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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6
3장 : 이전의 시도들
CHAPTER THREE: PREVIOUS ATTEMPTS
파란 알약을 선택하면 이야기는 끝나요.
당신은 침대에서 깨어나 당신이 믿고 싶은 걸 믿으면 되요.
빨간 알약을 택하면 당신은 이상한 나라에 머물게 되고,
난 당신에게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줄게요.
모르피우스, 영화 매트릭스에서
You take the blue pill and the story ends. You wake in
your bed and you believe whatever you want to
believe. You take the red pill and you stay in
Wonderland and I show you how deep the rabbit-hole
goes.
Morpheus, from The Matrix
서론
Introduction
일장에서, 우리는 상승 과정을 정의하고 살펴보았어요. 상승이란 기본적으로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는 걸 발견했죠. 창조를 위한 균형 잡힌 에너지의 광대한 자원이 있다는 걸 알았고, 이 에너지를 다양한 형태로 규합해서 우리의 의도를 실현하는데 사용한다는 걸 알았어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대충 살펴보았고, 에너지가 생각에 반응을 한다는 것과,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것이 창조를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또한, 창조의 과정이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았어요. 최고의 단계에서는 우리의 물리적 창조물이 아주 에너지로 충만해서 우리의 의도에 아주 잘 반응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생명의 나무를 통해 하강하면서, 에너지는 느려지고,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창조물은 반응이 느려지지요. 창조된 것들은 보다 더 물리적이구요. 생명의 나무를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은 양자적 단계 사이를 움직이는 것이고, 양자적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여분의 노력이 필요하고, 경계를 통과하고 나서는 여분의 에너지가 방출되지요.
일장에서, 우리는 창조 에너지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어요. 이 에너지의 이중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아름다운 음양의 상징을 살펴보기도 했죠. 그 우아한 상징을 살펴보면서, 에너지란 양극성이 잠재하고 있는 동시에, 균형 잡힌 일체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에너지의 균형을 벗어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았어요. 물론, 보통의 경우, 우리는 균형 잡힌 에너지를 갖고 작업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어떤 창조적 작업은 균형이 깨진 에너지로만 작업이 가능해요. 상승의 경계선을 통과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런 경우이지요. 양에너지가 더 필요하거든요.
이번 장에서는, 상승의 경계선으로 이 우주를 끌어올려서 통과시키려는 이전의 시도를 살펴봄으로써 상승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려고 해요. 우리가 경계선을 뛰어넘어서 이 제일 낮은 차원을 맨 위의 차원으로 돌이켜서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사실 우리는 세 번의 큰 시도를 했어요. 하지만, 상승의 경계선을 넘어서려는 우리의 시도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창조의 에너지가 어떻게 쓰이는지, 그리고 불멸의 영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에너지를 다루어서 우리가 의도하는 최선의 결과를 얻도록 만드는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해요.
다시 한번 에너지에 대하여 - 균형이라는 문제
Energy Revisited - A Question of Balance
이 시점에서 왜 우리가 상승을 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도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우리의 실패는 에너지가 실행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어요. 전에 언급했듯이, 에너지는 균형 잡힌 잠재성으로 통일된 자원이에요. 우리는 이런 에너지의 보편적인 자원을 균형 잡힌 상태로 쓸 수도 있고, 에너지적인 잠재성이 한 쪽으로 치우친 상태로 쓸 수도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균형 잡힌 에너지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럴 경우에 창조가 제일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에요. 균형 잡힌 상태에서 작업을 하면, 일을 성사시키기에 딱 맞는 정도의 창조적 표현력과 (양) 에너지적 스파크가 생기고, 또한 사물들을 통합적으로 유지하기에 딱 맞을 정도의 형성력(음)이 생기거든요.
안타깝지만, 모든 단계에서 균형 잡힌 에너지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차원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에너지는 느려져요. 이렇게 되면, 에너지가 실현하는 물리적 물질이 점점 무거워지고 갈수록 관성이 커지지요. 이런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양 에너지 쪽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해야 해요. 기초단위를 자극해서 추가적인 운동량을 얻고자 함이죠. 이것은 점진적인 과정이에요. 생명의 나무를 내려가면서, 우리는 창조 에너지를 점점 한쪽으로 더 많이 치우치게 만들면서 나아가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낮은 차원에서 물리성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적 추진력을 더 많이 얻게 되죠.
