 있다면 막을 생각이 없다.
변질된 선(善)에서 솟는 것만큼 지독한 악취도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신의 경우에도 한낱 썩은 고기일 뿐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악행을 당하는 것이 낫다.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 때 따뜻하게 해주고, 또는 수렁에 빠졌을 때 나를 끌어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게 선을 베푼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일은 뉴펀들랜드 종의 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자선은 인간애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유복하게 살고 있을 때야말로 바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그리고 그 경우 우리를 돕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 또는 나와 비슷한 인간에게 진심으로 선을 베풀려고 한 자선 모임에 대해선 들어 본 적도 없다. 자선은 인류에 의해 높이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미덕이다. 아니, 그건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러한 과대평가는 바로 우리의 이기심 때문이다.
내가 살았던 장소와 삶의 목적
내가 처음 숲 속에 거주했을 때가 우연히도 독립기념일인 1845년 7월 4일이었다. 내가 숲 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숲 속에 널찍하고 반들반들하게 길을 닦아 삶을 맨 안쪽까지 몰아붙인 다음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뽑아서 온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그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알고 싶고 다음 번 여행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진정한 얘기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악마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이상하리 만큼 확신하지 못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원토록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삶에서 성공하려면 탁월한 계산가가 되어야 한다. 단순화하고 단순화하여야 한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할 게 아니라 필요할 때 한 끼만 먹도록 하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이라. 나머지 일들 역시 같은 비율로 줄이라. 우리의 삶이란, 수많은 소국들로 구성되고 끊임없이 국경이 바뀌어 결국에는 독일인조차 현재의 국경이 어딘지 말할 수 없게 된 저 독일연맹과 흡사하다. 국가 그 자체도 이른바 내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비대해서 다루기 힘든 조직체가 되어, 그 안의 수백만 가정이나 다를 바 없이 여기저기 가구가 엎질러지고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리고 계산과 적당한 목표의 부족으로, 사치와 부주의한 지출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은 엄격한 검약, 스파르타식 간소함보다 훨씬 더 가혹한 생활양식, 고양된 목표다.
시간이란 내가 낚시하는 냇물일 뿐이다. 나는 그 물을 마시지만, 물을 마시는 동안 모래가 깔린 바닥을 보고 그것이 얼마나 얕은지를 알게 된다. 시간의 얕은 흐름은 이내 흘러가고 만다. 그러나 영원은 그대로 남는다. 나는 좀더 깊은 물을 마시고 싶다. 바닥에 조약돌처럼 별들이 깔린 하늘에서 낚시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하나조차 헤아릴 수 없다.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가 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태어난 그날처럼 현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제나 뉘우치며 살고 있다. 지성이란 식칼과 같아서 사물의 비밀을 인식하고 갈라낸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두 손을 바삐 놀릴 생각이 없다. 내 머리가 곧 두 손이며 두 발인 것이다. 내 모든 최고의 기능은 머릿속에 집중돼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머리가, 짐승이 굴을 팔 때 주둥이와 앞발을 쓰는 것처럼 굴을 파는 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으로써 이 언덕을 파볼 생각이다. 이곳 어딘가에 가장 풍부한 광맥이 있다. 나는 점치는 막대와 엷게 떠오르는 수증기를 보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바로 이곳에서 굴을 파기 시작한 것이다.
