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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전북정읍 답사자료 |
* 일 시 :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07:30~18:30
* 답사지역 : 전북 정읍
* 답사인원 : 45명
* 인 솔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답사경로
마산박물관(07:30) ㅡ 정읍IC ㅡ 동학농민혁명기념관 ㅡ 황토현전적지 ㅡ 갑오동학혁명기념탑 ㅡ 천곡사지7층석탑 ㅡ 은선리3층석탑 ㅡ 전봉준장군 고택 ㅡ 만석보터 ㅡ 만석보혁파비ㅡ 무성서원 ㅡ 내장사 ㅡ 마산박물관(18:30)
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 동학농민혁명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계 농민들을 주체로 일어난 농민혁명운동. 동학혁명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2004년 5월 11일, 동학농민군의 최초 전승지인 황토현전적지 부근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에 개관하였다. 개관 이래 전라북도청 관리사업소에서 관리와 운영을 하다가 2011년 1월부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관리·운영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무기, 생활용품, 전적류을 전시·보존하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과 매년 2회의 기획전시를 하는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에 있는 기념탑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탑으로 1963년 10월 3일에 건립하였다. 탑 높이 7.5m·탑신 6.3m·기단 1.2m·둘레 4.64m 규모이다. 탑신 앞면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除暴救民保國安民)’이란 글자가 세로로 쓰여져 있다. 강암 송성룡이 글씨를 쓰고, 김상기가 전액을 썼다. 뒷면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라는 노래와 함께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라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동남쪽 기슭에는 전봉준의 동상과 사당·유품 전시관 등을 갖춘 황토현기념관이 있다.
* 황토현 전적지
사적 제295호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이곳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전적지이다. 이곳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군의 혁명운동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전봉준 선생의 지휘하에 제폭구민·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고부 백산에 집결해 있다가 조선 고종 31년(1894년 갑오) 5월 11일(음 4월 7일) 새벽에 인근 고을의 농민군과 함께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전주 감영의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로부터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높아져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 각 현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었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그러나 정부의 무능으로 청·일의 군대가 개입하게 되자,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철수하여 전라도 53개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의 침략이 뚜렷해지자 농민군은 일본군의 침략에 항쟁하기 위하여 다시 일어나 각지에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우세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뒤로 그 세력이 크게 떨어지고, 전봉준 선생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순국하게 되자 정치의 개혁을 주장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동학농민운동에서 보여준 개혁 정신과 민족자주 정신은 그 이후 민족독립운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천곡사지 칠층석탑
정읍시 망제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석제 7층 석탑.
보물 제309호 (1963년 1월 21일)
* 은선리 삼층석탑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보물 제167호
이 석탑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을 가진 고려탑이다.
탑 기단은 단층인데 1층 탑신은 대단히 높다. 2층부터는 급격히 작아졌는데 2층 탑신 남쪽에 두 짝의 문을 단 감실이 있다.옥개석은 평평한 판석으로 만들어 간결한 멋이 있다. 탑의 구조는 백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기도 했다. 현재 탑의 높이는 6m 정도인데 탑 꼭대기의 상륜부는 없어졌다.
* 정읍 전봉준선생 고택지
정읍시 이평면 조소1길 20
사적 제 293 호 (1981년 11월 28일)
이 건물은 일명 녹두장군인 전봉준 선생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이다.고종 31년(高宗 1894) 갑오 동학(甲午 東學) 혁명(革命) 당시 전봉준(全琫準 1854~1895) 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흙담 4칸 집이다. 서편으로 한칸을 근래에 붙여 지은 것으로 원래는 방 1칸, 광 1칸, 부엌 1칸으로 당시 우리나라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이다.정면4칸, 측면1칸의 안채(초가)는 높이 15㎝의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졌다.일반적으로 부엌은 서쪽에 위치하여 이에 이어서 큰방과 윗방이 배치되는 것인데 이 집은 이 순서를 무시하고 있다.전봉준의 공초록(供招錄)에는 이 곳에 와서 수년이 되었다고 했는데 촌로(村老)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웃 마을 양교리(陽橋里 양간다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갑오년(甲午年 1894) 1월에 봉기한 후 안핵사 이용태(按 使 李容泰)가 내려와 동학교인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의 집을 모두 불질러 버렸는데 이 때 전봉준의 집도 불타버렸다고 한다.그 동안에 이론(異論)이 있었으나 1974년에 보수(補修)를 하면서 해체(解體)작업을 하는 중에 밝혀진 상량문(上樑文)에 무인(戊寅) 2월 26일(高宗 15年 1878) 세운 것으로 되었으니 어쩌면 전부 타지는 않고 남아 있는 폐옥(廢屋)을 보수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 전봉준(全琫準)
조선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1855(철종6)에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했다. 자는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본관은 천안,
* 만석보터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의 상류에는 농민들이 설치한 민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고종 30년(1893) 고부 군수 조병갑이 두 하천이 합류되는 하류 지점에 농민들을 강제 징발하여 본 만석보를 축조하고, 가을에는 막중한 보세를 징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민들이 봉기하여 갑오동학혁명을 유발하였고, 만석보는 당시 농민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갑오동학혁명의 발원지인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 만석보혁파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 정읍 무성서원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사적 제166호.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고, 고려 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안세림(安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과 1675년(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祠宇)·현가루(絃歌樓)·명륜당(明倫堂)·장수재(莊修齋)·흥학재(興學齋)·고사(庫舍) 등이 있다.
