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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은혜와 긍휼히 여기심을
청하나이다...아멘
아래의 글들은 내가
마지막으로 올리겠다고 한 그 글들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고 쓰다가 버린 글도 추린다고 추린 것이 지금의 이 글들입니다.
제목은 운명선(운명선의 특이점) , 선악과의 비밀,
지금 떨어지는 통제불능의 중공제 로켓, 확신과 불확신의 차이 입니다만
사실 며칠 더 내가 쓴 관찰하며 잘못된 점이나 오타를 관찰하려 하다가
지금 현재 기분의 변화도 심하고 여러 이유로
일단 더 늦기 전에 올리고 오타나 문맥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기회가 아직 내게 남아 있다면 고쳐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운명의선(운명의 특이점)
사람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을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본래 운명이란 것은
자신이 노력하는 분량만큼 정해져 가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란 없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마다 육체적 혹은 정신적 한계치가 있기에
결국엔 정해져 버린 운명의 테두리 안에 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정해진 운명은 바뀌지 않을까?
그건 또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각 사람마다 일생일대의
큰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것이 일생일대의 절대절명의 큰 위기인 것 같지만
그건 그저 내 실수와 어리석음이 만들어 논 자신의 덧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어떤 때는 정말 자신의 진정한 한계와 부딪쳐야 할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사람은 주로 죽음의 직전에 놓이게 된다.
이는 특별히
자기 자신의 욕심으로 이런 일이 생겨버린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을 나는 주저 없이 사람의 “운명의 선”이라 부릅니다.
이는 기술발전 용어로 사용하는 특이점이란 용어를 사용해
“운명의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어째든 내가 이것을 “운명의선”이라 부르는 것은
이것을 뛰어 넘으면 그 사람의 운명은 사실 크게 뒤바뀌게 되고
그것으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흔히
운명이란 있다하는 사람도 있고
운명이란 전혀 없다는 사람이 있으나
길거리를 방황하는 버려진 개는
새 주인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 로 그 운명이 결정이 됩니다.
.........먼저 신고가 되어 사람의 손에 잡히면
그 개는 일정기간동안 보호가 되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는 개는
어차피 관리비의 감당치 못한다는 명분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되고
그나마 주인을 만나는 개는
그 주인이 어떤 주인이냐에 따라 그 삶이 정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 개가 처음부터 야생의 들개의 종자였다면
그 종자는 보호소에서 조차 잠깐은 보호를 받을 일이 있었을지라도
곧 자연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방사되어지지만
처음부터 사람과 살기로 정해진 개는
갈 곳이 정해지지 아니하는 한
재산과 가축으로 정의된 이상 주인을 못 만나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운명이 아니라 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다행히 자신의 삶을 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는 “운명의선”혹은 “운명의 변곡점”혹은 “운명의 특이점”이란 것이 이것입니다.
이 변곡점 혹은 그 특이점을 뛰어넘으면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 되고
그 변곡점에서 좌절하면 그는 그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동시에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결국엔...
........최고로 잘되어봐야 자신에게 이전에 주어졌던 그 삶을 그대로
다시 살아가야하는 운명으로 고착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 고작입니다.
하나의 국가 혹은 나라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홍콩과 미얀마를 보면
중국을 기준으로 볼 때
홍콩은 길들여진 개와 같은 신세고
미얀마는 야생의 들개와 같은 신세이고
대만은 개와 같은 신세였지만 야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인정받아가는 중이고
한국은 본래 들개였어야 했지만 작은 이득에 길들여져 집개처럼 변해가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본래 대로라면 홍콩은 중공의 개로만 살 권리가 주어진 나라이겠지만
다행인지 어떤 건지 내가 꿈의 주인과 소통할 수 없게 된 지금과는 달리
내가 그래도 나의 꿈의 주인과 소통하며 함께 할 수 있던 그 이전에 때에
벌써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내가 꿈의 주인이라 부르는
그분이 이미 움직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이 중공 당국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하는데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살 권리가 있다고 한들
스스로 사먹지 않으려 하고
자신 없어서 두려워 식당에도 못 간다면
어차피 못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 두 나라는 모두 “운명의선”들 앞에 다들 놓여 있기 때문에
이젠 그들 스스로 그 운명의 선을 뛰어넘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내 꿈의 주인과 만나게 된 사연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그래도 모르는 분들에게 잠깐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어느 날 꿈에 내가 우연히 방언으로 반 정도 실험삼아 기도를 하던 중
귀신들이 나를 찾아와 나를 놀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난 그 상황이 어찌나 무섭고 두렵던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다가
이 왕에 하던 방언인 지라 내가 죽어질 만큼 몰입하여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찌나 무섭던지 정말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온몸에서 뭔가가 퍼져 나오는 듯하더니
밟고 강한 빛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며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또한 그것이 계기가 되어 힘을 얻게 된 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신이라 불리던 자들을 찾아다니며
죽이고 또 죽이며 다니는 일이 나의 일상이 되었고
나의 이런 경험들은 쌓이고 굳어지며 ..그렇게 생겨난 분이 바로 내‘꿈의주인’입니다.