독서
나는 여름내 책상 위에 호머의 『일리아스』를 놓아두었지만 이따금씩 읽곤 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집도 마저 지어야 했고 콩밭에서 잡초도 뽑아야 하는 등 두 손을 끊임없이 놀려야만 했기에 그 이상 책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앞으로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일하는 사이사이에 가벼운 여행기를 한두 권 읽었지만 곧 그 일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가 사는 곳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 때마다 보물함 속에 『일리아스』를 넣어 지니고 다녔던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로 적인 말은 유물의 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품보다도 우리와 친근하며 그만큼 보편적이다. 책의 세계의 소중한 재산이며 세대와 민족의 온당한 유산이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그곳 선반에는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서적들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게 마련이다. 책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지만, 그것이 독자를 계발시키고 고무시키는 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아직 인류가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위대한 시인만이 그것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작품들을 마치 별을 보듯이, 요컨대 천문학적으로가 아니라 점성술적으로 읽었을 뿐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마치 장부를 적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 계산법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편의를 위해 읽는 법을 배웠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책 읽기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치품처럼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고 보다 고귀한 기능을 잠들게 만드는 독서가 아니라, 발끝으로 서서 읽는 일, 우리의 가장 기민하고 주의 깊은 순간을 바쳐서 읽는 행위야말로 고결한 의미에서의 독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책이 독자처럼 우둔하지는 않다. 어쩌면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꼭 들어맞는 말을 해주는 책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귀를 기울여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날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 유익하고 문제의 새로운 양상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신의 삶에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지금까지의 기적을 설명하고 새로운 기적을 보여줄 책이 우리를 위해 어딘가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어딘가에 표현돼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를 혼란케 하고 어리둥절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과거의 모든 현자들도 직면한 적이 있었다. 어느 한 문제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현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삶으로 그 문제들에 해답을 주었다. 나아가서 우리는 책에서 지혜와 더불어 관대함도 배우게 될 것이다.
고독
지금은 온몸이 하나의 감각으로 바뀌고 땀구멍 하나하나로 기쁨을 숨쉬는 감미로운 저녁이다. 나는 이상하리만큼 자유로운 자연의 느낌을 품고, 자연의 일부를 품고 돌아다닌다. 구름이 낀 데다 바람까지 부는 서늘한 날씨인데도 나는 셔츠 차림으로 돌이 깔린 호숫가를 따라 걸어 본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다. 자연의 모든 요소가 내게 유난히 친숙하게 느껴진다. 휴식은 결코 완결되는 법이 없다. 가장 거친 동물들은 쉬지 않고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여우며 스컹크, 토끼들이 이제 겁 없이 들과 숲 속을 배회한다. 그들은 자연의 야경꾼들…. 생동감 넘치는 삶을 하루하루 이어주는 연결 고리인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그 사이에 누군가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나뭇가지나 풀잎이 구부러진 모양이나 신발 자국을 보고 내가 없는 동안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거의 정확하게 알아맞힐 수 있는데, 새를 보고 또는 공중에 남아 있는 담배나 파이프 담배 냄새로 그들의 성별과 나이와 품성까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곳에서 외로우시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는 날과 밤이면 사람이 가까이 있었으면 하실 테죠?”하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주 속의 점 하나일 뿐이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도무지 폭을 알 길 없는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주민이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 같소? 그러니 어째서 내가 외롭다고 느껴야 하오? 우리 행성이 은하수에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당신이 방금 던진 질문은 내가 보기엔 그다지 중요한 질문 같지 않구려. 사람을 동료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외롭게 만드는 건 대체 어떤 공간이겠소? 나는 아무리 두 다리로 애를 써봤자 두 마음이 서로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살고 싶어하는 것이 뭐겠소? 분명 많은 사람들 곁은 아닐 거요. 역이나 우체국, 술집, 공회당, 학교, 식품점,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도 아닐 것이오. 그보다는 버드나무가 물가에 서서 그쪽으로 뿌리를 뻗듯이 모든 경험에서 볼 때 생명을 분출하는 영구적인 원천 가까이에 있고 싶어할 거요. 그곳이 어디인가는 각자의 본성에 따라 다를 테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곳에다 자신의 지하 광을 팔 거요….”
우리를 건강하고 평온하고 흡족하게 해줄 묘약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나나, 그대의 증조부가 빚은 약이 아니라, 우리의 증조모인 자연이 빚은 우주의, 야채의, 식물의 약으로서, 자연은 그것으로 영원한 젊음을 누리고 전성기의 다른 수많은 파(Parr : 152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영국인) 노인보다 오래 살며 그들의 부식한 기름기로 자신의 건강을 유지했던 것이다. 나의 만병통치약은 삼도천과 사해의 물을 섞어 만든 가짜 몰약이 아니라 희석시키지 않은 순수한 아침의 대기 한 모금이다. 아, 아침의 대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샘인 이 대기를 마시지 않는다면 병 속에 담아 상점에서 팔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아침 시간 예매표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손님들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 역시 사람 사귀는 일을 좋아하여 언제든 혈기왕성한 사람을 만나면 한동안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은둔자는 아니어서 마침 술집에 무슨 볼일이 생기면 그 술집에서 가장 질긴 단골보다 더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있다. 내 집에는 의자가 세 개 있었는데, 하나는 고독을 위한 의자, 둘은 우정을 위한 의자, 셋은 친교를 위한 의자였다. 그런데 뜻밖에 그보다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면 그들 모두에게 내줄 의자는 세 번째 의자밖에 없었지만 대개는 앉지 않고 서서 공간을 좁히곤 했다.
