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조 청원군은 따님 한 분만 두어 외손봉사(外孫奉祀)로 지금에 이르렀다는 묘비문 일부 _ 카페지기
[..공은 따님 한 분만 두셨는데 덕수이씨 춘당공 휘 양(德水李氏 春塘公 諱 揚)의 장자 명신(明晨)에게 출가하였다 명신(明晨)은 지돈령부사 증시 강평(知敦寧府事 贈諡 康平)으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증손 용재 이행(容齋 李荇)은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의 종주(宗主)이며 도학(道學)에는 五대손 율곡 이이(栗谷 李珥)선생이 있고 동방의 이태백으로 불리는 6대손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과 조선조 4대 문장가인 7대손 택당 이식(澤堂 李植)이 있다 이외에 상신 7명과 대제학 五명을 배출하였으며 대대로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외손봉사(外孫奉祀)로 지금에 이르니 6백년간의 독실(篤實)함이 후손에게 효(孝)의 귀감(龜鑑)이다 이에 덕수이씨 춘당공 문중과 숙의(熟議)하여 공(公)의 약기(略記)를 돌에 새기어 세우노라]
* 청송심씨대종회에서는 지난 10월 10일 청송심씨 5세조 청원군(靑原君) 묘비(墓碑)를 새로 찬하여 건립하고, 양위분(兩位分) 산소사초(山所莎草)와 주변 정화작업(淨化作業)을 마친 후 덕수이씨(德水李氏) 춘당공파 문중과 함께 고유제(告由祭)를 봉행(奉行)하였다.
五世祖 靑原君 諱 淙 墓碑文(5세조 청원군 휘:종 묘비문)
▶소재지: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공(公)의 휘(諱)는 종(淙)이요, 시조 문림랑공 휘 홍부(始祖 文林郞公 諱 洪孚)의 四대손으로 청송인(靑松人)이다.
공은 조선조(朝鮮朝)초에 좌정승(左政丞)을 역임하신 청성백 휘 덕부(靑城伯 諱 德符)의 7형제 중 여섯번째로 출생하였으나, 자(字)와 호(號) 출생년도가 모두 부전(不傳)으로 알 수 없는바 형님이신 안효공 휘 온(安孝公 諱 溫)이 1375년생인 것으로 미루어 공은 1377년에 출생하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로부터 청성백(靑城伯)에게 사돈 삼기를 요청하여 태조의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를 맞아 부마(駙馬)가 되니 16세 정도로 추정되며, 태조 2년 10월 17일 청원군(靑原君)에 봉군(封君)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태조 7년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정안군(靖安君)을 도와 정종(定宗) 즉위에 공훈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태종8년 청원군에게 직접 경상도 절제사(慶尙道 節制使)를 제수하였으며, 태종 10년 4월에는 태종의 모후 신의왕후 한씨(母后 神懿王后 韓氏)의 명복을 비는 연화경법회(蓮華經法會)에 헌향사(獻香使)로 파견되어 헌향하였다.
태종 13년 가을에 임금이 전라도에서 실시된 무예(武藝)훈련에 거동할 때 청원군께서 배종(陪從)하게 되었으며, 그 때 전주에 체류하는 동안 임실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회안군(懷安君)이 보내온 생강 한 상자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주상께 고하지 않고 지내온 것을 문제삼아 다음해 사헌부에서 청원군의 불충한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탄핵을 받게 되었다.
이에 상감께서 사헌부에 이르기를 「불충한 사람은 법에 의해 조처해야 한다 그러나 외방에 자원부처(自願付處)하되 편의를 살피고 반드시 생명을 보전하게 하라」하였다.
태종 16년 11월 9일 공의 원(願)에 따라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파주 교하(郊河)로 안치되었으며, 얼마 후에 공신들이 주청하기를 우리는 서로 정사(政社)를 맹약하고 거사하여 공신이 되었는데 종사(宗社)와 관계되는 죄가 아니면 벌을 주지 않음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다음날 6조(曹)의 대간(臺諫)들이 청원군의 죄목을 들어 다시 취조하기를 주청하자 태종이「청원군의 죄상이 크지 않고 이미 당사자를 외방으로 안치하였는데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대간들이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누차 주청함에 따라 공을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옮겨 안치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다음해 안치소에서 득병(得病)하였으나 간병(看病)이 부실하여 병세가 악화되고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태종 18년 3월 15일 생을 마치니 향년(享年) 42세이다.
이날 강풍이 회오리치고 때 아닌 우박까지 내림에 세인들이 말하기를 공의 죄가 사소한데 가혹한 벌을 주었으니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공은 따님 한 분만 두셨는데 덕수이씨 춘당공 휘 양(德水李氏 春塘公 諱 揚)의 장자 명신(明晨)에게 출가하였다.
명신(明晨)은 지돈령부사 증시 강평(知敦寧府事 贈諡 康平)으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증손 용재 이행(容齋 李荇)은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의 종주(宗主)이며, 도학(道學)에는 五대손 율곡 이이(栗谷 李珥)선생이 있고, 동방의 이태백으로 불리는 6대손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과 조선조 4대 문장가인 7대손 택당 이식(澤堂 李植)이 있다.
이외에 상신 7명과 대제학 五명을 배출하였으며, 대대로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외손봉사(外孫奉祀)로 지금에 이르니 6백년간의 독실(篤實)함이 후손에게 효(孝)의 귀감(龜鑑)이다. 이에 덕수이씨 춘당공 문중과 숙의(熟議)하여 공(公)의 약기(略記)를 돌에 새기어 세우노라.
靑松沈氏大宗會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