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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설교집 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오늘은 주기도문 네 번째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중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어떤 내용을 이렇게 표현하셨는가? 주기도문 한 구절 한 구절을 우리가 볼 때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성경 전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2000년 동안 신학자들이 성경을 놓고 고민한 내용들을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이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놓고 얼마나 고민했는가를 짧게 인용을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늘날”, 즉 헬라어로 세메론이라는 단어 때문에 고민한 연구들이 있고, 그 다음에 “일용할”, 즉 에피우시오스라는 단어 때문에 고민한 것이 있고 마지막으로 “양식”, 즉 아트로스라는 단어에 대해서 고민한 많은 연구들이 있습니다. 세 단어 각각에 대해 엄청난 고민들을 했는데 여기서는 "양식"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만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떤 고민들을 했는지 그 예를 보는 것이지요.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용어이다.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렇게 비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하였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서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기본 동인을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부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이와 비슷한 고민들이 사실은 "일용할"이라는 단어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일용할”이라는 것은 "하루에 쓰이는"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도 "daily"라고 번역을 하는데 사실은 에피우시우스라는 이 단어는 “하루에 필요한”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아닙니다. 원래 헬라어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영어로 말하면 "uncoming", 즉 "앞으로 다가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 오늘 하루 필요하게 될 양식을 주시옵고" 이런 의미가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벌게이트역이라고 부르는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던 제롬이 이 “일용할”이라는 단어를 "슈퍼스티안렐"이라는 라틴어로 번역을 했다고 그래요. 아주 깊은 고민의 산물이죠. 번역이라는 것은 고민과 고민의 산물이니까요. 그런데 이 라틴어 단어의 뜻은 "물질을 초월하는"이라는 뜻이랍니다. "above real substance"라는 "물질을 초월하는"라는 의미로 이 “일용할”을 번역을 했다고 그래요. 제롬이 고민을 한 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서 이 양식을 우리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음식으로만 보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을 했던 거겠죠. 그런데 아까 제가 죽 읽어드렸던 주석에서는 "이것은 음식물로만 보아야 맞는다."라는 주장을 한 겁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각각 엄청난 양의 주석이 붙어 있습니다. 2000년 동안 고민을 했던 결과물이지요. 이 단어를 도대체 무슨 의미로 볼 것인가?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원어 사전 하나 달랑 들었다고 해서 성경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서 이천년간의 고민이 집적이 되어 있는데 그 고민들을 우리가 다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내 눈으로 성경을 보고 내가 내 눈으로 사전들을 찾아가면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산입니다. 그것은 학문적인 태도로 접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적인 태도로 접근을 하든, 계룡산 도사 같은 태도로 접근을 하든 혼자 힘으로 성경의 뜻을 알아내겠다는 것은 엄청난 오류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석을 계속 확인을 하는 작업을 해나가야 하는데 물론 우리 개개인이 다 그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즉 한 몸 공동체에서는 각각 맡은 서로 다른 역할이 있으니까 주석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 철저하게 계속 주석을 확인하여 나가야 합니다. 이 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신학자들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죠.
오늘 유난히 주석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인용을 해드린 이유는 여러분들이 혹시 제가 전해드리는 말씀을 들으면서 "전도사님이 비약이 좀 심한 것 같다"고 생각을 하실까 봐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을 하지만 - 신학자들이 먼저 고민한 내용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제 자신도 항상 설교를 하기 전에는 능력이 닿는 대로 주석을 확인을 합니다.
오늘 예배를 시작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핵심은 뭐죠?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신 말씀을 쭈욱 하신 거죠. 우리 먼저 마태복음 4장 보시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내 육체의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살아야 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으로만도 아니지요. 양쪽이 다 필요하다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묵상한 요한복음 6장으로 가보시죠. 요한복음 6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다 중요한 말씀이지만-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꼽는다면 이렇게 됩니다. 63절 보시지요.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 말씀을 하고났더니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게 됩니까? 66절이지요.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 부분이 우리에게 오늘 성경에서 듣게 될 진리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잠시 시간을 내어서 가이사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이사의 세계의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면서 삽니다. 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면서 산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밥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물론 첫째로는 세상 사람들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며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것이 먼저 먹을 것을 위해서입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먹을 것을 서로 나누어 먹을 가능성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음식물의, 제가 숫자를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좀 산다는 나라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지구를 더럽힐 정도로 배출되고 있지요. 북한과 우리를 비교하는 분들도 있고 한데 먹고 살만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자원의 배분 문제는 사치스러운 문제이고 당장 먹을 것의 재분배 문제가 너무너무 심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어떻게 나누어 먹을 것인가를 계속 소리 높여 외치는 분들이 많이 있죠. “좀 내놔라!”하면서. 그걸 주장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보면 ‘아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이 기본적인 음식은 나눠 먹을 가능성도 있겠다’라는 희망도 가지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실제 현실을 보면서는 과연 세상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절망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금 세계 현실이죠. 그래서 가이사의 세계에서 육신의 양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될지. 그런데 성경에서 그 부분을 보면 성경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듯이 말씀을 합니다. 우리 전도서 볼까요.