너무 작은 집에서 살면서 이따금 느꼈던 한 가지 불편이 있다면, 손님과 내가 거창한 말로 웅대한 사상을 주고받을 때 두 사람이 거기에 걸맞은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사상이 목적한 항구로 항해하기 전에 우선 항해 장비를 갖추고 수로 한두 곳을 움직여 볼 만한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상이라는 탄알은 그것을 듣는 이의 귀에 이르기 전에 일탈과 탄성을 극복하고 최후의 안정된 경로에 들어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그 탄알은 듣는 이의 옆머리를 파고 튀어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손님과 내가 말하는 문장도 어느 정도 공간에 그 행을 펼치거나 짤 만한 공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온순하고 지능이 모자라는 한 빈민이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종종 그가 들판에서 소 떼와 그 자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 있거나 통에 앉은 채 울타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자기도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겸손이라는 것을 훨씬 능가하거나 아니면 한참 미달하는 극도의 단순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지능에 결함이 있다.”고 했다. 그건 그가 쓴 표현이었다. 하느님이 원래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남들만큼 자신을 걱정해 준다고도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전 언제나 그랬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에요. 한 번도 정신이 온전한 적이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 같지 않았죠. 전 머리에 문제가 있어요. 그건 하느님 뜻일 테죠.“ 그리곤 자기 말이 맞는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는 내겐 몹시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처럼 유망한 바탕을 지닌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한 모든 말은 너무나 소박하고 진지하고 진실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스스로를 낮춘 그 비율만큼이나 고귀해 보였다. 나는 처음엔 몰랐지만,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신에서 우러난 결과였다. 지능이 떨어지는 이 가엾은 친구가 마련해준 진실과 정직을 기반으로 하면 우리의 교제도 현자들 간의 교제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호수
이따금 나는 다음 날 먹을 거라도 마련할 겸 한밤중 몇 시간을 달빛을 받으며 호수에 띄운 배에 앉아 낚시질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올빼미와 여우들이 세레나데를 부르고 간혹 가까이에서 이름 모를 새가 끽끽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는 이런 경험이 잊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월든의 풍경은 수수한 규모이며 아주 아름답기는 하지만 장엄하지 않고, 호수를 찾거나 그 물가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도 없다. 그러나 이 호수는 유난히 깊고 맑았다.
콩코드 일대의 물빛은 최소한 두 가지 빛깔을 띠고 있는데, 하나는 멀리서, 그리고 좀더 정확한 다른 한 가지 빛깔은 가까이에서 본 것이다. 첫 번째 빛깔은 빛에 크게 좌우되며 하늘빛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철 맑은 날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특히 물결이 일 때는 청색으로 보이며 멀리서는 모두 비슷비슷한 빛깔로 보인다. 폭풍이 부는 날씨에는 종종 어둡고 우중충한 잿빛을 띤다. 그러나 배를 타고 물 속을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빛깔들이 보인다. 월든 호수는 같은 자리에서도 청색으로 보일 때도 있고 녹색으로 보일 때도 있다. 천지 사이에 놓인 이 호수는 그 두 가지 빛깔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물이 너무 투명해서 수심 25피트에서 30피트 정도인 호수 밑바닥이 쉽게 보였다. 그 위를 노 저어가다 보면 수면에서 꽤 깊은 곳에서 대략 1인치 길이를 한 퍼치와 연준모치 떼를 볼 수 있는데, 그런, 곳에서 살다니 정말 금욕적인 물고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호수는 나를 위해 누가 미리 파놓은 우물이었다. 연중 넉 달 동안 호수 물은 그것이 사철 내내 맑은 것만큼이나 차가웠다. 나는 그 호수물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우물물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을의 다른 우물물만큼은 좋은 물이라고 생각한다. 겨울이 되면 대기에 노출된 모든 물은 대기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샘물과 우물보다 더 차갑게 마련이다. 호수는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얼굴이라 할 수 있다. 호수는 대지의 눈이어서,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이는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잴 수 있다. 물가의 나무들은 호수 언저리를 두른 가느다란 속눈썹이며, 주변의 울창한 언덕이며 절벽들은 그 눈을 덮고 있는 이마인 셈이다.
