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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해병대의 특성을 대변하는 상징
문구로 해병대의 일원으로서 자부심과 긍지 명예심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것 이상으로 해병대
의식 구조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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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의 피아가 대치된 상황에서 한국해병대 김성은 부대(1개대대)는 진동리 서방 고사리지구 섬멸전에서 6.25이후 파죽지세로 침공해 온 북괴군의 예봉을 꺾고 침공을 저지함으로써, 국군 최초의 큰 전과를 획득하였다. '50.8.5 이승만 대총령으로부터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획득한 뒤, 통영상륙작전에서 '50.8.17 - 9.11간 한국 최초로 단독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적을 완전 격멸하자, '50년 8월 23일 통영상륙 작전에 대한 취제차 원문고개로 해병대(김성은 부대)를 방문한 뉴욕타임즈 기자'마가렛트 히킨즈'는 해병대가 통영에서 거둔 전과처럼 기습적인 양동상륙작전으로 우세한 적군(북괴군 7사단 600여명)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귀신잡는 해병대'의 표제 아래 취채 기사를 널리 보도함으로써, '귀신잡는 해병대'란 말의 씨를 뿌려놓은 계기가 되었으며, 이 전공으로 국방부장관의 표창이 수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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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6월초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격퇴한 뒤 캔사스선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한국 해병대 제 1연대가 중동부 산악지역의 태백산맥에서 가장 험준한 전략적 요충지인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 제 5연대가 1차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한국 해병대가 임무를 교대하여 '51.6.4 - 6.20간 천연 요새인 난공불락의 진지를 돌파하여, 피와 땀으로 혈전 17일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적 1개 연대 규모를 격멸하고 24개 고지를 탈취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해병대 공훈을 치하하기 위하여 '51년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부장관 및 미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해병대 제 1연대를 방문 부대 표창장과 감사장을 수여하면서 격려사를 통하여 해병대를 '무적해병대'라 칭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무적 해병'휘호를 하달하였다. 그후, '무적해병'은 해병대의 용맹성과 상승불패의 군대임을 표출하는 상징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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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월남의 공산세력을 분쇄하고, 영원한 세계평화를 성취하겠다는 사명으로 건국사상 최초로 해외원정하는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청룡부대를 1965년 10월 9일 '캄란'만에 상륙시켰다.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은 '캄란','판랑','나트랑'방어전을
수행한 후, 1966년 9월 19일 '추라이'로 이동하여 작전임무 수행 중 월맹 정규군 제2사단 1연대와 21연대
및 지방게릴라 1개 대대가 1967년 2월 14일 23시 20분에 손틴군 짜빈동에 위치한 쳥룡부대 3대대 11중대에
인해전술로 파상적인 기습공격을 가해왔으나, 해병 제11중대는 중대 전술 기지를 사수하면서 수류탄, 크레모아, 지원화기의
적시 적절한 운영, 역습부대의 과감한 공격과 진내 육박전으로 4시간의 사투 끝에 적 사살 243명의 대전과를 획득하였고,
중대병력으로 막강한 적의 대부대를 저지 섬멸한 쾌거는 월남전 사상 유례없는 대첩이었으며, 해병대의 용감성을 전세계에
과시하였다.작전지역을 방문한 미 해병대 제3상륙 군단장 월드중장은 '내가 월맹전에서 처음보는 전과다. 전장병의
용감성은 우방군의 귀감이다'라고 격찬하였으며 외신기자들이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표제하에 대서특필로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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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창설 당시 신현준 초대 사령관은 훈시를 통해 '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온갖 고난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귀신잡는 해병대','무적 해병'의 전통을
수립 하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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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으로부터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해안교두보라는 새로운 영토를
적에게서 탈취 확보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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