(전도서 6: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북반구라고 해도 좋고 서구 열강이라고 표현해도 좋은데-서구 열강이라는 표현은 좀 들어간 것 같아요. 요즈음 중국이 워낙 커져서 - 이런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윤리 도덕의 문제냐? 아니라는 거죠. 이건 본능의 문제라는 겁니다.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가는 현장이 죄악된 현장이냐? 가이사의 세계에서 말하기를 악한 현장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렇게 단순히 윤리도덕적인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이죠.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 나가는 것은 그만큼 상을 풍성히 차리지 않으면 못 견디기 때문입니다. 절반이 쓰레기로 나가더라도 그만큼 상을 차려야 그나마 조금은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는 거죠. 오늘 전도서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의 식욕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먹을 것에 대한 탐욕이라는 것이 그 날 한 끼로 끝납니까? 그 다음 끼니에도 문제가 있죠? 올 겨울 먹을 양식, 그리고 내년엔 어떻게 먹을 것인가? 우리나라의 경우 내년에 경제 성장율이 3%는 되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5년 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은 “10년 후에 먹고 살 것을 지금 대비해야 한다.” 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거기서 끝납니까? 우리 다음 세대 걱정으로 날밤을 세우죠? 국가 차원에서도 우리 다음 세대들을 걱정하고 우리 개인들도 "내 새끼들, 내 새끼들이 결혼한 다음에 또 새끼들을 낳을 것이고, 그 다음엔 또 어떻게 할까?" 끝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절제를 해서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을 좀 반성을 하고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자는 얘기는 사실 하나마나한 소리라는 말입니다. 그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마치 유토피아에 대해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육신의 양식의 문제를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본능의 문제이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있는 것이 파렴치한 죄의 문제나 악의 문제로 우리가 볼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건 그 사람들의 본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와 그 다음 세대까지 걱정하야 하는 본능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프리카에 먹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겠어요? 내 새끼와 내 새끼의 새끼들이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판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먹을 것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인가? 우리 데살로니가후서 먼저 보시죠. 3장 10절입니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겁니다. 즉 각자는 일을 해서 자기 먹을 것을 구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외는 있지요.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먹을 것을 스스로 벌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예외입니다. 물론 당연한 말씀이지요. 따라서 상황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벌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런 시스템, 그런 생각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이제 고린도후서를 봅니다. 8장 14절과 15절입니다.
(고후 8:14~15)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때의 장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많이 거둔 자는 어떻게 되었죠? 넘치는 잉여 수확물은 썩어버렸죠. 그리고 모자라게 거둔 자는 집에 가지고 가서 보니까 100%가 되어 있더란 말이죠. 그것이 출애굽기 16장에 있는 만나 사건입니다. 그것의 신약적인 의미를 사도 바울이 14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잉여 생산한 사람은 생산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 줘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경제원칙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것의 10배를 벌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죠? 10배를 벌어야죠. 왜냐하면 스스로 생산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 9명이 나로 인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먹을 것의 10배를 버는 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헌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경제원칙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가이사의 세계의 사람들은 절대 이렇게 못하죠. 왜? 내 새끼의 새끼들까지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왜 이렇게 할 수 있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것을 체험하고 그것이 실제 현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관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말입니다.