물론 그 대신 잃는 것도 있어요. 에너지를 균형을 벗어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의도가 실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요. 균형에서 많이 벗어날수록, 그 영향은 뚜렷해지지요. 예를 들면, 양 에너지를 더 많이 쓸수록, 피조물이 자극을 더 많이 받게 되지요. 자극이 많아지면 그건 여러 방식으로 드러나요. 자연세계에서는 급격한 진화로 나타나고, 자연의 에너지가 심한 변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우리의 몸에서는 남성적인 성향인 야망, 추진력, 경쟁심 등으로 양 에너지가 표현되어 나타나게 되지요.
양 에너지 쪽으로 치우치면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실현의 속도가 더 빨라진다는 것이에요. 상승의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더라도, 양 에너지를 증가시키면 현실화를 더 빨리 할 수 있어요. 양 에너지가 많아질수록, 물리성은 자극을 더 받게 되고, 우리는 더 빨리 움직이게 되고, 일을 완수하는데 시간이 덜 걸리게 되죠. 시간을 우리가 주관적으로 인지할 경우에도 이런 자극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어요. 이번 상승 시도가 막바지에 이르러 물리적 상태가 자극을 받으면서, 시간은 점점 단축되어서 이젠 우리가 훨씬 짧은 시간에 훨씬 많은 걸 성취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러한 시간의 압축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퍼부은 추가적 양 에너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죠.
초과된 양 에너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함의를 갖는데, 낮은 차원에서 물리성의 특성인 육중한 관성과 동시에 작용할 때 더욱 그렇죠. 양 에너지가 초과된다는 것은 물리적 현실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는 걸 뜻해요. 양 에너지가 물리성을 통제하는 우리 능력에 끼치는 영향을 상상하려면, 일장에서 소개한 기차 비유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겠네요. 각각의 차원에 있는 물리적 우주를 우주의 기찻길에 놓여있는 하나의 기다란 기차라고 생각해보세요.
에너지가 빠르게 진동하는 높은 차원에서는 물리성 기차(TOP, Train of Physicality)가 작고 가벼워서, 우리 의도에 잘 반응해요. 우리가 그걸 움직이고 싶으면, 그건 금방 가속이 붙지요. 그걸 멈추고 싶으면 (또는 관심을 끊으면), 그건 금방 멈춰요. 움직이는 동안 물리성 기차가 축적한 운동 에너지와 관성이 비교적 작은 편이거든요. 물리성 기차가 작고 반응이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기차를 움직이거나 속도를 조절하는데 많은 힘을 들일 필요가 없어요. 조그만 엔진이면 충분하죠.
물리성 기차의 비유를 좀 더 확장해서 모양을 형성하는 에너지인 음 에너지를 포함시켜 보기로 해요. 여기서 음 에너지는 불멸의 영으로서 우리가 기차의 방향을 지시하기 위해서 깔아놓는 기찻길에 비유할 수 있어요. 높은 차원에서는 형태를 만드는 음 에어지는 더 강력해서 양 에너지에 균형이 맞추어져 있어요.
그 결과, 기찻길을 까는 게 쉽고, 기찻길은 쉽게 기차의 무게를 받쳐줘요. 방향을 바꾸고 싶다면, 강력한 음 에너지가 기찻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거나 심지어는 아예 완전히 새로운 길을 깔 수 있도록 도와주죠. 높은 차원에서는 에너지가 진동수가 높으면서 균형 잡혀있기 때문에, 창조물을 조절하기가 쉬워요.
생명의 나무를 내려오면서, 상황은 바꿔요. 아래로 내려올수록, 창조물은 점점 반응이 느려지고, 우린 에너지를 점점 더 균형에서 벗어나게 써야 하죠. 가장 낮은 차원에 이르면, 에너지는 꽤나 묵직해지고 걸쭉해져요. 이 같은 밀도 때문에, 뭔가를 움직이려면 양 에너지가 훨씬 많이 필요해요. 기차로 비유하자면, 기차를 출발시키거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엔진이 더 커져야 하죠. 물론, 양 에너지를 높이면 음 에너지가 약해져요. 따라서, 기차가 더 무거워지고, 다루기 거북해져서 출발과 정지를 하기가 더 힘들어질수록, 음 에너지인 기찻길은 더 작아지고, 약해지고, 깔기가 더 어려워지죠.