물의 들판이라 할 이 호수는 허공의 정기를 반사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동작을 받아들인다. 그 본성은 하늘의 중간이다. 땅에서는 풀과 나무만이 흔들릴 뿐이지만 물은 바람에 송두리째 움직이며 물결을 일으킨다. 나는 빛의 희미한 움직임과 번득임만 보고도 산들바람이 지나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 호수의 수면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언젠가는 공기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훨씬 더 미묘한 정기가 스치는 곳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호수는 너무나 순수하여 시장 가치를 매길 수가 없다. 여기에는 아무런 오물도 없다. 그것은 우리네 인생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우며 우리의 인격에 비하면 그 얼마나 투명한가! 인간은 결코 이들 호수들로부터 비열함을 배울 수 없다. 오리가 헤엄치는 농부네 집 앞 물웅덩이에 비하면 얼마나 깨끗한가! 이곳을 찾는 것은 정결한 야생오리들이다. 자연에게는 그것을 제대로 평가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주민이 없다. 보기 좋은 깃으로 노래하는 새들이 꽃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청춘 남녀가 이 야생적이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자연과 호흡하고 있는가? 자연은 그들이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저 혼자 번성한다. 그런 자연을 놔두고 천국을 논한다는 것이야말로 이 지상을 모욕하는 것이다.
더 높은 법칙
잡은 물고기를 꿴 줄을 들고 낚싯대를 끌며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숲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얼핏 오솔길을 살금살금 가로지르는 마못이 보였다. 그 순간 이상하리만큼 잔인한 기쁨의 전율과 더불어 그놈을 잡아 날로 먹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때 허기가 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놈이 갖고 있는 그 야성 때문이었다. 호숫가에서 사는 동안 한두 차례 먹을 만한 짐승 고기를 구하려 반쯤 굶주린 사냥개처럼 정신없이 숲 속을 배회한 일이 있었다. 그때 같아서는 무엇을 뜯어먹더라도 잔인할 것 같지 않았다. 아주 야만스러운 광경을 떠올려도 기묘하리만큼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게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보다 높은 삶, 이른바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을 찾아볼 수 있는데, 나는 이 두 가지 삶을 모두 존중한다. 나는 선한 삶 못지않게 야생의 삶을 사랑한다. 나는 낚시질에 들어 있는 야성과 모험 때문에 여전히 낚시질을 좋아하고 있다. 종종 짐승처럼 그 거친 삶 속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들과 숲에서, 요컨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삶을 영위하는 어부와 사냥꾼과 나무꾼 같은 이들은 흔히 일상적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접근하는 철학자나 시인에 비해 자연을 관찰하기에 훨씬 유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자연은 주저 없이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식욕과는 무관한 음식에서 이따금씩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얻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추한 미각에 정신적 지각이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 미각에서 영감을 얻어 왔다는 것, 언덕에서 따먹은 열매가 내 재능을 키워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전율을 느꼈다. 공자는 말하기를, “마음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했다. 음식의 참된 맛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대식가가 될 수 없고, 맛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식가가 될 수밖에 없다. 설혹 청교도일지라도 흑빵 한 덩어리를 시의회 의원이 거북의 고기를 먹을 때처럼 탐욕스럽게 먹을 수도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식욕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질이나 양이 아니라 감각적인 맛을 탐닉하는 것이 문제다.