자, 이제 육의 양식에 대한 말씀은 이 정도로 마치고 그 다음에 혼의 양식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가이사의 세계의 예를 들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가 뭐였습니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 사람들은 자유가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에게, 프랑스 대혁명 때 분노한 민중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였습니다. 만약에 너희가 우리에게 자유를 못주겠다면 나는 차라리 여기서 총에 맞아 죽더라도 너희들에게 항거하겠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자기 목숨보다 귀중한 것을 자유라고 규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아주 안타깝게 자살을 하셨는데요. 왜 자살을 하셨을까요? 뭐 정치적인 복선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추리할 필요는 없겠고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 분 판단에.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간 것이지요. 뭐 유언에도 그런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존심이 지켜지는 환경이 제공되어야만 했습니다. 자살률이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가늠하는 지표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자살하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지금도 소수 있을 수는 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자기 자존감이 보장이 안 되기 때문에 자살을 합니다. 자기 존재가치를 자기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이 자기 존재 가치를 매일매일 확인하는 것이 바로 혼적인 양식입니다. 내 존재감, 내 생존의 이유 - 내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생존의 이유가 항상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급되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다가오면서 이 사람은 더 이상 생존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따라서 가이사의 세계에서 육신의 양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양식입니다. 정신적인 양식의 핵심은 자존감입니다. 자기 자존감.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정신적인 차원에서 생존을 하는데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신정론 살펴보면서 신학자들이 세상의 악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보았었죠. 첫 번째는 자연재해라는 악, 두 번째는 도덕적인 악, 그 다음에 세 번째가 형이상학적인 악, 즉 존재의 불안정성의 문제 - 존재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고통- 그것을 형이상학적인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그 부분이지요. 자기 존재의 불안정성. 이것을 앞에서 말씀드린 자존감과 분리해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자존감이 지켜지든 말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존경하든 말든 자기 존재의 불안정성과 죽은 다음의 문제라는 이 존재의 불안정성이 또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 존재의 불안정성이 해결되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어집니다. 그것이 이제 우울증 같은 증세로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이 존재의 불안정성의 문제가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존재의 불안정성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이사의 세계에서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일시적인 방법은 있지요. 약물 같은 것을 사용하는 일시적인 방법은 있습니다. 제가 뭐 의료종사자는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는 언급해도 되겠지요? 약물 같은 것으로 대증요법을 임시방편으로 사람들이 개발을 했고 앞으로 또 개발을 계속하겠지만 본질적으로 가이사의 세계에서는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죽음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문제를 누가 건드리고 있는 거죠? 종교가 건드리고 있습니다. 불교도 윤회설이라든가 십이연기설이라든가 해탈이라는 것들이 그 문제를 얘기하고 있고. 샤머니즘도 이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이 어원이 "모퉁이를 돌아가셨습니다."라는 것이라면서요? 몇 년 전에 어디서 봤는데, “돌아가셨다”라는 표현이 “모퉁이를 돌아가셨다”라는 뜻이랍니다. 오셨던 곳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모퉁이를 돌아간다는 동사라고 그래요. 왔던 곳으로 돌아가든, 모퉁이를 돌아가든 좌우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사후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그런 표현들이 생길만큼 속박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그걸 건드리고, 샤머니즘까지 그걸 건드린단 말이죠. 이 부분이 이제 죽은 다음의 문제를 신에게 맡겨버림으로서 탈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최면이죠. 전혀 입증되지 않은 종교적인 신념, 교리적인 신념으로 이 존재적인 불안정성에서 탈피를 하려고 합니다. 가이사의 세계에서 종교라는 것이 그것을 제공해주죠. 이 두 가지를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요한복음 6장으로 다시 가보시죠. 55절에서 58절을 봉독합니다.
(요 6:55~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 생명의 떡 이렇게 부르시는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존재의 불안정성의 문제의 해결. 바로 영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나 암송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이 영생이 성경의 약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여호와는 내게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서 그 부족함이 없다는 것에 절반은 현실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고 절반은 존재의 불안정성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개념입니다. 이 존재의 불안정성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이 땅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다 받아서 다 누리더라도 그건 사상누각입니다. 어느 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이 약속의 실현은 그 두 가지 문제가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실현되는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문제와 영생의 문제, 영혼의 문제, 사후의 문제, 죽음의 문제가 거의 반반의 비중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혼적인 차원에서 첫 번째 말씀드렸던 자존감, 자기의 존재가치의 문제가 시기, 질투, 투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자존감 즉 자기의 존재 가치를 비교 우위에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할 때입니다. 그때 나의 존재가치가 확인이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투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는 부족한 것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그 사람을 쓰러트릴 때 내 자존감이 확인이 되기 때문에 경쟁이 계속됩니다. 단순히 학생들 좋은 대학 가기 위해서 경쟁하고, 좋은 직장 구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내 사업 성공하기 위해서 동종업계에 있는 다른 사람하고 경쟁하고,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저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경쟁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 질투, 경쟁이라는 것은 뿌리가 굉장히 깊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존재감에서 만족을 못합니다. 인간의 성취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빌게이츠를 생각하면 빌게이츠가 만족하며 살 것 같지만, 천만에요. 빌게이츠에게도 애끓는 소원이 있다 이겁니다. 제가 직접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뻔하다, 이거지요. 소원이 없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소원이 있다는 게 뭐죠? 자기 존재가치가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전도서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 부분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의 입이 절대로 만족을 하지 못한다. "은으로 만족함이 없다" 이런 표현도 있죠. 