이때 그는 나이면서 점차 내가 아닌 분이 되어가는 과정을 서서히 거치셨으며
나의 꿈의 주인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내가 꿈을 꾸는 꿈에서 꿈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건 어째든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하면
나는 지금의 대기업 어떤 예비 회장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지금보다 젊고 매우 자신감이 넘쳤지만 그 교만함이
상당히 커서 나를 만난 그 당시의 그는 나를 아주 무시하려는 듯 장난을 치며
괴롭게 하려는 듯 나를 놀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나는 그에게 정중히 권했습니다.
앞으로의 그의 삶에 있을 고난을 예언하듯 이야기하며
그 자신을 위해 제발 멈춰달라고 그를 위해 사정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사기 치는 자로 알았던지 더욱 가열 차게 나를 조롱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가 나의 모습과 기이한 상황과 분위를 보더니..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조금 뒤로 물러서는 자세를 취하려 하였지만
그땐 내가 보기에 이미 예언은 확정된 뒤였습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후론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그 일로 이미 정해진 그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딱히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운명이었겠지만 그날의 그 예비 회장님과 박근혜와 나
거기다 이 나라 국민들의 잠시동안의 그 무지함과 교만함이
함께 꽈리를 틀며 큰 격랑을 만들더니 내 운명까지 집어삼키게 되었고
결과적으론 우리나라의 운명이 크게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그분의 아버지나.. 결국엔 내 부친까지 돌아가시면서
그분이나 나 역시도 지금 이 상황에 우리 두 사람의 목전엔
.....이미 죽음의 저승사자를 만나기 직전입니다.
근데 내가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분명 나는 “운명의선” 앞에서 분명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아니 다른 것은 할 수 없었어도
내가 내 “운명의선”앞에 있을 때라면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작 그 “운명의선“ 앞에선 그것을 전혀 판단하지 못했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겨우 살피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지금 솔직히 이 글을 쓸 기분이 전혀 아닙니다.
심지어 난 내 앞에 놓인 “운명의선” 앞에서 내 부친을 살릴 기회가 있었던 것인데도
심지어는 그것으로 그 대기업 회장의 부친조차 살릴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었는데도 난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나의 미숙함과 부족함이
이 나라를 구할 절호의 기회와 그와 나의 부친을 구할 절호의 기회 모두를
잃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겨우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내 아버지는 마지막에 문 죄인이 정부가 실행한 코로나 병실지정 것으로 인해
마지막 치료 할 수 있는 장소를 빼앗긴 꼴이 되어 결국엔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내겐
우리가 가진 집을 팔아서 시골집 하나를 사고
그곳에 고압산소치료기를 들여 놓고 아버지와 함께 할 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따놓은 나였기에 약간의 의학적 지식도 있었고
오랜 장애인들과 생활에서 충분한 준비도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 판단했었지만
이 시대가 내게 집을 팔 기회를 주지도 않았고
나 역시 생각만 있을 뿐 달리 방법은 찾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그 당시 그 회장님을 찾아가
우리가 가진 집을 싸게라도 사달라고 통 사정을 했다면
그는 내게 빚진 마음이 있었을 것이기에 충분히 거래를 해 줄 수 있었을 것이고
이미 내가 꿈에서 그 큰 대기업에서 우리 집에 찾아와
내 집을 사려고 한 꿈을 꾼 적이 있었기에....