요컨대 우리가 먹은 음식이 우리의 동물적인 생명을 지탱시키거나 정신적인 생명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벌레를 위한 음식이 될 때가 문제인 것이다. 사냥꾼이 진흙거북과 사향뒤쥐 같은 천한 음식을 좋아하고, 귀부인이 족발로 만든 젤리나 외국산 정어리를 탐닉한다면 그들은 똑같은 사람들이다. 사냥꾼은 저수지를 찾고 귀부인은 잼이 든 병을 찾는 것이 다를 뿐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리고 여러분과 내가 어떻게 이처럼 먹고 마시는 더럽고 짐승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몸속에, 우리의 보다 높은 본성이 잠들수록 깨어나는 짐승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 짐승은 파충류 같고 관능적이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몸속에 들어 있는 기생충들이 그렇듯이 어쩌면 완전히 내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짐승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놈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은 나름대로 건강하며, 따라서 우리는 건강할 수는 있지만 순결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순결에 이를 경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내게 순결을 가르쳐줄 정도도 현명한 이가 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에 의하면 “우리의 정열과 육체의 외적 감각을 다스리는 힘, 그리고 선행은 정신이 신에게 접근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은 얼마 동안 육신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통제할 수 있고 외적으로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천박한 관능이라도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생식력은 우리가 해이해져 있을 때에 우리를 방탕하고 불결하게 만들며 우리가 절제할 때는 기력과 영감을 북돋워 준다. 순결함은 인간의 꽃이다. 이른바 재능이나 영웅적 행위, 신성함 같은 것들도 순결의 밑에 맺히는 여러 가지 열매일 뿐이다. 순결의 수로가 열릴 때 비로소 인간은 곧장 신에게로 흘러가게 된다. 순결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불순함은 우리를 파멸시킨다. 매일같이 내면의 짐승이 죽어가고 있으며 신성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과 굳게 맺어져 있는 열등하고 동물 같은 본성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파우니나 사티로스(둘 다 반인반수의 신) 같은 신 혹은 반신이며 짐승과 결합된 신성이며 욕망의 동물이다. 요컨대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것이다.
모든 관능은 비록 갖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실은 하나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순결 역시 그러하다. 육욕이라는 면에서는 음식을 먹든 마시든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든 잠을 자든 매한가지다. 이것들은 하나의 욕망이므로, 어떤 사람이 얼마나 육욕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 중에서 하나만 보면 된다. 불순한 인간은 서나 앉으나 순결할 수가 없다. 그 파충류는 자기 굴의 한쪽 입구가 공격받으면 다른 쪽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순결을 원한다면 절제해야 한다. 대체 순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자신이 순결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덕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귀로 들은 소문에 따라 말할 뿐이다.
노력하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나온다. 나태에서는 무지와 관능이 나올 뿐이다. 학생에게 있어서 관능이란 정신의 게으른 습관이다. 불순한 인간은 대체로 게으른 인간이며, 난롯가에 앉아 있는 인간, 해가 떴는데도 엎어져 있는 인간, 피곤하지 않은데도 쉬고 있는 인간이다. 불순함과 모든 죄악을 피하려면 마구간 청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일하라.
본성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기독교인인 당신이 이교도보다 순결하지 못하고 더 자제하지 못하고 더욱 신실하지 못하다면 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교라고 간주되는 많은 종교에도, 그 계율이 그것을 읽는 자를 부끄럽게 하고 비록 그저 의식의 수행이라 할지라도 신자를 새롭게 분발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많이 있다.
봄
제빙 일꾼들에 의해 얼음 위에 큰 구멍이 생기면 대체로 호수가 일찍 녹게 마련인데, 그것은 추운 날에도 바람에 일렁이는 호수물이 주변의 얼음을 잠식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월든 호수에는 이런 결과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 호수는 유난히 깊은데다가 얼음을 녹이거나 잠식할 물의 흐름이 없기 때문에 인근의 다른 호수만큼 빨리 녹는 법이 없다.