이것이 뜻하는 바를 바로 알 수 있을 거에요. 낮은 차원에서는 물리성 기차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힘이 더 들고,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세우는데 힘이 더 들고, 방향을 바꾸는데 힘이 더 든다는 것을요. 일단 기찻길을 깔았는데 기차가 가는 방향이 맘에 안 든다고 하면, 기차를 세워서, 다시 뒤로 돌리고, 새로운 기찻길을 깔아서 과정을 다시 시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리고 상황이 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통제 불능 상태로 돌변할 위험이 실제로 있어요. 예를 들면, 물리성 기차가 빨리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보내고 있는 방향이 벽돌 담장으로 곧장 향해 있다는 걸 갑자기 알아차리게 되면, 예상치 못한 물리적 장애(담장)에 부딪혀서 폭발하기 전에 기차를 멈추기가 어려울 수도 있어요.
당연히, 우리가 통제를 잃어버릴 위험은 기차가 커지고 강력해질수록, 그리고 기찻길이 약해지고 깔기 어려워질수록, 더 커져요. 차원이 내려갈수록, 우리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해요. 그리고 우린 주의를 기울여요. 불멸의 영으로서 우리는 창조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아요. 생명의 나무를 하강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물리성을 진동을 통해서 하나씩 생성해가면서, 우린 에너지적 균형을 조심스럽게 조절해요.
음양을 어떻게 조절해서 균형을 맞춰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영적인 계산을 하는데, 항상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운 예상치를 바탕으로 계산하죠. 그럴 만도 한 게, (양 에너지가 모자라서 느리게 움직이는 기차의) 등식에 양 에너지를 추가하는 것이, 양 에너지가 지나쳐서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조정할 수 없게 된 물리성 기차를 멈추는 것보다 쉬우니까요.
창조의 계단을 내려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는 양 에너지를 조금씩 늘여나가다가 경계선에 이르면, 우리에게 익숙한 빅뱅과 함께 새로운 차원의 우주를 생성시킬 수 있도록, 경계선을 뛰어넘을 만큼 충분한 힘을 얻을 때까지 양 에너지를 증가시켰어요. 문제는 우리가 맨 끝까지 내려온 다음에 이 낮은 차원의 물리성을 생명의 나무 위로 끌어올리기로 결정했을 때 생겼죠. 우리가 처음으로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시작했을 때에도, 우린 아주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이 단계에서는, 이미 물리성이란 기차가 아주 약한 기찻길 위에서 막대한 관성을 싣고서 달리고 있는 상태였거든요. 양 에너지를 아주 조금 더 올리는 것도 상황을 상당히 불안한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불멸의 영이고 우리는 물러서지 않아요. 첫 번째 시도에서 우리는 양 에너지를 아주 조그만 더 올리고 난 다음, 상승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레무리아 Lemuria
이 차원에서 상승을 위한 조건을 창조하려 했던 우리의 첫 시도는 레무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려요.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생명의 나무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나무에서 내려올 때 필요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 에너지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통제를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꽤나 조심스러워 하면서 양 에너지를 추가해갔어요.
레무리아의 경우, 양 에너지가 한 35% 정도 더 초과된 정도의 불균형이라면 안전할 거라고 우리가 느꼈다고 쳐봐요. (여기서 숫자의 정확성은 중요하지 않아요. 불균형의 양적 정도에 대해서 대충 감을 잡기만 하면 되요.—저자 주) 이 정도 불균형이라면, 창조물이 불타버리거나 궤도에서 탈선할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물리성이 상승의 경계선을 넘어서기에 충분한 운동량이 발생되지 않을까 희망한 것도 사실이에요.
우리의 첫 선택은 합리적인 예측이었고, 창조적인 결실을 맺기는 했어요. 우리 의도에 반응해서 사물들이 움직이기에 필요한 창조적인 추진력을 추가로 얻었어요. 원시적인 늪이 생성되었고, 초기의 생명체가 생겼고, 더 높은 인식으로 진화하였고, 마침내 뇌의 용량이 커지고 육체가 성숙하면서, 물질 안에서 의식이 나타났어요. 이것은 정확히 우리가 원했던 그대로였어요.