내가 그 꿈을 해석만 제대로 할 수만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건만....
그때 난 내가 군 그 꿈조차 해석할 수가 없었고
더하여 그런 일을 행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난 그것을 통해
내 아버지도 살릴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트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나의 바보 같은 미련함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였으니....
곧 ...........내 “운명의선” 앞에건 나는
그것을 충분히 뛰어넘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것을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설사 내가 그것을 이루려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고 판단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10월이고 나의 부친은 12월이었기에
그 이전에 먼저 그를 찾아가야 했었고
우리들 모두에게 그 시간은 상당히 힘겹고 복잡한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보건데.... 이때 누군가가 과감하게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운명을 바꿔줄 이를 만나
온 마음으로 무릎을 꿇으면
모두의 운명은 분명 크게 뒤바뀌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박정희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가 남도당 빨갱이로 몰려서 토벌 작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때도
그 당시 그 일을 총괄하는 백선엽 장군을 찾아가 살려 달라한 이야기는
나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만일 박정희가 자신의 운명선 앞에서 주저앉았다면 그는
그때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의선”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찾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만큼은 끝까지 행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는 다 아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운명의선”을 돌파하며 대통령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였기에 그가 또 다른 “운명의선” 앞에선 내가 알지 못하는 분명 피할
다른 길도 있었을 텐데...
그도 결국엔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그의 마지막에는 누군가의 총에 죽는 것을 보니
그런 그라도 자신의 또 다른 “운명의선” 앞에서 주저앉음으로 인하여
결국엔 그 이상의 운명으로 뛰어넘을 순 없었나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운명의선” 앞에선 자는 누구나
자신을 신 앞에 내던질 만한 겸손함을 지닌 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도 그러합니다.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와 월왕 구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월왕과의 전쟁에서 패한 구천이 죽고 그의 아들이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청하며
눈물로 원수를 갚고자 준비했더니 결국 월나라를 굴복시켰고
월나라의 부차는 뇌물과 굽실거림으로 목숨을 건진 후
마구간지기로 조롱을 받으며 살아가는 중에도
밤마다 천장의 매달아 놓은 쓸개를 핥으며 마음을 다잡아 준비하였고
이윽고 오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운명의선’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이런 극적인 ‘운명의선’보다 우리의 운명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자신을 더 좋은 운명의 발판위에 놓아두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설명 하고자 했던 ‘운명의선’ 우리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오히려 더 강하고 강력한 운명으로 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 것이지만
그런 기회가 아니라도 충분히 더 낳은 삶을 살아갈 방법은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만일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채로 길거리를 방황하는 자라면
우선 배고픔을 맞이할 것이고
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면 더 낳은 삶을 사는 것이지만
잠시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주먹과 폭력과 혹은 강압적인 방법을 썼다면
그 인생은 이미 뻔하게 결정이 난 것입니다만
내가 그곳에서 공장에 들어가 일차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충분히 살펴보며 세상에서 외면하지 못하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또 다른 더 낳은 운명의 기반에 올라서는 것이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을 들어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원리와 모습을 살펴보고
내가 가진 기반의 자본과 노력을 더하여
의료 정치 과학 등의 분야로 더욱 공부를 하게 된다면
그 노력이 결실을 맺는 날 나는 더 강한 운명의 기반위에 나를 올려놓을 것입니다.
곧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운명의선’이란
만남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노력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철학이 기회를 만나는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유독 큰 위기의 순간이 오면 ‘운명의선’ 이란 하나님 앞에 섰을 정도의 겸손함과
내 안에서 충분이 적극적인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별로 더 낳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나도 내 소중한 것들을 거의 다 잃었다 생각하기에
산다는 생각보단 죽음을 찾아 나아가려는 생각이 강하고
그렇기에 무엇을 더 행하려 하거나 뭔가를 찾을 것이란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글을 쓰는 것은
내가 혹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얻지 못하여
나의 상심이 나를 죽음에 내어 몰지도 모르지만
혹 남은 누가 있어서..