전도서에서 계속 이걸 지적을 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계속 성취 욕구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계속 자행하는 것이 경쟁과 투쟁입니다. 불교에서 거기서 해탈을 해보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죠. 저는 불교의 그런 노력을 높이 삽니다. 핵심을 정확하게 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답은 없더라는 거죠. 평생 수행만 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 부분이 어떻게 해결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을 하시는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뭐에요? 이게 바로 유업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살펴보았던 클레로스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 유업.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업을 받게 되면 우리가 더 이상의 욕심을 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구약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이 샘플이었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업을 나누어 줍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리더십을 받은 다음에 므낫세 지파와 르우벤 지파에게 먼저 이 쪽 땅을 나누어주고, 나머지 열 지파를 데리고 강을 건너가면서 강을 건너가서 땅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서 이 두 지파에게서 군대를 차출하게 되죠. 너희는 이미 땅을 받았지만 나머지 열 지파가 받는데 너희가 기여를 해라. 이래서 같이 넘어가죠. 넘어가서 나누어 주는 게 이 기업, 유업이라는 겁니다. 이 기업, 유업이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클레로스라는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계속 중요한 단어로 나옵니다. 이 기업, 유업이 뭐냐면 우리의 자족할 수 있는 터전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서에 보면 지계석을 옮기지 마라... 그런 말씀을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유업을 나누어 주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판다 이겁니다. 절대 사고 팔면 안 되는데 말이지요. 지계석을 옮긴다는 것은 땅의 경계표를 옮긴다는 것입니다. 등기부상에 수정을 가한다는 거죠. 그게 이제 노예로 팔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기도 하고 온갖 사연들이 있겠죠. 그런데 그 근원이 뭡니까? 땅을 넓히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에 만족을 못하는 거죠. 그것이 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지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환경만 주셨던 겁니다.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주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복지에서 가이사의 세계의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스템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 즉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마음 속에 새겨 주신다는 새 언약과는 달리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던 옛 언약은 마음에 심어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가이사의 세계의 시스템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의 복지에 들어가서 말이지요. 그러니 그 안에서 무엇이 벌어지겠어요? 경쟁과 투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따라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도 윤리적인 문제로 접근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취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무얼 말씀하시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상태가 되면 더 이상 경쟁과 투쟁이 일어날 조건이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오늘 교독했던 교독문의 이사야서의 진리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뱀이 흙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집어넣어도 물지 않고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먹고... 그것이 뭐냐 하면 투쟁할 조건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투쟁이 없어졌다는 것은 성취동기 즉 성취욕이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자기의 존재가치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이유가 더 이상 없다는 거죠. 그것이 약속입니다. 따라서 가이사의 세계에서는 육적인 삶과 혼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그 조건들이 언제나 함량미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을 헐떡거리며 삽니다. 절대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해 주신다는 거죠. 먼저 첫 번째로 말씀드린 존재 가치의 문제, 두 번째로 말씀드린 존재의 불안정성의 문제 그 두 가지가 다 해결이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해결이 되느냐?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고 내가 지적으로 동의를 하고 내가 그것을 진짜라고 철석같이 믿는데 나한테서 그게 해결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죠. 성경의 약속을 꿰뚫고 신약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에 대해서 꿰뚫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파악을 했습니다. “아! 이 부분은 육적인 양식도 주신다고 하셨고 혼적인 양식도 다 주신다고 하셨구나.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주신 것을 제가 믿고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성취시켜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믿고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믿고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예배 나가고 주일 예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하루에 적어도 두세 시간씩 성경을 보고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를 하고. 믿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느냐는 거죠? 구원이 실제로 지금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 앞에 있는 엄청난 과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2000년간 교회에서 진행되어 온 믿음이냐 행위냐의 논쟁입니다.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지요. 존재 가치의 문제와 존재의 불안정성의 문제의 해결, 즉 구원이 믿음으로냐, 아니면 선한 행위로냐를 놓고 논쟁하는 거지요. 성경에서는 뭘 말씀하시는 거죠? 예수님의 피스티스가 오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로 바뀐다는 신비한 약속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이 신비한 약속은 빼버리고 인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인간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느냐 하면서 논쟁을 하다보니까 논쟁은 하되 결론은 안 나는 것이죠. 왜냐하면 두 가지가 성경에 다 있거든요.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놓고 하는 논쟁 자체가 가능하냐? 성립이 안 되는 논쟁입니다, 이게.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선행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이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신비한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실제로 공급받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논쟁이고 뭐고를 떠나서 우리가 관심조차 기울일 주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의 관심은 모두 어디에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신비한 실현에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셔서 하나님의 나라인 공동체가 세워지고, “눈동자처럼 나를 아끼시고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면서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별걸 다 해도 내가 실제로 되었느냐는 거죠. 내가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느냐? 구원이 이루어져 가고 있느냐? 일용할 양식을 실제로 지금 받고 있느냐?