한 해에 걸쳐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들이 호수 속에서 작은 규모로 매일같이 일어난다. 대체로 아침이면 얕은 물은 그렇게까지 높은 온도는 아닐지 몰라도 깊은 물에 비해 빠르게 더워지며, 저녁 때면 다음날 아침까지 급속히 냉각된다. 요컨대 하루는 1년의 축소판이다. 밤은 겨울이며 아침과 저녁은 봄과 가을, 정오는 여름이다. 얼음이 깨지거나 울릴 때는 온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1850년 2월 24일 추운 밤이 지나 상쾌한 아침이 찾아왔을 때 나는 도끼머리로 얼음판을 두드려 보고는 징을 치기라도 한 것처럼 또는 팽팽한 북가죽을 두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십 야드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해가 뜬 지 한 시간쯤 지나자 호수는 언덕 너머로부터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의 영향을 받으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흡사 잠에서 깬 사람처럼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며 점차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런 상태가 서너 시간 계속되었다. 정오 때는 잠시 낮잠을 자더니 저녁때가 되어 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서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낮에는 얼음 갈라지는 소리로 가득한 데다 대개 역시 탄력을 잃어 울림을 완전히 잃기 때문에 설혹 얼음을 내리치더라도 물고기나 사향뒤쥐가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호수가 매일 저녁 천둥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며 언제 천둥소리를 낼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날씨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천둥소리를 내는 적도 있다. 이렇게 크고 차갑고 두꺼운 피부를 가진 물체가 그렇게 민감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럼에도 봄이 오면 싹이 터지듯, 호수 역시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어 때가 되면 순순히 천둥소리를 울리는 것이다. 봄이 오면 대지는 온통 살아나며 돌기들로 뒤덮인다. 아무리 큰 호수도 대기의 변화에는 온도계 속의 수은주만큼이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숲 속에 들어와 사는 데 있어 한 가지 매력은 봄이 오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볼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호수의 얼음은 이윽고 벌집 모양으로 녹기 시작하여 그 위를 걸으면 발이 빠진다. 안개와 비, 따뜻한 태양이 차츰차츰 눈을 녹이고 낮은 점점 눈에 띌 만큼 길어져 간다. 나는 봄의 첫 징후들을 주시하며 혹시 새가 돌아와 우짖는 소리라든가 줄무늬다람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여 본다. 이제 다람쥐의 양식도 거의 바닥났을 테고 마못 역시 겨울 숙소 밖으로 나와 돌아다닐지 모른다.
이윽고 햇살이 직각을 이루게 되고 훈풍이 안개와 비를 몰고 와 눈 더미를 녹이면서 태양은 안개를 몰아내고 진갈색과 흰색의 향을 피우는 변화무쌍한 풍경 위에서 미소를 짓는다. 그 풍경 속에서 졸졸거리며 흐르는 수많은 시냇물과 개울의 음악 소리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그네가 조그만 섬과 섬 사이를 건너간다. 시냇물의 혈관은 빠져나가는 겨울의 피로 가득하다. 대지에서 어느 정도 눈이 걷히고 며칠 간 따뜻한 날이 이어지면서 지표면이 어느 만큼 마르면, 이제 막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한해 유년기의 부드러운 첫 번째 징후들과 겨울을 꿋꿋이 버티고 난 말라빠진 초목의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는 건 자못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새풀, 부들개지, 우단현삼, 물레나물, 조팝나무, 터리풀 등등 줄기가 강인한 식물들이 있는데, 이 무궁무진한 곡창은 일찍 날아온 새들의 먹이가 되고 있다. 과부가 된 자연의 여신은 이들 품위 있는 잡초들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울그래스의 구부러지고 다발진 꼭지에 마음이 끌리곤 한다. 겨울을 맞는 우리들에게 여름을 상기시켜 주는 이 잡초의 형상은 예술에서 즐겨 본따기도 한다. 그 잡초는 고대 양식으로서, 그리스나 이집트의 양식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동장군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 대부분은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연약하고 섬세한 측면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 제왕을 거칠고 난폭한 폭군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연인과도 같이 다정한 손길로 여름의 머릿단을 치장시켜 준다. 월든 호수도 순식간에 녹고 있다. 북쪽과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폭 10야드 가량의 운하가 생겼는데, 동쪽 끝 부분의 얼음은 그보다 훨씬 넓게 녹았다. 얼음 가장자리의 큰 곡선은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그것은 물가의 곡선에 어느 정도 일치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규칙적이다.