이러한 진화의 결과는 그야말로 장관이었어요. 레무리아 실험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완벽에 가까웠어요. 생태계는 완벽하게 조율되었고, 동물들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았어요. 생명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은 정말 눈부실 정도였지요. 레무리아 시기의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지금 상상해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죠. 우리는 그에 비견할 만한 대상을 아예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환상을 그리는 화가들의 상상도 안에서라면 혹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요.
레무리아에 대해서는 많은 걸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레무리아 실험의 가장 결정적인 성격 중 하나이자, 여기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만물 사이에서 느꼈던 상호 연결성이에요. 레무리안들은 이런 연결성을 아주 강하게 느꼈어요. 그건 그들 삶의 일부였지요.
마야인들의 인사말인 “인 락 에쉬(In Lak’ech),” 즉 “나는 또 하나의 당신”이라는 뜻의 말은 레무리아의 모든 생명 사이에서 느꼈던 깊은 상호연결성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어요.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이 상호연결성은 여전히 강력했던 음 에너지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해요.) 레무리아 문명의 영적 수준은 매우 높았어요. 레무리안들은 평화와 조화, 그리고 풍요 속에서 살았어요. 레무리아는 마치 에덴의 동산이 그랬다고 하는 것처럼, 두려움도, 분노도, 증오도 찾기 힘들었어요. 레무리아 문명은 물리적 창조의 영광스러운 금자탑이었죠.
이 초기 이상향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유전자에 많이 남아있어요. 우리의 종교, 신화, 그리고 노래에 스며들어서, 어딘가 일찍이 있었던,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실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맘이 들 때마다 되풀이되곤 하죠. 물론, 우리 모두 이런 종류의 사회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억하고 원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런 사회를 이해하거나, 진가를 알아보거나, 심지어는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힘들어해요.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사고방식이 레무리아 방식과는 워낙 정반대라서 우린 그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업신여기고, 그 자취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걸 파괴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우리가 현 상황을 유지하는데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에요.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레무리아 사회가 남아있는 자취를 봐요. 왜 그랬는지 하는 이유는 조금 있다 분명히 알게 될 텐데, 우리가 레무리아 실험을 끝내고 나서도, 불멸의 영은 레무리아 문화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았어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좀 알고 싶으면,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 걸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보면 되요. 그들의 사회는 고대 레무리아 문명의 물리적 흔적들이죠. 원주민들은 모두 최초의 레무리아 문화와 유전적으로 연결되어있어요.*
* 레무리아 사회가 과연 어땠는지 느껴보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레무리아 사회에서, 아이들은 영예롭게 예우 받았어요. 어린이들은 신성이 보낸 새로운 사자들로 여겨졌고, 우리 사회에서처럼 속이 텅 빈 그릇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레무리아인들은 자기 자식들을 소유하지 않았고, 그들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 기능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헛소리를 자식들에게 주입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어린이들을 자기들 이미지를 그대로 베낀 조그만 복제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임금노예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 대신, 레무리아인들은 어린이들을 보호했고, 그들 원래의 모습인 빛의 아이들로서 그들을 키웠고,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배우듯이, 어린이들로부터 배웠어요. 그것은 아름답고, 공평하고, 영적으로 우아한 관계였지요.
우리는 그들을 실내에 가둬놓고, 복종과 순종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적 연결성을 약화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어린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질 못해요. 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파괴하지요. 그들 스스로의 깊은 영적 필요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신, 남이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주는 직장이나 경력 또는 다른 형태의 노예제도에 그들이 편입되기를 우린 바래요. 우린 그들을 비틀고, 으깨고, 그리고 나서는 그들이 사람 됐다고 하죠.
이건 끔찍한 농담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이 어른이 될 무렵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단절되어서, 원래 자기 자아의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게 되니까요. 그들은(우리는) 그 지경이 된 다음에야, 기형적인 관계들과 왜곡된 사회적 형식 속에서, 잃어버린 연결에 대한 느낌을 되살리려고 발버둥치느라 우리의 시간을 다 쓰죠.