이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육의 양식과 혼의 양식, 즉 존재의 가치와 존재의 안정성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부분이 바로 영의 양식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육의 양식의 부분과 혼의 양식의 부분이 실제로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이 바로 영의 양식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여전히 죽었지만 이제는 내가 진짜 떡이다, 이제 내가 진짜 양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만나는 상징이었던 것이고 이제는 그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뭐라고 그러셨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그러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그러셨을 때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게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양식을 우리가 먹게 될 때에 혼적인 양식의 문제와 육적인 양식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영적인 양식을 먹음으로써 나에게 일어나는 그 신비한 일이 일어나야 육적인 양식의 문제와 혼적인 양식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이죠.
영적인 양식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우리가 하나된 것처럼 저들도 우리와 하나 되게 하옵소서"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아서 영적인 양식을 실제로 먹고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로는 정화입니다. purification이지요. 정화라는 게 뭡니까? 정화라는 게 우리의 육적인 탐욕, 혼적인 탐욕, 존재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공포 이런 모든 것들이 제거되는 것들이 정화입니다. 이것이 정화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교리입니다. 교리. 논리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성화입니다. 성화는 무엇이냐 하면 이제는 나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살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 즉 성취동기를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화입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살아간다는 소위 이타적인 휴머니즘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요.
이렇게 정화와 성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영의 양식을 공급받으면 우리에게 정화와 성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예수님께서 딱 두 가지로 말씀하셨죠. 첫째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것이 정화입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것이 성화입니다. 요즘 계속 제가 말씀드리는 슈퍼컴퓨터가 꺼지고, 슈퍼컴퓨터의 전원을 빼버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를 현대적으로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해서 그 표현을 제가 쓰는 건데, 슈퍼컴퓨터의 전원이 꺼져야만 가능한 것이 뭐냐 하면, 아까부터 계속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나오는 기갈이기 때문에 육적인 생명을 유지하자는 것-혼적인 생명을 유지하자는 것 이것은 우리의 존재의 기반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갈의 문제, 배고픔, 목마름, 타는 목마름 이런 존재의 기갈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윤리도덕적인 문제는 슈퍼컴퓨터가 관장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슈퍼컴퓨터는 이 생명의 문제, 생존의 문제를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슈퍼컴퓨터라도 그 기갈을 채우는 방향으로만 접근을 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기갈을 채우는 쪽으로만 답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기갈은 전도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슈퍼컴퓨터가 아무리 작동을 하고 아무리 옵션을 추가해도 우리 슈퍼컴퓨터는 기갈을 채우는 방향으로만, 즉 기갈을 채우는 끝없는 수렁으로 가는 것만 계산을 해내지 우리 존재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 불같은 기갈이 사라지는 쪽으로는 작동을 못합니다, 이 슈퍼컴퓨터가. 슈퍼컴퓨터의 작동원리가. 따라서 우리가 슈퍼컴퓨터의 전원을 뽑아버릴 때만 해결이 되기 시작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을 제가 슈퍼컴퓨터의 전원을 뽑아버리는 걸로 표현을 해낸 겁니다.
자, 그러면 정화와 성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영의 양식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먹을 수가 있는가? 성찬식입니다. 속으로 “내가 성찬식 백번은 했는데요?”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죠? 우리는 전부 발가벗고 접근을 해야 합니다. 자꾸 우리를 포장하고 있으면 안 돼요. 성찬식을 통해서 "어? 예수님이 산 떡이라고요? 저 백 번도 더 먹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저 백번도 더 먹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겁니까?” 그렇게 질문을 해야 돼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된다고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으면서 제가 성찬식을 최소한 백 번은 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됩니까?” 그걸 하나님께 여쭤봐야죠. ‘아 성찬식을 하면 되는 거구나. 나는 성찬식을 백 번도 더 했으니 나는 모르는 가운데, 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겠지?’ 이렇게 자꾸 낙관적으로 생각을 하시면 수렁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을 드리는 거잖아요? “아! 예수님은 산 떡이시고 난 예수님을 백 번도 더 먹었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백 번도 더 먹었는데 왜 안 됩니까?” 질문을 했으면 답은 어디에 있겠어요?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렇죠?