그가 혹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올수 있는 자이거나
혹은 그것이 아니라도
이 글을 잃을 자가 자신의 운명선 앞에서
포기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좀 더 적극적으로
그 “운명의선”을 돌파해 보길 권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마지막 조언이자 마지막 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살아남으면
이 전에
내 꿈에서 내게 이미 보여준 그 어떤 예시처럼
나는 책을 하나 쓰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이 글도 그 책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아마도 이글이 나의 마지막 글이 될 것입니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특히 내 이 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희망합니다.
혹시 그리고 죽기 직전 이라면
먹어도 좋을 라면 레시피가 하나를 소개 합니다.
난 나름 많은 시간 라면을 끊여서 지겹지 않게 먹었던 자라서
제법 많은 라면 레시피가 있는데.. 그중
...괴롭고 힘들 때라면
사람은 나의 몸이 허락해 주는 한
매운 음식을 먹으면 육체적인 스트레스를 경감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개하는 레시피는
소위 내가 부르는 “불타는댄스” 레시피입니다.
재료는 메인 재료는
1. 아무 라면이든 1개 혹은 두 개
2. 캡사이신 1개 숟가락
3. 무 큰 토막 1개
4. 들기름 1개 숟가락
5.고추장 작은 1 숟가락 까지가 메인이고
있으면 좋은 부재료
6. 다시마 약간
7. 어묵
8. 두부 반에 반모
9. 청냥고추 조금
굳이 안 넣어도 돼는 부재료
9. 돼지고기나 닭고기 다진 것 조금
요리법 물을 끓인 후
부재료 있으면 부재료 몽땅 넣고
부재료 없어도 준비된 무와 캡사이신 한 숟가락 과 라면스프를 넣고
끓이는데
빨리 먹고 싶다면 그냥 찬물에 그것들을 몽땅 넣고 끓임
물을 끓인 후라면 처음 재료 넣고 2~3분 뒤 나머지 마른 라면을 넣고
찬물로 끊인 경우라면 물이 끊고 나서 바로 라면을 넣으면 됨
3분 뒤 마지막으로 라면을 건진 후
건진 라면에 들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비빈 후 먹으면 좋음
술안주로도 제법 쓸만함
남은 국물은 비빌 땐 한 숟가락 정도 넣어도 좋으나
그리고도 남은 것은
그 힘든 시간을 위해
적당히 넣고 밥과 고추장과 들기름을 넣고 비벼 먹으면
꽤 나쁘지 않은 식사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음식의 장점은 식은 음식을 먹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한번 밥과 함께 비벼두고 생각날 때 마다
냉장고에서 꺼내서 술안주로 먹어도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만
마음이 힘든 사람이 아니면 먹지 마시길
먹을 때는 좋아도 뒤 끝은 영 아닙니다.
뭐랄까 잘못을 크게 저질러
다 잃어버린 인생의 맛이라 할까?
뭐 그런 맛입니다.
선악과의 비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 또 어떤 사람이 있고
........그가 옳은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중에
오히려 그 길에서 타인에게 배척을 당하고 더하여 빼앗기고
또 그 일로 슬피 울어야 했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일들을 충분히 기억해 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일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바로바로 그 자리에서 그 일들이 바로잡아 지거나
처리되는 일은 적어도 내 경험상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러한 것이 신이 있고 없고의 기준일 수는 없습니다.
마치 내가 못을 하나 박으려고 하는데
망치와 못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못을 박고
그렇지 아니하면 그것이 준비 될 때까지 기다리던가!
혹은 그 도구를 사온 뒤 그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그저 당연히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이뿐
이것이 신의 유무의 판단 기준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도
준비된 도구가 없으면 굳이 그 일을 바로 행하지 않으시고
그 도구와 재료들이 준비되는 때를 기다리시며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뭐
성경에서 요나에게는 미리 큰 물고기를 준비해 두시지 않으셨느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중에
요나가 서있었으니
이미 준비된 역사에 요나가 굳이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와는 전혀 달라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원하는 일을 굳이 하려고 한 것이기에
스스로 도구와 못을 준비 했어야 했던 것이고
혹 그게 아니면 운 좋게
내 옆에 그런 비슷한 목적을 가진 다른 사람이 있어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기다려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린
신에게 이런 식으로 바라거나 이루어지길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전능하신 신이시어 당신은 전능하시오니
왜 이처럼 간절한 나를 돕지 않으십니까! 하며
울면서 소리 지르며 목청껏 외칠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생각엔
내가 넘어지더라도 혹 몰라서
그분인 하나님을 배신까지 하더라도 날 사랑하고 끝까지 버리지 않기를...