우리들의 방식과 레무리아의 방식은 또 다른 차이가 있어요. 레무리아 사회에서, 원로(노인)들은 영예롭게 예우 받았어요. 그들이 땅과 영에 오랜 세월 동안 바친 봉사의 삶을 사는 동안 쌓아올린 지혜의 화신으로 그들은 존경 받았어요. 레무리아인들은 이 행성에 있는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고, 삶이란 여정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지금 그러하듯이, (물리적 몸의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두려워하고, 그 종착역의 기미가 눈에 띠는 대로 감추려고 허둥거리는 대신, 레무리아인들은 종착역을 영예롭게 여기고, 장거리를 여행한 이들을 영예롭게 대접했어요.
두려움에 그들을 감추어 두려고 하지 않았고, 원로들이 마을에서 영예로운 예우를 받고 살면서, 마을에 공헌할 수 있는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방법들을 제공했어요. 정말로, 어린이들을 기르는 것은 우선적으로 원로들의 책임이었는데, 그건 오직 원로만이 어린 생명을 보살피는 영예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신뢰받았기 때문이에요. 원로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내내,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남아있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원로들을 감추어 놓죠. 그들은 노쇠하고, 비생산적인 존재라고 우리는 믿고, 그들이 평생 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짐짝처럼 취급해요. 집 안에 그들을 놓아두고서, 그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건설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삶에 그들이 줄지도 모를 지혜를 무시해버리죠. 우리는 공동 책임을 지는 대신, 몇몇 여인들의 등에 그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떠넘겨 버려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생산적인 사업에서 일하는 생산적인 개인만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우리가 배웠기 때문이지요. 늙은 육체는 젊은 육체만큼 에너지로 충만하지 않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기에 쓸만한 상품으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또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요. 우리에겐 제대로 된 영적 연결성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몸(우리 자아)의 종말이라고 밖엔 못 봐요. 원래는 아름다운 이행의 순간으로 여겨야 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린 죽음의 모든 기미를 감추어두려 하죠.
레무리아 사회는 노예제도(생산성)을 우리처럼 영예롭게 여기고 숭배하지 않았어요. 레무리아는 창의성과 자기표현이 최상의 목적으로 여겨진 아름답고 균형 잡힌 세상이었어요. 그들은 커피 타임은 단 15분이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라는 걸 배우느라 학교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지 않았죠. 그들은 권위를 숭배하는 걸 배우느라 오랜 세월을 보내지 않았어요. 그들은 지독한 예속 아래서 공장 조립라인이나 책상에 스스로를 묶어놓지 않았어요.
그 대신, 레무리아인들은 단일자의 불꽃들(Sparks of The One)이 되어 자신의 연결성과 목적성을 존엄과 자부심과 영광스러움으로 표현하도록 배웠어요. 우리가 일을 이해하는 감각으로 보자면, 레무리아인들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하면 자신의 가슴이 신나 하는 그런 일만을 하고 지냈어요.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음악이었고, 다른 이들에겐 서비스였어요. 아무도 다른 이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고, 모두 독립적이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표현력을 지닌 존재들이었어요.
개인들 하나하나가 자기들이 존재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했죠.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삶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달리, 부족함이 아니라 풍요로움이 신의 모든 창조물의 타고난 권리라는 것을 알고 가슴깊이 이해하고 있었지요.*
레무리아 사회에도 분쟁은 있었어요. 많은 부족들과 이민족 집단들이 있었고, 그들이 언제나 서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마찰은 항상 미미했고, 분쟁의 상대편 당사자는 영의 가족 중에 가치 있는 일원이라는 전제가 항상 있었어요. 레무리아 사람들은 “나는 또 하나의 당신”이라는 걸 이해하거든요.
그 결과, 분쟁은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시작된 적이 없었고, 특히 다른 부족을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분쟁이 시작된 적은 결코 없었어요. 단 한명의 개인을 파멸시키는 것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건 마치 자기 손을 자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지요. (저자 주)
레무리아 문명은 경이로웠고, 창의적이었고, 균형 잡힌 문명이었어요. 안타깝게도, 레무리아는 상승의 경계선을 뛰어넘을 만큼 양에너지가 충분하지는 못했지요. 이 땅에서 현실을 만든 유일한 이유가 상승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현실을 재구성하고 에너지 균형을 다시 설정하는 식으로 레무리아를 종결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비록 레무리아 문명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레무리아 사회의 일부는 보존되었고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어요. 이 지구의 에너지가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오면, 많은 이들이 필요하다고 여길 치유의 과정에서 그들의 지혜와 영적인 지식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출처 :빛의 길로 원문보기▶ 글쓴이 : 순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