(고전 11:23~29)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식에는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뭘까요? 회개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내려주시고 성찬에서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데도 이 영적인 양식이 우리에게 공급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회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뭐지요? 회개는 슈퍼컴퓨터를 끄는 것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성찬을 슈퍼컴퓨터가 켜진 상태에서 성찬을 하게 되면 무효입니다. 그냥 무효로라도 끝나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성찬식을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를 할 때에도 은혜가 오고 또 삶의 현장에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경로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올 때마다 우리는 극한의 회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혜가 영의 양식이 되어서 우리가 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화와 성화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도 내 슈퍼컴퓨터가 켜져 있는 상태에서는 정화와 성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슈퍼컴퓨터의 자료만 풍부해지는 거죠. 성경자료까지 입력을 하죠. 내 슈퍼컴퓨터가 성경자료까지 입력을 하면 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슈퍼컴퓨터에 성경 지식까지 들어가면, 그러면 죄가 더 커진다 이겁니다.
첫째도 회개 둘째도 회개 셋째도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회개를 하는 것이 영의 양식을 우리가 공급받아서 육의 양식과 혼의 양식과 영의 양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성경의 약속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회개를 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회개는 점점 더 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또 내 회개가 진행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기로 한 은혜를 내가 받으면, 어제까지 몰랐던 더 깊은 나의 죄성이 보인단 말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자기가 유난히 못된 인간이라는 얘기인가요? 그게 아니고 자기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자기의 죄성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죄성의 뿌리까지 보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회개가 점점 더 심각해졌을 거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점점 더 심각한 회개.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이 복음을 전하다가 버림을 받을까 봐 두렵다."라는 말이 왜 나왔겠어요? 끝없이 자기 죄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 불안을, 그런 두려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미친 듯이 하는 일이 뭐겠어요? 사명 감당이겠어요? 회개입니다. 회개. 사명 감당은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시키시는 겁니다. 회개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서는 사명 감당을 하겠다고 뛰어다니다 보면 대형사고가 일어납니다. 대형사고 칩니다. 사명 감당 한다고 뛰어다니다 보면. 왜냐하면 그 사명 감당을 누가 해요? 내 슈퍼컴퓨터가 하잖아요? 그러니까 대형사고가 터지는 겁니다. 사명 감당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자연스럽게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첫째도 회개, 둘째도 회개, 셋째도 회개입니다. 그러면서 슈퍼컴퓨터의 전원을 계속해서 뽑다보면 슈퍼컴퓨터의 전원을 뽑는 것이 우리도 요령이 생깁니다. 슈퍼컴퓨터는 전원코드를 위장하는 능력까지 있는 것 같아요. 어제 분명히 이 쪽 벽에 붙어있어서 뺐는데, 오늘 이 놈을 빼야겠다하고 가보면 거기에 벽지가 딱 발라져 있단 말이죠. "이 코드가 어디 갔어?" 이러고 찾는 겁니다. 슈퍼컴퓨터의 위력은 어마어마합니다.
한 형제님의 질문 : "슈퍼컴퓨터의 전원을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빼고 살아야 하나요?"