폭풍이 몰아치던 겨울에서 맑고 포근한 날씨로, 어둡고 침울한 시간에서 밝고 탄력 있는 시간으로의 변화는 만물이 일제히 살아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한 순간의 일처럼 보인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고 겨울 구름이 여전히 드리워져 있었으며 처마에서는 진눈깨비 섞인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어느 순간 쏟아져 들어온 빛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아아! 어제까지만 해도 차가운 잿빛 얼음이 끼어 있던 자리에 흡사 여름날 저녁처럼 잔잔하고 희망에 가득한 투명한 호수가 있는 게 아닌가! 머리 위엔 아무것도 없는데도 여름날 저녁 하늘이 호수의 품안에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호수가 저 먼 지평선과 정보라도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개똥지빠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게는 수천 년 만에 들어보는 소리 같았다. 그 음악을, 저 옛날처럼 여전히 감미롭고 힘찬 그 노래를 나는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5월 초가 되자 호수 주변 소나무 숲 한가운데에서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떡갈나무와 히코리나무, 단풍나무 같은 다른 나무들은 그 일대의 풍경에 특히 구름 낀 날에 햇빛과도 같은 눈부신 빛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안개 속을 뚫고 언덕 이곳저곳을 어렴풋하게 비추는 것과 같았다. 5월 3일이 아니면 4일에 나는 호수에서 아비 한 마리를 보았으며, 그 달의 첫 주 동안에 쏙독새와 갈색개똥지빠귀, 비어리, 멧딱새, 돼새 등 다른 새의 울음소리도 들었다. 숲개똥지빠귀의 울음소리는 그보다 훨씬 전에 들었다. 딱새 역시 벌써 돌아와 발톱을 웅크린 채 날개를 윙윙거리며 허공에 몸을 정지시켰는데, 이렇게 집을 조사할 때면 마치 허공을 잡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얼마 안 있어 유황처럼 노란 송진소나무의 꽃가루가 호수가의 바위와 썩은 나무 위를 온통 덮어서 통으로 하나 가득 모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이른바 ‘유황비’인 셈이었다. 칼리다스(5세기의 힌두 시인)의 『사콘탈라』에도 ‘연꽃의 금빛 가루로 노랗게 물든 냇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렇게 하여 하루가 다르게 높이 자라는 풀밭 사이를 거니는 사이에 계절은 여름을 향해 다가갔다. 이것으로 나의 숲 속 생활 첫해가 끝났으며, 이듬해 역시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1847년 9월 6일 월든 호수 곁을 떠났다.
맺음말
의사들이 환자에게 공기와 환경을 바꿔 보라고 권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다행히도 이곳만이 세상 전부가 아닌 것이다. 아프리카는 무엇을 표상하며, 서부는 무엇을 표상하는가? 우리 자신의 내면은 해도에 하얀 공백으로 있지 않은가? 발견하고 보면 그것 역시 저 해안처럼 시커멓게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것이 나일 강과 니제르 강, 미시시피 강의 수원일까? 아니면 이 대륙의 서북항로일까? 과연 그런 것들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일까? 프랭클린(영국 탐험가)만이 길을 잃어 아내가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는 유일한 인간일까? 그린넬(프랭클린을 수색하기 위해 나선 원정 대대장)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나 알고 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강과 바다를 찾아다니는 멍고 파크(스코틀랜드 탐험가)나 루이스와 클라크(미국 서부 탐험가), 프로비서(영국 탐험가)가 될 일이다.