원했겠지만
하나님은 만물과 만인의 하나님이시고
나 한사람만의 하나님도 아니시니
그런 식으로 나만 위해 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아직도 우리가 정신적으로 빈약하고 의지가 약하여
그저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하는 소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 중세시대의 기독교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져서
대립하다 서로마가 타민족에게 무너지고 자신들도 위험에 처하자
남은 기독교인들은 동방 어딘가에는 거대하고 풍요로운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 다스리는 기독교 왕국이 있다고 상상하며
결국엔 그 상상에 기대어 소문은 소문을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소문을 쫒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왕을 일으켜 도와주는 대신
그들이 그 신앙의 힘으로 바다에 나가기 위해 전력으로 노력한
그 힘으로 배를 만드는 기술과 항해술이 발전된 기회가 되게 하시고
그들이 그 이후에 세상에서 한 시대를 지배하는 자들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이건 분명 우리가 바라고 원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생선을 달라는 자에게 뱀을 주시지 않으시고
생선을 주시되 가장 어두운 그 깊은 곳에서 그물을 던지게 하시고
원하던 그 이상으로 배를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역시나 우리가 바라던 봐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 일을 이루기 전에 죽음 앞에 놓이게 된다면
우리 중 다른 사람은 영광을 얻을지는 몰라도 결국 나는
잘 못 딛은 발에 미끄러져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 한들
다른 사람이 다 죽던 지 말던지 나만 위해 살려 달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 한사람 살리고 다른 모두를 죽게 하는 것과
나 한 사람은 죽더라도 다른 모든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게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하겠으며
모든 것이 준비되면 쉽게 모두가 살 수 있는 일이데
굳이 죄인인 나 하나를 살리고자 끝없이 도움을 주어야 하는 그런
일이 왜 하셔야 했겠습니까?
그리고 설사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만을 위해준다 한들
오직 나만을 위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서만 내 조건에 맞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고
더하여 늘 모든 각 사람을 위해서도
또 따로 그들만의 세상을 일일이 다 만들 주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선 그러 실 수도 있고 설사 그렇게 하신다쳐도
내가 나의 세상을 스스로 멸망하게 만드는 자라면
굳이 나를 위해 이 세상을 만들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아무리 나를 위한 세상을 수없이 만들어 주어도
결국엔 나의 자격만큼의 세상으로만 끝없이 수렴될 것인데...
(여기서 수렴된다 함은 수학적 용어입니다만 아무리 외부의 조건을
크게 하여도 결국엔 정해진 용량 정도만 남는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처음부터 신이 보기에
신의 눈에 합당히 여길만한 그에게 합당할 만큼의 삶이 주어지게 하는 삶이 있고
또 그를 끝없이 도와주어야 하는 그가 살아 갈수 있는 삶이 있는데
결과적으론 그들이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굳이 신이 우리의 변덕과 죄악을 위해
그 일을 해야 할 이유가 그 어디에 있겠으며
오히려 그것은 그에게 고통만 더한 것으로 종결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리 된다면 그는 그러한 것은 자신들을 실험실의 쥐처럼 사용한 것이다
이야기 할 것인데.... 이것이 누구에게 유익한 일이 된 것이며
게다가
이것은 신의 무능함이나 신이 없다는 것과도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면서 동시에
신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는 것과도 관련이 없는 일이거늘
사람은 자신이 조금만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그게 무엇이든
이유를 불문하고 타인을 원망하는 버릇이 있으니
우리들은 기어이 다 결국엔 남의 탓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건 또 누구를 위한 일이었던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돕지 않고자 함이 아니라
지금 돕는 일이 그 상황에 합당하지 않다 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곧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한 것일 뿐인데...
준비된 상에서 즐기기만 하면 되는 아이와 같은 삶은
우리 스스로 차서 버리고
옳은지 그른지까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하는
그런 탐나는 좋은 것을 우리가 모두 얻고자 한 것이었으니
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며 “이제 누가 그 칼에 죽나 보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어찌 그들을 굳이 신들의 반열에 올려둘 수나 있었겠습니까!