답변 : "24시간 슈퍼컴퓨터가 꺼져있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기도할 때 슈퍼컴퓨터를 꺼야 되고 그 다음에 살아가는 현장에서 기도할 일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가 생깁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때마다 즉시즉시 뽑아야 합니다. 그 뽑은 상태에서 우리가 24시간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로기온(신탁)이 필요할 때, 즉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받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할 때 이럴 때는 순간순간 슈퍼컴퓨터의 코드를 뽑아야 합니다. 신탁을 받아야할 때에는 그때그때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뽑히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하면 내 슈퍼컴퓨터가 계산해 낸 것을 신탁이라고 우깁니다. 컴퓨터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우깁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라고 우깁니다.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는 말씀처럼요. 심지어 사탄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로기온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탁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내 슈퍼컴퓨터가 해석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전혀 엉뚱한 결론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요, 슈퍼컴퓨터가 켜져 있으면 판단을 못하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슈퍼컴퓨터가 꺼진 상태에서 로기온을 받고 그 로기온을 받은 대로 우리가 행동을 하는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무슨 일이든 다가올 때 슈퍼컴퓨터가 꺼져 있는지를 자동으로 확인하는 이런 습관까지 생깁니다. 꺼진 컴도 다시 보자! 이런 습관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무슨 얘기를 했을 때 내가 대답을 못합니다. 뭐부터 해야 되지요? 내 슈퍼컴퓨터가 켜져 있는가 아닌가 그것부터 확인을 해야 합니다. 슈퍼컴퓨터가 켜져 있으면 그 사람이 "어이, 이보게! 내가 말을 걸었는데 밥 먹을 때 다 되었네. 왜 대답을 안 하나?" 이런 상황이 돼도 대답을 못합니다. 대답을 실제로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리 버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질문 : "꺼야 될 상활인지 안 꺼야 될 상황인지를 내 슈퍼컴퓨터가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답변 : "그게 어떻게 되냐 하면요, 슈퍼컴퓨터가 모든 경우에 꺼져야 합니다. 제가 24시간 슈퍼컴퓨터를 끄고 살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을 아닙니다. 그래서 In Christ와 Out of Christ를 제가 오랫동안 언급해 온 것인데 In Christ 상태가 슈퍼컴퓨터가 꺼진 상태이고, Out of Christ 상태가 슈퍼컴퓨터가 켜진 상태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24시간 In Christ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24시간 그것을 너무 고집하다 보면 우리 안에서 오류가 일어납니다. 어떤 오류가 일어나느냐하면 스스로 최면을 거는 거죠. "나는 지금 In Christ 상태에 있는 것이 틀림없어"라고 자기를 속이는 일까지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진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슈퍼컴퓨터가 꺼져야 하는 상황은 하루에-제가 과장이 아닙니다-하루에 백만 번 정도 옵니다. 지금도 제가 이 제스처를 슈퍼컴퓨터가 한 거겠죠? 그렇죠? "이 쪽 손가락을 들까? 저 쪽 손가락을 들까?" 우리가 판단해야 되는 상황은 하루에 백만 번도 넘게 일어납니다. 백만 번도 넘게 일어나는데 우리가 얼마만큼 영의 양식을 많이 받아서 얼마만큼 정화되고 성화되었는가에 따라서 백만 번 중에 백 번 슈퍼컴퓨터가 꺼지다가 그 다음에 천 번 슈퍼컴퓨터가 꺼지고 그 다음에 만 번 슈퍼컴퓨터가 꺼지고 이것이 바로 믿음의 진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계속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는 슈퍼컴퓨터가 24시간 계속해서 꺼져있는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푯대를 향해서 달려갈 뿐이다."라는 표현이 바로 그거거든요. 우리는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슈퍼컴퓨터가 더 많이 꺼질 수 있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이죠. 이제 그렇게 진전이 되어가는 겁니다. 따라서 좀 큰 문제가 생길 때에는 우리가 금방 캐치를 할 수가 있죠. "아 여기서는 슈퍼컴퓨터를 꺼야지"하면서 슈퍼컴퓨터부터 확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설교하면서 왼손 들었다, 오른손 들었다 이런 것까지 슈퍼컴퓨터가 꺼진 상태에서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 부분은 제가 몇 달 후에 설교해야 되는 것으로 제가 느끼고 있는데 뭐냐 하면 "그렇다면 슈퍼컴퓨터는 영원히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목적이냐? 인간의 지정의는 폐기대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In Christ 상태에 들어갔을 때 슈퍼컴퓨터를 켜는 일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나중에 설명을 드리려고 제가 요즘은 말씀을 안 드리는데 나중에 슈퍼컴퓨터를 In Christ 상태에서 활용하는 일이 시작이 됩니다. 그렇게까지 진행이 되어야 하죠? 그 부분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 우리가 은혜를 나누기로 하고요.
자, 그런데 이 영의 양식을 받는 것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그러시죠? 마태복음에서는 이 단어를 "세네론"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누가복음 11장의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는 "헤메라"라는 단어를 씁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람어로 설교를 하셨다고 알려져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른 단어를 쓰셨는지 아니면 마태하고 누가가 다른 헬라어로 번역을 한 건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두 가지 단어를 서로 다르게 쓰고 있는데, 다르게 쓰고 있는 것이 저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신학자들은 여기에 굉장한 의미를 두더라고요. "세네론"이라는 단어는 오늘, 지금, 이런 의미가 있고 누가복음에서 “헤메라”는 "날마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한글 번역도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영어 번역도 다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헤메라"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이 "헤메라"라는 단어는 밤에 대비한 낮이라는 개념이고 하루라는 개념이 더 큽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오늘"로 번역된 “세네론” 이 부분을 영어성경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this day", NIV에서는 "today" 그래서 "오늘"이라는 것이 강조되도록 번역을 해놓았고, 누가복음의 “헤메라”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날마다"라고 번역을 했고,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day by day"로 번역을 했고 NIV에서는 "each day"로 번역을 했습니다. 조금씩 뉘앙스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신학자들의 이 고민을 받아들여서 번역을 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 두 가지의 뉘앙스의 차이를 찾는 것이 어쩌면 제가 모르는 비밀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그런 가능성이 없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저는 “현재까지는 이 두 단어의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하냐면 마태복음 6장을 보아야 합니다.