자신의 극지방을 탐험하라. 필요하다면 식량으로 고기 통조림을 한 배 가득 싣고 가되 빈 깡통은 표지가 될 수 있도록 높이 쌓으라. 고기 통조림이 그저 고기를 보존하려고 발명된 것일까? 아니다. 차라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완전한 신대륙과 신세계를 찾아 나설 콜럼버스가 되어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 항로를 열라. 사람은 누구나 왕국의 군주이며, 그 앞에서는 러시아 황제의 제국도 한낱 소국, 얼음 위에 솟은 조그만 얼음덩이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숲에 처음 들어갈 때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숲을 떠났다. 그때 내게는 아직 살아야 할 몇 개의 삶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하나의 삶에 그 이상 많은 시간을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또 부지불식간에 어느 특정한 길 하나에 들어서서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길을 다져놓는 것인지 놀라울 정도다. 숲에서 산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내 집 문에서 호숫가까지 내 발걸음으로 길이 나게 되었다. 지표면은 부드럽기 때문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다. 그리고 그 점은 마음이 가는 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상의 큰길은 얼마나 닳고 부스러졌으며, 또 전통과 순응의 바퀴자국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나는 선실 여행보다는 세상의 돛대 앞, 그 갑판 위에 서기를 원했는데, 그 자리에서라면 산 속의 달빛도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배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경험에 의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웠다. 즉, 사람이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면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일은 받아들이고, 어떤 일은 내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게 된다. 요컨대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위와 그의 내부에 확립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법칙이 확대되면서 보다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됨으로써 보다 높은 존재의 질서에 대한 허락을 받고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삶을 단순화하는 데 비례하여 삼라만상의 법칙은 덜 복잡해질 것이며, 설혹 공중누각을 세운다 해도 그 일은 헛된 수고가 되지 않는데, 누각이란 것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아래 기초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토록 서두르며 또 모험을 감행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멀리서 나는 것이든 그가 자신의 음악에 발을 맞추도록 내버려두자. 그가 사과나무나 떡갈나무만큼 빨리 성장하느냐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봄을 맞고 있는 그가 굳이 여름으로 계절을 바꾸기라도 해야 할까? 우리에게 맞는 여건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현실이 있을까? 공허한 현실이라는 암초에 난파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힘들여 머리 위에 청색 유리로 만든 하늘을 세워야 할까? 설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마치 유리 따위는 없다는 듯이 그 너머에 있는 진정한 창공을 응시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자신의 삶이 아무리 미천할지라도 그 삶을 정면으로 대하고 살도록 하라. 피하지도 욕하지도 말라. 그 삶은 당신만큼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가난해 보인다. 종종 가난하게 사는 마을 사람이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어쩌면 아무 의심 없이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넉넉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자기가 마을의 부양을 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들 중에는 부정한 수단으로 자신을 부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훨씬 더 불명예스러운 일인 것이다.
셀비어 약초를 가꾸듯 가난을 가꾸라. 옷이든 친구든 새것을 구하려고 애쓰지 말라. 헌옷을 뒤집어쓰고 옛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라. 사물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옷은 팔되 생각은 갖고 있으라. 친구가 모자라지 않도록 신께서 보살펴 줄 것이다. 설혹 평생을 거미처럼 다락방 구석에 갇히더라도 생각만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내게도 똑같이 클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 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군대라도 그 장수의 목숨만 빼앗으면 혼란에 빠뜨릴 수 있지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서라도 그 생각을 빼앗을 수는 없다.” 많은 감화에 자신을 굴복시켜 가면서까지 스스로를 계발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것은 낭비일 뿐이다. 겸손은 어둠이 그렇듯이 천상의 빛을 드러내 준다. 가난과 빈약함의 어둠이 주위로 몰려드는 순간, “보라, 삼라만상이 눈앞에 전개되지 않는가!”
우리 내면의 생명은 저 강물의 물과 같다. 올해 그 강물의 수위가 유례 없이 올라가 목마른 고지대로 범람할 수도 있다. 어쩌면 사향뒤쥐가 모두 익사하는 중요한 해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언제나 마른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내륙 오지에 난 둑에서 과학이 그 범람을 기록하기도 전에 강물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을 발견한다. 나는 지금 존이든 조나단이든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으로는 결코 밝아 오게 만들 수 없는 저 아침의 특성인 것이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저 빛은 우리에게는 어둠일 뿐이다. 그날은 바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날 동터 올 것이다. 앞으로도 동틀 날은 얼마든지 있다. 태양이란 아침에 뜨는 별일 뿐이다.
첫댓글 제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전우익씨도 아시지요?
잘 보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