사우는 1884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과 측면 3칸에 홑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최치원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정극인·안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는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바닥은 흙으로, 2층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28년(순조 28) 중건되었다.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명륜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의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인 각 4칸의 장수재와 흥학재는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이후 중수한 것으로,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기범연의(箕範衍義)』 1책 등 40여 종의 전적이 있다.
* 내장사
정읍시 내장산로 1253 (내장동)
백제무왕(百濟 武王) 37년(636년) 영은조사가 현재의 부도전 일대에 50여 동의 대가람을 세우고 영은사라 칭하였다. 고려 숙종 3년(1098년)에는 행안선사(幸安禪師)가 전각당우(殿閣 堂宇)를 새로 중창했고 조선에 와서 이곳 승려들이 작당하여 승적(僧賊)으로 변하여 민가에 행패가 심하여 날로 민심이 소란해지자 중종 34년(1539년)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하고 폐찰령을 내려 소각하고 말았다. 그 뒤 조선 명종22년(1557년) 희묵대사가 법당 및 요사를 수축하였으며, 선조 30년(1597년) 임진·정유(壬辰·丁酉)의난때 왜군에 의하여 병화로 소실되었는데, 인조 17년(1639년) 부용대사(芙容大師)가 사우(寺宇)를 개축하고 불상을 도금하였다. 그리고 정조3년(1779년) 영운대사(暎雲大師)가 대웅전·시왕전을 개수하고 요사를 개축하였는데 정조13년(1778년) 법당이 소실되어 고종9년(1878년) 유학(宥鶴), 익진(翼振) 두 선사가 중건하였으며 근래에 와서도 1938년 매곡선사(梅谷禪師)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를 신축하였으나 6·25전쟁으로 1951년 1월 12일(陰 11월 24일) 대웅전이 그리고 1월 18일(陰 12월 10일)에는 6개 암자가 소실되고, 1957년 주지 야은(野隱)이 요사를 1958년에 대웅전 중건에 착수 하였는바 1959년 주지 다천(茶泉)이 완공했다. 1964년에는 무량수전을 세우고 1965년 대웅전 불상가 정화(幀畵)를 조성 봉안했다. 그리고 정부의 국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1973년에 일주문(一柱門), 1975년에 명부전(冥府殿) 1978년에 정혜루(定慧樓)를 복원하고 1978년에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새로 세웠다. 1979년에는 인도(印度)로부터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奉安)하기도 했다. 성임(成任)의 정혜루기에 의하면 영은사는 고려 말엽 지엄선사(智嚴禪師)의 개산(開山)에서 비롯된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영은사의 개산 연혁을 밝히는데 고증자료의 연구가 더욱 요청된다. 현재 내장사는 1888년(高宗 25년) 간행된 정읍현지에도 영은사(靈隱寺)로 일컬어 왔으나 내장사란 최근 내장산의 산이름을 따서 내장사(內藏寺)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 조선동종
전체의 높이는 80cm이다.종신(鐘身)의 높이는 60cm이고 구경(口徑: 안지름)은 50cm의 작은 종이나 명문(銘文: 새긴 글)이 확실한 조선조 후기(朝鮮朝 後期)의 범종(梵鐘: 절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큰 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종(鐘)에 기록되어 있는 바로는 "건융 삼십삼년 무자 시월(乾隆 三十三年 戊子 十月) 시주 조한보(施主 趙漢寶), 전남장흥군보림사주성 윤광형(全南長興郡寶林寺鑄成 尹光衡)" 운운 하였다. 이는 조한보(趙漢寶)가 그의 아버지 조인구(趙仁九), 어머니 양씨(梁氏)의 복 (福)을 빌기 위하여 종(鐘)을 만들었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이때가 영조(英祖) 44년으로 1768년이다.내장사(內藏寺)가 고쳐 지어지자 전남(全南) 보림사(寶林寺)에서 옮겨 왔는데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 말엽에는 놋쇠의 공출(供出)을 피하기 위하여 원적암(圓寂庵)에 감춰져 있었고, 한국동란(韓國動亂) 때에는 정읍시내 포교당(布敎堂)에 피신시켜서 보전하였다.한편 2000년 4월 정읍시는 '내장사 이조 동종'이라는 명칭에 관해 '이조'라는 말이 일제 치하에서 조선조를 씨족사회로 격하하기 위해 붙인말이며 당시 이 동종의 주조처가 장흥 보림사라는 점에서 '내장사 소장 조선동종'으로 문화재명을 변경 추진하였다. ㅡㅡ 인터넷 검색 자료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