(마 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약속하고 계시는 그 영의 양식을 매일매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매일매일. 우리 일생을 해결하시는 은혜를 한 방에 주시는 게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매일 받아야 됩니다. 매 순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이제 기도 분량이 찼으니까, 나는 이제 정도 신령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는 이 정도 성경적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아. 자 이제 훈련소 생활은 마치고 자대 배치! 이제부터는 사명 감당!" 이렇게 되면 꽝입니다. 그날 필요한 영의 양식은 그날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매일매일 주시는 겁니다. 매일매일 이 양식을 받지 않으면 즉시 Out of Christ 상태로 가버리는 겁니다.
다른 면에서 말씀을 드리면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고 매일매일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은혜와 회개가 한 세트로 진행되는 일이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날 치의 은혜를 받아야 되고 매일매일 그날 치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향해서 회개를 하고, 이렇게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의 양식이 그날 치 그날 치 우리에게 공급이 되는 겁니다. 평생 지속되는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오류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차곡차곡 저장해서 곳간에서 곶감 빼먹듯이 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매일매일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은혜를 받아야 하고 매일매일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찬도 모일 때마다 성찬을 하는 것이 옳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매주일 성찬을 합니다. 수요기도회가 새로 시작이 되었는데 기도회에서도 성찬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성찬을 하고 혼자 있을 때에도 순간순간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무슨 일이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은혜를 구하고 회개하고 그것이 계속 진행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것이 성화가 되어간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저축이 된다는 의미로 보면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떤 현상이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냐 하면 더 많이 은혜를 받고 더 자주 회개를 하는 삶으로 바뀌어가는 것으로 말씀을 하는 것이지 은혜가 나에게 차서 내 존재가 점점 더 신령한 존재로 변해가는 내 존재의 성장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란 말이죠. 즉 이 성장은 관계의 성장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성경의 진리는 존재의 변화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관계의 변화에 대한 진리란 말이죠. 그런데 존재의 변화는 왜 필요하냐? 존재의 변화는 내 슈퍼컴퓨터가 꺼진 존재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혁명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슈퍼컴퓨터가 꺼진 존재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이사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슈퍼컴퓨터가 꺼진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혁명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혁명적인 존재의 변화지만 그 다음부터 모든 성경의 약속은 관계의 변화입니다. 관계의 심화. 하나님과의 관계의 심화인 것이지 내 존재의 성장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겠어요? 사도 바울이 간단하게 정리한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런데 우리가 육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지만, 그래서 수녀원에 보면 평생 가이사의 세계에 나오지 않기로 서약한 수녀들 수도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제가 기사를 한 번 보았는데. 그 사람들은 장례 치르고 나서 시신도 그 안에 묻히는지 그것까지는 제가 모르겠는데 죽은 후에야 그 문을 나온다고 합니다. 시체가 되어서. 그 전까지는 그 문에서 안 나옵니다. 그게 뭐겠어요? 쉬지 않고 기도하는 한 방편이겠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하는 삶이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일시적으로는 그런 기도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40일 금식하려고 기도원에 가서 40일 동안 기도원에서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들은 다 일시적인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서 살아갈 때 계속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몸에 배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훈련을 하기 위해서. 그래서 일시적으로 기도원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우리의 삶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저들을 세상에 보내옵나이다" 우리는 세상에 가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저에게 준비된 말씀은 다 전해드렸습니다. 그럼 이렇게 자세하게 약속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한테는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것을 확연히 보시는 시간이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조금 이루어지긴 했는데 왜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 걸까? 그런 분도 계실 테고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나의 회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내 슈퍼컴퓨터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그것이 컨트롤이 안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에 더 집중합시다!”가 아니라 우리는 “회개만 하면서 삽시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회개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회개를 할 때 사명 감당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아까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성찬이 이어질 텐데요. 오늘 성찬에서 우리가 정말 깊은 회개로 성찬에 임하는 귀한 성찬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만큼 우리가 영의 양식을 공급을 받고 그만큼 우리가 정화되고 성화되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성찬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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