이는 당연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어느 날 어떤 이가 나와 타인의 공동소유지에서
값비싼 황금을 캐서 가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 더 많이 수고해야 하고 그곳에 더 큰 고난이 있었다한들
그 땅에서 그 귀한 황금을 어찌 캐내지 않을 수나있겠습니까?
그러나
좋은 것은 내가 하고 힘들고 싫은 것은
“야! 너 신아! 니가 대신 다 해줘라!” 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주재 넘은 일이겠습니까?
이는 그가 알던지 모르든지
신을 종처럼 여기고자 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맞는 삶이 있습니다.
그 삶이 그 사람의 격에 맞을 수도 있고
그 삶이 그 사람의 능력에 맞을 수도 있으며
또한 그 사람의 분수에 맞는 삶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난 내 그릇에 맞는 삶이길 원합니다.
그게 모두에게 합당하고 모두에게 더 좋을 것입니다.
지금 떨어지는 통제불능의
중공제 로켓
사람은 무엇을 하든 분명 결과의 책임을 질 각오를
하고 행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런 걸 하지 않으려는 자는
그는 그의 태생부터가 사기꾼으로 태어난 것과 같은 삷을
살고자 한 것이고
혹은 늘 도둑질하던 습관에 이미 익숙해지는 중이거나
혹은 이미 뼈 속까지 도둑의 근성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에 딱 맞는 국가가 있다.
바로 중공이다 본래 공산당의 습성이 책임지는 건
남에 몫인 것이고 굳이 상황에 불리하면 책임지는 척만 하는 자들이지만
본래 세상이 만만하지는 않으니 그리 쉽게 무책임해 질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 스스로 강대국으로 여기며
무자비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천하의 깡패국가 중공이 있다.
문제는
이것들이 온통 똥을 싸두고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우주에 로켓을 지들 멋대로 쏘면서도 낙하하는 로켓의 ‘잔해물’은
나몰라라하는데..
이 이일이 그들 뜻대로... 그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될 거라! 생각한다면
정말 웃기는 일인 것입니다.
내 보기에 이 ‘낙하물’은
서울의 국회의사당에 떨어지거나
중공의 공산당 전당대회장 같은 상징적인 건물에 떨어질 확률이 크다고 보여 집니다.
물론 각 국회의원이나 당 간부들 숙소에 떨어질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꿈이나 이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기에
딱 이것이다 말하는 것 자체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는 말이긴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때때로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
그 모든 큰 재난이전에 무언가 상징적인 일을 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우리에게 다가올 더 많은 재난의 규모가 워낙이 큰 것이기에
그 상징적인 일도 더 명확히 우리에게 보여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번 어느날 우리의 집에 어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차가 와서
한참을 머물렀는데 그날 내 부친과 모친의 몸 상태가 이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그게 지금의 내 생각과 일치한다면
그들이 남몰래 나와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께
전쟁을 선포한 것과 같은 것이기에
설사 내가 요즘처럼
모든 영적인 힘을 허락받지 못하는 때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것과는 별개의 사항이고
물론 지금처럼 부친의 뜻하지 않는 사망의 충격과
그러한 장례의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까지
과도한 이득을 얻으려 은근한 협박과 강요를 하는 그들을 보며 받은 충격과
저울을 속이는 것과 같은 짓을 한 자들에 대한 분함과 억울함이 있는 상황에서
더하여
내가 사랑하는 이 나라 국민들이 불법을 업으로 삼는 정치꾼들과 부정한
정부로부터 공평치 못한 대우를 받는 것들에 대한 분노가 넘치는
나이기에
이 모든 것이
나의 정신적인 황폐함으로 내가 피해망상증의 증세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피해 방상증이든 아니든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모르는 큰 길을 만들어 두시고
죽을 자는 죽는 대로 모아두시고
살자들은 그 살아야 할 길로 인도하며 들이실 것입니다.
확신과 불 확신의 차이
없음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고 이 글로 써내려 가는 한
전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만
어떤 너 튜브 광고를 보다보니
참 ...뭐랄까
마음의 갑옷으로부터 꿈이 현실이 된다느니
멘탈이 준비가 되었냐느니 하며 말하는
미국의 언더아머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진리의 한 부분의 핵심을 콕찝은 그 광고를 보면서
와우!
사실 나는 어떤 대기업 회장이 될 예비회장을 만나던 어떤 자리에서
다른 수많은 말들을 두서없이 그에게 말했었지만
내가 그 예비회장에게 말하고자 했던 요점은
이런 라카이코리아처럼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그런 광고나 혹은
옳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한 핵심을 찌를 수 있는 그런 광고나
혹은 그것이 아니면
지금처럼 영어에 대한 열기가 살아있을 때는
아예 광고를 포기하고
회사의 역량을 동원에 영어 학습을 도와주는 그런 광고를 하며
마직막이나 중간에 간간히 회사 이름이나 이야기하는
뭐 그런 다른 어떤 식으로든 공익을 추구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당장에는 이득이 없어도
그것이 이후엔 당신을 지켜줄 힘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무심결에 생각나는 사설은 접고...
확신과 불확신 그 차이가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만
당연히 거기엔 너무도 거대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없다는 것은 당장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고
거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확신이 없는 자는 결국엔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그를 저 시궁창으로 아주 쉽게 던져 놓을 것이지만
확신을 얻는 자는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말던지
결국엔 성공이란 열매를 얻으며 얼마든지 자신의
이름의 자긍심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
그건 확신을 얻은 자의 이야기이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억지로 확신을 붙들고 있는 자는
자신이 확신을 하던 말던
그 서있는 곳이 지옥이면 지옥의 문이 열릴 것이고
그 서있는 곳이 천국이면
내가 당신의 이마에 입 맞추며 고맙다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 웃기는 일이겠죠!
기껏 용을 쓰고 도착하니 별 거지 같은 것 앞에서
입 맞추고 있다니...! 이건 일견 끔찍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더럽고 기분이 더러울 수 있는 일이 있던지 말던지
당신이 스스로 충분이 어리거나 젊은 나이의 사람이라 여긴다면
무엇이든
일단
무조건 확신을 가지고 덤벼야 합니다.
단 이왕이면 당신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나 혹은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위해 고르고 골라 추천해 준거라면
정말 미친놈처럼 확신을 가지고 덤벼야 합니다.
첫째 아이가 성장을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충분히 그 일에 메달리며 작은 성취라도 맛보아야
그것이 그 아이를 더 큰 성공의 링 위에 설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성장이란
활동과 그 활동을 통해 얻은 성취감과
좌절 속에서도 그것을 딛고 다시 빠르게 재시도를 할 수 있는 재기력과
불가능 속에서도 그 일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정리해 둘 수 있는
관리기능의 발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종합적으로 생존력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 모든 능력은 어린 자신이 이미 맛본 성취감의 크기만큼
견딜 수 있는 기본 자질도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칭찬의 중요성이
여기서 커지는 것이고 그리고
반대로 견딤은 자신이 이겨낸 좌절의 경험치 만큼 비례하며
커지는 그릇이라...
많이 혼이 나고 많이 실패하며 그 모든 모욕과 힘겨움을
모두 이겨내야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절대 병기이고 자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잃어야 하는 것 보다 크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기꺼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해주는 반면
불확실 속에서 견뎌야 하는 일은
그것을 견뎌본 그 경험의 맷집만큼은 적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설사 그것이 내가 반듯이 실패 할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분명 내게 권해준 자의 승률을 가지고 한 것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던
확신과 불확신의 차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을 가지고 있던 불 확신을 가지고 있던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정해진 그 일들은 이루어지며 흘러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원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던 못하던
그 회사는 그저 굴러가는 것처럼
확신과 불 확신의 차이는 아예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에 있어서는
내가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더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인 건 맞지만
불 확신을 가지든 확신을 가지든
결과는 내게 농축된 그 축척된 삶의 방식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젊고 어리다 생각하는 당신아!
늦었다 생각하는 지금 당장
부모와 선생님 권하시던 그 확신을 찾아서 끝까지 붙들고
죽기까지 붙드십시오.
그것이야 말로 당신이 알던 모르던
이미 당신에게 준비되고 농축된 영광의 그림자입니다.
할례루야!
만일 하나님 당신께서 이루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이 땅에 이루어지리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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